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777><colcolor=#FFF> 독일 제국군 육군 보병대장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 Paul von Lettow-Vorbeck | |
이름 | 파울 에밀 폰레토포어베크[1] Paul Emil von Lettow-Vorbeck |
출생 | 1870년 3월 20일 프로이센 왕국 라인란트 |
사망 | 1964년 3월 9일 (향년 93세) 서독 함부르크 |
복무 | 독일 제국군 국가방위군 |
최종계급 | 독일 제국군 보병대장 |
참전 | 의화단 운동 헤레로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 - 탕가 전투 |
주요서훈 | 푸르 르 메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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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활약한 독일 제국의 군인. 탕가 전투에서 얻은 아프리카의 사자(Der Löwe von Afrika)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2. 생애
프로이센 왕국 라인란트 지방의 레토포어베크 가문에서 태어났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890년 임관하였다. 1900년 의화단 운동 진압을 위해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1901년에 독일 참모부로 돌아갔다. 1904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로 배치되었으며, 로타르 폰 트로타 아래에서 헤레로족의 반란의 진압에 투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헤레로족 포로 심문 과정에서 게릴라전에 대한 가치와 그들의 삶과 규율에 대해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1907에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1913년까지 독일에 배치되었다가 1914년에 독일령 서아프리카로 잠시 파견되었다가 다시 독일령 동아프리카로 파견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아프리카의 각국 식민지 정부는 중립을 유지하는 것을 희망하였으나 결국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고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게릴라 전술을 통해 탕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아스카리로 불리는 현지인 군대를 이끌면서 스와힐리어를 구사하며 현지인들을 존중하는 방침 덕분에 규율을 다질 수 있었고, 게릴라전을 통한 지연전, 방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다. 1916년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1916년부터 영국군의 대대적 증원이 이루어지면서 동아프리카 전선의 전황은 더욱 독일 제국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레토포어베크가 이끄는 부대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거듭 승리를 거두었으나 결국에는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항복해 지원이 끊기자 영국군에게 항복한다. 본토에서의 전쟁을 포함하여 독일령 동아프리카도 항복하였지만, 레토포어베크가 이끈 전투 자체는 패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1919년 독일로 복귀하면서도 브란덴부르크에서 성대한 개선식을 받을 수 있었다.
전간기 동안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고 국가방위군에만 남아 있었으며 1920년 보병대장으로 전역한 후 잠시 정계에만 몸담았었을 뿐, 재선을 하지 않고 야인으로 지냈다. 점차 나치당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나치들은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과 같은 전쟁영웅을 선전에 이끌여들였으나 레토포어베크는 나치당을 혐오하였다.[2] 1935년 아돌프 히틀러는 영국 대사직을 부탁하였으나 레토포어베크는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전쟁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에게 나치는 보복할 수 없었고, 오히려 마켄젠 원수가 더욱 레토포어베크를 선전의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고 제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지속적으로 나치당의 감시를 받았으며 1939년 독일 국방군 명예 보병대장을 수여하는 정도로만 대우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경제적으로 곤궁에 처하였으며, 두 아들은 국방군에서 복무 중 사망하였다. 전후 경제를 회복하면서 가계도 나아졌고, 독일령 동아프리카였던 탄자니아를 방문하여 옛 아스카리 전우들과 재회하기도 하였다. 이후 1964년 서독 함부르크에서 사망하였으며, 옛 아스카리 부대원들이 초청받아 참석한 아래 독일 연방군 및 정부에 의해서 장례가 치러졌다. 그 해 서독 정부는 아스카리 부대원들에게 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