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23:56:26

손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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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峻
손준
작위 도향후(都鄕侯) → 부춘후(富春侯)
최종직위 승상(丞相)
성씨 (孫) / 고(故)
(峻)
자원(子遠)
생몰연도 219년 ~ 256년
고향 양주(揚州) 오군(吳郡) 부춘현(富春縣)
승상 재임기간 253년 10월 ~ 256년 9월 14일
{{{#!folding 가족관계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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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부 효의왕 손종(孝懿王 孫鍾)
종증조부 시조 무열황제 손견(始祖 武烈皇帝 孫堅)
재종조부 태조 대황제 손권(太祖 大皇帝 孫權)
재종조부 장사환왕 손책(長沙桓王 孫策)
재종숙 폐제 손량(廢帝 孫亮)
재종숙 경황제 손휴(景皇帝 孫休)
증조부 손정(孫靜)
조부 손고(孫暠)
아버지 손공(孫恭)
작은아버지 손작(孫綽)[1]
종제 손은(孫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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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정권 장악 이전2.2. 정권 장악2.3. 정권 장악 이후
3. 삼국지연의4. 무덤 발굴5. 평가6. 미디어 믹스

[clearfix]

1. 개요

삼국시대 오나라의 황족으로 는 자원(子遠)이다. 승상을 역임하고 부춘후에 봉해졌었다. 손견의 아우 손정의 증손자이며 할아버지는 손호, 아버지는 손공이다.

항렬손량의 7촌 조카지만 오히려 24살 더 많다. 이것은 손량이 손권이 말년에 반부인에게 빠져 늦게 낳은 막내아들이기 때문이다.[2]

원래 이름은 손준이지만 이후 손침이 숙청당하면서 본인까지 같이 손가에서 축출되며 고준으로 강제 개명당했다.

2. 정사 삼국지

2.1. 정권 장악 이전

손준은 어려서 궁마에 뛰어났고 예리하고 용감하면서도 과단성이 있었으며, 손권 말년에 무위도위, 시중이 되었다. 손권은 죽기 전에 제갈각을 태자태부, 대장군에 임명하여 10세의 손량을 보좌하게 하고 중서령 손홍을 태자소부, 회계태수 등윤은 태상으로 임명했다.

여범의 차남 장군 여거, 시중 손준을 불러 뒷일을 부탁했는데, 손준은 정치를 보좌하라는 손권의 유조를 받아 무위장군을 겸임하고 숙위가 되어 도향후에 봉해졌다. 이에 손준이 표를 올려 제갈각이 큰 일을 맡을 수 있다고 해 손권은 제갈각이 독단적인 것을 꺼렸지만 제갈각 만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결국은 제갈각에게 대임을 맡겼으며, 손권이 죽자 태자소부 손홍이 제갈각과 화합하지 못해 황제의 죽음을 숨기고 제갈각을 제거하려 하자 손준은 이 일을 제갈각에게 알려 그의 목숨을 구했다.

2.2. 정권 장악

이렇게 한 때는 제갈각을 밀어주고 따르던 손준이지만, 그 제갈각이 막나가기 시작했다. 합비 정벌에 실패하고 귀환해서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주변 사람과 아랫사람을 탓하며 관리들을 갈아치우고 숙위를 자신과 가까운 사람으로 임용한데다가, 그런 대패를 당해놓고도 정신 못차리고 청주와 서주 쪽으로 다시 정벌을 하려 한 것. 이렇게 제갈각이 민심을 잃고 원망을 사자, 손준은 손량과 상의하여 정변을 일으키기로 한다. 그리고 253년 10월, 주연을 열어 제갈각을 불러들이고 칼로 찔러 살해했다.[3]

제갈각의 차남 제갈송은 약을 먹고 자살했고 막내아들 제갈건은 수레에 모친을 싣고 [[위(삼국시대)|위나라]로 도망갔는데, 이에 손준은 기독 유승을 파견해 제갈건을 잡아 참수하고 제갈각의 삼족을 모두 멸했다. 이때 제갈근의 막내아들 제갈융도 약을 먹고 자살하고 그의 세 아들도 살해되어 제갈근의 대가 끊겼다.[4]

제갈각을 제거한 손준은 승상, 대장군으로 승진했으며, 중앙과 외방의 모든 군사를 감독하고 가절을 받았다. 이로써 손준은 오의 집권자가 되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때 어사대부를 두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선비들이 실망했다고 한다. 권중달 교수의 주석에 따르면 한나라에선 어사대부를 두어 승상의 직책을 보좌해 여러 업무를 맡았는데 손준이 승상이 되고서 어사대부를 두지 않았으니 오나라의 정치를 스스로 다 해먹겠다는 소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손준은 등윤과 속으로는 맞지 않았지만 겉으로는 서로 포용했다. 이는 일전에 손준이 제갈각을 주살하려고 손량과 함께 주연을 열어 초대했을 때 등윤이 궁궐에 들어가려다가 나오는 제갈각을 만났고, 손준의 음모는 까맣게 몰랐던 등윤이 다만 예법에 따라 황제를 뵙도록 제갈각에게 권유해 결과적으로 손준의 쿠데타가 성공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5]

여기까지의 내용들을 종합하면 손준은 제갈각 주살까지는 그렇게 큰 사고나 욕먹을 짓거리들은 안 했고,[6] 오히려 합리적인 결단들을 내렸었다. 서술했지만, 이궁지쟁으로 인재들이 갈려나가자 제갈각을 손권에게 추천한 것도 손준이었고, 손홍의 음모를 제갈각에게 알려 손홍을 간접적으로 죽인 것도 손준이었고, 제갈각의 무리수인 합비정벌을 반대한 것도 손준이었고, 합비정벌 실패 이후 미쳐 돌아가던 제갈각을 별 잡음없이 제거한 것도 손준이었다.

2.3. 정권 장악 이후

제갈각은 자신의 인척인 손권의 삼남 폐태자 손화를 각별히 여겼으므로 민간에서는 제갈각이 손화를 영접하려 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에 손준은 제갈각을 주살한 후 손화의 인수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손화를 죽여버렸고 사람들은 이에 슬퍼했다.

이 때문인지 <손준전>에서는 손준 집권 이후 그가 중후한 명성이 없고 교만하고 음험해 형벌로 죽인 자가 많았으므로 백성들의 원망을 받았으며, 또 궁중의 사람들과 간음해 공주 손노반[7]과 사통하기까지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건 단순히 왕족과 간음한 걸 넘어, 자기 7촌 고모뻘 되는 사람과 근친상간을 한 것이다.

254년 여름에 홍수가 발생했고 가을에는 손권의 장남 손등의 사남 오후 손영이 손준을 주살하려다가 일이 발각되어 손영은 자살했다. 다만 정사 삼국지 주석으로 인용된 《오력》에서는 이 일을 달리 서술하고 있다. 손준이 손화를 무고히 죽여 사람들이 격분하고 탄식하자 전사마 환려가 이를 이용해 장수와 관리를 모으고 함께 손준을 죽이고 손영을 세우려 했지만 손영은 이를 알지도 못했다.

255년 정월에 위나라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마사에게 대항해 관구검문흠거병해 위의 중앙군과 악가에서 싸웠는데, 손준은 이 소란을 듣고 윤달 정월 9일에 표기장군 여거, 좌장군 유찬과 함께 수춘을 치고자 군사를 일으켰다.19일에 오군이 탁고에 이르렀을 때 이미 패배한 문흠과 그 잔당 수만 명은 손준에게 투항했으며, 손준은 여세를 몰아 수춘성을 공격하려 했지만 이미 위의 진동대장군 제갈탄이 수춘성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물렸다.

그러나 제갈탄은 장수 장반에게 오군을 추격하게 했고 2월에 오군은 고파에서 장반에게 패배하여 유찬, 손릉, 장수 등의 장수를 잃었으며, 3월에 손준은 주이에게 안풍을 공격하게 했지만 패배했다. 문흠과 그 잔당을 얻은 것은 그나마 수확이었긴 하다.

그 해 가을 7월, 촉한에서 사자를 보내자 이때 손준의 당숙이자 손교의 아들인 무난독 손이가 장의, 임순, 손소 등과 공모해 손준이 사자를 접견하는 틈을 타서 손준을 죽이려고 했는데, 일이 탄로나 손노육, 손의 등은 자살하고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손준은 위위 풍조로 하여금 광릉에 성을 쌓게 하면서 장군 오양을 광릉태수, 유략동해태수로 임명했는데, 조정 신료들은 그 곳에 성을 쌓는 것이 불가한 것을 알았지만 손준을 두려워해 아무도 말하지 못했다. 오직 등윤만이 간해 그치게 하려 했지만 손준은 듣지 않았는데, 이 해에 큰 가뭄이 들어 결국 축성은 실패로 돌아갔다.

256년에 손준은 전에 위에서 투항해 온 정북대장군 문흠의 계책을 받아들여 위로 출정하기로 했는데, 8월에 먼저 문흠, 여거, 거기장군 유찬, 진남장군 주이, 전장군 당자의 군사로 강도에서 회수·사수로 들어가 청주서주를 취할 계획을 세우게 했다.

그런데 등윤과 함께 석두에서 군사를 전별했다가 종자 1백을 거느리고 여거의 군영에 들어갔는데, 여거가 군사를 정돈한 것을 보고는 갑자기 가슴이 아프다 칭탈하고 떠났다. 대체 왜 그런 건지 알 수 없지만 손준은 이후 자기가 죽였던 제갈각에게 얻어맞는 꿈을 꾸고 두려워하더니, 덜컥 병에 걸리고는 38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자식이 없어서 유언으로 후사는 사촌동생 손침에게 맡겼다. 그러나 뒷날 손침이 손휴에게 주살당한 후, 손휴는 손준의 관을 꺼내 인수를 빼앗는데 이것은 승상, 대장군으로 기세등등했던 그의 권력을 없애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손준과 손침의 이름을 황실 족보에서 삭제해 손씨 성 대신 고()씨를 붙여 고준(故峻), 고침(故綝)이라 불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걸 각색해 덤으로 부관참시를 해 목을 잘라버린다.

3. 삼국지연의

전체적인 행적은 같다.다만 관구검의 난 당시 반란군과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었던 정사와는 달리 손준이 관구검의 발목을 붙잡아 사마사에게 의도치 않게 도움을 주는 것으로 나와서 미묘하게 깎인 듯한 느낌을 준다.

4. 무덤 발굴

그런데 이렇게 사후에 명예가 박살난 덕분에 그의 무덤은 남았다. 링크

2005년 12월에 난징시에서 삼국시대의 묘가 발견되었다. 정확한 부장자의 신분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오나라에서 이렇게 큰 권세를 휘두른 왕족은 손준 한 사람뿐이었고, 관이 부서진 상태로 남아 있었으며, 뼈를 꺼내는 과정에서 군졸들이 발길질을 한 덕분에 치아 2개가 빠져나가 무덤에 뒹굴고 있어서 사실상 손준의 무덤이라 여겨진다. 이로써 삼국시대 인물들 중 유해를 남긴 얼마 안되는 사람이 되었다.

5. 평가

峻、綝兇豎盈溢,固無足論者。
손준과 손침은 흉악한 행실이 가득하여, 본래부터 논할 가치도 없는 이들이다.
진수
아예 고준(故峻)이라고 해서 손씨 가문 족보에서 빼버린 수준이기에 형제인 손침과 함께 막장 짓이 기록이 제대로 안 남아 있어서 그다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손준이 막장이라고는 했는데 정작 기록을 까보면 구체적인 이야기가 거의 없고 그냥 몇줄로 논할 가치조차 없다고만 나온다. 진수는 오서에서 손준의 열전은 '제갈등이손복양전'으로 넣고 그들이 제거한 제갈각이나 손휴 시절의 복양흥과 같이 넣었는데 이 열전 자체가 뒤끝이 좋지 않았거나 권력을 남용하여 나라과 주변에 피해를 입힌 자들의 열전이다.

구체적으로 뭘 했다는 얘기는 없지만 손화의 일족들을 죽였다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죽이는 등 그가 집권하던 시기에는 분란이 많았다. 이 때문에 그는 집권 후 음험하고 잔인하다는 악평을 받았다. 다만 손준 시대의 분란은 기본적으로 제갈각이 남긴 후유증을 손준이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단적으로 그가 본격적으로 악평을 받게 된 원인인 손화 숙청의 경우엔 제갈각이 죽기전에 워낙 오나라 조정에 분탕질을 쳐 놨기에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제갈각과 연계가 있다고 여겨진 손화를 주살하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보정대신 제갈각의 횡포와 죽음으로 인해 황제인 손량의 권위가 불안정해졌고 이런 정국불안으로 인해 손준 시대의 숙청이 많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방계 황족도 아니고 직계 황족을 독단으로 죽인 것은 지나쳤다. 방계 황족이면 몰라도 직계 황족을 죽인 것은 황제가 정해야하는 문제지 권신이 정할 문제가 아닌데, 중국 역사에서 동탁 같이 간신에 가까운 권신들이 직계에 가까운 황족들을 죽이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기에 손준의 진의가 의심되는 건 사실이다. 이궁지쟁에서 손준이 손패파였던 사실을 근거로 자신에게 부담스럽기에 (손량의 권위가 불안정해졌음을 핑계로) 손화를 죽인게 아닌지 의심을 제기할 수 있다. 이궁지쟁에서 배송지가 손패파 중심 인물 몇몇을 신랄하게 비판했는지 고려하면 더욱더 그렇다. 이궁지쟁이 온전히 손패파의 문제는 아니지만, 손패파가 집결한 이유가 기득권층이 몰려있던 손화파와의 권력 쟁탈이 목적이라는 공산이 큰 만큼, 권력 쟁탈이라는 목적을 끝내 쟁취한 손준이 동탁처럼 횡포를 부렸을 가능성이 결코 작지 않다. 같은 손패파의 일원이자 손패가 몰락할 기미가 보이자 바로 손절하고 본인과 같이 손량 지지파로 갈아탄 손노반과 사통했다는 점이 정황증거라고 할 수 있다.[8]

사실 근본적으로 손권이 군사를 모은 제갈각을 일찍부터 군벌이라고 견제했다기보단 손가 친위세력인 그가 손권 본인이 죽은 뒤에 경솔한 처신을 할까봐 걱정한 것으로 봐야 한다. 진짜 제갈각이 육손이나 다른 오의 사성 급인 대호족이라면 손량의 보정을 맡기지도 않았을것이다. 애초에 손량의 주요 보정 4인방(제갈각, 손준, 등윤, 여거)들은 하나같이 손씨 아니면 양주 호족이 아닌 외부 출신으로써 손권의 친위세력에 가까웠고 제갈각이 그 중 좌장으로써 중심을 잡았어야 했던 것이다. 제갈각은 손권이 아끼던 친위세력인 제갈근의 아들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제갈각은 손권의 기대치에 비하면 너무 정치를 못했고 손권이나 제갈근의 우려 그대로 치명적인 실수를 한다. 이렇게 제갈각이 합비신성전투에서 폭주한 이후 손량의 보정체제를 망그러뜨렸고 결국 손준이 손량의 명을 받아 제갈각을 주살하면서 그 뒷처리를 다 떠맡게 된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손준전의 기록은 짧지만 실상 손준 시기 오나라 기록 전반을 보면 손준은 보정대신으로써 크게 잘못한 것도 없다. 국정을 어지럽히던 제갈각과 손홍을 죽일때의 민첩한 판단을 보면 정권을 유지하는 능력 역시 뛰어났던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정책은 멀쩡했고 손권이 남긴 다른 보정대신들을 마음에 들어하진 않았어도 계속 보존하려고 했다. 손노반과의 사통 역시 어느 정도 정치적인 의도가 들어가 있을 공산이 큰데, 손노반의 영향력에 있는 전씨가문의 일원인 전상의 처는 곧 손준의 손윗누이였기에 오직 전공주(손노반)만이 그를 도왔다는 기록이 전부인(전혜해)전에 있기 때문이다. 즉, (실제로 사통 관계였을지의 진위와는 별개로) 손노반과 육체관계가 있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손준과 전씨가문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황제 손량과의 관계에서도 딱히 월권없이 명을 충실히 받아 일을 처리했고 사촌동생 손침마냥 황제를 폐하고 남은 보정대신들을 죽여 손씨 황실을 완전히 파탄내는 일은 하지 않았다. 적어도 나라의 최고위직에 올랐음에도 사감에 휘둘리지 않고 정권에 중요한 인물들을 남겨둘 줄 알던 손준이라면 이후에도 손침마냥 등윤, 여거, 주이를 숙청하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손준은 실속은 하나도 없었던 제갈각과 달리 외정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다. 손준은 서주 광릉군 소속인 광릉현, 해릉현, 여현, 강도현등을 255년에 점령했는데 모두 장강의 북쪽이다. 역시 서주 광릉군 소속인 당읍현은 250년 손권 말기에 점령했기에 손오 정권은 이 시기에 서주 남부에 좀더 깊숙히 진출했다. 물론 이미 조조가 213년에 회남 백성을 장강 남쪽으로 내쫒은 바람에 사실상 하비 남쪽과 광릉군은 빈 깡통이 되었고 덕분에 거점을 마련한 것 외의 광릉에 성을 쌓는 등의 추가적인 개발은 실패했지만 장기적으로 손준이 살아 있어 이후 손오정권의 혼란이 없었더라면 식민을 하던지 개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일단 손준의 집권 기간이 짧고 스케일 큰 사업들 추진하긴 했는데 막상 실현된 건 크게 없으니 자연스레 크게 말아먹은 적도 없는 케이스이다. 일단 제갈각 이후 손량을 충실히 보좌했다는 측면에선 손권이 원하는대로 보정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정책 면으로 준수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국정을 총괄하는 권신이 궁녀 사통, 손노반과의 사통 같은 황실에 권위에 더럽히는 했다는 것이 문제다. 손준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궁녀와 손노반과 사통한 것이 다소의 단점처럼 말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궁녀들은 표면상 황제의 여인들이다. 간신에 가까운 권신들이 궁녀들을 건드리는 경우가 많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9] 괜히 중국에서 환관들이 자주 권력을 잡는 것이 아니다. 손노반 사통도 황실의 권위를 더렵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손노반이 방계 황족이면 변명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손노반은 초대 황제 손권의 딸이자 현시점의 황제 손량의 누나다. 즉 황제의 누나이자 초대황제의 딸과 사통했으니 황실을 어지럽히는 간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갈각이 사고쳐서 황실의 권위가 좋지 않고 황제 어린 상황에서 이런 짓을 했다는 점은 손준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국정을 맡았는지 추측이 가능하게 하는 점이다.

또 한가지 손준의 문제라면 그가 죽으면서 같은 보정대신인 등윤, 여거가 아니라 사촌동생 손침이 권력을 물려준게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손준전에서는 단순히 손침에게 뒤를 맡겼다고 나오지만 건강실록에서는 급작스럽게 중병에 걸리자 표를 올려서 자신을 대신하는 보정대신 직을 손침에게 맡겼다고 나오는데, 제갈각 후엔 손준이 집권했고 손준이 죽었으면 그 다음은 당연히 선제 손권의 보정대신인 등윤, 여거가 손준의 뒤를 이어 보정을 맡아야 정상이다. 근데 기껏해야 편장군이자 손준의 사촌동생에 불과한 25세 애송이 손침이 다음 보정을 맡으면 당연히 미쳤다는 소리가 나올수 밖에 없고 반발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등윤과 여거가 이런 뜬금없는 짓에 분노하여 표를 올려 등윤을 승상으로 올리려 했고, 이게 통하지 않자 군사를 동원해 손침을 끌어내려고 한 것이 정상인 상황이다. 손준도 이런 문제를 모를리가 없었을것인데 막판에 이런 잘못된 선택을 한 이유는 불명이다. 기록에 따르면 손준은 갑자기 몸의 이상을 느꼈다고 칭하고 제갈각이 나오는 악몽을 꾸다가 심한병에 걸려 죽었다고 하니 갑작스레 급사하면서 환영을 볼 정도로 정신이 흐려져서 이런 판단을 했거나 아니면 애시당초 손준이 급사하는 과정에서 의식불명이 되자 손준의 측근인 손침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손준의 표를 조작했거나 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최씨 정권처럼 권신이 혈족에게 자신의 자리를 세습하는 경우는 많다. 건강 문제가 아니라 원래부터 손준은 손침에게 양보한 걸지도 모른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손준의 인성이 좋지 않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으니 손침과는 본성이 어느정도 맞아서 손침이 후계자로 선택한 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가 일찍 죽어버린 다음 하필이면 그 뒤를 이은 손침이 워낙 함량미달인 인물이라서 손량을 비롯해 손권이 세운 후계구도와 보정구도를 모조리 망가뜨린 죄가 이후 손준에게 소급적용된 감도 없잖아 있다. 사실 자의던 타의던 난신 손침에게 정권을 넘겨준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오나라에 해를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손준은 집권 과정은 어쨌든 쿠데타였고, 보정대신이었다곤 하지만 그가 승상이라는 직위에 오를 만한 치적이나 권위 같은 건 전무한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공포정치 자체는 제갈각이 먼저 시도한 것이라 쳐도 손화를 죽인 것은 이미 단순한 숙청을 넘어선 것이기도 하다. 물론 최소한 적당히 연립정권을 세우면서 자기 자리를 끝까지 유지하긴 했고 사촌 동생 손침과 달리 손량을 직접적으로 위협한 일은 없었으나, 당시에 민심이 결코 좋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애초에 손준의 집권 기간은 3년 정도에 불과하다. 간신에 가까운 권신들이 집권 기간이 길어질수록 문제를 많이 일으킨다는 것은 어느정도 역사에 정통한 사람이면 아는 기본 상식이다, 3년만에 저지른 문제가 많다는 것을 고려하면 집권기간이 길어졌을때 얼마나 큰 사고를 쳤을지 알 수 없다. 그래도 권신급 권력을 가졌음에도 찬탈을 탐하지 않아지만 집권기간이 고작 3년이기에 충신이라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다만 3년간 성과가 없었고 이는 손준이 크게 일을 벌이지 않은것도 있긴 했는데, 사실 평화로운 때의 3년이라면 모를까 전쟁이 툭하면 일어나는 난세의 3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손준의 집권 기간은 제갈각과 손침보다 길었다.

6. 미디어 믹스

6.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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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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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13, 14

통솔력, 무력, 지력은 그나마 고만고만한데 정치력과 매력은 쓰레기급. 그래도 사촌동생인 손침보다는 낫다. 삼국지 4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8/무력 69/지력 74/정치력 19로 영 아니지만, 투함을 가지고 있어서 아군 장수로 끌어들이면 해전에 유용하다. 그 이외의 병법으로는 보병계 병법인 분전, 모략계 병법인 혼란과 덫, 책략계 병법인 매도를 가지고 있다. 특히 다른 손씨들보다는 충성도가 낮아 아군으로 만들기 좋다. 의리가 0인 게 문제지만 어차피 부장이면 배신해도 부대가 넘어가지는 않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7/무력 72/지력 68/정치력 28/매력 10에 오나라 종특 제독 특기를 가지고 있다. 등장하는 시기가 시기인지라 전장에서 써먹을 수는 있으나 주력으론 부족하고, 정치력, 매력이 쓰레기라 내정으로는 쓰기 힘들다. 전체적으로 특기는 상업, 화시, 혼란, 회복, 제독. 총 5개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4/무력 70/지력 65/정치력 26/매력 11으로, 삼국지 10에 비해 골고루 너프됐다. 일러스트가 매우 교활한 모습으로 변했다. 콘솔판 추가 시나리오인 영웅난무에서는 왠지 촉 지방인 자동에서 군주로 등장한다. 부하는 손침, 손호, 손노반, 장포, 복양흥, 만욱, 동조, 등윤, 맹종, 하식, 잠혼. C급 문관 중심이라 난이도가 막장일 듯한 세력으로 보이지만, 자동은 방어에 아주 좋은 도시인 데다가 이엄, 곽준, 장완 등이 재야로 있으므로 의외로 그렇게까지 난이도가 높지는 않은 세력. 심지어 인접 세력도 크게 위협적인 세력이 없다.

삼국지 12에서는 삭제되었지만 PK에서 등장했다. 흑막답게 엄청난 포스를 뿜어내는 일러스트가 인상적인데 자세히 보면 도검을 뽑고 있다.[10] 척 봐도 제갈각을 꾀어들인 후 살해하는 장면을 반영했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4/무력 70/지력 65/정치력 26. 특기는 순찰 2, 수영 3. 전수특기는 수영으로 전법은 고무. 음성은 관리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64, 무력 69, 지력 68, 정치 26, 매력 10으로 전작에 비해 지력이 3 상승한 대신 무력이 1 하락했다. 개성은 징세, 소심, 악명, 탐욕, 주의는 아도, 정책은 침략황폐 Lv 3, 진형은 어린, 안행, 전법은 업화, 매성, 강습, 친애무장은 문흠, 손노반, 혐오무장은 섭우, 손화, 제갈각이다.

6.2. 삼국전투기

폭주형제 렛츠&고의 세이바 레츠로 패러디되어 나온다.[11] 그 때문에 손침은 세이바 고로 확정.

단편적인 포악한 악역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던 손준을 나름대로 재평가하여, 유능하고 합리적이었던 면모들을 부각시켰다. 물론 제갈각을 제거한 이후의 도덕적 타락 역시 누락시키지는 않았다.

전투외편 4편에서 처음 등장. 손권 사후 손량이 황제가 되며 실세가 된 5명 중 하나로 묘사된다. 손준은 똘똘해서 손권이 옆에 두고 키운 황족이라고 언급되며, 제갈각을 최고위로 추천한 것도 손준이라고 묘사된다. 그 밖에는 손홍이 무언가 꾸미고 있다는 걸 제갈각에게 전해서 제갈각으로 하여금 손홍을 제거하게 만들기도 했다.

합비신성 전투 편에서는 동흥에서 돌아온 뒤 합비를 정벌하기로 정한 제갈각에게 제갈각이라면 하고도 남는다며 시기를 물었지만, 제갈각이 바로 출진한다고 하자 크게 당황했다.

제갈각이 합비신성에서 패하고도 또 대규모로 군을 일으키려 하자 그가 선을 넘었다고 판단, 제갈각을 제거할 계획을 짰다. 손준은 궁에서 연회를 열어 제갈각을 초대한 뒤 그를 없앨 계획을 짰고, 계획대로 제갈각이 오자 제갈각을 사살하였다. 제갈각 사후에는 손준이 승상과 대장군을 겸하며 제갈각의 포지션을 그대로 차지했다.

낙가 전투 편에서는 관구검의 반란 소식을 듣고 수춘을 차지할 기회라고 여겨 유찬과 여거를 끌고 수춘으로 향했다. 그러나 손준이 수춘에 도착했을 시점에는 이미 제갈탄이 수춘을 점거한 상태였고, 거기다 관구검의 난 제압을 위해 위의 주력까지 대부분 근처에 몰린 상황이라 여거의 제안대로 퇴각을 결정했다. 한편으로는 오에 투항한 문흠 부자를 받아 주기도 했다. 문흠같은 무력형 장수가 꼭 필요했다고 반긴 건 덤.

전투외편 5편에서는 제갈각을 날리고 최고위에 등극한 이후 정치적으로는 몰라도 인격적으로는 완전히 망가져 온갖 패악을 저지르고 다녔기에 주변인물과 백성이 모두 손준을 미워했다고 서술되었다.

이후 문흠에게서 합비를 공략하더라도 때론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상대의 전력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는 제의를 받고 이에 동의하여 서주, 청주를 치는 극동쪽 루트로의 공략을 명했다. 손준은 위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겸 은근슬쩍 자기와 대립각을 세우던 여거를 보내 제거할 생각으로 이에 동의한 것이었는데, 정작 손준 본인이 여거의 부대를 시찰하다가 급격한 컨디션 난조를 일으키고[12] 돌아오자마자 악몽을 꾸고 병까지 생겼으며, 결국 얼마 안 가 유명을 달리했다고 묘사되었다.[13]

그렇게 많이 했어도 자식이 하나도 없어서 삼국전투기에서는 간담이 약한 것뿐만 아니라 어딘가가 여리다고 나온다. 여담이지만 손휴가 손침을 주살한 후 손준을 부관참시하는 듯한 묘사가 나오며 역사대로 손준과 손침을 고씨로 개명시키지만, 그냥 고씨라고만 나와 단순히 원래 있던 고(高)씨로 개명시킨 건지, 아니면 원래대로 고()씨로 개명시킨 건지 이 만화만 봐서는 알 수 없다.

[1] 안민도위(安民都尉)직을 역임하였다.[2] 그런데 큰아버지의 맏아들인 손침보다도 열 살 이상 많은 걸 보면 아버지 손공이 어려서 사고를 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큰아버지 손작이 너무 늦게 아들을 보았을 수도 있다. 또다른 7촌 백부인 손등과 비교해도 10살밖에 어리지 않는걸로 보아 손공이 손준을 일찍 낳은건 맞는듯 하다. 손준은 본인의 할아버지의 사촌 형제인 손권보다 37세, 본인의 증조할아버지의 손견보다 63-64세 밖에 안 어리다. 본인의 8촌 동생인 손호보다는 23세 연상. 다만 그의 할아버지 손고가 손권보다 형이다. 할아버지의 친동생인 손유랑 42세 차이. 그래도 왠지 적어 보이는건 맞다.[3] 제갈각/생애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때 제갈각은 주변에서 온갖 불길한 조짐이 나타나고 예감도 좋지 않아 가지 않으려 했다가 결국 어찌저찌 참석했다가 결국 죽음을 맞았다.[4] 그러나 제갈근의 차남 제갈교제갈량의 양자로 갔다가 요절했지만 외아들 제갈반을 남겼다. 제갈량이 제갈첨을 낳아도 제갈교는 여전히 양자로 남아 있었으며, 손침이 주살되자 제갈반은 오나라로 돌아가 제갈근의 대를 이었다. 즉 제갈각과 제갈융의 대가 끊겼을 뿐 제갈근의 피가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은 것.[5] 심지어 등윤은 제갈각의 아들 제갈송의 장인이기도 하다.[6] 이궁지쟁 때에는 손화를 지지하는 게 상식이건만 손패파가 되긴 했다. 하지만 눈에 띄는 행적은 거의 보이지 않아 손패파가 몰락할 때도 무사했으며, 오히려 이후에는 손패파의 행각을 저지하기까지 했다.[7] 손권의 큰 딸로 주유의 아들 주순의 부인이었지만 주순이 요절하자 전종의 부인이 되었다. 그래서 전공주라고 부르기도 한다.[8] 애초부터 이궁지쟁에서 손화의 지지세력은 괴멸하다시피했고, 손화파 중에서 권력을 쥐고있던 제갈각은 자멸했으며, 등윤은 제갈각 숙청을 암묵적으로 지지한 만큼 손준을 바로 타도할 스탠스를 취할 수 없었다. 또한, 손량이 비록 어렸긴 했으나 손화는 이미 손권이 생전에 자신의 손으로 폐출을 시킨 상황이었으므로 사실상 동탁에 의해 폐위된 소제보다도 입지가 낮은 상황이었다.[9] 대표적으로 예시로 동탁이라는 알기 좋은 예시가 있다.[10] 10 때는 그나마 서량 마씨 일족을 연상케하는 멀쩡한 일러스트였다.[11] 그래서 작중에서는 늘 모자를 쓰고 있는데, 모자의 색이 녹색과 파란색을 오락가락하는 경우가 많다.[12]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이는 여거의 병들을 보고 언제 이렇게까지 훈련을 시킨 거냐고 당황했고, 이런 자들이 자기에게 창끝을 향하면 어쩌냐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심장의 통증이 생겼다고 묘사되었다.[13] 마지막 유언은 "제갈각이 나를 죽이는 꿈을 꿨어.... 나, 나는 잘못이 없다고...." 완전히 겁에 질려서 숨을 거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