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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color=#000> 비트의 엘리사베타 | 에든버러의 마리 |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 | |
| <colbgcolor=#fcd69f><colcolor=#000> 루마니아 왕국 페르디난드 1세의 왕비 에든버러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Edinburg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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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영어 | 마리 알렉산드라 빅토리아 (Marie Alexandra Victoria) |
| 루마니아어 | 마리아 알렉산드라 빅토리아 (Maria Alexandra Victoria) | |
| 출생 | 1875년 10월 29일 | |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켄트 이스트웰 파크 | ||
| 사망 | 1938년 7월 18일 (향년 62세) | |
| 루마니아 왕국 시나이아 펠레슈 성 | ||
| 배우자 | 페르디난드 1세 (1893년 결혼 / 1927년 사망) | |
| 자녀 | 카롤 2세, 엘리사베트, 마리야, 니콜라에, 일레아나, 미르차 | |
| 아버지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 | |
| 어머니 |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 |
| 형제 | 알프레트, 빅토리아 멜리타, 알렉산드라, 베아트리스 | |
| 종교 | 성공회 → 루마니아 정교회, 바하이 신앙 | |
| 서명 | ||
1. 개요
영국의 왕손이자 루마니아 왕국의 왕비.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작 알프레드와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의 둘째이자 장녀로,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이다.2. 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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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color=#000> 문장 | 모노그램 |
- 에든버러의 마리 공녀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Marie of Edinburgh (1875년 10월 29일 ~ 1893년 1월 10일)
- 루마니아의 왕세자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Crown Princess of Romania (1893년 1월 10일 ~ 1914년 10월 10일)
- 루마니아의 왕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of Romania (1914년 10월 10일 ~ 1927년 7월 20일)
- 루마니아의 마리아 왕대비 폐하 Her Majesty Queen Maria of Romania (1927년 7월 20일 ~ 1938년 7월 18일)
3. 생애
3.1. 어린 시절
1875년 잉글랜드 켄트에서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 왕자와 에든버러 공작부인 마리아의 장녀이자 둘째로 태어났다. 해군인 아버지를 따라 몰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세월이 흘러 에든버러 공작가에 자주 찾아오던 친사촌 웨일스의 조지 공자가 마리에게 반해서 그녀와 약혼하기로 마음 먹었다.이 소식에 큰아버지 에드워드 7세와 아버지 알프레드 왕자,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매우 흡족해했다. 하지만 양가의 어머니들인 알렉산드라 왕세자비와 에든버러 공작부인 마리아는 사이가 너무 나빠서 조지와 마리의 사이를 매우 반대했고[1] 조지와 마리의 결혼은 무산되었다.
3.2. 루마니아의 왕세자비
1893년 아버지 알프레드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이 되기 몇 달 전 루마니아의 국왕 카롤 1세의 조카인 왕세자 페르디난드 1세와 결혼한 마리는 18살에 루마니아의 마리아 왕세자비로 불리게 되었다.마리는 페르디난드 1세와의 결혼 생활에서 장남 카롤 2세를 포함한 3남 3녀를 낳았지만 결혼 생활은 매우 불행했다. 마리의 오랜 친구이자 미국인 무용가였던 로이에 풀러는 나중에 마리가 남편에 대해 "싫어하는 남자. 혐오감이 더하는 자"라고 언급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루마니아 국왕 카롤 1세는 조카며느리 마리를 궁정에서 고립시켰는데, 이건 마리가 정치에 관여해 루마니아의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것을 우려해서였다. 하지만 이유가 뭐든 간에 17살에 시집 간 마리에게 이런 생활은 매우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마리는 18세의 어린 나이로 장남 카롤을 출산할 때 영국의 기준으로 의학적인 혜택을 덜 받았다.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어머니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아도 마리의 무통 분만을 지지했다. 그러나 루마니아에서는 무통 분만이 성경에 나오는 여성의 고통에 위반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친정 어머니 마리아가 루마니아까지 쫓아와 한바탕 했음에도 카롤 1세는 끄떡도 안 해서, 결국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까지 나서서 마리는 출산 때 영국인 의사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고집불통 꼰대 시숙부 카롤 1세와의 갈등, 신비주의와 영적세계에 몰입한 나머지 외향적인 마리와 도무지 맞지 않았던 시숙모 엘리자베트 왕비[2]와의 불통까지 겹치니, 마리는 루마니아의 궁정 생활을 힘들어하기 시작했고, 평생의 정부이자 오른팔이었던 루마니아의 귀족, 바르부 슈티르베이와 밀회를 개시하는 등 외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후 마리는 스캔들과 남편 때문에 루마니아를 떠나 잠시 아버지의 영지인 코부르크로 가서 지내기도 했다.
3.3. 루마니아의 왕비
1914년 카롤 1세가 사망하자 남편 페르디난드 1세가 즉위하면서, 마리 왕세자비도 자동적으로 왕비가 되었지만 대관식은 8년 뒤인 1922년에 치렀다. 결혼 초기만 해도 낯선 루마니아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던 마리 왕비는 이때쯤이면 바르부 슈티르베이 백작과의 밀회를 통해(....) 루마니아에 완벽하게 적응해 루마니아의 생존과 확장을 외치는 애국자가 되었으며 남편 페르디난드 1세와도 비록 남녀로서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국정 파트너로서 서로를 인정하며 화해했다. 마리는 전쟁 시기에는 아예 간호사로 나서 발진티푸스가 들끓는 최전선에서 몸소 부상병들을 이송하고 간호하며 루마니아 국민들의 큰 신망을 얻었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루마니아는 협상국으로 참전한다.[3] 1917년 루마니아 국토 절반이 독일군에게 짓밟히자 마리와 군의 조언자들은 러시아에게 의지하지 말고 루마니아가 독립적으로 독일과 러시아 모두와 싸워야 한다고 선택했다. 여기서 미국의 자금을 얻을 수 있었다.이러한 마리의 행동은 매우 올바른 처사였다. 1차 세계 대전은 영국과 루마니아가 가담한 협상국의 승전으로 끝났기 때문. 하지만 영국을 싫어했던 어머니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아가 매우 화를 냈다고.[4] 그럼에도 마리는 루마니아 왕비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으며,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루마니아는 루마니아어를 구사하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통합하는 "대 루마니아" 실현을 위해, 왕비인 마리를 루마니아의 국제적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며 프랑스로 보내기도 했다. "전사 왕비''의 등장을 국제 미디어에서는 큰 관심을 보였고, 본래 인맥이 넓고 화술과 사교에 뛰어났던 마리 왕비는 대단한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으며, 그 결과 루마니아는 자국의 국토를 40%나 늘리는 데 성공했다.
3.4. 루마니아의 왕대비
1927년 남편 페르디난드 1세가 사망하자 이미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한 장남 카롤 2세 대신 손자 미하이 1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아직 어린 미하이 1세를 대신해 그의 숙부이자 마리의 차남인 니콜라에 왕자가 섭정 위원회의 한 축으로서 루마니아를 다스리게 되면서, 마리는 국왕의 할머니이자 섭정의 어머니인 왕대비로서 확고부동한 국모의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이후 카롤 2세가 돌아와 아들 미하이 1세를 내쫓고 루마니아의 왕이 되면서 마리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마리는 카롤 2세의 귀환을 전혀 반기지 않고 경계했으며 카롤 역시 그런 어머니를 적대시했다. 카롤 2세는 마리의 불륜 상대이자 정치적 조언자였던 바르부 슈티르베이를 스위스로 추방했으며 마리가 가장 사랑하던 막내딸인 일레아나 공주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안톤 대공과 정략 결혼시킨 다음 "루마니아 국민들은 합스부르크를 싫어한다!"라는 핑계를 대며[5] 일레아나 공주를 오스트리아로 내쫓고 루마니아 입국까지 불허하면서 사실상 추방해버렸다.[6] 마리 왕비는 격노했고 "카롤은 모든 것을 낭비하고 파괴하고 뿌리째 뽑아버리며 자신보다 앞서 일했던 사람들을 무가치하게 내팽개치고, 박해하고, 모욕한다."라는 저주에 가까운 글을 남겼으나 카롤 2세는 자신을 반대하는 어머니를 브란 성을 비롯한, 지방에 유폐시키는 것으로 보답했다.마리 왕비는 이미 1926년 당시, 암으로 투병하던 남편 페르디난드 1세의 마지막을 지키던 와중에 미국인 바하이 교도이자 선교사였던 마사 루트를 루마니아 궁정에서 만나 바하이 신앙을 접했고, 아들 카롤 2세에게 핍박받는 와중에 더욱 영적 세계에 의존하며 바하이 신앙에 깊이 빠져들었다. 마리 왕비는 바하이 신앙의 지도자이자 런던에 체류하던 쇼기 에펜디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미국 언론에 바하이 신앙을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글을 발표하고, 쇼기 에펜디의 증조부이자 바하이 신앙 교리를 확립한 바하올라를 예수와 무함마드에 비유했다. 이 때문에 오늘날 바하이 신앙 공동체에서는 마리 왕비를 바하이를 믿은 최초의 군주로서 영웅시하고 있으나, 마리 왕비의 막내딸인 일레아나 공주는 마리 왕비가 죽을 때까지 교회에 다닌 걸 들어 어머니가 바하이교 신자였다는 걸 강하게 부정했다. 물론 마리 왕비는 바하이 신앙과 기독교 신앙은 공존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일레아나 공주는 말년을 수녀로 살 정도로 평생 독실한 루마니아 정교회 신앙을 고수한 기독교도였고 어머니 마리를 옹호하고 추모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는 걸 감안해야 할 것이다.
말년의 마리 왕비는 간경변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죽어가는 와중에도 회고록과 저작을 집필하다가 1938년 62세로 사망했다. 시신은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 수도원에 안치된 남편 페르디난드 1세의 옆에 안장했다. 생전 마리 왕대비의 유언으로 심장은 바르치크의 마리아가 건설한 바르치크 궁전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0년 발틱 궁전 남도브루자의 나머지가 크라이오바 조약에 의해 불가리아에 반환되면서 마리 왕비의 심장은 브란 성으로 이송되었다.
4. 가족관계
4.1. 조상
|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 에든버러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Edinburgh) | <colbgcolor=#fff3e4,#331c00>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 (Alfred,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 <colbgcolor=#ffffe4,#323300>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 |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Ernest I,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 |||
|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 |||
|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 |||
|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7] | |||
|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Victoria of Saxe-Coburg and Saalfeld) | |||
|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Maria Alexandrovna of Russia) | |||
|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 |||
| 니콜라이 1세 (Nicolas I) | |||
|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Prussia)[8] | |||
| 헤센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Hesse and by Rhine) | |||
| 헤센 대공 루트비히 2세 (Ludwig II, Grand Duke of Hesse) | |||
| 바덴의 빌헬미네 공녀 (Princess Wilhelmine of Baden) |
4.2. 자녀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 1남 | 카롤 2세 (Carol II) | 1893년 10월 3일 | 1953년 4월 4일 | 슬하 1남 |
| 슬하 1남[9] | ||||
| 마그다 루페스쿠 | ||||
| 1녀 | 그리스 왕국의 왕비 엘리사베트 (Elisabeth, Queen of The Hellenes) | 1894년 10월 12일 | 1956년 11월 14일 | |
| 2녀 | 유고슬라비아 왕비 마리야 (Maria, Queen of Yugoslavia) | 1900년 1월 6일 | 1961년 6월 22일 | 알렉산다르 1세 슬하 3남[10] |
| 2남 | 루마니아의 섭정 니콜라에 (Nicholas, Prince Regent of Romania) | 1903년 8월 5일 | 1978년 6월 9일 | 이오아나 두미트레스쿠-돌레티 |
| 테레자 리스보아 피게이라 데 멜로 | ||||
| 3녀 | 오스트리아의 일레아나 대공비 (Archduchess Ileana of Austria) | 1909년 1월 9일 | 1991년 1월 21일 | 슬하 2남 4녀 |
| | ||||
| 3남 | 미르차 왕자 (Prince Mircea) | 1913년 1월 3일 | 1916년 11월 2일 |
5. 여담
- 유럽 최고의 미녀 왕족으로 유명했으며, 어릴 때부터 파티와 승마를 즐겼고 당대 왕족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사진촬영에 아예 모델로 나서는 걸 즐길 정도로 외향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12], 왕실 어른들은 마리가 크면 바람둥이가 될 거라고 걱정할 정도였고 이는 현실이 되었다. 과묵하고 내성적이었던 페르디난드 1세와 성격이 맞지 않아 쇼윈도 부부로 살았던 마리는 평생 화려한 남성 편력을 자랑하며 불륜을 일삼았다. 마리의 불륜 상대 중 네임드로만 애스터 가문의 월도프 애스터, 루마니아의 명문 보야르 가문 출신이자 마리의 정치적 조언자였던 바르부 슈티르베이(Barbu Știrbey), 그리고 캐나다의 백만장자이자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의용군 부대장으로 참전해 루마니아를 위해 활약했던, 조 보일 대령이 꼽힐 정도다. 특히 자녀들 중 끝에서 두 명, 막내딸 일레아나 공주와 요절한 막내아들 미르차 왕자는 불륜 상대 바르부 슈티르베이의 아이들이라는 설이 무성했다.
게다가 이 바람기는 장남 카롤 2세도 제대로 물려받아서 여자를 엄청 밝혀 결혼 전부터 애인 지지 람브리노와 동거하며 사생아까지 낳았고,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 공주와 결혼하여 유일한 적자 미하이 1세를 낳은 후에도 처자식은 팽개치고 줄창 불륜을 벌이다 이혼당했다. 보다 못한 아버지 페르디난드 1세가 아들인 카롤 2세를 건너뛰고 손자 미하이에게 왕위를 물려줄 정도. 때문에 미하이 1세는 평생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고 1953년 카롤 2세가 사망했을 때에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 다른 자녀들의 문제도 심각했다. 일찍 요절한 막내아들 미르차를 제외한 장남 카롤 2세는 할 말 없는 막장 플레이보이 가장이어서 끝내 본처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 공주와 이혼했고, 장녀 엘리사베트는 그리스 왕국의 국왕 요르요스 2세와 결혼했으나 1935년 자녀 없이 이혼했다. 이혼 원인은 엘리사베트의 성격 탓. 워낙 안하무인이라 시어머니 소피아 왕대비가 굉장히 안 좋게 봤다고.
차녀 마리야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알렉산다르 1세와 결혼해서 3형제를 두었지만 남편 알렉산다르 1세가 1934년 프랑스에서 암살되면서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조용히 살았고,[13], 차남 니콜라에 왕자는 조카 미하이 1세의 즉위 직후 형 카롤 2세의 복귀에 협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동생이 루마니아 군부의 호감을 얻고 있던 걸 경계한 카롤 2세가 평민 여성과 결혼한 걸 트집잡아[14] 왕족 지위를 박탈하고 국외로 추방해버렸다. 막내딸 일레아나 공주는 카롤 2세가 오스트리아로 쫓아내기 위해 결혼시킨 오스트리아의 안톤 대공[15]과 맺어진 이후 여섯 자녀를 낳으며 잘 사는 듯했고 카롤 2세가 몰락한 이후 잠깐 루마니아로 귀국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루마니아가 공산화되면서 다시 추방당해 스위스와 아르헨티나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후[16], 말년에는 루마니아 정교회의 수녀로 출가하며 남은 평생 어머니 마리를 추모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대외적으로도 왕비다운 모습으로 존경받았지만 가정적으로는 자녀 문제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고, 사회적•명예적으로 빅엿을 날린 장남에 대한 심적 고통도 상당했다.
- 드라큘라 성으로 유명한 브란 성을 1차 대전 이후로 소유하고 있다가, 3녀 일레아나 공주에게 물려주었다. 이후 일레아나가 소유하고 있던 브란 성은 루마니아가 공산화되면서 몰수되었는데, 2006년에 일레아나 공주의 차남이자 상속자인 도미니크 대공이 반환받아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다.
6. 둘러보기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0 -15px 0" | ※ 2006년 루마니아 공영방송 TVR이 루마니아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루마니아인 100명'을 선정. | ||||||||
| TOP 10 |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 슈테판 3세 | 카롤 1세 | 미하이 에미네스쿠 | 미하이 2세 | 리하르트 부름브란트 |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 이온 안토네스쿠 | 미르체아 엘리아데 |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 | 콘스탄틴 브랑쿠시 | 나디아 코마네치 | |||||
| 11위~100위 |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 블라드 3세 | 조지 비칼리 | 헨리 코안더 | 게오르게 하지 |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 이온 루카 카라지알레 | 니콜라에 이오르가 |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 | 제오르제 에네스쿠 | 그레고리안 비볼라루 |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 미렐 러도이 |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 | 니콜라에 티툴레스쿠 | 페르디난드 1세 | 미하이 1세 |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 데케발루스 | 트라이안 버세스쿠 | 게오르그 뮤레산 | 이온 I. C. 브라티아누 | 러즈반 루체스쿠 |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 니콜라에 파울레스쿠 | 이울리우 마니우 | 이울리우 호수 | 에밀 시오랑 | 아브람 이안쿠 |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 부레비스타 | 에든버러의 마리 공녀 | 페트레 투테아 | 코르넬리우 코포수 | 아우렐 블라이쿠 |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 이오시프 트리파 | 니키타 스터네스쿠 | 이온 크레안거 | 마델리나 마놀 | 코르넬리우 바딤 투도르 |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 트라이안 부이아 | 루치안 블라가 | 조지 에밀 퍼레이드 | 아나 아슬란 | 아드리안 무투 |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 플로린 피에르시크 | 미하일 코갈리차누 | 야노스 코뢰시 | 디미트리에 칸테미르 | 일리에 너스타세 |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 게오르그 잠피르 | 기카 페트레스쿠 | 엘리사베타 리제아 | 불라 | 암자 펠라 |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 마차시 1세 | 미르체아 1세 | 티투 마이오레스쿠 | 토마 카라지우 | 미하이 트라이스타리우 |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 안드레아 마린 | 에밀 라코비차 | 빅터 바베슈 | 니콜라에 발체스쿠 | 호리아로만 파타피에비치 |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 이온 일리에스쿠 | 마린 프레다 | 외젠 이오네스코 | 두미트루 스타닐로아 | 알렉산드루 토데아 |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 투도르 게오르게 | 이온 티리아크 | 일리에 클레오파 | 아르세니 보카 | 바넬 니콜리타 |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 두미트루 코르닐레스쿠 | 그리고레 모이실 | 클라우디우 니쿨레스 | 플로렌틴 페트레 | 마리우스 모가 |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 니콜라에 스타인하트 | 로라 스토이카 | 커털린 흘단 | 안겔 살리그니 | 이반 피차이진 |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 마리아 터나세 | 세르지우 니콜라에스쿠 | 옥타비안 팔러 | 무명용사 | 치프리안 포룸베스쿠 |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 니쿠 코바시 | 두미트루 프루나리우 | 후녀디 야노시 | 콘스탄틴 노이카 | 바데아 카르탕 | |||||
| ※ 출처 |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1] 에든버러 공작부인 마리아는 알렉산드라 왕세자비와 사이가 나빴는데, 정작 그런 알렉산드라의 여동생인 자기 올케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와는 사이가 매우 좋았다. 참고로 다우마는 언니 알렉산드라와도 평생 절친한 자매 관계를 유지했다.[2] 루마니아의 엘리자베트 왕비는 카르멘 실바(Carmen Sylva)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프로 문학가이자 시인으로, 루마니아어를 연구하며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과 깊은 우정을 나눌 정도로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으나, 마리를 만날 당시에는 이미 심신이 지치고 어릴 때 요절한 딸에 대한 그리움이 심해진 나머지 신비주의에 침잠한 상태였다. 게다가 평생 자유주의적 신념과 자신의 신분 사이에서 고뇌하고 루마니아의 역사와 신화, 오컬트를 탐구했던 고전적 지식인이라, 오늘날로 따지면 소위 인싸 기질이 강했던 마리 왕비는 시숙모를 매사 엄진근한 진지충으로 여기며 상대하기 괴롭다고까지 평했다.[3] 당시 적국 독일 제국의 수장 빌헬름 2세는 마리의 고종사촌(고모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장남)이었다.[4] 당시 마리는 3남 미르차 왕자를 잃고 상심이 컸는데 어머니인 마리아는 딸에게 편지로 엄청 디스했다고 한다. 마리아는 독일의 군소공국 중 하나인 작센코부르고타의 공작부인이었기에 마리가 당연히 독일을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독일의 적국이고 자신이 싫어하는 영국과 연합한 딸의 행동에 대해서 "이번 전쟁은 너의 책임이다"라는 소리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딸이 걱정됐는지 마리에게 무사하길 바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5] 정작 루마니아가 그렇게 싫어하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여동생을 혼인시킨 장본인은 바로 카롤 2세 본인이었다. 숙청과 암살까지 서슴지 않는 오빠 카롤 2세가 자신을 혐오하자, 당시 겨우 20살 내외에 불과했던 일레아나 공주는 자신은 오라버니와 가족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며 호소하는, 일종의 충성 서약까지 할 정도로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다. 이 와중에 갑자기 오빠가 안톤 대공과의 혼담을 적극 주선하자, 일레아나 공주는 오빠가 자신을 가족으로 인정하는 화해의 제스쳐라고 여겨 기뻐했고, 안톤 대공과도 서로 마음에 들어해 일사천리로 결혼해버렸다. 이후 카롤 2세는 이 결혼을 트집잡아 바로 일레아나를 추방하는 작업에 착수했으니 애초에 혼인을 주선한 것 자체가 함정카드에 불과했다.[6] 카롤 2세는 어머니의 불륜을 혐오하며 자랐고 어머니의 연인이자 조언자인 바르부 슈티르베이를 극도로 증오했으며, 여동생이자 슈티르베이의 딸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일레아나 공주 역시 자신의 가족이 아닌 사생아에 불과하다고 확신했다. 문제는 그렇게 어머니의 바람기를 증오했던 카롤도 아내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 공주에게 충실하기는커녕 어머니와 똑같이 불륜녀와 바람을 피우며 사생아까지 보는 등, 바람기가 넘치는 건 매한가지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바람기가 넘치던 것과는 별개로 뛰어난 정치적 역량과 식견을 갖고 있어서 루마니아의 국익에 기여한 유능한 왕비였던 어머니 마리와는 달리, 카롤은 그런 어머니의 바람기만 물려받았을 뿐 정치적 역량과 식견은 전혀 못 물려받은, 가족으로서든 군주로서든 완전히 실격인 인간이었다. 일레아나 공주가 루마니아 대중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고 마리 왕비 역시 "내 자식들 중 루마니아 왕국 군주가 되기에 가장 적합한 아이"라고 말할 정도로 일레아나를 총애했기 때문에 카롤 2세는 일레아나를 동생이 아니라 반드시 숙청해야 할 정적으로 여겨 증오했다. 사실 권력욕이 엄청나게 강했던 카롤 2세는 나중에 남동생인 니콜라에 왕자마저 국외로 추방하는 등, 출생에 상관없이 자신의 모든 형제자매들을 경계하며 대립했다.[7] 조지 3세의 4남이다.[8]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장녀이다.[9] 미하이 1세[10] 페타르 2세 등[11] 합스부르크 가문의 분가인 토스카나 대공가 출신으로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도 2세의 차남인 카를 잘바토어 대공의 손자이다.[12] 그것도 달의 여신, 중세의 여왕, 농부의 아내, 다정한 엄마 등 온갖 컨셉의 과감한 코스프레까지 감행하며 즐길 정도였고, 마리는 근현대 유럽 왕족들 중 가장 많은 사진과 화보를 남긴 걸로 유명했다.[13] 1930년대 후반부터 류머티즘이 악화되어 국왕이었던 장남 페타르 2세를 제외한 두 아들과 함께 1939년부터 영국에서 거주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추축국의 침공으로 붕괴하고 전후에 왕정이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그대로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961년 사망했다.[14] 정작 카롤 2세 그 본인도 평민인 마그다 루페스쿠와 불륜을 저지르며 국가 예산을 끌어다가 루페스쿠가 별장을 살 돈을 주는 등 마그다를 실질적인 왕비처럼 대했고 루마니아에 폐위된 이후에는 기어이 그 마그다와 결혼했다는 것이다.[15]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도 2세의 증손자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방계였다.[16] 일레아나 공주는 망명지 미국에서 루마니아 공산정권을 비판하는 반공운동가이자 자서전까지 출판하며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남편 안톤 대공은 미국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렇다할 일자리도 얻지 못한 채 일레아나에게 생계를 의존하며 부부관계가 악화되었다. 결국 친척들이 사는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고 싶어한 안톤 대공과 일레아나 공주는 크게 갈등했고, 일레아나는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안톤 대공은 오스트리아로 돌아가며 이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