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성계육(成桂肉)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에 개성 덕물산 신상동 부락의 주민들이 도당굿 때 먹는 돼지고기 수육을 부르던 말이다.인터넷에선 주로 이 성계육을 써서 만든 국요리인 성계탕이 잘 알려져 있는데, 개성과 그 이북 지방에서 유행했다고 한다. 평안도 지방에 원래부터 있는 돼지고기 사골국과 비교하면 성계탕은 밥 대신 좀 더 돼지고기 건더기를 풍성하게 넣었음이 다르다. 남한에서 가장 비슷한 음식을 고르라고 하면 돼지국밥을 들 수 있다. 한국에서는 부산식 돼지국밥이 유명하지만 찾아보면 이북식 돼지국밥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쪽이 성계탕의 후신에 가까울 것이다. 다만 부산식 돼지국밥도 이북 출신 사람들이 기원이라는 설[1]도 있어서, 이래저래 돼지국밥의 조상뻘이 된다.
창작물에서는 흔히 여말선초에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에 대한 원한을 담아 붙인 이름으로 나오지만 이 이름이 출현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고 정황 상 빨라도 18세기 무렵일 것으로 여겨진다.
2. 전설
일단 인터넷에 떠도는 성계탕의 유래에 대한 야사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위화도 회군으로 요동정벌이 좌절되고 최영 장군이 실각, 처형되고 고려 왕조가 멸망, 조선이 건국되면서 살아남은 개성 사람들과 최영의 지지자들이 은밀하게 최영의 제사를 올리면서, 제삿상에 올린 삶은 돼지고기에 이성계에 대한 증오를 가득 담아 성계육이라고 부르면서 먹던 게 바리에이션이 되면서 성계탕이라는 이름으로 민간으로 퍼져 나갔다. |
이성계가 1335년(을해)생 돼지띠라는 이유로 돼지고기에 '성계육'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도 하고, 아예 개성 지방에선 돼지를 성계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설도 있다. 옛날 보존기술의 한계와 요리의 편의성 때문에 삶은 돼지고기 수육인 성계육보다는 국물이 있는 성계탕이 좀 더 보존성이 좋고 적은 재료로 풍성하게 먹을 수 있어 민간 사이에서 유행할 수 있었다.
고려대학교 국문과 유영대 교수[3]가 집필한 책 '이성계설화'에 보면, 개성 지방에서 떡국에 사용하는 조랭이떡도 이성계를 의식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조랭이떡 특유의 누에 모양을 만들 때 대나무 칼로 떡을 비트는 행위나, 먹을 때 동그란 부분만 이빨로 끊어 먹는 행위를 이성계 목을 비틀어 죽이는 것으로 비유했다는 것이다.
성계육 이야기에는 조선 왕조 내내 개성이 소외받았다는 이른바 '개성소외론'까지 따라 붙는다. 조선 왕조 내내 과거에 붙어도 위험 지역 주민이라는 이유로 한직만 돌았고, 후기에는 사회 경제적 차별까지 당해서 막막해진 개성민들이 상업에 종사해 송상으로 알려진 개성상인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2.1. 반박
다만 성계육은 일제강점기 무속집단의 풍속이 보급된 것으로써 개성의 이성계에 대한 적대적 민심을 상징하지는 않는다. 성계탕은 아무리 올려잡아도 조선 후기에 최영을 섬기는 소규모 신앙공동체가 향유한 풍속을 현대 대한민국 매체가 여말선초까지 끌어올려 개성의 풍속인 것처럼 확대 재생산한 결과물이다. 더군다나 조선 전기에 개성은 옛수도이자 경기의 일원으로 오히려 꽤나 조선내에서도 우대받고 위세를 자랑하던 도시였으며, 개성이 그나마 소외되기 시작한 것은 양란 이후 조선 후기의 일이다. 게다가 이것도 사실 진짜 차별받던 지역들(관서, 관북)에 비하면 이전만한 대우가 없어졌다고 투정부리는 것에 가까운 것이었다.개성소외론의 근원을 여말선초로 잡는 야사는 인조 26년(1648) 김육이 편찬한 <송도지(松都志)>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알려진다. 이게 진실이면 두문동 72현 전설도 진실이다.
태조 3년(1394) 조선이 한양 천도를 단행했을 때 한양 백성들은 한양 토박이들만이 아니었다. 적지 않은 수가 개성에서 이주시킨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한양에서 돼지고기 씹으며 타도 이성계를 외쳤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가 왕위에서 쫓겨나자 정종은 재위 1년(1399) 개성으로 환도를 단행했다. 개성이 정말로 이씨 왕가에 원한을 품어 부들부들 떨었다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불안한 정국인데 선뜻 돌아가자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종실록에는 정종이 어머니 신의왕후가 묻힌 제릉을 참배하고자 개성을 방문했을 때, 수창궁 북원(北苑)에 행차해 고려 태조 왕건이 도읍을 세운 뜻에 감탄하며 도읍을 도로 옮길 결심을 굳혔다고 적었다.[4] 하나 실제로는 수많은 인력과 물자가 소모되는 토목공사를 중단해 어수선한 시국을 다독일 필요가 있었고, 한양 도성에 안장된 계모 신덕왕후의 권위를 깎으며, 한양 도성을 건설한 정도전의 흔적을 흐리려는 목적이었다. 신덕왕후와 정도전의 영향력을 지우기 위해 선뜻 개성 환도를 결정했다는 데서 개성 민심에 대한 우려는 크게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태조가 개성에서 과거를 실행하였으나 태학생들이 거부하였다는 이야기는 용의 눈물, 정도전 등 사극에서 여러 번 재탕해서 널리 알려졌다. 태조가 여기에 격분해서 조선시대에는 개성 사람들에게 과거 응시를 금지했다가 성종대에서야 해제되었고, 그후로도 계속 차별을 받아 개성 사람들은 주로 상업에 뛰어들었다는 뒷이야기까지 붙었다.
하지만 개성은 대도시지만 한양과 달리 주변에 경작지 면적이 협소해 많은 인구를 부담할 식량을 자족할 수 없어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했다.[5] 경작지가 부족으로 상업에 의존하는 약점은 전근대시대에 해결할 방법이 없어 개성은 대대로 기근에 굉장히 취약했다. 1656년(효종 7)의 가뭄과 장마로 인한 쌀값의 앙등으로 이듬해 봄 개성 주민들이 주려 죽을 지경이 되어 가까운 황해도의 비축곡을 급히 운송해 기근을 구제하도록 조처했고(『효종실록』 권18, 효종 8년 2월), 수년이 지난 현종 1년(1660)에도 개성부에 유민 410명이 발생해 4월 초부터 6월 초까지 두 달간 진휼하는 등(『현종실록』 권3, 현종 원년 6월) 기근피해가 타 지역에 비해 매우 잦았다.
기록을 보자. 태조 2년(1393) 5월, 조선을 건국한 이후 처음으로 실시한 식년시에서 5월 3일 감시(監試, 생원진사시)를, 6월 13일 문과 전시를, 6월 24일 성균관에서 생원시를 치렀다.[6] 6월 13일의 문과 전시에서 선발된 33명의 이력은 방목에서 확인되는 바 전원 생원(生員) 혹은 진사(進士)이니 이들 중 다수는 태학생일 것이다.
그보다 앞서 치른 감시(생원진사시)에서는 박안신(朴安信) 등 99명을 아무 탈 없이 선발했는데, 개중에는 우현보와 이색의 당여로 지목되어 유배 갔던 유정현의 두 아들도 있었다. 유정현은 아들들이 합격했음을 계기로 직첩을 돌려받았다.[7] 이때는 한양천도 이전이다. 6월 24일에 치른 성균관 시험에선 132명을 선발했다. 과거 거부는 고사하고 온건파 관료의 자제들까지 참여해서 모자람 없이 충분히 인원을 선발했다.
물론 성균시에 응시해 합격하고도 입학은 거부한 고약해(高若海) 같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고약해조차도 태종 13년(1413) 천거받아 관직에 나선 이후론 꾸준히 봉직했다. 새 왕조가 건국된 직후라 고약해처럼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관망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지만, 이성계를 비롯한 집권자들은 그런 계층이 있음을 충분히 감안하여 유화책을 폈다. 개성에 불이익을 주었다는 기록은 없다.
정종이 개성으로 환도한 후 치른 정종 1년(1399) 식년시, 태종 1년(1401) 태종 즉위를 기념한 증광시, 태종 2년(1402) 식년시까지 개성에서 치른 과거 3번 모두 무탈하게 실시했다. 1402년 식년시에서는 처음으로 무과가 실시되기까지 하였다.
기록이 보여주는 당시 정황이 이러하니 개성 사람들이 설화나 야사에서처럼 정말로 새 왕조를 적대했다고 볼 수는 없다. 민심이 적대적인 도시에서 조선 왕조는 수많은 인파를 불러모으는 과거, 그것도 병장기를 합법적으로 휴대할수 있는 무과(武科)까지 실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15세기 말 성종대에 개성민의 과거응시를 허용했다는 주장도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개성 사람들이 개성에서 알성시를 열어달라고 성종에게 청원했지만, 개성이 한양과 워낙 가까워서 한양 유생들이 개성 가서 시험을 치를 수 있다는 우려로 거부되고 개성유수가 주관하여 도회(都會)[8]를 열어 4명을 선발하는 것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연산군 시기에 역시 개성에서 알성시를 열어달라는 청이 올라왔지만 성종 때 전례를 들어 거부하였다.
조선시대 지리관념으로도 개성은 한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서 성종은 '강릉이나 평양같이 먼 지방 유생들이 받아야 할 특전을, 왜 한양 지척에 사는 너희들이 받으려고 하느냐.'며 언짢아 했다.[9]
실제로 개성 주민들이 한양에 와서 수학하고 과거를 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월산대군과 성종을 가르쳤던 김구지(金懼知)는 남대문 밖에 세들어 살던 개성 사람으로, 과거에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가르치는 실력이 좋아서 세조도 이름을 기억하고 칭찬할 정도였다. 성종~연산군 연간에 당대 인식이 개성에서 날고기는 사람들은 전부 한양에 와서 개성에 남은 사람 중에는 주목할 만한 인재가 별로 없고, 거리가 가까워 한양으로 오가기 쉬운 개성에 특전을 베풀 필요가 없다고 할 뿐 차별한 적은 없었다.
개성소외론이 조선 초기에 비롯되어 조선시대 내내 쭉 존재했음을 주장하는 학술논문들은 조선 전기의 정사는 무시한 채 김육의 송도지 같이 17세기 이후 개성 문인들의 시각을 반영한 읍지[10]나 여지도서 같은 17세기 이후 지방지[11]를 근거로 든다. 17세기 이후에 들어서 개성 주민이 차별받는다는 인식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런 인식이 고려 멸망과 조선 초기부터 쭉 이어져내려왔다는 식으로 연원이 와전된 것이다.
하필 17세기에 개성소외론의 근원을 여말선초로 잡는 야사가 등장한 이유는 16세기 이후 개성의 위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개성은 한양에 가까워 접근성이 좋은 데다 고려시대부터 수도라 학문교육과 전승을 돕는 시설들이 밀집해서 개성문인들은 맘껏 혜택을 누리며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다. 게다가 행정구역 측면에서도 전국 유일의 유수부가 설치되었는데, 원래 유수라는 관직은 당, 송에서 제2수도를 관장하던 직책이었고 고려에서도 3경에 유수를 두었으며 개성유수의 서열은 8도감사보다 위에 있었다. 즉 조선왕조는 대놓고 개성을 제2수도로 대우한 것이다. 심지어 개성유수는 한성판윤을 제외하고는 유일무이한 경관직 지방관이었다.[12]
하지만 16세기 들어 조선의 중앙집권적 행정체계가 완전히 정착하고[13] 사화와 당쟁으로 중앙의 관인층이 각 지방으로 흩어져 서원에서 자체적인 교육과 전승 체계를 마련했다. 그리하여 중앙에 비해 낙후된 지방의 학문적 역량이 향상되자 개성과 타 지방의 차이는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재난으로 도시가 쑥밭이 되어 학문교육시설도 재가 돼버리니 개성의 이점은 완전히 사라졌다.
서경덕(徐敬德), 최립(崔岦), 차천로(車天輅), 마상원(馬尙遠) 같은 걸출한 문인들을 배출한 15~16세기의 영예는 끊어져버렸고, 정치적 측면에서도 제2수도를 상징했던 유수부의 지위는 17세기 들어 수도권에 강화, 광주, 수원 등의 새 유수부들이 속속 지정되면서 위상이 다소 낮아졌다. 과거 누려온 메리트가 모두 사라지고 자부심을 드높일 문인들도 배출되지 않은 상실감과 박탈감, 피해의식이 개성소외론 여말선초 기원이란 가공의 역사를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개성의 떨어진 자존심은 18세기에 도성 방어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개성의 위상이 크게 상승하고 노론과 낙론 종장들에게 수학한 유학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나서야 회복되었다. 수도에 인재가 몰리고, 출세하려면 수도에 가야 하는건 전세계가 마찬가지다. 그리고 전술했듯 조선 교통으로도 한양에서 개성은 이틀 거리이므로 개성사람과 한양사람을 엄밀히 구분하는게 어렵다.
개성소외론이 수백년 된 원한이란 설은 한양의 관료, 문인들이 개성문인들과 교류하며 편찬한 읍지가 퍼트렸고,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지리지에 실림으로써 공인되었다. 개성 아이들이 이성계의 이름을 부르고 다녔다는 기록은 남 보여주려고 출간한 문집인 성호사설에도 실렸다. 이는 왕실에서 개성이 그들의 역사를 비극적으로, 역동적으로 윤색함을 허락했고, 이제와서 개성 사람들이 조선 왕실에 충성함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교하자면 진짜로 차별받은 청천강 이북 지방에 대해서는 국가 공식 지리지에 차별을 명시하고 한양 문인들이 이를 공론화한 적이 없다.
3. 실제 유래
성계육의 진원지는 최영 신앙의 본산 격인 개성 덕물산이다. 개성에는 고려 중기부터 국가에 여러 환란이 닥쳤을 때 신령의 은혜를 바라며 기도하는 기은처(祈恩處), 쉽게 말해 기복의례를 올리는 신사(神祠)들이 여럿 있었다. 이 신사들은 조선 개국 후에도 그대로 남아서 지역민들은 물론 왕실도 치성을 올렸고, 조선 전기부터 유생들이 자추 찾는 유람명소이기도 했다.[14]특히 '안산'이라 불린 송악산(松嶽山)과 '밖산'이라 불린 덕물산(德勿山)[15]의 신사가 유명했는데, 이중 덕물산은 태조 5년(1396) 최영이 신원되면서부터 최영을 섬기는 신사로 전국 무속인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한국전쟁으로 지역 공동체가 완전히 박살이 나버려 지금은 조사할 길이 없지만, 20세기 전반 덕물산 자락 산상동(山上洞)이라는 마을은 부락 전체가 최영을 받드는 무속신앙과 관련 있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민속과 무속을 조사해 자료로 남긴 민속학자 아키바 다카시(秋葉隆, 1888-1954)는 덕물산을 방문해 조사하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산정의 부락을 산상동이라 하는데 거기에는 높고 낮게 돌로 쌓은 담과 울툭불툭한 소로가 상하로 돌아가고, 40호 초가집이 있다. 그리고 부락이 들어갈 사이도 없는 곳에 장군당 즉 최영사의 문이 있다. 신전(神殿)은 삼칸사면의 기와지붕으로 이어져 있는 본옥에 자리 잡았다. 건물에 얹은 몇 장의 청기와는 당시의 화려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본당 정면 구석에는 최영장군 및 그의 첩이라고 하는 여인의 큰 소상이 있고, 그우측에는 장군의 한 딸과 두 아들 그리고 군웅이 모셔지고, 좌측에는 용상을 받고 있는 별상이 있다. 별상의 딸은 천연두신 호구별상이라 하고, 별상은 소위 뒤주대왕이라 불리는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이르는 말이다. 또 옆벽에는 삼불제석·칠성신·송악산신·가망님·사방천왕·임경업장군, 좌측벽에는 감악산천총대왕·가망부인·용왕·용왕부인·송악산신·삼불제석의 화상이 걸려 있고, 대소 볼록거울이 함께 걸려 있고 장군의 장남이 청룡도와 삼지창을 가지고 서있다. 한 구석에는 연기에 그슬린 촛대가 있으며, 신기는 무녀가 굿할 때 사용한다. 촛대는 굿이 끝난 밤에 그 당번 무녀가 반드시 장군당에 촛불을 켜도록 되어있다. 아마 그 옛날 무녀는 신처(神妻)로서 신을 모시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부락의 중앙에는 장군의 부인을 모신 부인당이 있다. 장군당에 비해 규모는 떨어지지만 역시 기와집으로 지었고 당 안에 부인의 소상을 안치하고 뒤로는 큰 신경을 걸었고 그것과 나란히 좌우로 삼불 등을 모시고 외랑에는 부인의 하졸의 화상 및 수광대(首廣大) 두 개를 걸어두었다. 취지로 보아 임장군당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아키바 다카시 저, 심우성 역, 1993, 「조선민속지」, 동문선, p.283
아키바 다카시 저, 심우성 역, 1993, 「조선민속지」, 동문선, p.283
산상동 주민들은 최영은 물론 첩과 두 아들, 딸까지 일가족 5명을 모두 신으로 받들어 섬겼다. 그리고 마을 중앙에는 최영의 부인 소상에 부인의 하인 화상까지 별도로 모신 부인당이 마련되어 마을 전체가 철저한 무속신앙 공동체인 유별난 곳이었다.
경성제국대학에서 법문학부 교수를 지낸 민속학자 아키바 다카시는 제국학사원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조선의 전국 각지를 답사하고 1935-36년 복부공보회라는 사회단체로부터 편찬, 출판비를 지원받아 1938년 책으로 출간했다. 그와 동료 학자 아카마쓰 지죠는 1928년 5월 말, 1931년 2월, 5월 등 세 번에 걸쳐 덕물산을 방문하여 조사했는데 1931년 5월 조사에서 성계육이 등장한다.
한편으로 땅을 파서 부뚜막을 만들어 여기에 큰 솦을 걸고 와정(瓦井)의 신수(神水)를 부어, 화주(化主)의 집도로 분배된 생생한 희생의 소, 돼지를 큰 솥 속에 넣고 삶는다. 이렇게 날이 저물고 황혼 무렵에 제물을 익히는 부두막의 연기가 산기슭을 따라 길게 뻗치면, 굿의 대단원인 향연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제물의 성찬을 에워싸고 앉아 신주(神酒)를 마시며, 신의 은총에 안겨 남녀노소할 것 없이 모두 한껏 즐기고 있었다. 우리들도 화주와 함께 최초의 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조선 제일로 치는 덕물산 성계고기(成桂肉)의 맛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아키바 다카시, 아카마쓰 지죠 저, 심우성 역, 1991, 「조선무속의 연구」 下, 동문선, p.211
아키바 다카시, 아카마쓰 지죠 저, 심우성 역, 1991, 「조선무속의 연구」 下, 동문선, p.211
도당굿 희생물(탕주)[16] 이 사진이 바로 아키바 다카시와 아카마쓰 지죠가 1931년 덕물산 도당굿을 조사하며 찍은 성계고기의 모습이다.
덕물산 성계고기라는 아키바의 지칭으로 성계고기가 개성에서도 덕물산 명물임을 알 수 있다. 아키바가 붙여둔 주석을 봐도
덕물산에서는 고려의 충신 최영을 숭배한 결과,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이름을 장군의 영령에 올리는 돼지고기의 호칭으로 하고, 이것을 성계고기라 한다.
아키바 다카시, 아카마쓰 지죠 저, 심우성 역, 1991, 「조선무속의 연구」 下, 동문선, p.325
아키바 다카시, 아카마쓰 지죠 저, 심우성 역, 1991, 「조선무속의 연구」 下, 동문선, p.325
성계고기는 결코 개성 전체의 풍속이 아니다. 최영을 숭배하는 덕물산 산상동 부락에서 2년에 한 번 음력 3월에 여는 도당굿에 올리는 돼지고기를 일컫는 말이었다.
17세기 역사적 진실이 자리잡아버린 개성소외론은 18세기 두문동 72현 설화가 진실로 굳어지게 했다. 지역 여론을 주도하는 사대부들이 100년 넘게 저리 아우성인데 지역주민들이 과연 동조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낮다. 지역 주민들의 의식 또한 그와 함께하며 고려의 구도라는 역사성을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개성의 어느 곳보다도 최영을 의식하고 의지하는 개성 덕물산 신앙공동체에서 '성계육'이란 명칭을 사용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성계육이란 명칭이 조선 전기부터 있었거나 덕물산 밖에서 쓰였을 가능성은 낮다. 덕물산도당굿만 해도 산상동 부락에서만 조용히 지내는 굿이 아니다. 외지에서 온 유랑예인들까지 참여해 불특정 다수의 인원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신명나게 벌이는 일종의 축제다. 개성의 신사들은 지역 유생은 물론 한양 문인들도 곧잘 방문하던 명소였다. 조선 전기부터 혹은 덕물산 밖에서 쓰였다면 중간에 기록에 남을 수밖에 없다. 이중환의 택리지, 박지원의 연암일기 같이 개성의 무속신앙을 언급한 기록들은 상당히 많지만 그 어디서도 성계육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조선 전기 최영 신앙은 국가의 시선 아래 있었다. 최영을 신원하고 종로에 사당을 세워 화상을 봉안케 한 사람이 태조 이성계였다. 덕물산 최영 신당도 이 무렵 정비되었다. 태종 시기까진 양경 체제로 개성이 도읍지로서 위상을 유지했고 세종 시기까지 그 관성이 이어져 역사적 사실을 도외시한 개성소외론이 대두하지 않았다.
개성 문인들이 개성소외론에 동조했을 가능성은 아예 없다. 영조 16년(1740) 승정원일기 기록에 따르면 영조는 두문동 72현 전설을 이미 알았다. 그런데 영조는 그해에 개성에 행차에 두문동 72현 전설을 마치 처음 듣는다는 듯 쇼를 했고, 개성 사대부들은 두문동 이야기에서 충절 부분은 더욱 강조하고 비극적으로 죽었다는 부분은 알아서 뭉개 영조사 보기 좋게 편집했다. 이런 개성 사대부들이 조선에 적개심을 품고 돼지고기를 씹었을 가능성은 없다. 개성은 조선 후기 성리학 중흥의 수혜지로 19세기 이후 지역 유교전통이 확립되며 성리학의 영향력이 한층 강해졌다.
그럼 덕물산 무당과 주민들은 언제부터 돼지고기를 성계고기라 불렀을까? 산상동 부락이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소멸하여 정확한 시기를 특정하기는 불가능하다. 아키바는 주민 300명 가량인 마을에 무당 7명과 고수 2명이 있었고 무당이 늙으면 어린 소녀에게 전승하는 방식으로 신앙을 이어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전승내용도, 무당도 남아있지 않고 기억을 간직한 다른 생존자도 없다.
거칠게 추정은 해볼수 있다.
내가 이전에 송도를 지나는데, 마을 거리의 어린 아이들이 아직도 태조(太祖)의 등극하기 이전의 휘(諱 성계(成桂)라는 이름을 이름)를 마구 부르기에, 이는 전조(前朝 고려를 이름)의 남은 습관으로, 우리와는 원수가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당시 고려가 망하자, 끝내 옛 송도에서 늙은 자는 다 백성에 편입되어, 지금도 노인들이 두문동(杜門洞)이니, 팔판동(八判洞)이니 하는 동명을 전하니, 이는 그 유신(遺臣)들의 숨어 살던 곳이라 하여 개연히 길이 탄식하는 뜻에서이다.
- 이익, 「간발왕씨」, 『성호사설』 권12.
18세기 중반 저작인 이익의 성호사설에 마을 아이들이 태조의 즉위 전 휘를 마구 불렀다는 언급이 등장한다. 그리고 두문동 설화가 개성민들에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음도 확인된다. 유학하는 사대부들이야 왕실이 연주하는 장단에 알아서 맞췄지만 평민들은 그럴 필요가 없고, 조정에서도 평민들의 행실 하나하나까지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이익, 「간발왕씨」, 『성호사설』 권12.
고려의 구도라는 사실에서 자부심을 얻는 개성 주민의 역사인식이 18세기 이후 더욱 심화되어 18세기에 이르러 마을 아이들이 이성계의 휘를 마구 부를 정도였다. 이런 인식이 더욱 심화되어 올려잡으면 18세기 후반, 내려잡으면 구한말쯤 전국에서도 가장 신실한 최영 신앙 공동체인 덕물산 무속인들이 제에 쓰는 돼지고기를 성계고기라 부르게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이렇다고 덕물산 주민들이 조선 왕조에 적개심을 품었다고 주장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다. 양반들 비꼬는 내용으로 가득한 봉산탈춤을 두고 민란 획책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경주 주민들이 신라의 고도임을 자랑스러워 하고 공주, 부여 즈민들이 백제의 고도임을 자랑스러워 하고 김해 주민들이 가야 금관국의 고도임을 자랑스러워 하듯이 이 지역의 역사와 위인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전근대식으로 표현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개성의 역사성은 고려의 수도에만 있지 않다. 개성 주민들은 자신들의 고향이 고려의 수도라는 점 못지않게 조선왕실의 어향, 태조가 즉위하고 태종이 성장한 풍패지향이란 점을 진심으로 자랑으로 여겼다. 세종 즉위년(1418)에 개성의 태조 잠저에 사당을 짓고 목청전(穆淸殿)이라 이름하여 어진을 봉안했다. 목청전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개성 사람들은 무려 200년이 넘게 조정에 요청한 끝에 대한제국 시기인 광무 5년(1901)에 목청전을 다시 재건하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다시금 봉안했을 정도로 조선의 역사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심지어 조선 제 2대 국왕이었던 정종과 조선의 첫번째 대비였던 정안왕후의 능도 개성시 인근인 개풍군 영정리 백마산 동쪽 기슭에 있는 후릉이며 여기에 정종과 정안왕후가 나란히 묻혀 있다. 거기다 정종과 태종의 친어머니이자 태조 이성계의 첫번째 아내였던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 또한 개성 인근인 개풍군 상도면 풍천리(현재 개성 판문군 지동)에 있을 정도이다. 만약 조선 초기부터 개성의 민심이 조선왕실에 매우 적대적이었다면 조선 왕실의 주요 인물들의 무덤들이 개성 인근에 만들어지지도 못했을 것이므로 당대 개성의 민심은 결코 조선 왕실에 적대적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사대부들이 열심히 강조했던 두문동 72현 전설과 달리 지역 무속 공동체에서 시작되어 덜 알려졌던 성계육 이야기는 분단 이후 신문기사나 구전으로 간간히 언급되었다. 1970년대 최고작가 황석영이 1974년부터 10년간 연재한 베스트셀러 장길산[17]에 실려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졌고, 2014년 KBS 사극 정도전 때문에 젊은층의 역사 인식에도 들어가 박혔다.
4. 창작물
드라마 정도전에서 등장했다. 변복하고 궁 밖으로 나온 이성계와 이지란이 주막에서 음식을 시키는데, 거기서 성계탕이란 것이 유행함을 알게 되었다. 최영이 처형당한 뒤 이런저런 이유로 개경 내 많은 사람들이 이성계 세력에게 살해당해 개경 민심이 굉장히 좋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이성계는 눈물을 흘리며 성계탕을 먹었고, 이후 수도 천도를 결심한다.
사실 잔인한 시대 상황을 배경을 하고 있지만, 드라마에서는 극적 연출과 이성계를 연기한 유동근의 연기력으로 잘 포장되어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참고로 이 장면은 이지란을 연기한 선동혁이 해피투게더에 출연했을 때 정도전을 촬영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으로 꼽았던 장면이다. 이는 이성계를 연기한 유동근의 놀라운 감정이입 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여담으로 작중에서 성계육과 대비되는 음식으로 이밥이 있다. 드라마에서 이밥을 이성계가 내려 준 밥이란 의미로 해석하는데, 진실여부는 제쳐놓고, 이는 고려 민심이 이성계로 향함을 보여주는 요소였다. 그런데 조선 건국 과정에서 정몽주, 고려 왕씨 등 수많은 회생이 벌어지면서 개성의 민심이 급격히 돌아섰고 이를 보여주는 요소가 성계육인 것이다. 음식을 이용해 여말선초 이성계를 대상으로 한 민심의 변화를 연출한 제작진의 재치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SNL 코리아에서도 이 장면을 패러디했다. 배역은 정상훈이 이성계, 신동엽이 정도전이고 유세윤이 이방원, 정성호가 이지란이다. 거기에 정도전(煎)과 이방원할머니 족발도 같이 나오는데, 마지막에 이것들을 주막에서 키우는 강아지인 이성개(犬)에게 주는 것이 압권. 해당 영상.
단순히 해당 장면 자체를 패러디한 차원에서 벗어나 의외로 실제 역사에서의 훗날 이들의 관계를 SNL 식으로 적절히 버무렸는데, 정도전과 이방원이 서로 상대방의 이름을 딴 음식을 갈기갈기 찢으며 잘근잘근 씹어먹는 것은 훗날 벌어질 이들의 권력 투쟁을, 이성개(犬)가 이방원할머니 족발만 먹고 정도전(煎)은 먹지 않는 것은 살수들을 시켜서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에 대한 이성계의 미움을 묘사한 것. 드라마의 해당 장면에서는 이성계와 이지란만 등장했지만, SNL 패러디에서는 정도전과 이방원까지 등장시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프리카TV 먹방 버전(브금주의)으로 만든 것도 있다. 아이디와 닉네임들이 깨알같다.
태종 이방원에서도 등장한다. 아끼는 아들 방원이 아버지의 대업을 돕고 싶다고 나서자 그만큼은 험한 일 겪게하고 싶지 않은 이성계가 잠행할 때 장사꾼이 성계탕 파는 모습[18]을 떠올리며 이 난세에 끼어드는 순간 세상의 모든 비난을 다 지고가야 한다며 만류한다.
대체역사소설 킹방원 메이커에서도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처음에는 성계국밥이었다가 전주국밥으로 이름이 바뀐다. 전주 사람인 나랏님이 내려주신 쌀과 고기를 만들었다 해서 전주국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성계탕을 먹으며 슬픔에 젖었던 이성계가 전주국밥을 앞에 놓고 울음을 참는 모습은 건국 조선의 치세를 보여주는 명장면. 후에 이방원과 같이 전주 국밥을 먹으며 부자가 화해한다.
[1] 기본적으로 부산식 돼지국밥은 밀양 기원설이 정설이긴 하다.[2] '백기를 삶아 먹고 싶다'라는 뜻의 츠바이치(吃白起, 흘백기)라고도 한다.[3] 이 사람은 사학과 교수가 아니라 고전문학과 판소리 연구하는 국문과 교수다.[4] 『정종실록』 권1, 정종 원년 2월 15일[5] 박평식, 1998 「조선전기 개성상업과 개성상인」, 『한국사연구』 102, pp.189~190.[6] 『태조실록』 권3, 태조 2년 5월 3일, 6월 13일, 6월 24일[7] 『태조실록』 권3, 태조 2년 5월 3일[8] 지방 유생들의 학업을 장려하고자 치르는 특별시[9] 『성종실록』 권47, 성종 5년(1474) 9월 27일[10] 양정필, 2017, 「조선시대 開城 지역에 대한 차별과 개성인의 정체성」, 중앙사론 권46[11] 노영구, 2016, 「조선후기 개성의 도시 발달과 지역의식의 성장」, 서울학연구 권63[12] 한성에 감영이 있는 경기도관찰사조차 원칙적으로는 외관직이었다. 다만 개성유수는 2명이 보임되었고 이 중 1인은 경기도관찰사가 당연직으로 겸직했기 때문에 경기감사는 개성유수 자리에 묻어서 경관직으로 대우받았다.[13] 속현, 소 같은 고려시대의 차별적 행정구역은 조선 개국 직후에도 존속하긴 했지만 점진적으로 사라지다가 16세기 들어 완전히 사라졌다.[14] 개성은 조선 전기부터 관광명소였다. 고려 때 중수된 사찰들이 많아 숙박 걱정이 없고, 한양에서 겨우 이틀 거리에, 고려 중기부터 남경(한양)일대가 개발되고 중국 사신의 사행로도 개성에서 한양으로 이어져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고관대작뿐 아니라 평범한 유생들도 쉽게 방문할 수 있는 관광지로 유명했고 박연폭포나 송악산 신사는 지역 명물로 통했다.[15] 광복 당시 개풍군 봉동면 소재. 해발 288m로 개성시가에서 남동쪽으로 10km 떨어져 있다.[16] 도당굿을 진행할 때 바친 제물의 모습. 돼지2마리, 소머리 1개가 보인다. 설명 출처[17] 10권에 대놓고 덕물산 큰굿에서 성계육을 씹는다는 언급이 나온다. 덕물산 풍속을 전해 듣고 소설을 쓴 것. 황석영은 이를 덕물산 뿐 아니라 개성과 북쪽 전역의 풍속인 양 묘사했다.[18] "자, 성계탕 드시고 가시오. 안에 들어있는 고기를 최영 장군 죽인 이성계라고 생각하시오. 아주 잘근잘근 씹어드시오. 맛 좋고 속이 시원해지는 성계탕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