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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트 베르히톨트


<colbgcolor=#000><colcolor=#FFCC21,#deab00> 오스트리아 제국 외무부 장관
레오폴트 베르히톨트
Leopold Berchtold
파일:leopoldberchtold.jpg
본명 Leopold Anton Johann Sigismund Josef Korsinus Ferdinand Graf Berchtold von und zu Ungarschitz, Frättling und Püllütz
레오폴트 안톤 요한 지기스문트 요제프 코르시누스 페르디난트 베르히톨트 폰 운트 추 웅가르시츠 프레틀링 운트 퓔뤼츠 백작
출생 1863년 4월 18일
파일:오스트리아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 제국 파일:포어아를베르크, 빈, 잘츠부르크의 기.svg
사망 1942년 11월 21일 (향년 79세)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헝가리 왕국 쇼프론
역임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스라이타니아 외무부 장관(1912년 ~ 1915년)

1. 개요2. 생애
2.1. 제국 외무장관이 되기 전2.2. 외무장관이 되다.2.3. 제1차 세계대전
2.3.1. 사라예보 사건2.3.2. 사라예보 사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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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외무부 장관으로 오헝제국의 동진 정책을 주도했다. 제위/왕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직후엔 강경대응으로 일관하며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와 함께 전쟁계획을 입안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제국 외무장관이 되기 전

1863년 오스트리아 제국 지기스문트 자무엘 콜로만 폰 베르히톨트 백작(Sigismund Samuel Koloman von Berchtold, 1834-1900), 요제핀 가브리엘라 폰 운트 추 트라우트만스도르프 백작 부인(Josephine Gabriela von und zu Trauttmansdorff,1835-1894) 사이에서 1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베르히톨트는 어린 시절을 모라비아에 있는 부흘로비체 성에서 자랐다. 베르히톨트 가문은 티롤 출신이였고 베르히톨트 가문이 국내에서도 부유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가문인지라 베르히톨트는 집에서 개인 과외를 받으며 법학, 정치학을 공부하고 체코어, 슬로바키아어, 헝가리어를 배웠다. 1887년에 국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베르히톨트는 그의 학력, 귀족 가문의 배경, 신사다운 외모, 품위 있고 예의 바른 태도는 주변 사람들에게 큰 호감을 사며 빠르게 승진하였다. 1893년부터 외무부에 입각하여 프랑스, 영국, 러시아 제국의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러시아 대사 시절에는 친러 인사이자 제국 외무장관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 남작(Alois Leopold Johann Baptist Graf Lexa von Aehrenthal)과 인맥을 쌓으며 눈도장을 찍었고, 1912년 폰 에렌탈이 평소 앓던 지병악화를 이유로 외무장관직을 사임하자 베르히톨트가 후임 외무장관직에 앉게 되었다. 이는 당시 유럽에서 최연소 외무장관이었다. 다만 본인이 원해서 맡은것은 아니였다. 군대와 외교에 대해서 아직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직 준비가 안되었다고 생각했기에 마지못해 수락한것이었다.

2.2. 외무장관이 되다.

제국 외무장관으로서 베르히톨트의 제국이 평화를 유지하고, 불간섭 원칙을 고수하길 원했다. 그의 반세르비아 성향은 폰 에렌탈 남작에 영향을 받았고 따라서 그의 정책을 이어받아 동진정책에 독점적으로 초점을 맞추었다. 제국의 현상 유지를 위해서는 발칸 반도의 확보라고 생각한 베르히톨트는 보스니아를 발판으로 삼아 발칸 반도에서의 세력 확장을 추구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발칸 반도에 영향령을 확대하려는 러시아 제국과의 충돌을 야기했다. 러시아는 1905년일본에게 패한 뒤에야 발칸반도에 다시 관심을 쏟기 시작했는데, 당시 러시아 대사로 근무했던 베르히톨트로서는 러시아를 경계하게 되었다.

1912발칸 전쟁이 발발하였고, 베르히톨트는 세르비아가 아드리아 해로 세력을 넓히는 걸 견제하기 위해 알바니아의 독립을 지지했다. 이후 자신과 같은 반세르비아 인사이자 1년 전 제국 참모총장을 사임한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이하 콘라트)를 다시 참모총장으로 불러들인다. 러시아 제국은 1905년 일본에 패한 뒤에야 남동부유럽에 다시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긴장관계는 더욱 높아졌다.

2.3. 제1차 세계대전

2.3.1. 사라예보 사건

1914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자 베르히톨트는 곧바로 전쟁을 시작하길 원했던 콘라트를 만류하였다. 베르히톨트는 전쟁 불가피성을 인식하면서도 순서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일단 세르비아에 반오스트리아 조직을 해체하고 피격사건의 책임자를 축출할 것을 요구하는 게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선전포고는 그 다음이었다.

베르히톨트가 가장 우려한 것은 세르비아와 전쟁을 벌이면 범슬라브주의를 주창하는 러시아가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었다. 세르비아하고만 전쟁을 벌인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있겠지만 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도와 가세한다면 전쟁이 국지전에서 그치지 않고 최악의 경우 장기전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매우 높았으므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독일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베르히톨트는 독일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헝가리의 외무 보좌관 알렉산더 폰 호요스 백작(Alexander Graf von Hoyos, 1876-1937)을 베를린에 보냈다. 호요스는 베르히톨트가 작성하고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서명한 서한을 들고 베를린에 도착했고, 베를린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는 7월 5일 포츠담 궁을 찾아 빌헬름 2세와 오찬을 하면서 국서를 전달하고 황제의 의중을 물어보았다. 빌헬름 황제는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침공계획에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면서 내각과 의논해 보겠다고 했다. 빌헬름 황제는 그날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총리와 참모총장 등을 불러 자신의 견해를 물어보았다. 총리와 군부는 황제의 생각에 모두 동의했다. 베트만 총리는 황제의 대답을 ‘백지 수표’(blank cheque)나 다름 없다고 보았다. 즉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벌이면 독일은 무조건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판단에는 오스트리아의 정당성이 명확하므로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빌헬름 황제의 낙관적인 판단이 바탕이 되었다. 그러다 군부는 빌헬름 황제와 생각이 달랐다.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된다고 본 것이다.

이후 사건 수사를 통해 검은 손의 배후가 세르비아 왕국이라는게 명확해지자 이를 오헝 제국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오헝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에 압력을 넣기 시작했으며, 제국에선 내각과 군부가 참여한 합동회의가 열렸다. 콘라트를 필두로 강경파들은 세르비아를 기습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베르히톨트는 콘라트를 지지하였다. 이에 티서 총리는 전쟁에도 절차가 있으며, 개전 이전에 합법적 명분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날 회의에서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ultimatum)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최후통첩은 전쟁으로 가는 선행단계에 불과했다. 세르비아가 수용할 수 없는 강력한 요구가 들어가야 했다. 수차례 문구 수정을 거쳐 최종 문서가 7월 19일에 마련되었다.[1] 1914년 7월 23일에 베르히톨트는 다음과 같은 총 10개의 최후통첩안을 완성하여 문서를 세르비아로 보내고 세르비아 정부에게 48시간 안에 답장하라고 요구했다.
세르비아 왕국은 아래와 같은 사항을 실천에 옮긴다.
1.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증오심이나 경멸감을 조장하거나 그 영토의 보존에 반대하는 경향을 띤 일체의 출판물을 금지한다.
2. '인민의 방어'와 같이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반대하는 선전활동에 종사하는 모든 단체들을 즉시 해체하고 그 선전수단들을 몰수한다.
3.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반대하는 세르비아 내의 공공 교육 활동을 지체 없이 제거한다.
4.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반대하는 선전활동에 가담한 인물들을 군대 및 행정 조직 전체로부터 축출한다.
5.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의 영토 보존에 반대하는 전복 활동의 제거를 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 대표의 세르비아 내 활동의 협조를 수락한다.
6. 6월 28일의 음모에 가담한 방조자들에 대한 사법절차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의 대리인들이 참여토록 한다.
7. 사라예보에서의 정부 조사단의 결과를 손상시킨 보야 탄코비치 및 밀란 치가노비치 두 사람의 관리를 지체없이 체포한다.
8.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국경을 넘는 무기 및 화약류의 불법거래를 방지하고 사라예보 사건 당시 무기 거래를 방치했거나 방조한 관리들을 처벌한다.
9. 6월 28일 범죄 이후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적대적 발언을 자제하지 않았던 세르비아 고위 관리들의 정당화할 수 없는 발언에 대한 설명을 촉구한다.
10. 앞서 제시된 조치들의 집행에 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에 지체 없이 보고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7월 25일(토요일) 저녁 6시까지 세르비아의 답변을 기대한다.

세르비아로서는 적국 황위 계승자를 죽였다는 원죄를 안고 있었기에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 가운데 가능한 한 요구를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최후통첩 10개 항목 가운데 주권 침해요소가 강한 2개 항목을 제외하고 모두 수용했다 세르비아 정부는 범인 심문 및 다른 사항은 받아들이겠다고 했지만 5항과 6항처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정부가 자국의 주권을 침해하는것에는 거부했다. 테러 배후인물인 탄코시치 소령도 다뉴브사단 감옥에 수감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막지 못했다. 황태자를 잃은 제국의 분노가 워낙 강했기 때문이었다.[2]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의 조건부 승낙은 납득할 수 없다면서 7월 25일에 국교단절을 선언했다. 망설이던 헝가리 수상 티서 이슈트반프란츠 요제프 1세의 반대를 무릅쓰는 형태로 7월 28일에 세르비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베르히톨트가 콘라트에게 선전포고를 언제 해야 될지 질문했을때, 콘라트는 동원이 완료되고, 군사 작전이 준비가 되는 8월 12일에 선전포고를 이루어져야 된다고 말했다. 제국군은 2주정도 지나야 작전할 준비가 끝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베르히톨트는 외교 상황의 급박함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반대했다. 베르히톨트는 곧바로 동원 명령서를 황제에게 내밀었고, 황제는 이를 승인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2.3.2. 사라예보 사건 이후

1915년 외무장관직에서 사임하였으며, 제국이 해체된 후에는 헝가리에서 살다 1942년 사망했다.
[1] 세르비아가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있어야 선전포고를 개시 할 명분이 마련되기 때문이었다. 베르히톨트는 내심 세르비아가 최후통첩을 무시하길 바란 것이다.[2] 다만 의회와 군부는 사건을 빌미로 세르비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어 영광을 되찾고 발칸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계산도 있었다. 제국의 신민들은 황태자의 죽음을 간접 지원한 세르비아에게 크게 분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