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12 16:30:49

견갑


1. 개요2. 상세3. 갑주별 발전사4. 매체 속 견갑

1. 개요

견갑()은 어깨를 보호하는 갑주 부분을 의미한다.

2. 상세

인체 구조상, 어깨란 부위는 의외로 급소라 불릴 수 있는 부분이다. 어깨를 다치면 팔이나 손이 멀쩡해도 무기를 사용하기 어렵고, 근처에 심장이 있는 탓에 큰 부상을 입으면 과다 출혈로 쉽게 이어지기 때문이다[1].

그런데 보병끼리의 싸움에서 타격 1순위가 되는 부분은 예나 지금이나[2] 상체고, 어깨는 상체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급소지만, 동시에 다치기 쉬운 부위이기도 했던 것.

때문에 갑옷 문화가 발달된 문명에선 투구흉갑 다음으로 갖추는 게 바로 견갑이다. 다만 어깨란 부분이 워낙 중요한 관절인 만큼, 활동성을 위해 자주 생략되는 갑주 부분이기도 했다.

3. 갑주별 발전사

3.1. 서양 갑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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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의 주요 무대인 청동기 시대 그리스에선, 어깨 전체를 청동판으로 가리는 방식이 유행했다. 이 당시의 전쟁은 헥토르아킬레우스처럼 소수의 영웅들이 주도했는데, 이들이 일기토를 벌이다가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기에 온몸을 감싸는 형태의 갑주를 입혔다. 따라서 견갑도 무식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그 크기가 팔 절반을 가리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견갑은 팔랑크스의 시대가 오자, 잠깐 주춤한다. 이제 영웅 한 명만 잔뜩 무장시켜서 보내는 게 아니라, 수많은 병사들을 무장시켜서 내보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문제는 이 시대는 대량 생산초도 보급이란 개념이 없던 시기라, 병사 개개인이 대장장이가 수제로 만든 비싼 갑옷을 알아서 구비해야 했다. 이러다 보니 병사들이 꼭 필요한 투구와 흉갑 정도만 구비해서 입고, 좀 여유가 있는 병사들조차 방패로 가릴 수 없는 다리를 위해 정강이 보호대를 사지, 견갑은 뒷전이었다. 때문에 부유한 몇몇 호플리테스나 견갑을 사용했고, 그나마 부담이 덜 되는 리넨 갑옷이 주류가 되서야 일선에서 자주 보일 수 있었다.

이후 등장한 로마 제국군이 그들의 상징인 로리카 세그멘타타를 입으면서, 견갑은 잠시나마 위상을 찾았다. 그러나 사슬 갑옷이 유행하면서 견갑은 다시 뒷전이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장갑판으로 보호하는 형식의 견갑이 그렇게 되었다. 그나마 로마군이 사슬 갑옷을 막 받아들였을 때, 견갑을 장착하려는 시도를[3] 했었는데, 붙이고 나니까 견갑 때문에 팔의 움직임에 제한이 생기면서 사슬 갑옷의 뛰어난 활동성이 퇴색되었다. 게다가 여러 실전을 치루면서 사슬 갑옷에는 별도의 견갑을 붙이는 것보단, 그냥 사슬 부분을 티셔츠처럼 어깨까지 늘리거나, 망토로 어깨를 가리는 게[4] 더 효율적임을 깨닫고 장갑 형식의 견갑을 퇴출한다.
<nopad> 파일:Maastricht_Book_of_Hours,_BL_Stowe_MS17_f154v_(detail).png <nopad> 파일:external/rautaportti.fi/MH-A0805B%201460%20Shoulder%20Armor%20with%20Besagew_01_LRG.jpg 파일:external/www.ageofarmour.com/pauldrons1.jpg
왼쪽부터 일레트, 스파울더와 베사규, 폴드런.
그러다 중세 중반이 되자, 견갑은 다시 중요시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 기준에선 유래가 없던 대전쟁인 십자군 원정 때문이었다. 십자군 전쟁의 격전 탓에 더욱 튼튼한 갑주를 찾던[5] 기사들은 당연히 견갑 또한 눈독을 들였다. 기사들의 초기 견갑은 이른바 일레트(Ailette)란 것으로, 가죽이나 나무로 만든 두꺼운 사각형 조각이었다. 이 일레트는 등장 초기엔 조그만 널판지 수준이었으나, 나중에 가면 후술할 오오요로이의 견갑처럼 방패 수준으로 커진다. 이 때의 기사들을 일레트에 가문 문장을 그리거나, 아예 히터 실드 모양으로 개조해서 개성을 드러내곤 했다.

기사 계급이 전사 직종에서 귀족 계층으로 변화하고, 동시에 판금 갑옷의 시대가 찾아오면서 일레트는 본격적인 견갑에 자리를 내준다. 일레트의 자리를 처음 받은 것은 14세기에 등장한 스파울더(Spaulder)란 견갑으로, 여러 철판을 겹쳐서 관절형으로 만든 물건이었다. 이 스파울더로 어깨 상부를 가리고, 베사규란 작은 방패로 겨드랑이를 가리는 것이 당대의 방식이었다. 스파울더의 다음 타자는 폴드런(Pauldron)으로, 15세기에 등장했다. 폴드런은 먼 선조인 청동기 그리스의 갑주가 그랬듯, 어깨 전체를 가리는 형식이었다. 어깨 보호구로써의 성능은 당대 최상이었고 덕분에 초기 머스킷 시대까지 살아남으나, 무게 문제와 어깨 움직임의 제한이 심각했기에 스파울더를 선호하는 기사들도 있었다.

여기까지 서양 견갑의 발전사인데, 해당 발전사에 잠깐 벗어난 사례도 있었다. 다름 아닌 동로마 제국의 갑주로[6], 최종 분할 이후부터 동방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은 탓이다. 때문에 서방과 다르게 어린갑 내지는 찰갑이 주류였고, 후술할 동양 갑옷처럼 찰갑 형식의 견갑을 오랫동안 사용했다. 물론 서방과 교류가 잦았던 제국 극후반에는 스파울더와 폴드런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3.2. 동양 갑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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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에서 출토된 찰갑. 찰갑 형삭의 견갑이 돋보인다.
동양권, 정확히는 동아시아권은 전통적으로 찰갑이 주류 갑옷이었다. 때문에 견갑 또한 찰갑 형식이 많았다, 이를 보여주듯, 중국애선 무려 상나라 시절에 만들어진 찰갑식 견갑이 출토되었다.

거란여진 또한 찰갑 형식의 견갑을 사용했으며, 몽골 제국 또한 이를 착용하고 상술한 일레트를 부착한 기사들과 자웅을 겨룬 바 있다.

이후 원말명초부터 두정갑이 찰갑을 밀어내고 점차 주류가 되어갔는데, 이에 따라 견갑도 자연스럽게 두정갑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만주족 전사이 이 두정갑 형식의 견갑을 애용했으며, 후금-청나라 시기 팔기군들의 주요 장구류이기도 햇다.

3.2.1. 한국 갑옷

고대 한국의 견갑은 크게 두 형식으로 나눌 수 있는데, 찰갑 형식과 판갑 형식의 견갑[7]이 그것이다. 전자는 고구려백제를 포함한 부여계 국가들이 주로 사용했고, 후자는 신라가야처럼 한반도 남부에서 기원한 국가들이 초기에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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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판갑의 견갑 부분.
이후 가야가 멸망하고, 신라가 고구려의 군사적 영향을[8] 받으면서 찰갑 형식이 판갑을 밀어내개 된다.

한국의 견갑이 찰갑 형식으로 통일된 이후, 전반적인 발전사는 타 동아시아 찰갑식 견갑과 유사하게 흘라간다. 그러다 이후 고려 시대에 쇄자갑(사슬 갑옷)이 주류가 되자, 유럽처럼 견갑은 잠시 주춤한다. 상술했듯이 사슬 갑옷은 별도의 견갑을 추가하는 것보다, 그냥 사슬 부분을 어깨까지 늘려서 보호하는 게 활동성 측면에서 좋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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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견갑의 고유함은 이후 조선 중후반에 두정갑이 주류가 되자, 그 형태에서 다시 나오게 된다. 한국의 두정갑식 견갑은 외피를 통해 흉갑과 연결된 것이 주요 특징으로, 쉽게 말해서 흉갑과 일체형이다. 이는 별도의 견갑을 둘러야 했던, 동시대 명나라와 청나라의 것과는 구분되는 특징이다. 이러면 활동성은 좀 떨어지는 대신에 빠른 착용과 탈의가 가능했고, 어깨와 겨드랑이 부분에 빈틈이 없으므로 추위로부터 몸을 더 잘 보호할 수 있었다.

여담으로 광화문 광장에 있는 이순신 장군상이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가, 조선 두정갑식 견갑의 이런 특징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장군상을 자세히 보면 견갑 부분이 흉갑과 분리되어 있는 게 확실하게 보인다. 상술했듯이 이런 형태는 명-청의 견갑 형식이라, 고증 오류를 넘어서 한국의 영웅을 중국 장수처럼 묘사했다고 지탄을 받은 바 있다. 이때의 비판이 워낙 컸던 탓에, 후에 세워지는 이순신 장군상들은 견갑을 비롯한 조선 갑옷 양식을 최대한 고증해서 만들어지고 있다.[9]

3.2.2. 일본 갑옷

고훈 시대 초반에는 가야의 영향을 받아, 한반도 남부의 것과 유사한 판갑식 견갑을 사용했다. 그러다가 후반부터는 백제와 남중국 지역의 영향을 받은 찰갑식 견갑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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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시대가 오고, 일본 갑옷의 상징적인 특징을 정립한 오오요로이가 등장한다, 오오요로이는 견갑의 역할을 극한으로 중시한 갑주로, 사진에서 보다시피 흉갑과 비슷할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한다.

이토록 비대한 크기는 초기 사무라이의 전술에 비롯된 것이다. 보병 위주의 백병전을 치뤘던 센코쿠 시대의 후배들과 달리, 초기 사무라이는 기마궁수의 성격이 강한 병종이었다[10]. 문제는 두 손으로 활을 잡고 조준에 집중하다 보면, 말 위의 무사가 어느새 적의 공격에 무방비해지곤 했다. 타 문화권의 기마궁수들은 멀리서 화살을 쏘아댔기에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웠지만[11],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현대 전차처럼 돌격하면서 쏘는 전술을 채택했기에 문제가 심각했다. 그래서 견갑의 크기를 키워, 방패의 역할을 부여한 것이다.

이런 커다란 견갑은 하마(下馬) 전투시에도 꽤나 쓸만했다. 일본도는 초기 타치 종류 정도를 제외하면[12] 두 손 운용이 기본인 무기였다. 이는 일본도 특유의 강한 절삭력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는데, 이러다 보니 방패를 쓰기가 참 애매했다. 때문에 커다란 견갑은 오오요로이의 후계인 마루도요로이[13]와 마루도구소쿠[14]까지 유지된다. 이 시기의 사무라이들은 커다란 견갑의 방호력을 살려, 적의 화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돌격하는 전술을 자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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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센코쿠 시대가 찾아오면서, 요로이식의 커다란 견갑은 점차 사라져갔다. 이는 대 기병 전술이 발달하면서, 사무라이의 마상 전투가 점점 줄어든 탓이었다. 애초에 마상 전투를 상정하고 만들어진 갑옷인지라, 말 위에 올라타서 싸울 일이 없어지자, 그냥 값만 올리는 장식품으로 받아들여진 것. 게다가 상술한 하마 전투에서의 이점도 조총의 등장으로 의미가 없어졌다. 화약의 힘은 견갑 따위로 막을 뭔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임진왜란 시기가 되면 요로이식의 커다란 견갑은 퇴출되고, 옛 판갑식 견갑으로 회귀한다. 그래도 전란 속에서 축적된 제련 기술이 있는지라, 고훈시대의 것보다 그 방호력과 내구도가 월등했다. 또한 커다란 견갑을 포기한 대신, 갑옷 안쪽에 입는 천옷 어깨 부분에 판철을 기워 넣어 견갑 효과를 기대하기도 했다.

이후 판갑식 견갑마저 에도 막부 시기가 되면, 오랜 평화 속에서 점차 작아진다. 거기에 막말 시기에 뒤늦게[15] 사슬 갑옷이 유행하면서 완전히 쇠퇴한다.

3.3. 방탄복

소총이 점차 창칼을 밀어내고 있어도, 유럽에선 총알로 인한 어깨 부상을 막을 목적으로 잠시나마 퀴레시어 등이 착용했다. 그러나 화약과 총탄의 발전은 견갑을 비롯한 갑주의 발전을 순식간에 압도했다. 이윽고 전열보병의 시대가 오자, 퀴레시어마저 쏟아지는 총알에 무용지물이 된 견갑을 벗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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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견갑은 아주 잠깐 다시 쓰였다. 이는 다름아닌 화포, 정확히는 파편을 막기 위해서였다. 1차 대전기가 되면, 중근세에 쓰였던 돌 내지는 쇠공을 쏘아대는 화포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착탄과 동시에 폭발하는 고폭탄이 주류가 된다. 폭발과 동시에 일어나는 파변 탓에 사상자가 배가 되었으므로, 참전국 각각의 군부는 병사들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갑옷를 입혔다[16]. 견갑도 이에 맞춰 재등장한 것으로, 파편으로 인한 어깨 부상을 막기 위해 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금속제 견갑 때문에 개머리판을 제대로 견착할 수 없다는 점이 지적되었고, 따라서 다시 퇴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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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의 IOTV 방탄복.
아이러니하게도 견갑이 다시 부활한 것은, 기존 견갑의 주자재였던 금속이 밀려났을 때였다. 냉전기의 여러 전쟁과 이라크전 등을 겪은 미군은 병사들의 어깨 부상을 최소화할 방안을 강구했다. 따라서 2007년부터 정식 생산된 IOTV 방탄복에 강화 섬유 재질의 견갑을 달아 보급했다. 현대전에 맞게 권총탄 정도는 막을 수 있고, 벨크로와 MOLLE 시스템이 적용되어 각종 장구류를 부착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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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러시아군은 중장갑복을 입고 시가전을 수행하는, 이른바 '돌격공병'부대를 운용하고 있는데, 이들 또한 방탄 성능이 있는 섬유제 견갑을 착용한다.

4. 매체 속 견갑

고전 특촬물에선 외면 받았던 갑주다. 초기 전대물울트라맨 시리즈는 말할 것도 없고, 가면라이더 시리즈 또한 그랬다[17]. 이는 CG를 비롯한 여러 특수 효과 기술이 부족했던 시절, 부족한 연출을 슈트를 입은 배우의 액션으로 채우려는 궁여지책 탓이었다. 과장된 액션을 펼쳐야 하니, 자칫 방해가 되는 견갑을 포기했던 것. 때문에 견갑은 직접 액션을 펼치는 일이 드물었던 악당 측 간부 캐릭터들이나 착용했다.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운 2000년대 들어서는, 가면라이더 가이처럼 견갑을 주요 아이템으로 쓰는 캐릭터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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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시리즈의 클론 트루퍼들은 펄드론이란[18] 견갑을 착용한다. 특이하게도 방호 목적보다는, 경력 내지는 계급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착용한다. 설정상 특수 훈련인 ARC 양성 교육 과정[19]을 수료한 인원에게 수여되는 것이며, 아예 해당 과정을 주특기로 한 ARC 트루퍼들은 양쪽 어깨에, 수료만 한 인원들은 한 쪽에만 착용한다. 이후 클론 트루퍼를 이은 스톰 트루퍼들도 착용하는데, 이들은 딱딱한 재질의 펄드론을 썼던 클론들과 다르게 가죽제를 선호하며 병과 구분을 위해 착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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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해머 40K의 등장 세력, 아뎁투스 아스타르테스[20] 특유의 둥근 견갑으로 유명하다. 해당 세계관에서 아스타르테스의 견갑은 단순한 갑주 이상으로 묘사되는데, 자신의 소속과 경력을[21] 나타내는 건 물론이고 유전적 뿌리가 어디인지도 나타내는 일종의 신분증으로 쓰인다. 때문에 작중의 아스타르테스들은 파견을 나가도 갑주 한 쪽은 이전의 도장을 계속 유지하여 자신이 누군인지 드러내고, 반대로 신상을 숨길 때는 견갑에 검은 칠부터 한다.
[1] 때문에 옛 독일 국방군무장친위대는 병사들의 어깨 아래, 겨드랑이 근처에 혈액형 등을 문신으로 생겼다. 당연히 빠른 수혈 등을 위해서였지만, 문신을 못 알아볼 정도로 어깨가 망가지면 치료가 필요 없기에, 살릴 수 있는지를 구분할 때도 쓰였다.[2] 21세기 군대에서도 사격 훈련을 하면, 인간 상체 모양의 과녁판에다가 한다.[3] 특이하게 견갑 또한 사슬로 만들려 했었고, 이전에 쓰던 리넨 갑옷을 참고해서 디자인했다.[4] 천 갑옷 효과가 있었다.[5] 이 과정에서 나온 게 그레이트 헬름이다.[6] 이에 영향을 받은 문화권의 갑옷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7] 학계에선 '상박갑' 혹은 '어깨가리개'라고도 부른다.[8] 신라-왜 전쟁 때 온 고구려의 구원군으로부터 받은 것도 있고, 삼국 통일 이후에 구 고구려 출신 백성들이 군역을 하면서 흘러온 영향도 있다.[9] 대한민국 해군사관학교의 이순신상이나, 통영시의 '병선마당' 조형물이 대표적이다.[10] 사무라이의 별칭인 유미토리(弓取り, 활잡이)도 이런 연유로 굳어진 단어다.[11] 때문에 스키타이파르티아 제국이 운용한 궁기병들은 경무장만 하고 전장에 참여하곤 했다.[12] 타치는 기병도 역할을 했던 도검이었다. 말 고삐를 잡은 채로 사용하는 기병도 목적상, 당연히 한 손 운용이 기본이었다. 그러다 하마 전투가 잦아지면서 오오타치처럼 두 손으로 쓰는 타치가 등장하게 된다.[13] 한자로는 '환동개'. 한국사에선 고려 시대에 칩입한 왜구들이 주로 썼던 걸로 유명하다.[14] 당세구족의 초기 형태다.[15] 동시대 한국과 중국, 서유럽에선 사슬 갑옷이 퇴출된지 오래였다.[16] 그 중 실용성을 인정받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방탄모다.[17] 일례로 가면라이더 1호를 보면, 어깨 견갑이 없음을 할 수 있다.[18] 상술한 폴드런에서 모티브를 얻었음을 알 수 있다.[19] 현실 한국군으로 치면 공수 훈련 및 특전 훈련 비스무리한 거.[20] 스페이스 마린이라고도 한다.[21] 일례로 카토 시카리우스는 견갑에 훈장을 붙여서 자신의 경력을 뽐내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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