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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금성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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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흑금성은 누구인가3. 편승공작4. 흑금성의 대북활동5. 몰락6. 참고 자료7. 관련 문서

1. 개요

국가안전기획부 소속 4급 공무원 박채서(암호명 '흑금성')가 북한에서 공작 활동을 하던 중 총풍 사건과 관련하여 실체가 탄로난 사건.

2. 흑금성은 누구인가

<colbgcolor=#808080><colcolor=#fff> 박채서
朴采緖|Park Chae-seo
파일:IE001249166_STD.jpg
출생 1954년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구미리
(現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구미리)
본관 반남 박씨[1]
학력 갈원국민학교 (졸업)
청주중학교 (졸업)
청주고등학교 (졸업)
전주대학교 (일어교육과 / 학사)
국방대학원 (안전보장학 / 석사)
임관 육군3사관학교 (14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77년 ~ 1993년 3월
최종 계급 소령 (대한민국 육군)

[clearfix]
흑금성의 본명은 '박채서(朴采緖)'이며 1954년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現 청주시 남이면) 구미리[2]에서 태어났다. 갈원국민학교, 청주중학교[3],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3사관학교(14기)[4]에 입학해 1977년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하였다. 군 복무 중에는 전주대학교[5] 일어교육과[6]를 졸업했고 1990년 국방대학원에서 국제관계 전공으로 안전보장학 석사 학위[7]를 취득했다.

그러던 도중 국군정보사령부의 요원으로 선발되어 1991년부터 국군정보사령부 소속의 한미 합동공작대 A-23팀[8]에서 대북 우회 침투 공작에 참여했다. 이 시기 그는 북한 공작조직이 당면한 자금난을 이용하는 공작안을 기획했는데 이것이 상부에 의해 채택되었다. 이와 같이 그는 군 내에서 매우 전도유망한 군 첩보요원이었고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곧 유능한 엘리트에서 무능하고 술과 도박을 좋아하며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으로 180도 바뀌었다. 그는 동료들에게 돈을 빌리고도 제대로 갚지 않아서 신용 불량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행위는 감찰에 발각되어 결국 1993년 3월 그는 소령 신분으로 제대하고 말았다. 다들 무시무시한 정보사령부 소속 엘리트 첩보요원이었던 그가 이렇게 망나니로 몰락하는가 싶었다.

3. 편승공작

파일:200210310500013_2.jpg
왼쪽에서부터 박기영, 박채서, 정진호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계획된 작전이었다. 사실 박채서는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국가안전기획부 해외공작실로부터 특채 제안을 받은 상태였고 이를 수락한 후 국내 고정간첩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러한 짓을 벌인 것. 박채서는 안기부 4급 공무원으로 특채되어 소속을 정보사에서 안기부로 옮긴 후 203실(해외공작실) 공작원이 되어 대북활동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가 참여한 공작은 '편승공작'으로 대북사업에 열의가 있는 사업가를 지원하고 거기에 편승하는 방식으로 대북활동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박채서 공작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광고 프로듀서 출신 박기영[9]이었다. 박채서는 먼저 박기영의 이웃집으로 이사를 간 후 박기영과의 친분 쌓기에 주력했다.[10] 그리하여 박기영이 한국 광고를 북한에서 촬영하려는 방안을 꿈꾸고 있었음을 알아냈다. 박채서는 박기영과 함께 그 방안을 현실화하기 위해 자본을 물색하던 중 미진양행 운영자 정진호[11]와 접촉했다. 그리하여 박채서, 박기영, 정진호는 1995년 '커뮤니케이션 아자(AZA)'[12]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박기영은 대표를, 박채서는 전무를 각각 맡았다. 그렇게 박채서는 흑금성이라는 암호명[13]으로 제2의 첩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편 박채서는 점차 북한과도 접촉을 시작하였다. 회사 설립 이전에는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계를 통하여 북한 국가보위부장 대리인 김명윤과 접촉하였다.[14] 이때 박채서는 북한의 다른 정보기관들이 제안한 거래를 거부하고 오직 국가보위부하고만 거래를 이어나갔다. 이로서 국가보위부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고 북한 관련 정보도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회사 설립 전후에는 광명성경제연합회[15] 베이징 대표부의 '리철'('리철운' 혹은 '리호남')[16]이라는 사람과 접촉하였다. 그리고 '흑금성' 박채서는 북한에게 달콤한 제안을 하나 내밀었다.

4. 흑금성의 대북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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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촬영 계약서 체결 장면을 지켜보는 흑금성[17] 북한을 방문한 흑금성(오른쪽)[18] 북한 유도선수 계순희(중간)와 흑금성(가장 왼쪽)
흑금성이 내민 제안은 바로 '광고 촬영'[19]이었다. 그는 "광고 촬영이 북한에게 돈을 가져다 줄 것"이라며 구슬렸다. 당시 북한은 1990년대부터 동구권의 붕괴, 제1차 핵 위기, 자연재해, 고난의 행군 등의 사건들을 겪으며 상당한 경제적 타격을 입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북한 지도부는 흑금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20] 그리하여 1997년 2월 박채서는 리철과 함께 남북한의 관계자들을 끌어 모아 실무회의를 가지게 했다. 남에서는 박기영 사장을 비롯한 '아자' 직원들, 북에서는 방종삼 총사장을 비롯한 금강산국제관광총회사 관계자들이 모였는데 며칠 간의 회의 끝에 양측은 2월 14일 베이징 캠핀스키 호텔에서 대북광고사업 조인식을 가졌다. 이를 통해 북한에서의 광고 독점사업권이 넘어오게 됐다.

그리하여 흑금성은 명목상으로는 '사업'이라는 이름 하에 북한을 여러 번 방문했다. 흑금성은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을 직접 만났다고 알려졌으며[21] 장성택을 가장 자주 만났다고 한다. 그러면서 흑금성의 사업은 점차 크기가 커져갔다. 북한 내 광고촬영 독점권을 얻은 흑금성은 삼성 애니콜 광고의 북한 촬영 건도 담당하게 됐고 북한 내 TV 촬영 독점권과 MBC와의 합작에도 관여했으며 흑금성은 여러 번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이런 활동 와중에도 첩보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장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만났던 김정일과의 대화도 녹음기를 감추고 들어가 녹음하여 안기부에 보고하였다. 당연히 김정일을 만나기 전에 보디 체크가 있기 때문에 어설프게 은닉할 수 없어서 요도에 삽입하는 녹음 장치를 썼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북한으로부터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 남한 쪽 정보도 과감하게 넘겨주었다. 또 기자야당 정치인들과의 접선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편 첩보 활동을 위한 자기관리도 철저하게 했다. 그리하여 '흑금성'의 공작 활동은 1997년까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5. 몰락

1998년 국가안전기획부는 큰 위기에 빠졌다. 바로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관련자들이 북한에 국지도발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총풍 사건이 터진 것이다.[22] 이 일로 파문이 일고 안기부까지 수사의 손길이 뻗치자 안기부 간부 이대성은 수사가 확대되는 것을 막고자 대한민국의 정치인과 북한 고위층과의 접촉 내용이 담긴 이른바 '이대성 파일'을 언론에 흘렸는데 이것이 한겨레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시사저널의 김당 기자가 흑금성을 만나 취재한 기사에 따르면 흑금성은 대북활동을 하면서 북한의 의중을 파악한 결과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 중 이인제를 가장 선호하고 김대중을 가장 꺼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북한이 민주평화론을 주장한 김대중이 아니라 대북 강경파인 이인제를 택한 것은 꽤 의외다. 당시 총풍 사건 등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남과 북은 적대적 공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만일 그러한 흐름에서 벗어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서 평화통일 공세, 개혁개방을 위한 행보를 보인다면 북한 정권으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가 주도한 문화적 해빙(오테펠)과 스탈린 격하 운동이 동유럽의 민주주의, 현지 좌파 세력에게 영향을 미쳐 발생한 동독, 폴란드, 헝가리의 대규모 시위, 1968년 체코의 둡체크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주창하며 개혁을 시도한 것에서부터 시작한 '프라하의 봄', 서방과의 문화적, 경제적 교류 과정에서 동구권 인민들이 느낀 박탈감이 만들어낸 공산 정권에 대한 불만 증대 현상, 80년대 동구권의 경제난, 외채 위기 및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북한 입장에서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본래 흑금성을 북한 공작원으로 파견한 건 보수정당의 눈엣가시였던 김대중을 어떻게든 정계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북한이 친DJ 성향을 보였어야 했던 것. 하지만 김대중은 영국 유학길에 마가렛 대처 빠가 되어서 돌아왔고 북한이 제일 경계하던 지도자가 김대중으로 밝혀지자 안기부는 당황했을 것이다. 야당과 북한을 연관지어야 했는데 그 사이 총풍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모든 여론조사에서 김대중이 앞서는 결과가 나온 것. 그래서 그는 '적(북한)이 낙선시키려 하는 국가 지도자라면 역으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지도자가 아니겠느냐'면서 김대중 후보 측과 접촉을 시도하여 새정치국민회의정동영천용택 의원을 만났다. 그 접촉에서 흑금성은 여러 제보를 통해 북풍을 막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였다.[23]

그러나 이런 접촉이 안기부에 노출되면서 흑금성은 의심을 피하기 위해 두 의원을 만난 이유를 '해외 공작원 정보 보고' 문건에 적당히 보고했다. 헌데 이것이 공개되는 바람에 그의 신분이 드러나 흑금성은 이중간첩 누명을 썼다. 그래도 한편으론 1998년 3월에 사업 관련 방북이 예정되어 있었던 터라 방북 동안에 기사가 나오지 않은 것을 불행 중 다행이라 여기기도 했다. 만약 방북 동안 그런 기사가 나와서 대북공작원인 게 밝혀졌다면 흑금성은 바로 보위부에 끌려가 다시는 남한 땅을 밟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대성 파일'에 흑금성의 자료가 있었기 때문에 흑금성이 안기부 소속의 공작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결국 그의 신원이 밝혀짐으로써 '흑금성' 박채서는 공작 활동을 더 이상 추진할 수 없었고 안기부는 공작원으로서의 수명이 다한 그를 1998년에 해고하였다. 해고되면서 그가 받은 돈은 해직 위로금 3억 원이 전부였다. 이후 그는 대북활동에서 일종의 비선으로 활동하다가 2010년 이중간첩 행각이 발각되면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이 수사에서 제27보병사단 사단장, 제1야전군사령부 참모장을 지낸 김인동 소장이 흑금성에게 작계 5027을 넘긴 것이 드러났다. 이렇게 작계를 넘긴 대가로 그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군복을 벗어야 했다.[24][25] 그는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2016년 출소하였다. 한편 커뮤니케이션 아자는 정부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걸어 약 8억 4,000만원을 받아냈다.

흑금성 박채서는 2018년 8월 개봉한 영화 공작으로 크게 유명해졌고 대한민국의 시사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했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 616회 방송분에도 출연했다.

6. 참고 자료

7. 관련 문서


[1] 25세 서(緖) 항렬.[2] 반남 박씨 집성촌이다.[3] #[4] 이순진 前 합동참모의장과 동기다. 그것이 알고싶다 '흑금성, 두개의 공작' 편에서 그가 원래는 일반적인 야전군의 장성이 되는 것이 꿈이어서 남들이 하지 않던 일본어 듣기 전공도 하고 장교 영어반에 들어가고 소위 시절부터 육군참모총장 표창 및 국무총리 표창까지 받았으나 당시 군의 진급비리로 인해 육사가 아닌 3사 출신이라는 한계를 실감하고 이쪽 길로 돌아섰다고 언급했다.[5] #[6] #[7] 석사 학위 논문 : 日本(일본)의 危機管理(위기관리) 制度(제도)에 관한 硏究(연구)(1990).[8] 이 팀은 미국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CIA와 함께 활동하였다.[9] 그는 배우 채시라를 발굴해낸 전력이 있는 인물이었다.[10] 당시 박채서와 박기영은 똑같이 딸만 둘을 가지고 있었고 그 중 막내딸은 동갑이었다. 그래서 박채서는 자신의 막내딸을 박기영의 막내딸이 다니는 유치원에 보냈고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는 길에 양쪽의 부인들이 서로 만나면서 가까워졌다. 이때부터 박채서와 박기영도 서로 가까워졌는데 공교롭게도 둘의 음력 생일이 똑같아서 서로 만나면서 담소를 나누면서 점차 가까워지게 되었다고 한다.[11] 그는 정석모 전 국회의원의 아들이자 자민련 출신의 정진석 국회의원(현 국민의힘 국회의원)의 친형이다. 그도 대북사업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가진 인물이었다. 여담으로 조카인 정호영의 배우자 이영애가 조카며느리다.[12] 회사 이름이 '아자(AZA)'인 이유는 '힘내자'라는 의미의 '아자'라는 뜻과 'A에서 Z까지 갔다가 다시 A로 돌아온다'라는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13] 정작 박채서는 그 암호명을 몰랐다고 한다. 국가정보원(당시 국가안전기획부)에서 박채서를 지칭하기 위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14] 물론 북한도 그에게 접근하기에 앞서 고정간첩들을 통한 사전조사를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신용 불량자가 되어 정보사를 나간 것으로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에게 속은 것이었다.[15] 김정일의 호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진 이 기관은 대남 경제협력 사업을 담당하고 있었다.[16] 그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자로서 학생들에게 자본주의 경제학을 가르쳤다고 하며 이후 흑금성과 접촉하면서 여러 사업에 대해 논의하였다. 흑금성의 정체가 밝혀진 후에는 소식이 없다가 2007년 민족경제협력연합회 참사로 활동하면서 '리호남'이라는 이름으로 안희정과 접촉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북한의 공작원으로 계속 활동하고 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밝혀진 바는 없다. #[17] 의자에 앉아 있는 인물들은 광고기획사 '아자'의 대표 박기영(왼쪽)과 금강산국제관광총회사 총사장 방종삼(오른쪽)이다. 그리고 뒤에서 둘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바로 흑금성이다.[18] 위 사진은 흑금성이 공작 활동을 하던 시기 릉라도5월1일경기장에서 북한 안내원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19] 여기서 언급된 그 광고는 북한의 금강산이나 백두산을 배경으로 남한 기업의 TV광고를 찍는 내용이었다. 물론 흑금성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광고는 무산됐지만 훗날 2005년 광고제품으로는 삼성 애니콜이, 출연배우로는 한국 가수 이효리와 북한 배우 조명애가 각각 나와 광고가 촬영되어 상영되었다. 실제 광고[20] 물론 북한도 그를 무턱대고 믿은 것은 아닌 듯하다. 박채서는 자신이 북한 고려호텔 식당에서 김영룡 국가안전보위부 제1부부장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김영룡이 자신의 어머니 사진을 보여주고 자기 가족의 근황을 물으면서 '무언의 협박'을 했다고 증언했다.[21] 이때 흑금성은 김정일이 평양외국어대학 출신 엘리트 노영옥(평양예술대학 학장의 딸)과 자신이 결혼해서 "2세 '박통일'을 만들어달라"며 제안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자신은 아내를 생각해서 그 제안을 거절했다고.[22] 다시 말해 반공을 외치며 종북몰이를 하던 자들이 정권 유지를 위해 남방한계선(DMZ)을 향해 총을 쏴 달라고 한 것이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군사적으로는 크게 보수적이었다는 평가가 이래서 나온 것이다. 실제로 국민의 정부 출범 이래 군인 인권이 대폭 개선되었고 당포함 격침 사건 등을 기리기 위해 속초의 해경 충혼탑, YTL30호 침몰 사건을 기리는 통영의 충혼탑도 이때 세워졌다.[23] 2018년 8월 시사in 과의 인터뷰에서는 당시 대선 직전 김대중 후보를 직접 만난 적도 있다고 주장했다.[24] 기무사 모 중령이 비육사 출신이라 진급이 막히자 흑화해서 별들 뒤만 캐고 다니다 월척을 낚았다는 황당한 뒷이야기로 유명하다.[25] 단 박채서 본인은 2018년 8월 17일부터 9월 14일까지 출연한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자신이 작계 5027을 넘기는 등의 이중간첩 활동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였으며 방송에서는 실명을 거론하지 않은 김인동 소장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재심을 준비 중이라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