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21:13:25

박철웅

대한민국 제2·3·5대 국회의원
박철웅()
파일:external/tv.pstatic.net/yonhapnews_28442474.jpg
<colbgcolor=#580009><colcolor=#CFA547> 본관 김해(金海)
자양(慈陽)
출생 1912년
전라남도 고흥군
사망 1999년 1월 8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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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교육자, 정치인, 기업인, 독립운동가이며, 조선대학교 설립의 실무자 중 한 명[1]이자 덕산그룹 설립자이기도 하다. 본관은 밀양(密陽)[2], 호는 자양(慈陽).

2. 생애

1912년,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동학농민군 접주 출신인 아버지 박학준(朴學俊, 1869 ~ 1955)[3]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주신흥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하여 구류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33년부터 2년간 춘천매산학교, 호남보통학교에서 교사를 맡다가 일본 메이지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41년부터 일본 도쿄도 후생국, 교육국에서 일하다 퇴직 후 나사공장 제작소를 운영하였다. 1945년 8.15 광복 후 귀국하여 남조선과도정부 문교부 편수국에서 일하다 1946년, 서민호 광주부윤의 부름을 받아 서무과장, 총무과장을 거쳐 전남도청 운수과장까지 맡았다. 1946년 서민호 전라남도지사와 지역유지들이 모여 조선대학교설립동지회를 만들자 이곳에 실무자로 참여하였다. 이후 6.25 전쟁으로 설립동지회는 해체되고, 박철웅은 조선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면서 독단적인 운영으로 많은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1960년 4.19 혁명 후 학생과 교수들에게 지탄을 받아 '명예총장' 직함으로 대학운영 일선에서 퇴진한 바 있었고, 1963년에 총장직에 복귀했으나 1980년 8월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시절 광주보안대에 부인 정애리시 이사장과 함께 끌려가 학교운영권을 박탈당했다. 1982년 11월에야 학교법인 조선대학교 이사장 복귀가 허락되어 명예총장에도 추대됐다가 1986년에 총장직에 복귀했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많은 사립학교에서 부패 재단 퇴진운동이 벌어졌고, 8월 5일에 그와 비서가 강치중 조선대병원장을 공식석상에서 구타한 사건을 계기로 학생들이 그와 이사진의 퇴진을 요구하며 장기농성에 들어갔다. 결국 1987년 12월, 박철웅은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1988년 관선이사진 파견 이후 법원에 반환소송을 제기했으나 1989년에 불구속 기소되었고, 1995년에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판결을 받았다. 수십년의 세월동안 조선대학교 재단을 틀어쥐고 권력을 휘둘렀다는 평과 조선대학교 장학생들의 증언과 사료에 따르면 항일운동 후 나사공장을 운영하며 적게는 수십명의 조선 징용인들을 탈출시켰으며 해방 후 본인의 사유재산 대부분을 조선대학설립에 사용하였다. 상반된 평가를 지니고 있는 인물. 이는 부친인 박학준 접주와 박철웅 본인이 항일운동과 고학으로 고초를 겪었던 만큼 박철웅 본인이 민족운동과 교육에 큰 사명을 가졌던 것으로 보여지며 이를 통해 똑같은 비리사학인이면서도 그의 고향 후배인 이홍하보다 낫다.

부인은 한때 ‘서석동할머니’라는 별칭으로 불리우던 고리업자 정애리시다. 박철웅-정애리시 부부는 고려시멘트를 설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대학교 사유화와 자금을 끌어모았다는 평이 있다.

당시 광주를 일대로 한 호남 전라도 지역은 개발이 미미한 지역으로 건설 시멘트 공장 또한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조선대학교 건물 증축에 필요한 자재 수급에 어려움을 겪자 시멘트 공장의 필요성을 느낀 박철웅.정애리시 부부는 고려시멘트를 설립하였고 이 후 호남 지역 전반에 걸쳐 사업이 확장 됨에 따라 이를 모태로한 덕산그룹을 만들었다.

그러나 덕산그룹은 무리한 확장을 거듭하다가 IMF사태가 터지기도 전인 1995년에 무려 1조 원대의 대형 부도를 내고 공중분해되었다. 이후 아내인 정애리시는 전남 담양군 덕산복지재단 대표를 역임하다가 이후 이 시설은 혜림복지재단에서 인수했다.

조선대학교 병원 설립과정 당시 직접 관여한 인물로 당시 미군정 산하의 의료 기자재들과 재원을 기반으로 설립허가를 받아내었고, 휴전 후 식자재 납품 사업과 교육 실정이 낮은 여성들을 위한 문맹교육과 미용학원을 운영 하였으며 배우자인 박철웅이 사학운영과 정치활동외에 사업에는 관심이 없어 고려시멘트와 덕산그룹을 실질적으로 운영하였다는 평이있다. 정애리시는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학교 음악학부 성악과를 졸업하였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광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전라남도 고흥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라남도 참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1년 3.15 부정선거 등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공민권이 제한되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자녀로는 박성섭 전 덕산그룹-무등일보 회장, 박성현 전 고려시멘트 회장 등 4남 3녀가 있다. 박성현은 2010년대 이후 극우 유튜버로 활동 중이다. 그와 동향인 고흥군 출신이면서 그가 사유화한 조선대학교 출신 인물 가운데에 서남대학교 설립자이자 그를 뛰어넘는 악질 비리사학인이홍하가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씁쓸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박철웅은 민족운동이라도 했지 이홍하는 민족운동, 교육발전도 아닌 걍 사리사욕에 눈이 먼 악질에 불과하다.

1999년 1월 8일 오후 7시 30분,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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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관련 문서



[1] 조선대학교는 한 개인이 세운 것이 아니라 조선대학 설립동지회가 72,195명의 후원을 받아 설립한 민립대학이고, 박철웅은 동지회에서 주요 실무자로 일했다. 자세한 내용은 하술 내용과 조선대학교/역사 문서 참조[2] # 족보명은 박민수(朴玟洙).[3] 족보명은 박종기(朴鍾沂). 고흥군 두원면 유동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