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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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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ra Angelico - Purgatorium.png
《연옥 문의 그리스도》(프라 안젤리코, 프레스코화, 1440년)
언어별 명칭
<colbgcolor=#a0522d,#532a17><colcolor=#fff> 라틴어 Purgatorium
프랑스어 Purgatoire
영어 Purgatory

1. 개요2. 명칭3. 과정4. 고통5. 기간6. 성경적 근거7. 역사적 배경8. 교부들의 관련 언급9. 비가톨릭 종파의 입장
9.1. 동방 정교회9.2. 오리엔트 정교회9.3. 개신교
10. 타 종교의 유사 개념11. 창작물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하늘의 기쁨으로 들어가기에 필요한 거룩함을 얻으려면 죽은 다음에 정화를 거쳐야 한다. 교회는 선택된 이들이 거치는 이러한 정화를 연옥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단죄받은 이들이 받는 벌과는 전혀 다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0-1031항
연옥은 무엇인가?

연옥은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죽어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기는 하였지만, 하늘의 기쁨으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정화를 거쳐야 하는 상태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210항

1. 개요

연옥(Purgatorium, )은 가톨릭 교리상의 개념으로, 지옥의 벌을 받을 정도는 아닌 죄인이 천국의 상태에 도달하기 전에 겪는 정화Purgatorium를 일컫는다.

개신교에서는 부정하며, 정교에서는 찬성 및 반론에 대한 교의적 합의는 없다.

2. 명칭

연옥을 가리키는 라틴어 단어 'Purgatorium'는 '정화'를 의미하는 동사 purgare에 장소 혹은 상태를 의미하는 접미사 -orium이 붙은 것이다. 따라서 단어 자체는 '정화의 장소' 혹은 '정화의 상태'를 중의적으로 의미하고, 대중신심에서는 장소적 의미가 두드러지지만, 신학에서는 '정화의 상태'로 해석한다.[1] 곧 요약하자면, 연옥Purgatorium이란 '정화의 상태' 내지는 '상태로서의 정화'를 의미한다.

또한 독일어에서는 연옥을 Fegefeuer, 곧 '정화의(Fege) 불꽃(Feur)'이라 하는데, 이는 은유적이긴 해도 연옥이 정화의 단계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자어 연옥(煉獄)은 달굴 련() 자에 옥 옥() 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대중신심 등에는 잘 부합하지만 단어 자체가 '장소'의 의미를 지니기에 교리적 엄밀함이 부족하다.

3. 과정

연옥은 저승에 있는 일종의 강제 수용소가 아니고, 인간에게 부여된 벌을 실증적인 방식으로 보속해야 한 곳도 아니다. 오히려 연옥은 인간이 변모되기 위해 내적으로 필요한 과정이다.
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 《종말론 Eschatologie》 272쪽

통상 '사후세계'처럼 묘사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연옥은 '장소'가 아니라 '사건'이다.[2] 한자어 연옥(煉獄)의 '獄(감옥 옥)' 자 때문에 오해를 부를 수 있지만 '장소'의 개념이 아니며, 사실 라틴어 Purgatorium은 담백하게 '정화'라는 의미일 뿐이다.

가톨릭 교리에 의하면 은총지위를 상실하고 대죄[3]를 지니고 죽은 영혼은 지옥으로 가며, 은총지위를 보존하고 아무런 죄와 잠벌[4] 없이 죽은 영혼(성인)은 바로 지복직관(천국) 상태가 된다. 이 두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 영혼, 즉 은총지위를 보존하고 죽었으나[5] 아직 정화Purgatorium될 필요가 있는 [6] 영혼이 천국에 가기 전에 남아 있는 소죄와 잠벌을 정화Purgatorium하는 상태를 바로 연옥Purgatorium이라 한다. 연옥 영혼들은 정화가 끝나면 천국으로 가게 되므로 구원이 확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지옥에서 연옥으로 가는 따위의 이동은 불가능하다. 지옥은 영구한[7] 곳이다.

'고성소'와 혼동하기 쉬우나 다른 개념이다.

4. 고통

(시간 개념을 쓸 수 없는) 사후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내세의 고통을 설명하려면 어쩔 수 없이 현세적 몸의 고통에 따라 유비를 쓸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전통적으로 정화의 '불꽃'과 같은 설명을 사용하여 왔지만, 지옥의 고통과는 그 성격을 구별한다.

왜냐하면 연옥Purgatorium은 말 그대로 정화Purgatorium의 고통이기에, 인간이 자신의 죄를 마주봄으로서 겪는 고통 뿐만 아니라 그 죄의 정화에서 나오는 기쁨도 함께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지옥의 소위 '불꽃'이 하느님과의 단절에서 오는 고통을 의미한다면, 연옥의 소위 '불꽃'은 바로 죄인을 정화하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죽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점에서만큼은 연옥은 천국과 공통점을 지닌다. 차이점이 있다면, 아직 정화할 게 남아있는 자에겐 이 만남이 쓰라린 아픔이라는 것이다.[8] 바로 그렇기에 가톨릭 전통에서는 연옥을 '고통'의 상태이면서 동시에 '기쁨'의 상태로 가르친다.
그때에는 그 어떤 수정도 있을 수 없다. 죽음으로써 삶의 모든 자유의 선택은 종결된다. 죽음에서는 이전 선택들을 수정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도' 그렇다. 역사와 역사적 실존으 ㅣ경중만이 그대로 남는다. 자주 고달팠던 궤적과 실패와 성공을 안고 지상의 삶은 다만 그렇게 그 엄중함과 가치를 드러낸다. 여기 이승의 삶에서 하느님을 선택했다면, 아니 적어도 진리와 선을 선택했다면, 그 크고 작은 수많은 선택들의 총합에서 하느님을 향한 '예'가 솟아날 수 있다. 하느님의 정화하고 치유하고 거룩하게 만드는 사랑을 향해 늘 온전히 열려 있는 '예'가 가능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만,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오직 하느님을 통한' 의화라는 교리가 배제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죽음에서의 정화는 순전히 은총이다. 이미 지상의 삶에서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선택이 어느 것이나 순전히 은총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의 정화는 있어야만 한다. 하느님의 의화 은총이 인간 안에 굳어진 모든 고집과 반항을 그저 아무렇지 않게 덮어 버리거나 아예 무시해 버린다면, 의화는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마법이 되고 말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 안에 있는 불행과 악에 주술을 부려 달콤하게 미화시키는 일이 될 뿐이다.
그럴 수는 없다. 하느님은 당신 피조물을 그런 식으로 허투루 취급하고 넘어가실 수 없으시다. 그분은 피조물의 정화와 변모를 원하신다. 그분은 당신과 반대되는 것을 적당히 얼버무리고 덮어 둘 수 없으시다. 인간에게는 이 정화가 끔찍한 아픔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자신의 불행과 악에 대한 처절한 아픔과 다른 한편으로는 끝없는 기쁨이 모두 하나로 엮여 하느님의 빛 속으로 들어선다.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죽음 부활 영원한 생명 바로 알기: 현대인을 위한 종말론 강의》Am Ende das Nichts? Über Auferstehung und ewiges Leben (72020), 김혁태 번역, 생활성서, 2022, pp.238-239.
연옥이라는 말은 의미를 분명히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이 말이 진정으로 뜻하는 바는 현대 신학에서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하나의 실제성이다.
이 실제성은 거룩하신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우리 눈이 우리 자신에 대해 열린다는 것, 우리가 실제로 무엇인가 하는 깨우침이 우리에게는 한없이 고통스럽다는 것, 아울러 이 고통이 바로 우리를 정화하며 그제야 온전히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두가 우리에게 시한적인 벌(罰)이나 하나의 상황으로 부과되는 사건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일로, 이 만남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Der Tod ist nicht das letzte Wort (1976), 신교선·이석재 번역, 바오로딸, 32022(11986), p.45.
연옥의 기쁨과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기쁨은 천국에서 복된 이들이 향유하는 기쁨이다. 제노바의 가타리나 성녀는 단테의 뒤를 이어 말했다. 그 말은 심오한 교의적 관점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성녀의 깊은 체험에서 얻은 열매이기도 하다. "이 영혼들은 자신의 고통을 자발적으로 견뎌 냈기에 고통의 작은, 티끌 하나도 떨어져 나가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 그들의 기쁨이 지나치더라도 그 고통의 가장 작은 부분도 없애지 않으며, 그들의 고통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그 기쁨의 작은 부분도 없애지 않습니다. ...... 나는 천국에 있는 성인들이 느끼는 만족감을 제외하고는 이와 비교할 수 있는 만족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 《역설들》Paradoxes, 곽진상 번역, 가톨릭출판사, 2025, pp.188-189.
어떤 이가 무엇을 지었는지는 심판 날에 드러날 것이다.
"심판 날에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저마다 한 일이 어떤 것인지 그 불이 가려낼 것입니다. 어떤 이가 그 기초 위에 지은 건물이 그대로 남으면 그는 삯을 받게 되고, 어떤 이가 그 기초 위에 지은 건물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입게 됩니다. 그 자신은 구원을 받겠지만 불 속에서 겨우 목숨을 건지듯 할 것입니다."(1코린 3,13-15)
그닐카J. Gnilka는 이렇게 심판하는 불이 바로 오시는 주님을 가리키는 것임을, 이사야서 66장 15-16절과 관련지어서, "모습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위엄에 대한 표상은 ... 지성소에 접근하기 어려움"임을 보여주었다. (ThWNT I,656,24-25.) 이로써 그는 예레미아스에 맞서서(LThK IV,51) 모든 해석을 연옥이라는 방향으로 내렸다. 불은 없는데, 바로 주님이 불이시기 때문이다. ... 소박하고 객관화된 연옥 개념을 가정한다면 물론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연옥'이 그리스도론적으로 이해된다면, 그리고 주님이 심판하는 불이라고, 인간의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는 불이라고 설명된다면 '연옥'은 정확한 그리스도교적 개념이 되지 않을까?(로마 8,29; 필리 3,21) 초기 유다교에서 나온 연옥 사상이 진정 그리스도교화된 것은 정화가 그 어떤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주님의 변화시키는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깨닫는 데에 있지 않을까? 그분은 우리의 닫힌 마음을 자유로이 타오르게 하시고 변화시키시어 그것이 몸에 이롭게 작용하게 하지 않으실까?

......이로써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연옥의 근본적인 의미가 이제 우리에게 규명되었다. 테르툴리아누스에게서 보듯이, 연옥은 저승에 있는 일종의 강제 수용소가 아니고, 인간에게 부과된 벌을 실증적으로 보속해야 하는 곳도 아니다. 오히려 연옥은 인간이 변모되기 위해 내적으로 필요한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성인들의 통공과 함께 그리스도의 능력, 신적인 능력을 갖게 되고 일치할 능력도 갖게 된다. 이제 인간의 현실에 대해 관찰한 사람은 인간이 자신의 업적을 통해 은총을 받는 게 아니라, 은총으로써 완전한 승리를 얻게 되는 것이 필연적인 것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믿음의 핵심인 "예!"가 인간을 구원한다. ... 주님과의 만남은 이러한 변모의 불이고, 영원한 기쁨의 용기가 될 수 있는 저 티없는 형상으로 그를 태우는 불이다. 만일 참회가 은총의 반대이고, 은총으로부터 자라나서 선사되는 가능성이나 그런 형태가 아니라면, 이는 은총론에 모순될 것이다. 치프리아노클레멘스가 연옥을 교회가 규정한 참회와 동일시한 데에 중요한 점이 있다. 그리스도론으로부터 자신의 형상을 취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연옥설은 그리스도론적인 참회의 은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이론은 참회에 대한 생각, 곧 용서를 통해서 선물을 받은 사람답게 변화된 삶을 살 준비를 하고 산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베네딕토 16세, 『종말론』Eschatologie: Tod und ewiges Leben, 조한규 옮김, 생활성서, 2020, pp.270-273.

또한 연옥은 지상에서 하지 못했던 선악 선택을 사후로 미뤄서 하겠다는 의미도 아니다. 위에서 로핑크가 말했듯이 "죽음으로써 삶의 모든 자유의 선택은 종결된다. 죽음에서는 이전 선택들을 수정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곧 연옥이란 죽고 나서 회개하자는 교리가 아니라, 삶에서의 선악 선택 결과들이 하느님과 마주쳤을 때 일어나는 결과를 설명하는 교리이다. 그리고 인간이 하느님을 바라볼 때 느끼는 기쁨과 쓰라림, 찬양과 두려움의 공존은 성경에서 수도 없이 나온 묘사이다.
이 모든 것을 보면, 죽음에서 인간은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거룩하지 못한 부조리한 존재로 서 있음이 드러난다. 따라서 연옥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있으냐는 끝도 없는 논란은 조금은 터무니없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성경적 근거가 있다. 곧 하느님은 거룩하시나 인간은 그러지 못하고, 끊임없이 거룩하게 되려는 것이 믿는 이의 실존이며, 거룩하지 못한 인간은 하느님을 견딜 수 없다는 성경의 근본적 진술들이 바로 그 근거다. 이에 대해 성경은 수천 번도 넘게 말한다. 물론 모든 것을 규정하는 확실하고 정확한 개념과 신학 대사전에 나올 법한 교리적 정의를 보여 주는 성경 구절을 대라고 한다면, 연옥에 대한 그런 식의 구절은 성경에 없다.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죽음 부활 영원한 생명 바로 알기: 현대인을 위한 종말론 강의》Am Ende das Nichts? Über Auferstehung und ewiges Leben (72020), 김혁태 번역, 생활성서, 2022, p.234.

5. 기간

사후의 혼에 대해서 현세적 시간 개념을 그대로 쓸 수는 없지만, 흔히 유비적 의미에선 연옥을 시간 개념으로 설명한다.

현세 사람들이 기도하는 등 행위로 연옥 영혼들이 연옥에 있는 (유비적 의미에서) 기간을 단축할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9] 그 방법 중 대표적으로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부터 8일까지의 팔부첨례에 죽은 이의 무덤을 방문해서 그들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산티아고 같은 성지를 순례해서 대사를 받는 것이다. 이 대사는 자기 자신의 잠벌은 사할 수 없지만 연옥 영혼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본래 대사라는 것은 자신의 잠벌을 지우는 용도로도 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교회에서 선포한 주간에 일정한 과정을 통해 대사를 받거나 성지순례를 통한 대사는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단, 위령주간에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오로지 연옥 영혼을 위해 대사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외의 때에 얻은 전대사들 역시 마찬가지로 연옥 영혼들을 위해 양도한다고 기도함으로서 양도할 수 있다. 부분대사는 연옥 영혼들에게 양도가 불가능하며, 전대사만 연옥 영혼들에게 양도할 수 있다.

연옥에 머물며 잠벌을 씻는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파티마의 성모 발현 때 3명의 목격자들 중 한 명인 루치아가 일찍 죽은 지인(아멜리아)의 안부를 묻자, 성모 마리아는 "그 아이는 세상 끝날 때까지 연옥에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적 계시를 "이 사람은 마지막 때까지 무슨 일을 해도 연옥에서 못 나온다!"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루치아 수녀가 이 말을 성모 마리아에게 들었을 때는 1917년이었고, 이후에도 지금도 그녀를 위한 기도와 희생을 다른 신자들이 열심히 바쳐준다면, 교리적으로 최후의 심판 때보다 더 빨리 천국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현세의 사람들이 연옥의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를 정말정말 열심히 해준다면, 영혼들이 연옥에 머무르는 기간이 줄어든다고 한다. 실제로 전세계 가톨릭 교회에서는 연옥 영혼을 위한 위령 기도전구를 정말 많이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목적을 위한 소모임으로 본당마다 '위령회'(이른바 '연령회')라는 것이 있는데, 본당 신자가 사망하면 발인할 때까지 가서 기도해 주는 활동을 한다. 위에 어지간한 기도량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적어뒀지만, 없는 것보다는 확실히 낫다. 죽은 이를 위한 미사(이른바 '위령 미사') 역시 연옥 교리 덕에 생긴 것으로, 매년 기일마다 사망한 사람을 위해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그가 천국으로 가는 기간이 앞당겨진다는 것이다. 제사를 안 지내는 집안도 위령 미사만큼은 꼬박꼬박 바치는 경우가 많다. 2000년 사망한 김환성의 위령 미사가 [age(2000-01-0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봉헌되는 걸 보면, 천주교 신자들이 연옥과 위령 미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환성은 인기 연예인이었기에 팬들을 위한 추모의 형태도 적지 않아 있다.

6. 성경적 근거

가톨릭 교회에서 연옥에 대한 성경의 직접적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마카베오기 하권의 다음 대목이다.
다음 날, 장사 지내는 일이 시급해졌으므로, 유다와 그의 군사들은 전사자들의 주검을 거두어 조상들의 무덤에 친족들과 나란히 묻어 주려고 갔다.
그런데 죽은 자들마다 그 옷 속에서 율법으로 유다인들에게 금지된 얌니아 우상들의 패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전사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라는 사실이 모든 이에게 분명히 드러났다.
그들은 모두 숨겨진 일들을 드러내시는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의 방식을 찬양하였다.
또 그렇게 저질러진 죄를 완전히 용서해 달라고 탄원하며 간청하였다. 고결한 유다는 백성에게, 전사자들의 죄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을 눈으로 보았으니 죄를 멀리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런 다음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속죄의 제물을 바쳐 달라고 은 이천 드라크마를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는 부활을 생각하며 그토록 훌륭하고 숭고한 일을 하였다.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면,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쓸모없고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게 잠든 이들에게는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고 내다보았으니, 참으로 거룩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속죄를 한 것은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마카베오기 하권 (마카베오기 2권) 12장 39-45절

그런데 마카베오기 하권은 마르틴 루터종교개혁 당시에 개신교 성경에서 제외된 구약성경 경전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르틴 루터가 대사 논쟁에서 자기가 꿀릴까 봐 삭제했다는 의견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의견이다.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말씀이 적힌 유일한 종교적 교범으로 보았고,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인지 확인 불가한 출처가 부정확한 부분은 과감하게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2경전은 초대 교회 시절 히브리어 사본을 찾아내지 못했고, 불가타 라틴어역을 저술한 예로니모도 히브리어 사본이 없는 제2경전의 신뢰성에 의문을 가졌다. 이런 교부들의 불신을 반영해서 구약성서 목록을 재편성한 루터는 우선적으로 구약의 그리스어 부분인 제2경전을 위와 같은 이유로 외경으로 봤다.

사실 대사 논쟁이나 연옥 논쟁으로 마카베오기 하권이 가지는 위치는 가톨릭 내에서도 논쟁의 여지가 많다. 그 부분이 겨우 3절에 불과한 짧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 후 마르틴 루터는 2차적으로 신약성서의 재편을 주장했지만, 같은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와 비교할 때 출처가 분명하기 때문에 재편성을 하면 안된다. 그런 것은 이단자들이나 하는 짓이다"라는 소리를 듣고 포기했다. 이때 빼려고 했던 게 대표적으로 야고보서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루터가 종교 개혁을 감행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로마서의 말씀과 충돌되는 것처럼 보이는 선한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의 내용들 때문이었다.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 부르면서 야고보서 첫 장 전 설명에서 성경의 전체 맥락과 다르다며 주의를 요구했으나, 시간이 지나고 재판이 나오자 이런 설명을 아예 빼버렸다. 종교개혁 당시의 개신교는 종교개혁가들이 '부패했다' 믿던 가톨릭과는 다른, 순수한 그리스도 신앙으로써 꿈꾸는 무언가로 돌아가려는 열망이 지배적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그들 스스로도 무엇이 '순수한 신앙'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거나 입증하지는 못한 채, 그러한 열망은 일단 그리스도교 안에서 성경 외의 것들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었다. 사실 루터는 사도신경도 성경에 없기 때문에 예배에서 빼버리려고 고민하기도 했다.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은 기원전 3세기 70인역과 이후 유대인 랍비들의 얌니야 회의를 기준으로만 구약을 인정했기에, 20세기 초까지 제2경전은 가톨릭이 자신들의 종교적 정당화를 위해 첨부한 부분이라고 개신교와 유대교에게 까여왔다.[10]

그러나 히브리어 원본이 없는, 또는 시대상 마카베오서처럼 그리스어로 저술된 구약 제2경전 문헌은 헬레니즘 세계로 디아스포라된 여러 그리스어권 유대인 공동체들이 사용하고 형성시켜 온 것이었다. 70인역에서는 기존 히브리어로 있던 구약을 당시 지중해 세계 공용어인 헬라어로 번역했기에 사도 시대에도 신약에서 구약을 인용할 때 그리스어(헬라어) 구약을 인용했을 정도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리스어권 유대인 공동체라는 문화적 기반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사도행전이나 서간에서도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헬레니즘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에 터잡아 퍼져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들에게 '성경'이란 그리스어 구약이었던 셈이다. 이를 통하여 제2경전 내지 외경들은 그리스도교가 처음 형성될 때부터 그리스도교 안에 있었던 것이다.

사해문서에서 보듯이 제2경전들이 실제로 히브리 원본이 존재했을 가능성 자체는 있지만(마카베오서는 시대적으로 70인역 이후이니 논외) 다른 제2경전인 희년서, 에녹서까지 히브리어로 나와서 근거로 삼기에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희년서와 에녹서를 경독서로 사용한다. 사실 애초에 마카베오서는 히브리서 원본 유무와 별 상관이 없다. 개신교에서 정경으로 삼은 근거인 70인역은 기원전 300년쯤이고, 마카베오 시대는 그로부터 150여 년 후인 데다가 집필 시기는 기원전 60년대이다. 이건 히브리 원전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하게 인정하냐 마냐의 문제. 어쨌든 개신교 대부분이 이제 와서 제2경전을 정경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일부 교파에서 제2경전을 인정한다고 해서 무조건 연옥 및 유사 교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마카베오기에서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 말고도, 개신교에서도 정경으로 인정하는 신약성경에도 연옥에 대하여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될 만한 부분이 있다. 다만, 연옥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해석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기도 하다. 그중의 몇 구절을 통해 연옥이라는 개념을 옹호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오 복음 12장 32절

위의 마태오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말씀에 근거하여 유추해 보면, 내세에서도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 이것이 사후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가톨릭은 내세(연옥)에서 소죄를 다른 신자들의 전구나 자신의 벌로 용서받고 보속할 수 있다고 보지만, 이것이 그 신자의 구원 상태를 좌지우지하지는 않는다. 연옥에 가는 사람들은 쉽게 말해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며, 죽기 전에 모든 대죄를 용서받고(고해성사로) 떨쳐내거나 용서받지 못한 소죄+자신의 죄를 짓는 악습과 죄로 기우는 습성+이미 현세에 용서받았던 과거 대죄들의 못다한 보속을 연옥에서 모두 정화의 방식으로 벌 받는 것이다.

연옥은 구원(=천국행)이 확정된 신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오점이나 의롭지 못한 실수들에 대한 보속을 마저 치르는 상태와 장소를 말한다. 따라서, 가톨릭의 연옥 교리를 설명하며 연옥은 죽은 뒤의 제2의 구원 기회를 바라는 곳이라거나 하는 식의 설명을 하는 것은 오류이다.
죽은 이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죽은 이들이 전혀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습니까?
코린토 1서 15장 29절

위 구절은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교회를 향해 하는 말이다. 여기서 "죽은 이들을 위하여 받는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초대 교회 신자들이 죽은 이들을 위해 어떤 의식을 행했고, 또 바오로가 그 의식을 언급하면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가 그 죽은 이들을 위한 어떤 의식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보자. 코린토 1서 15장 전체를 읽어보면 오히려 바오로가 이 의식에 행하는 것에 대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 기초 위에 어떤 이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는다면, 심판 날에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저마다 한 일도 명백해질 것입니다. 그날은 불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한 일이 어떤 것인지 그 불이 가려낼 것입니다. 어떤 이가 그 기초 위에 지은 건물이 그대로 남으면 그는 삯을 받게 되고, 어떤 이가 그 기초 위에 지은 건물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입게 됩니다. 그 자신은 구원을 받겠지만 불 속에서 겨우 목숨을 건지듯 할 것입니다.
코린토 1서 3장 12-15절

코린토 서간의 이 구절도 연옥의 존재 유무를 지지하는 논거가 될 수 있다.

위의 성경 말씀들을 종합해 보자면, 우리가 (현실에서의 소원을 담아 기도를 드리는 것처럼) 죽은 자의 소죄(구원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 하느님 앞에서의 작은 죄악들)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보자면, 연옥이 유대인들로부터 이어받은 전통(아래의 "역사적 배경" 문단 참고)과 위에서 살펴본 성경 구절들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죽은 자들의 상황을 담아낼 개념으로서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다듬어져 형성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연옥"이 원래 그리스도교 안에서 논란이 많았던 주제이므로 개신교인들의 반론이 없진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전통을 통해 좀 더 진실에 다가가려는 토론은 바람직하지만, "내 성경 해석만이 옳으니 다른 해석은 잘못된 것"이라는 자세는 지양해야 한다.

7. 역사적 배경

연옥 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그들에게 유익하다'는 믿음과 그 전제가 되는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위에서 인용된 마카베오기 하권 12장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교가 존재하기 전부터 유대교(특히 바빌론 유수 이후의 유대교)에 널리 퍼져있었다.
바오로가 이런 말을 하자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중이 둘로 갈라졌다.
사실 사두가이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하고,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다 인정하였다.
사도행전 23장 7-8절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에도 부활이나 천사가 있다고 믿는 바리사이파와, 모세오경만을 인정해서 그런 게 없다고 믿는 사두가이파가 대립하여 서로 원수지간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당시 바리사이파가 믿었던 "부활"이 어떤 의미였을지를 생각해 보자. 당시 유대교에는 메시아가 고난을 받아 죽음을 당하고 부활한다는 개념은 없었으며, 동아시아/남아시아 종교에서 말하는 환생이나 윤회라는 개념도 없었다. 이들에게 부활은 내세에서의 죽은 자들의 부활이었다. 그리스도교는 이런 믿음을 유대교로부터 이어받았다.

그리고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어떤 식으로 죽은 이들에게 유익한지, 그리고 죽은 이들이 어떤 상태에 있길래 기도가 필요한지를 설명하기 위해 차츰 지금과 같은 개념으로서의 연옥 교리가 발전했다. 이는 5세기 초부터 발생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4세기까지는 역사적인 혼돈기로서, 그리스도교 전반에 종말론적 성향이 강하게 끼어있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의 심판이 곧 도래할 것이라 믿었고, '모 아니면 도',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이분법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5세기 무렵부턴 직전의 테살로니카 칙령으로 나타나듯 로마 제국 내 그리스도교, 특히 아리우스파 등의 이단을 몰아낸 정통인 가톨릭 교회의 국교로서의 위치가 안정되었는데, 한편으론 점차로, 비교적 세속적 태도를 버리지 못한 제국 내 신자들의 숫자도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교회는 기존의 이분법적 구원론에 관해서 일종의 중간값이라 할 수 있는 "분명 죄를 지었으나 지옥에 갈 만큼의 죄[11]까지는 아닌 이들''의 구원 여부에 대해서도 명확히 설명해야 할 당위성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기존의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에 대한 설명으로써 여겨져 오던 연옥 교리가 본격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곤 한다.

연옥 개념은 중세의 경제 발전 때문에 탄생했다는 이론도 있다.[12] 중세 시기 교회는 노동을 통해 돈을 벌지 않는 행위를 죄악시했는데, 특히 고리대금업이 대표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에 고리대금업자 이미지가 덧씌워진 반유대주의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유럽 중세 시기 경제 발전이 이뤄지면서 교회의 이러한 통제는 잘 되지 않았고, 교회는 언제부턴가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순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13] 자크 르 보프가 이런 타협의 일환으로 설정되었다고 보는 '연옥'이라는 공간은 내면적 회개를 중시하는 공간으로, 정죄가 끝나면 천국행을 보장받는 곳이었다. 금융업자들은 생전에 돈을 벌기 위해 저질렀던 자신의 잘못을 참회, 회개하고 재산을 교회에 기부하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자크 르 보프는 연옥이 자본가들에게 지옥을 면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기 때문에 연옥은 오히려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보았다.

8. 교부들의 관련 언급

"충실한 아내는 죽은 남편을 위하여 기도하며, 특히 그 기일에는 기도한다. 만일 이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허위로써 남편을 배신하고 버리는 사람이다."
테르툴리아누스(2세기), 《일부일처에 관하여》
"황제의 시체는 높은 관대(棺臺)에 안치되었고 하느님의 제관들과 군중은 눈물과 비애 속에서 그의 영혼의 안식을 위하여 기도와 제물을 봉헌하였다. 이는 황제의 평생소원의 성취이니, 그는 자기가 죽은 뒤 신자들이 모여 자기를 추억하며 기도하기 위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도들을 주보로 삼은 대성전을 건설하였다."
에우세비우스(3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생애》
"우리는 별세한 교황과 주교들을 기도 중에 기념한다. 이는 지극히 성스럽고 지고한 제례를 봉헌할 때 주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그들의 영혼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믿는 까닭이다."
예루살렘의 키릴로스(4세기)
"나의 형제들과 친구들이여,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부탁한다. (죽은 뒤에) 형제들이 기도하러 모이거든 부디 나를 잊지 말고 기억하여 주기를 바란다. 나의 시체에 향료를 바라 장례지내지 말라. 향료는 하느님께 바치고 죄 중에서 잉태된 나는 비애 속에 매장하라. 내게는 향액을 주지 말고 기도로 도와 달라. 죽은 자의 영혼은 산 성인의 기도로 큰 이익을 받는 법이다."
에프렘(4세기)
(그라티아누스 황제와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별세하였을 때)
"제 기도가 유효하다면 폐하는 행복할 것입니다. 제가 폐하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은 때가 없었으며, 모든 제례 중에 페하를 기억하였습니다."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별세하였을 때)
"주님, 주의 종 테오도시우스에게 성인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평안을 주소서. 그의 영혼이 죽음의 가시가 쏘지 않는 평안한 곳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내가 저를 사랑하였으니 천국에까지 저를 좇아가리이다. 내가 눈물과 기도로써 저를 우수와 비애가 없는 불사불멸의 주님의 산 위로 인도하기까지 저를 떠나지 않으리이다."
암브로시우스(4세기), 《Faith of Catholics》, Vol. Ⅲ., 176
"사도들이 지극히 거룩한 제사 중에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한 것은 실로 지당하다. 이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저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스(4세기), 《Faith of Catholics》, Vol. Ⅱ
(죽은 어머니를 위한 기도)
"내 마음의 하느님이시여, 내 어머니 죄를 위하여 주께 간구하옵나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상처의 구속 능력으로 말미암아 내 기도를 들어 주소서.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평안히 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또한 내 마음과 소리와 붓으로 봉사하는 나의 형제들로 하여금 이 기도문을 읽을 때마다 주님 제대 앞에서 주님의 종 모니카(그의 어머니)를 기념하도록 복돋아 주시옵소서."
아우구스티누스(4세기), 《고백록》

9. 비가톨릭 종파의 입장

9.1. 동방 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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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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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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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namu.wiki/thread/IllegalLazyNonstopSteam|토론]]을 통해 "정교회 예루살렘 시노드(1672)의 도시테오스 신앙고백과 칼리스토스 웨어 정교회 대주교의 인용을 삭제하지 않는다."로 합의되었습니다.''' 합의된 부분을 토론 없이 수정할 시 [[나무위키:기본방침/이용자 관리 방침#편집권 남용|편집권 남용]]으로 간주되어 제재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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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신자들은 지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할 의무가 있다고 확신하며, 죽은 이들이 그러한 기도로 도움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기도가 죽은 이들을 돕는 것인가? 죽음과 마지막 날의 육신 부활 사이의 기간 동안, 영혼들의 상태는 정확히 어떠할까? 이 지점에서 정교회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명료하진 않으며, 시대에 따라 다소간 변화가 있었다.[14]

17세기에는 표트르 모힐라Пётр Могила와 본인의 신앙고백에서의 도시테오스[15] 등 다수의 정교회 저술가들이 가톨릭의 연옥 교리 또는 그와 매우 유사한 것을 옹호했다. (통상적인 로마의 가르침에 따르면, 연옥의 영혼들은 속죄적인 고통을 겪으며, 이를 통해 자신들의 죄에 대한 '보속' 곧 '속량'을 바친다.)[16]

오늘날에는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정교회 신학자들이, 적어도 이런 형태의 연옥 개념은 거부한다. 다수파는 믿는 이들 중 죽은 이들은 전혀 고통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쪽으로 기울 것이다.
또 다른 학파는 어쩌면 그들이 고통받을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다 해도 그 고통은 속죄적인(expiatory) 성격이 아니라 정화적인(purificatory) 성격이라고 주장한다.[17] 왜냐하면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죽으면, 하느님께서는 그의 모든 죄를 값없이 용서하시고 어떠한 속죄적인 형벌도 요구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속량이자 보속이시다.[18]

그러나 세 번째 그룹은 이 문제 전체를 완전히 열어두기를 선호할 것이다. 그들은 "사후 세계에 대한 상세한 정식화를 피하고, 그 대신 경외심을 담은 불가지론적 침묵을 지키자"고 말한다.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께서 한때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고심하고 있을 때, 한 목소리가 그에게 들려와 이렇게 말했다. "안토니오, 너 자신이나 신경 쓰거라. 이것들은 하느님의 심판이니, 네가 알 바가 아니다."[19]
Kallistos Ware 대주교,[20] 'The Orthodox Church, Penguin Books, 1963, pp.259-260.

'연옥'이라는 단어가 가톨릭에서 흔히 나타나는 대중신심이나 문학적 표현에 따라 제 3의 장소를 의미한다면, 그런 의미의 연옥은 정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반대한다. 그러나 '연옥'이라는 단어가 가톨릭 교리 및 교의신학에서 말하는 제 3의 상태로 이해되는 한, 그런 의미의 연옥에 찬성할 수 있는지는 근현대 정교회에서도 시대와 학풍에 따라 다수론이 달랐다. 17세기에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상태'에 대한 설명에선 가톨릭과 동일한(유사한) 가르침이 유행했으며, 오늘날에는 과거보단 가톨릭과의 차이를 강조하는, 그러나 현대 가톨릭 신학이 강조하는 정화로서의 연옥 개념과 유사한 가르침이 공존하는, 경향을 보인다.

죽은 영혼이 천국에 다다르기 전 정화의 상태가 있다는 믿음은 가톨릭과 정교회 동서대분열 전부터 있었지만,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은 가톨릭과 정교회 사이에, 그리고 정교회 내부에 다양한 의견이 있었다. 15세기 서방에서 개최된 피렌체 공의회에서 에페소스의 마르코스(Μάρκος ο Ευγενικός) 주교는 교황수위권필리오케를 비롯한 서방 신학을 반대하면서 연옥에 대한 믿음 또한 거부하였다. 이런 경향은 17세기까지 이어졌다. 비록 표트르 모힐라Пётр Могила[21]가 가톨릭의 연옥과 동일한(혹은 매우 유사한) 견해를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정교회의 이야시 공의회에선 다수설이 연옥에 대한 반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66. 우리는 연옥의 불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22]
성경 어디에도 사후 영혼이 정화될 수 있는 일시적인 형벌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교회는 오리게네스의 이러한 견해를 정죄했습니다. 더욱이, 영혼이 한 번 세상을 떠나면 다시는 교회의 성사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영혼이 이생에서 지은 죄를 속죄할 수 있었기에, 같은 이유로 그곳에서 고백 성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 성사는 정통 교리에 어긋나므로, 교회는 그 영혼들을 위해 피 흘림 없는 희생을 바치고 기도를 바쳐 그들이 이생에 계속 사는 동안 지은 죄를 용서받도록 하는 것이 옳고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들이 단지 일시적으로 겪고 있는 형벌에서 구원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사후 영혼의 상태에 관해 어떤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들을 인정하거나 승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충분한 속죄를 하기 전에 죽음으로 인해 끌려가 구덩이와 물 속에서, 날카로운 가시로 고통을 받습니다. [23]
1642년 정교회 이야시Iași 공의회. Meletios Syrigos 편집,「표트르 모힐라의 신앙고백」 [24]

그러나 정교회 신학의 다수설은 17세기에 결국 가톨릭의 연옥 교리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견해로 기울었으며, 1672년 예루살렘 공의회에선 다음과 같은 선포를 하기에 이른다: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은 그들이 살았을 때의 행실에 따라 안식에 있거나 고통 중에 있다. 그러나 그들의 상태는 육신의 부활 때까지 완전하지 않을 것이다. 참회하는(μετανοήσαντες) 상태에서 죽었으나, 참회의 열매, 즉 보속(ἱκανοποίησις)을 맺지 못한 이들의 혼은 하데스로 내려가며(ἀπέρχεσθαι εἰς ᾄδου, 거기서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한다.[25]
그러나 그들은 사제들의 기도와 친지들의 자선을 통해, 특히 개인들이 세상을 떠난 친척들을 위해 바치고 또한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가 매일 모든 이를 위해 똑같이 바치는 피 없는 희생 제사를 통해(μαγάλα δυναμένης μάλιστα τῆς ἀναιμάκτου θυσίας) 구원받을 수 있다. 이 중간의 정화 상태로부터의 해방은 부활과 공심판 이전에 일어날 것이나, 그 시점은 알려져 있지 않다.[26]
[해설]비록 물질적 물리적 고통은 언급이 없고 연옥이라는 용어를 피하긴 했으나, 이는 본질적으로 로마교의Romish 연옥 교리이다.[27] ...... 동일한 교리가 필라레트러시아 대교리문답서(니케아 신경 제11조에 대한 부분)에서도 가르쳐진다. 희랍 교회가 로마교의 연옥을 거부한다고 자주 주장된다.(일반적으로 매우 정확한 Winer조차도 그렇게 주장한다). Winer는 Metrophanis Critopuli, c. 20을 인용하지만, 이 문헌은 교회의 권위를 가지지 않으며, 비록 '정화하는 불(πῦρ καθαρτήριον)'이라는 단어와 모든 물질적, 물리적 고통의 개념을 거부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 상태에서의 영적인 양심의 고통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 고통받는 이들은 기도와 제대에서의 희생제사를 통해 해방될 수 있다고 한다. The Conf. Orthodoxa(P. I. Qu. 66) 는 '영혼들의 일시적인 정화적(징벌적) 고통(πρόσκαιρος κόλασις καθαρτικὴ τῶν ψυχῶν)'에 대해 모호하게 말하고 있다. 로마 교회라고 해서 물질적인 불이 교리는 아니다.[28]

1672년 정교회 예루살렘(베들레헴) 공의회, 「도시테오스 신앙고백」 제18조[29]

반면, 오늘날 정교회에서는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인정하지만, 가톨릭 연옥 교리의 징벌적 요소는 거부하는 게 신학적 다수설이다.
● 모두가 부활할 때까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어떤 상태에 있게 되는가?

공심판의 시기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 상태에 있게 된다.
의로운 영혼들은 빛에 있게 되어 영원한 선한 것들을 미리 맛보며 쉬게 되고 불의한 영혼들은 그와는 반대인 상태에 놓이게 되어 영원한 고통을 미리 맛보게 되고 하느님과 멀리 떨어진 상태에 놓이게 된다.

● 죽은 이들의 영혼들이 죽음을 당한 후 중간 상태에서 선함과 고통을 맛보게 된다는데 성서 어디에서 그러한 것을 찾아볼 수가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와 라자로가 죽은 후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행복을 느끼고 있고 부자는 뜨거운 불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데서 찾아볼 수가 있다.(루가 16,19~31)
정교회 신앙의 신조 제11조 - 죽은 이들의 부활 중에서
앞 장에서 우리는 윤회를 믿는 이들에 대해 언급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도 이와 유사한 이론에 영향을 받아 purgatorium, 또는 연옥을 선포한다. 즉, 영혼이 순결해지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한 채 죄를 짊어지고 떠난 영혼이나, 고백성사로 죄는 사함 받았지만 그들에게 내려진 형벌의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영혼들은 사후에 연옥이라는 곳으로 간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그곳에서 윤리적 정화를 이루기 위한 나름의 일정기간의 형벌을 치른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의 이런 교의는 복음에 근거하지 않고 있다. 그 교의는 금을 제련하듯이 죽은 자들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불이 있다고 믿는 칼데아인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세계 제5차 공의회가 단죄했던 오리게네스의 유사한 가르침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밖에도 대 포티오스 성인이 "마테오포논(헛된 수고)"이라고 명명했던 단성론자이자 플라톤주의자였던 필로포노스(6세기 전반)의 이단적 가르침으로부터 따온 것이다. 따라서 정교회는 성서에 바탕을 두지 않은 로마 카톨릭의 이런 이론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울러 정교회가 이런 그들의 교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연옥에서 오직 영혼만이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생전에 죄를 짓는 도구로 이용되었던 육체는 사후에 썩고 분해되어 형벌을 면한다는 것인데 영혼에게만 내려지는 형벌은 하느님을 불의한 분으로 만든다.

2) 많은 사람들이 영옥을 거쳐 갈 거라는 희망 속에 두려움 없이 죄를 범하고 좀 더 쉽게 악을 행할 수 있다. 그들은 일시적인 그 과정을 거쳐 마침내 자신들의 죄가 깨끗이 씻겨질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3) 그들의 이런 이단적 가르침은, (이미 우리가 언급했듯이) 사후에 영혼이 한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로 옮겨 가는 것이 불가능하며 특히 거룩한 삶에 대한 투쟁이나 열망 없이는 아무도 영광의 관을 쓰지 못한다는 큰 진리를 왜곡한다. 어떻게 "믿음의 싸움"(디모테오전서 6:12)을 경시하고 비웃었던 사람에게 상이 내려질 수 있겠는가?

4) 연옥은 불경한 교의이다. 그것은 고백성사를 무력화한다. 왜냐하면 진실로 회개하고 영적 사제에게 죄를 고백했다면 비록 그에게 내려진 벌의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어도 그의 죄는 이미 사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벌은 ― 로마 카톨릭이 그들의 잣대로 주장하는 것처럼 ― 하느님의 정의를 만족시키는 "벌"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인간은 결코 하느님의 무한한 정의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죄를 고백하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벌은 따뜻한 아버지로서, 그리고 영적 체험이 풍부한 영적 아버지로서 신자가 열매를 제대로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제의 교육적인 조치요, 치료약이다. 사제는 고백자의 마음 상태나 진실성 그리고 신심에 따라 때론 그 벌을 경감하거나 늘이기도 하며 때로는 그 벌을 면제하기도 한다. 따라서 죄인이 진실 되게 고백하고 신심과 겸손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자비에 기대며 회개한다면 그는 죄를 용서받는다. 이것은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세 사람"(루가복음 18:14)에게 일어났으며, 주님께서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루가복음 19:9)고 말씀하셨던 자캐오에게도 일어났다. 또한 십자가위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루가복음 23:43)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심으로써 이 진리를 확인해주셨다.

5) 연옥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교의는 모독이며 용납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에 대해" 십자가 위에서 "단 한 번"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베드로전서 3:18, 히브리서 9:28 참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의 희생에 대한 효력을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주 예수 그리스도, 신인 구세주의 형용할 수 없는 무한한 희생의 가치를 감소시키고 불완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인의 죄를 손수 짊어지셨다. 그것은 당신의 이 무한한 가치를 지닌 선물을 받아들이길 원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우리 죄의 빚"을 모두 갚고도 남는다.

이단적 교의를 깊이 검증하면 할수록 그 교의가 불경하고 빈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마르코스 에브게니코스 성인은 페라라-플로렌디아의 위(僞) 공의회(1438-1439)에서 이런 이단적 교의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그곳에 참여했던 서방교회 대표들의 입을 봉쇄했다. 이처럼 정교인은 사후에 공심판이 오기 전에 잠든 이들을 일시적으로 벌하는 "연옥"의 교리를 "그와 관련하여 일언반구도 기록하지 않은 성서"의 정신에 따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니콜라오스 바실리아디스, 『죽음의 신비― 죽음과 부활에 대한 정교회의 신학』 pp. 423~426
정교회는 좀 더 복잡하다. 그들도 죽은 이들을 위한 간구의 기도를 바친다. 하지만 서방 교회의 연옥 교리가 말하는 응보적이고 징벌적인 측면은 거부한다. 정교회의 소극적인 태도는 결정적으로, 서방의 연옥 교리가 오리게네스의 '만유 회복설'과 연관이 있다고 보는 그들의 지속적인 의심 때문이었다. 연옥 교리를 둘러싼 서방 신학과 동방 신학 사이의 서로 다른 발전에 대해서는 G. Bätzing, Kirch im Werden 23-28을 보라.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죽음 부활 영원한 생명 바로 알기: 현대인을 위한 종말론 강의》Am Ende das Nichts? Über Auferstehung und ewiges Leben (72020), 김혁태 번역, 생활성서, 2022, p.393.
연옥에 대한 가톨릭의 가르침은 중세 때 동방 교회와 일치를 이끌어내고자 개체된 두 공의회에서 그 최종적인 형상을 찾아냈다. … 동방 교회는 중간 상태에 대해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구축한 견해를 고수했다. 그리하여 일치를 위해 개최된 리옹 공의회(1274)와 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서 연옥이 쟁점으로 등장했다. 그 차이점은 1백년 뒤 종교 개혁자들과 대결한 가운데 개최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드러난 차이점과는 물론 다른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사후의 벌과 보속에 대한 가르침은 거부했지만,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서방 교회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이는 기도와 자선, 선행을 비롯해 특히 그들을 위한 영성체에서도 이루어진다.
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 《종말론 Eschatologie》 259-260쪽

아무튼 현대 정교회 신학의 다수론이 가톨릭 신학에서 말하는 '정화로서의 고통'에 거리감을 표한다는 건 분명하다.

동시에, 이 차이점을 단순화해서 양측의 차이를 캐리커처화하는 것도 금물이다. (피렌체 공의회를 반대했던) 에페소의 마르코스 대주교 이후 정교회 신학에서 연옥에 대한 거부란 (가톨릭 연옥 교의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30] '사후정화'에 대한 거부가 아니었으며, 천국과 지옥이 아닌 제 3의 장소로서 연옥에 대한 인정 거부와 사후정화를 위하여 발생하는 형벌에 대한 거부로 특징지어진다. 현대에는 회개의 결실을 맺지 못한 자들이 극심한 감각적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을 완전히 거부하는 관점이 인기를 얻고 있다. [31] 그러나 어찌 되었든, 통속적인 수준의 가톨릭의 연옥론과 정교회의 연옥 거부론과 달리 두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의 선언들은 통속적인 견해들과 달리 극단적인 수준의 거리감을 보여주지 않는 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32]

정교회에서도 죽은 후 사람의 영혼이 어떤 '중간 상태(Intermediate state)'에 놓이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영혼이 아직 생전에 행한 선행이나 악행에 대해서 최종적인 심판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혼은 그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일시적 상태에 놓인다. 이 시기에 의로운 영혼은 낙원의 복됨을, 불의한 영혼은 지옥의 형벌을 미리 맛보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신자들이 죽은 이들을 위하여 추도식, 기도, 자선을 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가톨릭과 같으며, 그 근거 중 하나로 마카베오기 하권 12장 43절을 드는 것도 가톨릭과 같다. 양자는 의로운 영혼이라도 지은 죄가 없지 않다면 천국행이 지연된다는 것과 산 사람들이 죽은 이들의 지복을 앞당기기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유익하다는 두 가지 교리를 핵심으로 하고 있어 공통된다.

다만 정교회에선 이 중간 상태의 성격(징벌적 요소가 있는가 등)에 대해 가톨릭의 연옥과 같이 상세히 가르치는 공식적인 교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가톨릭의 연옥론에 대한 찬반도 역사와 학파에 따라 다양하게 형성되었다. 정교회에서는 단지 죽은 이를 위한 기도가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할 뿐, 그것이 정확히 어떻게 죽은 이에게 도움이 되는지는 교리로 확정 짓지 않고 그저 전승으로 말한다. 이에 대하여 델로니아(ΤΕΛΩΝΙΑ, 방벽)라는 전승이 있으며, 영어로는 'Aerial toll house'라 한다. 이 전승에 따르면 죽은 의로운 영혼이 하늘로 올라갈 때 일종의 관문을 거치며, 천사들이 의로운 영혼을 천상으로 받아들이려 할 때 대기권에서 악마들이 생전에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며 영혼들을 가로막는다고 한다. (정교회 신앙의 신조 제11조 참고)

9.2. 오리엔트 정교회

콥트 정교회 등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육체와 분리된 후, 다른 곳으로 간다고 본다. 의인(믿은 자)의 영혼은 낙원(ⲡⲁⲣⲁⲇⲓⲥⲟⲥ, Paradise)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며, 악인(믿지 않은 자)의 영혼은 하데스(ⲁⲙⲛⲧⲉ, Hades)에 보내진다고 본다.

여기서 낙원과 하데스는 죽음 이후 부활과 최후의 심판 전 인간의 상태를 묘사하는 '중간 상태'를 가리킨다. 단지 과도기적이거나 대기하는 단계일 뿐이며, 의인과 악인을 최종적으로 구분하는 시점은 아닌 것이다. 부활, 곧 심판의 날에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통한 구원을 받아들였는지 거부했는지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 이 때 악인은 최종적인 고통에 들어가고, 의인은 완전하고 최종적인 복된 상태에 들어간다(마태오 25:31-46; 요한 5:28-29). 그러나 이 대기 기간 동안 “주 안에서 죽은 이들”은 “복되다”고 인정받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머문다(묵시 14:4,13; 필립비 1:23; 요한 14:1,3; 루가 23:43).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초대를 고의적으로 거부한 이들에게는 두 번째 기회가 없다.

이러한 믿음은 루가 복음서 16장 19-31절에 나오는 부자와 라자로에 관한 이야기에 근거한다. 하데스에 여전히 있는 것으로 분명히 보이는 그 부자는 중간 상태에 있는 악인을 가리킨다. 그의 영혼은 살아 있었고, 완전히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고통 중에 있었다. 심판의 날에 하데스는 악인들을 내어줄 것이며, 그들은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져진다(묵시 20:13-14).

즉 하데스에 있는 영혼은 범죄를 저지르고 체포되어 보석금 없이 재판을 기다리며 감옥에 갇힌 사람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완전히 알고 있으며, 최종 심판에서 처형당할 것을 알면서 고통 속에 기다리고 있는 상태이다. 혹은 공부를 하지 않아 시험에서 매우 저조한 성적을 거둔 학생과 같다. 그는 합격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알면서, 성적 발표를 기다리는 고통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반대로 시험에서 훌륭히 잘 본 우수한 학생은, 발표를 기다리면서 평화와 기쁨 가운데 다가올 상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오리엔트 정교회 전통에서는, 산 자의 기도가 영혼에게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인정하기에 사후 세계가 완전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영혼이 더 나은 상태로 변화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는 연옥처럼 '사후 정화'라기보다는 영혼이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얻을 가능성을 뜻하는 것이다.

9.3. 개신교

연옥, 면죄, 성상 및 유물에 대한 예배와 숭배, 그리고 성인을 통한 기도에 관한 로마 교회의 교리는 어리석은 것이며, 헛되게 발명된 것이고, 성서에 전혀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적대하는 것이다.
성공회 39개 신조 제22조[33] 참고
연옥과 사죄의 우상과 유물에 경배하고 존중함과 성인의 이름으로 기도함에 관한 로마교도리는 허망하고 위조한 것이다. 성경에 빙거할 수 없을뿐더러 하나님의 말씀에 반항하는 것이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 장정> "종교의 강령" 제 14조[34][35]

성공회루터교회를 포함한 대다수의 개신교 교파들은 연옥과 같이 '죄를 씻는' 상태는 없다는 주장을 유지한다. 애초에 타인의 기도를 통해 벌이 사라진다, 벌을 줄여준다 등은 개신교에선 해괴한 소리로 취급한다. 사실 개신교에서 이토록 연옥을 배격하는 것은 종교개혁의 계기 중 큰 하나가 면죄부(대사)라는 연옥 교리의 큰 폐단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연옥에 대한 현대 성공회의 주류 입장은 적극적인 부정론보다는 불가지론적 입장에 가깝다. 물론 제3의 상태를 사실상 인정하는 일부 신학자들이나 신자들도 잠벌을 정화하는 상태로서의 가톨릭적 개념은 부정한다.

대다수 개신교 교단에서는 마카베오기를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마카베오기의 해당 구절이 연옥을 의미하지도 않는다고 본다.

해당 본문에서는 전사한 몇 사람이 우상숭배를 한 것으로 밝혀지자 마카베오와 부하들이 그들도 부활에 동참할 수 있도록 기도와 제사를 올린다. 그런데 이런 기도와 제사는 연옥에서 벗어나고자 함이 아니라, 모든 이가 똑같이 중간 상태에 있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육신의 부활을 얻기를 소망한 몇몇 사람이 아직 속죄받지 못한 죄가 있기 때문에, 이들도 다시 일어나(하늘에 가서가 아니라) 장차 임할 하느님 나라를 확실히 누리도록 하는 것을 소망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36]

개신교에서 마카베오기를 교리의 근거로서 인용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성서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며 나아가 최초의 70인역 자체에 마카베오기 등 제2경전으로 간주하는 문서가 포함되었는가라는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참고

또한 개신교에서는 가톨릭에서 연옥의 근거로 드는 베드로전서의 구절들을 이렇게 해석하며 연옥설에 반대한다. 그리고 고린토 전서 3장에 나오는 불 가운데서 받은 구원은 공적이 불에 타버려서 상급이 없다는 뜻이지 연옥에서 나와 구원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고 본다. 죽은 자들을 위해 받는 세례에 대해 나오는 고린토 전서 15장 29절 역시, 그런 것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지 그것에 대한 어떤 평가도 내리고 있지 않고, 만약 그것이 일반적인 교회 전통이었다면 우리가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받는다고 표현했을 것이기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연옥의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비약이 있다고 본다. 또한 개신교에서는 마태오 복음서 12장 32절에 나오는 성령을 거역한 사람은 내세에서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을, 단순히 죽어서는 죄를 용서받을 기회가 없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라고 해석하며, 죄를 용서받을 수도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비약이라고 본다.

또한 만약 연옥이 있다면 재림 때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천국으로 직행하는 사람, 잠벌이 남아 있어서 연옥에 가야 하는 사람, 지옥에 가야 하는 사람, 세 부류로 나뉘어야 공평한 것인데, 성경에는 이와 관련한 내용이 전혀 없고 가톨릭도 이런 주장을 하지는 않는 것을 근거로 들어 개신교에서 연옥설을 반대하기도 한다. 재림의 때에는 연옥에 안 가도 천국에 들어가는 데에 문제가 없다면, 그동안은 뭐하러 사람들이 연옥에 갔는지 의문이 남는다.

또한 개신교에서는 고린토 전서 11장 32절, 고린토 후서 12장 7절, 히브리서 12장 11절 등을 근거로 들어, 신자들이 받는 벌은 어디까지나 신앙적 유익을 위한 것이지, 연옥에 가야하는 근거가 되는 잠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아울러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그들에게 유익하다'는 믿음과 관련하여 죽은 신자를 위한 기도를 인정하는 성공회에서도 별세한 신자들을 위한 기도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도로 그들의 죄가 덜해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신자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듯이 그렇게 기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성찬례의 모든 과정 속에 지금까지 이 세상에 왔다가 돌아간 모든 신자들과도 함께 주님을 찬양하며 그 안에서 친교를 나누었다는 의미.[37]

다만 교파나 신학자에 따라서 정교회의 정화단계에 더 가까운 것을 믿기도 한다. 물론 정식 교리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교파나 신학자들에 따라 연옥과 비슷한 곳은 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천국이나 지옥에도 종류가 있어, 신앙과 선행, 혹은 악행의 수준에 따라 조금씩 다른 단계의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는 견해가 있기도 한데, 이 경우, 예수를 믿지는 않았지만 선행을 쌓은 사람인 경우에는 지옥 중에서 그나마 고통스럽지 않은 곳으로 간다든지, 예수를 믿었어도 딱히 특별하게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게 살았다면 천국에 가더라도 정말 특별할 게 없는 곳으로 간다는 식의 견해이다. 물론 이런 입장에서도 잠벌을 정화하는 상태로서의 가톨릭적 개념은 부정된다. 다른 견해로는,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지 않았던 지역이라면 일단 천국이나 지옥과 다른 임시 상태를 상정 가능하다는 견해도 있다.

10. 타 종교의 유사 개념

이슬람에서도 비슷한 개념이 있다. 이슬람교에 따르면 선인은 낙원에 가고, 악인은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하지만,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만큼의 무거운 죄를 짓지는 않은 인간은 일정 기간 동안 지옥에서 반성하고, 그 후 낙원으로 올라간다고 본다. 그래서 무슬림들도 죽은 자에 대한 기도를 꽤 자주 하는 편이다. 그러나 '수백만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을 학살한 히틀러스탈린과 빵 하나를 훔친 도둑'을 신의 '전지'의 속성을 겸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심판은 객관적이며 정의롭게 진행된다. 즉, 인간이 직접 경험하고 생각하고 듣는 것으로는 그것의 공평성, 실효성에 대해 말하거나 주장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덧붙여서 인간은 지식의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점을 우려해보면 옳다, 옳지 못하다로 나누기엔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선 "낙원(천국)과 지옥은 단계가 나뉘어 있다"고 함으로써 불공평성에 대한 의문증을 어느 정도 해소하기도 한다.

11. 창작물

  • 천국과 지옥에 비해 개념도 애매모호하고 인지도도 없다보니 다룬 작품도 드물다. 연옥을 소재로 한 작품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단테신곡 연옥편이 있으나 지옥편에 비해서는 인지도가 훨씬 적다. 물론 천국편에 비해서는 인지도가 있다.
  • AVGN이 상당히 자주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이기도 하다. 게임 오류 등으로 스테이지가 끝날 방법이 없을 때 고통에 겨워 내지르는 단어 중 림보와 함께 매우 높은 빈도로 등장.
  • 귀멸의 칼날에 등장하는 염주 렌고쿠 쿄쥬로가 소속된 가문의 이름이자 전집중 호흡 기술 중 화염의 호흡 제9형의 이름이다. 오의인만큼 화염의 호흡 최고의 품새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으며, 극장판에선 용의 형상을 띈 검기 연출이 추가되었다. 아카자와 대치 후반에 쿄쥬로가 이 기술을 시전하는데, 거대 불기둥을 칼날로부터 휘두르는 수준으로 묘사된다. 한마디로 궁극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자의 좌반신을 깎아내는 수준에 그쳤다.[38] 외전에서 쿄쥬로 본인의 독백으로 '내 이름을 본떠서 만든 형.'이라 언급했으므로 기유의 잔잔한 물결처럼 직접 만들어낸 기술일 가능성이 높다.
  • 궤적 시리즈 에선 일반적으로 죽게되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간다 라고 하지만 악인들은 죽으면 연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때문에 이 작품에서 악인이 죽을때는 '연옥에서 기다리겠다' 혹은 '연옥에서 지켜보겠다' 같은 말을 하곤 한다. 대충 지옥과 같은 늬앙스라는 느낌. 다만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불분명한데 하늘의 궤적 3rd의 환영의 나라에서 케빈이 처리한 이단이나 악행을 행한 자들이 고통받는 연옥이 등장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케빈의 심상을 구현한 것에 지나지 않았고, 여의 궤적에선 제라르 당테스가 '연옥조차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정작 제라르는 죽은지 얼마안가 불사자로 부활했기 때문에 정말 존재하지 않는지는 알 수 없다. 영혼은 분명히 존재하고 환생이란 개념도 존재하면서 묘하게 사후세계 만큼은 애매하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1] 애초에 신학적으로 엄밀하게 보자면 천국도 지옥도 '장소'가 아닌 '상태'의 개념인데, 여기서 연옥만 콕 집어서 '장소'라 하면 누구나 어색함을 간파할 것이다.[2] "'연옥'은 어떤 장소가 아니다. … 그리스도교 신학이 말하는 정화(연옥)는 하나의 '사건'이지 장소가 아니다."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죽음 부활 영원한 생명 바로 알기: 현대인을 위한 종말론 강의》Am Ende das Nichts? Über Auferstehung und ewiges Leben (72020), 김혁태 번역, 생활성서, 2022, p.235.)[3] 하느님을 저버리는 중대한 죄.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4] 가톨릭에서는 죄와 벌을 논리적으로 구별한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었더라도(이를 전통적으로 '죄의 용서'라 한다) 죄 자체가 초래한 부정적 결과를 정화할 의무는 사람에게 남기 때문이다.(이를 전통적으로 '잠시적 벌', 곧 '잠벌'이라 한다) 만일 이 보응을 다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면 연옥으로 남은 정화를 마저 하고 나서야 천국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5]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며 대죄 중에 있지 않은 상태.[6] 즉 소죄(대죄에 대비되는, 죄이기는 하나 지옥에 갈 정도는 아닌 죄)와 잠벌이 남아 있는[7] 다소 엄밀하지 못하게는 지옥을 '영원'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교리서에서도 쓰는 표현이니 틀린 건 아니지만, 신학에서는 하느님 및 천국의 '영원함'과 지옥의 '영구함'(끝없음)을 구별한다.[8] 연옥 교리가 그리스도교 안팎을 막론하고, 심지어 가톨릭 신자들에게마저도, 자주 오해를 받는 건 소위 '제3의 상태'라는 연옥이 천국에 앞서 일어나는 정화 개념이라는 걸 주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최종결과는 ㄱ. '하느님과의 지복직관', ㄴ. '하느님과의 영원한 단절' 단 2개의 극단적 이분법 밖에 없다. 이 교리는 가톨릭이든 정교회이든 개신교이든 그 어디서도 예외란 없다. 연옥은 (고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톨릭 신학에서) 오직 ㄱ에 앞서 인간에게 스쳐지나가는 과정으로 묘사될 뿐이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연옥 교리란 바로 다음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천국에 갈 정도의 훌륭한 사람이 사후에 하느님을 마주본다면 자신이 저지른 죄에 그 어떤 아픔도 느끼지 않는단 말일까?"[9] 어찌 보면,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이 선행을 많이 베풀었어도, 그걸 아는 사람이나 친한 사람이 많지 않다면 기도해줄 사람이 당연히 많지 않을 테니 단축기간도 짧을 것이다.[10] 정교회의 경우 특정한 구약 정경목록에 대한 범정교회 차원의 합의된 교리는 없다. 다만 히브리 성경보다 넓은 구약 정경목록들이 고대의 지역 시노드들에서 공인되었고 이 시노드들이 동서방에서 이단 시비 없이 친교 안에 받아들여졌기에, "히브리 성경보다 넓은 구약 정경 목록들이 최소한 이단은 아니다"라는 소극적 안전장치가 있을 뿐이다. 또한 제2경전이 히브리 성경과 권위가 같은지 여부에 대해서도 방법론적 합의는 없다.[11] 죽을 죄, 요한 1서 5,16-17[12] 자크 르 고프의 <연옥의 탄생>.[13] 물론 교회의 입장은 연옥은 중세에 새로 만들어진 교리가 아니라, (니케아 공의회 이전의 삼위일체론처럼) 이미 교회에서 인식되던 것이 중세에 명료화되었다는 것이다.[14] Orthodox are convinced that Christians here on earth have a duty to pray for the departed, and they are confident that the dead are helped by such prayers. But precisely in what way do our prayers help the dead? What exactly is the condition of souls in the period between death and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t the Last Day? Here Orthodox teaching is not entirely clear, and has varied somewhat at different times.[15] 발췌자 주석: 정교회 예루살렘 총대주교(1669~1707). 1672년 예루살렘 시노드를 개최하여 여기서 후술할 〈도시테오스 신앙고백〉The Confession of Dositheus이 나왔다.[16] In the seventeenth century a number of Orthodox writers — most notably Peter of Moghila and Dositheus in his Confession - upheld the Roman Catholic doctrine of Purgatory, or something very close to it.' (According to the normal Roman teaching, souls in Purgatory undergo expiatory suffering, and so render 'satisfaction' or 'atonement' for their sins.)[17] (발췌자 주석) 이 부분은 현대 가톨릭 신학과 매우 유사한 가르침이다. 현대 가톨릭 신학에서는 연옥의 속죄적인 점을 부정하지 않는단 점에서 정교회의 해당 학파와 차이가 있으나, 연옥(라틴어: purgatorium)이 근본적으로 정화(라틴어:purgatorium)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 고통 역시도 정화에 수반되는 과정으로 본다.[18] Today most if not all Orthodox theologians reject the idea of Purgatory, at any rate in this form. The majority would be inclined to say that the faithful departed do not suffer at all.
Another school holds that perhaps they suffer, but, if so, their suffering is of a purificatory but not an expiatory character; for when a man dies in the grace of God, then God freely forgives him all his sins and demands no expiatory penalties: Christ,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is our only atonement and satisfaction.
[19] Yet a third group would prefer to leave the whole question entirely open : let us avoid detailed formulation about the life after death, they say, and preserve instead a reverent and agnostic reticence. When Saint Antony of Egypt was once worrying about divine providence, a voice came to him, saying: 'Antony, attend to yourself; for these are the judgements of God, and it is not for you to know them?'[20] 정교회의 영국인 대주교. 본래 성공회 신자였으나 정교회로 개종하여 대주교가 되었다.[21] 키예프 및 전 루스의 총대주교(1633–1646). 오늘날 러시아 정교회 및 우크라이나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공경되고 있다.(축일: 1월 1일)[22] What are we to think of the fire of purgatory?[23] It is nowhere taught in the Holy Scriptures that there is any temporary punishment, whereby the soul, after death, may be purged. On the contrary, the Church, in the second Council of Constantinople, did condemn Origen for this very opinion. Moreover, it is evident that the soul, when once departed, cannot again become a partaker of the Sacraments of the Church. Could this be, that the Soul could satisfy there for sins committed in this life, then, by like reason, it might partake of the sacraments of penance there; which being contrary to orthodox doctrine, the Church rightly and wisely offers the unbloody sacrifice for those souls, together with her prayers, that they may be forgiven those things wherein they had offended, whilst they continued in this life: And not that they might be delivered from any punishment that they were then suffering for a time only. Our Church doth not admit or approve of such fables as some men have fancied concerning the state of souls after death; as that they are tormented in pits and waters, and with sharp prongs, when they are snatched away by death before they can have done sufficient penance for their faults.[24] 해당 본문은 이 웹사이트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https://maksimologija.org/mogila-orthodox-confession/ 제목이 오해를 부를 수 있는데, 해당 편집본「표트르 모힐라의 신앙고백」은 위에서 소개한 표트르 모힐라의 친 라틴신학적 성격에 광범위한 수정을 가한 텍스트로, 당시에 모힐라에 대한 반대 주장이 있었다는 근거이지 모힐라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텍스트는 아니다. "모힐라 자신은 이러한 수정들에 동의하지 않았다Moghila himself was displeased by these changes."참고: 표트르 모힐라에 대한 Ware 대주교의 아티클[25] The souls of the departed are either at rest or in torment, according to their conduct in life; but their condition will not be perfect till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The souls of those who die in a state of penitence (μετανοήσαντες), without having brought forth fruits of repentance, or satisfactions (ἱκανοποίησις), depart into Hades (ἀπέρχεσθαι εἰς ᾄδου), and there they must suffer the punishment for their sins;[26] but they may be delivered by the prayers of the priests and the alms of their kindred, especially by the unbloody sacrifice of the mass (μαγάλα δυναμένης μάλιστα τῆς ἀναιμάκτου θυσίας), which individuals offer for their departed relatives, and which the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daily offers for all alike. The liberation from this intervening state of purification will take place before the resurrection and the general judgment, but the time is unknown.[27] This is essentially the Romish doctrine of purgatory, although the term is avoided, and nothing is said of material or physical torments.[28] The same doctrine is taught in the Longer Russian Catechism of Philaret (on the 11th article of the Nicene Creed). It is often asserted (even by Winer, who is generally very accurate, Symb. pp. 158, 159) that the Greek Church rejects the Romish purgatory. Winer quotes the Conf. Metrophanis Critopuli, c. 20; but this has no ecclesiastical authority, and, although it rejects the word πῦρ καθαρτήριον (ignis purgatoris), and all idea of material or physical pain (τὴν ἐκείνων ποινὴν μὴ ὑλικὴν εἶναι, εἴτους ὀργανικήν, μὴ διὰ πυρός, μήτε δἰ ἄλλης ὕλης), it asserts, nevertheless, a spiritual pain of conscience in the middle state (ἀλλὰ διὰ θλίψεως καὶ ἀνίας τῆς συνειδήσεως), from which the sufferers may be released by prayers and the sacrifice of the altar. The Conf. Orthodoxa (P. I. Qu. 66) speaks vaguely of a πρόσκαιρος κόλασις καθαρτικὴ τῶν ψυχῶν, 'a temporary purifying (disciplinary) punishment of the souls.' The Roman Church, on her part, does not require belief in a material fire[29] Philip Schaff,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ume I. The History of Creeds.로부터 중역. 해당 본문은 인터넷에서 무료 열람 가능하다. 해설은 그 자신이 신학자이자 교회사가였던 Schaff의 서술을 그대로 번역했다.[30] 위에서 소개한 가톨릭 전통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가톨릭 연옥론에서 말하는 연옥의 소위 '고통'은 하느님을 마주함으로서 얻는 정화와 거기서 나오는 부끄러움으로 인한 진정한 의미의 자기객관화에 가깝다. 곧, 정교회 신학이 '사후 정화는 고통이 아니다'로 표현함으로써 의도하는 바로 그 의미가 가톨릭 신학에선 '아픔 동시에 기쁨'으로 표현된 것이다.[31] 이는 정교회 세계가 겪은 역사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후기 중세 정교회는 비잔티움 황제들의 동서교회 통합론에 맞서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반서방적인 성격을 가졌다.(예: 에페소스의 마르코스) 반면 근대 초에는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동방에도 개신교의 선교와 학풍이 서서히 밀려오고 있었고, 개신교에 대한 반박 논리가 정립되어있지 않았던 당시 정교회는 상당수의 논증을 가톨릭으로부터 차용했고, 그래서 근대 초 가톨릭의 언어를 이용한 신학이 발달하게 된다. 그렇기에 초기 근대 정교회 신학은 너무 서방스러워서 정교 정체성이 위기에 처했다는 평가를 정교회내의 반서방주의자들로부터 받았다.
한편 20세기 초 정교회는 러시아 혁명이라는 재앙을 맞아 서유럽(특히 프랑스)에 대규모의 러시아인 디아스포라를 형성했고, 이러한 러시아인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서방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동서방의 차이를 의식적으로 부각하는 신학이 발달하게 된다.(예: 블라디미르 로스키) 이 학풍을 '파리 학파'(Paris School)라 부르며, 현대 정교회 신학의 한 조류를 이루는 학풍이다. 근대 초 정교회 신학과는 반대로, 파리 학파는 정교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해 서방 신학을 지나치게 적대적으로 캐리커처화했다는 비판을 듣고 범 정교회 공의회(예루살렘, 이야시)의 교리선언에 대한 가치를 낮게 보았다는 문제점을 가진다.
[32] 다시 말해서, '제3의 상태'에 대한 양 교회의 믿음은, (양측의 다른 모든 차이가 그러하듯이) '믿음'이라는 말을 엄밀한 의미에서 이해하는 한 (곧 시대에 따라 변하는 신학적 다수설이나 대중신심이 아닌, 공적 선언과 전체 교회의 수용에 의한 교리로 이해하는 한) 상호 모순이 없다. 그러나 이 상호 모순이 없는 (엄밀한 의미의)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 양측이 역사적으로 발전시킨 서로 다른 어휘와 논증, 이에 뒤따르는 대중신심들에서는 긴장이 확인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양측 차이가 그러하듯이.[33] 현대 성공회는 이 교리에 대해 굳이 설명하거나 믿을 교리로 받아들이지 않으나 공식적(원론적)으로는 연옥을 인정하지 않는다.[34] 기감 공식 사이트[35] 사실 감리회의 신조는 성공회 39개 신조를 일부 계수한 것이라 위의 성공회 신조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36] 톰 라이트, '톰 라이트 죽음 이후를 말하다', IVP, 2017, 53-54p[37] 톰 라이트, 위의 책 및 참고[38] 하지만 방어에 특화된 물의 호흡, 그 중에서도 뛰어난 품새이며 아무리 일륜도가 부러져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고는 해도 수주인 기유가 사용하는 잔잔한 물결을 뚫어버린 그 아카자다. 거기다 상현부터는 신체 능력이 하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상승하는데다 아카자는 요 몇백 년간 맨몸 격투를 주로 해왔으니 몸의 내구도가 더 강할 수밖에 없다. 반점을 발현한 상태였던 탄지로와 기유를 상대로도 잠시 밀렸을 뿐 금방 적응하고 압도했다. 이후 탄지로가 내비치는 세계를 각성하고 나서야 아카자의 목을 베었다. 그런 즉 거의 놀아주듯이 즐기면서 싸움에 임했다고 해도 상현 3인 만큼 내구성이나 방어력, 전투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난 아카자를 반점과 혁도 없이 아카자의 좌반신을 깎아내고, 마지막에는 목까지 반쯤은 깎아내는 모습을 보면 귀살대 상위권으로서의 강함을 충분히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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