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 세계 챔피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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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James 'Bobby' Fischer 로버트 제임스 '바비' 피셔 | |
<colbgcolor=#000><colcolor=#fff> 출생 | 1943년 3월 9일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일리노이 시카고 | |
사망 | 2008년 1월 17일 (향년 64세) |
[[아이슬란드| ]][[틀:국기| ]][[틀:국기| ]] 레이캬비크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1943-2005) [[아이슬란드| ]][[틀:국기| ]][[틀:국기| ]] (2005-2008) |
타이틀 | GM (1958) |
세계 챔피언 | 1972-1975 |
Elo 레이팅 | 2785 (최대 레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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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체스 선수이자 제11대 체스 세계 챔피언이다.오늘날에도 체스인들에게 기억되는 전설의 체스 선수이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체스 선수 중 하나로 꼽힌다.
2. 생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컸다. 어머니인 레지나 피셔(Regina Fischer)는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소련의 반유대주의 핍박을 피해 프랑스로, 프랑스에서는 독일의 침공을 피해 미국으로 다시 이민을 온 이민자였고, 피셔가 태어났을 무렵에는 집집을 전전하며 품팔이를 하는 한편 공산주의 정치 활동을 하면서 근근히 연명하고 있었다.6세에 처음 체스를 배웠다. 1957년 14세의 나이로 당시 역사상 최연소 미국 챔피언이 되었으며 인터내셔널 마스터 타이틀을 취득했고, 그 다음 해인 1958년에 15세의 나이로 당시 역사상 최연소 그랜드 마스터 타이틀을 취득했다. 이후 1962년도에 미국 국내 대회에는 출전하는 대신 국제 무대에서 은퇴했다가 1966년도에 다시 복귀했다. 그리고 1968년도에 국제무대에서 은퇴했다가 1970년도 소련 대 세계전에서 다시 복귀했다.
1958년 세계 체스 챔피언십 지역 간 예선을 공동 5위로 통과, 1959년도 도전자 결정전에 첫 진출하였다. 이때 피셔의 나이는 16세로, 2007년 망누스 칼센 이전까지 역대 최연소 도전자 결정전 진출자였고, 규정에 따라 바로 그랜드 마스터 타이틀을 받았다.
1962년 도전자 결정전에서 승부조작 논란을 제기하였다. 당시에는 도전자 결정전이 8명 간의 쿼드러플 라운드 로빈으로 진행되었는데, 상위 3명의 소련 체스 플레이어들이 서로간의 12경기에서 평균적으로 단 19수만 두고 모두 무승부로 끝내버린 것. 이에 피셔는 3명이 짜고 모든 경기를 무승부로 한 게 아니냐고 주장하였다. 결국 FIDE에서는 이러한 논란에 대응하기 위해 이후 도전자 결정전부터는 기존의 풀리그제에서 싱글 엘리미네이션 토너먼트제로 방식이 변경되었다.
1971년도 도전자 결정전에서는 소련의 마르크 타이마노프에 6 대 0으로 완승[1]하고 덴마크의 벤트 라르센에게도 6 대 0으로 완승을 거둔다. 전직 체스 세계 챔피언인 티그란 페트로시안에 5승 3무 1패로 승리하여 당시 제 10대 세계 체스챔피언이었던 보리스 스파스키의 도전자로 나설 자격을 얻게 된다. 승리 당시 현장의 영상 그리고 1972년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있었던 세계 체스 챔피언십에서 스파스키에게 7승 11무 3패로 승리하고 세계챔피언이 된다.
1975년도에는 방어전의 운영을 둘러싸고 세계 체스 연맹과 대립했다. 피셔는 기존 방식인 24전제가 무승부를 너무 유도한다고 주장하며, 초대 챔피언십 방식이었던 무승부 관계없이 먼저 10승을 거둔 플레이어가 이기는 방식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는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2] 결국 그는 타이틀을 반납하고 그 타이틀은 1974년도 도전자 결정전 우승자인 카르포프에게 돌아간다.[3]
그 후 오랜 시간동안 체스계에서 모습을 감췄지만 1992년 돌연 복귀해 상술했던 규정대로 유고슬라비아에서 스파스키와 다시 맞붙어 승리한다. 이 승리로 300만달러 이상의 상금을 받지만 당시 미국이 취한 유고슬라비아 경제 제재 조치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다시 소식 불명이 된다. 이 기소에 대해 피셔 자신은 반유대주의 발언과 반미 발언에 대한 정치적 박해라고 주장했다.
그 후 일본에 주재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2004년 7월 14일 나리타 공항에서 필리핀으로 출국하려다 출입국 관리법 위반 혐의로 도쿄 입국 관리국 나리타 공항 지국에 구속되었다. 같은 해 8월 친교가 있던 일본 체스 협회 사무국장 와타이 미요코와 결혼하게 된다.
미국 정부는 피셔의 신변을 요구했지만 피셔 측은 거부했다. 2005년 3월 21일 아이슬란드 정부가 피셔에게 시민권을 주는 조치를 취해 일본 정부는 피셔의 아이슬란드 출국을 허락했다. 이후 아이슬란드에 체류했지만 2008년 1월 17일 64세의 나이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지는 아이슬란드 쉬뒤를란드의 한 교회 앞에 위치해 있다.
3. 기풍
역대 최강, 천재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공격적이고 창의적인 수를 두었다.바비 피셔의 기풍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데, 심지어 스타일이 없고 매 순간 엔진처럼 최선의 수를 둔다는, 체스의 정석 그 자체라는 평가도 있다. 이러한 평가가 사실인지에 대한 여부를 제쳐두고라도, 피셔 스스로 체스에는 정답이 있고 그대로 두면 항상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피셔는 오프닝, 미들게임, 엔드게임, 전술, 전략 모든 면에서 특별한 약점이 거의 없었던 올라운드 천재 플레이어였고, 치열한 승부욕으로 항상 이기기 위한 공격적인 체스를 뒀다. 다만 공격적이지만 미하일 탈처럼 기물 희생을 통해 포지션적 이득을 보는 스타일과는 정반대로, 피셔는 포지션적 손해를 조금 보더라도 기물 이득을 챙기는 것을 매우 선호했다. 시실리안 나이도프의 포이즌드 폰 베리에이션에서 폰을 따내는 것을 선호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우선 피셔는 체스 대회에서 오프닝 준비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엄청난 연구를 한 플레이어였다. 다만 체스에는 정답이 있다는 그의 철학답게 오프닝에 대한 호불호가 심했는데, 유명한 예시로 백일 때는 첫 수로 거의 킹즈 폰 오프닝만을 두었다. "시험해본 결과 e4가 가장 좋다.(e4 is best by test)"라는 어록이 유명하다. d4를 둔 것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며, 그나마도 명백히 낮은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둔 것이다.[4] 그 외에도 카로칸 디펜스를 한 판도 두지 않았다거나, 알레킨 디펜스를 스파스키와의 챔피언전에서 두 번 사용한 것을 제외하면 둔 적이 없는 등 오프닝에 대한 호불호가 강했다.
피셔의 사실상 유일한 약점은 미들게임이었다. 전술적인 오픈 게임을 선호했던 피셔가 미들게임이 약하다니 무슨 소린가 싶지만, 스파스키와의 챔피언십 이전에 소련의 그랜드마스터들의 피셔 기풍 분석 중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이 “말들의 포지션이 일반적이지 않고 특이하며 아주 복잡할 때 피셔가 실수를 할 때가 꽤 있다“는 것이었다. 대표적 예가 미하일 탈인데, 탈의 전성기가 지난 후 대결했음해도(당시 피셔의 나이는 어렸다) 2승 4패 5무로 전적이 밀린다[5][6]. 기상천외한 희생으로 희한하고 이상한 포지션을 만들어서 상대를 혼란시키는 탈의 스타일에 정석적인 싸움으로 승기를 굳히는 피셔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포지션이 자주 나오는 것으로 유명한 프렌치 위나워는 피셔의 상대 전적이 가장 나쁜 오프닝 중 하나였다.
피셔의 기풍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정석적이며 전술적인 플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무형의 포지션적인 이득보다는 유형의 기물 이득을 중시했으며, 스스로도 자신을 “폰 잡는 자 (pawn-grabber)로 지칭한 바 있다. 날카로운 포지션에서 전술로 기물 이득을 보고 그걸 굳혀서 이기는 방식을 선호한 것이다.
피셔의 엔드게임은 역대급이었다. IM이자 체스 교육자인 제레미 실먼은 피셔가 비숍 엔딩에서 특출나게 매서운 계산을 보여주었다고 평하며 엔드게임 최고의 마스터들 중 한 명으로 꼽았다. 피셔 스스로도 엔드게임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는지 엔드게임의 역대 최고수로 꼽히는 호세 라울 카파블랑카가 엔드게임을 잘 하다는 건 엄청난 오해라면서 카파블랑카는 룩폰엔딩도 모른다고 깠다.
무승부를 싫어해서 무승부 제의는 무승부가 확실한 경우에만 받아들였다.[7] 가끔 이는 오히려 독이 되기도 했는데, 스파스키와의 경기에서 스파스키가 킹즈 갬빗을 꺼낸 뒤 무승부격인 포지션에 들어갔다. 하지만 무승부를 싫어한 피셔는 백을 공격하려다 포지션적 블런더를 두고 말았고 지기도 했다.
카스파로프는 피셔의 스타일을 두고 마지막 한 개의 폰까지 나와서 싸우는, 처절한 전투 체스라 평했으며 칼센은 피셔가 항상 무승부가 아닌 승리를 노린 체스를 둬서 보기에 재밌다고 평했다.
4. 성격
무례하고 오만하며, 거의 정신병의 영역에 다다른 더러운 성격으로 악명높았다. 체스계 탕아라고 불릴 정도로 협회와 마찰이 잦았으며, 결국 스스로 챔피언 타이틀을 반납하는 결말을 맞이했다.바비 피셔 본인은 폴란드계 미국인이자 유대계 미국인이었으나 자기 정체성을 일생 내내 부정했다. 피셔는 반유대주의자로서 유대교와 유대인들에 대한 망발을 망설임 없이 했으며 본인이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유대인 세계정부의 음모 때문이라고 평생 믿었다. 피셔의 친구인 GM 요하네스 하인 도네르(Johannes Hein Donner)에 따르면 피셔는 홀로코스트를 부정했고 아돌프 히틀러를 존경했으며 같은 미국 유대인 GM 새뮤얼 레셰비스키(Samuel Reschevisky)에 따르면 피셔는 나의 투쟁 등 히틀러가 쓴 저서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고 한다.
논란이 되는 발언도 망설임 없이 했는데, "여자 체스 챔피언은 내가 나이트 하나 접어도 이긴다."[8], "여자는 지적인 활동을 안 하는 게 좋으며 요리도 못하기 때문에 밥도 하지 말고 청소나 해야 한다" 등의 발언을 인터뷰에서 하기도 했다. 다만 미하일 탈의 증언에 따르면 여성 체스 기사들의 게임도 팔로우했던 모양으로, 타국의 여성 기사들의 기풍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또한 "나는 '체스 천재'가 아니다. 나는 체스를 두는 '천재'이지 '체스 천재'가 아니다. 가리 카스파로프 같은 쓰레기는 체스 천재라 불릴 수 있는데, 걔는 병신 하수일 뿐이다. 체스도 잘 못하지만 그것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못 한다."라는 발언이 유명하다.
9.11 테러 몇 시간 후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이 공격이 마음에 들고 유대인 두목들을 몇 백명씩 잡아다가 죽여야 한다는 과격한 망언을 해서 미국체스협회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살해해 왔다는 맥락에서 나온 말이긴 하지만, 9.11 테러에 대한 미국인들의 트라우마는 장난이 아닌지라…
이런 말들이 유명인들의 어록을 담은 사이트 등에서 바비 피셔의 말처럼 떠돌아다니지만 출처는 알 수 없다. 다만 아이슬란드의 말년에서 그와 함께 지낸 Sverrison이 쓴 책에서 카스파로프가 바비피셔의 1992년 스파스키와의 리매치에 대한 말로 본인들(카스파로프와 카르포프등 90년대 챔피언 경쟁 하던 선수들) 레벨과는 떨어져있다고 한 말에 대해 분노했다고 써있다. 인터넷의 말들의 출처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카스파로프에 대해 부정적인 말만 한 건 확실해보인다.
이런 망언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어릴 때부터 피셔의 반사회적인 행동들에 대한 이야기는 꽤나 많다. 뉴욕의 공립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을 발로 찬 일로 학교에서 쫒겨난 이후로 학교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고, 1957년 자동차로 여행을 떠나던 중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체스 선수의 팔을 반복적으로 물어뜯는가 하면, 피셔가 잠깐 몸담았던 세계예수의교회에서 만난 신도를 자신을 배신했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폭행하여 입건된 일도 있었다.
실제로 정신 관련 질환을 진단받은 적은 없지만, 일부 의사나 심리학자들은 반유대주의 등 그의 감정이 과잉된 행동이 조현병이나 아스퍼거 증후군 때문이라 의심한다. 그는 1975년에 상대 선수가 자신의 음식에 독을 탔다고 주장하며 챔피언 타이틀 방어전을 거부했고, 러시아가 비행기에 폭탄을 장착해서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기질은 피셔의 청년기와 유소년 시절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대전 상대였던 선수들은 피셔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하곤 했고, 체스에 광적으로 몰입하는 그의 정신건강을 걱정한 어머니가 의사와 상담을 받도록 한 적도 있다. 실제로 피셔는 경기 외적으로 상당히 예민했으며, 뭔가 자신의 마음에 안 들면 경기를 포기하기도 했다. 스파스키의 챔피언십 경기마저 2경기를 기권했으며, 사실 아예 매치를 기권하고 집에 가려던 걸 겨우 말리고 카메라와 구경꾼들 없는 곳에서 경기하자는 피셔의 요구사항을 스파스키가 받아들여서 겨우겨우 나머지 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
그 원인을 질병보다는 피셔의 어린 시절에서 비롯된 트라우마에서 찾기도 한다. 어머니는 편집증적인 성향을 지닌 공산주의자였고, 냉전 초입이었던 1950년대 내내 FBI는 그녀를 감시했다.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기밀 해제되어 공개된 FBI 리포트에 따르면 항상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어머니는 한때 바비의 누나 조앤을 몇 번씩이나 다른 집에 입양시키려 했었으며, 생부 또한 꽤나 편집증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누나와 자신의 생부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9]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서부터 시작된 오래간만에 미국에 나타난 체스 신동에 대한 미디어의 관심과 스폰서들의 압박 또한 결코 좋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출처
5. 여담
폴 모피 이후로 유럽(특히 소련과 러시아)이 독점하던 체스 챔피언계에 나타난 유일한 순수 미국인 세계 챔피언[10]이다보니 미국에서 인기가 많다.미국 체스 챔피언십에 8회 출전하여 모두 우승을 거두었다. 그 중 6번째로 출전한 대회인 1963-64년 대회에서는 무려 전승 우승(11전 11승. 백(선수) 5승, 흑(후수) 6승)을 기록했는데, 이는 미국 체스 챔피언십 대회 역사상 유일무이한 전승 우승이다. 1971년도에 달성한 공식 대회 20연승 기록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11]
역사 상 최고의 체스 선수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다. 역대 Elo 레이팅 랭킹에선 30위 권이지만 이는 레이팅 인플레이션의 영향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을 보정한 경우 2890점대에 해당한다는 연구도 있으며, 이는 50년이 지난 현대 선수들의 보정 레이팅까지 포함해도 최고 레이팅이다. 이렇다 보니 동시대 다른 플레이어들과 격차 면에서 압도적인 기록을 보이는데, 전 챔피언이자 2위 스파스키보다 레이팅이 120점 더 높았다.[12] 이는 예상 승률 66%에 해당하는 차이다.[13]
체스960이라는 변형 체스 룰을 창시했으며, 이를 기려 체스960은 피셔 랜덤 체스라 불리기도 한다. 그가 이러한 방식을 만든 이유는 오프닝에 대한 암기가 체스를 망친다고 생각해서였으며, 이것이 그가 체스를 떠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타임 컨트롤 방법 중 하나인 증초(Increment) 방식을 고안했으며 이를 피셔방식이라고도 한다. 초읽기의 일종인데, 오늘날 체스에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타임컨트롤이 30+15인 경기가 있다면 이는 기본시간 30분이 주어지며 매 수를 둘 때마다 남은 시간이 15초씩 증가한다는 의미이다.
2014년 9월 11일에 개봉 된 바비 피셔와 스파스키의 챔피언전을 스토리로 제작 된 영화 세기의 매치가 있다. 토비 맥과이어가 바비 피셔 역을 맡았다.
바비 피셔를 찾아서(Searching for Bobby Fischer; 한국 개봉명은 위대한 승부)라는 영화도 있는데 제2의 바비 피셔로 기대 받던 체스 신동 조쉬 웨이츠킨에 대한 이야기이다. 피셔는 출연하지 않는다.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과 동명 원작 소설의 주인공인 베스 하먼이 바비 피셔를 모티브로 했다.[14]
IQ가 200 가까이 되는 고지능자이다. 이는 피셔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등이 나온 Erasmus Hall 고등학교에 입학할때 치른 IQ 테스트에서 180을 기록하면서 거의 만점을 기록한걸로 알려져있다. 1972년 체스 챔피언 경기를 위해 아이슬란드로 갔을때 아이슬란드 체스협회장이었던 Thorarisson이 본인의 딸의 대화내용을 아이슬란드어를 모르는 당시의 바비 피셔가 다음날 음절도 안틀리고 그대로 다시 암송해서 이야기했다는 비범한 일화도 있다.
주머니에 작은 체스판을 들고 다니면서 원하면 체스를 두자고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은퇴 후에도 비공식적으로 한 게임들의 기보가 남아 있다.
후에 체스챔피언이 되는 비스와나탄 아난드과의 일화도 있다. 아난드를 만나서 주머니에서 체스판을 꺼내서 아난드의 경기를 같이 분석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대가 시대인 사람인지라 아난드는 어떤 포지션에서 컴퓨터 엔진의 분석을 이야기하고 넘어가려는데 피셔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해 논쟁이 있었다는 아난드의 인터뷰가 있다.
5개 국어를 할 수 있는 폴리글롯이지만 모국어인 영어를 포함한 어휘력은 초등학생 수준에 불과했다는 증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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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세계 체스 챔피언십 및 참가자 | ||||||
{{{#!folding FIDE 이전 타이틀 (1886~1946) {{{#!wiki style="margin:-5px -2px -11px" | <tablebgcolor=#fff> 연도 | 장소 | 디펜딩 챔피언 | 도전자 | ||
1886 | 미국 | 빌헬름 슈타이니츠 | 10 | 5 | 요하네스 주커토르트 | |
1889 | 아바나 | 빌헬름 슈타이니츠 | 10½ | 6½ | 미하일 치고린 | |
1890 | 뉴욕시 | 빌헬름 슈타이니츠 | 10½ | 8½ | 이시도어 건즈버그 | |
1892 | 아바나 | 빌헬름 슈타이니츠 | 12½ | 10½ | 미하일 치고린 | |
1894 | 미국 몬트리올 | 빌헬름 슈타이니츠 | 7 | 12 | 엠마누엘 라스커 | |
1896 | 모스크바 | 엠마누엘 라스커 | 12½ | 4½ | 빌헬름 슈타이니츠 | |
1907 | 미국 | 엠마누엘 라스커 | 10½ | 5½ | 프랭크 J. 마셜 | |
1908 | 뒤셀도르프 뮌헨 | 엠마누엘 라스커 | 10½ | 5½ | 지그베르트 타라시 | |
1910 | 베를린 | 엠마누엘 라스커 | 9½ | 1½ | 다비드 야노프스키 | |
1921 | 아바나 | 엠마누엘 라스커 | 5 | 9 | 호세 라울 카파블랑카 | |
1927 | 부에노스아이레스 | 호세 라울 카파블랑카 | 3 | 6 | 알렉산더 알레킨 | |
1929 | 독일 네덜란드 | 알렉산더 알레킨 | 15½ | 10½ | 에핌 보골류보프 | |
1934 | 독일 | 알렉산더 알레킨 | 15½ | 10½ | 에핌 보골류보프 | |
1935 | 네덜란드 | 알렉산더 알레킨 | 14½ | 15½ | 막스 오이베 | |
1937 | 네덜란드 | 막스 오이베 | 9½ | 15½ | 알렉산더 알레킨 |
{{{#!folding FIDE 타이틀 (1948~1993) | 연도 | 장소 | 디펜딩 챔피언 | 도전자 | ||
1948* | 헤이그 모스크바 | 14 | 미하일 보트비닉 | |||
1951 | 모스크바 | 미하일 보트비닉 | 12 | 12 | 다비트 브론슈타인 | |
1954 | 모스크바 | 미하일 보트비닉 | 12 | 12 | 바실리 스미슬로프 | |
1957 | 모스크바 | 미하일 보트비닉 | 9½ | 12½ | 바실리 스미슬로프 | |
1958 | 모스크바 | 바실리 스미슬로프 | 10½ | 12½ | 미하일 보트비닉 | |
1960 | 모스크바 | 미하일 보트비닉 | 8½ | 12½ | 미하일 탈 | |
1961 | 모스크바 | 미하일 탈 | 8 | 13 | 미하일 보트비닉 | |
1963 | 모스크바 | 미하일 보트비닉 | 9½ | 12½ | 티그란 페트로시안 | |
1966 | 모스크바 | 티그란 페트로시안 | 12½ | 11½ | 보리스 스파스키 | |
1969 | 모스크바 | 티그란 페트로시안 | 10½ | 12½ | 보리스 스파스키 | |
1972 | 레이캬비크 | 보리스 스파스키 | 8½ | 12½ | 바비 피셔 | |
| - | | 아나톨리 카르포프 | |||
1978 | 바기오 | 아나톨리 카르포프 | 6 | 5 | 빅토르 코르치노이 | |
1981 | 메라노 | 아나톨리 카르포프 | 6 | 2 | 빅토르 코르치노이 | |
1984*** | 모스크바 | 아나톨리 카르포프 | 5 | 3 | 가리 카스파로프 | |
1985 | 모스크바 | 아나톨리 카르포프 | 11 | 13 | 가리 카스파로프 | |
1986 | 런던 레닌그라드 | 가리 카스파로프 | 12½ | 11½ | 아나톨리 카르포프 | |
1987 | 세비야 | 가리 카스파로프 | 12 | 12 | 아나톨리 카르포프 | |
1990 | 리옹 | 가리 카스파로프 | 12½ | 11½ | 아나톨리 카르포프 | |
*: 챔피언의 사망으로 챔피언 vs 도전자 1:1 대전이 아닌 5인 라운드 로빈 방식으로 치러졌다. **: 타이틀 방어 포기 ***: 중단 |
{{{#!folding PCA 타이틀 (1993~2006) {{{#!wiki style="margin:-5px -2px -11px" | 연도 | 장소 | 디펜딩 챔피언 | 도전자 | ||
1993 | 런던 | 가리 카스파로프 | 12½ | 7½ | 나이젤 쇼트 | |
1995 | 뉴욕시 | 가리 카스파로프 | 10½ | 7½ | 비스와나탄 아난드 | |
2000 | 런던 | 가리 카스파로프 | 6½ | 8½ | 블라디미르 크램닉 | |
2004 | 브리사고 | 블라디미르 크램닉 | 7 | 7 | 페테르 레코 |
{{{#!folding 통합 타이틀 (2006~ ) {{{#!wiki style="margin:-5px -2px -11px" | 연도 | 장소 | 디펜딩 챔피언 | 도전자 | ||
2006 | 멕시코시티 | 블라디미르 크램닉 | 6 [2½] | 6 [1½] | 베셀린 토팔로프 (FIDE 챔피언) | |
2007* | 멕시코시티 | 블라디미르 크램닉 | 8 | 9 | 비스와나탄 아난드 | |
2008 | 본 | 비스와나탄 아난드 | 6½ | 4½ | 블라디미르 크램닉 | |
2010 | 소피아 | 비스와나탄 아난드 | 6½ | 5½ | 베셀린 토팔로프 | |
2012 | 모스크바 | 비스와나탄 아난드 | 6 [2½] | 6 [1½] | 보리스 겔판드 | |
2013 | 첸나이 | 비스와나탄 아난드 | 3½ | 6½ | 망누스 칼센 | |
2014 | 소치 | 망누스 칼센 | 6½ | 4½ | 비스와나탄 아난드 | |
2016 | 뉴욕시 | 망누스 칼센 | 6 [3] | 6 [1] | 세르게이 카리야킨 | |
2018 | 런던 | 망누스 칼센 | 6 [3] | 6 [0] | 파비아노 카루아나 | |
2021 | 두바이 | 망누스 칼센 | 7½ | 3½ | 이안 네폼니아치 | |
2023** | 아스타나 | 이안 네폼니아치 | 7 [1½] | 7 [2½] | 딩리런 | |
2024 | 싱가포르 | 딩리런 | 6½ | 7½ | 구케시 디 | |
2026 | ||||||
*: 챔피언 vs 도전자 1:1 대전이 아닌 8인 라운드 로빈 방식으로 개최했다. **: 챔피언의 타이틀 방어 포기로 도전자 결정전 1, 2위가 대결 |
[1] 타이마노프는 이 일로 고국에서 미국인에게 무력하게 졌다는 비난을 받고 체스를 은퇴하게 된다. 캐삭빵[2] 양쪽이 9승을 거둘 시 상금은 양분하고 피셔가 챔피언을 유지한다는 독소조항이 결정적이었다.[3] 이후 그의 제안은 부분적으로 인정되어 먼저 6승을 거둔 선수가 챔피언이 되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카르포프와 가리 카스파로프의 챔피언전이 장장 48게임 후에 승부가 나지 않자 다시 24전제가 된다.[4] 단, 보리스 스파스키와의 챔피언 결정전 6경기에서 일부러 스파스키의 주력 오프닝인 QGD 타르타코워로 들어가서 이겨버렸다! 이 경우에도 d4를 두진 않았고 잉글리시 오프닝을 통해 전환해서 들어간 것이다.[5] https://www.chess.com/blog/MilanBgd01/13-games-robert-fischer-vs-mikhail-tal.[6] 어떻게 보면 당대의 체스 선수들을 압도했던 피셔가 전적이 팽팽하다는게 놀라운 것.[7] 당시는 전략적인 판단에 따라 10수 남짓만 두고 합의 무승부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기했듯이 피셔의 이의제기로 인해 대회 방식이 바뀌기도 했고, 오늘날 큰 대회는 대부분 초반 합의 무승부를 금지한다.[8] 그런데 당시 여성 챔피언과 피셔의 레이팅 차이를 봤을 때 발언이 싸가지 없을 뿐, 허세가 아니고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9] 피셔의 누나의 아버지는 모스크바에서 결혼했다가 이혼한 한스 게르하르트 피셔(Hans Gerhardt Fischer)였던 반면, 피셔의 생물학적 아버지인 폴 펠릭스 네메닐(Paul Felix Nemenyl)은 어머니와 한번도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지 않았다.[10] 초대 세계 챔피언인 빌헬름 슈타이니츠는 귀화한 미국인이다.[11] 20세기 이전에는 더 높은 연승 기록도 찾아볼 수 있지만 명백히 수준 차이가 나는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달성 한 것이다. 하지만 피셔는 도전자 결정전에서 세계 랭커들만을 상대로 기록을 쌓았다.[12] 스파스키는 자신이 챔피언이던 시절에도 레이팅으로는 피셔보다 낮았다.[13] 실제로 챔피언십에서 스파스키와의 승률이 대략 60%대이다.[14] 천재, 미국인, e4 선호, 정신적 문제를 앓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