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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왕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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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
2.1. 시아파의 분열과 이스마일파의 등장2.2. 이스마일파의 교세 확장2.3. 카르마트파의 분열과 그 여파
3. 건국과 확장
3.1.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개종3.2. 파티미야 혁명: 아글라브 이프리키야의 전복3.3. 칼리파 체제 성립3.4. 후우마이야 왕조와의 경쟁3.5. 반란 진압
4. 전성기
4.1. 이집트 · 팔레스타인 정복4.2. 카이로 건설과 수도 이전4.3. 시리아 전역4.4. 마그레브의 지리 왕조4.5. 알 하킴의 치세
5. 쇠퇴
5.1. 영토 상실과 봉신국들의 독립5.2. 바드르 알 자말리의 집권과 잠시동안의 중흥5.3. 망국의 길
6. 멸망

1. 개요


파티마 왕조의 역사를 서술하는 문서.

2. 배경

2.1. 시아파의 분열과 이스마일파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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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파우마이야 왕조아바스 왕조와 같은 보편 수니파 칼리파들을, 이른바 '찬탈자'로 여겨 이들의 통치를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들은 오직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후손들만이 진정으로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나중에 그들의 추종자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여긴 후세인 이븐 알리를 거쳐 통해 이맘(imām)[1]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나타났다. 동시에,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진정한 이슬람의 정의와 전통을 회복하고 종말의 시대에 나타난다는 마흐디(mahdī)[2]의 출현에 관한 종말론적인 예언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민중들은 이 인물이 시아파이자 알리의 후손일 것으로 여겼다. 그뒤 이러한 믿음은 시아파들 사이에서 그들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가 되었고, 죽거나 처형당한 몇몇 시아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어,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약속된 날에 반드시 돌아오거나 죽음에서 부활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전통은 6번째 이맘인 자파르 앗 사디크의 계승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사디크는 본래 장남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일찍 요절해버려 765년 자파르 앗 사디크가 임종을 맞이할 즈음에 7대 이맘의 자리는 공석으로 놓여져 있었다.[3] 대부분은 앗 사디크의 아들 무사 알 카짐을 새로운 이맘으로 추대하면서, 874년에 11대 이맘 하산 알 아스카리의 후계자인 12대 이맘이 자취를 감춘 이후 언젠가 그가 마흐디(구세주)로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추종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가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그나 그의 후손들을 또 다른 마흐디로 여겨 그의 귀환을 고대하게 되었다. 전자는 훗날 "12이맘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자는 "7이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7번째 이맘의 정확한 신원은 논란이 되었지만, 대체로 9세기 후반까지는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아들이자 자파르 앗 사디크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로 여겨졌다. 파티마 칼리파국을 건국한 세력은 이 중에서도 7이맘파의 교리를 광신적으로 추종하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일의 이름을 따서 "이스마일파"라고 칭해졌다. 아바스 왕조의 시아파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스마일파의 이맘들은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이들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히 하룬 알 라시드(786~809)의 통치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이스마일파의 행적은 더더욱 모호해졌다.

2.2. 이스마일파의 교세 확장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은 아바스 당국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신자들을 모으면서 이스마일파의 세를 늘려 나갔다. 특히 그는 나중에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고 "다이(daʿwa, (초대/부름)"라는 선교사들을 각지에 파견하면서 그의 귀환을 준비하고 대표할 몇몇 인물들을 선별했다. 이 비밀 연락망의 우두머리는 이맘의 실존 여부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 소위 "훗자(ḥujja)"라고 불렸다. 최초로 알려진 훗자는 시리아 사막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 살라미야에 정착한 후제스탄 출신의 부유한 아랍 상인 압둘라 알 아크바르였다. 곧 살라미야는 이스마일파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아들과 손자들은 이스마일파의 선교에 있어 이를 담당하는 주요 원로가 되었다.

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이스마일파는 사마라의 혼란기로 인한 아바스조의 통치력 붕괴와 이어지는 잔즈 반란으로 수니파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그들의 지도력에 대한 침묵주의와 12번째 이맘의 실종에 대한 12이맘파 신자들의 불만을 이용하며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함단 카르마트 및 이븐 하우샤브와 같은 일부 선교사들은 870년대 후반에 쿠파의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예멘(882)과 인도(884), 바레인(889), 페르시아, 마그레브(893)로 비밀 연락망을 구축하면서 이스마일파의 교세를 확산시켰다.

2.3. 카르마트파의 분열과 그 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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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9년, 압둘라 알 아크바르의 증손자였던 압둘라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이스마일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보수적이었던 기존 교리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그와 그의 조상들이 더 이상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에 대한 "훗자"가 아니라 알리의 혈통을 이은 정당한 이맘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주장하였으며, 그 자신은 또한 민중들에게 재림이 기대되었던 마흐디였다고 설명하며 스스로를 드러냈다.[4]

압둘라의 이러한 주장은 이스마일파에 균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의 이스마일파 공동체는 알 후세인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나 몇몇 선교사들, 특히 이스마일파 선교에 열성적이었던 함단 카르마트와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스마일파 본래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아라비아 동부(알아흐사)에 정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고, 훗날 "카르마트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902년에서 903년 사이에 친 이스마일파 충성파들이 시리아에서 대규모 봉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바스 왕조가 예상 외로 신속하게 대응하여 반란이 금방 진압되자, 압둘라는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 그리고 마침내 마그레브로 피신하였다. 그곳은 이스마일파의 선교사들 중 한명이었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쿠타마 베르베르족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대거 이스마일파로 개종시키는 등 일련의 진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약 8개월 동안 북아프리카를 횡단한 압둘라는 904~905년 사이에 카와리지파를 신봉하던 현지 미드라르 왕조 치하의 시질마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이프리키야의 혁명을 지켜보았다.

3. 건국과 확장

3.1.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개종

파티마 왕조가 설립되기 전에, 이프리키야를 포함하여 마그레브(북아프리카)의 상당 부분은 명목상으로는 아바스 왕조의 봉신국이었으나 사실상은 독립적으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랍계 왕조 아글라브 토후국의 지배 하에 있었다. 893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는 오늘날 알제리 북서부 밀라 근처의 익잔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그곳에 있던 쿠타마 베르베르족의 분파 바누 사크탄에게 마그레브에서는 최초로 시아파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글라브 당국의 집요한 탄압과 다른 쿠타마 베르베르족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익잔을 떠나 타즈루트(밀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부족인 바누 가슈만에게로 갔다. 거기서부터 그는 새로운 선교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스마일파에 대한 지지를 쌓아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적인 쿠타마 부족과 인근 도시(밀라, 세티프, 빌리즈마)의 아랍 토후들이 함께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했으나, 알 쉬이는 그들이 채 뭉치기도 전에 우호적인 쿠타마 부족들과 함께 진격하여 저항 세력을 분쇄했다. 이 첫 승리는 알 쉬이와 그의 쿠타마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마일파 선교에 대해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후 2년 동안 알 쉬이는 언변 혹은 무력을 통해 대부분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켰으며, 이를 바탕으로 아글라브 토후국 통제 하의 주요 도시 거점들을 제외한 마그레브 대부분의 시골 지역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타즈루트에 기반을 둔 이스마일 시아파 신정국가를 설립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이전 이스마일파 선교 네트워크와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지만, 어느정도는 현지의 쿠타마 베르베르족을 감안하여 그들의 부족 구조에 맞게 변화시켰다. 알 쉬이는 당시 북아프리카로 피신해온 압둘라과 자주 접촉하면서, 이슬람 통치자의 역할 중에서도 '선교와 교화'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울리야 알라(Awliya' Allah, 하나님의 친구)"라고 알려진 선교를 계속했으며 그들을 이스마일파의 교리로 인도했다.

3.2. 파티미야 혁명: 아글라브 이프리키야의 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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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튀니지 아글라브 조.png
아글라브 왕조 멸망전

서기 900년 무렵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토후국은 혼란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베르베르인들은 발라즈마에서 아랍인들을 학살하고 튀니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아글라브 당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반란은 902년, 아글라브 군대가 나푸사 산에서 카와리지파 베르베르 군대를 분쇄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그 직후에도 불안한 움직임이 계속 감지되었다.

902년, 아글라브 아미르 이브라힘 2세가 시칠리아를 원정하는 틈을 타서 알 쉬이는 콩스탕틴 인근의 밀라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의 아글라브 패권에 처음으로 도전했다. 이 소식은 카이로완의 아글라브 당국에게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같은 해 10월 그들은 12,00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알 쉬이의 군대는 이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는데, 두 번의 패배 끝에 그들은 타즈루트를 탈출하여 익잔으로 피신했다. 곧 익잔은 파티미야 혁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알 쉬이는 선교사와 첩자들로 구성된 이스마일파의 비밀 네트워크를 다시 구축했다.

이브라힘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르다 902년 10월에 사망했으며 압둘라 2세가 그 뒤를 이었다. 903년 초 압둘라 2세는 익잔의 쿠타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 다른 원정을 시작했지만, 때마침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903년 7월 27일 압둘라 2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지야다트 알라 3세가 튀니스에서 권력을 잡았으나, 내전으로 지리멸렬해진 아글라브 정부는 이스마일파의 세력화에 대한 조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다. 기회를 포착한 알 쉬이는 휘하의 베르베르 군대를 보내어 밀라를 탈환하고, 이듬해 10월이나 11월까지 또 다른 요새 도시인 세티프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훗날 파티마 왕조로 발전할 이스마일파 국가의 초석이 이때부터 놓여진 것이었다.

90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세 번째로 토벌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카유나에서 쿠타마 군대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아글라브 장군은 급히 도망쳐야 했으며 쿠타마인들은 수많은 전리품을 얻을 수 있었다. 혁명군의 승리는 906년 3월 무들리 이븐 자카리야 휘하 아글라브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이 군사 반란은 아글라브 이프리키야 국가가 붕괴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조직된 네번째 토벌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알 쉬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친아글라브측 쿠타마 부족장들이 피신해 있던 요새도시 투브나를 점령하였다. 투브나는 일대의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아글라브조의 핵심 군사 요충지였기에, 이곳이 함락된 것은 혁명에 큰 의의가 되었다.

한편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날이 갈수록 증가하는 반란군의 위협에 대응하여 그의 궁정을 튀니스에서 카이로완 인근의 궁전 도시 라카다로 이전시켰으며 그곳을 요새화했다. 907년에 쿠타마 군대는 발라즈마, 바가야, 티지스 요새를 잇달아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아글라브 조는 동부 알제리 고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였다. 이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반혁명 선전을 강화하고 병력을 모두 집결시키면서 카이로완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907~908년 사이의 겨울을 그의 군대와 함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 아르부스에서 보냈으며, 북부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곳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1년 동안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로 공방을 주고받으며 지지부진한 전황을 이어갔다. 다만 908년부터 909년까지 알 쉬이 측이 튀니지 남부(초텔 제리드)를 휩쓸고 투주르, 나프타, 가프사를 함락시킨 것만이 유일한 성과였다.

그러나 혁명이 성공해가는 과정을 지켜본 베르베르 부족들이 알 쉬이 측에 계속 합류함에 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반란군은 엄청난 규모로 팽창해갔던 반면에 아글라브 측은 그러지 못했다. 알 쉬이는 마침내 909년 2월 25일 20만의 군대를 이끌고 익잔에서 출병하였으며 그해 3월 18일에 알 아르부스 인근에서 왕공 이브라힘이 이끄는 아글라브 군대와 만났다. 전투는 오후까지 계속되었는데, 쿠타마 기병대가 전장을 우회하여 아글라브 군대의 측면을 공격하면서 혁명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패배 소식이 라카다에 전해지자 지야다트 알라 3세는 귀중한 보물들만을 챙기고는 이집트로 도주하였다. 이에 카이로완 시민들은 버려진 라카다 궁전을 약탈하고 최후까지 저항하라는 이브라힘의 명령에 반발을 숨기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알 쉬이는 3월 24일 쿠타마 선발대를 보내어 라카다를 확보하도록 했으며, 그 다음날에는 자신이 직접 당도하여 이곳을 마흐디 국가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였다.

3.3. 칼리파 체제 성립

라카다를 점령한 직후, 알 쉬이는 아글라브 왕조의 관료제 상당 부분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전임자들의 궁정에서 일하던 관리들이 새 정권을 위해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는 '주군'의 부재를 대신하여 새로운 이스마일 시아파 정권을 설립했고, 잠시 동안만 그 정권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곧 군대를 이끌고 서쪽의 시질마사로 가서 압둘라를 영접하고 910년 1월 15일 라카다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압둘라는 자신을 '알 마흐디'의 성을 가진 칼리파로 선포하고, 그의 후계자이자 아들에게 '알 카임'의 칭호를 수여했다. 이로써 파티마 왕조가 성립되었다.

910년 1월, 카이라완에 입성한 압둘라는 자신을 선지자의 딸 파티마의 후손인 알 마흐디 (메시아, 구원자)로 칭하며 파티마 왕조의 개창을 알렸다. 이후 이스마일파의 세기종말적 성격은 약화되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마흐디는 정복지에 평화를 보장하였다. 더이상의 약탈이 금지됨과 동시에 새로운 지방관들이 파견되었고 엄격한 도덕 하에 질서가 확립되었다. 알 쉬이를 필두로 한 화려한 행렬과 함께 라카바로 향한 마흐디는 자신의 칭호가 무함마드와 알리, 하산, 후세인, 파티마, 그리고 선대 이맘들 다음으로 금요 예배(쿠트바)에서 언급되게 하였다. 아미르 알 무미닌, 그리고 알 라쉬둔, 알 마히드윤이라 자칭한 마흐디는 아바스조 칼리파를 찬탈자로 간주, 스스로 이맘과 동시에 칼리파임을 선포하며 팽창주의 정책을 확립하였다. 신의 약속에 따라 '사악한 반란자'들로부터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압둘라 알 마흐디와 알 쉬이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알 쉬이는 알 마흐디의 권력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우려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칼리파가 진정한 마흐디라는 증거를 요구했다. 911년 2월, 알 쉬이의 동생 아불 압바스가 마흐디에 대한 모반을 꾀했다고 지목되었는데 마흐디의 심복인 베르베르인 장수 가즈위야는 아불 압바스 뿐만 아니라 그의 형 알 쉬이와 측근인 알 자키까지 살해하였다. 아부 압둘라 알 쉬이와 그의 형제 및 측근들의 제거는 그를 추종하던 몇몇 쿠타마 베르베르인들이 한 아이를 새로운 마흐디로 내세워 봉기하도록 이끌었는데, 이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진압되었다.

새로운 정권은 이프리키야에서의 존재를 단지 일시적인 것으로 여겼고, 그들의 진짜 목표는 아바스 조의 수도인 바그다드였다. 하지만 알 카임이 이끄는 파티마 군대의 914~915년과 919~921년에 걸친 연이은 이집트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파티미야 혁명을 동쪽으로 전파하려는 야망은 연기되어야 했다. 게다가 파티마 왕조는 아직 불안정했다.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말리키 수니파와 이바드파, 카와리지파와 같은 다양한 분파들을 지지했기 때문에, 나중에 산하자 베르베르족에 의해 확장되기 전까지 이프리키야에서의 파티마 왕조의 실질적인 권력 기반은 상당히 좁았다. 사학자 하인츠 할름은 초기 파티마 정권을 두고 "마그레브 동부와 중부에 대한 쿠타마와 산하자 베르베르족의 헤게모니"라고 묘사한다.

912년, 알 마흐디는 지중해 해안을 따라 새로운 수도의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새로운 요새화된 궁전 도시 알 마흐디야의 건설은 916년에 시작되었다. 신수도는 921년 2월 20일에 공식적으로 완공되었지만, 이후에도 건설이 계속되었다. 새로운 수도는 수니파 아글라브 조의 거점이었던 카이로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지역 주민들과 더 이상의 긴장을 고조시키지 않고 칼리파와 그의 쿠타마 베르베르족들을 위한 안전한 거점을 구축할 수 있도록 했다.

3.4. 후우마이야 왕조와의 경쟁

10세기의 대부분 동안, 파티마 칼리파국은 마그레브 서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서 당시 알안달루스를 통치하고 있던 코르도바후우마이야 왕조와 대립하였다. 909년 아부 압둘라 알 쉬이에 의해 짧은 기간 동안 점령되었던 타헤르트는 2년 뒤인 911년 미크나사 부족 출신의 파티마 장군 마살라 이븐 하부스에 의해 함락되었다. 917년과 921년에 재차 추진된 원정에서 파티마군은 모로코 북부의 나쿠르 공국을 점령하였으며, 일대의 중심지인 페스시질마사 역시 함락시키는 등 일련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 두 원정은 타헤르트 총독으로 임명되었던 마살라 이븐 하부스가 이끌었다.

이후 쇠약해진 이드리스 왕조와 제나타·산하자 베르베르 족장들은 상황에 따라 후우마이야 왕조나 파티마 왕조 사이를 오가면서 그들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 다만 마그레브 서부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파티마 왕조의 효과적인 통제 범위는 이전의 아글라브 조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마살라의 후계자인 무사 이븐 아비엘 아피야는 이드리스 조의 페스를 다시 점령했지만, 932년에 마그레브 서부를 후우마이야 왕조에게 바치고는 그들에게 항복해버렸다. 때문에 후우마이야 왕조는 950년대의 대부분 동안 모로코 북부에서 다시 우위를 점했고, 파티마 장군 자우하르가 칼리파 알 무이즈 대신에 958년에 또 다른 원정을 감행하여 모로코 북부 대부분을 정복할 때까지 계속 그곳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자우하르는 958년 9월이나 10월에 시질마사를 함락시킨 후, 휘하 장군이었던 지리 이븐 마나드의 도움으로 959년 11월에 페스를 점령했다. 그러나 그는 살레, 세바, 탕헤르에 있는 후우마이야 수비군을 완전히 격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우회하여 지브롤터 해협에 군대를 주둔시키도록 하였다. 자우하르와 지리는 960년에 재차 모로코를 원정한 후 알 만수리야로 귀환했다. 이 원정의 결과로 타헤르트를 포함한 마그레브 중부(알제리) 대부분은 지리 이븐 마나드에게 주어져 칼리파 대신 그곳을 통치하도록 했으며, 그 외의 페스와 시질마사를 포함한 모로코의 복속된 지역들은 현지 토후들의 지배 하에 놓였다.

마그레브와 시칠리아에서 벌어진 이 모든 일련의 전쟁들은 강력한 군대와 함대의 유지를 필요로 했다. 934년 알 마흐디가 사망했을 당시, 파티마 칼리파국은 지중해의 강대국 중 하나가 되었다.

3.5. 반란 진압

제 2대 파티마 이맘-칼리파였던 알 카임의 통치 기간 대부분은 아부 야지드의 카와지리 반란으로 점철되었다. 943~944년 제나타 부족들 사이에서 일어난 반파티마 봉기는 이프리키야를 통해 확산되어, 카이로완을 점령하고 945년 1월부터 9월까지 알 마흐디야를 포위하는 등 대규모로 번졌다. 비록 알 카임은 포위전 도중에 사망했지만, 이것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이스마일이 아부 야지드를 물리칠 때까지 비밀로 부쳐졌다. 이후 그는 부친의 죽음을 발표하고 자신이 새로운 이맘이자 칼리파로 등극했음을 알렸으며, 알 만수르의 칭호를 취했다. 알 만수르가 반란의 마지막 잔재들을 제압하기 위한 원정을 벌이는 동안, 카이로완 남쪽에는 그를 위한 새로운 궁전 도시가 건설되고 있었다. 건설은 946년경에 시작되었고 알 만수르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알 무이즈 시기에 완공되었다. 이곳은 알 만수리야라고 명명되었으며 파티마 칼리파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4. 전성기

4.1. 이집트 · 팔레스타인 정복

966년, 자우하르는 알 무이즈의 명을 받들어 아바스 왕조에 충성하면서도 독자적으로 행동하던 이흐시드 왕조를 침공하였고, 마침내 오랜 숙원이었던 이집트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알 무이즈는 자우하르에게 정복 후 그곳을 안정화시키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그의 통치 하에서 이집트의 지배권은 비교적 쉽게 확립되었으며, 곧이어 970년 자우하르는 이집트에서 피신한 몇몇 이흐시드 잔당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여 시리아를 침공했다. 이 군대는 쿠타마 출신의 장군이었던 자파르 이븐 팔라가 이끌고 있었다. 이 침공은 처음에는 성공적이었으며 같은 해 다마스쿠스를 비롯한 많은 도시들이 점령되었다. 이후 자파르는 969년 안티오키아를 점령하고 알레포를 쳐 떨어뜨린 다음 동로마 제국을 공격했는데, 동쪽에서 새로운 위협이 나타나자 어쩔 수 없이 진격을 멈춰야 했다. 최근 패배한 다마스쿠스 토후들의 호소를 받아들인 바레인의 카르마트파가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아랍 부족민들로 구성된 대규모 연합을 조직한 것이었다. 971년 8월, 자파르는 사막 지대에서 그들과 대결을 벌였으나 포위 작전에 패배하고 말았고, 그 자신도 죽임을 당했다. 한 달 후, 카르마트파의 하산 알 아삼은 요르단 전역에서 새로운 지원군을 이끌고 이집트를 침공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일강 삼각주 지역을 점령하는 데 시간을 오래 소모했고, 그 틈에 자우하르는 푸스타트와 카이로의 방어망을 구축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카르마트파의 진격은 도시의 바로 북쪽에서 저지되었으며 결국 패배했다. 해상 지원을 하기 위해 도착한 칼브 지원군은 이집트에서 카르마트인들을 추방하도록 도왔다. 팔레스타인의 수도인 라믈라는 972년 5월 파티마 왕조에 의해 탈환되었지만, 시리아 전선의 주요 거점들은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4.2. 카이로 건설과 수도 이전

이집트가 충분히 평정되었다고 느끼자, 자우하르는 곧바로 신수도의 건설에 착수하였다. 그가 969년에 건설한 신도심 '알 카히라(القاهرة, al-Qāhira)[5]는 "정복자" 또는 "승리자", "토벌자"라는 의미로서, 도시 건설이 시작되던 시기에 하늘에 떠오른 화성을 기리는 뜻에서 그렇게 지어졌다. 이 도시는 7세기경 아랍 정복자들에 의해 세워진 유서깊은 지역 수도인 푸스타트에서 북동쪽으로 몇십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새로운 수도가 완공되자, 자우하르는 이프리키야에 있는 알 무이즈가 이곳으로 오도록 했다. 칼리파와 그의 궁정, 재무부는 972년 가을 알 만수리야에서 출발하여 육로로 여행했으며, 해군 역시 해안을 따라 이동했다. 도중에 몇몇 주요 도시들에 들른 후, 알 무이즈는 973년 6월 10일 카이로에 도착했다. 그 이전의 다른 왕실 수도들과 마찬가지로, 카이로는 칼리파 궁전과 공식적인 국가 모스크인 알 아즈하르 모스크를 수용하는 행정적이고 고풍스러운 대도시로 건설되었다. 988년에 건설된 또 다른 모스크는 이스마일파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중심이 되는 학술 기관이 되었다. 파티마 칼리파국의 마지막 몇 년까지 이집트의 경제적인 중심지는 푸스타트였고, 그곳에는 대부분의 일반 인구가 거주하면서 무역 활동을 했다.

파티마 왕조 치하의 이집트는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레반트, 티하마,[6] 헤자즈, 예멘, 심지어 가장 먼 영토인 물탄을 포함하는, 단언컨대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지역이 되었다. 파티마인들은 지중해와 인도양에서 시작하여 송나라 (960~1279) 치하의 중국까지 나아간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였으며, 이들 덕분에 중세 이집트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번영기를 맞이하였다. 파티마 왕조는 농업 진흥에 관심을 기울여 부를 증가시켰고, 다양한 상품 작물의 재배를 장려했으며 아마포 제조업을 육성하였고, 세계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물품들을 들여와 이들을 거래할 수 있도록 하였다. 파티마 궁정의 관료체제는 이전의 이흐시드 왕조와 아바스 왕조에 의해 구축된 관료 모델들을 모방하여 설립되었다. 이흐시드 조의 지배 하에 존재했던 와지르 제도는 파티마 왕조의 지배 하에 곧 다시 부활했다. 이 자리에 처음으로 임명된 인물은 유대인 출신의 개종자 야쿠브 이븐 킬리스로, 979년 알 무이즈의 후계자 알 아지즈에 의해 이 자리에 올랐다. 와지르가 칼리파와 그가 통치하는 거대한 관료 국가 사이의 중간 다리 역할을 겸하게 되면서, 그들의 직무는 수년~수십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더욱 중요해져갔다.

4.3. 시리아 전역

975년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1세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대부분을 정복하며, 일대의 이슬람 영토는 파티마 왕조가 지배하는 트리폴리 이남 지역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요안니스 1세는 최종적으로는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976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하던 도중 사망하면서 파티마 왕조는 동로마 제국의 위협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한편, 튀르크계 노예 병사인 굴람(ghulām) 출신이자 반란에 실패하고 도망친 부와이흐 왕조의 군벌 아프타킨은 다마스쿠스 주민들의 추대를 받아 그곳의 영주가 되었다. 그는 시리아의 카르마트파, 그리고 사막의 베두인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977년 봄 팔레스타인을 침공했다. 자우하르는 다시 한번 그들의 침공을 격퇴하고 나아가 역으로 다마스쿠스를 포위했다. 하지만 그는 겨울 동안 적군에게 패배했고, 아스칼론에서 아프타킨을 상대로 농성전을 벌여야 했다. 이 소식을 보고받은 파티마 칼리파 알 아지즈는 자우하르를 구하기 위해 978년 4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이후 그에게 항복한 아프타킨과 그 휘하의 굴람 병사들은 다마스쿠스로 돌아가는 대신 파티마 군대에 합류하여 시리아 정복에 유용한 전력이 되어주었다.

979년 이븐 킬리스가 와지르에 오른 직후부터 파티마 왕조는 전략을 바꾸었다. 이븐 킬리스는 연례적으로 공물을 바쳐 카르마트파의 침공을 막고, 자라흐 및 바누 킬라브와 같은 그 지역의 부족들이나 왕조들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남부와 같이 옛 이흐시드조 영토의 대부분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기세를 얻은 파티마 왕조는 893년에 다마스쿠스를, 그해 말에는 유프라테스 상류의 락까와 라흐바까지 나아갔다. 다만 그 이북은 동로마 제국의 보호령이자 또다른 이슬람 왕조였던 함단 토후국의 지배 하에 있었다.

락까 총독으로 임명된 파티마 장군 바이쿠르는 991년 알레포를 목표로 또 다시 원정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고 함단 왕조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같은 해 이븐 킬리스가 사망했고 장군 무니르가 바그다드와 반역적인 서신을 주고 받은 혐의로 투옥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는 당시 불가리아 제1제국과 전쟁을 벌이느라 이곳에 신경을 쓸 여념이 없었고, 함단 통치자 사드 앗 다울라 역시 991년 말에 사망했기 때문에 상황은 파티마 왕조에게 호재였다. 파티마 군대의 사령관은 망구테킨이라는 튀르크계 굴람 출신의 인물이었는데, 그는 오론테스 계곡을 따라 신중하면서도 만전을 기해 북쪽으로 진격했다. 그는 992년 홈스와 하마를 점령하고 안티오키아의 동로마-함단 연합군을 물리쳤으며, 이듬해에 샤야르를 점령하고 994년에는 알레포를 포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995년 5월, 이 소식을 들은 바실리오스 2세가 그의 군대를 이끌고 아나톨리아 반도를 횡단하는 강행군을 거쳐 재빠르게 이 지역에 도착하자 상황은 반전되었다. 망구테킨은 곧 포위를 풀고 다마스쿠스로 철수해야만 했다. 파티마 왕조는 새롭게 군대를 모집하고 배를 건조하여 또 다른 원정을 준비했지만, 바실리오스 2세는 그들과 협상을 통해 약 1년 동안의 평화 조약에 조인했다. 996년 푸스타트 근처 나일강의 항구였던 알 마크에서 일어난 화재로 인해 많은 배들이 전소되면서 원정은 더욱 지연되었으며, 마침내 그해 8월 알 아지즈가 사망하면서 알레포는 다른 문제들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4.4. 마그레브의 지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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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무이즈는 이집트로 궁정을 옮기기 전에 지리 이븐 마나드(971년 사망)의 아들 불루긴 이븐 지리를 마그레브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파티마 왕조를 대신하여, 아미르의 칭호를 취하면서 이 지역에 새로운 봉신 왕조를 건국했다. 그들의 권위는 여전히 마그레브 서부에서 미약했으며 후우마이야 왕조 및 토착 베르베르 지도자들과의 경쟁이 계속되었다. 자우하르의 성공적인 서부 원정 이후, 후우마이야 왕조는 그들의 지배력을 재확인하기 위해 973년 모로코 북부로 돌아갔다. 이를 틈타 불루긴은 979년부터 989년까지 이 지역에서 그의 통치권을 일시적으로 확립한 마지막 원정을 시작했고, 이것은 984~985년에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다시금 확보하려는 우마이야 군대의 마지막 노력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978년에 칼리파는 불루긴에게 트리폴리타니아의 통치권을 주었지만, 그 지역에서의 지리 왕조의 영향력은 나중인 1001년 무렵에 바누 카즈룬 왕조로 대체되었다.

998년 불루긴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알 만수르는 지리 왕조의 근거지를 아시르에서 옛 파티마 수도 알 만수리야로 옮겼고, 이프리키야의 실질적인 독립 통치자로서의 지리 왕조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동시에 파티마 칼리파에 대한 충성을 여전히 유지했다. 이에 파티마 칼리파 알 아지즈는 그의 지위를 인정함과 동시에 공식적으로 지리 왕조에게 마그레브의 통치권을 양도하였다. 양국은 자주 선물을 교환했으며 새로운 지리 왕조의 통치자가 즉위할 때는 카이로의 파티마 칼리파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4.5. 알 하킴의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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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아지즈가 불의의 병으로 사망한 이후, 그의 어린 아들 아부 알리 알 만수르(11세)알 하킴의 칭호를 취하면서 즉위했다. 처음에는 이집트 칼브 가문의 지도자이자 퇴역 군인이며, 알 무이즈의 옛 호위병 중 한 명이었던 하산 이븐 암마르가 섭정을 맡았지만, 곧 알 하킴의 환관이자 가정교사였던 바르자완이 그를 대신해 권력을 잡았다. 바르자완은 제국의 내정을 안정시켰지만, 알레포에 대한 알 아지즈 시대와 같은 확장 정책을 추구하는 것을 자제했다. 1000년 바르자완은 알 하킴에 의해 암살 당했고, 알 하킴은 국가를 직접적이고 독재적인 수단으로 장악하며 직접 통치를 선언하였다. 1021년 의문의 실종까지 지속된 그의 치세는 파티마 왕조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시기이다. 수많은 서사 기록들이 그를 괴팍하거나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묘사하지만, 최근의 연구는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인 상황을 기반으로 더 객관적인 설명을 제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알 하킴은 일반적으로 관료들을 직위에서 해임할 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경고 없이 무조건 처형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렇게 죽은 사람들 중 대다수가 재정 관련 인사들이었는데, 이것은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부서에서 기강을 잡으려는 알 하킴의 방식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또한 과학 연구를 위한 도서관이자 이집트판 지혜의 집인 "다르 알 일름(Dar al-'Ilm, 지식의 집)"을 건설하였는데, 이는 알 아지즈 치세까지 실시되었던 지식 함양 정책과도 다소 부합했다. 대중들에게 그는 푸스타트 거리에서 직접 말을 타고 순례하는 것 뿐만 아니라, 더 친숙하고 쉽게 접할 수 있으며 직접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는 칼리파로 유명했다. 한편으로, 그는 공공의 부정을 억제하기 위한 변덕스러운 법령을 실시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기독교인과 유대인에게 엄격했는데, 특히 그들이 공공장소에서 착용하는 의복이나 행동하는 방식에 대해 새롭고 억지스러운 제한을 가함으로써 다수의 이집트 사회를 불안에 떨게 했다. 그의 치세에 전례 없는 기독교 탄압이 실시되었으며, 여러 교회와 수도원[7]이 파괴되었다. 1009년에는 불분명한 이유로 예루살렘의 성묘교회마저 그의 명령에 의해 철거당했다.

알 하킴은 아프리카계 흑인(누비아인)들의 군대 모집 비율을 크게 늘렸는데, 나중에 이들은 쿠타마족, 튀르크인, 데일람인들과 맞먹는 또 다른 강력한 파벌을 형성하였다. 1005년, 그의 통치 초기에 아부 라크와가 일으킨 위험한 봉기는 성공적으로 진압되었지만 그 여파는 카이로 인근까지 도달했다. 1012년 아랍계 바누 타이이 부족의 지도자들은 라믈라를 점령하고 메카의 샤리프인 알 하산 이븐 자파르를 파티마 칼리파에 대항하는 수니파 칼리파로 선포했으나, 1013년 그가 사망하자 곧 항복했다. 알 하킴이 기독교인들을 매우 탄압하고 예루살렘의 교회를 파괴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은 1001년에 체결된 휴전을 약 10년 동안 유지했다. 그의 대부분의 통치 기간 동안, 알레포의 함단 왕조는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정부에 복속된 완충국으로 남아있었다. 이것은 1017년 아르메니아계 파티마 장군 파타크가 함단 통치자 만수르 이븐 루르를 추방하고 알레포를 점령할 때까지 유효했다. 그러나 1~2년 뒤에 파타크는 알레포에서 사실상 자립해버렸다.

알 하킴은 또한 여러 사건들로 그의 이스마일파 추종자들을 놀라게 했다. 1013년, 그는 알 마흐디의 두 증손자(압둘 라힘 이븐 일야스, 아바스 이븐 슈아이브)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정한다고 선포했는데, 전자는 세속적인 정치 통치자로서 칼리파를 물려 받을 것이고 후자는 종교 지도자로서 이맘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는'신정일치', 즉 '이맘과 칼리파는 파티마 왕조의 군주 단 한명이 겸임'한다는 당초 파티마 왕조의 목적과는 멀리 동떨어진 것이었다. 또한 1015년에 그는 궁정에서 정기적으로 행해졌던 이스마일파 교리 강의 "마잘리스 알 히크마(majālis al-ḥikma, 지혜의 회의)"를 갑자기 중단했다. 1021년, 그는 카이로 외곽의 사막으로 당나귀를 타고 밤 산책을 떠났으나 돌연 실종되었다.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5. 쇠퇴

5.1. 영토 상실과 봉신국들의 독립

알 하킴이 사망한 이후, 그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압둘 라힘 이븐 일야스와 아바스 이븐 슈아이브가 잇달아 암살되면서 후계자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알 하킴의 여동생 시트 알물크는 자신의 15살 난 아들 알리를 알 자히르라는 칭호로 즉위하도록 주선했다. 그녀는 1023년 사망할 때까지 섭정을 맡았고, 그 다음으로는 전 재무 관리 출신이었던 알 자르자라이가 궁정 관료들과 함께 도맡아서 업무를 처리했다. 한편 파티마령 시리아는 1020년대 동안 일련의 부침을 겪었다. 1022년 독립을 선언한 파타크가 살해된 후 친 파티마 총독이 알레포에 부임했지만, 1024~1025년에 살리흐 이븐 미르다스가 이끄는 아랍 베두인계 바누 킬랍, 바누 자라흐, 바누 칼브의 족장들이 연합하여 알레포를 점령하고 시리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파티마 왕조로부터 빼앗기 위해 기회를 노렸다. 이에 알 자르자라이는 튀르크계 장군 아누슈테킨 알 디즈바리를 파견했는데, 그는 1029년 티베리아스 호수 근처에서 벌어진 우크후와나 전투에서 적들을 패퇴시켰다. 1030년에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3세는 휴전을 깨고 북부 시리아를 침공했으며 알레포에 그의 종주권을 강요했다. 그러나 1034년 그가 사망한 후 상황은 반전되었고 1036년에는 평화를 되찾았다. 1038년 알레포는 파티마 왕조에게 완전히 합병되어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알 자히르는 1036년에 사망했고, 파티마 왕조 역사상 가장 긴 통치 기간을 가진 그의 아들 알 무스탄시르가 칼리파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으며 정국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겼다. 그는 즉위 당시에 7살이었으며 따라서 알 자르자와이는 계속해서 와지르를 맡았다. 1045년 알 자르자와이가 사망하자, 여러 궁정 관료들이 그 뒤를 이어 과두정치를 벌이며 정부를 계속 운영해 나갔는데, 대표적으로 팔레스타인 출신의 법학자였던 알 야주리가 있었다.

1040년대[8]지리 왕조는 카이로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바그다드의 수니파 아바스 칼리파들에게 복속하였다. 이에 파티마 왕조는 아랍 베두인계 유목부족이었던 바누 힐랄과 바누 술라임 등을 파견하여 그 지역에 파괴적인 침공을 감행했다. 한편 시칠리아에서의 파티마 종주권 역시 무슬림들이 분열되고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증가함에 따라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1060년, 이탈리아-노르만족의 루제루 1세가 섬을 정복하기 시작했을 때, 파티마 왕조의 권위와 함께 그 지역에서의 이슬람 세력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러나 동부에서 파티마 왕조는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1047년, 예멘의 파티마 선교사 알리 무함마드 알 술라히는 그곳에 요새를 건설하고 부족들을 모집하여 이듬해에 사나를 점령할 수 있었다. 1060년 그는 아덴과 자비드를 점령하고는 예멘 전역을 정복하기 위한 계획을 시작했다. 1062년, 알 술라히는 1년 전의 슈크르 이븐 아비 알 푸투흐의 죽음을 빌미로 메카로 진군하였으며, 그러는 동안 사다에 있던 자이드 이맘을 강제로 굴복시켰다. 메카에 도착한 그는 파티마 종주권 하에 있는 성지의 새로운 샤리프이자 관리자로 무함마드 이븐 자파르를 임명했다. 이후 그는 사나로 돌아와 파티마 칼리파를 대신하여 자신의 가문을 그곳의 통치자로 만들었는데, 결과적으로 그들이 타이즈를 건설하고 아덴을 이집트와 인도 사이에 있는 무역의 중심지로 만듦으로써 카이로의 파티마 왕조는 더욱 부유해질 수 있었다.

한편 1056년에 부와이흐 왕조 휘하의 용병이자 튀르크계 굴람 출신이었던 알 바사시리는 셀주크 술탄 투으룰이 바그다드를 장악하고 부와이흐 왕조를 멸하자 라흐바로 도주한 후 파티마 조에게 복속했다. 이후 그는 알 무스탄시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이에 카이로의 파티마 정부는 그곳의 선교사 알 무아야드를 경유하여 알 바사시리에게 50만 디나르 금화 및 그 상당의 의복, 활 1만 개, 검 1천 개, 말 5백 필, 다수의 창과 화살을 보내주었다. 1056~1057년 사이에 알 무아야드와 알 바사시리는 시리아와 이라크 상부의 여러 토후국들을 정복했으며 신자르로 진군하여 쿠탈미쉬와 쿠라이쉬 휘하의 셀주크 군대를 패퇴시켰다. 마침내 1058년 12월 27일, 알 바사시리는 투으룰이 반란 진압에 여념이 없는 틈을 타서 수니파 아바스 왕조의 수도인 바그다드에 입성하였으며, 그 다음해 금요일에 바그다드 대사원에서 파티마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의 이름으로 예배(아잔)를 거행했다. 한 세기에 이른 부와이흐 왕조 치하에서도 겪지 못한 전대미문의 대사건에 수니파 주민들이 반발했으나, 알 바사시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 1월 29일에는 대사원 밖의 무살라(예배당)에서 파티마 왕조의 깃발을 올리고 이드 알 아드하(희생제)를 행했다. 명목상이지만 파티마 왕조의 바그다드 지배는 투으룰이 1060년에 알 바사시리를 축출할 때까지 약 9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거둔 일련의 성공들에도 불구하고, 1060년을 기점으로 수많은 지역 통치자들이 파티마 칼리파의 종주권에서 벗어나거나 이에 도전해오기 시작함에 따라 파티마 왕조는 쇠퇴를 거듭했다. 이미 1060년대 초에 파티마 왕조는 시리아 북부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하였는데, 1070년에는 알레포의 미르다스조 토후 마흐무드 이븐 미르다스가 아바스 칼리파의 이름으로 금요 예배를 거행하여 사실상 자립하였으며, 이듬해에 셀주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은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파티마령 시리아를 침공하려다 방향을 틀어 만지케르트에서 동로마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그러는 와중에 파티마군의 내부에서도 혼란이 계속되었다. 일찍이 알 무이즈알 아지즈 대에 관용 정책으로 편성된 다민족 혼성군은 전투에서는 효율적임이 검증되었고 전반적인 측면에서는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파티마조의 정치에는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통적으로 파티마조의 설립에 큰 도움을 주었던 쿠타마계 군벌들이 정치적인 문제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튀르크계 군벌들의 입지가 점차 강해지면서 이에 균열이 발생하였다. 마침내 1062년, 파티마 군대 내부의 여러 민족들 간의 잠정적인 균형이 붕괴함에 따라 그들은 대대적인 대전을 벌였는데, 6년 간에 걸친 이 내전은 1062~1072년 동안에 일어난 극심한 가뭄 그리고 대기근과 겹치면서 파티마조의 쇠퇴에 결정타를 날렸다. 와지르는 우후죽순처럼 갈아치워졌으며, 관료제도는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붕괴되었고, 칼리파의 권위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자원의 감소는 여러 민족 파벌들 사이의 문제를 가속화시켰는데, 주로 알레포의 함단 가문의 후손이었던 나시르 앗 다울라 이븐 함단이 이끄는 튀르크인들과 아프리카계 흑인(누비아인)들 사이에 노골적인 대립이 있었으며, 베르베르인들은 상황에 따라 양측을 오가면서 갈등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에 더해 경제적으로 중요했던 레반트 해안도시 지역마저 티레 총독 아부 아킬, 트리폴리 총독 아민 앗 다울라 등의 치하에서 독립하여 파티마조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한편 파티마 제국의 여러 지역들은 카이로의 튀르크계 군벌, 해안 지역의 라와타 및 여타 베르베르계 군벌, 상이집트의 누비아계 군벌과 같은 여러 민족 세력들의 지배 하에 놓였으며, 설상가상으로 시리아 지역은 셀주크 제국의 잇따른 침공을 받았다.

튀르크 군인들은 카이로를 부분적으로 장악했지만, 그들의 지도자였던 나시르 앗 다울라는 어떠한 공식적인 지위도 부여받지 못했다. 1067~1068년 사이에 그들은 국고를 약탈한 다음 궁정에서 찾을 수 있는 보물이란 보물은 모조리 가져갔다. 그 이듬해에 튀르크 군대는 나시르 앗 다울라에게 등을 돌렸지만, 그는 간신히 베두인 부족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한 뒤 나일강 삼각주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하고는 이 지역에서 카이로로 들어오는 물자와 식량 일체를 차단했다. 식량을 수입에 의존하던 민중들, 특히 수도의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이 시기의 사료들은 도시의 극심한 기아와 고난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심지어 일부 사료에서는 식인 행위까지 보고될 정도였다. 나일강 삼각주의 황폐화는 이집트 콥트교 공동체의 장기적인 쇠퇴를 가속화하는 전환점이 되었을 수도 있다. 나시르 앗 다울라는 1073년에 다른 튀르크계 군벌에게 살해되었지만, 유일하게 튀르크 군대를 제어할 수 있었던 그가 사라지자 튀르크인들의 횡포는 절정에 달했다. 1073년 내내 이집트에서는 무정부 상태가 이어졌다.

5.2. 바드르 알 자말리의 집권과 잠시동안의 중흥

1073년 말엽, 이집트를 구하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로서,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는 당시 아크레 총독으로 재임하고 있던 아르메니아 출신의 군벌 바드르 알 자말리를 카이로로 초청했다. 바드르는 자신의 아르메니아인 친위대를 대동할 수 있다는 조건 하에 이를 승낙했고, 이듬해 1월에 카이로에 도착했다. 내전을 벌이고 있던 튀르크인들은 그에 대해 별 의심을 하지 않았는데, 이에 바드르는 자신과 칼리파 간의 밀약을 눈치채지 못한 채 방심하고 있던 튀르크 군벌들을 일거에 모두 암살해버리면서 정권을 잡았다. 그 결과, 바드르 알 자말리는 파티마조 역사상 최초의 군벌 출신 와지르로 등극, "군대의 사령관(amīr al-juyūsh)", "무슬림들의 정당한 보호자(Kāfil quḍāt al-Muslimīn), "신자들의 선교적인 모범(Hādī duʿāt al-Muʿminīn)" 등 당대 파티마조의 주요 직위를 겸임하며 사실상 칼리파를 능가하는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1078년 알 무스탄시르는 공식적으로 모든 국정에 대한 권력을 그에게 이양했다. 그는 비록 칼리파는 그대로 두었지만, 한 사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무력을 동원한 표퓰리즘적인 독재자로서" 이집트를 통치할 무신 정권을 수립했다. 중세 아랍 학자들은 그를 두고 "전권을 가진 와지르(wizārat al-tafwīḍ)"라고 묘사했는데, 이 칭호는 동시대의 아바스 왕조를 조종했던 셀주크 군주들이 가졌던 칭호와 매우 유사했다.

사실상의 칼리파였던 그의 통치는 파티마 왕조의 제한적이지만 일시적인 중흥을 가져왔다. 비록 바드르 알 자말리의 권력은 세습되었으며 그가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이, 그의 아들이 죽은 뒤에는 군부 지도자들이 계속해서 그 자리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바드르와 그의 후임자들은 거의 1세기 가까이 파티마 왕조를 몰락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바드르 알 자말리는 헤자즈에서 파티마 칼리파의 권위를 다시 세웠고, 예멘으로 쳐들어가 파티마조에게 우호적인 술라흐 왕조의 통치권을 재확립하였다. 그러나, 시리아에서 파티마인들은 중동의 상당 부분을 정복하고 독립적인 튀르크멘 집단으로 변모했을 뿐만 아니라, 아바스조 칼리파의 수호자가 된 수니파 동맹 셀주크 제국의 대대적인 침공을 목격했다. 셀주크 침공기에 중앙아시아로부터 이주해온 수많은 튀르크멘 부족들 가운데 하나인, 나와키족 출신의 군벌 아트시즈 이븐 우와크는 1073년에 예루살렘을, 1076년에 다마스쿠스를 잇달아 함락시킨 이후 아예 이집트 자체까지 정복하려 하는 등 자신의 야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바드르는 그를 카이로 근처에서 전투를 통해 패퇴시킨 후, 반격을 개시하여 기자 및 아스칼론과 같은 몇몇 해안 도시들을 탈환했다. 이에 아트시즈는 셀주크 측에 도움을 청하였고, 왕제 투투쉬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자 파티마 군은 철수하였다. 다마스쿠스에 입성한 투투쉬는 아트시즈를 처형하고 시리아 남부를 셀주크 령으로 편입하였다. 이후 1080년대에 걸쳐 바드르는 셀주크 제국의 침공에 대비하여 진흙 벽돌로 된 카이로 성벽을 석재로 교체하였으며, 1089년에 한 차례 더 원정하여 티레, 시돈, 비블로스 등을 점령했다. 다만 그가 사망하는 1094년까지는 셀주크 제국과 평화 시기가 이어졌다.

바드르 알 자말리는 일련의 내부 개혁에 착수하여, 헬레니즘로마 시대의 이집트] 대부터 약 60~90개로 나뉘어져 있던 행정 구역을 23개 주로 재편하고[9] 불필요한 지역을 철폐하여 간소화시킴으로써 행정 부문의 효율화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한편 종교적으로는 그가 아르메니아 출신이었기 때문에, 바드르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이민을 종교에 상관없이 장려했는데, 덕분에 그의 임기에 기독교와 이슬람을 믿는 수많은 아르메니아 이민자들이 이집트로 대거 유입되었다. 1090년대 말에 이르면 이집트의 아르메니아 인구 수는 약 10만에 육박하였으며, 그 중 대부분이 믿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기존의 콥트 교회와 함께 이집트 기독교의 양대 종파를 이루게 되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엘리트층으로써 행정과 군사 부문에 기용되었으며 이러한 풍조는 1160년대까지 1세기 가량 이어진다. 한편 바드르는 이스마일파에 대한 우위를 회복하기는 했지만 수니파와 다른 시아파, 기독교 등도 존중해주었으며, 종교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통제력을 유지하면서 교회와 모스크 모두의 건설을 후원하였다. 그는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 콥트 교회와의 관계와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특히, 그는 파티마 왕조의 봉신이었던 누비아(마쿠리아) 및 에티오피아(자그웨)와 같은 기독교 왕국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키릴 2세(1078~1092) 등의 인물들을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의 직위에 임명하기도 했다.

주유쉬 모스크(الجامع الجيوشي)는 바드르의 명령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해 칼리파의 후원 아래 1085년에 완공되었다. 마슈하드로 지어진 이 모스크는 와지르였던 바드르 알 자말리가 파티마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를 위해 질서를 회복한 것을 기념하는 일종의 승리 기념비이기도 했다. 1087~1092년 사이에, 바드르는 상술했듯이 진흙으로 세워져있던 도시의 성벽을 모조리 석재로 교체하고 도심의 규모를 약간 확장시켰다. 이 기념비적인 사업의 산물로서, 거대한 성문들 가운데 3개는 밥 주웨일라, 밥 알 푸투흐, 밥 알 나스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5.3. 망국의 길

비록 바드르 알 자말리가 여타 국가들의 패권 도전에 대응하여, 시리아와 아라비아 반도 등지에서 종교와 무력 수단을 병행하여 적극적으로 활동을 벌임으로서 파티마조 칼리파의 권위는 어느정도는 회복이 된 것처럼 여겨졌지만, 군벌들이 사실상 국가의 통치자가 되면서 파티마 칼리파 자신은 단지 의례적인 종교 지도자로 전락하였으며 정치적인 실권에서는 점점 멀어져갔다. 이것은 그들의 라이벌이였던 바그다드아바스조 칼리파들이 부와이흐 왕조셀주크 제국의 치하에서 그랬던 것과 완전히 동일했다. 또한 계속되는 반란으로 국력은 쇠퇴했고, 시리아에서는 파티마 왕조의 군대가 셀주크족에게 패배를 거듭했으며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지지세력이 형편없이 줄어들었다. 이와 더불어 제국의 외곽지역은 사실상 그 지역의 장군들이 다스리게 되었는데, 이들이 점점 반독립적으로 변모함에 따라 카이로 중앙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영토는 사실상 이집트 일부 지역에 한정되었다.

바드르 알 자말리는 1094년에(알 무스탄시르 역시 이때 함께) 사망했고, 그의 아들인 알 아프달 샤한샤가 뒤를 이어 와지르로써 권력을 잡았다. 알 무스탄시르 이후 칼리파직은 알 무스탈리에게로 넘어갔고, 1101년에 그가 사망한 뒤에는 5살짜리 알 아미르가 칼리파에 올랐다. 알 무스탄시르의 또 다른 아들 니자르는 그의 아버지 생전에는 공식적인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알 아프달에 의해 이것이 성사되지 못하자 무력으로라도 황위를 차지하려고 시도했고, 마침내 1095년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같은 해에 패배한 뒤 처형당했다. 알 아프달은 여동생이 알 무스탈리와 결혼하고, 그의 딸이 알 아미르와 결혼하도록 주선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가문을 파티마 가문과 합치기를 기도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아들이 칼리파 자리를 물려받기 위해서 다방면으로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실패했다. 알 아프달의 이러한 행동은 이스마일파를 완전히 분열시켰다. 니자르를 지지하는 이스마일파(니자리 이스마일파)와 무스탈리를 지지하는 이스마일파(무스탈리 이스마일파)로 세력이 양분된 것이었다. 특히 페르시아, 이라크, 중앙아시아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하던 선교사 하산 에 사바흐와 그가 이끄는 이스마일파 선교단은 새 칼리파를 인정하지 않고, 카이로에 있는 파티마 본국과의 관계를 끊었다. 나중에 그들은 새로운 이스마일파 세력을 일구었는데, 시리아 지파의 이름을 따서 "아사신"이라고 칭해졌다. 이들은 니자르와 그 후손들을 정당한 이맘이라 주장하고 카이로의 파티마 칼리파들에 대해서는 찬탈자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이로써 파티마 왕조의 근간을 구성하던 이스마일파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으며, 심지어 이집트 내부에서도 새로운 칼리파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알 아프달의 재임 기간(1094~1121) 동안, 파티마조는 제1차 십자군이라는 외부로부터의 새로운 위협에 직면했다. 처음에는 양측이 셀주크 제국에 대항하는 합의와 동맹을 맺으려고 노력했지만, 이 협상은 결국에는 결렬되었다. 1097년 5월 또는 6월에,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제안으로 십자군은 파티마 왕조와 처음 접촉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카이로의 파티마 중앙정부는 십자군이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1098년 2월에 그들에게 사절단을 파견하였으며, 알레포의 셀주크 아미르 리드완과 예루살렘 아미르 쇠크멘을 십자군이 물리치는 것을 보고 이를 축하하면서, 기독교인에 대한 자신들의 우호적인 태도를 대단히 강조했다. 파티마 사절단은 십자군과 함께 한 달 동안 그곳에 머물다가, 십자군이 준 선물을 가지고 라타키아 항구를 통해 귀환하였다. 명확한 합의가 이루어졌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당사자들은 카이로에서 결론을 내릴 것으로 예상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후 알 아프달은 안티오키아에서의 십자군의 승리를 이용해 1098년 8월 예루살렘을 재탈환했고, 십자군과의 협상에서 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 다음에 양측이 회동을 가진 것은 1099년 4월 아르카에서였는데, 이곳에서 그들은 예루살렘에 대한 소유권 문제와 관련하여 교착 상태에 빠졌다. 뒤이어 1099년 7월 알 아프달이 구원군을 이끌고 진군하는 동안 십자군은 파티마 왕조의 영토를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마침내 양측은 아스칼론 전투에서 격돌했고, 이 전투에서 알 아프달은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티마 왕조에 대한 초기의 협상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븐 알아티르는 파티마 왕조가 십자군을 불러들여 시리아를 침공했다고 기록했다.

이 패배로 인해 팔레스타인에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지며 파티마조는 그나마 남아있는 레반트 남부 지역에 대한 통제권마저 상실해버렸다. 비록 많은 십자군들이 그들의 서약을 이행하고 유럽으로 귀환했지만, 이탈리아 해상도시 국가들의 도움을 받은 잔존 병력들은 1109~1110년 사이에 친파티마 해안도시들 가운데 트리폴리, 베이루트, 시돈을 잇달아 함락시킨 뒤 레반트 해안의 많은 부분을 그들의 지배권 아래 넣었다. 파티마 왕조는 해군의 도움으로 티레, 아스칼론, 가자 등의 도시들만을 겨우 지킬 수 있었다. 1107년 이후, 알 아프달의 부관이었던 알 마문 알 바타히가 새로운 신성으로 등장하여 권력을 잡았다. 그는 1119년에 카이로에 천문대를 건설하는 등 알 아프달 임기 말에 행해진 여러 행정 개혁들과 기반시설 건설 사업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알 아프달은 1121년에 암살당했는데, 이것은 니자리 이스마일파 암살자들의 소행으로 추정되지만, 이 사건의 진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알 마문은 알 아프달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했지만, 전임자와 달리 그는 군부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결국 그의 권력 대부분을 칼리파에게 의존해야만 했다. 1124년, 그는 티레를 십자군에게 빼앗겼다. 또한 알 마문은 카이로에 그 규모는 작지만 주목할 만한 모스크인 알 아크마르 모스크를 건설했는데, 이것은 1125년에 완공되어 오늘날까지 대부분이 남아 있다. 그러나 같은 해, 파티마 칼리파 알 아미르는 알 마문을 체포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그가 십자군에 대해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의 부와 권력이 칼리파를 위협해서였을 수도 있다. 3년 후 그는 처형당했다. 그 뒤 알 아미르는 칼리파의 실권을 되찾고 와지리의 섭정 통치를 일시적으로 중단시켰다. 하지만 알 아미르 그 자신도 1130년에 (아마도) 니자리 암살자들의 손에 죽고 말았다.

알 아미르는 죽기 직전에 알 타이브라는 늦둥이 아들을 얻었다. 그가 사망한 뒤에는 알 아미르의 사촌, 즉 알 무스탄시르의 손자였던 압둘 마지드가 스스로 섭정을 임명하려 했으나, 군부의 압력으로 알 아프달의 아들 중 한 명인 아부 알리 아흐마드가 와지르로 임명되었다. 아흐마드는 압둘 마지드를 투옥하고, 자신이 12이맘파가 고대하는 "숨겨진" 이맘인 무함마드 알 문타자르의 대리자임을 선언하며 파티마조를 멸망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가 1131년 알 아미르의 추종자들에게 암살당하면서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압둘 마지드는 석방되어 섭정직을 다시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곧 섭정이 아닌 '사라진' 5촌 조카를 대신하여 1132년 1월 새로운 칼리파로 선언하고는 스스로를 알 하피즈라 칭하였고, 여태껏 이어져 내려오던 부자계승의 원칙을 깨버렸다. 대부분의 무스탈리파들은 그가 정통한 후계자라고 여겼지만, 예멘의 술라흐 왕조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파티마 왕조와의 관계를 끊은 뒤 독립해 나갔다. 그들은 알 아미르의 아들 알 타이브가 은둔하고 있는 이맘이라고 주장하며 카이로의 알 하피즈와 그의 후계자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전에 무스탈리파와 니자리파로 갈라졌던 이스마일파는 결국 타이비파, 하피지파, 니자리파로 삼분되었다.

1135년, 파티마 왕조의 아르메니아 군부는 알 하피즈를 압박하여 기독교 아르메니아인 바흐람을 와지르로 임명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무슬림 군대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고 2년 뒤인 1137년에 수니파 무슬림이었던 리드완에게 와지르직을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리드완이 알하피즈의 폐위를 모의하자, 알 하피즈는 수도원에 유폐되어 있던 바흐람을 다시 궁정으로 불러들였다. 결국 리드완은 알 하피즈 및 바흐람 측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한 뒤 항복하였고, 바흐람은 와지르를 맡는 것을 거부한 뒤 칼리파의 최측근이 되었다. 이후 와지르의 자리는 공석이 되었고, 알 하피즈는 1149년 사망할 때가지 직접 국가를 통치했다. 이 기간 동안 이집트에서 이스마일파의 세력은 상당히 줄어들었고, 파티마 칼리파에 대한 정치적인 도전이 점점 더 흔해졌다. 수니파 무슬림들이 고위직에 오르는 비율 역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티마 왕조는 수많은 파벌들과 엘리트층들이 왕조를 무너뜨리는 대신에 꼭두각시인 칼리파를 조종하는 것에 대해 공통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계속해서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알 하피즈는 파티마 칼리파들 중 마지막으로 국가를 직접 통치한 인물이자, 성인이 되었을 때 황위에 오른 최후의 통치자였다.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세 칼리파였던 알 자피르(1149~1154), 알 파이즈(1154~1160), 알 아디드](1160~1171)는 모두 즉위했을 때 10대 초반이나 그보다 어린 아이들이었다. 알 하피즈 시기에 약화되었던 와지르의 권력은, 알 자피르가 즉위 후 자신의 계승을 도운 이븐 마살을 와지르로 임명하면서 부활하였다. 그러나 군부는 대신 이븐 살라르라는 수니파 인사를 지지했고, 반란을 일으켜 전투에서 이븐 마살을 살해한 뒤 1150년 그를 와지르로 추대함으로써 칼리파의 마지막 권력기반을 무너뜨렸다. 1153년 1월, 예루살렘의 십자군 왕 보두앵 3세는 레반트의 마지막 남은 파티마 거점이었던 아스칼론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지난 4월 이븐 살라르는 의붓아들 압바스와 압바스의 아들 나스르가 꾸민 음모에 의해 암살당한 뒤였다. 구원군이 도착하지 않자, 아스칼론은 도시 내의 주민들이 이집트로 안전하게 떠날 수 있다는 조건 하에 그해 8월에 항복하였다.[10] 그 다음해인 1154년 나스르는 알 자피르를 살해했고, 당시 와지르였던 압바스는 알 자피르의 5살 난 아들 '이사'를 알 파이즈로 옹립시켰다. 이에 궁정의 여성들은 상이집트의 아르메니아인 무슬림 총독 탈라이 이븐 루지크를 불러들였다. 탈라이는 카이로에서 압바스와 나스르를 몰아내고 와지르가 되었으며, 이후 십자군을 상대로 몇몇 새로운 작전들을 펼치기도 하였지만, 이것은 그들을 해상에서 괴롭히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알 파이즈는 1160년에 사망했고 탈라이는 이듬해에 알 자피르의 여동생인 시트 알 쿠수르에 의해 암살당했다. 탈라이의 아들인 루지크 이븐 탈라이는 1163년까지 와지르를 맡았는데, 쿠스의 총독이었던 샤와르에 의해 타도된 뒤 살해되었다.

6. 멸망

와지르에 등극한 샤와르는 그의 정적들과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샤와르는 명목상의 지배에 좀처럼 만족하지 못했고,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한 음모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러한 파티마조의 무질서하고 혼란에 빠진 내부상황은 당시 다마스쿠스를 포함한 시리아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장기 왕조의 군주 누레딘예루살렘 국왕 아모리 1세의 개입을 불러 일으켰다. 십자군은 이미 1161년에 탈라이 이븐 루지크에게 자신들에게 공물을 바칠 것을 강요했고, 그가 이것을 거부하자 이듬해에는 이집트를 침공할 태세를 취한 바 있었다. 1163년 샤와르가 카이로에서 쫒겨났을 때, 그는 누레딘에게 가서 피난처를 구했다. 당시 누레딘은 부친 장기로부터 물려받은 에데사 및 알레포 등지의 영토에서 제2차 십자군을 패퇴시키는 등 십자군에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며, 여세를 몰아 형의 영지였던 모술과 이라크 북부 지방까지 지배 하에 두면서 명실상부 이슬람 세계의 강자 중 한명으로 등극한 상태였다. 누레딘은 곧 이것이 시아파가 장악한 이집트를 탈환하고, 레반트와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왕국의 건설이라는 전대미문의 업적을 세울 수 있는 기회임을 깨달았다. 마침내 누레딘은 자신의 장군 아사드 앗 딘 시르쿠를 보내어, 이집트를 점령하고 샤와르를 다시 와지르로 임명하도록 했다. 시르쿠는 1164년 여름에 이 임무를 완수했다.

샤와르의 남은 몇 년의 임기는 예루살렘 왕과 누레딘 사이에 상황에 따라 동맹을 바꾸면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1167년 십자군은 시르쿠의 군대를 쫒아 상이집트에 진입했다. 1168년, 십자군이 카이로를 점령할 가능성을 우려한 샤와르는 그의 적이 이 도시를 가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구도심 푸스타트에 불을 질렀다. 십자군이 이집트를 다시 떠나도록 강요한 후, 1169년 1월 8일 누레딘의 명령으로 시르쿠가 파티마 지배층 및 주민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으며 카이로에 무혈입성하였다. 시르쿠는 곧 샤와르를 붙잡아 처형했고, 이로써 이집트는 사실상 누레딘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시르쿠는 자신이 직접 와지르에 등극했고, 그가 급사한 뒤에는 그의 조카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11]이 새로운 와지르가 되었다. 이를 보고받은 누레딘은 살라딘 역시 시르쿠처럼 자신의 신하일 것임을 당연하게 여겼고, 당시 예루살렘 왕 아모리 1세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살라딘은 자신이 수니파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면서, 시아파의 기도 요구를 진압하고 이스마일파 교리 강연을 중단시키거나 수니파 재판관(카디)를 임명하는 등 수상한 행보를 이어갔다. 1170년, 파티마조의 마지막 칼리파 알 아디드가 젊은 나이임에도 세상을 떠났다. 파티마 왕조는 먼 친척을 통해서 명맥을 이어갈 수도 있었지만, 실권자인 살라딘이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파티마 왕조가 멸망하게 되었다. 그후 살라딘은 이집트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북아프리카와 레반트에 걸친 대제국인 아이유브 왕조를 창건하였다.


[1] '모범이 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2] '올바르게 이끄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카임(qāʾim, (불의에 맞서) 일어서는 자) 등 의미가 유사하거나 아예 동일한 타 명칭들도 여럿 있지만, 시아파들 사이에서는 마흐디가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다.[3] 자파르 앗 사디크가 후계자를 임명하기 전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기 때문도 있다.[4] 훗날 파티마 왕조는 압둘라가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의 후손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계보와 관련 기록들을 내놓았지만, 그들의 자료에서조차 각 이맘들의 이름과 계승이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등 그 신빙성이 매우 떨어졌다. 이로 인해 수니파와 12이맘파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모든 혈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오로지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했다.[5] 오늘날의 카이로[6] 아라비아 반도 동부, 그중에서도 홍해에 면한 평야 지역을 가리킨다. '티하마 (تِهَامَةُ)'는 고대 셈어로 '바다'를 의미한다.[7] 대부분은 콥트교멜키트교였다.[8] 아마도 1041년 또는 1044년으로 추정된다.[9] 상이집트 9개, 하이집트 14개[10] 이때 시아파 이맘 후세인 이븐 알리의 시신이 아스칼론에서 카이로로 옮겨져 오늘날의 알 후세인 모스크에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11] 일명 살라딘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