임진왜란에서의 동일한 위치에서 일어난 전투에 대한 내용은 독성산성 전투(임진왜란)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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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032807><colcolor=white> 시기 | 548년 (양원왕 4년) | |
장소 | 경기도 오산시 독산성 | |
원인 | 나제동맹에 대한 안라국(아라가야)의 도생(圖生). | |
교전국 | 신라-백제 연합 (공세) 승 | <rowcolor=black> 고구려 (수세) 패 |
주요 인물 | 백제 지휘관 성왕 (백제 국왕) | 고구려 지휘관 양원왕 (고구려 태왕) |
신라 지휘관 진흥왕 (신라 국왕) | ||
백제 참전자 참전자 불명 | 고구려 참전자 참전자 불명 | |
신라 참전자 주진 (朱珍)[1] |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신라-백제 연합의 승리 | |
영향 | * 고구려의 쇠퇴 시작 * 나제동맹 재확인 및 백제의 안라국 복속 * 신라-백제 연합군의 한강 장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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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548년, 독산성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백제와 신라 양측에 고립당한 가야제국(諸國)이 고구려에 사주해 백제를 공격하게 했으나, 나제동맹에 따른 신라군의 신속한 원군 파병으로 연합군이 고구려군을 대파했다. 곧 깨질 나제동맹이 아직 굳건했음을 알 수 있으며, 속사정을 알아보면 이후 삼국시대의 판도에 꽤 영향을 미친 전투였다.2. 배경
6세기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장수왕 시대부터 시작된 남하 정책을 방어하기 위해 나제동맹을 맺어둔 상태에서, 두 나라의 가운데에 있는 가야 소국들을 두고 서로 파워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고구려라는 강적 때문에 가야 쪽으로 대대적인 군사 동원은 서로 자제하고 있었지만 백제와 신라의 가야를 둔 쟁탈전은 이미 6세기 초반부터 진행되고 있었다.먼저 가야를 공격한 것은 백제였다. 백제는 512년에서 513년에 거쳐, 모루국(순천), 사타국(광양), 상다리(여수), 하다리(돌산), 상기문(임실), 하기문(남원), 대사국(하동) 등 전라도 일대의 가야를 멸망시켰다.
이후 백제는 내륙의 가야를 고립시켜 복속을 시도했고 이에 위기를 느낀 대가야는 백제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의 우호 관계를 추진했다. 522년 3월 대가야의 왕 이뇌왕는 신라 법흥왕에게 사신을 보내 혼인 동맹을 청했고 이에 가야 지역으로 영향력 확대를 노린 신라에서는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대가야에 보내 혼인동맹이 맺어졌다.
대가야와 더불어 유력한 가야 세력이었던 아라가야(안라국)은 529년 백제와 신라에 중립을 선언했다. 이에 백제 성왕은 아라가야를 공격하여 걸탁성을 빼앗았다.
신라는 백제가 소백산맥 이서(전라도) 쪽 가야 땅을 먹는 것까지는 방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529년 백제가 소백산맥을 넘어와 내륙의 아라가야까지 공격하자 신라도 더이상 가만히 있지 않았다. 신라는 529년 탁기탄(양산)을 시작으로 532년 금관가야(김해)을 병합하였고, 538년 탁순국(창원)을 병합했다.
남은 가야의 소국들은 멸망을 피하기 위해 신라에 교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한편 백제는 가야 소국의 군주들을 두 차례 사비성을 불러모아 사비회의를 열었지만 끝내 결렬되었다.
남은 가야 소국들 중 비교적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아라가야(안라국)[3]는 백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왜국에게까지 도움을 청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호응한 고구려군이 고구려에 속국화된 동예인들을 대거 동원해서 백제의 북방을 공격했다.
3. 전개
나제동맹 100년간 늘 그랬듯 고구려가 백제로 쳐들어오자 성왕은 신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신라는 주진(朱珍)에게 3,000명의 병사를 주어 보냈고, 결국 고구려군은 신라-백제 동맹군에게 대패했다.[4] 이후 백제의 식민지격으로 전락한 안라국은 관산성 전투(554년)에서 백제가 신라에 대패하면서 신라의 속국이 되었고 561년 2월, 파사산 전투에서 신라에 패배해 최종적으로 멸망한다.고구려는 이 전투에서의 타격이 컸는지 3년 뒤 나제동맹군의 대대적인 침략을 방어하지 못하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차지하고 100여년간 지배한 지금의 경기도부터 강원도까지의 한강 유역을 죄다 백제와 신라에 내주고 전성기를 마감하게 되었다. 사실 이 즈음부터 돌궐과의 대립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남방전선에 집중하는 게 갈 수록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새로 얻은 한강 유역을 두고 곧 백제와 신라가 서로 싸우게 된다. 관산성 전투 문서 참고.
4. 의의
548년 당시 한강 이북의 독산성이 백제의 영유 하에 있었다는 것은 적어도 그 이전에 백제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현재 학계에는 475년~551년 사이 한강 유역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다. 기왕의 통설이 고구려 영유설이라면, 최근에는 연구자마다 한강 유역 회복시기와 범위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백제 영유설을 주장하는 연구 성과도 축적되고 있다. 독산성의 위치가 한강 이북이라면 백제 영유설의 논리가 좀 더 보강되는 셈이다.한편 433~434년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은 이후 5세기 후반에 이르면 두 나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495년 이후 동맹군의 활동이 없었는데, 이때 이르러 다시 공동으로 군사활동을 한 것이다. 541년에 백제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다시 복원한 후 구체화된 첫 결실이었다. 곧 548년 독성산성 전투는 나‧제동맹의 추이와 관련해서도 의미가 있다.
5. 이모저모
- 《일본서기》<흠명기>에 마진성(馬津城) 전투가 언급된다.마진성(馬津城)전투【정월 신축에 고구려가 군사를 이끌고 마진성을 포위하였다.】에서 사로잡은 포로가 ‘안라국과 일본부가 (고구려를) 불러들여 (백제를) 정벌하기를 권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근데 이 전투가 일어난 시기가 《삼국사기》에서 독산성 전투가 일어난 시기와 미묘하게 겹친다. 548년 정월 신축일에 고구려의 군대가 백제의 마진성을 포위 공격했다는 기록인데 《삼국사기》에는 548년 정월에 고구려가 예와 손을 잡고 독산성을 쳤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진성 전투와 독산성 전투가 같은 전투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1] 혹은 주령(珠玲)이라고도 불린다.[2] 인물의 이름은 《삼국사기》에도 나오나 독산성 전투 참전 내용은 위서인 《화랑세기》에만 등장.[3] 후기가야 22국 중 주도권이 있던 가야는 북부의 대가야, 서남부의 소가야, 중부의 아라가야, 동부의 금관국-탁순국으로 4곳 정도였다. 그런데 백제가 서부 7국을 멸망시키면서 소가야가 힘을 잃었다. 대가야는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었지만 결국 영향력을 상실했다. 금관가야-탁순국이 신라에 멸망한 540년대 정세에서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가야는 아라가야가 사실상 유일했다.[4]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사다함의 아버지인 구리지가 신라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했다는 내용이 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