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03 10:21:07

황신덕


파일:미군정청 문장.svg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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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황신덕
黃信德
파일:황신덕.jpg
아명 황진주(黃眞珠)
추계(秋溪)
출생 1898년 11월 6일
평안남도 평양부
(現 평안남도 평양시)
사망 1983년 11월 22일 (향년 85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123-31 자택
본관 제안 황씨(齊安 黃氏)[1]
직업 언론인, 교육인, 사회운동가
학력 정진소학교 (졸업)
숭의여학교 (졸업)
지요다고등여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중퇴)
니혼여자대학 사회사업학부 (사회사업학 / 학사)
주요
경력
시대일보 기자
중외일보 기자
동아일보 기자
경성가정의숙 교장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 위원
여성문제연구회 회장
가정법률상담소 이사장
추계학원 이사장
대한어머니회 이사
3.1 여성동지회 회장
가족관계 아버지 황석청, 어머니 홍유례
언니 황애시덕
남편 임봉순(任鳳淳)[2]
아들 임형빈
비고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2. 생애
2.1. 해방 이전2.2. 해방 이후

1. 개요

대한민국의 교육인이자 정치인, 사회운동가, 친일반민족행위자.

독립유공자 황애시덕의 둘째 여동생이다.

2. 생애

2.1. 해방 이전

1898년 11월 6일 평안남도 평양부(現 평양시)에서 아버지 황석청(黃錫淸)[3]과 어머니 홍유례(洪裕禮) 사이에서 1남 6녀 중 여섯째 딸로 태어났다. 정진소학교와 숭의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지요다고등여학교를 졸업한 뒤 와세다대학에 진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니혼여자대학 사회사업학부를 졸업하였다. 일본에 갔을 당시 박순천 등과 함께 사회주의 여성 운동 성격의 '삼월회(三月會)'를 조직했다.#

귀국한 뒤 동아일보 등에서 기자로 근무했으며 2.8 독립 선언3.1 운동에 참여하였다. 1920년대에는 신간회근우회에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말기 교육인으로 중앙여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근무하는 한편 제자를 정신대로 보내는 등 친일 활동을 하였다.#

2.2. 해방 이후

8.15 광복 후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 의원에 선임되었다. 그녀는 개원식에 들어가는 날 경향신문 기자에게 "조선 여자가 이제야 참 정권을 얻었다는 것은 선진국에 비해 부끄러운 일입니다."라면서 "다른 선배들을 빼놓고 내가 대의원이 되었다는 것은 나로서 사양하여야할 일이지만 이왕 선정된 것이니 성의껏 사명을 다해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황신덕은 당시 대다수가 문맹이었던 여성들을 위해 여성을 위한 선거 방식이 필요하다 했고# 다른 여성 의원들과 함께(신의경, 박현숙 등) 여성 의원 할당제를 주장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때 서울시 선거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김말봉, 박현숙 등과 함께 부녀자를 상대로 선거 강연 대회를 진행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난 뒤 여타 다른 지식인들과 함께 북한에 의해 납북되었으나 같은해 10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 학교법인 추계학원(추계예술대학교, 중앙여자고등학교, 중앙여자중학교, 추계초등학교)을 설립하여 교육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한편 1952년 여성문제연구회를 설립하여 민법 개정 당시 여성의 요구를 반영시켰다. 또한, 이태영, 이희호과 여성법률상담소를 운영하면서 난감한 상황에 빠진 여성들을 위해 무료로 법적 도움을 주었다.#

1962년 제5차 개헌 당시에는 여성인권 향상을 명시하는 규정이 헌법에 들어가야 하며 양원제를 택하고 하원은 직능대표, 상원국가유공자로 구성하고 교육에 대한 별개의 장을 두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1967년 3.1 운동 정신 계승을 목적으로 하는 삼일여성동지회에 임영신, 황애덕과 함께 회원으로 참여했고# 1975년 이갑성이 총재, 이활이 부총재로 있는 구국동지회 발족에도 참여했다.#
[1] 남파공파(南坡公派) 19세 氵변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오빠 황류(黃瑬)는 항렬자를 썼다.[2] 호는 추정(秋汀)이다.[3] 이명 황석념(黃錫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