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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호/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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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플레이 스타일
2.1. 타격2.2. 수비2.3. 주루2.4. 내구성

1. 개요

강민호의 플레이 스타일을 정리한 문서.

2. 플레이 스타일

2.1. 타격

박경완의 뒤를 잇는 거포 포수로, 항상 시원한 풀스윙으로 타석에 임하는 타자다. 그래서 '풍기'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주전 포수로 출장한 05년 이래로 05, 06, 09 3시즌을 제외하곤 매년 두자릿수 홈런을 치고 있으며, 그 빠진 3년 중 06, 09 시즌에는 두자릿수 홈런에 딱 하나 모자른 9개를 쳤다. 하락세가 완연한 삼성 시절에도 두자릿수 홈런은 빼먹지 않고 있다. 부진했다는 시즌들에도 2013년을 제외하면 장타율 4할은 꼬박꼬박 넘겼고, 커리어하이 갱신에 성공한 15시즌엔 아예 포수 단일시즌 장타율 및 OPS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을 남겼다. 특이한 기록으로 홈런 아홉수만 6번을 기록했는데, 9홈런 2번에 19홈런 4번(08, 11, 12, 20)을 기록했다. 풀스윙 때문에 삼진이 많지만 공갈포는 아니라서 출루율 3할 5푼 이상에 BB/K 0.6이상은 찍어줄 수 있는 타자이다.

장타 일변도로 임하는 타자이지만 클러치 능력 또한 준수하다. 2023년 종료 시점에 통산 끝내기가 무려 12번이며 이는 KBO 역대 2위 기록이다.[1] 끝내기 종류도 홈런, 안타, 밀어내기 볼넷, 몸에 맞는 공까지 다양하게 기록했다.[2] 또한 만루의 사나이로 유명하다. 통산 만루홈런 14개로 KBO 역대 2위 기록[3]을 보유하고 있다.

데뷔 후 2~3년간은 평범한 포수의 타격을 보여줬으나, 07 시즌부터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인상적인 타격폼인 김태균의 타격폼을 카피하여 타격포텐을 터뜨렸다.[4] 2012 시즌 뇌진탕 부상과 계속 써오던 타격기술의 문제점이 겹쳐서 한계가 오는듯 했으나, 2015 시즌 장종훈 타격코치의 조언으로 장점인 당겨치기를 극대화하고 스윙을 이전보다 더 간결하게 하며 히팅 포인트와 무게중심을 앞에두는 새로운 타격폼[5]을 장착, 컨택과 장타력을 훨씬 발전시키며 부활에 성공했다.

다만 2018 시즌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한 뒤 에이징 커브가 진행됨에 따라 컨택이 많이 떨어지게 되었고, 이는 이적 초기의 부진으로 이어졌다. 이후 타격폼 수정도 거쳤으나 더 안좋은 결과로 이어졌고, 기존의 타격폼으로 복귀하며 양준혁의 조언을 받은 후 장타 일변도의 스윙에서 컨택을 더 중시하는 면모를 보이며 커리어 평균 스탯 정도는 찍어줄만큼 부활하게 됬다. 확실히 전성기에 비해 홈런 갯수가 떨어지긴 했지만, 파워 자체는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치기 좋은 코스로 날아오는 직구는 가차없이 담장을 넘길 정도로 중심 타자로서의 가치는 아직도 건재하다.

2.2. 수비

수비에서 데뷔 초 여러모로 미흡한 모습을 보여 자주 욕을 먹었으나, 초창기에도 그렇게 나쁜 수비는 아니었다. 최기문의 부상으로 처음 기회를 얻은 강민호가 주전 자릴를 꿰찰 수 있었던 것도 수비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6] 하지만 급격히 느는 타격 실력에 비해 수비의 성장은 더뎠고, 시야가 좁고 입체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줬기에 팬들에게 주기적으로 까이게 되었다. 그러나 경력이 쌓이면서 차츰 수비도 발전되는 모습을 보였다. 강민호의 수비 중 특히 뛰어난 점은 높은 도루저지로, 어깨가 매우 강한 데다가 전성기 시절 미트에서 공을 빼내는 속도(팝타임)가 매우 빠른 것으로 알려졌다. 강민호의 도루저지율은 꾸준히 좋아져 2011 시즌부터 리그 정상급의 저지율을 보여줬다. 2009년 팔꿈치 부상의 여파로 2009 시즌, 2010 시즌에 도루저지율이 크게 떨어져 비판을 받았지만, 부상 여파에서 벗어난 2011 시즌부터는 리그 상위급의 도루저지율을 기록했다. 타격에서 크게 부진했던 2014 시즌조차 타 팀 포수들의 도루저지율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완연하다. 이와 함께 포구/블로킹도 점점 발전해 나갔다.

아쉬운 점은 현대 포수에게 가장 요구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능력인 프레이밍이 서툴다는 점. 그 덕분에 KBO 심판들이 가장 좋아하는 포수로 꼽히기도 했다. 심판들이 강민호를 좋아하는 이유 "정직한 미트질". 심판들은 "(강민호는) 심판을 속이는 미트질이 아니라 잘 보이게 공을 잡아준다. 심판의 스트라이크존이 흔들리지 않게끔 정확하게 잡아주기 때문에 믿음이 간다.", "(미트질을 하면) 심판들도 가끔 헷갈리게 된다. 강민호 같이 정확하게 잘 잡아주는 포수에게는 심판들도 믿음이 간다."면서 강민호를 칭찬했다. 타팀팬들에게 정직한 포수로 칭송받은 것은 덤이다. 2017년 즈음에는 포구 실패가 갑작스레 늘어났는데, 이에 대해 프레이밍을 신경써서 어설프게 프레이밍을 시도하다가 오히려 공을 빠뜨리는 현상이 잦아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롯데 코칭스태프가 공개적으로 아쉬움을 표할 정도였기에 삼성으로 이적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삼성 이적 후에는 연습하여 나아진 것인지 프레이밍 지표가 준수해졌으며 PASS/9 수치가 폭락하여 매우 안정적인 포수가 되었다. 즉 프레이밍이 뛰어나진 않지만 대신 안정적인 포구를 해주는 포수로 변신했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리고 포수리드 시에 몸쪽 승부를 주로 하다보니 상대 타자에게 몸에 맞는 공을 많이 내주는 편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ABS가 도입되면서 프레이밍이 서툴다는 단점은 사실상 없는 거나 다름없게 되었다.

2.3. 주루

주루능력은 포수임을 감안해도 상당히 떨어진다. 순수 주력은 리그에서 가장 느린 것으로 평가되며, 통산 주루 RAA는 -32.9로 매우 낮다. 롯데 시절 동료인 이대호, 최준석과 같이 담장 직격 1루타는 정말 흔히 볼 수 있는 타자로 당장 강민호의 커리어 하이 시즌인 2015년의 스탯티즈 승리기여도를 죄다 까먹은게 주루 능력이다.[7] 그래서 이대호, 김태균과 함께 스탯만으로 타격 능력을 온건히 평가할 수 없는 타자.[8] 기아의 김태군, 두산의 호세 미겔 페르난데스보다는 빠르지만 딱 그 정도. 게다가 애초에 저 둘은 강민호보다 경기 자체에 적게 출장해서[9] 누적 주루 수치는 리그 역대 최하위권이다. 간간히 시도하는 도루도 거의 다 실패해서 성공률이 42%에 불과하다. 롯데에서는 이대호, 최준석과 돼돼풍으로 묶여서 누상에서 팬들의 이를 갈게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삼성에서도 오재일이나 이원석 등과 묶여 노인정 라인으로 불리곤 했다. 대신 자신이 느린 것을 잘 알고 있어서 그런지 무리한 주루는 잘 하지 않으며, 견제사나 주루사 등도 잘 없다. 젊을 때는 무리하게 뛰다가 죽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고 나서는 도루 시도 횟수는 적지만 성공률이 제법 높아졌으며 2016년 4도루 0실패, 2023년은 8월까지 6도루 0실패에 3루 도루까지 기록했다.

2.4. 내구성

KBO 역대 최다 출장 경기 기록의 보유자다. 이것을 체력 소모가 심하고 위험하기로 소문난 포수로 달성했다는 점에서 더욱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지명타자로 출장한 비중도 적지 않지만, 포수로 출장한 경기만 따져도 2,043경기의 박경완을 넘어 1위를 기록 중이다. 최다 출장 경기 기록을 깬 시점의 2,238경기 중 지명타자로 나선 경기는 141경기에 불과하다. 특히 2006년 최기문이 부상으로 빠졌을 때는 역대 3번째 포수 전 경기 출장[10]이라는 기록까지 썼다.

기존의 강민호를 대표했던 강점은 단연 타격이었고, 양의지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강민호의 타격에 비교할만한 포수가 존재하지 않았다.[11] 하지만 롯데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2017 시즌까지 그동안 팀과 국가대표에서 무지막지하게 굴려져온 까닭에 앞으로 포수로선 오래볼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강민호는 삼성으로 이적한 지 7년이 지난 2024 시즌까지도 리그 수위권 포수로 맹활약하고 있으며, 역대 포수 통산 경기 수, 타석 수는 물론이고 포수 수비이닝도 압도적인 수치로 1위를 자랑하며 단 한번의 외도없이 주전 포수 자리를 지키고 있다.[12]

내구성은 역대 포수를 넘어 역대 야수 중 원탑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인데, 지명타자로도 나설 수 있는 타격을 가졌고 실제로 지명타자로 종종 출전하지만 단 한 번도 지명타자로 통계가 잡힌 시즌이 없다.[13] 강병철 감독에게 중용 받은 이래 부상으로 빠진 2009 시즌을 제외하면 매 시즌 거의 풀타임으로 소화해냈다. 커리어 내내 100경기 이하로 출전한 시즌이 단 3시즌이며 그 중 한 번은 겨우 3경기 6타석 출장한 데뷔 첫 해인 2004 시즌이다. 이 기록을 따라잡을 가능성이 그나마 있는 양의지와의 경기 수 차이도 7~800 경기가 난다. 양의지와의 나이 차이가 겨우 2살인데다, 양의지보다 늦게 은퇴할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라 역전이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더욱 대단한 점은 단순히 어린 나이에 일찍 데뷔했기 때문이 아니라 30대에 접어든 이후에도 포수들 중에서 수비이닝과 출장경기수가 가장 많다는 점이다.[14] 포수가 가장 체력 소모가 심한 포지션이라는 점에서 강민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알 수 있다. 말년에 다소 주춤하는가 했으나 2021년 규정타석을 채우고 2022년에는 규정타석엔 단 2타석 모자랐지만 팀내 타석 순위 3위를 기록했고, 2023년엔 포수 수비이닝이 도합 16000이닝을 돌파하며[15] 역대급 포수로서의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1] 1위는 정근우의 16개.[2] 홈런 2개, 1루타 8개, 밀어내기 볼넷 1개, 몸에 맞는 공 1개.[3] 1위는 17개의 이범호.[4] 본인이 포수 자리에서 봤을 때 가장 인상적인 타격폼이 김태균과 장성호의 타격폼이었는데 자신은 다리를 높게드는 편이 아니라(물론 15 시즌 부터는 다리를 높게 드는 폼으로 수정했다.) 김태균의 타격폼을 카피했고 카피한 후 첫 타석에서 바로 쓰리런을 날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15 시즌 타격폼 수정 전까지 보면 김태균과 상당히 유사한 타격폼을 계속 유지했었다.[5] 이전 타격폼이 김태균과 유사한 폼이었다면 이번 타격폼은 강정호와 매우 유사하다. 강정호 또한 강민호처럼 당겨치기를 선호하는 타자이다.[6] 장성우가 수비보다 타격으로 롯데에 지명받은 것과 상반되는 부분.[7] 통산 주루 RAA가 -32.9인데 2015년 한 시즌에만 -10.7을 기록했으며 이는 같은 해의 최준석, 박석민, 최형우에 이은 역대 4번째로 안좋은 시즌이다. 그래서 7에 근접했던 sWAR이 이후 주루스탯을 반영하게 됨에 따라 대폭 깎이게 되었다.[8] 이는 역대 최강의 타선중 하나로 평가받는 2010년 롯데의 중심 타선인 이대호, 홍성흔에서 강민호로 이어지는 똥차라인들이 주루에서 득점력을 죄다 까먹기 때문에 실제 체감되는 중압감이 세이버 스탯에서 저평가가 되는 이유이다.[9] 김태군은 오랫동안 포수로 활약했으나 강민호보다는 커리어가 많이 작은 편이며 삼성에서도 강민호의 백업이었기에 누적 타석이 강민호보다는 적다. 호미페의 경우 애초에 외국인 선수라 몇 시즌 뛰지도 않았다.[10] 1989년 김동기, 1996년 박경완에 이은 기록이다. 진갑용과 홍성흔이 중간에 전 경기 출장은 했으나 지명타자로 출장된 경기가 포함되어 있다.[11] 그나마 근접했던 것이 포수 최초 100타점을 기록한 조인성 뿐이었고, 양의지조차 2010년대 초반까진 한 단계 밀렸다. 양의지가 본격적으로 폭발한 건 두산 베어스 1기 마지막 해와 NC 다이노스 이적 후로, NC에서의 4년 동안 양의지는 매년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폭발력을 보여줬다.[12] 다만 2022 시즌부터는 주전급 포수들인 김태군, 김재성의 등장으로 체력 안배가 가능해져 지명타자 출장이 꽤 늘었다.[13] 동시대의 경쟁자인 양의지는 2021 시즌 지명타자로 통계가 잡혔고, 실제로 골든글러브도 포수 자격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지명타자로서 수상했다.[14] 수비이닝의 경우 스탯티즈에서 2014 시즌부터 제공하였는지라 이전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2014 시즌부터의 출장 경기 수는 유강남에 이은 2위, 누적 수비 이닝은 1위를 기록 중이다. 2014년도에는 유강남이 군 복무 중이었기에 2015 시즌부터 비교하면 강민호 7652이닝 vs 유강남 7921이닝으로 유강남이 좀 더 많은 이닝을 수비했지만, 강민호가 유강남보다 7살이나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강민호의 위대함만 더 부각된다. 나머지 포수들과는 1천 이닝 이상 차이난다. 양의지가 부상으로 포수 출장이 줄어든 2021년 이후를 제외하고 비교해도 강민호가 수비이닝이 더 많다.[15] 사실 이는 과거에 박경완의 기록을 넘겨 본인이 계속 경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