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5px -10px -15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유산 | |
<colbgcolor=#315288>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딜쿠샤) 서울 앨버트 테일러 家屋(딜쿠샤) | ||
소재지 | <colbgcolor=#fff,#1f2023>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2길 17 (행촌동) | |
분류 | 등록문화유산 / 기타 / 주거숙박시설 | |
수량/면적 | 1동 / 현황실측면적 293.8㎡ | |
지정일 | 2017년 8월 8일 | |
시대 | 1920년대 | |
소유단체 | 국가유산청 | |
관리단체 | 서울특별시 | |
링크 | 서울역사 박물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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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명 Dilkusha.지상 2층 규모의 서양식 주택, 국가등록문화재 687호.
2. 연혁
일제강점기이던 1923년 광산사업가이자 AP통신 임시특파원으로 일하던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와 영국인 메리 테일러 부부가 인왕산 성벽을 따라 산책하다 만난 큰 은행나무 아래 붉은 벽돌로 지은 집이다. 본래는 임진왜란의 명장 권율의 집터였던 곳으로,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 앞에 권율 장군 집터라는 표지석이 있다.집의 이름인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희망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테일러 부부는 벽난로까지 갖춘 2층 집을 짓고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일이다."라는 시편 127편 1절을 새겼다.
1919년 2월 28일, 3.1 운동 하루 전 테일러 부부의 아들 브루스가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났고, 병원 간호사들이 메리 테일러의 침상에 숨긴 기미독립선언서를 앨버트는 동생 빌 테일러의 신발 뒤축에 숨겨 해외에 알리게 했다.
1940년의 어느 날, 아들 브루스는 미군 입대를 위해 딜쿠샤를 떠났고, 1941년 미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태평양 전쟁이 터지면서 앨버트는 적국의 국민으로 바로 수감되었고, 메리는 딜쿠샤에 가택연금되었다. 5개월 남짓 수감생활 후 1942년 일제는 다시 외국인 추방령을 내렸고, 테일러 부부는 급하게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1948년 가을,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던 메리 테일러는 "태평양 너머에 내 나라가 있고, 내 집이 있다"고 늘 말하던 앨버트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자, 죽거든 자기 재를 한국 땅에 묻어 달라고 부탁한 남편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성공회 헌트 신부님과 언더우드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미군함을 타고 한국으로 들어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앨버트를 묻고 딜쿠샤를 방문했다.
1950년 발발한 6.25 전쟁에도 용케 파괴를 면한 딜쿠샤는 서울이 경제성장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빌딩 숲에 갇힌 신세가 된다. 그 뒤로 딜쿠샤라는 이름은 잊혀지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붉은 벽돌집'이나 '서양 사람 집', '은행나무 집', 심지어 '귀신이 나오는 집' 등으로 불리었으며, 집 없는 사람들이 무단거주하기 시작하여 한때는 16가구가 넘는 가족이 딜쿠샤에 깃들어 생활하기도 했다.
1997년, 유태흥 전 대법원장이 딜쿠샤가 대한제국 시절 신문인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인 것 같다고 제보하면서 잊혀졌던 이 집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문화재 지정을 위해 건축가와 역사가들이 딜쿠샤를 조사하던 과정에 "DILKUSHA 1923"이라 새긴 명판이 발견되면서 잊혀졌던 이름을 다시 찾게 되었다.#[1] 서울특별시는 딜쿠샤 자리에 신문박물관을 설립하려 했으나 딜쿠샤가 대한매일신보와 무관한 건물임이 밝혀지자 계획을 취소했다.
2006년, 딜쿠샤를 떠난 지 66년 만에 브루스 테일러가 아내 조이스, 딸 제니퍼와 함께 딜쿠샤를 찾았다. 군대 입대를 위해 그 곳을 떠난 브루스가 87세의 노인이 되어 다시 돌아온 것이었는데, 이것이 그의 생전 마지막 딜쿠샤 방문이었다.
2016년 2월 28일, 브루스가 살아 있었다면 아흔일곱 살이 되는 생일 날, 그의 딸 제니퍼가 2015년에 세상을 떠난 브루스의 재가 든 주머니를 들고 와 딜쿠샤에 뿌렸다. 그 해부터 서울시의 문화재 지정 논의가 본격 진행되어 2017년 8월 국가등록문화재 제687호로 지정되었다. 서울시는 2018년부터 복원 공사에 착수해, 3.1 운동 100주년이던 2019년 딜쿠샤 복원을 마치고 일반 개방을 추진하였으나 건물 내 거주하던 주민들과의 법적 분쟁 탓에 그 해에는 임시 개방에 그쳤다.
2021년 3.1절부터 개방된 딜쿠샤 전시관은 기존 내부 1·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거주할 당시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고, 나머지 공간은 테일러 가족의 한국에서의 생활상과 테일러의 언론활동 등을 조명하는 6개의 전시실로 구성했다.
전시관은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9시~오후 6시까지 운영되며, 입장료는 무료이다. 상시관람이 가능하며 해설은 '서울시 공공서비스예약'을 통해 사전예약을 권한다.
- 참고문헌: 김세미, 이미진 글, 전현선 그림, "딜쿠샤의 추억"(찰리북, 2017)
3. 국가등록문화재 제687호
<개요>
○ 1919년 3.1운동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을 전세계로 타전한 AP통신사 특파원이었던 앨버트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와 그의 아내(Mary Linely Taylor)가 1923년 거주를 위해 건립한
가옥으로, 역사적 인물의 삶을 조명하고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역사적 공간으로서의 건축적
가치가 있다.
○ 앨버트 테일러는 1910년부터 서울에 거주하였으며, 1919년 3.1독립선언과 제암리학살사건을
외부에 알려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전파하였다. 특히 세브란스 병원 침상에서 발견한 3.1독립
선언서를 갓 태어난 아들의 침대 밑에 숨겨 두었다가 일제의 눈을 피해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렸으며, 이를 계기로 조선의 항일독립운동을 도왔다. 이로 인해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의
수감생활을 거쳐 추방됐으며 48년 미국에서 사망하였다.
<건축학적 특징>
○ H자형 평면의 지하1층 지상 2층의 프랑스식 쌓기의 벽돌조 건물로 외벽의 벽돌쌓기 방식이 특이
하다. 즉 일종의 ‘공동벽 세워쌓기 (rat-trap bond)’로 한켜는 면이 표면에 나타나도록 세워쌓고
한켜는 면과 마구리가 번갈아 나타나도록 쌓았다.
○ 평면은 박공지붕의 양 익부와 가운데 5개의 열주가 있는 중앙부(전면은 베란다)로 구성되었
으며, 중앙부 4칸 중 좌측 한 칸이 현관과 홀 및 돌출반원형 계단이 있고, 나머지 3칸은 2짝씩의
유리문 3개가 있는 대연회장이, 그리고 동측 익부는 벽난로가 있는 식당, 서쪽 익부는 욕실과
옷방이 딸린 2개의 자녀방(나중에 손님방), 그리고 후면부는 식료 저장고, 창고 등 서비스구역
들로 구성되었으며, 2층도 1층과 비슷한데 중앙의 응접실에서는 저 아래 도시와 저너머 산들이
조망되고 화창한 날에는 한강까지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지하층에는 나무, 석탄, 와인을 저장
하였으며, 벽난로와 거대한 이동식 난로, 얼음상자 등이 있었다.(Mary Linely Taylor, 「Chain of
Amber」참조) 창호는 오르내리기 창호(외벽의 내부창)와 여닫이 창호, 미서기 창호가 혼재되어
있으며, 바닥은 목조마루이다.
○ 1919년 3.1운동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을 전세계로 타전한 AP통신사 특파원이었던 앨버트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와 그의 아내(Mary Linely Taylor)가 1923년 거주를 위해 건립한
가옥으로, 역사적 인물의 삶을 조명하고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역사적 공간으로서의 건축적
가치가 있다.
○ 앨버트 테일러는 1910년부터 서울에 거주하였으며, 1919년 3.1독립선언과 제암리학살사건을
외부에 알려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전파하였다. 특히 세브란스 병원 침상에서 발견한 3.1독립
선언서를 갓 태어난 아들의 침대 밑에 숨겨 두었다가 일제의 눈을 피해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렸으며, 이를 계기로 조선의 항일독립운동을 도왔다. 이로 인해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의
수감생활을 거쳐 추방됐으며 48년 미국에서 사망하였다.
<건축학적 특징>
○ H자형 평면의 지하1층 지상 2층의 프랑스식 쌓기의 벽돌조 건물로 외벽의 벽돌쌓기 방식이 특이
하다. 즉 일종의 ‘공동벽 세워쌓기 (rat-trap bond)’로 한켜는 면이 표면에 나타나도록 세워쌓고
한켜는 면과 마구리가 번갈아 나타나도록 쌓았다.
○ 평면은 박공지붕의 양 익부와 가운데 5개의 열주가 있는 중앙부(전면은 베란다)로 구성되었
으며, 중앙부 4칸 중 좌측 한 칸이 현관과 홀 및 돌출반원형 계단이 있고, 나머지 3칸은 2짝씩의
유리문 3개가 있는 대연회장이, 그리고 동측 익부는 벽난로가 있는 식당, 서쪽 익부는 욕실과
옷방이 딸린 2개의 자녀방(나중에 손님방), 그리고 후면부는 식료 저장고, 창고 등 서비스구역
들로 구성되었으며, 2층도 1층과 비슷한데 중앙의 응접실에서는 저 아래 도시와 저너머 산들이
조망되고 화창한 날에는 한강까지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지하층에는 나무, 석탄, 와인을 저장
하였으며, 벽난로와 거대한 이동식 난로, 얼음상자 등이 있었다.(Mary Linely Taylor, 「Chain of
Amber」참조) 창호는 오르내리기 창호(외벽의 내부창)와 여닫이 창호, 미서기 창호가 혼재되어
있으며, 바닥은 목조마루이다.
4. 기타
- 2013년에 방송한 딜쿠샤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유튜브에 좋은 화질로 올라와 있다. 촬영 당시에는 94세 고령으로 생존해 있던 집의 원 주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 가족, 거주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배우 김미경의 1인칭 나레이션으로 진행된다. 이 문서 내용 중 많은 부분이 해당 영상에 나온 얘기다.
- 문화재 중 드물게 고가차도와 터널 사이에 있는 지리적인 특성을 가졌다. 실제로 딜쿠샤 앞으로 가면 이화여자대학교 및 연세대학교로 가는 독립문고가와 광화문을 가는 사직터널이 있어서 고가차도와 터널 사이에 끼어있는 드문 특성을 가졌다. 다큐 영상에 따르면, 터널 위에 있는 집은 증개축을 할 수 없다는 법이 있어서 덕분에 원형을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직터널은 중앙터널을 제외하면 도보 이용이 가능하나, 독립문 고가차도는 자동차만 지나갈 수 있고 그 아래로 가면 도보가 가능해서 독립문, 서대문형무소역사관까지도 갈 수 있다. 딜쿠샤에서 15-20분 거리.(반대는 오르막길이라 더 오래 걸린다)
- 이전에는 일반 주민들이 쪽방으로 개조하여 거주했던 곳이었는데 딜쿠샤 복원 결정 때 해당 주민들이 복원을 반대하며 이주를 거부해서 서울시와 마찰을 빚은 적이 있다. 법적으로는 딜쿠샤는 국가 소유지만, 행촌동 주민들도 존재를 모를 정도로 잊혀진 유적이었기에 국가나 시에서 관리를 한 적이 없었고, 그 사이 무단 거주자들이 들어와 집을 자비로 보수·관리하면서 살았던 것. 문제는 딜쿠샤가 방치된 지 50년이 넘어버린 바람에 거주자들도 세대가 바뀌어서 이전 거주자에게 권리금을 주고 집을 매입한 사람, 이전 거주자에게 보증금을 내고 셋방살이를 하는 사람 등등이 존재하게 되어서 아주 골치 아프게 되었다. 결국 서울시가 갈등조정관을 파견해 주민들과의 합의 끝에 이주비 등의 보상금을 지급하고 문화재청과 종로구청과의 합의로 복원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 앨버트 테일러의 아들인 브루스 테일러(1919 ~ 2015)는 비록 무단 거주자들이지만 부모님의 집에서 사람이 지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밝혔다.
- 주택가 사이에도 끼어 있고 독립문 고가차도와 사직터널 사이에 끼어 있는 지리적인 지형 때문에 자동차 주정차는 불가하다. 실제로도 이 곳은 자동차들이 고가와 터널 진입을 위해 달리고 있어서 주정차를 하기에 어려움이 많은 곳이다.
- 실제 딜쿠샤 옆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도 딜쿠샤를 은행나무집이라고 불렀다. 이 나무는 지금의 딜쿠샤가 있는 서울 행촌동과 사직동 지역에서 신성하게 여기는 나무로 알려졌는데 외국인들이 이 나무 앞에다가 서양식 건물을 지을 때 마을의 신성함을 깨뜨린다고 하여서 반발했던 적이 있었다. 현재도 이 나무는 딜쿠샤 옆에 그대로 있으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딜쿠샤 주소는 행촌동 1번지다. 1번지일 수밖에 없는 것이, 지을 당시에는 은행나무만 있고 집이 하나도 없는 언덕이었기 때문이다.
- 딜쿠샤 옆에 오래된 은행나무의 위치는 권율 장군의 옛 집터라고 알려져 있으며 권율 장군의 사위인 이항복이 소유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행촌동 지명의 유래 역시 이 은행나무와 관련된 것으로 전해진다.#
- 딜쿠샤에서 권율 장군 집터 쪽에 나있는 골목을 들어가면 요즘 시대에서 굉장히 보기 드문 나무 전봇대를 볼 수 있다.
- 딜쿠샤에서 북쪽 누상동(옥인동) 쪽으로 가면 일제시대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 일식 건물 몇 채와 집터가 아직 남아 있으며 일부는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동쪽 경복궁 서쪽 담장과 접한 곳에는 건물 개축 공사 중 지하에서 조선시대 집터가 발견되었고, 보존 전시하고 있다.[2]
5. 관련문서
[1] 당시 기사를 살펴보면 딜쿠샤를 건물주 또는 설계자의 이름이라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2] 실은 경복궁 주변, 육조 터, 미 대사관, 비각, 보신각 등이 있는 그 부근 전부의 지하가 모두 옛 한양의 집과 가게, 관청 터 유적이다.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겪으며 싹 타버리고 무너져서 모두 무시하고 새로 건물을 지으며 다 묻혀 버린 것. 지금은 청계천 공사 때 나온 것이며 종로 피맛골 공사 때 발견한 우물 등 일부분만 파 놓고 공개하고 있는데, 발굴하게 된다면 어머어마한 규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