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문각 공무원 9급/지방직 7급 공통과목 강사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D1D1D,#e2e2e2 | 국어 | 영어 | 한국사 |
박혜선 | 진가영 | 노범석 | |
강세진 | 김세현 | 박기훈 | |
천지현 | 김태은 | 선우빈 | |
전선혜 | 이아람 | 정우교 | |
신동수 | 김신주 | 임준수 | |
최석만 | 유희태 | 남택범 | |
정일현 | |||
오동훈 |
| ||||||
송림학원의 강사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1D1D1D,#e2e2e2 | 국어 | 영어 | 수학 | 사회탐구 | 과학탐구 | 논술 |
체리 | 정지안 | 배경빈 | 이다지 | 장풍 | 민준호 | |
손창빈 | 박정인 | 이선우 | 장유리 | 곽승훈 | ||
김현옥 | 조은성 | 주성우 | 어준규 | 윤성로 | ||
장봉근 | 최지현 | 임지열 | 한지우 | 백봉용 | ||
서한빈 | 마로리 | 최낙현 | 최성주 | 최현호 | ||
최혜란 | 박제의 | 박기훈 | 임동호 | |||
백성희 | 박태균 | 최진수 | ||||
한헌주 | 안민형 | |||||
안지훈 | 최지혁 | |||||
홍진태 | 박진영 | |||||
송태준 | 박현옥 | |||||
이서은 | 변현수 | |||||
강우진 |
}}}}}}}}}}}} ||
박기훈 | |
| |
<colbgcolor=#E51937><colcolor=#fff> 약력 |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대학원 |
출생 | 대한민국 통영시 |
생년 | 1976년 5월 6일 ([age(1976-05-06)]세) |
학력 | 통영중학교, 통영고등학교, 한국교원대(석사수료) |
직업 | 강사 |
약력 | 전) 비타에듀, 이강학원, 종로학원, 메가스터디, EBS 강사 전) 메가공무원, 메가소방 한국사 강사 전) 합격의 법학원 한국사검정능력시험 및 경찰간부 강사 현) 박문각, 나두공, 송림학원 한국사 강사 |
소속 | 박문각 공무원 |
종교 | 개신교 |
신체 | 174cm, 100kg |
1. 개요
現 공무원 한국사 강사, 前 공무원(7급 주사보).대학원을 마치고 2007년부터 입시 강의를 시작했다. 10여 년간 비타에듀, 종로학원, 메가스터디, 이강학원 등 여러 입시학원에서 온/오프라인 강의를 하다가 2017년부터 본격적인 공무원 강의를 시작했다.
2017년 합격의 법학원에서 경찰간부 한국사 강의를 시작으로 2019년에는 메가공무원과 메가 소방에서 강의를 했다.
메가 공무원에서 가장 많은 실강생을 모으면서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다가[1] 2021년 6월에 본격적으로 박문각 공무원으로 이적했다.
2. 유년시절
원래 조부께서 지역 최고의 땅부자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대 보기 드문 대졸자로 부와 학식 모두를 갖춘 초 엘리트였다고. 조부께서 태평양전쟁에 장교로 징병된 뒤 해방 이후 전재산을 털어서 고아원을 운영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전재산을 사회에 바치시고 아버지는 다니시던 동명목재상사가 군사정권에 의해 문을 닫으면서 결코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할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박기훈은 초등학생 시절, 집안 환경이 안좋아서 동생을 지키고자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6개월 간 살았다고 한다. 이 때가 박기훈이라는 인간이 형성되는데 가장 중요한 6개월이었다고. 당시 조부께서는 손자라고 특별대우 하지 않고 다른 어린이들이랑 같이 지내도록 했다. 처음엔 "나는 하나뿐인 손자인데 왜 여기 형들 밑에서 심부름이나 하면서 눌러 지내야하나" 싶었지만 금세 할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또 할아버지께서는 그 남존여비의 시대에 새벽에 일어나서 청소를 하고 할머니를 위해 아침상을 차려놓는 등 굉장히 부드러운 남편이셨다고 한다. 이러한 할아버지 밑에서 교인으로서의 신앙, 배우자를 배려하는 삶, 양성평등의 정신,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 등을 포함해 삶의 중요한 가치들을 배웠다고 한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김세진·이재호 분신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 열사의 가족과 같은 집에 살아서 경찰에게 감시당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선생한테 빨갱이 자식이라고 두들겨 맞고, 친구들한테는 왕따 당하고, 집에서능 경찰이 감시하고 있었다고. 그런데 바로 다음 해에 민주화 열기가 일어나면서 친구들에게 학교에서 민주화 운동의 선봉으로 칭송 받았다고 한다.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1년만에 역적에서 영웅이 되는 걸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이러한 성장과정을 겪으면서 상당히 일찍부터 철이 들었고, 평소에도 한국사의 비극에 관해 진지한 고민을 했다.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만큼 행동도 정숙해져서 학교에서도 양반이 된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던 중 고등학생이 돼서 박지원에 대해 공부하게 되면서 눈이 번쩍 뜨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학자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선진적인 주장에 매료되었으며, 패관소품체를 연구하면서 정신이 중요한 만큼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그래서 그 때부터 욕설이나 비속어를 사용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등 노력을 했다.
그렇게 역사와 윤리학을 사랑하던 소년은 집에선 둘도 없는 효자였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대들었다. 원래 학과를 역사학과로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께서 몰래 교무실에 찾아가 경영학과로 원서를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교무실로 찾아가 아버지가 쓰시던 원서를 찢어버리셨다. 그래서 분노한 아버지에게 그 자리에서 두들겨 맞았는데 얻어 맞으면서 두 눈을 부릅뜨고 "사학과나 철학과에 가지 못한다면 자결하겠습니다" 라고 소리친 끝에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할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박기훈은 초등학생 시절, 집안 환경이 안좋아서 동생을 지키고자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6개월 간 살았다고 한다. 이 때가 박기훈이라는 인간이 형성되는데 가장 중요한 6개월이었다고. 당시 조부께서는 손자라고 특별대우 하지 않고 다른 어린이들이랑 같이 지내도록 했다. 처음엔 "나는 하나뿐인 손자인데 왜 여기 형들 밑에서 심부름이나 하면서 눌러 지내야하나" 싶었지만 금세 할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또 할아버지께서는 그 남존여비의 시대에 새벽에 일어나서 청소를 하고 할머니를 위해 아침상을 차려놓는 등 굉장히 부드러운 남편이셨다고 한다. 이러한 할아버지 밑에서 교인으로서의 신앙, 배우자를 배려하는 삶, 양성평등의 정신,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 등을 포함해 삶의 중요한 가치들을 배웠다고 한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김세진·이재호 분신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 열사의 가족과 같은 집에 살아서 경찰에게 감시당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선생한테 빨갱이 자식이라고 두들겨 맞고, 친구들한테는 왕따 당하고, 집에서능 경찰이 감시하고 있었다고. 그런데 바로 다음 해에 민주화 열기가 일어나면서 친구들에게 학교에서 민주화 운동의 선봉으로 칭송 받았다고 한다.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1년만에 역적에서 영웅이 되는 걸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이러한 성장과정을 겪으면서 상당히 일찍부터 철이 들었고, 평소에도 한국사의 비극에 관해 진지한 고민을 했다.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만큼 행동도 정숙해져서 학교에서도 양반이 된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던 중 고등학생이 돼서 박지원에 대해 공부하게 되면서 눈이 번쩍 뜨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학자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선진적인 주장에 매료되었으며, 패관소품체를 연구하면서 정신이 중요한 만큼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그래서 그 때부터 욕설이나 비속어를 사용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등 노력을 했다.
그렇게 역사와 윤리학을 사랑하던 소년은 집에선 둘도 없는 효자였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대들었다. 원래 학과를 역사학과로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께서 몰래 교무실에 찾아가 경영학과로 원서를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교무실로 찾아가 아버지가 쓰시던 원서를 찢어버리셨다. 그래서 분노한 아버지에게 그 자리에서 두들겨 맞았는데 얻어 맞으면서 두 눈을 부릅뜨고 "사학과나 철학과에 가지 못한다면 자결하겠습니다" 라고 소리친 끝에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3. 강의 및 교재
집약된 이론 강의를 추구한다. 대부분의 한국사 강사들이 6,000분 ~ 9,000분 정도의 러닝타임으로 이론 강의를 진행하는 것에 비해서 겨우 3,600분 만에 이론 강의를 끝낸다. 강의 스타일에 맞게 이론서도 300쪽이 조금 넘는 수준의 양이다.모의고사 강의는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하는데, 매일 풀어보는 월간 대한매일모의고사, 주제별 모의고사, 경제·사회·문화사 모의고사, 단원별 기출변형 하프, 주제별 10지 선다, 전 범위 동형 모의고사, 미러링 모의고사 등 다양한 종류의 모의고사를 1년 내내 진행한다.
컴팩트를 지항하는 강사들이 대체로 빠른 말투와 암기식 강의, 딱딱한 스타일이 많은 반면에 박기훈 강사는 빠르지 않은 말투에 철저히 스토리 텔링식 수업을 추구한다. 긴 러닝타임의 강사들에 비해 역사적 사건 자체의 흐름이나 야사 등은 거의 얘기하지는 않지만, 인과관계와 시대 구조에 대한 설명은 상당히 길다.
4. 여담
- 어린 시절부터 역사책을 읽는 것이 가장 즐거웠으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도서관에서 틀어박혀 사서를 읽던 대학시절이라고 한다.
- 여건이 되지 못해 학문연구를 충분히 하지 못한 것이 평생 한으로 남았다고 한다.
- 젊은 시절 빚을 갚느라 건강이 많이 망가졌다고 한다. 매일 학원 열군데를 뺑뺑이 돌았으며, 새벽에 동료나 선배 강사가 술자리에 불러서 광대놀음을 해야했다고. 그러면서 고혈압과 탈모에 걸리고 체중이 30키로가 늘어났으며 어금니 6개가 빠졌다.
- 상당히 친화력이 뛰어나 대학시절 생일잔치에 400명이 오고, 결혼식에는 1200명이 왔다고 한다.
- 상당히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어릴 때 고아원에서 몇 년 살기도 했으며, 20살이 되도록 이사를 23번을 다녔고, 중학교에선 축구부에게 집단 린치를 당하기도 하고, 고등학교 때는 3대 15로 싸우다가 죽기 직전까지 맞아봤다고 한다. 그렇게 고생끝에 대학에 들어가고 특채로 7급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더니, 몇 년간 두문분출하셨던 아버지 앞으로 8억의 빚이 생겼다고 한다. 차마 아버지를 감옥에 보낼 순 없어서 그 빚을 전부 자기 앞으로 돌리고 빚을 갚고자 학원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탄도 원망도 많이했는데, 신앙의 힘으로 간신히 일어설 수 있었다고.
- 수업 중 할아버지 자랑을 종종 하신다. 조부께서 당시로서 드문 대졸자로 태평양 전쟁 때 징병돼서 장교로 복무했는데[2] 해방 이후 당시 지역 최고의 부호였으나 전재산을 털어서 고아원을 운영하셨다고 한다. 그 남존여비의 시대에 새벽에 일어나 할머니를 위해 아침상을 차리는 등 여러모로 숭고한 분이셨다고.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 밑에서 아내를 모시듯 배려하는 생활, 자식을 사랑하는 법, 신앙, 신념이 우선시되는 삶 등 인간으로서의 모든 부분을 배웠다고 한다.
- 상당한 애처가이다. 연애를 시작한 지 20년이 됐고 초등학생 딸이 있는 지금도, 수업시간마다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으면서 "우리 아내가 제일 예쁘다."라고 자랑을 한다. 또 외벌이 할 때도 집안일을 도맡아했으며, 단 한 번도 돈 벌어오고 집안일 하는 걸로 아내한테 유세를 떨어본 적 없다고 했다. 오히려 집에서 구박을 받고 가끔 맞더라도 웃으면서 맞춰준다고.
- 상당히 가정적인 아버지이다. 오죽하면 "내 딸을 인격자로 키워내는게 내 인생의 목표" 라고 한다.
- 고등학교 3학년 때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대들었다고 한다. 원래 학과를 역사학과로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께서 몰래 교무실에 찾아가 경영학과로 원서를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교무실로 찾아가 아버지가 쓰시던 원서를 찢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분노한 아버지에게 그 자리에서 두들겨 맞았는데 얻어 맞으면서 두 눈을 부릅뜨고 "사학과나 철학과에 가지 못한다면 자결하겠습니다" 라고 소리친 끝에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고.
- 대학 학부 시절에는 학생회장이었다고 한다. 학부는 밝혀진 바 없으며 대학원을 한국교원대학교로 진학한 듯하다. 어쨌거나 그러한 리더십으로 현재 동네 축구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 처음 조기축구회 회장직을 맡았을 때, 클럽에 정기적으로 활동하는 멤버가 두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렇게 무주공산에서 시작해서 사비로 수천만원을 써가며 연회를 주기적으로 개최하고, 회원들을 구워 삶은 끝에 초거대 조기축구 클럽으로 발전시켰다고 한다.
- 폭력이 난무하던 시절에 군생활을 했음에도 단 한번도 후임에게 손찌검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다만 교화가 필요한 후임이 있으면 건달 출신 동기한테 대신 때리도록 시켰다고. 그러다 한 번은 동기가 너무 열심히 후임을 패다가 그 후임의 갈비뼈를 부러트렸다고 한다.
- 종종 전직 대통령들이나 동료 강사들의 성대모사를 한다.
- FC 바이에른 뮌헨의 열렬한 팬이다. 근 10년간 뮌헨이 치른 모든 경기의 스코어를 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한다.#
- 쉐보레 말리부의 오너였는데 2달밖에 안 타고 동생에게 아예 넘겼다가 아내한테 호되게 맞았다고 한다.
- 유튜버 황현필과 막역한 사이라고 한다.
- 대학생 시절 처음 데모하러 나갔다가 눈앞에서 최루탄이 터지는 걸 보고 너무 무서워서 기숙사로 도망쳤다고 한다. 나중에 끝까지 현장을 지킨 대학 동기에게 졸렬한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고 얻어 맞았는데, 왜소한 친구라 주먹이 맵진 않았지만 그 때 맞은 기억은 평생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
- 역사학도라는 것에 대해 상당히 자부심을 가진다. 대한민국 한국사 강사 중 유독 사학도로서의 자긍심이 강하며, 그래서 수업 중 다른 강사들이라면 할 수 없는, 교과서에는 없는 학계의 이야기를 종종 한다.
- 이덕일을 진심으로 혐오한다.
- 재수학원에서 윤리와 사상을 가르친다. 순전히 자기 만족을 위해 가르치는 수업이며, 철학 쪽으로도 자신감이 상당해서 대한민국 윤사 강사중 실력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부한다.
- 페미니스트이다. 대학 시절부터 여러 페미니즘 운동을 주도했다고 한다.
- 한 번도 여성에게 쌍욕을 쓴 적이 없다고 한다. 오죽하면 '년놈들'이라는 표현조차 싫어해서 무조건 '놈년들' 이라는 표현을 쓰신다. 다만 명성왕후는 너무 싫은 나머지 강의 도중 분을 참지 못하고 'xx년' 이라고 욕을 했다가 여학생들로부터 집단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 굉장한 주호이다. 대학생 때는 술이 무한으로 리필되는 삼계탕 집에 가서 인삼주를 28병을 마셨다고.
- 상당히 호인이시다. 항상 꾸준히 기부활동을 하고 계시며, 살면서 어지간한 지방 아파트 가격보다 더 많은 돈을 지인들에게 배푸는데 쓰셨다고. 그래서 자신에게 친밀함을 넘어서 경외심을 가지는 지인들도 많다고 한다.
- 어린 시절 김세진·이재호 분신사건이 일어났을 때 열사의 가족과 같은 집에 살아서 경찰에게 감시당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선생한테 빨갱이 자식이라고 두들겨 맞고, 친구들한테는 왕따 당하고, 집에 오면 경찰이 집 앞을 지키고 있었다고. 그런데 바로 다음 해에 민주화 열기가 일어나면서 친구들에게 학교에서 민주화 운동의 선봉으로 칭송 받았다고 한다.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1년만에 역적에서 영웅이 되는 걸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고.
- 16세에 친구들과 물놀이 갔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후론 절대 키보다 깊은 물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 진순이이다.
- 독실한 개신교인이시다. 이념과 신념은 버릴 수 있어도 신앙은 바꿀 수 없다고.
- 타고난 음감과 미성으로 인해 같이 노래방에 간 사람중 본인에게 매료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지만 뮤지컬은 절대로 보지 않는다고 한다. 대사를 노래로 하는것에 대해 거부감이 강하다고. 다만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는 여러번 관람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