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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 ||||
| ← | | → | 83호 |
| | 창경궁 대온실 |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 ||
<colbgcolor=#e3ba62> 덕수궁 정관헌 德壽宮 靜觀軒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 |
수량 / 면적 | 1동 지상 1층, 지하 1층, 바닥면적 297.1㎡ | |
건축시기 | 1897년 ~ 1901년 사이 (창건) | |
설계자 |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 (Афанасий Иванович Середин-Сабатин) / (추정) |
<colbgcolor=#e3ba62> 정관헌 |
정관헌 동측면 |
정관헌 야경[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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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e3ba62> 정관헌 영상 |
덕수궁은 근대에 지은 황궁이니만큼 경내에 서양식 건물, 양관(洋館)이 여러 채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정관헌이다. 다만, 다른 양관들과 달리 한국 전통 가옥의 일부 요소가 혼합된 형태이다. 러시아 제국 건축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4]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현존하는 덕수궁 내 양관 중 가장 오래되었다.
‘정관(靜觀)’ 뜻은 '조용히(靜) 내다 본다(觀)'이다.
2. 용도
건물의 용도는 확실하지 않으며 여러 의견이 있다. 그 중 고종이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감상했던 카페로 잘 알려져 있다.그러나 공식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어진 관련 기사만 나온다. 1901년(광무 5년) 2월에 태조 이성계의 준원전 본 어진을 이곳에 모시라는 기록을 시작으로##[5],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6]를 보관하고#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순종실록부록》의 기사도 1912년에 여기 있던 어진들을 중화전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7]
실록보다 더 기사량이 많은 《승정원일기》에는, 어진 외에도 신하들을 접견한 것과## 봉심[8]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역시 커피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정관헌이 애당초 카페였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다만, 전용카페는 아니더라도 황실에서 생활 공간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제기된다. 1920년 5월에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 〈자규(子規)야[9] 우지마라 주인(主人) 일흔[10] 덕수궁(德壽宮)을 백량동작생황진[11]이 옛이야기가 아니로구나〉에서는 정관헌을 '고종이 아기였던 영친왕과 함께 여름 더위를 잊던 곳'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1915년 덕수궁 실측 자료인 〈덕수궁 원안〉에 따르면, 내부에 서양식 욕실이 설치되었으며, 지하층에는 조리시설을 갖춘 주방이 딸려 있었다. 이를 통해 적어도 일상 생활을 영유할 수 있는 건물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정관헌의 유력한 용도는 고종 황제의 서재다. 일단 고종시대에 정관헌에서 일어난 가장 확실한 사건은 임인년에 어진과 예진을 모사한 것이다. 이 관습은 숙종때 시작되었는데 영•정조시대를 거치며 10년마다 하는 행사로 자리잡았다. 이전 임금들의 어진 도사처로는 정조대의 창덕궁 서향각, 철종대의 창덕궁 희정당이 있다. 정조에 대한 계승 의식이 투철했던 고종은 갑술년(1874)에 자신의 어진을 서향각에서 모사했다. 갑자년(1864)부터 계유년(1873)까지 왕실의 각종 책보를 서향각에 자주 봉안한 것으로 보아 고종의 서향각 또한 정조의 서향각과 마찬가지로 각종 서화를 소장하고 신하들을 접견하는 서재의 성격이 강하게 보인다.
3. 역사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현재 남아있는 덕수궁의 건물 중 즉조당,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1897년(건양 2년) 이후에 신축한 전각이다. 상술한 1901년(광무 5년)에 적힌 태조 어진의 정관헌 봉안 기록을 종합하면 그 사이에 건립한 것으로 추측된다.##[12]<colbgcolor=#e3ba62> 일제강점기 정관헌[13] |
<colbgcolor=#e3ba62> 1973년 덕수궁 휴게실로 쓰이고 있는 정관헌 | <colbgcolor=#e3ba62> 1998년 정관헌에서 다과회를 연 모습 |
8.15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덕수궁 휴게실'이라는 이름으로 기능했다. 1954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에서 주최한 광복절 기념 음악회를 비롯하여# 각종 모임 및 행사가 이따금씩 열렸다.#
윤정희가 출연한 1977년 영화 〈야행〉에서 카페로 영업 중이던 정관헌의 내부 모습이 나온다. 현재와는 다르게 칸마다 쇼윈도가 설치되었고 기타 현대식 시설도 갖춰져 있었다.
문화재청에서 2004년 2월 6일 등록문화재 제82호로 지정했다. 그러나 이미 덕수궁 전체를 사적 제124호로 관리하고 있었기에 영역이 겹친다는 이유로 2008년 6월 23일 자로 지정 해제되었다.
4. 구조
이 포스팅을 참조. 자세하게 정리를 잘 해놓았다.5. 여담
- 건물 동남쪽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정관헌 촉각 모형이 있다.
<colbgcolor=#e3ba62> 〈2020년 대한제국 외국공사 접견례〉 행사 영상 |
<colbgcolor=#e3ba62> 〈정관헌에서 명사와 함께〉 행사를 개최한 10년 간 시민 2만명이 참관했다는 내용을 다룬 2018년 9월 28일 자 YTN 뉴스 ' |
[A] 2008년 6월 23일 지위 박탈, 사적 124호로 통합.[A] [3]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4] Афанасий Иванович Середин-Сабатин. 1860 ~ 1921. 흔히 ‘사바틴’으로 널리 불린다. 근대기 서울과 인천의 주요 건물들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을미사변 당시 현장을 직접 목격한 2명의 외국인 중 한 명이다.(다른 한 명은 시위대 지휘관이었던 미국인 다이(W. M. Dye) 대령.[5] 저 당시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선원전이 불탔기 때문에 태조의 어진을 베껴 그리려고 함흥의 준원전에 있던 그림을 잠시 덕수궁으로 옮겼다. 하지만 태조 어진을 실제로 여기에 모시진 않았고, 경운당이란 건물에 임시로 보관했다가 베껴 그린 직후 다시 함흥으로 옮겼다.[6] 당시 순종은 황태자였기에 그의 초상화는 어진이 아닌 예진(睿眞)으로 불렸다.[7] 단, 《순종실록부록》은 일제가 만들었고, 일제강점기의 고종(이태왕)과 순종(이왕)의 동정을 다뤘기에 《조선왕조실록》으로 보기엔 힘들다. 더군다나 조선 시대를 다룬 《고종실록》과 《순종실록》도 일제의 이왕직에서 펴낸 것이기에 정식 실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8] 奉審. 왕명으로 왕실의 사당이나 무덤, 초상화 등 여러 시설과 물건들을 관리하고 점검하던 일.[9] 두견새.[10] '잃은'의 당시 표기법.[11] 柏粱銅雀生黃塵. "잣나무 서까래 구리로 만든 새는 누런 먼지만 내고 있네"라는, 당나라 시인 왕발(650 ~ 676)의 시 〈임고대편(臨高臺篇)〉에 등장하는 구절로 세월의 무상함을 표현한 것이다.[12] 당시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선원전이 불탔기 때문에 태조의 어진을 베껴 그리려고 함흥의 준원전에 있던 그림을 잠시 덕수궁으로 옮겼다. 하지만 태조 어진을 실제로 여기에 모시진 않았고, 경운당이란 건물에 임시로 보관했다가 복제본을 그린 직후 다시 함흥으로 옮겼다.[13]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14] 2009년 문화재청과 ‘문화재지킴이’ 협약을 맺고 현재까지 다양한 문화재 보호활동을 실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