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23:31:26

외치

미라/외치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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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외치-복원.jpg
[1]
혐오감을 느낄 수 있으므로 열람 시 유의[2]
외치
Ötzi | Oetzi | 아이스맨(Ice man)
본명 불명
출생 기원전 3275년
사망 기원전 3230년 (향년 45세)(추정)
알프스산맥 외츠 계곡
신체 160cm, 50kg대, O형
직업 사냥꾼
1. 개요2. 명칭에 관해3. 발견4. 신체5. 소지품6. 직업7. 사인8. 부족과 조상9. 최초의 문신 미라10. 매체11.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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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1년 9월 19일 이탈리아-오스트리아 국경 사이 알프스산맥의 외츠 계곡에서 발견된 약 5300년 전(청동기 시대 초기) 중년 남성의 자연 냉동 미라. 그의 생존 시대와 뛰어난 보존 상태 덕분에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며, 발견 당시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이때까지 발견되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미라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또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미라로도 손꼽힌다. 외치라는 이름은 발견 지역의 이름을 딴 것이며, 별명은 "아이스맨(Ice man)"이다. 시신뿐만 아니라 가죽옷, 나무 활 등 썩기 쉬운 유물까지도 5300년 전 상태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초기 청동기 시대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더없이 귀중한 유해이고 심지어 2016년 9월에는 외치 발견 25주년을 기념하여 한 연구팀에 의해서 목소리마저 디지털로 복원했다. 복원한 외치의 음성. 외치는 이탈리아 볼차노의 남(南)티롤 고고학 박물관(South Tyrol Museum of Archaeology)의 영하 7도로 유지되는 무균 냉동실에 보관되고 있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연구된 인간'으로서 계속 연구가 이루어진다.

2. 명칭에 관해


독일어 표기를 두고 그냥 '독일어'라 칭하기가 모호한 것이, 최초 발견지는 독일어권인 오스트리아 인근이며, 이탈리아를 포함해 확장 로마자(기호가 추가된 로마자)를 쓰는 다른 유럽 언어들도 'Ötzi'라는 표기를 주로 사용한다.

인터넷 내에서는 모국어에 관계없이 이 'Ötzi' 표기와 아래의 영어식 표기가 혼용된다. 한국어로는 발음의 괴리가 있으나, 로마자 표기 없이 '외치'로 부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외치의 발견 직후 500개나 되는 이름이 생겨났지만 외치로 통일되었다.

3. 발견

1991년 9월 19일, 독일인 등반가 부부인 헬무트 지몬과 아내 에리카 지몬은 하산 도중 알프스산맥 피나일봉(해발 3200m) 부근 외츠 계곡에서 얼음에 묻힌 채 상반신을 드러낸 시신 한 구를 발견했다. 당시 부부는 조난된 등산객의 시신이라 생각하여[3] 경찰에 신고하였고, 다음 날인 9월 20일 출동한 지역 경찰관과 인근 산장의 관리인이 전동 드릴도끼 등을 이용하여 시신을 꺼내려 시도했다. 하지만 악천후 때문에 발굴이 쉽지 않아 포기하였다.

당일 시체를 회수하기 위해 8명의 산악인으로 구성된 전담 팀이 외츠 계곡을 방문하여 시체가 묻힌 곳을 발굴하였고, 9월 22일 시체를 완전히 꺼내는 데에 성공했다. 발굴하던 도중 가죽으로 만들어진 옷과 구리 도끼 등 현대인의 것일 리 없는 물건이 나오자 팀은 시신과 함께 발굴된 물건들을 현지 대학교인 인스브루크 대학교로 보냈다. 9월 24일 해당 대학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소지품의 정밀한 분석이 실시되었고 그 결과 약 4000년 전 청동기 시대에 사망한 사람의 시신이라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이후 시신의 피부에서 추출된 세포 조직과 소지품 등에서 샘플을 채취해 더욱 정확한 탄소연대측정으로 조사해 보니 무려 5300년 전에 사망하였다는 놀라운 결과가 나와 당시 고고학계와 언론이 떠들썩했다.

발굴 당시 시신과 유품들은 도랑 형태의 두 바위더미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도랑 안의 시신 위로 3m 두께의 눈과 얼음이 들어찼고, 그 위로 빙하가 덮여 시신과 유품들이 수천 년이 넘도록 온전하게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시신은 빙하의 무게에 눌려 두개골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납작한 모습이 되었다. 엎드린 상태였고, 왼쪽 엉덩이와 허벅지 살은 야생동물에게 뜯어먹혀 유실된 상태였다.

4. 신체

2012년의 분석 결과 밝혀진 사실들은 다음과 같았다.
외치가 살던 시대에는 의료 기술이 매우 열악하여 부상이나 질환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사망했으며, 설령 치료해도 완전히 치료가 되지 않고 후유증을 갖는 사례가 많았을 것이다. 하술하겠지만, 외치의 몸에는 문신들이 엄청 많았는데, 적지않은 수가 치료 목적으로 환부에다 새긴 것들이다. 오랜 활동으로 인해 그의 몸이 성치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구가 진행되던 과정에서 외치의 고환은 발견했으나 음경 부분이 보이지 않아 성불구자설, 도난설 등 온갖 헛소문이 떠돌기도 했었다. 결론은 그냥 미라화되면서 쪼그라들어 보이지 않았던 것.

2023년 연구에서는 외치의 표본이 현대 DNA에 오염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외모 관련으로 "높은 피부 색소 침착, 어두운 눈 색깔, 남성형 대머리같은 표현형 특성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하였다.

5. 소지품

의류들은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재질과 원형을 알아내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 작은 도구들이 든 가죽가방과 바구니,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그릇.
  • 도구: 사슴뼈 바늘과 끈, 뼛조각, 연필 모양의 뼈 공구, 부싯돌, 풀로 만든 칼집에 든 돌단도.
  • 의류: 가죽모자, 조각난 염소 가죽을 이어서 만든 가죽바지, 가죽, 염소가죽으로 만든 코트, 풀로 엮은 망토, 가죽으로 만든 가죽 신발끈, 건초를 채운 사슴가죽 신발. 관련 기사와 복원 사진
  • 무기: 1.8m 길이의 주목나무 (잉글리쉬 롱보우와 재질이 같다. 미완성)과 산딸나무, 가막살나무로 만든 돌화살 14개(미완성품 12개, 완성품 2개)가 든 노루 가죽 화살통(손상이 심함), 그리고 뼈 손잡이로 된 구리 손도끼(유럽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금속 도구 중 하나로, 순도 99.7%).
  • 기타: 가죽끈에 꿴 상태의 버섯들을 가지고 있었다. 발화제 겸 연료인 말굽버섯(불이 잘 붙고 오래 탐)과 함께, 의료용으로 자작나무 버섯(얇게 썰어서 일회용 반창고로 사용할 겸 진통제로 복용. 근대에서야 그 효능이 알려짐)도 가지고 있어서, 5천년 전에도 나름의 의학지식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먹다남은 훈제 혹은 염장 고기의 뼛조각과 비타민 보급용으로 보이는 자두씨도 지니고 있었다.

6. 직업

CT촬영 결과, 상체에는 다부진 근육을 가지고 있었으나 무리한 흔적이 전혀 없는 대신, 무릎과 엉덩이의 고관절, 요추 하부, 발목에 관절염이 있었다. 특히 무릎과 고관절은 연골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이는 외치가 농업에 종사하지 않았고, 뭔가를 짊어지고 줄곧 걸어다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위장에선 여러 종류의 꽃가루[12]와 함께, 두 차례에 걸쳐 섭취한[13] 밀알, 채소, 야생 염소의 일종인 아이벡스 고기, 사슴 고기가 발견됨에 따라[14] 사냥꾼으로 종사하면서 물물교환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7. 사인

파일:외치의 죽음.jpg

최초 발견 시에는 동사아사로 추정했으나 이후 연구 결과는 타살. 외치는 왼쪽 어깨 아래에 박힌 돌화살에 치명상을 입었으며[15] 뒤통수에 심각한 타격을 받은 것이 직접적인 사인으로 밝혀졌다.[16] 또한 오른손에도 방어흔으로 추정되는 상처가 있었다. 그리고 함께 발견된 화살촉과 칼, 의류에서는 4명의 혈흔이 발견되어 현재는 그가 조직적 살인의 피해자이거나 전투 중 전사했을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8. 부족과 조상

위의 사실들로 인해 외치가 수렵 및 채집 생활을 하던 부족에 속해 있었는지, 아니면 그보다 더 발전된 농경 사회의 부족민이었는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지만, DNA를 추출하여 각 시대 유골들의 유전자와 비교한 결과, 농경 부족 사회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임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외치의 조상 또한 외치가 태어나기 2천년 전에 튀르키예에서 유럽으로 이주, 정착한 초기 농경부족인 초기 유럽 농경민(Early European-Farmer)[17]으로 확실시되었다.[18] 외치의 게놈 구성은 대다수가 유럽 초기 농경민에 해당하며, 나머지 소수는 서부 수렵채집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게놈 구성상 원시 인도유럽인을 나타내는 얌나야(Yamnaya) 성분[19]이 전혀 없어서 이들이 유럽으로 유입, 확산되기 전인 5300년 전에 사망했다는 점이 더욱 유력하다. 이는 당시 수렵부족이 신석기 시대의 농경 문화의 발달로 인해 농경부족에 점차 밀려났거나 순수한 수렵채집 생활을 포기하고 더 효율적인 농경문화를 받아들여 농경민족과 동화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착용하고 있던 의복과 소지품 다수가 양, 염소 등 가축가죽으로 만들어진 것과, 수렵 문화에선 나올 수 없는 구리 도끼, 위장에 들어 있던 음식물 중 고기 외에도 밀알이 많이 섞여 있던 점도 외치가 농경 사회 출신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다. 하플로그룹은 Y염색체 G2a[20][21]이며 함께 검출된 미토콘드리아 하플로그룹은 K1Ö.[22]

외치의 후손들은 주로 사르데냐시칠리아이탈리아 남부 지방에 거주한다. 단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와 게놈 성분, 그중에서도 초기 유럽 농경민 성분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밝혀진 사람들이 사르데냐 섬 주민들이다. 특히 섬의 남부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초기 유럽 농경민 성분이 유럽인 중에서 가장 높다.

9. 최초의 문신 미라

또한 외치는 문신이 새겨진 채 발견된 최초의 미라이다. 원래는 남아메리카의 친초로 미라가 가장 오래된 문신 미라였으나, 탄소측정상의 오류가 발견되면서 외치가 가장 오래된 문신 미라가 되었다. 해당기사

외치의 몸 구석구석에 새겨진 백여 개의 문신은 발견 당시부터 학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MRI와 엑스선 등으로 정교한 분석을 한 결과 외치의 등 아래 쪽 관절들의 마모 상태(특히 무릎 쪽)가 심한 것으로 보아 심한 관절염을 앓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이 문신들은 특히 관절염이 심했던 부위들에 몰려서 새겨져 있었고, 담석증이 확인된 부위인 하복부에도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문신을 주술적 치료 용도로 사용했음을 보여 준다. 2019년 6월 16일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선 문신을 침을 놓은 자국으로 해석했다.

10. 매체

11. 여담

  • 외치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오스트리아이탈리아가 치열한 법정 투쟁을 벌였다. 알프스산맥에 명확한 국경선을 그어놓은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 결국 항공사진 판독을 동원한 결과 외치의 발견장소가 '이탈리아 쪽으로 93m 정도 들어간 곳'으로 밝혀졌다. 이에 1999년 1월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를 떠나 이탈리아 볼차노시의 남티롤 고고학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2022년 기준 입장료는 성인 13유로, 학생 10유로이다. 남티롤 고고학 박물관의 슈퍼스타라 할 만하다. 로비 포함 3층까지 외치 미라와 그 소지품 등을 전시하고 발굴 과정과 보전 방식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학교에서 단체 견학을 자주 온다.
  • 외치를 처음 발견한 지몬 부부는, 외치가 엄청난 뉴스거리가 되고 발견장소가 관광지로 발전하자 주 정부에 보상을 요구했다. 주 정부는 '외치를 보관하는 비용이 더 든다'며 항소했으나, 오랜 법정공방 끝에 결국 법정은 지몬 부부의 손을 들었다.
    • 이후 공교롭게도 헬무트 지몬(67)은 산행을 떠났다가 조난당해 2004년 10월 23일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이후 외치와 관련된 6명의 학자, 구조대원 등이 잇따라 사망함에 따라 '아이스맨의 저주'라는 괴담이 떠돌기도 했다. 물론 외치 조사와 관련된 이는 7명이 아니라 수백 명에 이른다.
  • 외치는 문명인이라기보단 원시인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외치가 살던 시대에도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등지에는 이미 멤피스와 우루크 등 수만 명 규모의 도시와 거대한 신전들이 들어서 있었고, 문자도 등장했다. 인도의 인더스 문명도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외치가 살았던 유럽에서도 쿠쿠테니-트리필리아 문화라는 선사 시대 문화권이 초기 형태의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원시인은 석기 시대, 그것도 구석기 시대 사람인데 반해, 외치는 청동기 시대의 농경민 출신이라서 일반적인 원시인의 스테레오 타입과도 거리가 멀다. 사실 유럽 내에서도 부족 사회를 유지한 민족들은 북유럽에서는 9세기까지, 서유럽에서는 심지어 17세기까지[24] 거의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원시인 이미지에 가까운 생활을 유지했다.
  • 발견지의 근처인 오스트리아티롤 지역에서 헌혈한 3700명 분량의 남성 혈액 샘플을 토대로 Y염색체 하플로그룹을 채취해서 외치의 샘플과 대조한 결과, 19명이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단 하플로그룹이 일치해도 정말로 외치의 후손인지 아닌지는 알기 어렵다.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것은 그와 공통조상을 수천년 단위로 좁힐 수 있다는 점이다. 신문기사


[1] 생전의 모습을 두개골을 비롯한 남은 유해를 통해 추정해 재현한 모형.[2] 미라화한 외치의 시신. 전신 이미지 링크(이것도 혐오감을 느낄 수 있으니 열람 시 유의)[3] 해당 지역에서는 등산객 외에도 프랑스 혁명 전쟁 또는 나폴레옹 전쟁, 제1차 또는 2차 세계 대전 시기 낙오된 병사의 시신들이 발견된 사례가 종종 있었고, 지금도 발견되고 있다.[4] 사람의 두개골은 몇 개의 뼈가 합쳐져 만들어졌고 그 경계선이(봉합이라 불린다) 어느 정도 없어졌는지에 따라 나이를 추정할 수 있다. 치아 마모 정도, 골반 상태도 중요 단서.[5] 사지의 뼈 길이에서 신장을 산출해낼 수 있는 공식이 있다. 완전한 백골로 발견된 변사체도 이를 통해 생전의 신장을 추측할 수 있다.[6] 모발 관련 대립 유전자인 금발 유전자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 금발 발현 유전자는 시베리아 중부의 토착민인 고대 북유라시아인에게서 기원한 것이므로 5000년 전에 이 고대 북유라시아인의 후손인 원시 인도유럽인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유럽 전역에 확산되었다. 그래서 5300년 전 사망이라는 연대측정에 대한 신빙성을 더해주는 증거이기도 하다.[7] 2023년 분석 결과[8] 유전자 암호 분석결과 밝혀진 것이다. 이전에는 벽안이라 여겨졌고 생전 모습을 재현한 구형 모형도 벽안으로 제작되었지만 이는 잘못된 정보로 밝혀졌다. 눈동자의 색상을 결정하는 대립 유전자 6개 중 5개가 열성이었고 하나만 우성이었다. 참고로 대립 유전자 6개 모두가 열성이어야 갈색이 아닌 다른 홍채 색상을 가질 수 있다.[9] 이는 빵이나 시리얼 죽같은 탄수화물로 인해 여러 우식질환이 유발된 상태로 발달한 농경문화를 보여준다. 다만 당시 제분기술이 미비하여 이 음식들은 상당히 거칠었을 것이다. #[10] 이는 그가 사냥꾼이었기 때문에 오랜 수렵채집 생활로 얻은 일종의 직업병일 가능성이 높다.[11] 정상인의 늑골은 좌우로 12쌍이고, 10번째 늑골까지는 흉골과 연결이 되어 있지만, 11번째와 12번째는 부유늑골이라 하여 흉골과 연결되지 않는다. 외치는 이 12번째 부유늑골 두 개가 없었다.[12] 적어도 사망하기 48시간 전 내내 산속을 걷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13] 마지막 식사는 사망 30분 전[14] 대식가였다. 다만 이시대 땐 인류가 움직이는 활동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던 시기여서 대식을 했다. 멀리 갈 거 없이 조선시대 때도 지금보다 몸으로 움직이는 일을 많이 해서 사람들이 밥을 많이 먹었다.[15] X-레이로 2001년에 발견. 2007년 CT촬영으로, 뒤에서 견갑골을 뚫고 박힌 돌화살이 좌쇄골하대동맥을 파열시키고 쇄골 아래에서 멈췄다. 관련뉴스 이런 부상을 입으면 과다출혈로 사망하는데 10~15분 이상 버티기 힘들다.[16] 유럽아카데미 미라 및 아이스맨 연구소(EURAC)에서 2013년 발표. 기사[17] 유럽인의 게놈 구성은 3가지의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유럽의 토착 수렵채집민인 서부 수렵채집민(Western Hunter-Gatherer), 동부 수렵채집민(Eastern Hunter-Gatherer)과 서아시아에서 기원하여 보스포러스 해협을 거쳐 유럽으로 이주한 초기 유럽 농경민(Early European-Farmer), 그리고 고대 북유라시아인(Ancient North Eurasian)과 동부 수렵채집민(사실 동부 수렵채집민의 직계조상도 고대 북유라시아인이다)에게서 기원하여 현재의 드네프르 강과 돈 강 일대의 초원에 머무르다가 기원전 3000년경부터 유럽 전체로 확산된 원시 인도유럽인에 해당하는 초원 목축민(Steppe-Herder)으로 이 세 가지 기원이 유럽인의 유전자에 기여한 부족들이다. 초기 유럽 농경민 자체는 서아시아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랍인이나 이란인으로 대표되는 서아시아 사람들도 이 성분이 매우 높게 나온다. 괴베클리 테페나 예리코, 차탈회위크와 같은 신석기 시대 초기의 건축물 유적을 남긴 민족들도 이들 계통으로 추정된다.[18] 외치의 조상은 유럽으로 이주하기 이전에는 지금의 흑해 동남부의 아나톨리아, 그것도 폰토스 동부 고원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9] 서유럽이든 동유럽이든 상관없이 현대 유럽인들은 모두 이 성분을 가지고 있다![20] 현대에 Y염색체 하플로그룹 G2a을 보유한 사람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장소는 캅카스산맥 일대이다. 그의 조상이 아나톨리아에서 이탈리아로 이주한 것으로 밝혀진 것도 이 결과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21] 서브클레이드는 G2a2a1a2 또는 G-L91[22] K1f 계열로, 미토콘드리아 하플로그룹은 기본적으로 여성을 통해서만 자손에게 전해지며 외치는 남성이므로 자손에게 전할 가능성이 없기에 학자들이 그를 위한 고유의 독자적인 서브클레이드를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희박한 확률로 남성도 미토콘드리아 DNA를 자손에게 남길 수 있다는 이론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그러나 희박한 확률임을 감안하면 여전히 보유자가 외치 하나밖에 없는 유전자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지중해 일대에 골고루 분포하는 하플로그룹이다.[23] 이외에도 냉동인간에 대해 묘사한 영화인 데몰리션 맨도 수록되었는데 일부 내용이 바뀐 채로 수록되었다.[24]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 지역 주민들이 이랬는데, 시대가 시대라서 철로 된 도검과 갑옷, 석궁을 갖추었다는 것과 기독교를 믿었던 것 말고는 거의 선사 시대 원시인들과 다름없이 살아서, 이미 종교 개혁이 일어나는 등으로 근대적인 문명 수준을 갖춘 로우랜드 지역 주민들에게 철저히 개무시당했다. 이들이 로우랜드 지역과 함께 하나의 스코틀랜드인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은 통일 영국의 초대 국왕이었던 제임스 1세가 브리튼 제도 주민들 간의 융화를 추진하면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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