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8:42:12

믿고 거르는 고대가드/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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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례
1.1. 2013년1.2. 2014년1.3. 2015년1.4. 2016년1.5. 2017년1.6. 2019년1.7. 2021년1.8. 2022년1.9. 2023년
2. 그렇다면 선배 가드들은 어땠는가?
2.1. 50년대2.2. 70년대2.3. 80년대2.4. 90년대 (KBL 드래프트 이전)2.5. KBL 드래프트 이후
2.5.1. 1998년2.5.2. 2000년2.5.3. 2001년2.5.4. 2002년2.5.5. 2005년2.5.6. 2006년2.5.7. 2007년2.5.8. 2008년2.5.9. 2010년2.5.10. 2011년2.5.11. 2012년
3. 한편 연대 가드들은 어땠는가?
3.1. 70년대3.2. 80년대3.3. 90년대(KBL 드래프트 이전)3.4. KBL 드래프트 이후
3.4.1. 1999년3.4.2. 2000년3.4.3. 2001년3.4.4. 2004년3.4.5. 2006년3.4.6. 2007년3.4.7. 2008년3.4.8. 2009년3.4.9. 2010년3.4.10. 2011년3.4.11. 2012 가을3.4.12. 2014년3.4.13. 2016년3.4.14. 2017년3.4.15. 2019년3.4.16. 2020년3.4.17. 2021년
4. 한편 중대 가드들은 어땠는가?
4.1. 70년대4.2. 80년대4.3. 90년대 (KBL 드래프트 이전)4.4. KBL 드래프트 이후
4.4.1. 2000년4.4.2. 2001년4.4.3. 2002년4.4.4. 2007년4.4.5. 2008년4.4.6. 2009년4.4.7. 2010년4.4.8. 2011년4.4.9. 2012년 가을4.4.10. 2016년4.4.11. 2017년4.4.12. 2018년4.4.13. 2019년4.4.14. 2020년

[clearfix]

1. 사례

* 1라운드에 선발 받은 고려대학교 출신 가드를 표기한다.
* O X로 나눠 표기한다.
* 소포모어(2년차) 시즌까지는 '?'로 표기할 수 있다.

1.1. 2013년

1.1.1. 박재현 O

2013년 드래프트는 하위권 팀들의 탱킹 의혹이 생길 정도로 대형 유망주들이 몰려나오는 황금드래프트라 평가받았다. 박재현 또한 이승현, 이종현과 함께 고대 왕조의 주역이였으며, 그 해 고려대가 대학농구리그 및 프로아마 최강전을 우승할 수 있게 만든 주축이였다. 당시 평가 중 이승현, 이종현이 골밑을 받쳐줘 박재현의 실력이 미화된 측면이 있다는 의견들도 있었으나, 박재현이 보여준 개인 기량은 충분히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설득력을 얻지 못했었다. 그해 빅 3로 불렸던 김종규, 김민구, 두경민에 이은 차상위 순번이 확정적이였으며, 막판까지 두경민과 3순위를 두고 논쟁이 벌어질 정도로 큰 기대감을 받았다. 신인 드래프트 당일 서울 삼성은 1.5%의 확률을 뚫고 행운의 4픽을 거머쥐었고 박재현을 지명했다. 이는 앞선 김종규, 김민구, 두경민의 바로 뒷 순번이자, 5순위인 이재도, 7순위인 전성현보다도 앞 순번이였다.[1] 삼성팬들은 드디어 암흑기를 뚫고 비상을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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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014년

1.2.1. 김지후 O

김지후는 고려대학교 시절 대학리그 최고의 슈터라고 불렸다. 외곽으로 주는 킥아웃 패스를 받아 그대로 받아먹는 캐치 앤 샷에 최적화된 모습을 보였으며, 팀의 고비 때 마다 3점슛을 터트리는 강심장의 면모 또한 보여줬던 선수이다. 기복이 있지만 슛 하나 만큼은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4년 드래프트는 이승현, 김준일, 정효근 등 대어급 유망주들이 상위 순번에 포진해있었으며, 전년도보다는 못하지만 역시 대형 드래프트라고 평가받았다. 드래프트 당시 전주 KCC는 4순위로 김지후를 지명했고 이후 원주 동부가 5순위로 허웅을 지명했다. 당시 농구 팬들 사이에서는 '왜 KCC가 허웅을 잡지 않고 김지후를 잡았냐'는 논쟁이 계속 이어지곤 했다. 당시 KCC는 허웅의 아버지인 허재가 감독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논란을 피해가기 위해 일부러 아들을 지명하지 않은 것'이라는 의견도 존재했다.[2] 당시 암흑기였던 KCC에서 데뷔시즌 평균득점 7.17로 신인으로는 좋은 활약을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결국 허웅은 리그 정상급 슈팅가드이자 슈퍼스타로 성장했고, 반면 김지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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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2015년

1.3.1. 이동엽 O

포인트 가드 치고 많이 느리고 떨어지는 운동능력을 갖고 있지만, 농구 감독인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우월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대학무대에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였기에, 믿거고 신화를 끊을 수 있을까 기대를 모았다. 리그 최하위권 가드진이라고 평가받는 삼성이기 때문에 데뷔시즌부터 꾸준한 기회를 받고 있지만 항상 평범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다. 그 사이 해당 드래프트 1순위였던 문성곤은 매년 리그 최우수 수비수에 선정되고 있으며, 2순위였던 한희원은 3&D로 늦게나마 포텐셜을 터트리며 국가대표까지 승선, 3순위였던 송교창은 리그 MVP에 선정, 6순위였던 정성우는 기량발전상과 수비5걸을 동시에 수상하며 최상위권 수비형 핸들러로 성장, 7순위였던 이대헌은 올스타급 빅맨으로 성장했다. 이동엽의 앞 뒤 순번 선수들이 리그에서 큰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지만, 정작 5순위라는 낮지 않은 순번에서 이동엽의 활약은 많이 아쉽다는 평가이다. 2023년에는 놀랍게도 3억원이라는 거액에 FA 재계약을 했다. FA 이후에는 연봉이 무색하게 끔찍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삼성 팬들에게 큰 질타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1번으로 뛰기에는 부족한 리딩 능력, 패싱센스, 운동능력이 발목을 잡았고 2번으로 뛰기에는 공격 스킬이 부족했기 때문에 결국 믿거고의 사슬을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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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2016년

1.4.1. 최성모 ?

2016년 드래프트에서 천기범, 박지훈과 함께 가드 최대어 3인방으로 분류되어, 1라운드 7순위로 원주 동부에 뽑혔다. 대학 시절에는 흔치 않은 슬래셔 타입의 듀얼가드라고 평가 받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돌파형 가드들이 그렇듯이 프로에서는 장점이 죽어버렸고, 슈팅이 안정적이지 못해 득점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결국 kt 소닉붐으로 트레이드 되면서 허훈의 백업이나 파트너 역할을 맡았다. 본인의 약점이었던 슈팅 부분도 일부 개선된 모습을 보여줬다. 시즌 종료 후 기대감을 안고 상무에 입대했지만, 뜬금없이 포텐이 터져버린 정성우 때문에 전역 이후 경쟁에서 밀려버린 상황이다. 이후에는 팀에서 평범한 백업가드로 출전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삼성으로 이적한 이후 갑자기 팀의 1번 자원들이 부상으로 모조리 전멸[3]해버리는 바람에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1번 자리를 소화해야만 했는데[4] 꽤 쌓인 프로 연차로 인해 발전한 경기 운영 능력과 나쁘지 않은 외곽 슛, 그로 인해 되살아난 돌파 능력 덕택에 지공 위주의 경기를 펼치는 삼성에서 당당히 주전 1번을 차지하며 믿거고 라인에서 탈출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기존 믿거고 라인 선수들보단 좋은 활약을 펼치고는 있으나 주전으로 뛰게 된 게 24-25시즌이 처음인데다 내년에 이대성이 돌아올 시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미지수이기에 다음 시즌 활약상까지 봐야 믿거고 라인 탈출 여부가 나올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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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2017년

1.5.1. 김낙현 X

고려대 시절부터 연세대 허훈과 라이벌 관계를 가져가며 대학리그를 양분한 가드이다. 슛에 있어서는 고교 시절부터 인정받아왔으며, 특히 클러치 능력이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프로 진출 이후 데뷔 시즌에는 본인이 클러치 상황에서 반대로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시즌이 끝나고 출전한 2018 아시안게임 3X3 농구 결승에서는 희대의 본헤드 플레이를 저질러.. 믿거고의 단어를 언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2년차 시즌부터 급격하게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즌 이후 '식스맨 상'을 수상했다. 3년차 시즌에는 더욱 발전하여 괄목상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결국 시즌 이후 '기량 발전상'까지 수상하며 믿거고의 타이틀을 완전히 떼어내버렸다. 이후 리그를 대표하는 가드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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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2019년

1.6.1. 김진영 O

레전드 김유택의 아들이자 이복형제 최진수의 동생으로서 청소년 시절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대형 유망주였다. 포지션 대비 큰 신장과 뛰어난 운동능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대학 3학년을 마치고 2019년 얼리 드래프트로 참가하여 서울 삼성에게 전체 3순위로 지명 받았다. 데뷔 시즌은 장점과 단점이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었지만 아직 어린 선수이기 때문에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2년차 때는 훨씬 많은 출전 시간과 롤을 부여받으며, 김진영 또한 좋은 신체조건과 운동능력, 패기로 종종 하이라이트 필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아직까지 부족하지만 큰 가능성을 보여준 시즌이기도 했다. 중요한 3년차를 준비하던 도중.. 비시즌 만취한 상태로 음주운전을 하는 큰 사고를 내어 선수인생에 급격한 위기를 맞이했다. 향후 징계 여부에 따라 차후 시즌 활약에도 큰 변동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이다.

KBL 재정위원회 결과에 따른 27경기 징계 + 구단 자체 징계 54경기 까지 총 81경기 징계가 확정되며 1시즌 반을 못 뛰게 되었다. 또한 범죄 이력에 따라 상무에 가는 것도 불가능할 것으로 보여 현역 or 공익으로 병역을 이행한다면 선수생활 3~4년을 통째로 날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창 성장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수 년을 실전경험 없이 보내야 하는 상황이라 향후 선수 생활 자체가 불투명한 상태이다. 2022-23시즌에 복귀하긴 했지만 냉정한 은희석 감독의 평가와 함께 워크에씩이 떨어진다는 세간의 악평을 뒤집지 못하고 있다. 이후에도 출전시간을 받지 못했고 잊혀진 선수가 되어 정관장으로 트레이드까지 되는 수모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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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2021년

1.7.1. 정호영 O

2미터에 육박하는 윙스팬 뛰어난 운동능력을 갖춘 듀얼가드로서 내외곽을 가리지 않는 뛰어난 공격력을 대학무대에서 보여줬다. 프로무대에서도 종종 득점 폭팔력을 보여주면서 본인의 장점을 어필했지만 부족한 웨이트와 수비력 등 약점이 부각되면서 백업가드 이상의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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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2022년

1.8.1. 김태완 O

빠른 스피드와 3&D를 강점으로 고려대 시절 앞선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3학년 때 얼리드래프트로 KBL에 지명됐다. 신인시절부터 적지 않은 출전시간을 부여하며 팀에서 경험치를 주고 있지만 뚜렷한 성과는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 1번으로 뛰기에는 기량이 부족하고 2번으로 뛰기에는 사이즈가 작은 애매한 듀얼가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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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2023년

1.9.1. 박무빈 X

연세대 유기상과 함께 학년을 대표하는 가드 2명으로 불리었고, 문정현과 함께 빅3라고 평가받던 대어급 선수였다. 2순위로 지명 후, 프로에 와서도 신인 시절부터 어느정도 기대치를 충족시켜주는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후 젊은피로 국가대표에도 승선하는 등 창창한 미래가 기대되는 선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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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렇다면 선배 가드들은 어땠는가?

2.1. 50년대

  • 김영기: KBL의 "불통 총재"로 유명했지만 50~60년대 한국 농구계의 간판스타였던 불세출의 가드였다. 일명 "드리블의 마술사". 현역 은퇴 후에는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신동파, 유희형, 김인건 등을 이끌고 69년 방콕 아시아선수권과 70년 방콕 아시안게임 우승을 하기도 했다.

2.2. 70년대

  • 김동광: 가드의 명가인 송도중-송도고 출신으로 전규삼 감독으로부터 농구를 배운 수제자다. 최철권과 함께 기업은행 농구단의 레전드. 국대에서도 주전을 놓치지 않았으나, 정작 국제대회 결승마다 중국에 밀리던 콩라인의 시작. 아이러니하게도 김동광이 국대를 은퇴한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박수교의 맹활약 끝에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지도자로서도 우승을 여러번 했고 행정가와 해설위원까지 역임하며 왕성한 활동을 했다.
  • 정태균: 가드의 명가 송도고 출신. 대학 시절 빠른 스피드를 가진 날다람쥐를 연상케 하는 가드였다. 그러나 1982년 실업 삼성전자 농구단에 입단한 후 쟁쟁한 선배들에 밀려 자리를 못잡게 된다. 결국 별 활약 없이 1986년 조기에 현역 생활을 접고 농구 유학을 떠났고 훗날 여자농구계에서 오랫동안 지도자를 맡았다.

2.3. 80년대

  • 이충희: 고대의 레전드. 대만리그 선수 겸 감독. LG 세이커스 창단 겸 초대 감독. 오리온스 4대 감독. 이충희는 182의 단신으로 포지션 상은 슈팅 가드지만 커리어 대부분을 스몰 포워드로 뛰었기 때문에 해당사항이 없다. 다시보면 코너맨 또는 스윙맨이었다. 잡으면 3점을 던졌다. 그래도 가드 역할은 간간히 있었다. [5]
  • 김진: 동양 오리온스의 창단 코치와 3대 감독을 포함해서 LG 세이커스 6대 감독었으며 2002 부산아시안게임 국가대표팀 금메달 당시 감독으로 유명하다. 학생 시절 포워드였으나 대학 시절 가드를 맡았다. 올드 팬들에게는 이충희와 함께 80년대 고려대학교의 주전 슈터이자 김현준과 함께 80-90년대 삼성전자의 주전 슈터로 더 익숙하다. 90년 FIBA 월드컵과 베이징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스타일은 슈팅 가드였지만 김현준이 스몰 포워드면 본래 포지션인 슈팅 가드를 맡으면서 전자 쌍포로 활약했다. 반대로, 김현준이 슈팅 가드면 맞지 않았던 포인트 가드를 맡았다.

2.4. 90년대 (KBL 드래프트 이전)

  • 김상식 & 정인교: 각각 기업은행, 산업은행의 에이스로서 커리어 대부분을 포워드로 뛰다 프로 출범 이후 슈터 2번으로 전업했다. 즉 이들은 슈팅가드 포지션에서 뛰었을 뿐 정통 가드는 아니다. 슈터 스타일이지만 가드 놀이는 정인교보다 김상식.
  • 윤호영: DB윤호영과는 다르다!![6] 드리블이 좋았던 단신가드. 암흑기 고대의 앞선을 이끌던 선장이었으나 피지컬, 득점력 부족으로 삼성전자 입단 후 별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프로 출범 후 5시즌만에 은퇴, 이후 KBL 심판으로 전업하여 명성(?)을 떨친다.
  • 김병철: 대구 동양/대구 오리온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02-03 KBL 정규리그 MVP. 폭발적인 3점슛을 가진, 허재 이후 최고의 2번이었으나, 신장이 작아 명성에 비해 국대에서는 중용되지 못하였다.[7]
  • 박규현: 창원 LG 세이커스 창단멤버 겸 프랜차이저. 프랜차이저의 무덤이자 감독의 무덤인 LG에서 성공사례이자 고려대 선전 사례. 별명은 거미. KBL에서 수비상을 휩쓸은 찰거머리. 리딩은 못했지만 뛰어난 수비력과 정확한 슈팅으로 키 식스맨 역할은 했다.
  • 주희정: KBL 레전드. 전성기는 삼성-KT&G. 고려대 2학년 시절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자퇴 후 나래이동통신(現 원주 동부 프로미)에 연습생으로 입단했다.[8] 97-98 시즌 신인상에 이후, KBL에서 무려 20시즌 동안 1000경기 넘게 출장한 살아있는 전설. 프로농구 역사상 플옵에서 탈락하고도 정규리그 MVP를 수상한 유일무이한 선수다.

2.5. KBL 드래프트 이후

2.5.1. 1998년

  • 신기성 (7순위, 원주TG)
    KBL 최초의 신인왕
    KBL 첫 드래프트는 현주엽, 윤영필(경희대), 김택훈(연세대) 등 토종 빅맨이 대세였다. 그리하여 당시만해도 빠르기만 하고 3점이 다소 약하던 신기성은 예상외로 변청운(건국대), 이은호(중앙대), 박재일(명지대)에도 밀려 전체 7위로 원주 TG에 선발되는데, 98-99 시즌에서의 맹활약을 통해 당시 청주 SK를 플레이오프로 이끌지 못한 서장훈, 현주엽을 제치고 신인왕을 차지한다.[9] 신기성의 바로 다음 순위가 "모래반지빵야빵야" 표명일(명지대) 이었다. KBL 커리어 내에서는 드래프트 직전 세대인 주희정, 김병철과 함께 우수한 커리어를 보낸 고대 출신 가드이며, 현재 2020-21시즌에도 신기성을 뛰어넘는건 고사하고 비슷한 커리어를 보낸 고대 출신 가드들은 아무도 없다. 그나마 상술한 김낙현이 누적스탯을 쌓아야 비견이 가능할 정도.

2.5.2. 2000년

  • 이정래(7순위, 창원LG), 강대협(12순위, 대전현대)
    명지고 시절 김병철을 능가할 슈터라고 평가받았던 이정래는, 대학 시절부터 허리 부상으로 골골대느라 기대치만큼 활약하지 못했음에도 창원LG에 1라운드에 지명되나 후술할 황진원과 맞트레이드된다.(부상이 안타깝긴 하나 믿거고의 시초)
    오히려 2라운더 강대협황진원과 더불어 KBL 최고의 저니맨이자 키 식스맨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2.5.3. 2001년

  • 전형수(2순위, 여수코리아텐더)
    뛰어난 돌파와 정교한 슛을 갖춘 왼손잡이 공격형 가드로 당시 최대어 송영진에 이어 2순위로 여수 코리아텐더에 선발된다. 재정 문제로 부도 직전이던 팀을 플레이오프 직전까지 이끄는 등 코텐 돌풍을 주도했으나, 바로 다음 3순위가 하필 슈퍼루키[10]였던 탓에 뭔가 만족스러우면서도 아쉬운 활약이었다. 이후 저니맨 신세에 이어 다시 돌아간 창원 LG 세이커스에서 몰락했다. 하지만, 고양 오리온스에서는 기량 내리막 대비 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2.5.4. 2002년

김주성 & 낙생고 3인방 드래프트로 기대를 모았으나, 김주성(1순위), 진경석(3순위), 박지현(4순위), 이한권(5순위)을 제외하곤 대부분 프로에서 폭망하는 등(2순위 정훈 포함) 실제 뎁스는 매우 떨어졌던 해로, 사실 누굴 뽑았어도 망픽이었다.

2.5.5. 2005년

  • 정상헌(8순위, 대구오리온스), 김지훈(17위, 안양KT&G)
    재앙급 믿거고. 경복고 출신 대형 가드였으며 고교 시절 방성윤과 함께 FIBA Asia U-19 대회를 접수하는 등 천재로 불렸으나 고려대 진학 후 방황에 빠져 연세대와의 정기전을 한 번만 뛰는 등 문제아로 유명했다. 대구 오리온스 김진 감독이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여 자퇴생 신분인 그를 무려 1라운드에 선발하였으나 아니나다를까 팀 이탈.(-_-) 다음 시즌 울산 모비스로 트레이드되어 유재학 감독의 지도 아래 어느 정도 선수 생활을 재개하고 06-07 시즌 우승 멤버에도 이름을 올린 뒤 이듬해 상무로 입대하기까지 하나, 상무 제대 후 귀신 같이 은퇴!! 그 후엔 다들 알다시피...
    안양 KT&G 김동광 감독은 고대에서도 백업가드였던 아들 김지훈이 2라운드에서도 선발되지 않자, 17순위로 자기가 감독하는 팀으로 선발하여 아들의 취업문을 열어준다. 참고로 이때 고려대 포워드 김동욱이 전체 14순위로 삼성에 뽑혔다. 앞에 팀들은 다 뭐한겨??[11]

2.5.6. 2006년

  • 임휘종(7순위, 안양KT&G->서울삼성으로 트레이드), 배경한(10순위, 원주동부), 전원석(14순위, 안양KT&G)
    2000년대 중반 고대의 싹쓸이 스카웃은 대단했다. 특히 고교농구의 에이스란 에이스는 죄다 모아놓은 듯한 화려한 가드진이 유명했는데, 결과는 이정석, 김태술로 실속을 챙긴 연세대에 매번 밀렸고, 심지어 중앙대에도 맥을 못췄다.
특히 임휘종은 2003년 그리스 FIBA U-20 대회에서 한국이 16팀 중 12위를 차지할 때 주전으로 뛰던 장신 가드였는데,[12] 이른바 황금세대 사이에서도 주전으로 뛰었음에도 불구, 대학 시절 별 발전이 없이 프로에 와서 미미한 커리어를 보낸다. 바로 뒷순번이 무려 한양대 조성민으로 KTF 추일승 감독이 낼름 가져갔고, 2 라운드 15 순위에는 괜찮은 빅맨인 중앙대 한정원이 있었다.
그리고 안양 KT&G 김동광 감독은 2년 연속 2라운드에 고대 가드를 뽑고 이듬해 서울 삼성 감독으로 이직한다.

2.5.7. 2007년

  • 신제록(12순위, 안양KT&G)
    신제록 역시 황금세대의 청대 시절 주전 2번이었다. (03년 세계대회는 부상으로 불참) 4학년 정기전때 당시 연세대로 편입했던 이동준의 출전을 놓고 양팀이 신경전을 벌일 때 당시 고대 주장이었다.(결국 이동준은 출전하지 못했고 06년 정기전은 고려대가 이긴다.) 프로에서는 부상과 씨름하던 시간이 더 많았다. 배우 신성록의 동생으로 더 유명하다. 황금세대답게 후순위에도 알짜가 많았는데, 14순위 "봉다디" 김봉수, 17순위 꽃창무, 3라운드 22순위의 슛쟁이 정병국 등이 아직 잘 뛰고있다. 김봉수는 16-17시즌을 끝으로 은퇴. 안양 KT&G는 3년연속 2라운드에 고대가드를 뽑는다. 이번엔 이상범 감독

2.5.8. 2008년

  • 양우섭(13순위, 부산KTF)
    운동 능력이 뛰어난 가드. 1번으로의 능력은 다소 아쉬우나, 수비가 매우 좋고 2번으로도 활용 가능하다. 예전의 박규현을 보면 연상. 차이는 힘과 체력. 일단 믿거고에서는 제외.

2.5.9. 2010년

  • 신정섭(12순위, 원주동부), 김태주(13순위, 서울삼성)
    모두 2라운더들로 별 기대치가 없었으나, 신정섭의 경우 2015년 프로농구 승부조작 사건으로 영구제명된 바 있다.
    반대로 김태주는 은퇴 이후 교사자격증 취득 이후 임용고시에 합격하며 체육교사가 되었다. 사실상 이쪽이 훨씬 좋을 수 있다

2.5.10. 2011년

  • 정창영(8순위, 창원LG), 홍세용(20순위, 안양KGC→원주동부로 트레이드)
    모교 시절 어시스트 왕. 190cm의 대학 리그 장신 포인트 가드. 프로에서는 슈팅 가드 병행.
    창원 LG의 가드난을 해소할만한 장신 가드로 기대를 모았으나, 큰 활약없이 2시즌을 보내고 상무에 입대한다. (그리고 기존의 양우섭, 유병훈, 정창영 중 누구도 만족할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자, 창원 LG는 포가난 해소를 위해 트레이드로 김시래를 영입한다.)
    강을준 감독이 지명했으나 김진 감독이 중용을 했다. 하지만, 상무 입대 후에도 불구하고 프로의 빠른 공수전환과 집중력이 부족하면서 고전했다. 현주엽 감독으로 교체되면서 큰 시련을 맞이했다.
    이후 FA로 은퇴까지 고민했는데 KCC 이지스에서 전창진 감독님을 만나면서 오용준에 버금가는 기량발전과 모범을 보이면서 평가를 뒤집었다. 사실 가드 보다 가드-포워드 사이로 보면 된다.
    단신 슈터였던 홍세용(홍경기로 개명)은 커리어 대부분을 2군리그에서만 뛰다 계약해지되었고, 실업팀인 놀레벤트 이글스에서 선수 겸 코치로 뛰다가 2017년 전자랜드에 합류했다.

2.5.11. 2012년

  • 1차 드래프트: 조찬형 (3라운드 21순위, 안양KGC)
    단신 슈터였던 조찬형은 고질적인 피로골절 부상으로 인해 1군에서 단 한게임도 뛰지 못하고 방출된다. 은퇴 후 체육교사를 하고 있다.

3. 한편 연대 가드들은 어땠는가?

3.1. 70년대

  • 박수교: 본격 프로농구판 이순철[13] 선수 시절에는 득점력, 센스 넘치는 패싱력을 필두로 외모와 쇼맨십, 그리고 카리스마까지 겸비하여 70년대에 현대전자에 입단한 후 80년대를 주름잡았던 최고의 명가드이자 인기스타였다. 허나 기아/모비스 ~ 전자랜드 시절로 이어지는 지도자 및 단장 생활은 말그대로 맹점을 드러내면서 한국 농구사에 한 축으로 평가받는 명가드는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게되는 오명을 얻고 말았다.
  • 최희암: 선수 시절에는 그저 그런 가드였지만, 1980년대부터 연세대학교 농구부 감독으로 부임한 이래 정재근부터 조상현까지 이어지는 연세대학교의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 허나 프로감독 시절인 모비스나 전자랜드 시절의 평가는 그리 좋지는 못하다.

3.2. 80년대

  • 김현준: 전자슈터 농구대잔치 통산 득점 1위에 빛나는 슈터로, 허재, 이충희와 함께 농구대잔치의 삼국지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허나 비운의 교통사고로 인해 1999년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14]
  • 유재학: 천재 가드였으나 부상 관리 및 재활 시스템의 문제 때문에 일찍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었다. 34세의 나이로 대우 제우스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한 이래 모비스를 강팀으로 만들고 단일팀 600승이라는 금자탑을 세우면서 프로농구 출범 이후 최고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 김남기: 기량은 출중했으나 질병과 부상, 그리고 작은 키로 인해 프로에서 롱런하지 못하고 일찍 은퇴를 했다. 최희암의 후임으로 연세대 농구부를 지휘하며 방성윤, 이정석의 선수들과 함께 대학농구를 평정했다. 다만 프로감독 시절인 오리온스 시기에는 김승현의 이면계약 파동으로 팀이 워낙 개막장을 달리고 있었기에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역전패를 당하는 경기가 많아 팬들에게 까이기도 했다. 여담으로 김남기 감독의 임기가 끝나자마자 오리온스는 고양으로 야반도주를 했다. 명지대 감독 시절 성폭행 논란과 함께 불명예의 퇴진을 당했다.

3.3. 90년대(KBL 드래프트 이전)

  • 이상범: 선수 시절에는 좋다고 이야기하긴 뭐하나 그래도 어느정도 경쟁력은 있는 공격력과 수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SBS입단 이후 KGC에서 무려 20년이 넘도록 한 팀에서 선수, 코치, 감독까지 역임한 명실상부한 프랜차이즈 스타라고 보아도 무방할듯 하다. KGC 말년에는 선수단 부상관리에 실패하면서 경질이 되긴 했으나 국대 코치, 일본 고등부 코치를 역임하면서 경험치를 누적하여 17-18시즌 DB의 정규시즌 우승이라는 언더독 신화를 썼다.
  • 이상민: 컴퓨터 가드 연세대학교의 최전성기를 연 최고의 포인트 가드. 운동 능력, 패싱력, 곱상한 외모를 필두로 한국농구 역사상 최고의 팬덤을 보유한 선수이다. 다만 국제무대에선 높은 드리블 때문에 플레이가 불안정했다는 것과 연대 출신 선수들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플라핑으로 평가를 깎아먹는 점이 있다.

3.4. KBL 드래프트 이후

KBL 시기 슈터로 이름을 날렸던 문경은, 우지원, 조상현, 방성윤은 커리어의 대부분을 스몰 포워드로 뛰었기에 이 항목에 넣지 않았다.

3.4.1. 1999년

  • 황성인(1R 3순위, SK): 조상현/조동현 쌍둥이 형제와 함께 대전고 3인방으로 고등학생때부터 유망한 선수였다. 연세대학교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포인트 가드였으며, SK에 지명이 되어서도 그 당시 구멍이었던 포인트 가드 포지션에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전형수와 트레이드 된 LG 시절에는 과거만 못했지만, 전자랜드에서는 은사인 최희암과 다시 만나 신기성 이후 포가난에 시달리던 팀의 경기 조율을 도맡아 활약했다. 말년엔 황봉사라는 굴욕적인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 조동현(1R 8순위, 대우): 건실한 수비력만으로도 프로 생활에 롱런할 수 있었던 선수 중 한 명. 커리어 내내 수비 5걸에도 세번이나 들었고, 평균 10득점 이상을 기록한 시즌도 한 두차례 있었다. 고질적인 무릎 부상이 있었지만 전창진의 부산 kt 소닉붐를 이끌면서 모션 오펜스를 보조하는 포인트 가드로 쏠쏠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KT 감독 시절을 거쳐, 현재 울산 모비스의 수석코치로 부임했다. 감독으로는 낙제점

3.4.2. 2000년

  • 은희석(1R 5순위, SBS): 우월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상대 포인트 가드와의 매치업에서 우위를 가져갔던 2000년대에 활약했던 대표적인 장신 가드 중 하나였다. 이정석 → 주희정 → 김태술로 이어지는 포인트 가드 라인에서 백업을 충실하게 수행했다는 점과 김성철과 함께 좋은 벤치 분위기 메이커의 역할을 했다는 장점도 있었으나 그러기엔 선수 말년에 잦은 부상으로 인해 은삼억이라는 별명도 있을 만큼 출장을 못했다는 게 문제. 은퇴 이후 연세대학교 농구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3.4.3. 2001년

  • 이형주(1R 7순위, LG), 허중(1R 10순위, 현대): 두 선수 다 3~4시즌간 백업롤을 수행하고 큰 활약은 없이 은퇴하였다. 그해 로터리픽인 송영진, 전형수, 김승현과 5픽 황진원을 제외하면 나머지 선수풀이 빈약했던 드래프트였다.

3.4.4. 2004년

  • 이정석(1R 2순위, SBS): 2000년대 중반 서울 삼성 썬더스 가드왕국의 한 축을 담당했던 가드. 신인 시절에도 단테 존스가 이끄는 SBS에서 괜찮은 역할을 수행해줬다. 주희정과 트레이드 된 삼성 시절 이상민, 강혁, 이정석이라는 3가드 시스템을 바탕으로 밸런스형 포인트 가드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었다. 하지만 2011-12시즌 무릎 십자인대 부상으로 인해 가드왕국의 대들보 중 하나였던 이정석은 드라마틱한 몰락을 겪게 된다. 이후 SK로 트레이드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상대는 또 다시 주희정이었다. 주희정이 팀내의 맏형으로 가드진을 잘 이끌어주고 있는 반면 이정석은 김선형의 출장정지 징계기간 동안만 잠시 활약했을 뿐 이후로는 1군에 기용이 되지 않고 있다. 이후 현대모비스로 이적했으나 D리그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은퇴 후 연세대학교의 코치로 재직하고 있다.
  • 최승태(1R 7순위, KCC)[15]: 4~5시즌동안 평균 5분남짓을 소화하며 KCC, LG, 오리온스 등에서 식스맨 역할을 수행해주었다. 사실 R.F 바셋 트레이드만 아니었어도 KCC에 갈 수 있었던 선수가 다름 아닌 양동근. 은퇴 이후 추승균 감독 밑의 KCC 코치와 조성원 감독 밑의 LG 코치로 지도자를 하게 되었다. D 리그 코치로 좋은 평.

3.4.5. 2006년

  • 전정규(1R 1순위, 전자랜드): 흔히 KBL 역사상 최악의 1픽이라고 꼽히는 양대산맥 중 하나. 캐치앤샷에 정말 최적화된 선수로 노마크 성공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수이나 운동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공수 마진이 말 그대로 마이너스로 가버리는 선수. 다만 오리온으로 이적한 이후에는 포워드 농구 전술에 힘입어 외곽 슈터의 롤을 조금이나마 해주고 있다.
  • 정승원(2R 19순위, SK): 단 두 시즌만 소화하고 은퇴. 현재 삼일상고 코치.

3.4.6. 2007년

  • 김태술(1R 1순위, SK): 2000년대 중반 양희종, 이광재와 함께 신촌 오빠 부대 재건의 선봉장. 6년 주기 포인트가드설이 나올 정도로 천재 가드로 명성이 자자했다. 신인 시절인 SK시절에도 매직 키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스타성도 괜찮았고, KGC 이적 후에는 리빌딩의 최종 목표이자 크블 최초 아이돌 구단이라는 빅재미를 선사했던인삼신기의 주축을 맡으며 양동근의 뒤를 잇는 최상급 포인트 가드 중 한명으로 평가받았었다. 하지만 부상 이후 KCC 시절에는 드라마틱한 추락을 보여주었고, 삼성 시절에는 시즌 중반까진 준수한 모습을 보여줬으나 체력 저하로 인한 야투성공률 하락과 턴오버 증가로 이상민, 크레익과 함께 16-17시즌 막판 삼성 까임 지분의 트로이카를 형성하다가 점차점차 자리가 밀려났고 결국 DB로 이적했다.
  • 이광재(1R 7순위, 동부): 연세대학교를 이끌었던 주전 슈터였다. 11-12시즌까지 폭발력 넘치는 외곽슛을 보여주면서 주전 자리를 꿰찼으며, 양경민 이후로 끊어졌던 동부의 슈터 계보를 이어가는 듯 싶었지만, 부상 이후엔 드라마틱한 기량하락을 보여주고 있다. kt로 이적한 이후에는 그냥 슛폼만 이쁜 가드가 되어버렸다. 17-18시즌엔 더 폭망한 모습을 보여줘 DB로 이적했고, 현역 마지막 시즌이였던 18~19시즌에는 상범 매직 덕분인지 승부처에서 나름 활약했다. 은퇴 후 상무의 코치가 됐다.

3.4.7. 2008년

  • 유희선(2R 19순위, SK): 오리온에서 1군경기 단 한 게임만을 치른 이후 방출되었다.

3.4.8. 2009년

  • 송수인(1R 9순위, 전자랜드): 대어급 선수들을 싹쓸이했던 연세대 05학번에서 그나마 살아남은 유일한 선수[16]였지만 (상무 복무 기간 빼고)6시즌 동안 고작 79경기(그나마 루키 시즌을 빼면 30경기) 출전에 그친 채 2016-17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접었다.

3.4.9. 2010년

  • 이정현(1R 2순위, KGC): 15-16시즌 이후 KBL 최고의 스윙맨이자 조성민을 잇는 차세대 국대 슈팅가드. 나이젤 딕슨의 트레이드의 대가로 kt에게 물려받은 1라운드 지명권에서 2순위가 뜨자, 바로 밑에 거론될 박형철과 박찬성을 뽑지 않겠냐는 의견이 많았지만 이상범이 뜬금포로 지명을 하였다. 사실 고교 시절에서 에이스 롤을 많이 맡았던 선수였고, 김태술이 상무에서 복귀하기 때문에 굳이 포가를 뽑을 이유가 없어서 지명을 했는데, 이 선택은 말 그대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동급 최강의 BQ와 패싱센스, 스틸, 골 결정력, 피지컬의 다양한 장점을 갖추고 있어서, 현재 시점에선 거의 적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14-15시즌부터 과도한 플라핑이 부각되기 시작하여 인터넷에선 허구한날 까인다.
  • 박형철(1R 5순위, LG): 박찬희, 박찬성과 함께 3박으로 불리면서 로터리픽 물망에도 올랐으나, 이정현과 변기훈에 밀려 5픽이 되었다. 플레이를 보면 준수한 외곽슛과 함께 신장을 바탕으로 한 수비 등 장점이 충분한 선수지만, LG 시절에도 김시래, 양우섭에 밀려 기용이 잘 안됐었고, SK 이적 이후에도 김선형만 줄창 굴리는 문경은의 전술 탓에 팀내 지분이 점차 없어지고 있다. 꾸준한 기회를 주더라도 제몫은 하는 선수라는 평가답게 KGC 이적 후에는 모션 오펜스를 바탕으로 쏠쏠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3.4.10. 2011년

  • 김현호(1R 5순위, 동부): 프로 데뷔이후 원주 DB 프로미에서 평균 10분 초반대의 출전시간을 받으며 준수한 슈팅롤을 바탕으로 백업가드 역할을 맡고 있다.
  • 이관희(2R 15순위, 삼성): 17-18시즌 기준 서울 삼성 썬더스의 국내 에이스. KBL에 흔치 않은,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하는 선수이다. 프로 저연차 때는 팀에서 백업 가드의 역할을 맡았고, 고질적인 틴오버와 무리한 플레이, 멘탈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허나 시간이 지나고 계속 발전한 모습을 보이면서, 17-18시즌에는 팀의 국내선수 중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차후가 더 기대되는 선수.
  • 권용웅(2R 19순위, SK): 서울 SK 나이츠에서 4시즌 동안 백업가드로 뛰다 은퇴 후 SK 나이츠의 유소년 지도자로 일하고 있다.

3.4.11. 2012 가을

  • 박경상(1R 4순위, KCC): 데뷔 시즌에는 리빌딩을 위해 최하위를 달리고 있던 KCC의 주전 가드로 활약했다. 팀 상황이 워낙 열악했던 터라 비교적 쉽게 주전 가드로 올라설 수 있었고, 훌륭한 개인 기량을 선보이면서 두자릿 수 평균 득점을 올렸다. 허나 시즌이 지날수록 주전 경쟁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17-18시즌 울산 모비스로 이적하면서 어느정도 재기에 성공한 모습이다.
  • 김지완(1R 6순위, 전자랜드): 1.5번 성향의 듀얼 가드이며, 준수한 득점력으로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에서 식스맨 역할을 맡았다. 꾸준하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16-17 이후 상무 입대가 기정사실화 되었는데.. 음주운전 사고로 인해 상무 지원이 불합격 되었다. 이후 현역으로 복무하다 19-20시즌 전자랜드에 복귀했고, 그 다음 시즌에 KCC로 이적했다.

3.4.12. 2014년

  • 허웅(1R 5순위, 동부): 허재 감독의 장남. 허재가 허웅을 거르고 김지후를 뽑았다. 타고난 슈팅 능력을 바탕으로 국대에서도 괜찮은 공격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동생인 허훈과 더불어 국대 발탁 논란에 중심에 섰지만, 농구팬들 대부분은 허웅의 발탁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평. 공교롭게도 허재는 김지후를 뽑은 이후 성적을 내지 못하면서 자진사퇴를 하게 된다.[17]
  • 김기윤(1R 6순위, KGC): 2017-2018시즌 안양 KGC인삼공사에서 부산 kt 소닉붐으로 트레이드 되었다. 트레이드 이후 압도적인 꼴지인 소속팀을 먹여살리는 소년 가장이 되었다. 다만 김우람, 박철호와 함께 팀내 트로이카를 이루는 유리몸이라 풀타임 출장 시즌이 거의 없다는게 문제. 18-19 시즌 이전, 비시즌에 박철호와 교통사고가 나며 현재 부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부상 정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문에 따르면 일단 18-19 시즌은 시즌 아웃으로 알려졌다. 사실상 은퇴.

3.4.13. 2016년

  • 천기범(1R 4순위, 삼성): 고교 시절 천재 가드로 명성을 날리고, 전세계의 유망주들이 출전하는 NBA 국경 없는 농구캠프의 올스타전에서 MVP를 받으며 기대감을 높였다. 허나 대학 4년 내내 발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로터리 픽으로는 뽑혔지만 프로에서는 애매한 기량을 보이다가 2022년 음주운전과 운전자 바꿔치기를 시도하며 완전히 몰락했다.
  • 성기빈(2R 17순위, 삼성): 대학 시절에도 천기범에게 밀려 잘 나오지 않았으니 사실상 이상민이 연대 라인 붙여준 거라는 소문이 농구 커뮤니티에선 파다하다.

3.4.14. 2017년

  • 허훈(1R 1순위, kt): 허재 감독의 차남이자, 허웅의 친동생. 압도적인 꼴찌인 소속팀을 먹여 살리고 있으며, 서울 SK 나이츠에 지명된 대학 동기 안영준과 유력한 신인왕 후보였으나 타이틀을 내주고 말았다. 이후 형인 허웅과 더불어 국대 발탁 논란에 중심에 섰다. 농구팬들 대부분은 허웅의 발탁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평에 비해, 허훈의 기용이 상당히 문제가 되면서 아시안게임 이후 국대에서는 빠지게 되었으나 2019 농구월드컵부터 거의 매번 주전포인트가드로 뛰고 있다.

3.4.15. 2019년

3.4.16. 2020년

3.4.17. 2021년

  • 이정현(1R 3순위, 오리온) : 선배 87 이정현과 동명이인에 띠 동갑 선배다. 오리온-캐롯-소노에서 거의 MVP급 활약을 선보이며 허훈 이후 제대로 된 가드라는 호평을 얻고 있다.
  • 김동현(1R 9순위, KCC)

프로에서의 커리어까지 종합을 해보면 연대 가드가 미세하게 우세하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연고전은 상황이 좀 달랐는데, 전반적인 선수 풀 구성에서 고려대에 밀리다 보니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하던 과거와는 다르게 2000년대부터 연고전 농구 전적이 비등비등해지더니 2010년대에는 2승 6패로 절대적인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2000년대 고려대가 그랬던 것처럼 고교 최고급의 가드를 긁어모은 것과는 다르게 2010년대 이후 지명된 연대 가드들이 선배들의 활약보다는 못 미친다는 점도 감안하자. 현재 그나마 이름값을 하는 연대 가드들은 2014 드래프트 동기 허웅과 김기윤 정도이며, 허웅도 허재의 혈통빨(...) 때문에 본인의 노력이 저평가를 받고 있고 김기윤도 사익스와 이정현이 빠져나가자 2015-16시즌의 활약상은 온데간데 없이 이원대와 박재한에게도 밀리는 등 짭태술이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민망한 경기력을 보이고 있다.

4. 한편 중대 가드들은 어땠는가?

4.1. 70년대

  • 최인선: 현역 시절 문서 참고 바람. 90년대 최고 명장. BQ가 뛰어났으며 영리했다. 기아자동차-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감독 시절 참고. 감독 퇴임 이후 해설도 역대급.

4.2. 80년대

  • 허재: 농구대통령. 전설 중의 전설. 중앙대-기아 역사상 최고의 올어라운드 플레이어. 한국농구의 마이클 조던. 뱀처럼 독하면서 독수리처럼 날카로웠다. 본업은 슈팅 가드. 포인트 가드슈팅 가드를 모두 했다.
  • 강동희: 마법사. 중앙대 역대 최고의 포인트 가드. 고등학교 시절까지 슈팅 가드였으나 인품속에 포인트 가드를 맡은 희생. 깡통 같은 몸매에 비해 머리와 패스가 뛰어났다. KBL 원년 MVP. 은퇴 후에도 지도자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농구계에서 영원히 퇴출됐다.

4.3. 90년대 (KBL 드래프트 이전)

  • 김승기: 터보. 중앙대 포인트 가드 중 최고의 힘장사. 수비에서 몸싸움이 강했으며 공격에서 3점이 강했다. 하지만, 기복도 덤.
  • 이세범: 마른 몸매로 인해 체력과 몸싸움은 열세였으며 공격력은 부족했지만 패스와 리딩은 준수.

4.4. KBL 드래프트 이후

KBL 시기 스윙맨(슈팅 가드 겸 스몰 포워드)도 가드를 맡았던 선수는 기재했다.

4.4.1. 2000년

  • 임재현(1R 2순위, SK): KBL의 스티브 내쉬. 듀얼 가드. 이 부분으로 인해 리딩은 부족했지만 반대로 스피드와 슈팅은 뛰어났다. 전형적인 공격형 가드로 SK 나이츠의 전성기와 KCC 이지스에서 2번의 플레이오프 우승을 했다. 지도자로서 15-16 시즌 중 오리온에서 은퇴 이후 코치로 플레이오프 우승을 함께했다.

4.4.2. 2001년

  • 황진원(1R 5순위, 삼성): 전형적인 세컨 가드 겸 스윙맨. 02-03 시즌 재정이 어려웠던 코리아텐더 돌풍의 주역. 투맨 게임이 가능하면서도 슈팅도 준수했다. KT&G 돌풍의 주역이기도 했고 은퇴 말년 동부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했다. 11-12 시즌 동부 프로미의 정규리그 우승 멤버.

4.4.3. 2002년

  • 박지현(1R 5순위, 동양): 스피드 가이. 하지만, 임재현과 함께 리딩이 부족하면서 비판이 많았다. 동양 오리온스/오리온스 시절에 좋은 평을 받지 못하면서 저니맨 신세. LG 세이커스에서도 경쟁체제로 많은 출전을 하지 못했다. 동부 프로미로 이적 이후 투맨 게임과 슈팅이 좋아지면서 한 때 리즈 시절을 보냈다. 11-12 시즌 동부 프로미의 정규리그 우승 멤버.

4.4.4. 2007년

  • 정병국(3R 2순위, 전자랜드): 듀얼 가드. 트위너라는 비판이 있지만 슈팅으로 롱런했다. 식스맨상 수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미스런 일로 KBL을 떠나게 되었다.

4.4.5. 2008년

  • 강병현(1R 4순위, 전자랜드): 모교 52연승 멤버. 00년대 중앙대 농구부 전성기 출신. 허재과 김영만에 이어 올어라운드 플레이어. 점프와 스피드가 뛰어났던 스윙맨 출신. 실제로 센터를 제외하고 모든 포지션을 맡았다. 대학 시절에는 스몰 포워드와 파워 포워드를 보았고 KBL 데뷔 시절은 포인트 가드를 보았지만 KCC에서는 슈팅 가드 겸 스몰 포워드를 기본으로 보았다. 상황에 따라 파워 포워드를 보았다. 우승반지도 2개 획득. 하지만, 큰 부상으로 인해 운동능력을 잃은 이후 좋은 활약을 보이지 못하지만 KGC와 LG에서 그래도 버티는 중.

4.4.6. 2009년

  • 박성진(1R 1순위, 전자랜드): 듀얼 가드. 하지만, 자기관리 실패와 잦은 부상으로 인해 날개를 펼치지 못했다.

4.4.7. 2010년

  • 박유민(1R 3순위, 오리온스): 포인트 가드. 준수한 패싱을 가졌다. 하지만, 무릎부상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다. 현재 스킬트레이너. 이름도 박찬성으로 개명.
  • 안재욱(1R 8순위, 동부): 포인트 가드. 제2의 강동희. 초중고대 직속 스승이었던 강동희와는 다르게 체력과 힘은 좋았지만 체격의 열세와 속도는 더 느렸다. 패스만은 좋았지만 자기관리 실패로 몰락.

4.4.8. 2011년

  • 김선형(1R 2순위, SK): 모교 52연승 멤버. 포인트 가드. 체공과 돌파는 역대급. 판타지 플레이어. KBL 데뷔 이전에 슈팅이 부족한 평이 있었지만 놀라운 발전. SK 나이츠의 암흑기를 끊은 장본인. 2014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10년대 최고의 가드.

4.4.9. 2012년 가을

  • 유병훈(1R 3순위, LG): 슈팅 가드 겸 포인트 가드. 세컨 가드로서 스피드는 느렸지만 준수한 수비력과 패싱을 가졌다. 2013-2014 LG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 멤버 겸 2014-2015 시즌 KBL 식스맨상 출신. 2019-2020 시즌 FA로 LG를 떠나면서 KCC로 이적했다.
  • 정성수(1R 10순위, kt): 포인트 가드. 신장의 열세와 수비력 부족이 있었으며 부상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 김현수(2R 3순위, kt): 듀얼 가드. 스피드와 슈팅이 준수하다. 전창진 감독의 혹독한 체력훈련과 슈팅교정과 함께 좋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kt의 암흑기로 인해 삼성으로 트레이드 되면서도 준수한 활약을 하고 있다.

4.4.10. 2016년

  • 박지훈(1R 6순위, kt): 듀얼 가드. 사실상 스틸픽. 드리블,패스,시야는 부족한 평이 있지만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속도와 속공을 중심으로 하는 활동량이 뛰어나다. 이적 이후 KBL 올스타 레벨로 성장했다.
  • 박재한(2R 3순위, KGC): 포인트 가드. 농구를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하는 과감성. 2016-2017 KBL 파이널의 활약을 보면 알 수 있다.

4.4.11. 2017년

  • 김국찬(1R 5순위, KCC): 스윙맨. 스피드는 느리지만 패스와 슈팅이 준수하다. 모비스로 이적 후 반짝 활약을 보여줬으나, 아직 믿고 기용할 수 있는 주전급은 아닌 상황이다.
  • 이우정(1R 7순위, DB): 듀얼 가드. 기복은 심하지만 스피드와 슈팅이 준수하다.

4.4.12. 2018년

4.4.13. 2019년

4.4.14. 2020년


프로에서의 커리어까지 종합을 해보면 중대 가드도 미세하게 우세하다고 할 수 있겠다. 허재와 강동희는 역대급이고 김승기 또한 선수로서 준수했으며 명 코치(수석코치) 겸 감독이 되었다. KBL 시대 이후 임재현과 황진원을 보면 각자의 장단점이 있지만 적어도 팀에는 보배였다. 박지현 또한 처음에는 식스맨이었지만 점점 베스트로서 발전했다. 중앙대 52연승 시절 강병현과 이후 팀에 알토란 레벨이 된 유병훈은 스카우트가 예전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팀에는 준수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2010년대 초중반 이후 중대 가드들의 입지가 예전만 하진 못하다. 청대 출신 가드들을 많이 입학시켰으나, 박지훈을 제외하고는 프로에서 기대만큼의 활약을 하지 못 하는 중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연대 가드보다는 아쉬움이 있어도 적어도 고대 가드에 비해 한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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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드래프트 당시 경희대 BIG3 + 박재현과 5픽인 이재도와의 차이는 확실히 크다는 평가였다.[2] 지명 후 허재 감독은 "고민 많이 했다.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김민구 자리에는 김지후가 더 낫다고 판단했다. 부자지간에 한 팀에서 뛰는 것도 좀 그렇다. 허웅이 서운해 할 수도 있겠지만, 동부라는 팀에 지명 받았으니, 순위에 연연하지 말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후에도 이 드래프트에 대해 허웅을 지명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맡고 있는 팀에서 뛸 경우엔 허웅에게도 팀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허웅이 프로 선수로 성장하는 것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지명을 포기했다고 밝히기도 했다.[3] 이로 인해 트레이드로 급하게 박승재와 이원대를 수혈했다.[4] 사실 시즌 전부터 1번 롤에 대한 준비는 하고 있었다.[5] 이충희의 플레이 스타일이 바로 3점슛 시대 이전, 고전적 스몰 포워드의 역할이었다.[6] DB 프로미윤호영스몰 포워드이다.[7] 90년대까지는 허재의 아성을 넘을수 없었고, 허재가 사고를 쳐서(음주운전) 국대에 없을 때는 운동 능력과 센스가 좋은 이상민이 강동희와 함께 백코트를 이뤘다. 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는 포워드 문경은이 2번에서 뛰었고, 김병철은 03년 하얼빈 아시아선수권 이후부터 짧은 기간 동안 활약하였다.[8] 신기성보다 고려대 1년 후배지만, 자퇴 후 바로 입단하는 바람에 드래프트 없이 97-98시즌부터 KBL에 데뷔했다. 97-98시즌 신인상 수상자임에도 다음 해 신기성이 드래프트로 같은 팀에 합류하면서 서울 삼성으로 트레이드된다.[9] 물론 KBL 초창기 시상식 기준이 엉망이었던 점은 감안해야 한다.[10] 전시즌 꼴찌였던 오리온스는 김승현이 가세하자마자 01-02 시즌 우승을 차지한다[11] 김동욱은 원래 00학번으로 입학해야 했으나 수능 점수 미달로 1년을 통으로 날렸고 뒤늦게 입학한 후에는 잦은 부상에 시달리면서 드래프트 당시 평가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12] 당시 주전은 김태술-임휘종-양희종-차재영-하승진 + 윤호영, 이광재, 함지훈, 정영삼[13] 공교롭게도 이순철 또한 연세대 출신이다.[14] 후에 삼성 썬더스에서 그의 등번호 10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한다.[15] 픽은 모비스에서 나왔지만 지명권 양도로 인해 KCC에서 선수시작을 했다.[16] 김동현과 손진우(211cm,센터)는 낙마했고, 김용우는 얼리로 나갔지만 3라운드에서 간신히 지명되었고 이후의 활약도 그리 좋지 못했으며, 박성훈은 스포츠 도박 가담으로 흑역사가 되었다.[17]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백업 슈팅 가드로는 뽑힐 법 하다 수준의 이야기지. 선발이 당연하다는 레벨은 아니다. 또한 국대 발탁에서의 문제는 키 185짜리를 포워드로 뽑았다는 게 문제(근본적으로는 허훈을 가드로 뽑았기 때문에 허웅을 원래 뽑혀야 할 포지션인 가드로 뽑아놓을 경우 포워드 라인이 휑해지기 때문에 꼼수성으로 보는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