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7 00:08:45

하멜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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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역사적 기록
3.1. 평가
4. 기타 사항

1. 개요

네덜란드어: Journal van de Ongeluckige Voyagie van 't Jacht de Sperwer
영어: The journal of the unfortunate voyage of the jaght the Sperwer
번역: 스페르베르[1][2]의 불운한[3] 항해 일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선박 선원이었던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이 1653년 상선 스페르베르 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난파되어 제주도에 표류한 후 조선에서 13년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탈출해서 1668년 네덜란드로 귀국하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책. 귀국한 하멜은 동인도 회사에 13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했고 이에 대한 증거로 써서 낸 게 바로 이 『하멜 표류기』다.

단, 전술하였듯 원제목은 이런 이름이 아니다. 이 '하멜 표류기'라는 이름은 1934년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 국역본으로 번역한 명칭이다.

2. 배경

이 '하멜 표류기'는 크게 '표류기(漂流記)'와 '조선 왕국기(朝鮮王國記)'로 구성되어 있는데 '표류기'는 네덜란드를 떠난 후 조선에서의 억류 생활을 거쳐 다시 네덜란드로 귀국할 때까지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일지이며 난파 경위, 조선에 표박한 이후 하멜 일행이 겪은 체험과 감상이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왕국기'는 조선의 지리, 풍토, 산물, 정치, 군사, 형법 제도, 종교, 교육, 교역 등 하멜이 조선에서 체류하면서 보고 들은 조선에 대한 각종 정보들을 기록한 것이다.

이렇게 하멜 표류기는 17세기 조선의 생활상을 세세하게 기록한 최초의 유럽 서적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원래는 억류되어 있는 동안 밀려 있던 임금을 받아내기 위해 동인도회사에 제출한 일종의 산업재해 보고서이며 이 때문에 자신들이 고생한 부분을 과장했다는 평도 존재한다.

해당 책은 네덜란드에서 1668년에 출판되었으며 프랑스 번역가 미누톨리(Minutoli)가 1670년에 주석을 달고 프랑스에서 출판했다. 미누톨리가 번역한 프랑스 번역판 하멜 표류기는 당시 유럽인들 사이에서 유명했는지 영국인 철학자 존 로크가 직접 이름을 서명한 복사본이 존재한다.

3. 역사적 기록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이 치계(馳啓)하기를,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藥材)·녹피(鹿皮)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포(包), 용뇌(龍腦) 4항(缸), 녹피 2만 7천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길리지단〔吉利是段〕[4]인가?’하니, 다들 ‘야야(耶耶)’[5]하였고, 우리 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 제주도)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西北)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韃靼: 타타르)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郞可朔其)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6]라 하였습니다.”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 여행이 금지된 곳. 한양)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7]
효종실록 11권 효종 4년(1653년) 8월 6일 무진 2번째 기사[8]
제주도에 표류하게 된 하멜과 일행 38명은 권극중과 노정이 보낸 군대에 의해 잡히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양까지 불러와서 벼슬도 시켜주고 나름대로 잘 대해줬지만 하멜 일행중 두사람(생존 선원들 중 최선임자인 1등 항해사와 포술장이었다)이 청나라 사신의 행차에 뛰어들어 집으로 보내달라고 난동을 부리는 사건으로 그 둘은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 일행 전원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졌다가 귀양으로 끝났으며 이후 이들은 전주, 남원, 순천, 여수 등에 분산 배치되었다가, 여수 전라좌수영에 배치된 인원 전부와 순천에 배치된 일부가 일본으로의 탈주를 감행한다. 1666년으로 억류 13년 만이었다.[9]

게다가 하멜이 13년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탈출할 때까지 조선 조정은 하멜 일당이 남만인인 줄 알고 있었다. 남만은 동이-서융-남만-북적, 중에서 남쪽 오랑캐, 즉 동남아쪽을 의미하는데, 이런 괴상하게 생긴 신기한 놈들 사는 어떤 동네로 생각했다. 그들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이런 식으로 국가를 세웠다는 사실 자체는 아예 모르고[10], 얘들은 남만인 중에서도 화란[11]인이라는 일본의 통보를 받고서야 '그런 나라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일본 에도 막부는 하멜에게서 조선의 정세, 국제 관계, 나라 상황 등 국가현안 뿐 아니라 문물, 풍습과 같은 부수적 분야를 포함한 총 54여개 항목에 대한 조사를 단 하루만에 진행하였고, 이를 무기로 조선을 외교적으로 압박했다.[12] 이게 어떤 의미냐면 하멜 일행은 일본에 통보를 하고 정식으로 방문한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도망쳐 온 것이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방문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를 단 하루만에 일목요연하게 끝냈다. 이는 이런 상황에 대비한 가이드 라인이나 정책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
“우리는 매일 많은 고관들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며 그 이유는 그들과 부인들 그리고 아이들이 매우 신기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또 제주도 사람들이 우리 생김새가 사람보다는 괴물처럼 생겼다는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가 무언가를 마실 때는 코를 귀 뒤에 돌린다는 말까지 있었다.”
헨드릭 하멜

조선에서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하멜 일행은 화젯거리였고, 너도나도 구경하러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건 당시 하멜 일행의 생김새가 사람이 아니라 괴물 같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인데, 조선인들은 하멜 일행의 생김새를 희화화하며 이야깃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조선인에게 배척받는 존재였던 하멜 일행은 거의 유일하게 자신들에게 잘 대해주는 승려들과는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출처] 승려들도 당시 조선 사회에서 배척받는 존재였다.

그렇다고 나라에서 섣불리 일본으로 보내줄 수도 없는 것이 효종은 북벌을 추진 중이었는데, 당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빠삭하게 꿰고 있었고 효종은 가뜩이나 약점이 잔뜩 잡힌 판국에 또 조선 사정을 알게 된 외국인이 들어왔으니 유용하게 부려먹을지언정 내보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14]

게다가 당시 일본으로 인도한 청나라 사람, 대만 사람, 유구국 사람들이 기독교도라고 마구 참수되는 일이 적잖았고, 심지어 유럽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들도 "너 배교할래 죽을래?"라는 선택을 받고 순교하거나 배교하던 시절이었다. 대표적으로 크리스토방 페헤이라(Cristóvão Ferreira)나 주세페 키아라(Giuseppe Chiara) 같은 경우가 있었으며, 이들은 배교후 일본이름을 쓰고 일본인으로 전향하여 카쿠레키리시탄의 색출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즉 그들이 첩자질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조선으로서는 쉽사리 내보내지 못한 것이다. 하멜 일행은 자신들이 모두 기리시단이라고 일본말로 진술한 바가 있어 조선에서는 얘들 보냈다간 다 죽는다면서 잡아두자고도 했다. 실제로 일본에 도착한 하멜 일행이 나카사키로 보내져 후미에를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칼뱅파 개신교를 중심으로 이미 본토에서 성상 파괴 운동이 진행되었던 네덜란드였으니 후미에를 하는 데에 거리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 측에서는 의심을 풀지 못하고 이들의 진술이 사실인지, 또 조선에서 종교 행위나 포교 활동을 했는지를 알아보고자 서신을 주고받는 통에 결국 일본 도착으로부터 1년이나 더 지나서야 겨우 고국행 출항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3.1. 평가

하멜 표류기가 서구 중심적이며, 조선에서 잘해줬는데도 악담을 늘어놓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이유에는 하멜 표류기에 "조선인들은 서로를 믿지 못해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며 이를 자랑스러워한다", "벨테브레가 말하길 조선인들은 겁이 많아 병자호란 때 싸워 죽은 이보다 스스로 목 매달아 죽은 이가 많았다고 했다", "피를 싫어해서 전투 중 누군가가 쓰러지면 곧 달아나고 만다." "조선인들은 자살하는 것을 수치스런 행동으로 여기지 않으며, 필요에 의해 그렇게 한다고 말하며 자살자를 가엾게 여긴다." "조선인은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을 지나치게 믿어선 안된다. 그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고서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영웅적인 행위라고 여긴다." 등이 있기 때문이다.

인권이니 평등이니 하는 개념도 희박한 시대인 17세기에 서양인이 서구 중심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무엇보다 그들에게 조선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을 억류한 나라이기 때문에 좋은 감정이 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첫 탈출 시도 이전의 대접은 융숭했고, 이후로도 그들을 챙겨주고 위해 준 이들이 더러 있었으나 아무리 잘 대해준다 한들 고향에 가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인데, 22세부터 36세가 되도록 14년 동안이나 고향에 못 돌아가게 강제로 막고, 종국에는 각종 노역에 부여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험난한 삶을 살게 한 조선에 대해 우호적인 관점을 가지긴 어려웠을 것이다.

제주도에서 시도한 첫 탈출이 실패하고, 곧바로 한양에 올라 여러 조사를 받은 후 조정의 판단에 따라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효종의 어가를 수행하는 직을 임명받았는데, 강제적임에도 매월 쌀 40kg의 넉넉한 봉급을 받았다. 그러던 중 조선에 청나라 사신이 오자 그들 앞에 모습을 내보이며 도움을 요청하는 두 번째 탈출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조선정부가 청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이를 묵인시켰다. 청 사신도 그들에게 별 관심도 없었던 듯하다.

이들의 탈출 시도에 신하들은 청나라가 조선이 북벌을 위해 네덜란드 용병을 고용한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사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들을 모두 처형시키자고 했다. 처형의 방법이 꼭 검투사같은 게, 네덜란드 선원 한 사람 대 조선군 두 명이 서로 동등한 무기를 쥐고 싸우는 식이었다. 이 처형의 요점은 '남만인이 모두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조선군과 대결시킨다`는 건데, 이를 주장한 신하들은 "남만인의 체격이면 우리네 두 명과 맞먹고, 더군다나 동등한 무기를 쥐었으니 평등한 싸움"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효종은 하멜 일행을 유배시키는 것에 그쳤다.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이 이들을 죽이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라고 효종에게 조언했다고 한다. 효종은 여기에 더해 하멜 일행이 유배지에서 정기지급받는 쌀 10kg에 더해 자신의 사비를 털어 쌀 30kg을 보태주기까지 했다. 강제입국된 마당에도 이원진이 제주목사로 있었을 때와 효종의 치하에서는 하멜 일행은 넉넉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면서 조선정부는 이들이 안중에도 없어졌고, 결국 하멜 일행은 호남 지방에 뿔뿔히 흩어져 각종 노역에 시달린 채 방치됐다.

다만, 일본에서 받은 조사에서는 난파된 후 조선인들이 어떻게 대했줬냐는 나가사키 관할 영주의 질문에 대해서는 "잠자리와 먹을 것, 마실 것 등 잘 대해줬다."고 답했다. 실제로 하멜은 자신의 표류기에도 "기독교인들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이교도(조선인)들은 우리를 극진히 대해 주었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아마 초기 제주도 목사인 이원진과 이를 비롯한 몇몇 관료들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원진 목사같은 경우 제주도에 조난된 하멜 일행에게 '왕에게 서신을 올렸으니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 희망적인 말을 하며 달래주었고, 처음엔 쌀과 밀가루 및 소금만 지원해주던 것을 금방 고기와 반찬도 더 해주었다. 하지만 이후 새로 발령받은 목사는 고기와 반찬을 빼는데다가 쌀과 밀가루 역시 보리로 대체했다. 이 외에도 하멜 일행이 호남지역에서 노역을 할 때 물심양면으로 챙겨 준 전라 좌수사 이도빈과 정영 등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헨드릭 하멜 항목을 참조.

또 "관아에서는 남편을 죽인 여인을 어깨까지 파묻고 나무톱을 놓아두었는데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양반을 제외하고 누구나 그 톱으로 한 번씩 그녀가 죽을 때까지 목을 잘라야 한다."[15], "국왕을 저주한 왕의 형제의 아내를 바닥이 구리로 된 방에 가두고 불을 지펴 죽였다.(자세한 것은 민회빈 강씨 참조)"[16], "원래 Tymatte(대마도의 네덜란드어 음차)은 조선의 일부였으나 일본과의 전쟁 이후 Quelpaert(제주도의 네덜란드어 명칭)와 교환하는 댓가로 일본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에게 많은 공물을 바쳐야 한다"[17] "조선에는 다른 승려들도 있는데 이들은 머리를 깎지 않으며 결혼도 할 수 있다[18]" 등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기록들도 많이 있어서 교차검증을 거쳐야 하며, 애시당초 하멜의 표류기는 역사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인의 견문록이라서 잘못된 기억이나 부정확한 풍문 또는 우연히 눈에 띈 일부 사례가 일반화되어 기록됐을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하멜 표류기를 읽어보면 그 내용이 상당히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는데다가 '저 더러운 야만인 이교도들이 우리를 괴롭혔다.'는 식의 구절은 없어서 일부 학자들은 '이 인간은 피도 눈물도 없나? 십수 년간 고생한 얘기를 쓰면서 뭐 이리 밋밋해?' 라면서 마치 영수증을 보는 것 같다고 평하기도 했다. 너무 징징거리듯이 서술하면 티가 나니 그랬을 수도 있다. 사실 밀린 임금 타내려는 보고서니 영수증 맞다 무엇보다 [[3D#s-2|내가 이렇게 고생했다]]는 걸 회사에 강조해야 임금이나 보험금을 많이 받을 수 있으니까 의도적으로 노린 감도 있다.

실제로 의도적으로 왜곡된 부분들도 있는데 조선측 기록인 윤행임의 <석재고>에서는 "그들은 모두 성력에 능통하며 조총과 대포를 잘 만들었다. 이에 따라 그들을 도성과 주변 수비대에 나누어 배속시켰다."고 서술되어 있다. 벨테브레도 한양에서 무기제조 책임자였고 이 분야에 전문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하멜이 자신의 표류기에서 밝히고 있는 것들 즉,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구걸을 해야 하는 등 모든 사소한 일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출처 아무래도 회사측에서부터 밀린 임금을 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서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VOC선에 승선했던 이들은 주로 대장장이이거나 도구 만드는 이들로 총과 25-30문에 해당하는 대포를 간단히 수리 할 수 있었다. 거기다 위급한 상황에는 누구나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어야만 했다. 대장장이가 빵을 굽기도 했고 요리사가 대포를 수리하기도 했다. 이들 모두는 아마도 무기를 다루는 법과 조립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니 무기를 제조하는 관청에서 일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하멜 표류기에서 나오는것 처럼 구걸만으로 들을 구입했다는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하멜은 일본에 도착한 뒤 심문 과정에서 한양에 있을 때 조선인들에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최신 무기의 사용법과 기술들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말하는것이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하멜은 해안에서 몇정의 총만 건질 수 있었고, 이런것들도 그나마 심하게 손상됐다고 말했었지만 실제 그 물품들은 물속에 단기간만 있었기 때문에 이 또한 의심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조선의 문헌에서 볼 때 난파된 배에서 건진 모든 무기류는 한양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760년 부터 1839년까지 생존했던 조선인 작가 송행은 역사상의 평론에서 네덜란드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위의 하멜의 증언은 고의적인 왜곡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난파선의 생존자들 중에서는 포에 대한 전문가도 몇명 있었다. 그들은 배에 30문 정도의 대포를 가지고 있었고, 모두 바퀴가 달려있어서 쉽게 운반이 가능했다. 포가 한발 발사되면 대포는 배 뒤쪽까지 굴렀다. 그래서 뒤로 반동하는 힘이 가해져 몸체가 쪼개지는 것을 방지했다. 그들의 소총 역시 정교한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철끝을 부싯돌이 내려치는 원리로 불꽃을 일으켜 화약이 발사된다. 이것은 걸쇠를 잠그고 끄는 용수철 작용으로 일어난다. 출처

하지만 표류 직후 우리는 이교도들에게 기독교도로서 무색해질 정도의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저술하는 등 호의적인 내용도 많다. 더불어 평생 미혼이었다는 점이라든가를 볼때 그 나름대로 조선인 처와 자식에 대한 생각이 있지는 않았을까 추측할 수도 있다. 특히 하멜 표류기에서 이상하게 감정이 실려있는 부분이 있는데 전라도 유배 시에 순천, 나주 등으로 이배할 것을 명받은 직후다. "어떻게 우리가 기반을 마련했는데 떠나라니!" 하면서 흑백화나 요금 청구서 같은 메마른 내용이라 평하는 하멜 표류기에서 유일하게 격한 감정을 실어 저술한 부분이 있는데 이를 미루어 볼 때 하멜이 처자식을 두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선교사가 전라도에서 유럽인의 모습을 한 조선인을 본 적이 있다고 기술한 적이 있다. 다만 이들은 하멜의 후손이 아니라 하멜 일행의 후손으로 보고있으며 있으며 본디 병영 남씨로 가계를 이어오다가 의령 남씨 족보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근데 실제로 하멜은 조선에 처와 자식이 있었는데 "조선 여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생겼다"는 불리한 이야기는 자신이 저술한 하멜 표류기에서는 모두 제외되어 있지만 하멜과 함께 탈출한 다른 선원 및 지인들이 기록하거나 문답한 내용에는 그들이 조선에서 처와 자식들을 두었다는 기록들이 실제로 나온다. 사학자들은 그들의 조선인 배우자가 과부나 무당 같이 소외된 여성들이었을 거라 추측한다.

위 문단에도 나왔듯이 '내가 이 이교도들에게 받은 대접은 어떤 기독교도에게 받은 대접보다 좋았다'는 구절이나 조선인들은 정이 많다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평한 부분도 많고 자신들에게 호의적으로 접근하여 같이 교류한 승려들이나 전라수사 이도빈, 제주목사 이원진[19] 등의 경우에는 매우 긍정적이고 호의적으로 서술했다.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하멜이 좋게 서술한 수사들은 대개 조정에서 공이 크다면서 서울로 불러 높은 벼슬을 주었고 하멜이 깐 수사들이나 병사들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탐관오리로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기록에서 교차검증이 가능한 곳도 제법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국내에는 하멜이 자신의 고생을 강조하려고 경험을 과장하거나 없는 사실을 지어내거나 혹은 일본에서의 경험담을 마치 조선에서 경험한 것처럼 표류기에 적었다는 일부 주장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위에서도 언급된 남편을 죽인 여인을 땅에 묻고서 나무톱으로 목을 썰게 했다는 기록은 사실 일본에서 목격한 노코기리비키(鋸挽き)와 혼동했다는 주장이다. 노코기리비키는 절대적 충성을 강요하던 당시의 무사계급 사회에서 하극상으로 주인의 생명과 재산에 해를 끼치거나 주인의 명예를 더럽힌 가신과 하인들 뿐만 아니라 다이묘의 시녀와 간통한 사람[20]이나 강도[21], 기독교인들을 처형[22]할 때 쓰이던 극형이었다.

형벌 수법이 이렇게 잔혹한 것도 만인에게 널리 보여 하극상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함이었으며 실제 집행 사례도 암살과 배신이 난무하던 전국시대에 집중돼 있다. 이처럼 노코기리비키는 남편을 죽인 일개 여인에게 내려지는 형벌도 아니었고 여성이 당했다는 기록도 없다. 그리고 에도시대 이후 정국이 안정된 후로는 너무 잔혹하다 하여 보여주기 식으로 며칠 간 땅에 파묻어 놓기만 하고 따로 형장에서 처형했다. 에도시대에 남편이나 타인을 고의로 죽인 여성은 하리츠케(磔)라는 나무틀에 묶은 후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에 처해진다.

물론 봉건제 국가였던 에도시대 일본 지방에서는 소위 말하는 원님재판식의 제멋대로 된 처벌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있다. 와다 신고로가 이렇게 당한 경우인데 당대에도 원님 재판아니냐는 평가를 받았다. 때문에 실제로 에도시대에도 여성들에게 노코기리비키(鋸挽き)가 일종의 관습법처럼 계속 이루어졌는지 여부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실제로 일본측 기록에서도 겐로쿠 시대(1688년 ~ 1704년)에 죄인의 옆에 놓인 톱으로 죄인을 실제로 톱질한 사람이 나타나는 바람에 당황한 에도막부가 그 뒤에는 감시 관리를 두게 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하멜 표류기 출판 이후에도 톱질을 당한 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찌되었든, 하멜이 본 저 처형법은 아예 조선의 형법서라 할 수 있는 경국대전이나 대명률직해에는 전혀 없는 형벌이다. 조선 또한 대명률직해에 따라 아내가 남편을 죽인 경우 참형, 남편이 아내를 죽인 경우 교형에 해당했지 관아의 지시에 따라 지나가는 행인들이 범죄자의 목을 직접 톱으로 썰어서 죽이는 그런 형벌 전통은 조선에는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조선시대에는 형벌을 최대한 경국대전과 대명률에 근거하여 집행하려고 했고 특히 관에 의한 사형같은 경우에는 사형실행시 임금에게까지 직접 보고가 되던 부분으로서 "XX임금 때 간통으로 교수형에 처했다" 등의 기록들이 실록에 남아있는데 조선시대에 법전에도 전혀 없는 관아에 의한 공개 톱질형식의 사형법에 대한 하멜의 기록은 당연히 그 신빙성이 크게 떨어진다.

또한 "국왕을 저주한 왕의 형제의 아내를 바닥이 구리로 된 방에 가두고 불을 지펴 죽였다"는 내용 또한 실제로 민회빈 강씨는 구리로 된 방에 불을 지펴 죽인 게 아니라 사약을 마시고 사사되었기 때문에 하멜이 기록한 기록과 실제 사형법이 아예 다르다. 불을 지펴 죽였다는 얘기는 영창대군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섞여서 그랬을 것 같다. 하지만 영창대군의 사인(아사, 증살 등)은 실록 자체에서도 매우 모호하다. 영창대군의 비문과 인조 실록에는 이정표가 잿물을 먹여 죽였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집권한 서인 측에서도 "그런 소문만 믿고 일을 처리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 나왔으며 실제로 병으로 죽었는지 잿물을 먹여 죽였는지 불을 지펴 죽였는지 확실하게 밝혀진게 없이 소문만 무성했을 뿐이었다.

물론 하멜 표류기에 나오는 조선의 형벌 얘기는 남편을 죽인 여인의 참수 사례나 국왕을 저주한 왕의 형제의 아내를 바닥이 구리로 된 방에 가두고 불을 지펴 죽인 사례 뿐만이 아니다. 왕에게 불경죄를 지은 경우(가택을 허물고 재산 몰수), 양반이 남의 하인을 죽인 경우(3배의 가치로 배상), 하인이 주인을 죽인 경우(발바닥 태형 후 살해 수법과 동일하게 처형), 일반 살인범의 경우(시체를 씻은 물을 먹인 후 배를 때려 처형), 남편이 간통한 아내를 죽이거나 양반이 하인을 죽인 경우(무죄), 간통한 남녀의 조리돌림(길거리에서 욕보인 후 곤장형), 납세를 못한 경우(정강이에 곤장) 등 많은 사례를 열거하고 있다.

하지만 남편을 죽인 부인을 땅에 파묻어 톱으로 참수하라거나 국왕을 저주한 왕의 형제의 아내를 바닥이 구리로 된 방에 가두고 불을 지펴 죽였다거나 죽은 피해자의 사체를 씻은 식초와 물을 살인자에게 먹여 불룩해진 배를 때려 죽이라거나 주인을 죽인 수법 그대로 하인을 죽이라는 등, 오늘날은 물론이고 당시로서도 대단히 엽기적이고 잔혹한 이런 집행 규정은 앞서 말했듯이 경국대전대명률직해 어디에도 전혀 없다. 그럼에도 하멜이 이렇게 기록해 놓은 것을 보면 지방에서 소위 말하는 원님재판식의 제멋대로 된 처벌이 이뤄졌거나 허풍섞인 과장된 풍문을 들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일종의 심어진 가짜 기억(Implanting False Memories)으로 잘못 기억했거나 일본에서의 경험들이나 일본 체류시에 전해들은 풍문들과 서로 혼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박으로 조선에서 무려 13년하고도 28일을 살았던 하멜은, 일본에서는 고작 1년을 지냈지만 당시 가톨릭이라면 치를 떨었던 도쿠가와 막부의 엄격한 감시와 통제 때문에 다른 네덜란드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데지마라는 인공섬에 갇혀 살았다. 그래서 일본 관련 기록이라고는 얼른 고국에 보내주지 않는다는 불평 뿐이고 표류기 어디에도 일본의 풍습, 기후, 지리, 산업, 군대, 교육, 사회 구조, 윤리관, 종교 등에 관한 얘기는 없다. 오로지 조선에 관해서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두 나라의 경험을 혼동해 기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똑같이 조선에서 동고동락한 주변 동료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착각하거나 없는 일을 꾸며낼 여지도 없는 데다가, 무엇보다 하멜의 경험이 조선의 일인지 일본의 일인지는 일본과 숱하게 무역 거래를 해 온 같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무역상들이 있기 때문에 하멜이 의도적으로 기록을 날조 왜곡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반론이 있다.

즉, 만일에 하멜이 일본에서 톱질 당한 여인을 봤거나 그에 대한 풍문을 들어놓고 조선에서 본 것처럼 적었다면 같은 동인도 회사 직원이나 동료들이 이를 지적했을 거라는 얘기다. 또한 하멜이 회사로부터 온전하게 체납 임금을 받은 것을 보면 회사 자체적으로 그의 기록에 대한 사실 검증을 마쳤다고 할 수 있다는 반론이 있다.

하지만《하멜 표류기》에는 다음과 같은 심각한 오류 또한 회사나 동료들 그리고 무역상들의 별 다른 검증이나 지적 없이 그대로 실려있는 것을 분명히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 검증을 제대로 거쳤다고 보기에는 매우 힘들다는 지적이 있다.
『 이 나라의 동남 방향에는 일본이 있는데 제일 가까운 곳,

즉 부산에서 오사카까지는 약 25~26마일이고

그 중간에 쓰시마, 즉 그들이 대마도라 부르는 섬이 있습니다.

이 섬은 처음에는 조선에 속해 있었는데

그 옛날의 전쟁에서 조약으로 일본 땅이 되고,

조선은 그 대신 제주도를 얻었다고 합니다.
- 《하멜 표류기》 조선왕조에 대한 지리적 위치 중에서

이처럼 하멜 표류기에서는 조선과 일본이 서로 전쟁을 벌인 끝에 제주도대마도를 서로 맞교환 했다는 기록이나 실제로 일본 에도시대의 6가지 처형 방식 중 하나인 노코기리비키(鋸挽き)를 일본이 아닌 조선의 형벌로 잘못 기록한 부분 또 조선에서는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없었던 일본식 대처승(결혼할 수 있는 승려)에 대한 묘사와 조선이 일본에게도 공물을 바치고 있었다"는 잘못된 기록들이 발견된다.

일본 막부는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기위해 자국을 방문하는 외국 사신단들을 자국민들에게는 '속국들이 조공을 바치러 오는 것'으로 거짓 선전을 했었다. 현실은 그 '속국'들이 파견하는 사신단을 접대하기 위해 허리가 휘청일만큼 어마어마한 접대비를 썼지만. 즉 하멜이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은 그동안 일본측 정보들을 우선 접한 탓일 가능성이 크다. 정작 한편으로는 "외국인이 일본 땅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즉시 맞아죽는다는 조선인의 말은 거짓이었다. 이것으로 국가간에 서로 얼마나 많은 근거없는 말들이 떠돌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참고로 에도막부는 반대로 조선에게는 네덜란드를 일본의 속국으로 왜곡 선전하였다.

그러한 잘못된 기록들이 분명히 확인이 되는 등 엄밀히 따지면 교차검증 과정에서 일본과 조선의 경험담들이 실제로 뒤섞인 부분들이나 잘못된 기록들이 분명 나타나기 때문에 제대로된 검증을 거쳤다고 보기에는 매우 힘든게 사실이다.

거기다 하멜의 동료들이 하멜이 일본에서 본 것인지 조선에서 본 것인지 본인들도 하멜의 그림자처럼 항상 함께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 확인할 방법은 없었으며, 실제 잘못된 기록을 보고도 지적을 했는지 안 했는지도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애초에 저런 명백한 오류들이 별 다른 검증없이 지나갈 수 있었던 이유 자체가 당시 현실상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또한 조선과 직접 교역을 하지 않는 이상 하멜의 기록들에서 잘못된 부분들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히 검증을 할 방법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제주도대마도를 조선과 일본이 전쟁 끝에 서로 맞교환 했다는 기록은 하멜의 기록이 제대로된 '검증'을 거쳤는지에 관한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데, 제주도는 조선초기에 이미 조선의 영토로 확고히 편입된 지역이었고 대마도 역시 역사상 조선에 조공을 바친 적은 있었어도 조선의 영토로 완전히 편입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결국 하멜 표류기는 검증을 제대로 거치지 않았거나 만약 검증을 거쳤는데도 저런 잘못된 정보가 실려있는 것이라면 하멜의 동료들이나 일본과 숱하게 무역 거래를 해 온 같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무역상들 그리고 하멜이 소속되어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자체가 제대로 된 검증을 할 만한 지식이나 역량 자체가 부족했다는 증거가 된다. 이런 심각한 오류는 당연히 검증 과정에서 걸러졌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검증을 했다고 가정하기도 힘든 것이 귀국한 하멜은 동인도 회사에 13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했고 이에 대한 증거로 써서 낸 게 바로 『하멜 표류기』이다. 한마디로 '하멜 표류기는 검증을 거치고 출판된 책이 아니라 그냥 하멜이 써서 낸 원본이 그대로 출판된 경우로 검증 자체를 거치지 않고 원본 그대로 출판된 책이다.

즉, 하멜 표류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교차검증을 통한 접근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잘못된 정보들 또한 별 다른 검증이나 지적없이 그대로 실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실제로 하멜 표류기에는 제주도대마도의 사례나 조선일본에게도 조공을 한다는 기록들 처럼 매우 심각한 오류들 또한 분명 사실인것처럼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구한말 선교사들의 기록도 그렇지만, 하멜 일행이 직접 본 것이 아닌 민간에서 소문으로 들을 수 밖에 없는 내용인 이상 그 자체의 신뢰성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가령 민회빈 강씨의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하멜 일행이 정확하게 알 수 있을리가 없고, 이러한 기록들은 당대에 민간에는 이러한 소문이 있었다는 정도로 생각하는 게 정확하다. 즉 하멜 일행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것이 아닌 내용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엄격한 교차 검증이 필수적이다.

4. 기타 사항

파일:스티히터판 하멜 표류기 1.jpg
파일:스티히터판 하멜 표류기 2.jpg
  • 스티히터판 하멜 표류기에는 8장의 목판화 삽화가 실려 있다. 그런데 삽화가가 순전히 상상만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효종을 비롯한 조선인들의 복식과 건물의 건축양식 등이 유럽식이다.
  • 이들이 처음 상륙한 곳이 제주도라서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의 용머리해안 인근에 하멜을 기리기 위해 커다란 범선 형태의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다만 조선의 기록은 그들이 표류한 위치가 '大靜縣地方 遮歸鎭下 大也水沿邊'(대정현지방 차귀진하 대야수연변)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조성된 위치가 잘못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 강진군에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하멜 일행이 거주했다는 증언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여기 살았다더라"는 식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 하멜 표류기와 같은 해에 출판된 한스 야콥 폰 그림멜스하우젠의 독일 바로크 소설 《모험적 독일인 짐플리치시무스(Der Abentheuerliche Simplicissimus Teutsch)》에도 병자호란 직후의 조선이 잠시 등장한다. 작중 짐플리치시무스는 러시아에서 동방으로 향하다 여진족들에게 잡혀 조선으로 온다. 그는 조선에서 무기 관련 업무에 종사하고 조선인들 사이에서 힘자랑도 하다, 조선 왕의 호의로 일본을 거쳐 포르투갈 선박을 타고 오스만과 베네치아를 거쳐 다시 유럽으로 돌아온다. 이는 하멜의 일대기와 매우 유사하여 일각에서는 그림멜스하우젠 역시 하멜 표류기를 읽었다고 여기기도 하나,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 특이하게도 1670년에 출판된 하멜 표류기 프랑스 번역판인 "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andois, Sur la Coste de l'Isle de Quelpaerts: Avec la Description du Royaume de Corée: Traduit du Flamand; Par Monsieur Minutoli"라는 책에 존 로크가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다. 존 로크의 서명을 해당 책의 앞부분에 확인 할 수 있다. 1670년대에 출판된 하멜 표류기 프랑스 번역판을 존 로크가 읽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 하멜과 같이 조선으로 갔던 사람 중에는 하급선의(승선 의료진) 마테우스 에보켄(Mattheus Eibokken)이 있다. 에보켄은 표류자 일행 중에 조선말을 가장 유창하게 구사했는데, 그래서 귀국 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임원 니콜라스 빗선(Nicolaes Witsen)에게 증언하는 형식으로 간단한 네덜란드-조선어 사전을 출판했다. 링크 이 사전은 사실 하멜 표류기에 직접 포함되지는 않지만 일부 출판본에서 부록 형식으로 끼워주기도 한다. 이 사전의 내용은 중세국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은 Stock, 스팸 Spaem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17세기 서남 방언에서[23] 'ᄯᅥᆨ', 'ᄲᅡᆷ > ᄲᅣᆷ'의 초성자에 쓰인 ㅅ계 합용병서(ㅼ, ㅽ)의 앞 ㅅ 발음을 그대로 했다는 증거가 된다. 또 은 Tiarck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해당 단어를 단독으로 발음할 때도 자음군 단순화를 적용한 [닥]이라 읽지 않고 겹받침의 [ㄺ]을 전부 발음했음을 보여주고 있다.[24]
  • 하멜 일행의 최연소자는 탈주 당시 25세의 데니스 호버첸으로, 조선에 도래했을 당시에는 12살의 어린아이였다. 그는 당시 배에서 이런저런 잡일을 하는 급사로 채용되었는데, 조선에서 보낸 세월이 네덜란드에서 보낸 세월보다 더 길었기 때문에 네덜란드어로 읽고 쓰는 방법들을 다 까먹어 버렸고 귀국후 급여를 정산하는 명세서에 동그라미나 X를 그려 동의 여부를 표시했다. 그다음 연소자들은 탈주 당시 27세의 베네딕투스 클레르크, 클라스 아렌센이다. 마찬가지로 급사 출신인 이들 역시 조선 도래 당시 14세로 데니스 호버첸과 처지가 다르지 않았다.
  • 하멜 일행의 최고령자는 조선에 남았다고 전해지는 요리사 얀 클라에천[25]을 제외할 경우 탈주 당시 47세의 조타수 호버트 데니슨으로, 바로 데니스 호버첸의 아버지이다.[26] 바꿔 말하면, 호버첸은 아버지가 일하는 배에서 일머리 배우려고 따라갔다가 변을 당한 셈이다(...)
    • 대다수의 네덜란드 에덜란드 동인도 회사 선원들은 하멜과 같은 엘리트 서기를 제외할 경우, 게르만 족 특유의 장자상속제로 인해 10대 초반의 어린나이에 고향을 떠나 동인도 회사에 급사로 채용되어 수십여 년 간 내부승진으로 간부급 직위에 올라 상관 임원으로 퇴직 하는 것이 관례였다. 자식을 데리고 배에 오른 호버트 데니슨이 특이한 경우.
  • 이말년씨리즈에서 맛깔나게 패러디를 했다. 보러가기 당연히 재미를 위한 왜곡이 많으므로 비현실적인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본래 하멜이 저런 인물이었다고 믿으면 곤란하다. 고증오류인지 각색인지 알 수 없으나 기록과 달리 하멜이 혼자 표류된 포수로 등장한다.
  • 조선왕조실톡에서도 패러디되었다. 독자의 재미를 위해 하멜 일행이 네덜란드어 대신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영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보러가기
  • 2014년 출판된 구야, 조선 소년 세계 표류기라는 책은 하멜 표류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구야라는 조선인 소년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전체적으로 각색된 부분도 있지만 하멜 표류기의 내용 자체를 바꿔버리지는 않았다. 막판부에는 말년의 렘브란트도 등장한다.
  • 2018년에 전 8권이 완간된 나는 바람이다라는 청소년 소설도 해풍이라는 조선인 소년이 하멜 일행이 귀국할 때 이들을 따라 유럽까지 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네덜란드위키피디아헨드릭 하멜 항목에서는 어째서인지 한국인들 사이에서 하멜이 거스 히딩크급으로 매우 유명하다는 약간 과장된 듯한 서술을 담고 있다. 사실 본토 네덜란드에서는 좀 별난 난파 경험을 겪은 대항해시대의 흔하디 흔한 선원 1에 지나지 않아 그렇게까지 유명한 인물도 아닌 반면, 한국에서는 거의 최초로 한국에 대한 기록을 문서로 남긴 서양인이라는 사실이 굉장한 상징성을 지녔으며, 대대수의 한국인들도 교양 프로그램이나 일부 열의있는 국사 교사들에게 여담으로 이름이나마 접해 보았고, 그가 한때 마무른 강진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강진군이라는 동네가 마땅히 관광거리라곤 없는 깡촌인지라 하멜을 일종의 관광자원 삼아 하멜 기념관과 동상까지 세우고[27] 하멜의 고향이 호린험이라는 인연에서 강진군이 호린험과 자매결연을 맺는 등 충분히 유명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니 그렇게 여길 만도 하다. 그리고 사실 한국에서 빈센트 반 고흐렘브란트, 히딩크 감독, 그 외에 아르연 로번이나 뤼트 판니스텔로이 같이 대개는 한국 축구선수와 한 팀에서 뛴 덕에 유명한 스포츠 스타 정도를 제외하면 하멜의 인지도를 따라올 네덜란드 사람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과장은 약간 있되 그리 심한 과장까지는 아니고 외국인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생각해도 이해할만한 정도.


[1] Sperwer. 영어로 하면 Sparrow hawk(새매)를 의미하는 단어다.[2] Jaght. 영어로 하면 Yacht(요트)를 의미하는 단어다.[3] 후술하겠지만 이 책은 단순 표류기 책이 아니라 산재보고서였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불운한 경험을 겪었는지는 부각시킬 목적으로 작성된 만큼 이런 비관적인 제목이 붙어있다.[4] 크리스천을 일본어로 음차해 '키리시단'이 되었고, '키리시단'을 다시 우리말로 음역한 것이다.[5] 네덜란드어에서 '예', '그렇다'를 뜻하는 'Ja'(야)라고 한 것을 그대로 받아적은 것으로 보인다.[6] 당시 나가사키에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외국인의 체류가 인정된 인공섬 데지마가 있었다.[7] 실제로 네덜란드의 전통 춤에는 스텝을 밟으며 발을 흔드는 춤의 종류가 많다.[8] 링크[9] 좌수영 뒷담을 넘어 인근 해안으로 도주한 다음, 미리 선창에 묶어 두었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데 성공했다. 이들이 탈주한 해안은 현 여수시 종화동으로, 거북선대교인근이다. 당시에는 이곳이 해안가였다.[10] 당시 남만, 즉 동남아는 당시에도 부족 사회가 많았다. 그리고 조선과 명나라를 제외한 여타 지역은 다 오랑캐라고 생각한 시대상도 반영된다.[11] '화란'은 '홀란드'를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홀란드(Holland)라 불렸다. 사실 홀란드는 네델란드를 이루는 여러 지역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사실상 네델란드의 최중심지역이어서 당시에나 지금이나 많은 나라들이 네덜란드를 홀란드라 칭한다. 수도 암스테르담도 (노르트)홀란드 지역에 위치해있다.[12] 당시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 재위기 시절이다.[출처] 《역사저널 그날, 네덜란드 청년 하멜, 조선에 표류하다》 편[14] 이후 200년 가량 지난 뒤 철종 시기인 1854년 표류한 투 브라더스 호와 고종 시기인 1866년 표류한 서프라이즈 호의 미국인들의 경우에는 그냥 청나라로 보내버렸다. 당시 기사를 보면 이들의 국적을 '미리견'으로 표현했는데, '아메리칸'에서 '아'는 슈와, 이른바 약한 어 모음이므로 '메리칸' 정도로 들렸을 것이고 이게 '미리견'으로 음차된 것으로 추측이 된다.[15] 이런 사형방식은 에도시대의 처형법인 노코기리비키(鋸挽き)와 혼동했다는 의견이 있다.[16] 단종의 죽음에 대한 야사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사약을 내릴 때, 사약의 효과를 올리기 위해 방에 불을 지피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것이 백성들의 눈에는 사람을 방안에서 태워죽이는 것처럼 보였던 것 같다.[17] 일본의 세견선을 조선이 쌀을 바치는 것으로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일본인들이 사정을 모르는 네델란드인들에게 "조선이 우리 일본의 속국이다"라는 식의 거짓말을 하기도 했었고...[18] 일본의 대처승, 혹은 조선의 무당을 승려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19] 실학자 반계 유형원의 스승이자 성호 이익의 당숙이고, 제주목사로 있으면서 제주도의 풍습을 기록한 책 ‘탐라지’를 썼는데 오늘날에도 조선 중기 제주도의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로 대접받고 있다.[20] 전국 시대의 무사인 와다 신고로가 이 이유로 처형당했다.[21] 에도시대 중기의 범죄자이자 강도인 나오스케 곤베에의 처형 사례[22]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가신이던 나카가와 모가 기독교 숭배 이유로 처벌당한 사례[23] 중앙 방언의 경우 이미 16세기 후반 자료에서부터 ㅅ계 합용병서와 예사소리 표기의 혼동이 나타나기 시작하므로 그때부터 어두자음군이 소멸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멜 일행은 호남 지역에서 체류했기 때문에 당시 그 지역의 방언에 남아있던 어두자음군을 들리는 대로 채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24] 덤으로 "羅州를 "Naedjoo", 靈巖을 "Jeham"이라고 표기했는데 최소한 이때에도 두음 법칙이 존재했었다는 걸 알 수 있다.[25] 49세로 하멜 일행의 탈주 당시 남원 거주.[26] 호버첸은 호버트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영어에서 아들의 이름에 -son을 붙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27] 심지어 하멜 맥주도 있어서 맥주 축제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