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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사회당(19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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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진보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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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 통일사회당 (해산)


(개별 합류)[1]

(개별 합류)[2]

[[한국사회당(1960년)|]]
(개별 합류)[3]

(개별 합류)
(재창당) 통일사회당 (등록취소)



(개별 합류)

(개별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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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파일:통일사회당 글자.svg
통일사회당
<colcolor=#104D82> 한문 명칭 <colbgcolor=#fff>統一社會黨
등록번호 제17호[4]
1차 창당일 1961년 1월 21일
1차 해산일 1961년 5월 16일
2차 등록일 1967년 4월 7일
2차 해산일 1973년 7월 2일 (성립요건 흠결)
사무소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138-2
대표자 김철
국회의원
0석 / 219석
당 색
진청색 (#104D82)
국제조직

당원 수 20,299명
(1973년 7월 2일 기준)[5]
1973년 7월 2일 기준
1. 개요2. 역사
2.1. 결성과정2.2. 대중당과의 통합시도2.3. 제7대 대통령 선거와 그 이후
3. 역대 지도부4. 선거 결과
4.1. 대통령 선거4.2. 국회의원 선거
5. 기타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1. 개요

1961년에 창당된 대한민국의 진보정당.

창당된 1961년에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해체된다. 1965년에 김철 등에 의해 재창당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1967년에 마침내 통일사회당이 다시 등록되었다.

1972년에 10월 유신이 일어나고 정당 성립요건이 강화되어, 통일사회당의 정당등록이 취소되고 해산되었다. 그러나 1974년에 같은 이름으로 재창당한다.

2. 역사

2.1. 결성과정

1960년, 사회대중당은 진보당계와 비진보당계로 분열되었다. 1961년 사회대중당 창당준비위원회의 다수파는 통일사회당 준비 위원회를 구성했고 창당했다. 당시 위원장은 이동화였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해체된다. 그 후 1965년김철, 안필수, 구익균[6] 등이 통일사회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7월 20일 대성빌딩에 모여 대표위원에 김성숙을 선출했다. 창당준비위원회는 민주사회당의 서민호, 혁신계의 정화암까지 3자를 공동대표로 한다는 통합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까지 도달하지만 결렬되었다. 7월 2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통일사회당 중앙당 창당준비위원회 결성신고를 마쳤다. 하지만 12월 16일 대표위원 김성숙윤보선의 신한당 창당에 참여한 행위를 이유로 제명하고 1967년 4월 3일 대표최고위원 김성숙이 당 공식결의에 불복하고 대중당에 입당하였다는 이유로 권한정지 처분을 하는 우여곡절을 겪고 1967년 4월 4일 대의원 58명중 40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개최하고 이봉학을 대표로 선출하였고, 4월 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정당등록을 하고 전국 47개의 지구당과 함께 출범하였다.

2.2. 대중당과의 통합시도

1968년 7월 13일 대중당의 이형연 대변인은 대중당과 통일사회당이 합당에 합의하였다고 발표했고 이날 종로호텔에서 열린 양당 전권대표자회의에서 도출된 합의안은 다음과 같다.
당의 노선은 민주사회주의를 추구한다.

통합신당의 이름은 양당의 이름을 반영하도록한다.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있는 인사, 재야인사들의 참여를 위해 특별배려를 한다.
양당은 합당절차에 따른 계속적인 협의를 위해 대중당에서는 이청천, 김하경, 안정용, 김린, 이형연, 이원수를 전권대표로 통일사회당에서는 손철, 김철, 안필수, 류갑종, 유영봉, 김성식을 전권대표로 선출하여 교섭을 진행해 나갔으나 그해 9월 24일에 실시된 재보궐선거에서 대중당이 민주공화당에서 제명된 신용남, 기세풍을 공천한 것에 대해 통일사회당이 반발함으로써 결렬되었다.

2.3. 제7대 대통령 선거와 그 이후

1970년 12월 1일 대성빌딩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통일사회당은 김철 부위원장을 당위원장으로 추대하는 한편, 다음해에 있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나올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김철 후보는 4월 24일 보수 야당인 신민당에 지나친 기대를 가질 순 없지만 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수립할 수 있는 정권 교체를 이룩하기 위해 후보를 사퇴한다 밝히며 대통령 선거에서 물러난다. 또한 신민당 전국구의원인 박재우가 통일사회당에 입당하여 잠시나마 원내정당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현역의원인 박재우 후보를 비롯해 모든 후보들이 낙선하고, 전국구의석을 받기에도 부족한 표를 받아 다시 원외정당의 자리로 돌아간다.

이후 10월 유신이 일어났고, 군소정당은 존속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정당법의 지구당 요건이 강화되었다. 또한 김철 위원장이 반공법 위반으로 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결국 통일사회당은 1973년 7월 2일에 정당법부칙 제2.3항에 따라서 등록이 취소되었다. 일부 인사들은 이듬해 통일사회당이라는 정당을 다시 창당했다.

3. 역대 지도부

  • 대표자
    • 1대 이봉학(1967년 4월 7일~1970년 4월 29일)
    • 권한대행 김철(1970년 4월 29일~1971년 1월 19일)
    • 2대 김철(1971년 1월 19일~1973년 7월 2일)

4. 선거 결과

4.1. 대통령 선거

<rowcolor=#fff> 연도 선거명 후보 결과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김철 사퇴[7]

4.2. 국회의원 선거

<rowcolor=#fff> 연도 선거명 지역구 전국구 총합
1967년 7대 0/131 0/44 0/175
1971년 8대 0/151 0/51 0/204
1973년 9대 미참여

5. 기타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대한민국의 진보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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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동화, 유성환, 구익균, 서상일, 윤길중, 박기출 등.[2] 유성환 등.[3] 김철, 김성숙 등.[4] 1967년 2차 등록 시.[5] 1967년 등록 당시 당원 수는 11,500명이었다.[6] 구익균은 이후 민주사회당(대중당) 쪽으로 간다.[7] 신민당 김대중 후보 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