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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666><colcolor=#FFF> 이름 | Joachim Lemelsen 요아힘 레멜젠 |
| 출생 | 1888년 9월 28일 |
| 사망 | 1954년 3월 30일 (향년 65세) 서독 니더작센주 괴팅겐 |
| 복무 | 독일 제국군(1907년 ~ 1918년) 국가방위군(1918년 ~ 1935년) 독일 국방군(1935년 ~ 1945년) |
| 최종 계급 |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
| 주요 서훈 | 곡엽기사 철십자 훈장 |
1. 개요
독일 국방군 기갑대장.2. 생애
2.1. 초기 생애
레멜젠은 1907년 7월 1일에 장교후보생으로 독일제국군에 입대했고, 1908년 11월 19일에 소위로 임관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서부 전선에서 대대 부관으로 복무했고, 1914년 12월 24일에 중위로 진급했다. 전쟁 중의 공로로 그는 호엔촐레른 왕가 십자 훈장과 한자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이후 국가방위군에도 남았다.1931년 11월 1일, 레멜젠은 중령으로 진급했고 1934년 4월 1일에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1935년 4월 1일에 드레스덴의 군사학교 교장에 임명되었고 1937년 4월 1일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1938년 3월 1일, 레멜젠은 제29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고 1939년 4월 1일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2.2.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레멜젠은 폴란드 침공 동안에 제29보병사단을 이끌었다. 이 기간 동안 그의 직접적인 명령이 있었는지 불분명하지만 그의 지휘를 받는 부대가 폴란드 전쟁 포로 약 250~300명을 사살하는 전쟁범죄가 발생하기도 했다. 프랑스 침공 당시 그는 제29보병사단을 계속 지휘하다가 1940년 5월 29일에 제5기갑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40년 8월 1일에는 포병대장으로 진급했다.1940년 11월 25일, 레멜젠은 제47기계화군단장에 임명되었고 그의 부대는 구데리안이 이끄는 제2기갑군의 휘하로 배속되었다. 1941년 6월 4일 기갑대장이 되어 병과가 전속되었고,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자 그의 부대는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다. 그의 지휘 하에서 제47기계화군단은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에 참전한 뒤 스탈린 선을 돌파했고 특히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큰 활약을 보여주었다. 키예프 전투에서도 소련군의 남서부 전선을 붕괴시키는 등 활약을 펼쳤고, 뱌지마-브랸스크 포위전에 참가했다. 하지만 다른 부대들과 마찬가지로 모스크바 전투에서 그의 사단은 꽤 큰 손실을 입어야 했다. 이후 동부전선에서 보여준 공적으로 1941년 7월 27일에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특기할 만한 점은 폴란드 침공 당시의 관리 미숙에 마음이 불편했는지, 동부전선에서의 지휘 기간 동안 그는 휘하 부대에 소련군 포로들을 학살하지 말도록 명령했고 민간인들 또한 학살의 대상이 아니라 볼셰비즘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대상임을 강조했다.
1942년, 제47기계화군단은 주요 격전지에서 한발 물러선 중부집단군에 있었고 6월에 제47기갑군단으로 개칭되었다. 청색 작전의 개시로 전장의 주공이 남부로 이동하며 거의 모든 차량화 부대가 남부 집단군으로 이전되었기 때문에 그의 군단은 이름만 기갑군단이었고 사실상 보병군단이었다. 1942년부터 1943년 봄까지, 레멜젠과 그의 군단은 후방에서 파르티잔을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43년 7월 5일, 성채 작전(쿠르스크 전투)이 개시되자 레멜젠의 기갑군단은 기갑전력을 보충받아 일선에 투입되었다. 비록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의 패배로 전황은 크게 기울었지만 그는 후속전에서 부대를 성공적으로 후퇴시키는데 성공하여 1943년 9월 7일 곡엽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1943년 9월 4일부터 1943년 12월 31일까지 그는 이탈리아 주둔 제10군 사령관을 지냈고, 1944년 5월 1일에는 프랑스 주둔 제1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기 직전인 1944년 6월 5일에는 이탈리아 주둔 제14군 사령관이 되었고, 1944년 10월 26일에는 이탈리아 주둔 제10군 사령관을 맡았다. 이탈리아에서도 그는 소련에서처럼 파르티잔을 토벌해야 했다.
1945년 2월 22일, 그는 다시 이탈리아의 제14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945년 4월 연합군의 마지막 공세 당시 지휘를 맡았다. 1945년 5월 8일, 그와 제14군의 잔존 병력은 영국군 에게 포로로 잡혔다.
2.3. 말년
레멜젠은 1947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영국군 주재로 열린 알베르트 케셀링의 전범 재판에서 증언했다. 그 후 1948년 4월 10일 레멜센은 석방되었고, 1954년에 사망했다.3. 평가
곡엽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훈받은 유능한 기갑 지휘관이며, 엄격한 지휘 철학의 소유자였다. 레멜젠은 동부전선 기간 동안 전방위적으로 나타난 소련군 포로 학살 행위에 반대했는데,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후 불과 3일 뒤인 6월 25일에 그가 휘하 부대에 내린 명령서는 다음과 같았다."나는 포로와 민간인 모두에 대한 무의미한 총살이 발생한 것을 목격했다. 군복을 입고 용감하게 싸우다 포로로 잡힌 러시아 군인은 명예로운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는 민간인을 볼셰비즘의 멍에에서 해방시키고 싶고 그들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이 명령은 파르티잔이나 정치장교에 대한 총통의 처분 명령에 대치되지 않는다.”
6월 30일에는 더 구체적인 명령을 내렸다."내 명령에도 불구하고 포로, 투항병에 대한 총살 사건이 반복적으로 보고되고 있으며, 무책임하고 무분별하며 범죄적인 방식으로 자행되고 있다. 이는 살인이다! 총통의 명령은 정치장교와 모든 파르티잔 전투에 대한 무자비한 조치를 명령한다. 이 집단에 속하는 것으로 명백히 확인된 자들은 장교의 명령에 따라서만 체포되어 총살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운 러시아 병사는 비정규 전투원이 아니라 부상병으로서 명예롭고 적절한 대우와 치료를 받을 자격이 있다. 파르티잔에 대한 가혹한 조치와 포로와 투항병에 대한 체계적인 적절한 대우는 독일군의 막대한 피해를 줄일 것이다."
즉 그가 쓴 바와 같이 파르티잔에 대해서는 가혹하고 철저하게 토벌했지만 정규 소련군이나 소련 민간인에 대해서는 최대한 온건하게 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독일군 지휘관들이 이 사람만큼만 했더라도 독일은 파르티잔으로 인한 고생을 훨씬 덜 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