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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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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계급별 복장

1. 개요2. 역사
2.1. 탄생과 활약2.2. 퇴출
3. 비교: 타국의 군복4. 매체
4.1. 패트리어트4.2. 시드 마이어의 문명
5. 기타6. 사진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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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드코트(Redcoat)란 과거 영국 육군해병대가 입던 붉은색 군복 혹은 그 군복을 입은 영국 육군 전열보병대를 말한다. 영국 육군 보병의 별명이자 한 때 세계를 주름잡던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British Empire)의 아이콘이라 할만하다.

2. 역사

2.1. 탄생과 활약

그 기원은 청교도 혁명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만들어진 신식 군대(New Model Army)이다. 당대에 상대적으로 값이 싼 코치닐 염료를 활용하였기에 붉은색으로 복식을 물들였고, 몽골의상 → 폴란드 기병군복 → 귀족옷의 단계를 거쳐 이전부터 서유럽 군인들의 군복으로 자리하게된 프록 코트를 물들여 입었다.

영국 해군에 파견보내던 육군 연대를 아예 해군에 배속시켜 만든 영국 해병대 역시 육군 보병의 레드 코트를 입었으며, 이러한 색상덕에 조리시 붉은색이 되는 랍스터가 그들의 멸칭으로 따라붙게 되었다.

물론, 모든 육군 병력이 붉은색 군복을 입진 않았고, 라이플 연대는 흑록색 군복을 입는 등 일부 부대는 다른 색상의 피복을 입기도 했으나 소수였다.

특히 17~19세기 전열보병들 간의 선형 전투에서 타국에서는 기본적으로 최소 3열로 전열을 갖춰 전투를 치르는 데에 비하여 영국군은 특이하게 2열의 얇은 전열을 구사했는데 이는 영국군이 사격과 속사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타국에서는 1열 사격 2열 사격준비 3열 재장전의 단계를 거쳐 사격에 임했는데, 이는 전장식 화기 특유의 느린 재장전 속도 때문이었다.

게다가 병사들이 사격에 쓸 재료인 부싯돌과 화약은 턱없이 비쌌기에 사격을 연습한다 하더라도 부싯돌을 끼울 곳에 나무조각을 끼워넣는 식으로 사격연습을 했다, 다만 이 대중적인 인식에 대해서는 이견이 강한데, 당대 유럽 각국은 염초밭 개량을 거듭해 훈련과 실전에서 사용하기에 충분한 초석을 생산하고 있었다. 유럽 전역을 화약연기로 덮은 나폴레옹의 대육군과 영국함대와 맞붙은 프랑스함대의 화약은 인도에서 수입한 게 아니다.

따라서 사격전보다는 백병전을 중시할 수 밖에 없었으므로 (종종 5~6열도 더 넘어갈만큼) 종심이 깊은 전열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영국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인도를 확보한 이후에는 엄청난 양의 초석 광산을 통해 막대한 화약을 확보하여 실탄 사격연습을 할 수 있었으며, 특히 속사를 연습할 수 있었다. 타국에서는 3열로 구성된 병력이 느린 속도로 사격전을 감행할 때 영국군은 2열로 구성된 병력들이 더 빠른 속도로 사격에 임했다. 게다가 이론상 같은 병력을 3열로 나누어 순차사격 하는 것보다 2열로 나누어 순차사격을 하면 탄환의 밀집도가 1.5배 올라간다. 영국군은 거기에 더해서 2열이 동시사격을 해대기도 했다. 이렇게 되니 3열 이상으로 나뉘어 순차사격을 하는 적보다 압도적인 화력을 낼 수 있었던 것. 이는 병사 개개인의 숙련도와 정예도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영국군은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으로도 적의 대병력을 맞이하여 대등한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이런 영국군 특유의 가늘지만 야무진 붉은 전열을 가리켜 '씬 레드 라인'이라고도 한다. 앞서의 특성 때문에 영어 숙어로 '특정 지역, 주의를 지키는 용감한 소수인들'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여담으로 동명의 전쟁영화도 있다.

또한 영국의 경제력도 중요한 부분이지만, 또다른 원인은 영국이 섬나라라는 점이다. 섬나라 특성상 해군만 강력하면 육군의 수가 적어도 국토 방위를 할 수 있고, 실제 중세 이후에 영국 본토가 적국에 침범당한 것은 한번도 없었다. 국방예산은 한정되어 있는데 영국은 본토 방어와 식민지 유지를 위해서도 많은 해군이 필요했으므로, 항상 해군에 많은 투자를 하고 상대적으로 육군의 병력수가 적었다.

1645년 영국의 첫 상비육군이라 할 수 있는 신식 군대의 전병력은 22,000명에 불과했다. 비슷한 시기(1631년) 영국보다 국력과 인구가 훨씬 못미치는 스웨덴30년 전쟁에서 전병력도 아니고 한 전투에서 동원한 병력이 2만 4천명이었다. 7년 전쟁이 일어난 18세기 중반을 예로 들면 영국이 동원한 전병력은 약 30만명인데 반해, 프랑스는 100만명에 달했고,[1] 프랑스 혁명 전쟁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난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으로 예로 들면 1793년의 영국군 전병력은 고작 4만명에 불과했으며 육군 병력이 최대로 늘어난 1813년에는 25만명이었다. 반면 동시기 프랑스러시아 제국이 유지한 육군은 최대 60만명을 넘었다.

즉, 타국보다 병력수가 적으니 실사격 훈련비용도 부담이 적었다. 또, 레드 코트들은 식민지 주둔군이 많았고, 식민지에서는 본토보다 교전기회가 많았으므로 실전경험도 본토 방어가 주임무였던 타국군대보다 풍부한 편이었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부족한 병력 수를 질적인 우위로 메꾸려 했던 것이다.

다만, 병사들의 자질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으나 그에 비해 이들을 이끌 장교진은 대륙 여타 국가보다 특출날 것이 없었다.[2] 공병이나 포병 등 기술병과를 중심으로 사관학교 및 병과학교를 설치하였을 뿐 장교 대다수를 차지하는 보병이나 특히 기병은 여느 국가가 그러하듯 매관제로 충원한 까닭에, 이들 다수 장교는 현장에서 구르거나 비정규적 경로로 실력을 닦아야 했으며 군사적 재능 없이 현찰 박치기로 낙하산 임명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3] 장교 임명을 왕의 커미션을 받았다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다. 그래서 장교가 영어로 'Commissioned Officer'인건가?[4] 그 결과, 이러한 병사들을 이끌 장교들의 실력이 들쭉날쭉했다. 존 처칠이나 아서 웰즐리, 로버트 크로퍼드 등 유능한 장군도 여럿 배출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취약점에 대한 기습적 양동작전도 못하는 무능한 인사가 동시에 복무하기도 했다. #반도전쟁 중 스페인 동부 영국군의 삽질

평시의 레드 코트들은 군인으로서 종신 서명을 한 훈련되고 규율잡힌 직업군인들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예산 절감을 위하여 평시 상비군을 최소화하다보니 큰 전쟁이 일어나면 비로소 육군을 급격히 확대했는데, 이럴 때는 모병관들이 도시를 돌면서 노숙자를 강제 입대시켰으며 범죄자들도 형을 면제해 준다는 조건으로 입대시켰다.[5] 물론 이렇게 임시 모집한 병력은 병이든 부사관이든 장교든 간에 전쟁이 끝나면 바로 내보냈다. 이런 질 낮은 영국 병사들도 빨간 코트를 입었으니 레드코트라 불렸지만, 당연히 급편한 병력이니만큼 규율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았기에 약탈탈영을 저지르고는 하였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 전쟁반도 전쟁에서 영국의 동맹이라 할 수 있는 스페인 민간인을 무차별로 약탈했고,[6] 매년 탈영병이 수천 명씩 나와서 탈영병들이 영국군 보급고를 조직적으로 습격한 일도 있을 정도였다.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인도 주둔군의 사령관으로서 마이소르 왕국마라타 동맹을 상대로 수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는데, 그러다가 반도 전쟁에서 스페인 전선 영국파병군 사령관이 되어 인도 주둔군과 달리 질 낮은 병사들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들이 하도 약탈과 탈영을 해댄 탓에 식민지 주둔군만 지휘하다가 이들을 지휘하게 된 아서 웰즐리는 학을 떼고 싫어했고, 상황을 통제하고자 약탈한 병사들을 교수대에 보냈다. 아서 웰링턴은 이들에 대해서 "사생아 낳은 새끼들과 경범죄자들, 술마시려고 입대한 놈들. 쓰래기들이다."(enlist from having got bastard children – some for minor offences – some for drink", "the scum of the earth")라는 애증 섞인 평을 남겼다.

다만, 여기에는 어느 정도 과장과 도식화가 섞여들어갔음을 고려해야 한다. 일단 당대 영국이나 유럽대륙의 다른 국가들이나 병사들이 주로 하층민이었던 점은 동일하였고 감언이설에 혹하거나 강제로 징집된 점은 별반 다를 것 없었다. 오히려 이 무렵 영국군이나 프랑스군은 다른 국가들보다는 규율이 잘 잡혀 있었고 병사들 수준도 나름 믿을만한 편이었다. 우선 나폴레옹 전쟁 시기 스코틀랜드의 직조업이 붕괴해 많은 청년 기술자들이 실업자가 되어 영국군에 입대했는데, 이들로 편성한 하이랜더 연대는 제대로 된 군인들이었고 아서 웰즐리도 이들 부대를 높이 평가했다. 또한, 요크 공작 프레더릭 어거스터스의 개혁 이후 체계화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고,[7]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민병대나 나름 중상류층인 요먼으로 구성된 요먼대 등 국립 지역방위군 겸 예비군으로부터도 자원병 형식으로 부대와 병력을 대거 충원받았다.[8] 웰링턴 공작이 마라타 동맹을 상대했던 아사예 전투를 평생 더 자랑스러워 했다며 비교당하는 워털루 전투에서조차 프랑스군이 약체화한 만큼이나 영국군도 약체화한 군대로도 버티며 싸웠다는 사실에서도 보듯 고작 부랑자와 죄수, 어중이떠중이의 군대는 결코 아니었다.[9] 약탈과 탈영 문제도 편향적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막상 동시기 다른 군대들이 약탈에 소극적이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으므로 영국군만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프랑스군조차 약탈로 악명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국가적 차원에서 "약탈 경제"를 시행한 결과물이 프랑스 제1제국의 비상과 몰락이라는 분석이 있을 정도이다. #재정 적자, 아시냐 지폐, 그리고 나폴레옹 오히려 비토리아 전투 당시 웰링턴의 지시로 약탈자를 처형한 흔적을 본 프랑스군 장교들이 "영국군은 규율이 엄정하구나!"라고 '감탄'했다는 일화도 있다.

2.2. 퇴출

레드 코트를 전장에서 밀어낸 것은 역시 시대가 바뀌면서 원색의 군복이 더이상 전장 환경에 맞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총의 명중률도 좋지 않고, 대열 유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화려한 원색의 군복이 오히려 실용적이었는데, 이는 전투가 시작되면 사방에서 소음이 발생하고 당대의 흑색화약 특유의 엄청난 연기로 시야가 가려지는 등 혼잡한 상황에서 통일된 복색 덕에 오인사격을 줄일 수 있었고, 부수적으로 하층민 출신이 많은 병사들 대상으로 당시 신사들이나 입는 형태의 화려한 옷을 입혀주어 사기진작 효과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10]

그러나 이미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도 이러한 원색 복장이 그만큼 불리한 점도 많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예컨대 인도주둔군은 자기들 복장을 일부러 더럽히거나 염색하여서 카키색 계열로 바꾸기도 하였고, 나머지 본토주둔군이나 유럽대륙 원정군에서도 경보병대(특히 라이플 연대)는 암녹색 군복을 사용하는 등 저시인성 복색을 채용하였다. 이러한 추세는 보어 전쟁에서 눈에 잘 띄는 붉은 레드 코트가 보어군의 좋은 과녁이 되면서(...) 급진전하여, 영국 육군은 레드 코트는 물론 흰색 장구들까지 전면적으로 폐지하였고 전투복을 카키색 군복으로 교체하며 레드 코트는 예복으로 전용된다.

보어전쟁 당시 벌어진 마주바 전투를 다룬 영국 영화 《마주바 전투》에서도 이 점이 확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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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에 배치된 영국군은 척 봐도 잘 드러난 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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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어군은 갈색 옷을 입고 바위에 숨으면 잘 보이지 않은 대조적 모습이다.

이러다보니 이 패전을 교훈삼아 카키색 전투복으로 바꾼 것이 나중에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하늘색 군복의 프랑스군은 물론이고 독일군보다도 사망 비율을 줄일 수 있었던 중요한 결정이었다. 개전 시점 독일군과 프랑스군의 전투복을 보았을 때 독일군은 피켈하우베의 높게 솟아 있는 뿔 장식이 눈에 매우 잘 띄었고, 프랑스군은 은회색 반합을 맨위에다 결속하는 군장 구조상 눈에 잘 띄었다.[11] 그래도 독일 군복의 녹회색(feldgrau)은 준수한 위장색이었지만, 프랑스 군복의 수평선 청색(horizon blue)은 레드코트보다는 나았지만 여전히 위장성이 떨어져 당시 프랑스 내에서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장성들이 프랑스 육군의 상징이라며 전쟁내내 유지되다 전간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영국군과 유사한 카키색으로 바뀌었다.

육군 뿐 아니라 해병대 역시 19세기 말에 육군과의 구분 및 해군 소속임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검은색으로 옷을 바꿨고, 지금도 정복 색상을 검정으로 유지하고 있다.

3. 비교: 타국의 군복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전열보병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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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 군복의 영국 육군과 대조되게, 혁명기와 제정기 프랑스 육군은 푸른 군복을 입었고, 혁명기 이전 부르봉 왕조 때에는 흰색 군복을 입었다. 마찬가지로 부르봉 왕가 시기의 스페인 육군 역시 흰색을 입었으며, 오스트리아 육군의 군복도 흰색이었다. 프로이센 육군은 특유의 군청색, 흔히 프러시안 블루라고도 알려진 색의 군복을 입었으며, 러시아 육군은 표트르 대제 시대에는 녹색, 이후 18세기에는 영국과 흡사한 붉은색, 나폴레옹 전쟁기에는 다시 녹색의 군복을 입었다. 그밖의 국가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열보병 문서 참고.

4. 매체

근대 유럽을 배경으로 한 전략 게임에서는 거의 항상 등장한다. 미국 독립전쟁이 배경인 창작물에 항상 등장한다.

4.1. 패트리어트

영화에서 묘사되는 캠던 전투[12]
(대륙군이 접근하는 영국군에게 선제 사격을 가한다. 가브리엘이 뒤를 돌아보자 아버지 벤저민이 있다.)

가브리엘 마틴: 돌아가지 않을 거에요.[13]
벤저민 마틴: 그래. 나도 그럴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벤저민, 전장을 바라보며 대륙군의 지리멸렬함에 한숨을 쉰다.)

벤저민 마틴: 게이츠 저놈은 빌어먹을 병신이야. 영국 육군에 너무 오래 있었어. 탁 트인 야지에서 레드 코트랑 정면으로 맞붙으려고 하다니……. 이건 미친 짓이야.[14]

(영국군, 더 가까이 접근하여 사격을 개시한다. 일제사격 한방에 대륙군의 사상자가 대거 발생하며 전열이 무너지고, 영국군의 기세에 눌린 대륙군은 패퇴하기 시작한다.)

벤저민 마틴: 이 싸움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진 거야.

(영국군의 포격과 기병 돌격으로 전열이 무너진 대륙군은 버티지 못하고 혼비백산하여 후퇴한다.)

다만, 실제 캠던 전투는 저것과는 좀 다르게 진행되었다. 당시 대륙군은 병력 수와 포문 수에서 영국군보다 2배 정도 많았으나 병력의 질은 영국군이 좀 더 좋았다. 전통적으로 영국군은 우익에 정예를 배치하는 경향이 있었고, 당시 대륙군 지휘관이었던 게이츠도 영국군 장교 시절 하던 대로 우측에 전투경험이 있는 정예를 배치했다.[15] 문제는 그 결과 좌측에 배치한 게 전투경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새파란 민병대 출신 신병 뿐이었다는 것이다.[16] 반면, 대륙군 좌익에 맞서는 영국군 우익은 바로 그 레드 코트였으며, 대륙군 우익에 맞설 영국군 좌익도 왕당파 민병대가 좀 섞이기는 했어도 기본적인 훈련도와 실전경험은 있었다. 양군이 교전에 들어가자 오합지졸이었던 대륙군 좌익은 영국군 우익에게 신나게 얻어터졌고, 전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상당수의 병력이 죽거나 도망쳐 버렸다. 반면 영국군 좌익은 대륙군 우익과의 교전에서 다소 밀리긴 했지만 일단 버티고는 있었다. 대륙군 좌익이 모조리 털린 후에도 전장에 남은 대륙군 우익은 열심히 버텨봤지만, 영국군 좌우익의 포위공격을 받다가 영국군 기병대에 뒤통수를 거하게 맞아 완전히 와해되었다. 물론 결정적인 패인이 훈련도 부족이었다는 점과, 기병대의 공격이 전투의 피날레를 장식했다는 점 자체는 영상과 동일하다.

4.2. 시드 마이어의 문명

문명 4문명 6에서 잉글랜드 문명의 고유 유닛으로 등장한다. 정확히는 문명 6에서는 지도자 빅토리아의 고유 유닛.
  • 문명 4
    르네상스 시대 유닛인 소총병을 대체하며 화약 유닛을 상대로 전투력 보너스를 받는다. 본작의 르네상스 시대에는 소총병이 주력 유닛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고 수류탄 투척병이 카운터로 설계되어 있는데, 소총병도 화약 유닛이고 얘네도 마찬가지이므로 화약 유닛을 잘 잡는다는 건 동시대에 적수가 없다는 뜻이다. 다음 단계의 유닛인 보병은 한참 뒤에 나오므로, 활용할 수 있는 기간도 길다.
  • 문명 6
    산업 시대의 전열보병을 대체하며 전투력이 높고 잉글랜드의 수도가 없는 대륙에서는 전투력 보너스를 추가로 받으며 상륙 시 행동력을 추가로 소모하지 않는다. 문명 4에서와 마찬가지로 보병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적수가 별로 없다.

5. 기타

  • 이곳 출신 은퇴 영국 군인들은 주로 런던 첼시의 로열 종합병원 근처에 살았다. 로열 종합병원은 1682년 프랑스의 군인 복지 시설 '오뗄 드장빌리드 드 파리(the Hotel des Invalides de Paris)'를 모델로 찰스 2세에 의해 설립, 크리스토퍼 렌 경(Sir Christopher Wren)의 설계로 1689년부터 가동을 시작해 476명의 은퇴 군인을 받았다. 현대에도 입원 경쟁이 치열해 영국 은퇴 군인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라고.
  • 영국 일각에서 현재의 1, 2차 대전식 카키정복이 아니라 이 레드코트 풍의 붉은 정복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처럼 카키색의 정복과 붉은색 예복이 나뉘어 있는 걸 정복을 폐지하고 붉은 예복만 줘서 정복을 겸하게 하면 되려 피복비가 절감된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미 카키색 정복이 100년 넘게 사용된터라 일선의 평은 뭥미? 라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미합중국 육군에서도 2006년에 이런 아이디어가 나와서 기존의 육군 예복인 진청색 군복을 정복 겸 예복인 ASU로 바꾸고 녹색 정복을 폐지하는 조치를 시행했는데, 공군과 구분이 잘 안 가는 등의 이유로 2차대전 시기 육군 장교용 정복 형태로 새 정복을 만들고, ASU는 예복으로 다시 뺐다. 미국 독립전쟁 때부터 쓴 전통적인 육군의 색상인 블루를 완전히 버리긴 그랬기 때문이다.
  • 영국에는 오래된 관습에서 벗어나 경제와 비용도 생각해야 된다고 하며 아직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왕실이 아직도 있는 영국 땅에서 "전통을 내다버려라!"하고 주장한다는게 쉬운 건 아니다. 단, 레드 코트가 대영제국의 번영과 왕조의 상징이라면, 카키색 육군복은 1, 2차 세계 대전을 극복한 영국의 노련함과 투지의 상징이다. 카키색 군복 역시 상징성이 있는 만큼 굳이 레드 코트로 회귀할 이유가 없다. 카키 역시 채택된 지 100여년을 넘은, 어엿한 전통 색상인 셈이다.
  • 새뮤얼 존슨이 쓴 영어 사전(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1755년작)에서는 원래 레드코트라는 단어는 영국군을 경멸하는 의미로 낮춰 부르는 속어였다고 나왔다.[17] 그런데 나중에는 영국군 스스로 레드코트라 부를 정도로 경멸의 의미는 완전히 사라졌다.

6.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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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육군 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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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육군 군복.
파일:해리윌리엄.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Chief_of_the_Defence_Staff%2C_General_Sir_Nicholas_Houghton_GCB%2C_CBE%2C_ADC_Gen._MOD_45155682.jpg
현대의 레드 코트.
왼쪽은 아이리시 가드의 명예 대령 예복을 입은 웨일스 공 윌리엄, 오른쪽은 블루스 앤 로열스의 예복을 입은 서식스 공작 헨리 왕자이다.
영국 육군의 현용 카키색 정복을 입은 닉 호턴 장군.
본래 전투복이던 것이 정복화됐다.

7. 관련 문서



[1] 동시에 운용한 병력이 아니라 7년 전쟁 기간내에 잠시라도 동원한 병력의 총합.[2] 다만, 이 표현에는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인은 험한 직업이었으며 그중에서도 병사 계급은 더 대우가 나빴다. 일반적으로 병사 인적 자원의 수준은 대륙이나 영국이나 그리 좋지 않아서, 부랑자나 빈민, 주정뱅이 등이었고, 종종 범죄자도 군 복무로 옥살이를 갈음하고는 하였다. 심지어 이 점은 근대적 국민군이 탄생한 프랑스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도 영국군은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을 계기로 일반 시민들도 사병으로 복무하면서 일부 개선되었으나, 근본적으로는 상기 여건과 더불어 대대적인 군제 개혁, 엄격한 훈련과 규율, 법 집행 등이 맞물리면서 얻어낸 성과였다. #1 #2 #3[3] 오늘날에는 현대적으로 정비된 능력주의적 임용제도와 실적주의적 성과 평가를 포함한 인사제도가 존재하기에 매관제가 (최소한 공직에서는) 수명을 다하고 사라졌지만, 표준화한 검증수단으로서 시험제도 및 초등과 고등을 막론한 보편적 교육체계가 존재하기 전에는 매관제나 인맥을 통한 추천제 등이 그나마 효율적인 인사체계로 작동하였다. 자세한 것은 매관매직 문서 참고. 무엇보다도 통념과는 달리 매관을 통한 인사가 생각만큼 많지도 않았다. #나폴레옹 전쟁기 장교들[4] 원래 "commission" 자체가 "(기사로) 서임하다.", "(관리장교로) 임명하다."라는 뜻의 단어이다. 여기서 파생한 말로는 고위외교관 혹은 명목상 외교관이고 실질적으로는 식민지 장관이었던 "판무관"(commissioner) 및 그들의 임지인 "판무관부"(commissariat)가 있다. 그 주체가 군주인 것도 공화국이 아닌 군주국에서는 군주가 통수권자이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에도 수익을 받는다는 용어로 쓰일만큼 장교임명은 돈의 역할이 매우 컸다. 장교직위 자체가 재산으로 인정될정도.[5] 영국 육군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일반인 대상으로 징병제를 시행하지 않았다. 단, 모집법 1778과 모집법 1779에 의해서 주거가 불분명한 노숙자의 강제입대와 형의 감면을 조건으로 범죄자의 징집은 가능했다. 평시 영국 육군은 상비군 4만 명만 유지했으므로 이들을 군대에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으나 큰 전쟁에 참전할 때에는 마구잡이로 군대에 집어넣었다. 참고로 영국 해군은 프레스 갱으로 불리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한 강제 징집이 있었는데, 이는 이들도 평시에는 예산 절감을 위해서 군함 상당수를 육지로 올려 예비함대로 두고 운용인원도 소집해제를 빙자한 해고 상태로 두어서 전시에는 인력이 빠듯했거니와 기본적으로 뱃일 자체가 고되어서 평시에도 인력 충원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6]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페르난도 7세가 왕위를 포기하게 만들고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의 왕으로 옹립했다. 졸지에 프랑스인 왕을 모시게 된 스페인인들은 당연히 분노해 반란을 일으켰고, 프랑스 엿먹이는데 열심인 영국이 스페인 반군을 도와주기 위해 병력을 파견한 것이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다. 따라서 스페인 반란군과 영국군이 협력해서 프랑스를 몰아내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었으나 영국군 병사들이 스페인 민간인을 약탈하는 바람에 종종 스페인 반군은 영국의 협력을 거부하고 스페인 민간인들이 오히려 프랑스 편을 들 정도였다.[7] 그의 대표적인 성과물로는 표준화한 훈련 및 병참제도, 규격화한 군수체계, 근대적 군사교육기관 설립 및 지휘계통, 병사들의 급여 및 생활복지 개선 등이 꼽힌다.[8] 프랑스와 더불어 당대 둘 뿐인 국민국가로서 시민들의 사기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다른 나라 병사들이 왕(king)을 위해서 혹은 왕 "탓에" 싸울 때 프랑스군은 혁명을 위해서, 영국군은 왕과 국가를 위해서(for king and country) 싸웠다.[9] 해당 문서의 편제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프랑스군이 청년 근위대 등 급조부대를 동원한 것처럼 영국군도 하이랜더 연대나 KGL 여단 등 일부 종군 부대도 있으나 대부분 미숙련 부대이거나 상태가 부실한 동맹군 부대였다.[10] 반면 귀족들이나 신사들은 충분한 경제력과 위신을 보유하여 고작 멋진 옷에 혹할 이유가 없었고, 푼돈이나 받고 남의 지휘나 따르는 사병입대를 고려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므로 전부 장교로 참전하였다. 따라서 사병 지원자들의 질적수준은 대체로 도시 하류층, 시골뜨기, 범죄전과자 등으로 떨어졌고, 영국의 식민지이면서 홀대받고 낙후된 상태였던 아일랜드인처럼 특정 민족이 다수 종군하기도 하였다. 다만 18세기 후반에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실업자가 된 숙련 방직공들도 다수 있었고, 특히 영국군의 경우 나폴레옹 전쟁 당시 본토방위병력인 민병대를 정규군으로 전환하기도 하였는데, 이들 민병대는 많은 경우 일반적인 시민 및 농촌 주민들로서 오히려 기존 정규군 내 하층민들보다 규율이 좋았다. #[11] 출처: 1차세계대전사, 존 키건.[12] 자세히 보면 영국군의 유니언 잭은 힘차게 펄럭이는 반면, 미합중국 대륙군의 성조기는 힘없이 축 처져있다. 대륙군의 참패를 암시하는 장면.[13] 몇몇 자막 달린 영상에서는 이를 부대로 복귀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오역하기도 하는데, 맥락상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의지 표명이다. 작중 가브리엘은 아버지 벤저민의 허락 없이 대륙군에 입대했다.[14] 당시 영국 육군의 전열보병은 영국의 막대한 군비에 힘입어 유일하게 실탄을 이용하여 훈련했기에 당대 유럽에서 뛰어난 훈련도와 강함으로 위명을 떨쳤다. 민병대 수준을 겨우 벗어난 당시 미합중국 대륙군 전열보병들이 전면전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위 영상에도 미 대륙군 전열보병들이 머스킷을 쏠 때 화약접시의 불꽃에 겁먹고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사격할 때는 눈만 질끈 감아도 조준선이 흐트러지기 쉬운데, 안그래도 잘 안맞는 머스킷으로 저래대니 사격 명중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만큼 훈련도가 처참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뿐만 아니라 레드 코트들은 일제사격 한 번 맞아 사상자가 나는 것을 감수하고 더 접근해서 사격했다. 영국군의 훈련도가 대륙 육군보다 더 높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실제로도 저렇게들 했다.[15] 서양에서 정예를 방진의 우측에 배치하는 전통은 매우 유서 깊은데, 고대 그리스 팔랑크스 시대에서부터 시작됐다.[16] 숙련병을 한 군데에 몰아넣어 하나의 단위부대만 강화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여러 부대에 분산하여 각 부대의 뼈대를 잡아주는 것이 전체 조직력에서 유리하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투입하지 않는 것만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는 했다. 예컨대 워털루 전투 당시 연합군은 병력 자체는 프랑스군보다 많았으나 경험 없는 신병이나 훈련이 부족한 비숙련병 위주인 부대가 많았고, 이들의 패주와 와해를 우려한 웰링턴 공작은 반도전쟁에 종군한 부대나 참전은 안 했어도 충분한 훈련을 받은 부대만을 전열에 투입하였다.[17] 'The term redcoat was a derogatory one, used as a "name of contempt for a soldier" with the word "soldier" itself being described as "one who serves for p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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