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28 20:20:46

고이즈미 신지로/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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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기 삶 및 정계 입문 이전3. 정계 입문4. 국회 입성5. 환경대신 발탁6. 2021 자민당 총재 선거7. 기시다 내각 시절8. 2024 자민당 총재 선거9. 자유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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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고이즈미 신지로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초기 삶 및 정계 입문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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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버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와 형 고타로와 같이 찍은 사진. 우측이 신지로.

1981년 4월 14일,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미야모토 카요코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준이치로와 카요코는 별거 상태로, 신지로는 형 고타로와 함께 첫째 고모인 미치코에 의해 길러졌다. 간토가쿠인 무츠라 소학교, 간토가쿠인 무츠라 중학교, 간토가쿠인 무츠라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의 모교이자 지역 명문고인 가나가와 현립 요코스카 고등학교(神奈川県立横須賀高等学校)에 입학하려고 시험을 치렀는데, 합격하진 못했다. #[1]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에는 야구부 부원이었다. #

2004년 칸토가쿠인대학 경제학부[2]를 졸업하고 2006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SIPA에서 정치학 석사를 취득했다.[3] 이후 미국에서 약 1년간 국제전략연구소 CSIS 연구원으로 재직했다가 아버지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다. CSIS 재직 당시 쓰지 기요토 의원과 함께 근무했다.

한국 내에선 통상적인 일본의 정치인 가문과 마찬가지로, 아버지 준이치로가 정계 입문을 적극 추천했다고 알려졌지만 일본 내에서는 오히려 아버지가 정계 입문을 매우 반대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현대의 정치인들이 나라를 불문하고 세습하지 않겠다는 립서비스를 많이 하기에 어느 정도 걸러들을 필요는 있지만 고이즈미의 경우는 교차검증이 어느 정도 되어 있는 편. 형인 고타로는 아버지의 의견을 받아들여 정치인이 아닌 배우가 되었지만 동생인 신지로는 정계에 입문하였다.

이에 형 고타로가 한 인터뷰에서는 신지로가 정계에 입문하자 아버지인 준이치로가 충격을 받았고 이후 그 정치 도전을 인정하면서 "스스로 공부해라(自分で勉強しろ)"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

3. 정계 입문

2006년 6월 아버지 준이치로는 총리직을 내놓은 뒤부터 정치의 중심에서 급격히 멀어진다.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급히 귀향한 신지로는 2007년 아버지의 개인비서 자격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해, 2008년 아버지의 정계은퇴 선언 직후 공식 후계자가 됐다.

자민당의 파벌이나 세습정치 같은 구태를 비판하고 혁파하려 한 준이치로조차도 자신의 후계자로는 아들을 세우고, 그 과정도 은퇴 발표를 해버리고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후계자로 아들을 지명하는 과정에서 다른 후보는 끼어들 틈도 없었다는 부분에서 비판을 받는다.

4. 국회 입성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나가 아버지의 지역구인 가나가와 11구에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됐다. 당시 최연소는 민주당의 마쓰오카 히로타카(1982년생)이었다. 당시 아소 다로 총리가 자민당의 멸망에 쐐기를 박고 정권이 민주당으로 넘어가는 게 확실시되던 상황에서 치른 선거라서, 자민당의 거물들조차 지역구에서 줄줄이 낙선하던 판이었다. 규마 후미오는 완전 낙선, 아마리 아키라, 이부키 분메이, 마치무라 노부타카 등은 지역구 낙선이지만 석패율 비례대표로 부활. 심지어 전직 총리대신들조차 16선 관록의 가이후 도시키가 낙선했고, 모리 요시로후쿠다 야스오는 젊은 여성 자객을 상대로 겨우 살아남은 선거였다.

그럼에도 민주당 바람이 강하게 분 수도권에서 당선되었다는 점은 대단하다. 이때 자민당 소속으로 첫 당선된 신인이 단 4명뿐이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물론 지역이 가문의 텃밭이긴 하다. 어쨌든 같이 당선된 신인이 별로 없었고 자민당이 쪼그라든 상태에 혜성같이 나타난 신인이라 오히려 일본 정치 전면에 나설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이 때 맡은 자민당 내의 첫 당직은 청년국장으로, 보통은 재선 이상이 맡기에 초선 의원이 맡을 수 없는 요직이다. 자민당의 위기 상황에서 혜성같이 배출된 젊고 잘생긴 명문가 도련님의 브랜드 가치를 인정해 준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실제로 총선 이후 살아남은 자민당 의원 수가 많이 줄어든 터라 다들 선수에 비해 중요한 당직을 맡기도 했다.[4] 실제로 자민당 젊은 정치인들 중 에이스급이 청년국장을 맡으며 수많은 중진 정치인을 배출했다. 청년국장을 거친 총리대신들로는 다케시타 노보루, 우노 소스케, 가이후 도시키, 아소 다로, 아베 신조, 기시다 후미오가 있다. 이외에도 현 자민당의 중진들 중에서도 활동이 활발하고 지명도가 높은 의원들이 많이 거쳐갔는데 청년국장 경험자로는 히라누마 다케오, 누카가 후쿠시로, 오코노기 하치로, 하마다 야스카즈, 시모무라 하쿠분, 이노우에 신지, 하기우다 고이치 등이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민주당이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다. 2012년 사면초가 처지의 노다 요시히코 총리는 카미카제 해산을 단행해 스스로 무너졌다. 총선이 치러지면서 신지로는 초선 때보다 3만 표를 더 받고 79.9%라는 압도적인 득표로 재선됐다. 한편 이 당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고이즈미 신지로가 청년국장으로서 46회 총선에 대거 출마한 젊은 아베 칠드런들(오구라 마사노부 등)의 지원유세를 어마무시하게 많이 다녔다. 자민당 중진들보다도 고이즈미 신지로의 지원유세가 최고였다고. 2013년엔 자민당 청년국장 자격으로 '다케시마의 날' 행사에 참여했다. 정권을 되찾은 자민당은 우익 색깔이 한층 강해졌고, 신지로는 당색에 쉽게 물들었다.

이듬해 내각부 대신정무관 겸 부흥대신 정무관에 임명됐다. 의원내각제는 국회의원이 행정부 요직에 앉으므로 한국으로 치면 차관급의 고위직. 2014년의 총선거에서는 자기 선거구는 내버려 두고 전국을 돌며 지원 유세만 했는데도 압도적인 득표차에 더해 전국 최다 득표자의 기록을 남기며[5] 3선 의원이 되었다. 이때가 불과 33세.

2017년 총선거에서도 지원 유세만 나갔다. 마찬가지로 78%, 15만 4천표의 큰 득표율로 당선. 1일 반 정도만 본인 유세를 했다고. 각종 스캔들로 하야 위기였던 아베가 국회 해산권을 발동해 총선을 치렀는데, 신지로의 이미지와 지원 유세는 자민당이 재집권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웃기는 것은 선거가 끝나자 갑자기 '자민당 필요 없다'며 아베 신조를 정면 비판했는데, 이는 속이 뻔한 행동에 불과했다. 아베가 부가가치세율 인상을 결정하여 국민적 반감이 높아지자 그걸 이용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던 것.

일본 정가 및 언론은 신지로가 선거 유세에서 동일본 대지진 10주년을 언급하거나 2020 도쿄 올림픽 이후 인구 감소, 경기 후퇴 등을 언급한 것에 주목하면서 신지로의 야망이 차기 총리 자리라고 보고 있다.

신지로의 약점은 무파벌로 자민당의 뿌리 깊은 병폐인 계파 문제를 어떻게 타개할지도 관건이다. 아버지 준이치로가 자민당 내 비주류로 총리 재임 당시 파벌 타파를 내세웠던 만큼 자민당 내에서 아버지를 이은 무당파 비주류에 속하며, 기존의 자민당 내 파벌(호소다 파, 아소 파-지공회, 기시다 파, 니카이 파 등)들의 영수들이 죄다 '포스트 아베 신조'라 불리는 총리직 경쟁자들이기 때문에 이들 파벌에 입적할 이유가 없을 뿐더러 이들도 받아줄 이유가 없다.

보수 계열의 타 당에 들어가 독자적 정치세력을 구성할 가능성도 있지만, 일본 정치의 세력 구도는 사실상 '자민당 외 듣보잡'인 상황일 뿐더러 고이케 유리코 등 신지로보다 더 상황이 좋았던 거물들조차 자멸한 상황이라 가능성이 낮다.

그런 면에서 모리토모/가케학원 스캔들의 조사를 위한 국회 특별위원회를 제의하거나, 자민당에서 발의한 참의원 정족수 확대 등, 공직 선거법 개정안을 힘으로 통과시킨 것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등 당내 소장파로서 이미지를 만드는 중이다. 철저한 진상조사를 촉구하는 등 일본 언론과 여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아베 신조는 건재했다. 신지로에게 있어 차기 대권주자로 부각될 기회였지만, 조사하라는 둥 원론적인 입장 표명만을 하면서 전혀 아베를 저지하지 못했다.

더욱이 2018년 6월 10일의 니가타현 지사선거에서 자민/공명당 후보인 하나즈미 히데요 후보에 대한 지원유세를 거절했는데, 당시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스캔들 때문에 위기였던 아베 신조의 재신임에 반대한다는 정치적 행위를 한 셈이다. 결과는 여당 단일후보 하나즈미 히데요가 야당 단일후보 이케다 치카코를 3만 표 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아베는 무사히 당권을 지켰다.

만일 야당에게 졌더라면 신지로는 정말 현 자민당 주류들에게 찍힐 뻔했다. 어쨌든 아베의 총리 연임이 성공하며 "신지로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 뻔히 보인다"라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신지로는 결혼 보고를 하러 총리실 문을 두드리게 된다.

아사히 TV보도 스테이션은 12월 여론조사에서 차기 총리 지지도를 조사했는데, 29%의 지지율로 아베 신조의 16%, 이시바 시게루의 16%로 눌렀다. 지역구를 너머 지원 유세를 여러 군데 다니면서 정치적 입지가 높아졌다. 한편 제 1야당인 입헌민주당 측에서는 에다노 유키오 대표가 9%의 지지율로 2위인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4%)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니가타현 지사 선거 얼마 후 9월 20일에 치러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이시바 시게루에게 투표했다. '자민당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목소리도 강점으로 바꾸어나가는, 그런 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이 때도 선거 운동 중엔 중립인 척 쫄았다가, 투표 직전에야 이시바를 지지한다고 밝혀 더욱 비웃음을 샀다. 뭔가 보여줘야 될 때를 실기하고 마지막에서야 마지못해 권력자에게 반기를 드는 행동은 아무런 실리도 챙기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낸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일본 정가에서는 이시바 지지를 표명해 총리의 등용문이 되는 관방장관에 오르지 못할 거라는 견해가 우세했고 그대로 됐다. 선거가 승리로 끝나자마자 아베는 수월회(이시바파)를 대대적으로 쳐냈다.

5. 환경대신 발탁

2019년 9월 10일 신지로가 바베큐 내각의 신임 환경대신으로 발탁된다는 보도가 나왔다.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이 적극적으로 어필했다는 후문. # 아베의 기관지로 불리는 산케이 신문은 신지로를 키워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정조회장, 고노 다로 방위대신과 경쟁토록 하는 아베의 정치적 계산이란 평가.

아버지와 달리 한국에 인지도가 없었지만, 2019년 일본 후지 TV 인기 아나운서 타키가와 크리스텔과 갑자기 결혼임신을 발표하면서 한국 미디어에도 화려하게 등장했다.

일본 농협에 대한 대대적 개혁을 추진하는 등 차기 총리에 오르기 위한 단계를 밟아나가는 차기 대권 주자로서 알려졌으며, 역사 인식은 어떤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점차 지성이나 정치 철학이 빈약하다는 점이 드러나, 일본 누리꾼들로부터조차 조롱받고 있다. 예시.

게다가 타키가와 크리스텔과의 결혼을 쓸데없이 총리 관저에 직접 찾아가 보고하는 행동을 하면서, "총리가 되고 싶은 티를 너무 노골적으로 낸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물러나라는 둥 발언이 무색하게 결혼을 아베에게 보고하러 간 것도 비웃음을 샀다. 이를 두고 일본 언론이나 팬들은 "아버지 준이치로가 그랬듯, 언론을 잘 이용하는 정치인으로서 미래가 촉망된다"고 떠들었다.

영국 BBC는 'Shinjiro Koizumi: A rising star in Japanese politics'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현지 익명의 취재원(일본인)이 말하길 성미 급한 젊은이(young guy in hurry)'라고 평가했다면서 "셀럽과의 결혼은 차기 총리 자리를 노린 것"이라는 말도 했다. #

원래는 아버지와 같이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였다. 입각 직후에도 원자로 사고가 난 후쿠시마현을 찾아가 전임 환경대신이 한 원전 오염수 방류 주장을 어민들에게 사과하고 원전 폐지 찬성 입장을 밝혔다. 아버지 준이치로 전 총리도 원전 폐지를 강력히 주장하여 아베 내각을 곤란하게 하던 대표적인 원전폐지 찬성파로, 신지로에게도 "입각 후에 이를 이루어 달라"라고 당부하였다. 국민들은 물론 주변국들의 기대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정작 환경대신으로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답을 흐려, 원전 폐지에 대한 소신이 없어진 게 아닌가 의심을 받는 중이다.

더 타임스에서는 '2020년에 주목해야 하는 20인' 목록에 올렸다. #

그리고 아베 신조 총리직 사임 이후 총재 선거에 대해서는 8월 30일 , 고노 다로 방위대신이 출마하면 지원하겠다는 발언을 했다.# 9월 8일에는 스가 요시히데 지지로 선회했다. # 스가 내각에서는 환경대신직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

총리대신 지명 투표에서 고이즈미 신지로에 투표한 이름 모를 표가 하나 나와, 여야 가릴 것 없이 중의원들이 폭소하였다. 한일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자기 이름 쓰는 칸인 줄 알고 자기 이름을 쓴 거 아니냐", "신지로가 셀프투표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드립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 마루야마 호다카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 의원이 직접, 자신이 신지로에 투표했음을 밝혔다.

그래도 환경대신답게 경단련과 탈탄소 제휴를 하기도 했다.# 2021년 3월부터는 기후변화 문제 담당 업무를 겸하게 되었다.#

온실가스를 2030년까지 46% 감축하겠다는 일본정부의 발표가 있어 언론에서 이에 대해 환경대신인 그에게 왜 하필 46퍼센트인지 인터뷰하자 '멍하니 있었더니 뚜렷하지는 않지만 46이라는 숫자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고 대답해 웃음을 주고 있다.#초심을 잃지 않는 모습 고이즈미 신지로의 지역구 요코스카시의 지역번호가 "046"이다.

6. 2021 자민당 총재 선거

당초 2021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스가 요시히데 현직 총리 지지를 선언했으나1 9월 3일, 뜻밖에도 스가가 총재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는데 불출마를 여러차례 권한게 고이즈미 신지로라는 보도가 나왔다.2

그리고 본인도 총재선거 불출마를 선언하고, 같은 가나가와현 의원이자 친한 고노 다로를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총재 선거에서 고노 다로가 지면서 파벌 안배 따라 환경상에서 물러난다. 2021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본인과 스가가 지지한 고노가 기시다에 패배함에 따라 자민당 주류에서는 배제되게 되면서 비주류의 길을 걷게 되었다.

7. 기시다 내각 시절

2021년 10월 말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역시 79%의 압도적 지지율로 당선된 이후 시행된 당 인사에서 총무회장 대리로서 후쿠다 다쓰오 총무회장을 보좌하게 되었다. 과거 신지로가 자민당 농림부회장을 맡던 시절 후쿠다가 농림부회장 대리로서 신지로를 보좌한 바 있는데 관계가 역전되었다. 물론 두 사람은 청년 정치인으로서 공감대를 갖고 친한 사이이지만 자민당 당내에서 두 사람의 입지가 제대로 역전된 게 드러난다. 신지로는 계속되는 망언으로 인한 이미지 하락에 더해 현직 총리 기시다 및 아베, 아소에 대항한 적그리스도로서 요직에서 배제된 반면[6], 후쿠다는 자민당 총재선에서 젊은 의원들의 자율투표를 이끌며 소장파 리더로서 자리매김하고 당 4역인 총무회장직을 받아냈다.

2022년 9월 6일, 제2차 기시다 제1차 개조내각의 출범에 따라 국회대책부위원장에 임명되면서 한번 더 좌천되었다.# 국회대책위원회는 위원장과 수석부위원장이 존재하는데, 수석부위원장을 필두로 하여 여러 부위원장들이 있기 때문에 총무회장을 보좌하는 대리 직책에서 국대위원장, 그 것도 수석부위원장 산하의 부위원장으로 더 좌천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총리의 아들인데다가 어린 나이에 4선 의원으로 환경대신의 자리까지 오르며 승승장구 했던 과거에 비하면 확실히 밑바닥으로 좌천된 것이다.

다만 2023년 말부터 기시다 총리가 연이은 실정으로 '증세안경' 소리를 들으며 간 나오토 전 총리 이래 최악의 지지율을 보이는 가운데 공부회 등을 설립하며 은인자중하던 신지로가 설문조사에서 차기 총리감 1~2위에 드는 등 대권 잠룡으로 분류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요미우리 신문이 '다음 자민당 총재에 어울리는 정치인'을 조사한 결과,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을 꼽은 응답이 20%로 가장 많았다. 다음이 17%의 신지로, 고노 다로(12%) 순이었다. 이들은 수년 전부터 포스트 기시다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항상 수위권에 있었다.

하지만 계파가 중요한 일본 정계에서 계파가 없다는 것은 약점으로 꼽힌다. 자민당 총재 선거는 당원 투표보다 국회의원 표가 더 중요하므로 이들이 승리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아베파가 비자금 의혹으로 몰락하고 자민당 계파정치가 바뀔 경우 계파에 속하지 않은 의원들에게도 기회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7] #

또한 12월 15일 지지통신이 발표한 여론조사(8~11일) 결과 집권 자민당 국회의원 14명 가운데 고이즈미 전 환경상이 총리로 적합하다는 응답은 16.0%로 1위였다. 이 때문에 2024년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와 가까운 그가 비주류 세력을 결집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물론 일본은 의원내각제라서 신지로가 대중적 인기가 높고 자민당 내에서도 지지가 높아졌다 하여 당장 차기 총리가 되지는 않겠으나, 그 동안 꾸준히 인지도를 높히고 대중적으로 친근한 이미지를 쌓았기에 당내에서도 무시 못할 정도로 입지가 상승했다고 볼 수 있다. # 기시다 총리가 자신과 대적한 고노 다로를 지원한 고이즈미를 밑으로 좌천시키면서도 국민적 인기만 높지 당내 인기는 거의 없는 이시바 시게루처럼 아예 배척할 수 없는게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8]

8. 2024 자민당 총재 선거

현직 총리인 기시다 후미오가 차기 자민당 총재 선거에 불출마했는데, 이는 의원내각제와 사실상 자유민주당 일당 우위인 일본 정계 환경을 고려하면 사실상 총리 사임 선언이 되는지라 고이즈미 신지로 역시 총리 자리에 재도전할지 여부에 관심이 쏠렸다.

2024년 8월 21일, 공식 회견은 아직 없지만 사실상 일본 총리에 도전하는 게 확정이라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이미 신지로 본인이 자민당 의원 40여명에게 추천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이후 2024년 9월 6일, 공식적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함을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 자세한 내용은 2024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문서 참조.

외교정책 공약으로 기시다 내각의 외교 정책을 계승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편 납북자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총리가 되면 정상끼리 같은 세대이므로 지금까지 접근법에 얽매이지 않고 전제 조건 없이 마주하는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고 싶다"고 밝혔다. 북일정상회담을 성사시켰던 아버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노선을 이어가려는 모습.

1차 투표에서 3위로 낙선했는데, 의원 선거에서는 75표로 최다 득표를 했지만 당원당우 득표에서 다카이치 사나에의 109표, 이시바 시게루의 108표에 한참 못 미치는 61표를 얻었다.

고이즈미의 탈락 원인으로 가장 크게 지목되는 건은 선택적 부부별성 지지와 노인연금 수령 나이 80세 지지이다. 정치자금 게이트로 파벌이 해체되면서 뒷배가 사라진 3선 이하 의원들이 고이즈미의 주요 지지세력이지만[9] 이들은 비교적 젊은 층이 주로 포진되어 있는 반면, 당원표 의결권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고령인만큼 보수적인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런 이들에게 부부별성은 권위에 도전하는 정책이며 부부별성법에 직접 영향받을 결혼 적령기 일본 20대~40대 여성들은 부부별성 자체에 관심이 없어 양쪽에서 무관심또는 반대의사를 보인 것이며 거기에 노인연금 80세 안은 대중적 지지까지 떨어뜨릴수 있는 위험한 정책이었기 때문에 당원들의 비토정서를 자극한 것.

이번 패배는 고이즈미에게 고질적인 약점으로 지적되던, '환경대신 외의 다른 내각 실무 경력이 풍부하지 못해 부족하다.'는 부분이었으며 상술한 공약과 이로 인한 반대 여론도 경험 부족으로 인한 문제점이 터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결과적으로 보면 패배야 어쨌든 고이즈미의 정치적 입지면에선 패배와 별개로 손해는 없는 것과 다름없다. 이번 총재 선거는 고이시카와로 묶이며 정치적으로 연이 깊은 고이즈미, 이시바, 고노 3인방이 모두 출마했던데다가 주로 이들과 대립하던 아베 파벌도 아베의 피살 이후 자연스레 해체수순을 밟으며 이 3인방을 막아설만한 정적도 없다시피했기 때문, 즉 이번 총재 선거는 정적끼리의 힘겨루기보다는 막말로 고이시카와 3인방의 리더 결정전에 가까웠다. 선거 결과 공개 이전부터 이 3인중 총재가 나올거라는 추측이 지배적이었고 실제로 3인방중 1인인 이시바 시게루가 총재가되었던 만큼[10] 도중에 서로 갈라지지 않은 이상 고이즈미또한 이시바에 의해 내각에 재입성하거나 자민당의 주책을 맡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지는 만큼 아직 젊은 편인 고이즈미의 나이를 고려하면 훗날 재기할 수 있는 반석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본 선거에 대한 후일담으로 집에 와서 눈물을 흘리며[11] ‘아빠가 졌어, 인생이란 게, 질 때도 있단다'고 아이들에게 말했는데 4살 아들이 ‘아빠, 그러면 내일은 이길 거야?’라고 말해서 웃었다고 한다.# 원래는 이런 부끄러운 모습이라도 아들이 이걸 보고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아들의 순수한 한마디에 웃음이 나왔다고.

9. 자유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

총재선 1차에서 낙선한 후 결선 투표에서 이시바를 지원해 그의 당선 공신이 되었기 때문에 추후 내각이나 당에서 요직을 맡을 가능성도 점쳐졌고 실제로 자민당 부총재, 간사장, 정무조사회장, 총무회장과 같이 묶이는 당5역인 선거대책위원장에 선임되었다. #

이시바 총재가 총리 취임 후 10월 9일 중의원 해산 및 10월 27일 차기 중원선 투·개표를 결정했다고 하기 때문에, 고이즈미로서는 선거대책위원장이 되자마자 시험대에 올랐다. 조기 총선은 본인도 총재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바이므로 본인의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한편 중의원 해산 과정에서 의장 누카가 후쿠시로의 미숙한 진행과 야당의 반발로 인하여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탓에 만세 삼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고이즈미가 2017년부터 만세삼창을 하지 않은 사실이 재발굴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본인은 당시 “합리적인 이유도 없이 (관례를) 계속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라고 밝혔다.

10월 11일, 정치자금 파문을 최초로 단독적으로 조사하고 고발한 고베가쿠엔대학의 가미와키 히로시 교수가 "고이즈미가 정치자금 보고서에 지출 등을 과소하게 기재했다"는 이유로 고이즈미와 회계책임자, 사무담당자를 도쿄지방검찰청에 고소했다. #

제5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공 연정이 과반수를 넘기지 못하며 패배하자 사임하였다.# 사임하면서 '직을 그만두겠다는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라는 말을 해 펀쿨섹식 화법이 다시 도마에 오르며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번 조기총선은 자민당 총재선거 기간 중 고이즈미의 "새로운 정권이 탄생한다면 국민의 신임을 묻는 것이 당연(新政権ができたらすぐにでも国民の信を問うのが当然)"하다는 발언을 계기로 점화되었다. 조기총선에 반대한 이시바와는 정반대의 스탠스. 그러나 자신을 간판으로 내세운 선거에서 국민들에게 어필할만한 아젠다 셋팅에 실패한 덕분에 선거는 언론이 주도한 "정치와 뒷돈"이 주요 이슈가 되어버렸으며, 그 결과 대패로 귀결되고 말았다. 기시다 정권의 승계를 내세운 이시바와 함께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다만, 고이즈미의 스탠스대로 신속하게 해산하지 않았더라면 더 크게 패배했을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이번 총선에서 자민당이 기록한 비례득표는 26.73%인데, 이 수치는 자민당 역사상 최악의 패배라 불리는 2009년 총선 당시 자민당이 기록한 비례득표와 소숫점 둘째자리까지 정확히 일치한다.# 하지만 2009년에 야권에서 민주당 한 당이 얻었던 득표가 이번에는 입헌민주당, 국민민주당, 일본유신회 3개 당으로 흩어졌기 때문에[12] 자민당이 제1당 지위라도 사수할수 있었던 것.

실제로 이번 총선이 해산 이후 불과 18일만에 치러지는 바람에 야권에서 후보 단일화 논의가 거의 진행되지 못했다. 급한대로 입헌민주당 대표인 노다 요시히코비자금 스캔들 연루 의원 출마 지역구에서만이라도 단일화를 타 야당에 제안했고, 국민민주당과 일본유신회도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워낙 시간이 촉박했던지라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만약 총선이 조금 더 늦게 치러져 야권이 단일화를 성사시켰다면 자민당이 실제 결과보다 의석을 더 잃고 야당으로 추락했을수도 있단 이야기.[13]


[1] 일본도 지방 분권적인 성격이 강하고 그 지역 명문고 출신의 학맥이 강하다. 당연히 요코스카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인으로서 요코스카 최고 명문고를 나오는 게 도움이 많이 되었겠지만, 학업 능력이 그렇게 좋진 않았던 듯하다.[2] 편차치 45~50 정도인 중하위권 대학. 중고일관제라 무시험으로 그냥 입학할 수 있다.[3] 아버지 준이치로가 총리로 재직하던 시절이다. 이 대학원 동문으로 나카소네 야스타카 의원과 쓰지 기요토 의원이 있다.[4] 일례로 재선 중의원 의원에 불과하던 다이라 마사아키그림자 내각의 국무대신에 내정될 정도. 다이라 의원은 훗날 6선 의원 신분으로 이시바 내각 디지털대신으로 임명되어 진짜로 국무대신을 맡게 된다.[5] 당시 2위가 가나가와 15구 고노 다로, 3위가 가나가와 2구 스가 요시히데였다.[6] 신지로가 밀어준 고노 다로도 외무대신을 지낸 사람이 갈 직책이 아닌 당 홍보본부장으로 좌천되었다.[7] 그러나 총재선은 위에서 서술했듯이 국회의원 표로 결과가 정해지기 때문에, 자기가 어느 파벌에 소속되어있고 자·타 파벌의 지원을 받느냐 못받느냐가 당연히 중요하다. 특히 자신을 밀어주는 뒷배가 3A(아베 신조, 아소 다로, 아마리 아키라)와 같은 정치계의 거물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대표적인 무파벌 출신 총리인 스가 요시히데도 당시 상대 후보들이었던 기시다 후미오와 이시바 시게루의 파벌들을 제외한 모든 파벌들의 지원을 받고 당선되었고, 2021년 총재선에서 고노 다로가 자파벌인 지공회의 제대로된 지원을 받지 못해 파벌의 표가 갈라져 결선투표 끝에 2위로 낙선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이건 자민당의 계파정치가 바뀌지 않는다는 가정 하의 얘기고, 일본의 역사적 특성상 오래전부터 계파 정치를 중요시하고있는 일본 정치이기에 야당들 또한 계파가 존재하므로 오랫동안 이어져오고있는 계파 정치를 바꾸는 것은 거의 쉽지 않다. 대부분의 정치인들또한 말로만 계파 정치 타파를 외칠 뿐이지 속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8] 아베, 아소, 기시다로 이어지는 일본의 정치의 중심 세력의 입장에서 고이즈미를 아예 배척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고이즈미는 이시바와 다르게 4대에 걸쳐 의원으로 입성한 정치 가문으로 당장 전대인 부친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총리직을 수행한 일본 현대사의 거물 중 1인이었다. 이시바와 다르게 대대로 친분을 쌓은 의원들이 많고 비주류로 세력이 약하다고 하더라도 뭉쳤을 경우 자신들을 위협할 세력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기시다는 고이즈미를 좌천은 시켰으나 그 이상의 제재는 하지 않았다.[9] 이 사람들은 딱히 정치적 스펙트럼이 일관적이진 않지만, 자신들의 재선 가능성때문에라도 가장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고이즈미와 합세해 차기 선거를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10] 여기에는 결선에서 고이즈미가 자신을 포함한 지지세력의 표를 이시바에게 몰아준 영향도 상당수 있었다.[11] 원래 눈물이 많다고 한다.[12] 아닌게 아니라, 이 3개 당의 득표율(입헌민주당 21.2%+국민민주당 11.32%+일본유신회 9.36%)을 합치면 2009년 당시 민주당이 얻었던 득표(42.41%)와 비슷해진다.[13] 대표적인 사례가 비자금 스캔들로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도쿄 17구히라사와 가쓰에이다. 국민민주당 후보가 28.02%, 일본유신회 후보가 22.87%로 표를 거의 균등하게 나눠가지는 바람에 히라사와 가쓰에이가 34.78%라는 매우 낮은 득표율로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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