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의 진보정당 | ||||
| (창당) | → | 민주혁신당 | → | (해산) |
| → | 사회대중당 (개별 합류) | |||
| → | 한국사회당 (개별 합류) | |||
| 민주혁신당 | |
| <colcolor=#3cb371> 약칭 | 민혁당 |
| 창당일 | 1957년 10월 15일 |
| 해산일 | 1960년 2월 2일 |
| 대표 | 서상일 |
| 이념 | 진보주의 페이비언 사회주의 평화주의 반공주의 자유민주주의 |
| 당 색 | 붉은색 (#E0115F) |
1. 개요
1957년 서상일이 장건상 등과 함께 혁신계 세력을 통합하여 만든 진보주의 정당.2. 특징
본래는 조봉암도 참여하려 했었으나 조봉암은 의견 차이로 인해 참여하지 않고 진보당을 따로 창당한다. 그러나 장건상계와 서상일계 간에 갈등이 벌어지고, 결국 서상일이 장건상계 인사 7명을 제명하였다. 이후 장건상은 혁신세력 연합을 주장하며 진보당 등과 연합해 통일준비회를 발족하게 된다. 이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했으나 1석의 의석도 건지지 못한 채 원외정당으로 있다가 1960년 2월 해체하고 만다. 정당 해산 이후 남은 인사들은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 당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훗날 제15대 국회의 전반기 국회의장이 되는 김수한을 비롯해 장건상, 정현섭, 김성숙, 고정훈, 신숙, 박기출, 이동화 등이 있다.창립하는 데 참여한 인물 대부분이 전직 민족주의 계열 운동에 참가한 전적이 있고, 반공주의 성향을 가졌다는 것이 특이점이다. 반공혁신 계열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시기 일본 민사당과 비슷한 점이 있다.
강령 및 정강에 있어서 페이비언 협회식 사회주의를 추종한다는 것과, 강력한 반공주의를 내세웠다는 것 이외에는 진보당과 별 차이가 없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서상일이 진보당 사건 당시 조봉암이 공산주의자라는 증언을 한 것을 계기로 양당 간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4.19 혁명 이후 혁신계열이 사회대중당으로 통합되었을 때도 계파 간 협력에 장애로 작용하게 된다.
약칭이 민혁당이지만 1999년에 있었던 민혁당 사건의 민족민주혁명당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다.
3. 역사
1956년 5월 15일 정·부통령선거 후 정계는 보수와 혁신의 대립을 비롯하여 각 세력간에 혼란을 빚고 있었다.보수세력의 자유당 내부에는 주류와 비주류가, 야당인 민주당 내에는 구 민국당과 흥사단, 그리고 혁신세력은 서상일(徐相日)·조봉암(曺奉岩)의 진보당계, 민주사회당의 무정부주의인 정화암(鄭華岩), 민족자주연맹의 구 중간파인 조헌식(趙憲植), 근로인민당계의 사회당운동에 가담하였던 김창숙(金昌淑), 비자유·비민주 측면의 김홍식(金洪植) 등의 준사회당운동 등이 대표적 양상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진보세력들은 대동단결운동의 결과, 1957년 10월 15일 서상일을 중심으로 이 당을 결성하여 1960년대까지 존립하였다.
진보당추진위원회(조봉암·서상일 중심), 공화당 존속파와 조선민족청년단의 잔류 간부간에 합의된 민주혁신운동의 3대원칙(반공통일 재건에 효과적인 경제정책, 비보수, 원내세력에 의한 추진)을 내걸고, 민주혁신당 추진 12인위원회가 신당결성을 추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서상일·조봉암·김홍식·조헌식 등은 5인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들은 다시 그 위원회를 확대하여 신당창당을 위한 7인연락협의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1956년 10월 2일서상일과 조봉암 간의 이념상의 대립에 따라 진보당계가 7인연락협의회로부터 철수하면서 반대 입장을 나타내어 분열되었고, 민혁당 창당준비위원회는 계속 신당결성을 추진하여, 1956년 11월 8일 우파사회주의자 서상일·김성숙(金星淑)·이동화(李東華)·고정훈(高貞勳)·장건상(張建相) 등 44명이 중심이 되어 창단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그 위원회의 구성문제 때문에 서상일과 장건상간의 근로인민당계와 비근로인민당계로 분립되어, 장건상은 진보당 쪽으로 기울어 민주혁신당 창당준비위원회의 이탈파가 되었다. 그리고 서상일중심의 민주혁신당창당준비위원회파는 1957년 10월 15일 555명(596명 중)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결당대회를 개최하였다.
민주혁신당의 당기구는 상임집행 최고기관으로 정치위원회를 설치하였으며, 간사장과 그 산하에 당무·조직·선전의 3국과 15부서를 설치하고, 그 밖에 통제·재정·정책·국회대책·선거대책 등 5개 위원회와 고문회의 등을 두었다.
그리고 강령은 공산독재·관료압제·자본전제·기타 일체의 부패세력의 배격과 내각책임제 실시, 민족자본의 육성으로 복지사회의 실현, 방위태세의 확립과 민주방식에 의한 조국통일의 완수, 호혜원칙에 의한 우방과의 외교강화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1959년 11월 20일 내무부장관 최인규(崔仁圭)가 민주혁신당은 정당 등록이 될 수 없다고 밝혔고, 장택상(張澤相)이 재야 비보수계 군소정당 등을 규합, 1960년 2월 2일 반독재민주수호연맹을 결성함에 따라 민주혁신당도 여기에 동조하여 1960년 자유당의 마지막 선거인 3·15정부통령선거를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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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민주혁신당 (民主革新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