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3 22:29:03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楊花津外國人宣敎師墓園
Yanghwajin Foreign Missionary Cemetery
파일: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jpg
<colbgcolor=#003865> 위치 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진길 46 (합정동)
국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분류 묘지, 공원
개장 1890년 7월 28일
최초 안장자 존 헤론[1]
안장자 수 417명[2]
안장자 국적 15개국[3]
면적 13,224㎡
관리주체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
연락처 02-332-9174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로고 파일:26467_1460356328_49_수정.jpg

1. 개요2. 상세3. 안장된 인물들
3.1. 주요 인물 명단3.2. 기타

[clearfix]

1. 개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복음의 씨앗으로 이 땅에서 헌신한 선교사님들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분들의 삶은, 선교 200주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한국교회의 소중한 자산이자 밑거름으로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줍니다.
또한 이곳 양화진묘원은 한민족의 지난했던 근대사를 반추해 볼 수 있는 사색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144번지에 위치한 묘원.

합정역 인근, 가톨릭 성지 절두산의 바로 옆에 있는 나루터에 조성되었다. 원래는 항구이자 양화나루를 수비하는 진영인 양화진이 있던 곳이라 양화진이라고 부른다. 찾아가려면 합정역 7번 출구에서 내려서 2호선 선로 방향을 따라 도보하면 된다.

2. 상세

서울 지하철 2호선합정역에서 당산철교로 빠져나가는 오르막길 바로 옆에 바싹 붙어 위치한다. 이 때문에 당산철교 북단에 차단막이 설치되어 있다.

100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조성된 곳으로서, 특히 외국의 공원을 방문하는 듯한 독특하고 이국적인 정취가 있다. 실제로 서양 문화권에서는 묘지를 일종의 추모공원 같은 곳으로 예쁘게 꾸며놓아서 님비는커녕 오히려 핌피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절두산성지(천주교)과 양화진묘역(개신교)을 한데 묶어 양화진성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포구에서는 이걸 함께 묶어서 가톨릭개신교범기독교 연합 사업 비슷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두 종파 간 의견 차이로 무산됐다. 안장된 인물의 대부분은 장로회감리회 소속이지만, 그래도 성공회[4]구세군, 재림교같은 군소 교단 소속 선교사들의 묘도 있다.

2005년까지만 하여도 사실상 방치된 곳이었으나[5]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개신교 교계의 문제 제기 후로는 100주년 기념교회에서 관리하고 안내판도 상당히 정비하였다. 거기에 주말에는 일정 시간대별로 무료 안내 가이드까지 운영한다. 월요일~토요일 하루 4회이며,[6][7] 사전 예약을 하는 것이 장려되지만 당일 방문도 가능하다. 코스는 실내 영상물 시청 → 묘소 참배 → 양화진홀 관람이며, 전체적으로 1시간~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그 외에 유료로 안내해 주는 사람들은 100주년 기념교회와는 무관하다.

위의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6.25 전쟁 당시의 상흔을 간직한 비석도 있다. 총탄 자국이나 포탄 자국이 남아있다.

명색이 묘역이라 어느 정도는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해야 하는데, 촬영을 한다면서 시끄럽게 떠들고 이곳 저곳을 쑤시고 다니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서 눈살을 찌푸리게끔 하기도 한다. 심지어 비석에 앉거나 기대서 사진을 찍는다거나 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 또한, 묘역 내에서는 마이크 사용이 금지되어 있는데 100주년 기념교회와 무관한 가이드가 마이크를 사용해서 안내하다가 100주년 기념교회 자원봉사자들에게 제지당하기도 한다.

3. 안장된 인물들

고종 이후 대한민국의 종교계, 언론계, 교육계 등에 공헌한 외국인 인사 500여 명의 묘가 있다. 그 중에서 구한말 개신교 선교사 및 가족들의 수는 145명. 이래저래 한국 근현대사와 관계된 인물이 많다.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 어니스트 베델(배설), 장로회 선교사이자 연세대학교 설립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감리회선교사이자 배재학당의 설립자인 헨리 아펜젤러, 이화학당의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의 설립자 더글러스 B. 에비슨, 감리회 선교사이자 독립운동한글 발전에 큰 역할을 한 호머 헐버트 박사,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한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의 묘도 여기에 위치하여 있다. 최초로 안장된 인물은 헤론(J.W.Heron)으로, 1890년 7월 28일이다.

외국인 개신교 선교사 묘지라는 이미지 때문에 구미권 출신 인사의 묘만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 1867~1962)라는 일본인도 안장되었다. 처음엔 YMCA일본어 교사로 활동하다가 이후 감리회 전도사로 활동하였으며, 한국의 독립을 지지했고 용산구 후암동의 가마쿠라보육원(현 영락보린원)에서 한국인 고아들을 보살폈다. 8.15 해방 후 1947년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1961년 다시 내한했고, 1962년 3월에 영락보린원에서 향년 9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시대를 생각하면 무척이나 장수한 인물.

3.1. 주요 인물 명단

가나다 순. 본인 대신 가족이 안장된 경우 ☆ 표시.

3.2. 기타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개신교 선교사가 아닌 인물의 묘도 꽤 많다. 최근에 조성된 정체 불명의 묘비도 있고, 프리메이슨의 로고가 새겨진 묘비도 몇 보인다.(…)[12]

지금에야 상당수의 인물들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안장되었기 때문에 개신교의 성지 격인 장소로서 개신교인들이 많이 방문하지만, 개신교 선교사들에게만 한정된 장소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곳은 당시 시대에 한국에서 죽은 외국인들을 매장하던 묘지였다. 그렇기에 프리메이슨이나 개신교와 관련이 적은 사람들의 묘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묘하게도 당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러 온 선교사들이 꽤나 많았던지라 상당수 인물이 선교사이고, 한국과 한국 개신교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선교사들도 많다보니 지금은 공식적으로 개신교 계열 단체들이 관리하게 되었다.


[1] 존 헤론은 고종황제의 주치의를 맡았던 미국 출신의 선교사이자 의사로, 제중원 원장을 맡기도 했다.[2] 이 중 선교사의 수는 145명이다.[3] 남아프리카 공화국, 뉴질랜드, 덴마크, 독일, 러시아, 미국, 스웨덴, 영국, 이탈리아, 일본, 캐나다, 프랑스, 필리핀, 호주, 그리고 한국인도 포함되어 있다.[4] 2대 성공회 한국교구장이며 YMCA 회장이었던 A. B. 터너 주교를 비롯한 여러 성공회 성직자와 신자의 묘들이 가장 가장자리에(...) 성공회 묘역을 이룬다.[5] 쓰레기가 쌓이고 인근의 비행 청소년들이 아지트로 삼기도 했다고 한다. 방치의 영향인지 현재도 훼손된 묘비가 몇몇 보인다.[6] 10:00, 11:30, 14:00, 15:30. 양화진홀 관람은 10:00~17:00.[7] 일요일은 묘원 안식일이다.[8] 가묘이다. 아펜젤러는 해양 사고로 바다에 빠져 사망했고, 이후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해를 찾으면 안장되겠지만 120년 전 바다에 빠져 사망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9] 당시 42세였으며 16세와 14세인 두 아들(크리스토퍼 킴과 스코트 한솔 킴)과 함께 안장되었다.[10]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11] 사실 고용국이 일본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뀐 만큼 자기 업무에 충실했던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12] 프리메이슨 로고가 새겨진 묘비의 주인은 회원으로 있었던 주한미군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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