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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형(영화 감독)

파일:이규형.jpg
이름 이규형(李奎炯)
출생 1957년 6월 15일
사망 2020년 2월 7일 (향년 62세)
학력 신일고등학교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 (중퇴)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데뷔 1986년 영화 '청(블루 스케치)'

1. 개요2. 생애
2.1. 전성기(1980년대 중반)2.2. 망작 제조기2.3. 헝그리 베스트 파이브2.4. 일본 연예계 전문가 활동2.5. 영화 복귀(2000년대)2.6. 몰락2.7. 사망
3. 기타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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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영화감독, 르포작가였다. 여러 편의 소설을 쓰기도 했다. 신일고등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중퇴),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

2. 생애

2.1. 전성기(1980년대 중반)

1983년 영화 <사랑만들기>와 1985년 영화 <내사랑 짱구>의 각본을 맡았다.

1986년 "청(블루 스케치)"로 데뷔했으며, 이 영화에서는 당시 신인배우였던 천호진과 모델로 활동하던 신인 조민수(영화 첫 데뷔작)가 나온다. 내용은 타이틀처럼 '블루(우울)'해서 흥행에는 실패했다.(서울관객 3만 9천) 그래도 평은 나쁘지 않았으며 지상파에서 방영했다.

1986년에 출판한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가 책이 잘 팔렸고, 이듬해에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를 만들어서 흥행에도 성공(서울관객 26만)시켰다. 배우진을 보면 당시 그나마 유명한 배우는 강수연이었고, 철수역의 박중훈과 '보물섬'역으로 출연한 김세준은 생짜 신인이었다. 오히려 단역으로 출연한 개그맨 최양락이 이 세 명보다 더 인지도가 있었다, 여하튼 1980년대의 대학생 컴퍼스 라이프를 코믹하고 발랄한 대사와 트렌디 드라마같은 전개로 그려낸, 이 전의 구닥다리 청춘물과 확연히 대비되는 영화였다. 이것으로 리즈 시절이 열리지만, 오래 가진 못했다.

그 다음 영화인 "어른들은 몰라요"가 서울관객 22만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해 리즈시절을 이어가나 했지만…

2.2. 망작 제조기

그 뒤로 "굿모닝 대통령(1989년/서울관객 58,117명)","난 깜짝 놀랄 짓을 할거야(1990년/서울관객 23,938명)","공룡선생(1992년/서울관객 7,401명...)[1]" 등등 내놓는 작품마다 말아먹었다.

코미디로 만든 것이긴 해도 오죽하면 1990년에 하던 쇼 비디오 자키에서 하던 'VJ 법정 최변호사 김변호사'에서 변호사 역으로 원고측은 김미화, 피고측은 최양락이 맡았는데, 극중에 영화가 너무 재미없다고 환불해달라는 실제 소송 사건을 토대로 나올 당시에 최양락이 배우로 나온 어른들은 몰라요나 난 깜짝 놀랄 짓을 할거야같은 영화를 이야기하며 자신이 배우로 나온 것을 자랑하자 판사 역으로 나온 김진호가 "아니? 최변호사. 뭡니까? 전혀 듣도 보도못한 영화들인데요? 모두 망한 영화인가요?"라고 말해 최양락을 울적하게 만든 게 나왔는데 이규형에 대한 미래같은 복선이 되어 버렸다.

굿모닝 대통령은 스포츠서울에 자신이 먼저 영화화 이전에 소설로 발표해 작은 화제를 모았다. 한양대 연영과 후배[2]이자 당시 리즈 시절이었던 가수 이상은이 주연이었는데, 당시에는 극히 드물었던 배낭여행을 소재로 한 것[3]이다. 극히 드물기도 했지만, 당시 올림픽 특수와 경제성장에 힘입어 갓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시기이기 때문에, 해외여행에 설레는 수요층을 노린 소재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영화나 소설이나 참 할 말을 잃게 하는 어이없는 구성이 가득하다. 베트남 보트 피플을 약탈하는 태국 해적들에 맞서 싸우다가 죽은 일행에 태극기를 걸쳐 주고 애국가를 부르는 걸 두고 1989년 영화지 로드쇼에선 이건 뭔 짓거리냐며 비웃듯이 악평했다. 그나마 영화 주제가로 쓰인 오석준, 장필순, 박정운, 일명 '오장박'이 부른 내일이 찾아오면이 인기를 끌면서 '굿모닝 대통령'이란 영화에서 유일하게 건질 만한 것은 바로 이 노래 하나라는 말도 나왔다.[4] 여담으로 제목이 '굿모닝 대통령'인 이유는 여주인공의 꿈이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대통령이라서다. 제목이 비슷한 장진감독의 2009년작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굿모닝 대통령'과 전혀 상관없다.

이 시절 쓴 소설들을 보면 자신의 경험담과 들은 얘기를 반복해서 우려내는 한계를 보여 주었다. DMZ에서 근무하면서 전우가 죽은 얘기와, 생명수당으로 어머니에게 성경을 사 준 얘기(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는 기독교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조동진의 '행복한 사람' 얘기 등은 스케치 시리즈 (블루 스케치, 청춘 스케치, 별별 스케치, 자서전 격인 스케치북)에 중복 등장한다.

2.3. 헝그리 베스트 파이브

이후 스포츠 서울에 연재했던 헝그리 베스트 파이브라는 농구만화 스토리(그림은 허무영)를 쓰기도 했는데 만화는 꽤 성과를 냈으나 애니메이션화는 실패. 슬램덩크의 아류작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규형 본인은 슬램덩크가 나오기 전부터 농구만화를 기획하고 있었다고 하고, 증거를 대기도 했다. 심지어 디어보이스처럼 슬램덩크보다 먼저 나오고도 아류작 취급받은 작품도 있다는 점에서 진지하게 대할 필요는 없는 루머다. 그리고 슬램덩크도 트레이싱 논란이 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어쨌든 이 원작만화를 직접 감독한다고 하여 다시 화제를 낳으며 1995년 12월에 계몽사 계열 영프로덕션에서 제작하여 헝그리 베스트 파이브 애니메이션판을 개봉시켰으나 처절하게 망했다. 애니만 본 사람이 슬램덩크 아류작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건 슬램덩크 제작진을 초청해 만들었기 때문에 닮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원작 팬들의 감상은 그냥 우리 손으로 만드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는 평. 슬램덩크도 아니고 헝그리 베스트 5도 아닌 어중간한 작품이 나와버렸다.(...) 감독도 우이 타카시이고 거의 70% 이상 일본의 ROBOT 사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소문이니 뭐니 하는데 아니다. 1995년 영화월간지 로드쇼에서 제작 개봉예정이라고 제법 크게 소개할 때 애니 부분 파트를 일본 제작진 도움을 받아야 했다고 발언했는데, 여기서 애니 파트 연출 보조로 우이 타카시를 언급했다.

그러나 원작은 슬램덩크와의 공통점이 농구를 한다는 것 외에는 거의 없다. 작중 경기 중 하나가 북산 대 능남의 경기와 비슷하다고는 하는데 나머지 경기는 그런 의혹이 없다. 강준호와 강백호의 캐릭터성이 닮았다면 닮았다고 볼 수도 있긴 하다. 그러나 활약도 그렇고 비중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강백호와는 다르다. 헝그리 베스트 5의 경우 슬램덩크보다는 연재 당시 대히트했던 농구대잔치의 각 대학 선수들이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주인공 김영웅의 경우 농구대통령이라는 별명은 허재에게서 따왔고 외모는 이상민을 닮았다. 작중 최고의 슈터인 백지훈은 문경은을 빼다박았다. 그리고 한국작품답게(...) 연애 요소는 꼭 들어가지만, 이건 등장인물들이 성인이니까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다. 만화의 재미는 사람에 따라 다르니 평가는 생략. 참고자료

2.4. 일본 연예계 전문가 활동

여하튼 영화가 연속으로 망하고 애니도 망하면서 묻히는가 했더니만 일빠적인 책을 여러권 내면서 다시 주목 받게 되었다.[5] 영화가 잘 풀리지 않자 1991년 일본에 갔다. 무슨 자격으로 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일본은 관광비자를 받아야 갈 수 있는 나라였고, 그것도 한번 입국하면 2주가 최대 시한이었다. 이규형이 별 직업이 없이 일본에 저렇게 오래 머물 수 있었던 것은 미스터리다.[6]

이규형의 일본찬양은 성급한 일반화와 견강부회로 일관했다. 사실 재미도 있고 베스트셀러도 되었지만, 여러가지 개인적 판단을 일반적인 것으로 이야기하여 별로 신빙성이 없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일본 대중문화 개방 논의와 더불어 이런 활동으로 유명해져 강연으로도 돈을 꽤 모았다는 후문. 게다가 일본어 학습서도 펴내 베스트셀러가 되고.. 1997년 라디오단파라는 일본 방송사가 주는 상을 받기도 했다.

이 당시 이규형이 주로 하던 일이 일본 대중문화 컨텐츠를 한국에 소개하는 것이었다. 사실 한국 방송계의 흑역사이지만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만해도 일본 유학생들이 하던 아르바이트중에 하나가 한국 방송사에 일본 방송프로 녹화본 등을 유출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일본의 원단을 들여와서 한국방송 제작에 표절 참고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관련 방송프로에 자주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이사람이 쓴 책중에 'JJ가 온다'(1999)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주로 일본 연예게와 아이돌같은 것을 소개하며 미화하는 책이다. 이 책을 펴내면서 '일본 문화를 개방하면 한국은 일본 연예계의 내공에 패배할 것'이며 한국 연예계는 일본 아이돌에게 초토화된다는 말을 한 적 있다. 오히려 현실은 일본에서 한류 열풍이 불어 한국 아이돌이 일본의 메인스트림을 장악하고, 심지어 전세계적으로 케이팝 붐이 일어났으니,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다만 이것은 이규형만의 시각은 아니고 그 시대에 다수가 우려하던 것이었다. 뉴스아카이브를 통해 일본문화 개방에 대해 반대하는 1980, 1990년대(일본문화개방 이야기는 1980년대에도 있었다) 연예계 기사들을 찾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런 인식은 국내 연예계 전반에 당연한듯 퍼져 있던 "문화개방 반대 이유"였다. 일본영화를 개방하던 1990년대 말엽에도 이런 반응도 있었으나 20년 넘도록 일본 실사 영화로 100만 관객을 넘긴 작품은 겨우 3작품 정도이고, 그외에 하울의 움직이는 성, 너의 이름은., 슬램덩크 등 애니메이션이 성공한 것 빼고 한국 영화계에서 일본영화에 대한 우려는 사라진 지 오래다.

일본은 1950~1960년대부터 구로사와 아키라 같은 감독들이 베니스 영화제 수상을 하는 등 국제적으로 인정 받는 영화들을 내놓았기에 일찍 일본 문화가 개방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런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히려 일본 문화가 개방된 1990년대 후반부터 정작 일본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원작 영화에만 치중되는 장르 편중으로 일본 영화계는 점점 지위를 잃어갔고, 반면에 한국은 박찬욱, 봉준호 감독 등이 등장하면서 세계 영화시장에서 비중을 넓혀갔다. 어찌보면 우리나라에 일본 문화가 개방된 시기가 절묘했다고 볼 수도 있다. 영화계 말고도 일본 아이돌 역시 한국에서 영 맥을 못 추고 비웃음조로 되려 일본 포르노, 즉 AV 배우가 오히려 음지로서 아이돌이라고 하는 비아냥이 나오고 있다.

그밖에도 개중에는 '레퍼런스'라는 이름 하에 일본 원단을 그대로 베끼던 업계관계자들의 두려움도 한몫 했다. 이들이 공개적으로 거론한 이유는 "한국 문화계 잠식 우려"였다. 위에 나왔듯이 이규형은 그런 쪽의 브로커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한 이런 일을 이규형만이 하지도 않았다.

몇 권의 책을 더 내기는 했지만 점점 한계가 드러났는지 'JJ가 온다'를 비롯해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에 낸 책들은 초기에 냈던 책에서 상당 부분을 그대로 전제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2002년에 낸 '비타민 일본, 아스피린 일본'을 마지막으로 일본 대중문화 소개자로서의 역할은 사실상 끝났다. 이 시기에는 이미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발달하면서 더 이상 그의 책에 의존할 이유가 없어졌다.

영화인으로서 한국 대중문화를 발전시킬 생각보다는 일본 대중문화의 앞잡이 노릇이나 했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달리 수많은 영화인들의 노력으로 이후 칸과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는 것과 한국 가수들이 일본 오리콘 차트와 미국의 음반시장까지 석권했다는 것은 대중문화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역량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저 책자들에서 이규형이 닥치고 일본 영화는 넘사벽이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 만화나 게임, 애니, 음반과 달리 영화는 되려 한국이 가능성이 더 있다라고 판단했다. 이규형은 여러 영화 관계자들을 만나 한국 이상으로 독점이 많은 일본 영화계 문제를 지적했다. 이규형 역시 5~60년대 일본영화 전성기 시절이라면 모를까, 90년대엔 한국이 더 유리하다고 서술했다. 일본 영화/문제점에 나온 토호의 독점 역시 이규형이 지적했다. 한국과 차원이 다른 독점으로 일본이 더 어려운 제작환경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을 정도로 무조건 일본 대중문화 빠돌이 짓만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1990년대 SBS에서 일본 서브컬쳐를 다룬 특집 다큐멘터리는 사실상 그가 기획한 셈인데 당시 한국언론으로서는 코믹 마켓을 (긍정적인 톤으로) 취재하는 등 생각보다 앞선(?) 측면도 있었다.

2.5. 영화 복귀(2000년대)

어쨌든 이렇게 다시 유명해지자 자본을 끌어모아서 2004년 공동경비구역 JSA를 연상케하는 제목을 가진 영화 DMZ, 비무장지대를 감독, 각본을 맡아 만들었다. 본래는 '호텔 코코넛'이라는 제목으로 촬영에 돌입하였으나 이후 변경되었다. 이 영화는 10.26 사건5.18 민주화운동을 전후한 시점에서 DMZ에서 벌어진 남북간에 교전과 군 생활을 다룬 이야기인데 백골부대 수색대였던 자신의 체험을 영화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징병제가 없는 일본에서는 평화시기에도 군 복무를 하고 때로는 목숨도 걸어야 하는 한국의 군생활에 대한 어느 정도의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공동구역 JSA의 흥행 성공도 있었고. 배역도 꽤 호화진이라 당시 주가를 올리던 유엔의 김정훈을 주연으로 하였다.[7] 본인의 젊은 시절과 그의 외모가 닮았다고 말하기도 하였는데 초기 기획 당시에는 주연배우로 유승준이 거론되기도 했다! 물론 그가 미국시민권 따기 직전이라 나중에 전면 취소했다고 한다. 그런데 모든 면에서 엉망이었고 전국 16만 7천에 그친 흥행 실패 때문에 거액의 빚을 지게 된다.

2.6. 몰락

그리고 2006년에는 인터넷 상영으로 이뤄진 이주현 주연 도박영화 굿 럭을 감독했다. 조연으로 이외수, 홍석천, 조상구, 전유성이 나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압도적으로 유명세를 거두며 대박을 거둔 타짜와 비슷한 시기에 소개되었고 평으로도 흥행도 철저하게 묻혔다.

자기가 감독하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자기가 쓰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시나리오 작가로서는 감각이 떨어진다. 인터뷰나 기고한 글을 봐도 1980년대 먹튀 수준의 영화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게 보인다. 영화가 망하는 건 당연한 이치. 한국영화가 부흥하기 전인 1980년대에나 통할 작품을 쓴다는 중평이었다.

2009년에는 사기혐의로 구속되어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영화를 만들 생각 없이 새로운 영화를 만든다고 속여 거액의 투자가들을 모아 투자금을 가로챘다는 것. 거액의 빚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갚을 생각이 없이 돈을 빌렸다는 것이 인정되어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사기죄로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는 건 법원이 죄질이 매우 안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판결문에서 “이규형은 자신의 지명도를 신뢰한 피해자로부터 거액을 받아 가로챘다. 이후 피해 회복을 위한 실질적인 조처를 하지 않아 엄히 처벌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로 심형래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으나, 심형래는 갚을 생각이 있었다고 인정되어 무죄처리되었다. 감방에서 나오고도 얼마 안 가 2011년 다시 사기혐의로 기소되었다. 결국 더 이상의 연예계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2.7. 사망

2020년 2월 7일 밤 10시 30분경, 담도암으로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62세. 굉장한 골초였다던데, 아무래도 이게 원인인 듯.

3. 기타

유명블로거 이규영(본명이 아니라 에로배우 이름을 땀)도 자신을 이규으로 오해한 투자자들에게 거액의 사업제의를 받은 적이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개중에는 아주 지저분하고 사기성 짙은 이야기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람도 학력 부풀리기 의혹이 있다. 자서전이나 기타 에세이에 의하면 서울대학교나 다른 대학교 합격을 했지만 (혹은 점수가 거의 수석 수준이지만)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한양대를 갔다고 주장했다. 신정아나 기타 다른 경우와 다르지만 어느 정도 가려 들어야 할 이야기.

1974년(당시 신일고등학교 2학년) 장학퀴즈 기장원 출신이라고 한다. 사진도 있기에 거짓은 아닌 듯. 1980년대 후반 라디오방송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 출연하여 자신이 학창시절 '전교에서 공부는 2등, 싸움은 제일 잘 했다'며 자랑스럽게 얘기하기도 했다.

강철수의 발바리의 추억에선 대놓고 본명으로 나온다. 주인공인 김달호가 당시 잘나가던 감독(?)으로 영화 촬영하는 이규형을 찾아가 나도 배우가 될 수 있느냐고 묻는 장면인데 거만스럽게 "꿈깨슈. 그 얼굴로 무슨 배우가 된다고 헛소릴 하는거요?"라고 답변한다. 그 시절만 해도 청춘 스케치 시리즈로 아직 전성기였던 터에 잘나가는 감독이랍시고 나온 것이기에 명예훼손이니 뭐라고 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 1989년 당시에 발바리의 추억 단행본 잡지광고 모델로 나왔기에 이 인연으로 작품에서 패러디(?)된 수준이라 할 수 있겠다.

4. 관련 문서



[1] 이후 SBS에서 드라마로 리메이크했다. 중간에 배경이 남자 고등학교에서 남녀 고등학교로 바뀌는 등 원작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말이다.[2] 이상은 이외에도 허준호는 고등학교 후배, 김세준은 중학교 후배로 주연배우 3명 모두 이규형 감독과 학교 선후배 관계였던 셈.[3] 드물 수 밖에 없는 게 해외여행 자유화가 법적으로 허가된게 이 영화 만들던 1989년이니까. 이전에는 해외여행은 정말 아무나 못갔다.[4] 이 노래가 일본 가수 쿠와타 케이스케의 노래 Just a Man in Love표절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이 곡은 이상은의 사랑할거야가 표절해서 유명하다. 그에 반해 내일이 찾아오면은 이렇다 할 표절 논란이 없었고 사랑할거야에 비해 Just A Man in Love와 닮은 구석이 부각되지 않는다.[5] 일본의 여러면을 찬양하며, 일본식 풍습이 국제화의 표준이라고 주장했다. 일례로 책 가운데 하나는 제목이 "일본을 읽으면 한국이 보인다."이다.[6] 미스터리일 이유는 없다. 외국인의 체류는 전적으로 주권국의 소관이므로 어떤 비자를 줄 것인지 그리고 비자 만료 후에 내쫓을 것인지 여부는 주권국(이 경우 일본)의 결정사항이다. 직업이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일본 당국에서 허락해 주면 머무르지 못할 이유는 없다. 실제로 해외 예술가들의 국내 레지던시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널리 허용해 준다.[7] 해당 영화와 KBS 2FM '김정훈의 FM 인기가요' DJ 활동 등과 맞물려 KBS 2TV 쇼 파워비디오 공동 진행을 그만뒀는데 공교롭게도 당시 이 프로그램 공동 MC였던 개그맨 김경식의 학교(서울예전)-SBS 선배인 최양락은 이규형 감독의 전작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어른들은 몰라요' '난 깜짝 놀랄 짓을 할거야'에 출연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