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모님과 조부모
할아버지 데즈카 타로 | 핫토리 한조의 후손인 할머니 |
1928년 오사카의 유복한 집안에서 출생. 증조부는 일본 최초의 군의관이었으며 조부는 거물 법률가였다. 11월 3일에 출생했는데 이 날은 메이지 덴노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메이지(明治) 덴노의 연호에서 치(治)를 따와 이름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데즈카가 태어나고 2주일 뒤 미국에서는 미키 마우스가 주인공인 영화가 개봉했다.
아버지 데즈카 유타카(1900~1986)는 일본의 대기업인 스미토모의 중역이었는데 상당히 근대적인 취향의 소유자로 카메라를 좋아했고 당시엔 드문 물건이었던 수동식 영사기도 소유하고 있어서 어린 데즈카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나 월트 디즈니 컴퍼니 장편들을 자주 감상하며 자라났다. 데즈카 오사무가 디즈니의 열렬한 팬이 된 것과 그에 대한 오마주는 아버지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또한 유타카는 고베로 이사가면서 탄페이 사진 클럽이라는 전위적인 아마추어 사진 집단에 소속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아버지는 어머니에겐 상당히 강압적인 폭군의 이미지였다고 데즈카는 후에 회고하기도 했다. 데즈카의 작품에 모성애는 자주 묘사되지만 아버지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기도 하다.[1]
어머니 데즈카 후미코는 일본 육군 중장의 딸로 남편에게 절대복종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수동적인 성격은 아니었다고 한다. 남편이 전쟁에 나갔을 때는 혼자서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강인한 면도 있었고 아들 데즈카에게는 만화책을 사주고 직접 구연동화식으로 읽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후에 데즈카 오사무의 아들인 데즈카 마코토가 데즈카가 어렸을 때 본 만화책에서 만화책의 여백에 그려진 만화를 발견했는데 마코토는 처음에 이것을 아버지가 어렸을 때 그린 만화로 생각했지만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니 할머니, 즉 데즈카 오사무의 어머니가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2. 유소년기
1929년 3월 21일 돌.
5살 때 데즈카의 가족은 효고현의 다카라즈카시로 이사를 갔다. 다카라즈카시는 유명한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본거지이자 온천과 루나파크 등의 근대적인 시설들이 갖춰진 도시였다. 데즈카는 이때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데즈카의 아버지는 다카라즈카 호텔 클럽의 회원이었고 어린 데즈카를 이끌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데즈카의 어머니는 데즈카를 데리고 다카라즈카를 자주 보러 다닌 데다 데즈카의 바로 옆집에는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최고 스타였던 아마츠 오토메(天津乙女)가 살고 있었던 탓에 이래저래 데즈카의 어린 시절은 다카라즈카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상술한 아버지의 이력도 그렇고 오사무는 그야말로 한신칸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고 자란 셈이다.
1931년 3세.
또한 이 시절에 데즈카는 친구의 영향을 받아 천문학과 생물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데즈카의 집은 마당이 넓어서 곤충 채집에는 최적의 장소였는데 이때 곤충 채집에 빠진 데즈카는 몇 시간이고 마당을 돌아다니며 곤충을 채집했다고 한다. 데즈카가 후에 필명으로 쓰게 된 오사무(治虫, 치충)는 이때 딱정벌레에서 따온 이름이었다고 한다.
동년 부모님, 여동생 미나코와 함께.
한편으로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보게 된 만화는 이제 직접 그리는 수준에 이르러서 수업시간에 몰래 만화를 그리다가 선생님에게 들켜 그린 것을 압수당하고 혼났지만 교무실에서 선생님이 데즈카가 그린 만화를 보고 재미있어해서 동료 교사들과 돌려보고 나중에 가면 교사들이 데즈카가 만화 그리는 것을 묵인해줄 정도였다고 한다. 친구들과도 간사이벤(일본 사투리)을 쓰지 않는 탓에 처음에는 따돌림을 당했지만 재미있는 만화를 그린다는 걸로 점점 친해져서 나중에는 데즈카의 집에 친구 20명이 우루루 몰려올 정도였다고. <어머니는 나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셨다>에 따르면 만화로 인해 '안경잡이 꼬마\'라는 별명에서 '데즈카 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 만화의 신은 어릴 때부터 조짐을 보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1936년 8세.
3. 청소년기와 청년기
1941년도에 오사카부립 키타노 중학교(현 오사카부립 키타노 고등학교)[2]에 입학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학교도 군국주의에 물들었기 때문에 그림이나 만화를 그리다가 선생한테 걸리면 쓸데없는 짓 한다고, 혹은 전쟁 물자를 낭비하는 2등 국민이라고 두들겨 맞았다고 한다. 이후 학교 대신 강제 훈련소에 보내지기도 하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4년 만에 중학교를 조기졸업하는 비극을 겪었으며 오사카의 공장에서 노동 작업에 투입되었다가 오사카 대공습에 휘말려 머리 위로 소이탄이 떨어지는 와중에 겨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이후 공장을 때려치고 집에서 만화를 그리게 되는데, 이때의 경험은 후에 1974년 작 '종이요새'[3]라는 단편 만화와 데즈카 오사무가 사망하고 6개월 뒤에 나온 TV 스페셜 애니메이션 '데즈카 오사무 이야기 - 나는 손오공'에서 묘사된다. 한편 이 시절 만난 '아카시'라고 하는, 전쟁에 참전해서 전사한 친구[4]와의 이야기로 '대부의 아들'이라는 단편 만화를 만들었다.1945년 17세.
그러다가 시험을 쳐서 1945년 오사카제국대학 부속 의학전문부에 입학해 1951년에 졸업했다. 사실은 이 시험을 보기 전 구제 나니와고등학교[5]에 입학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오사카제국대학 의학부 출신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동 대학의 의학전문부(의전[6]) 졸업이다. 제국대학의 임시의학전문부는 태평양 전쟁 당시 군의관의 부족을 메꾸기 위해 신설된 일종의 약식 과정으로 당시 구제 의과대학에 의학부(구제대학 학부 과정)와 함께 병설된 것으로[7] 종전 후인 1951년 폐지되긴 했지만 졸업 후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하면 똑같이 정식 의사가 될 수 있었다. 데즈카는 구제중학교까지만 졸업했기 때문에 제국대학 의학부나 구제 의과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으나 부속 전문부는 의학전문학교 과정이었기 때문에 응시가 가능했다. 생전에는 1944년까지 구제 나니와고등학교를 다녔고 이후 1945년에 오사카제국대학 의학전문부에 입학했다라고 경력이 소개되었지만 데즈카 사후에 이것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후 그가 나이를 두 살 속였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 동안 세간에 알려졌던 의대 졸업 경력을 속이기 위해서였을 거라고 연구가들은 추측했다. 그리고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도 속였는데 이 역시 명문고 진학에 실패한 사실을 감추고 위해서였기 때문이고 추측했다. 의전에 입학한 것도 본인이 고백하길 전시에 군의관이라면 후방에 배치되어 적어도 전투에서 싸우다 죽는 일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딱히 의사가 되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만화를 경시 내지는 천시하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제국대학 출신이 만화가라는 것만으로도 만화의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데즈카 오사무 본인도 굳이 위와 같은 사실을 적극적으로 해명하지는 않았다. 의사 면허를 딴 뒤 슬럼프에 빠진 시기에는 지도교수의 조언에 따라 논문을 써서 1961년 나라현립의과대학 의학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제국대학 학부가 아닌 부속 임시의학전문부 출신이긴 하지만 그가 의사 면허증과 의학박사 학위를 보유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희한하게도 논문 테마는 우렁이 정충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에 관해 주변에서도 "그냥 인간 걸로 하지 왜 우렁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4. 만화가로서
전후 데즈카는 전쟁 중에 그린 장편 만화들 중에 고심하다가 '유령남[8]'의 원고를 마이니치 신문에 보냈지만 마이니치 신문에선 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근처에 살던 마이니치 신문 인쇄국의 여직원이 어린이 신문의 기자를 소개해주었고 그곳에서 1946년에 <마아짱의 일기>로 데뷔했다.
1946년 18세.
같은 해 사카이 시치마한테 장편 스토리 만화의 합작을 제의받아 전체적 구성은 사카이 시치마가 이를 바탕으로 데즈카가 그리는 형태의 장편 만화 '신 보물섬'을 제작하였다. 이듬해(1947년) 1월 출간 후 당시에 만화로선 이례적인 40만 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만큼 많은 인기를 얻었고 오사카에서 아카혼 붐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1948년 말에 연재한 '잃어버린 세계'와 '메트로 폴리스', '다가올 세계'는 초기 데즈카의 대표적인 SF 만화 작품으로 꼽히며, 1950년엔 만화가들 사이에서 베스트 만화 입문서이자 입문서의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만화대학'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애니메이션 제작에도 의욕을 보이기 시작하여 상경 후 애니 제작사를 전전한 끝에 소규모 제작사를 찾았으나, 사장이 "출판용 만화를 만들면 애니 만들 필요가 있냐"며 문전박대당했다.[9]
만화를 연재하는 시간이 늘어나 대학 학점의 취득이 어려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데즈카는 의사와 만화를 겸임하는 것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교수도 의사보단 만화가가 되는 것이 어떻냐고 권고해 어머니의 지지와 더불어 데즈카는 전업 만화가가 되기로 결정을 굳혔다. 후술하지만 그의 신념에는 만화 원고료로 애니 제작을 할 결심도 숨어 있었다. 같은 해(1950년)부터 만화 소년에서 정글대제를 연재하기 시작했고, 1951년엔 철완 아톰의 전신인 '아톰 대사'를 소년에 연재하는 등 동시기 많은 일본 소년 만화잡지에서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가 게재되기에 이른다. 이듬해 도쿄로 이동해 1953년 만화 소년의 소개로 토시마 구에 소재한 토키와 장으로 입주했고, 데즈카는 자신이 머물던 14호실을 후지코 후지오에게 양보한 뒤 이듬해에 이사하였다. 이윽고 아동 만화의 연재를 진행하는 한편, 1950년대 중기부터 성인용 단편 만화, 그림 만화,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활동을 해나갔으며 쇼와 29년(1954년) 연간 소득 중 간사이 화가 부문에서 1등을 차지했다. 연수입이 217만 엔이었다고 한다. 잡지에서 취재를 왔는데 그는 토키와 장 2.25평짜리 좁은 다다미 넉 장 반 방 한 칸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기부터 각 만화잡지에서 다수의 인기 만화가들이 등장하면서 데즈카가 그린 만화의 인기도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1966년부터 일대 붐을 일으킨 극화는 데즈카의 어시스턴트까지 대본소 극화를 수십 권이나 빌려올 만큼 영향력이 높았고, 이에 따른 노이로제에 걸려 정신 감정도 받았었다고 한다. 이후 데즈카는 주변의 권유를 승낙해 소학관 전속 만화가가 되었다. 코단샤에서도 초대를 받아 상황이 혼란스러워지자, 소년 매거진에 13회 연재분을 그리고 이시노모리 쇼타로에게 '쾌걸 하리마오'의 연재를 넘겨주었다. 같은 해 오카다 에츠코와 다카라즈카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업무에 바빴던 데즈카는 결혼 이전 2번밖에 데이트를 하지 못했고, 결혼 피로연이 열리기 1시간 전까지 원고를 그리는 바람에 지각해버렸다는 후문도 있다.
5. 애니메이션 제작자와 경영자로서
이미 데즈카는 1945년 전쟁 후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한 의욕을 갖고 상경 후 애니 제작사를 전전한 끝에 소규모 제작사를 찾았으나, 사장이 "출판용 만화를 만들면 애니 만들 필요가 있냐"며 문전박대당했다.[12] 결국 그는 애니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만화가 일에 전념했고, 1960년 토에이 동화로부터 <서유기>[13] 제작협력을 받아들여 원안과 구성을 맡아 오이즈미학원 스튜디오에서 실제 작업을 하며 배웠으나, 혼자 일했던 그에겐 토에이 측 스탭과의 소통이나 스케줄에 위화감을 느꼈다. 당시 그는 인쇄물에 표현된 정지된 그림의 박력과 동화로서 영상에 힘을 발휘하는 그림의 차이를 알지 못했고, 클라이맥스를 후반으로 몰려는 토에이식 스타일과 작품 곳곳에 흥미거릴 배치하려는 데즈카식이 각각 충돌하기도 했다. 그러나 애니 제작의 기본을 배운 건 값진 경험이었다. 야부시타 다이이치나 시로카와 다이사쿠 등과 연출에 관여하며 공동작업에서 발생하는 어려움까지 감내하기도 했다. 제작 전 구리 요지, 야나기바라 요헤이, 마나베 히로시 등이 이끄는 '애니메이션 삼인회'에 초청받았으나 제작에 관해서는 일절 함구했다. 구리 요지는 "니가 만드는 거 기대하고 있다"라고 비아냥댔지만 데즈카는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1961년엔 데즈카는 도쿄도 네리마구 후지미다이[14]에 토지를 사고 자택을 짓고, 그 빈 공간에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지어 '데즈카 프로덕션 동화부'라고 이름짓고 애니메이터 6인을 모집해서 사카모토 유사쿠와 야마모토 에이이치, 곤노 슈지 등 외부 작가들을 발탁했다. 직원의 월급에서 제작비까지 모두 데즈카가 그린 만화의 원고료로 조달되어 40분짜리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ある街角の物語)'를 1년에 걸친 끝에 완성했고, 발표 이후 블루리본상, 교육부 예술제 장려상, 제1회 오후지 노부로 상 등을 수상받았다.
이듬해(1962년)부터 동화부를 무시 프로덕션으로 개명해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된 철완 아톰의 제작에 들어갔다. 하지만 당시 10명에도 미치지 못하던 직원 규모는 매주 TV 방송에 디즈니와 같은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것은 작업량, 예산, 시간상으로 도저히 불가능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해나가게 된다.[15] 철완 아톰은 대히트를 쳤고 캐릭터 상품 로얄티로 수익상으론 막대한 이익을 얻었으며, 해외 수출용 방영권 + 파생 상품 권리 판매 등을 대비해 무시 프로덕션의 직원 규모를 확대해나가게 된다. 또한 무시 프로덕션은 훗날 일본의 대표 애니메이터들인 스기이 기사부로, 린 타로, 데자키 오사무, 타카하시 료스케, 토미노 요시유키, 카와지리 요시아키, 야스히코 요시카즈, 스기노 아키오, 아라키 신고 등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냈다.
1969년부턴 성인 대상 극장용 영화 '아니메라마' 3부작이 무시 프로덕션에서 제작 & 공개됐는데, 이들 중 데즈카는 클레오파트라의 감독을 맡았고 세번째 작품인 슬픔의 벨라돈나는 일절 제작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 무렵 무시 프로는 거의 망해가는 분위기였고, 마지막 작품은 그 동안 무시 프로에서 많은 도움과 활약을 한 야마모토 에이이치에게 평소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마음껏 만들어 보라고 맡겼다. 그래서 실험적이고 전위적이고 예술성이 강한 야마모토의 취향이 발휘된 난해한 작품이 탄생했다.
애니메이션 제작 참여와 동시에 데즈카는 만화 연재를 병행해 이어나갔는데 연재하던 잡지에서 사건상 마찰이 빚어진 W3(우주의 세 용사)도 1965년 연재하였다. 이듬해(1966년) 데즈카는 실험적으로 만화 잡지 COM을 창간해 경쟁 잡지이던 가로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불새를 비롯한 여러 만화들이 게재되었다. 이후 1960년대 후기엔 빅 코믹에 청년만화 등을 발표하는 등 꾸준히 활동했지만, 데즈카 오사무표 아동만화의 인기가 점점 시들해지고 내일의 죠, 거인의 별 등으로 대표되는 극화가 새로운 유행으로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데즈카는 이미 한물간 퇴물 만화가로 평판이 떨어진 상태였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애니메이션 사업도 경영 부진이 계속되어 사카모토 유사쿠 등 초기 멤버들이 떠났다.
1968년 '데즈카 프로덕션'을 새로 세우고 1971년 무시 프로덕션 사장직에서 물러났으나, 1973년 그가 일궈 온 무시 프로덕션이 도산하고 개인적으론 1억 5천만엔(추정)이란 거액의 빚을 짊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를 데즈카는 스스로 '겨울의 시대'였다고 회상할 만큼 혹독한 시기로 평했는데, 그해부터 몇 년간 진행한 블랙 잭, 불새, 붓다, MW 등의 연재와 과거 작품들의 단행본 복간, 데즈카 오사무 만화전집 발간 등으로 대중적인 평가가 반전되기도 했다. 다만 전 토에이 동화 프로듀서 야마구치 야스오는 저서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데즈카의 카리스마가 전보다 빛을 잃었다고 밝혔다.
1988년 11월 상하이 국제 애니메이션 대축제 심사원으로, 사진만 봐도 삐쩍 마른 모습인데 이 당시부터 암 말기라서 의사들에게 여기 가지 말라는 충고까지 들었음에도 갔다. 참고로 사망 당시 몸무게가 40kg대까지 살이 빠졌을 정도(한창일 때 몸무게가 70Kg이었다). 그리고 석 달도 안 돼 세상을 뜬다. 나가이 고는 데즈카가 죽었을 때 어린아이처럼 울었다고 한다.
전설적인 인물답게 제자들도 유명한 사람이 많은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데자키 오사무 등을 들 수 있으며 그 외에도 린 타로, 테라사와 부이치(우주해적 코브라의 작가) 등등 숱한 그의 제자가 이름을 날렸고 날리고 있다.
하지만 모든 만화, 애니메이션 업계인이 전부 데즈카 오사무의 제자인 것은 아니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미즈키 시게루 같은 만화가는 데즈카 오사무와 직접적인 도제 관계는 아니었으나 스스로 연구해서 거장의 자리에 올랐고 애니메이션 쪽은 미야자키 하야오, 오오츠카 야스오, 타카하타 이사오, 코타베 요이치 등을 배출한 토에이 애니메이션과 토리우미 히사유키, 스다 마사미, 오시이 마모루 등을 배출한 타츠노코 프로덕션이 있기 대문이다.
숱한 명작을 남기고 애니메이션 업계에 한 획을 긋기도 하고 슬럼프에 빠졌다가 부활하기도 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보내다 1989년 2월 9일 위암[16]으로 인해 향년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은 "부탁이니까 일하게 해줘(頼むから仕事させてくれ…)"였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 평생 현역. 죽기 3주 전까지 일기에 자신의 몸 상태나 신작의 아이디어를 적었다고 한다.
6. 참고 자료
-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 - 야마구치 야스오 저. 김기민/황소연 역. 미술문화. 2005.
[1] 특히 ‘불새’를 보면 여성은 모성애에 목숨을 걸고 남자는 거의 짐승적인 욕망만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2] 하시모토 도루, 마쓰시마 미도리, 노노무라 류타로, 아라이 쇼케이가 이 고등학교 출신.[3] 에이케이 커뮤니케이션즈에서 정식 번역판으로 출간한 <로스트 월드>에 수록되어 있다.[4] 당시 유명한 야쿠자 조직 두목의 아들이었고, 학교 응원단장을 맡았다고 한다.[5] 구제 오사카고등학교와 함께 現 오사카대학 교양학부의 전신으로 現 오사카대학 토요나카 캠퍼스가 이전 구제 나니와고등학교가 위치해있던 자리이다. 참고로 구제고등학교는 중등교육기관인 현재의 신제고등학교(구제중학교가 현재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가 아닌 제국대학 학부에 입학하기 위한 예비과정으로 대학예과와 같은 등급이였다. 일본 내지의 구제고등학교 졸업자는 이변이 없다면 제국대학이나 관립의과대학에 진학하였다.[6] 약자가 현대 대한민국의 의학전문대학원과 똑같은 '의전'이지만 사실은 전혀 무관한 구제 의학전문학교.[7] 당시는 소학교(6년)-구제중학교(5년)-구제고등학교(3년)-구제대학 의학부(4년)의 정식 의학사 코스와 단시간에 임상의사의 신속한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소학교(6년)-구제중학교(5년)-의학전문학교(4년) 코스로 양분되어 있었다.[8] 메트로폴리스의 원형이 된 만화라고 한다.[9] 1917년 애니 제작 초기에는 만화가에게 개런티를 주면서 제작을 맡겼으나, 1920년대 이후엔 상황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10] 한국과는 달리 일본에서 ‘애인(愛人, 아이진)’이라고 하면 주로 바람 피는 불륜 상대를 가르킨다. 한국의 ‘애인’에 해당하는 일본어는 ‘연인(恋人, 고이비토)’인데, 어느덧 이 일본어 ‘연인’도 한국어로 정착하게 되었다.[11] 러시아의 작가 안톤 체호프의 어록인 "의학은 나의 아내고, 문학은 나의 연인이다"를 흉내낸 말이기도 하다. 체호프 자신이 본래 의대생이었다가 작가의 길로 들어선 것을 빗댄 표현.[12] 1917년 애니 제작 초기에는 만화가에게 개런티를 주면서 제작을 맡겼으나, 1920년대 이후엔 상황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13] 원작은 데즈카 만화 <나의 손오공>이었다. 데즈카가 쓴 영화 각본은 개연성이 없이 손오공이 돌아와 보니 여자친구 원숭이가 죽었다는 비극적인 장면을 집어넣어서 토에이 애니메이터 사이에서 불평이 많았다고 한다.[14] 당시에는 대다수 땅이 밭이었다.[15] 이런 사정은 동시기의 미국 애니 업계도 비슷해서, 해나-바베라 프로덕션, 드파티-프레렝 엔터프라이즈, 필메이션 등이 이미 제작 예산을 줄인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시 프로덕션은 미국식 정통 리미티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조악하게 극도로 예산을 줄인 그림 연극에 가까운 움직이지 않는 애니메이션이었다.[16] 당시에 심한 위장병으로 고생했는데 일에 집중한 나머지 결국 치료시기를 놓쳐 위를 거의 다 잘라내다시피 했는데도 이미 암이 몸 전체에 퍼지는 말기에 도달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