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8-12-09 04:59:18

RC 데포르티보 데 라 코루냐

파일:LaLiga2.png
2018-19 시즌 참가구단
파일:Granada.png 그라나다
(Granada)
파일:attachment/틀:세군다 디비시온/NUM.jpg 누만시아
(Numancia)
파일:Deportivo.png 데포르티보
(Deportivo)
파일:LasPalmas.png 라스팔마스
(Las Palmas)
파일:CF_Reus_new_logo.png 레우스
(Reus)
파일:attachment/틀:세군다 디비시온/LUG.jpg 루고
(Lugo)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Rcd_mallorca.svg.png 마요르카
(Mallorca)
파일:CF_Rayo_Majadahonda.png 마하다혼다
(Majadahonda)
파일:Málaga.png 말라가
(Málaga)
파일:attachment/틀:세군다 디비시온/ZAR.jpg 사라고사
(Zaragoza)
파일:07PDIur.jpg 알메리아
(Almería)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37px-Albacete_balompie.svg.png 알바세테
(Albacete)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D_Alcorc%C3%B3n_new_logo.png 알코르콘
(Alcorcón)
파일:Extremadura_UD.png 에스트레마두라
(Extremadura)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0px-Elche_CF_logo.svg.png 엘체
(Elche)
파일:LlFefzg.jpg 오비에도
(Oviedo)
파일:Osasuna.png 오사수나
(Osasuna)
파일:G6qGWPF.jpg 짐나스틱
(Gimnàstic)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80px-C%C3%A1diz_CF_logo.svg.png 카디스
(Cádiz)
파일:gNvfBCx.jpg 코르도바
(Córdoba)
파일:attachment/틀:세군다 디비시온/TEN.jpg 테네리페
(Tenerife)
파일:Gijon.png 히혼
(Gijón)


파일:Deportivo.png
RC 데포르티보 데 라 코루냐
R.C. Deportivo de La Coruña
정식 명칭 Real Club Deportivo de La Coruña, S.A.D.
별칭 Blanquiazul (청색과 백색), Turcos (터키사람들)}}}'''
창단 1906년 3월 2일
소속 리그 세군다 디비시온 (Segunda División)
연고지 갈리시아 주 라 코루냐 (La Coruña)
홈 구장 에스타디오 리아소르 (Estadio Riazor)
(34,600명 수용)
회장 티노 페르난데스 (Tino Fernández)
감독 나초 곤잘레스 (Natxo González)
주장 페드로 모스케라 (Pedro Mosquera)
공식 웹 사이트 및 소셜 미디어 파일:Deportivo.png 파일:트위터 아이콘.pn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pn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png 파일:유튜브 아이콘.png
우승 기록
프리메라 리가 (1부)
(1회)
1999-2000
세군다 디비시온 (2부)
(5회)
1961-62, 1963-64, 1965-66, 1968-69, 2011-12
코파 델 레이
(2회)
1994-95, 2001-02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3회)
1995, 2000, 2002
UEFA 인터토토 컵
(1회)
2008
클럽 기록
최고 이적료 영입 세르히오 (Sergio)
(2001년, From RCD 에스파뇰, 1790만 €)
최고 이적료 방출 플라비우 콘세이상 (Flávio Conceicao)
(2000년, To 레알 마드리드 CF, 2500만 €)
최다 출장 프란 곤잘레스 (Fran González) - 550경기 (1988-2005)
최다 득점 디에고 트리스탄 (Diego Tristán) - 95골 (2000-2006)

1. 소개2. 경기장3. 역사
3.1. 창단3.2. 역사를 바꾼 렌도이로3.3. 90년대: 수페르 데포르3.4.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하보 제네레이션3.5. 2000년대 중후반: 베이비 데포르3.6. 2010년대: 강등과 잔류 사이
4. 거쳐간 선수5. 근황6. 선수단7. 기적 메이커

1. 소개

90년대 초중반엔 스페인을, 2000년대 초중반엔 유럽을 호령했던 신흥 강호

또 하나의 기적을 써내려 간 팀

언더독의 교과서

정식 명칭은 레알 클루브 데포르티보 데 라 코루냐지만 흔히 데포르티보 혹은 데포르로 불린다. 스페인 서북부 지역 갈리시아의 항구 도시 아 코루냐를 연고로 하며 홈 구장은 리아소르다.

지금이야 프리메라 리가 잔류가 목표인 약체에 불과하지만 프리메라 리가 우승을 경험해 본 9개 클럽 중 하나로 한 때는 레알 마드리드의 영원한 천적이자 캄프 누에서 바르샤를 4:2로 격파할 만큼 화끈한 공격력을 보유한 팀이었다. 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중후반까지 데포르티보가 자국 무대와 유럽 챔피언스 리그에서 보여줬던 강력함은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이어 스페인에서 다섯 번째 클럽으로 불리기 손색이 없다.

라이벌로는 셀타 비고가 있으며 스페인어로는 Derbi gallego(갈리시아 더비)로 불리며 갈리시아어로는 O noso derbi(우리들의 더비)라고 칭한다. 스페인에서 거칠기로 소문난 더비 중 하나로 매번 스페인 정부는 위험도가 높은 경기로 지정해 추가 경찰 인력을 투입시킨다. 최근 들어 크고 작은 다툼이 항상 일어났는데 이는 두 클럽에 로컬 보이들이 많아진 것이 그 이유다. 특히 성골 셀타 유스인 이아고 아스파스우고 마요는 매번 데포르티보 팬들을 도발하는 골 세레모니나 제스쳐, 과격한 SNS 포스팅으로 구설수에 올라왔다. 11/12 시즌과 12/13 시즌 셀타는 두 선수에게 자체 징계를 내렸을 정도.

셀타 팬들은 셀타가 진정하게 갈리시아를 대표하는 구단이라 자부한다. 셀타의 홈 유니폼은 전통적으로 하늘색인데 하늘색은 갈리시아를 상징하는 색이다. 실제로 데포르티보가 연고로 하는 갈리시아 북부보다 셀타가 연고로 하는 갈리시아 남부가 더 자역색이 깊다. 셀타 팬들은 데포르 팬들을 가리켜 터키놈 내지 터키년이라 칭한다. 한편 데포르 팬들은 셀타 팬들을 포르투갈 촌뜨기라며 받아친다.데포르티보는 최근 원정 유니폼을 갈리시아기의 모양을 본따서 디자인하고 있는데 이를 두고 셀타 팬들은 '터키놈들이 갈리시안 코스프레하네.'라며 대차게 까는 중.

셀타 응원가 중에는 '스페인에 데포르티보는 데포르티보 알라베스 밖에 없다.'가 있을 정도. 한편 데포르티보 팬들은 '데포르티보는 6개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데 셀타는 타이틀 하나도 없는 근본 없는 클럽이다.'라며 깐다. 최근에야 셀타가 데포르티보에 비해 인지도가 높지만 역사적으로 셀타는 대부분의 시간을 데포르티보에게 얻어터지며 살았다. 그래선지 데포르 팬들이 셀타를 혐오하는 정도가 8이라면 셀타 팬들이 데포르를 혐오하는 정도는 10으로 보면 될 듯. 유독 셀타 팬들이 더 격하게 반응한다.

최근 들어 갈리시아 지방 정부는 아빠는 데포르 팬, 아들은 셀타 팬 같은 테마로 훈훈한콩가루 집안 더비 홍보 영상을 만들어 험악한 분위기 형성을 막고 있다. 평소엔 같은 갈리시안이지만 축구에 있어선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살벌하기 때문. 지역색이 뚜렷한 스페인은 국가 외에도 각 지역별로 지역가가 있다. 경기 시작 전에 갈리시아 지역가를 함께 떼창하는데 이 순간만큼은 정말 하나가 된다, 그러나 지역가가 끝나면 하나고 뭐고 없고 욕설이 난무하는 등 완전 남남이 되는 진기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이 외에 라이벌로는 발렌시아가 있는데 이는 데포르티보의 역사에 항상 걸림돌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93/94 시즌 데포르티보는 발렌시아에게 무승부를 거두며 프리메라 리가 우승을 코 앞에서 놓쳤고 10/11 시즌에는 발렌시아에게 패배하며 20년 만의 강등을 확정지었다. 데포르티보와 발렌시아가 프리메라 리가 4강을 형성했을 시절에는 발렌시아 팬들 역시 라이벌 의식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으나 지금은 많이 사그러든 상태다.

2. 경기장


정식 명칭은 에스타디오 무니시팔 데 리아소르(Estadio Municipal de Riazor)지만 현재는 스폰서십 계약으로 에스타디오 아방카-리아소르(Estadio ABANCA-Riazor)다. 현지 언론이나 팬들은 여전히 리아소르라 부른다. 2015년 새로이 전광판을 설치하며 수용 인원이 34,611석애서 32,660석으로 줄었다.

1906년에 개장했으나 당시엔 운동장 외엔 아무런 시설이 없었다. 1944년이 되서야 대대적인 리모델링으로 라커룸, 관중석 같은 시설들이 들어섰다. 구단에서는 리아소르의 기원을 1944년으로 보고 있으며 1944년 10월 28일 발렌시아 전을 리아소르의 첫 경기라 명시하고 있다. 이후 1982 스페인 월드컵을 대비해 또 한 번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쳤고 월드컵 당시 3경기를 리아소르에서 치렀다.

데포르티보는 한 때 홈 극강으로 불릴 만큼 리아소르에서 쉽게 패하지 않았고 원정 팀에게 리아소르는 지옥이나 다름 없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리아소르를 15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너뜨리지 못했고, 02/03 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과 준우승팀인 AC 밀란과 유벤투스 또한 이 곳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맛봐야 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장엄함도, 누 캄프의 웅대함도 갖추고 있지 못한 이 자그마한 구장은 오직 32,660명의 관중 만을 수용할 수 있을 뿐이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리아소르가 갖고 있는 이 마력의 원천은 바로 '가족이나 다름 없는 12번째 선수들'에게 있었다. 누 캄프 만큼의 대군은 아니지만, 클럽을 향한 애정으로 넘쳐나는 소수 정예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리아소르 구장을 '철옹성의 요새'로 불리우게끔 만들었다. 리아소르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레알 마드리드)와 누 캄프(바르셀로나)를 비롯해 비센테 칼데론(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메스타야(발렌시아) 그리고 산 마메스(아슬레틱 빌바오)와 함께 스페인에서 가장 유서 깊은 경기장 중 하나로 평가 받고 있다.

3. 역사

3.1. 창단


1906년 창단되어 스페인 왕실로부터 처음 레알 칭호를 부여받았다. 셀타 비고와 함께 갈리시아를 대표했지만 스페인 내에선 오랜 시간 무명 구단으로 취급받았다. 1941년부터 1957년까지 프리메라 리가의 일원이었으나 중하위권을 맴도는 팀에 불과했다. 이 시절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레전드 중 하나인 루이스 수아레스가 데포르티보 유스를 거쳐 1군에서 잠시 활약했다.

3.2. 역사를 바꾼 렌도이로


오랜 시간 무명 구단에 불과했던 데포르티보의 역사가 바뀌기 시작하니 때는 1988년이다. 아 코루냐는 당시 인구가 20만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소도시로 산업 기반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먹고 살기 바쁜 어촌이었다. 게다가 데포르티보는 아 코루냐를 대표하는 구단이었으나 오랜 시간 트로피 하나 없이 하부 리그만 전전했으니 당연히 시민들은 축구에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1982년 월드컵 유치로 홈 구장 리아소르를 대대적으로 보수했으나 데포르티보의 성적이 나빠 적자만 거듭하니 결국은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지방 정부에서도 내다버린 존재가 되어버렸고 당장 해체를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새롭게 부임한 구단주 아우구스토 세사르 렌도이로는 막대한 부를 가진 자본가도 아니었다.

아우구스토 세사르 렌도이로는 여느 다른 구단주들처럼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업가가 아니었다. 렌도이로는 아 코루냐 출신으로 법을 전공한 변호사 출신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축구, 필드 하키를 비롯한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다. 시 의원에 있으면서 아 코루냐의 하키 팀 HC Liceo의 구단주를 맡은 후 팀의 스페인 리그, 유럽 대회 및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시킨 경험이 있었다. 때마침 시 의회에서는 세금만 축내던 데포르티보의 구단주를 몰색하던 중이었고 렌도이로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낙점받았다. 렌도이로는 데포르티보가 당장 해체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기에 몇 번을 고사하다 주위의 계속된 권유에 어쩔 수 없이 승낙한다.

렌도이로는 1988년 부임한 이후 데포르티보는 3년 만에 프리메라 리가로 끌어올렸다. 20년 만에 프리메라 리가로 복귀한 것이었다. 렌도이로 구단주는 "바르샤, 마드리드, 우리가 왔다!(¡Barça, Madrid, ya estamos aquí!)"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데포르티보를 프리메라 리가 우승팀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주위에선 당연히 말도 안되는 헛소리로 치부했고 강등 걱정이나 하라며 비웃기 바빴다.

그러나 렌도이로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1992년 여름 그는 데포르티보의 역사를 바꾼 두 건의 영입을 성사시키니 바로 베베투마우로 실바였다. 당시 베베투와 마우로 실바는 이미 브라질 대표팀에 발탁되었을 정도로 남미에선 유명세를 떨치는 선수들이었다. 반면 데포르티보는 내세울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무명 구단에 불과했다. 렌도이로는 베베투와 마우로 실바를 직접 만나기 위해 몸소 브라질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갈리시아는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 브라질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강조해 두 선수의 마음을 잡는데 성공한다.

3.3. 90년대: 수페르 데포르


렌도이로의 지극정성 끝에 영입한 베베투와 마우로 실바를 필두로 기존의 미로슬라프 듀키치, 프란 곤살레스, 파코 리아뇨를 앞세워 데포르티보 승격한 지 2년 만에 바르셀로나와 최종 라운드까지 우승 경쟁을 펼치는 강팀으로 변모하게 된다.

92-93 시즌: 프리메라 리가 3위 등극. 클럽 역사상 첫 유럽 무대 진출. 베베투는 29골로 프리메라 리가 득점왕 등극. 클럽 역사상 첫 득점왕 배출.

93-94 시즌: 프리메라 리가 준우승. 발렌시아와의 38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 종료 직전 미로슬라프 듀키치가 페널티킥을 실축. 우승 목전에서 바르셀로나에게 타이틀을 헌납.

94-95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 클럽 역사상 첫 타이틀 획득. 그와 동시에 두 시즌 연속 프리메라 리가 준우승. 스페인의 신흥 강호로 급부상.

95-96 시즌: 데포르티보, 유럽 컵 위너스 컵(현재 UEFA 컵 통합) 4강 진출. 그러나 유럽 무대 병행과 일부 주전 선수들의 노쇠화로 인해 리그는 9위로 마감. 베베투는 데포르티보를 떠나 브라질로 컴백.

96-97 시즌: 프리메라 리가 3위. 700만 유로에 영입된 히바우두가 시즌 21골을 기록하며 센세이션을 일으킴.

1997년 여름: 이적 시장 마감일에 바르셀로나히바우두의 바이아웃 2550만 유로를 지불하며 그 유명한 '히바우두 사건'을 일으킴. 히바우두 중심으로 97/98 시즌을 구상하던 데포르티보에겐 이루 말할 수 없는 치명타. 데포르티보-바르셀로나 간의 관계 또한 급속도로 악화.

97-98 시즌: 히바우두 잃은 데포르티보는 프리메라 리가 12위로 추락. UEFA 컵에서도 1라운드 탈락.

3.4.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하보 제네레이션


98-99 시즌: 하비에르 이루레타 취임. 데포르티보를 새로운 팀으로 리빌딩하기 시작. 프리메라 리가 6위 등극 & UEFA컵 진출권 획득.

99-00 시즌: 구단 역사 상 첫 프리메라 리가 우승. 자우밍야, 로이 마카이, 빅토르 산체스, 마누엘 파블로 등이 '하보 제너레이션' 구축.

2000년 여름: 렌도이로, '유로 데포르티보' 정책 선언. 후안 카프데빌라, 후안 카를로스 발레론, 디에고 트리스탄 등의 영입에 4,000만 유로 가량 투자.

00-01 시즌: 프리메라 리가 준우승. 챔피언스 리그 8강.

01-02 시즌: 프리메라 리가 준우승. 챔피언스 리그 8강.

02-03 시즌: 프리메라 리가 3위. 챔피언스 리그 16강.

2003년 여름: 천문학적인 부채로 인해 긴축 정책 선언. 로이 마카이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

03-04 시즌: '리아소르의 기적'을 일으키며 사상 첫 챔피언스 리그 4강 진출. 프리메라 리가 3위.

3.5. 2000년대 중후반: 베이비 데포르


04-05 시즌: 프리메라 리가 8위.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 탈락. 하비에르 이루레타 감독 성적 부진으로 자진 사퇴.

05-06 시즌: 프리메라 리가 8위. '유망주들의 아버지' 호아킨 카파로스 감독을 중심으로 리빌딩 시작. 전술적·정신적 지주 발레론의 부상으로 후반기 하락세.

2006년 여름: 렌도이로, '베이비-데포르티보' 정책 선언. 자유계약 선수, 명문 클럽 유스팀 선수들 위주로 리빌딩 단행.

06-07 시즌: 후반기 옅은 스쿼드를 실감하며 13위로 시즌 마감. 선수 및 구단 운영진과 관계가 틀어진 호아킨 카파로스는 자신 사퇴.

2007년 여름: 미구엘 앙헬 로티나 취임. 멕시코 신성의 안드레스 과르다도 영입에 700만 유로에 영입.

07-08 시즌 전반기: 20라운드까지 19위에 머물며 유력한 강등 후보로 선정.

07-08 시즌 후반기: 21라운드 바야돌리드 전 이후 5-2-2-1 포메이션으로 파격적인 변화를 단행. 세비야 FC(홈) 승리, 발렌시아 CF(원정) 무승부, FC 바르셀로나(홈) 승리, 레알 마드리드 CF(홈) 승리를 비롯해 수직 상승세를 달리며 8위로 시즌 마감. 인터토토 컵 통해 UEFA 컵 진출.

2008년 여름: 07-08 시즌을 통해 크게 성장한 필리페 루이스안드레스 과르다도를 중심으로 진정한 '베이비-데포르'로 거듭남.

08-09 시즌: 프리메라 리가 7위. UEFA 컵 32강 진출.

09-10 시즌: 프리메라 리가 10위. 전반기 4위~6위를 맴돌며 밝았던 시즌 전망. 2010년 1월, 팀의 핵심 과르다도필리페가 동반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며 후반기 급격히 추락.

2010년 여름: 팀의 핵심 필리페 루이스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 몰락의 서막

10-11 시즌: 프리메라 리가 19위. 20년 만의 강등. 미구엘 앙헬 로티나 감독 자진 사퇴.

3.6. 2010년대: 강등과 잔류 사이


2011년 여름: 호세 루이스 올트라 취임. 세군다 리가로 강등에도 불구하고 더 뜨거워진 팬들의 성원. 쏘시오(연간 회원)의 수가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 & 세군다 리가 통틀어 10위. 한편 안드레스 과르다도, 디에고 콜로토, 라우레 그리고 아란수비아까지 핵심 선수들의 잔류 선언.

11-12 시즌: 세군다 리가 1위 & 승격. 세군다 리가 최다 승점 & 연승 기록 경신.

12-13 시즌: 프리메라 리가 18위. 구단 역사 상 처음으로 한 시즌에 감독이 2번 교체. (호세 루이스 올트라도밍고스 파시엔시아페르난도 바스케스). 페르난도 바스케스 부임 후 브루누 가마의 맹활약에 힘입어 연승 행진을 달리기도 했으나 최종전 레알 소시에다드에게 0:1로 패하면서 강등 확정.

2013년 여름: 강등에 따른 극심한 재정난을 견디지 못하고 파산. 3부 리그 다이렉트 강등 위기. 말이 3부 리그지 데포르티보라는 구단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사건.

2013년 겨울: 투표 결과로 티노 페르난데스가 새로운 구단주로 취임.

13-14 시즌: 세군다 리가 리가 2위 & 승격

2014년 여름: 티노 페르난데스 구단주, 의견 차이로 인해 승격을 이끈 페르난도 바스케스의 갑작스런 해임. 과거 사라고사를 이끈 빅토르 페르난데스 선임.

14-15 시즌 전반기: 승격팀 치곤 나쁘지 않은 행보. 하지만 계속된 주전 선수들의 부상으로 강등권으로 추락. 빅토르 페르난데스 경질.

14-15 시즌 후반기: 15년 4월, 데포르티보의 황금기를 이끈 빅토르 산체스 부임. 최종전 캄프 누에서 0:2에서 2:2 극장을 만들어 내며 기적 같은 잔류.

15-16 시즌: 리그 15위. 전반기 최우수 감독으로 선정된 빅토르 산체스. 라 리가 구단 중 최소 슈팅 허용 및 바르셀로나와 함께 최소 패를 기록하며 꾸준히 중상위권에 랭크. 그러나 후반기 들어 전술적 한계, 빅토르 산체스와 일부 선수 불화로 하락세.

2015년 여름: 선수단 불화를 이유로 빅토르 산체스 경질. 지난 날 에이바르의 기적을 이끈 가이스카 가리타노 선임. 불화를 일으킨 선수들을 방출하는 대신 빅토르 산체스를 경질하면서 큰 논란을 일으킴.

16-17 시즌: 16위. 성적 부진으로 2월 27일 가이스카 가리타노 경질. 2월 28일 페페 멜 선임.

17-18 시즌: 성적 부진으로 10월 중순 페페 멜 경질. 파브릴(데포르티보 B)의 3부 리그 승격을 이끈 크리스토발 파랄로를 1군 감독으로 승격.
2월6일 셰드로프 감독선임 하지만 리그 35라운드 바르셀로나전패배로 강등확정

4. 거쳐간 선수

데포르티보를 거쳐간 선수들의 특징이 있다. 하나 같이 네임 벨류는 떨어지지만 재능 하나 만큼은 뒤쳐지지 않는 선수들이었다는 것이다. 마치 흙 속에 가려진 진주들처럼 말이다.

루이스 수아레즈: 우루과이의 수아레즈가 아니라, FC 바르셀로나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레전드로 유명한 스페인 출신의 수아레즈이다. 데포르티보 유스 출신으로 53/54 시즌 한 시즌 몸담은 후 이적했다. 데포르티보에서 선수 뿐만 아니라 감독으로서도 활약했다.

아만시오 아마로 : 레알 마드리드의 레전드인 아만시오 아마로 역시 데포르티보에서 데뷔했다. 4시즌을 뛰었으며, 그 당시 2부였던, 데포르의 승격에 기여했으며, 이를 지켜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직접 지목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시킬 만큼의 재능이었다. 이후, 금빛 화산 디 스페타노와 함께 활약했다.

프란 곤살레스: 아 코루냐에서 태어나 레알 마드리드의 이적 제의도 거부한 채 축구 인생 한 평생을 데포르티보에 바친 레전드. 데포르티보의 10번이자 주장으로서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빠르진 않았으나 재간둥이 스타일의 윙어. 그가 스페인 대표팀으로 데뷔하던 날, 라 코루냐 시민들이 갖는 자부심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인구 20만의 소도시 라 코루냐에서 프란은 누군가에겐 친구이자 누군가에겐 친아들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은퇴 후엔 맨체스터 시티 FC에서 코칭을 배우고 있으며 아들 니코 곤잘레스는 FC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주목받는 유망주 중 한명이다. 다만 2000년대 중반 위약금 파문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데포르티보를 강등으로 내몰 뻔한 사건 이후로 일부 팬들은 그에게 등을 돌린 상태.

베베토: 호마리우와 투톱으로 뛰면서 94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아기 안기 세레모니로 한국에서도 유명하지만 데포르티보 레전드라는 사실은 잘 모른다. 데포르티보 소속으로 131경기 출장 86골을 기록했다. 베베토의 조상은 데포르티보의 연고지인 갈리시아 출신이었다. 활약도 활약이지만 갈리시안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 팬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데포르티보 팬들의 가슴 속엔 호마리우보다 위대한 스트라이커.

마우로 실바: 레돈도, 과르디올라와 함께 90년대 프리메라 리가 수비형 미드필더 삼대장. 왕성한 스태미너와 투철한 프로 정신으로 30대 중반까지 데포르티보의 중원을 든든히 받쳐줬다.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수비진을 보호하는 능력 만큼 역대급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에 수준급의 키핑력과 패싱력은 덤. 전투적인 수비형 미드필더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는 평. 다만 공격 축구를 사랑하는 브라질의 특수성으로 인해 젊을 시절엔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 전문적인 수비형 미드필더의 중요성이 늘어난 90년대 후반부터 재조명 받는 중이다.

- 존 토샥(리버풀의 스타 플레이어 & 웨일즈 출신의 명장) "세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다. 컨디션이 좋은 날엔 적토마와 같다."
- 스페인 언론들 "근래 역사를 통틀어, 클로드 마켈렐레 만큼 훌륭한 수비형 미드필더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마우로 실바 정도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 당시 마켈렐레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무쌍을 쌓을 시절
- 리아소르의 기적 당시 카카를 완전히 지워버린 일화도 유명하다. 당시 카카는 21살, 마우로 실바는 36살.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자우밍야: 브라질 출신의 희대의 테크니션. 화려한 발재간으로 큰 명성을 떨쳤는데 호나우지뉴가 등장할 당시 제2의 자우밍야라고 불렀을 정도. 우리가 봤던 호나우지뉴가 했던 등 패스나 필립 플랩 같은 기술은 이미 자우밍야가 먼저 하고 있었다. 사포를 가장 실용적으로 쓴 선수기도 하다. 스페셜 보면 레알 수비진을 바보로 만드는 사포 패스가 나온다. 어쨌든 99-00 시즌 데포르티보의 라 리가 우승을 이끈 장본인이다. 98-99 시즌 6위하던 팀을 우승으로 이끈 정말 신들린 활약이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그 시즌 활약상만 놓고 봤을 때 자우밍야>히바우두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 승선이 유력했으나 당시 데포르티보 감독 하비에르 이루레타에게 훈련 도중 박치기를 했다. (지단보다 박치기도 먼저 했다!) 이 사건으로 스콜라리 감독에게 미운 오리로 전락하며 최종 명단에서 탈락당했다.

도나토: 브라질 출신이나 스페인 국대를 지낸 수비형 미드필더 겸 중앙 수비수. 데포르티보 우승 당시 나이가 36세였지만 왕성한 스태미너로 우승을 견인했다.

아프리카: 아프리카 최고의 수비수로 평가 받던 모로코 국적의 누레딘 나이베와 아프리카 최고의 골키퍼 송고 역시 우승 멤버로 데포르티보의 첫 황금기를 이끈 장본인이다. 이 외에 모로코가 낳은 테크니션 무스파타 하지바시르도 있다.

남미: 우루과이 국적의 스트라이커이자 비운의 아이콘 왈테르 판디아니, 2002 월드컵을 앞두고 베컴 발등을 부러트려 유명해진 알도 두세르, 아르헨티나 국가대표를 지낸 멀티 플레이어 리오넬 스칼로니가 있다. 뉴캐슬의 주장 파브리시오 콜로치니도 데포르티보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다.

유럽 출신으로는 주로 2000년대 활약했던 선수들로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파울레타: 포르투갈 부동의 원톱인 그 파울레타가 맞다. 로이 마카이에 가려지고 디에고 트리스탄이 새롭게 이적하면서 보르도로 팔려갔다. 데포르티보 소속으로 41경기 12골을 기록했다.

디에고 트리스탄: 당대 스페인이 내놓은 무결점 스트라이커. 당시 스페인 대표팀에 라울이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명성을 떨쳤다면 최전방에는 트리스탄이 있었다. 지금도 스페인에선 게으른 천재의 대명사로 언급될 정도로 타고난 재능은 남달랐다. 01/02 시즌 라 리가 득점왕에 올랐고 2002 월드컵에는 스페인의 10번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평소에 훈련을 게을리했고 부상을 당한 후에도 계속해서 늦은 밤까지 파티를 즐기는 등 자기 관리에 실패하며 04/05 시즌 이후로는 퇴물로 전락했다. 재능은 재능인 것이 퇴물로 전락한 후에도 리보르노와 웨스트 햄을 통해 빅 리그를 전전했다. 데포르티보 소속으로 통산 237경기 출전 101골을 터트렸다.

로이 마카이: 바이에른 뮌헨 시절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데포르티보의 우승 멤버기도 하다. 안보이다가도 골 찬스가 있으면 귀신 같이 나타나 골망을 흔드는 선수로 유명했다. 데포르티보 소속으로 02/03 시즌 29골로 라 리가 득점왕에 오른 경험이 있다. 로이 마카이디에고 트리스탄 투 톱에 발레론 내지 자우밍야가 받쳐준다면 라 리가 최고라는 떡밥이 돌기도 했다. 실제로 저렇게 나온 적이 있지만 결과는 딱히 좋지 않았다. 긴축 정책으로 신음하던 데포르티보는 고심하던 끝에 디에고 트리스탄 대신 로이 마카이를 이적시키기로 결정하고 결국 2003년 여름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했다. 여기서 한 번 더 느끼는 트리스탄의 위대함. 어쨌든 로이 마카이는 데포르티보 소속으로 163경기 87골을 터트렸다.

- 자신의 커리어를 통틀어 데포르티보 시절 프리메라 리가 우승을 최고의 순간으로 꼽았다.

- 08-09 시즌 UEFA 컵을 통해 페예노르트 소속으로 로이 마카이는 리아소르로 돌아왔다. 당시 팬들은 "Te quiero Makaay!(사랑해요 마카이!)"를 외치며 그를 뜨겁게 맞이했다.

알베르트 루케: 03/04 시즌 스트라이커에서 왼쪽 윙어로 보직 변경 후 포텐이 제대로 폭발하며 신성으로 떠올랐다. 세리에 A의 신성이 카카였다면 라 리가의 신성은 알베르트 루케였다. 폭발적인 스피드를 이용한 돌파와 강력한 왼발 슛 그리고 투우 세레모니는 루케의 트레이드 마크. 리아소르의 기적 당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AC 밀란을 침몰시키는데 크게 일조했다. 스페인 대표팀으로는 2002 월드컵유로 2004에 출전한 경력이 있다. 2006 월드컵 조별 예선 리투아니아 전에 중거리 슛으로 스페인을 탈락 위기에서 구해내는 등 2000년대 중반 스페인 최고의 왼발 잡이로 떠올랐으나 뉴캐슬 이적 후 이적한 후 계속된 잔부상과 감독과 관계가 틀어지며 빠르게 몰락했다. 말라가에서 10-11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 2011년 스페인의 인기 축구 방송 Punto Pelota의 패널로 활동할 때 갈리시아 더비 관련 영상을 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당시 루케는 "내 축구 인생 중 가장 행복했고 리아소르의 기적, 셀타 비고와의 갈리시아 더비들은 잊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후안 카를로스 발레론: 백만 데포르티보 팬들의 근원, 상징 그리고 혼 그 자체였던 레전드. 플레이메이커 시대에 스페인이 내놓은 대답으로 사비, 이니에스타 이전 세대의 미드필더 중 가장 창조적이고 패스가 뛰어난 선수였다.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세군다 리가 최우수 공격형 미드필더상을 타며 데포르티보의 승격을 견인했다.

- 현역 시절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중 한 선수였다. 스페인 언론에선 "스페인은 두 가지 팀이 존재한다. 하나는 라울을 중심으로 한 스페인과 다른 하나는 발레론을 중심으로 한 스페인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그의 전성기 시절은 대단했다. 다만 소속 팀의 네임 벨류와 라울의 절대적 영향력으로 인해 주목을 덜 받았을 뿐. 그를 지도한 이루레타는 발레론이 데포르티보가 아닌 다른 클럽에서 뛰었더라면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 이니에스타다비드 실바, 사비 알론소가 선배이자 동료로 영감을 받은 선수로 유명하다. 특히 다비드 실바와는 동향으로 가까운 이웃이다. 다비드 실바는 자신이 21번을 고집하는 이유로 바로 발레론을 뽑았다. 발레론은 데포르티보 시절 그리고 지금 라스 팔마스에서도 21번을 달고 있다.

- 데포르티보 팬들에겐 지네딘 지단이나 후안 로만 리켈메보다 더 위대한 플레이메이커로 남을 레전드. 12/13 시즌 레알 마드리드의 우리 형 호날두는 발레론의 조율 능력에 놀라움을 표했고 나이에 한 번 더 놀란 장면이 El Dia Despues에 잡혔다.

- 흔히 리켈메가 최후의 플레이메이커라 하지만 최후의 플레이메이커는 발레론이다. 두 번의 심각한 무릎 부상으로 은퇴의 기로 앞에 서기도 했으나 만 40세가 된 지금도 라스 팔마스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기 때문. 최근 캄프 누 원정에서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기립 박수를 받기도 했다. 만 40세가 되도록 현역인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기 관리가 뛰어난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정도면 세리에 A토티처럼 라 리가의 역사를 대표하는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한국에선 해외 축구 오래 본 아재들만 기억하는 선수에 불과하지만 스페인 내에선 여전히 영향력 있는 모습. 은퇴 후 라스 팔마스 운영진에서 일하고 있는데 라스 팔마스 경기 중계를 보면 항상 카메라가 잡아준다. 수트 입은 모습이 새롭다.

- 라스 팔마스의 간판 스타 케빈 프린스 보아텡은 이적을 확정지은 후 라스 팔마스 공항에 도착했을 때 발레론이 자신을 반기러 나와서 되게 놀랐다고 한다. "구단이 나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성의."라고 말했다. 스페인 리그가 처음이었다는 점 그리고 보아텡과 발레론의 활동 시기가 겹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위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빅토르 산체스: 선수 시절 레알 마드리드, 라싱 산탄데르를 거쳐 데포르티보에 입성한 후 루이스 피구, 호아킨 산체스와 함께 꾸준히 라 리가 최고의 우측 자원으로 평가 받았다. 면도날 크로스와 속 시원한 중거리 포는 빅토르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2006년 데포르티보를 떠나 파나티나이코스로 이적, 그 후 세군다 리가의 엘체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은퇴 후 당시 헤타페의 감독이었던 미첼의 수석 코치로 세비야, 올림피아코스에서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작년 여름 미첼과 결별한 후 감독직을 구하다가...

강등 위기에 직면한 데포르티보로 9년 만에 돌아왔다. 감독 경력이 없었음에도 팬들은 빅토르가 팀을 강등에서 구해낼 것이라 굳게 믿었다. 빅토르는 14/15 시즌 데포르티보를 잔류시킨 후 15/16 시즌 데포르티보를 중상위권으로 이끌며 팬들의 믿음에 보답했다. 그야말로 레전드의 귀환.

마누엘 파블로: 지난 10년 간 데포르티보의 주장 완장을 차고 있다. 투철한 프로 정신을 바탕으로 만 39세인데도 현역으로 뛰고 있다. 이번 15/16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것으로 보인다. 절친 발레론과 함께 누가 더 먼저 은퇴하는 지 내기를 했다고 한다!

- 마누엘 파블로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카푸, 하비에르 사네티와 함께 세계 최고 라이트 백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01/02 시즌 갈리시아 더비에서 정강이가 부러진 중상을 당한 후부터는 평범한 선수가 되어버렸다. 2002 월드컵 당시 수비 능력이 부족한 미첼 살가도, 2% 다듬어질 필요가 있는 푸욜보다 한 수위라는 평가를 받으며 닥주전인 듯 했으나... 큰 부상 한 번에 훅 가버렸다. 어쨌든 그의 부상이 스페인 우측 풀백의 판도를 뒤바꿔놓은 것만은 확실하다.

후안 카프데빌라: 비야레알 시절로 잘 알려져 있지만 데포르티보에서도 7년 간 활약했다. 엔리케 로메로에게 밀려 오랜 시간 로테이션에 그치다가 05-06 시즌부터 뒤늦게 포텐이 폭발해 06-07 시즌에 이르러선 라 리가 최고의 레프트 백으로 자리매김했다. 동시에 스페인 국가대표팀에서도 입지를 넓혀가며 유로 20082010 월드컵 우승 당시 주전 선수였다. 03-04 시즌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한 프리킥은 그가 남긴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다. 데포르티보를 떠난 후에도 꾸준히 리아소르에서 관전하러 오는 선수 중 한 명.

조르제 안드라데: 유벤투스 팬들에겐 사이버 선수. 그러나 데포르티보 시절엔 정상급 수비수였다. 잠시 포르투갈의 주장이기도 했으나 그 시절이 하필 게임에만 존재하던 유벤투스 시절이라 안타까울 뿐. 여담으로 발렌시아 CF의 전 감독 누누 산투도 데포르티보 소속이었는데 누누 같은 경우는 부상도 아니었는데 경기장에서 보기가 힘들었다!

프란시스코 몰리나: 유로 2000 노르웨이 전 저지른 실수로 인해 스페인 국대와는 인연이 없었으나 라 리가에선 언제나 최고의 골키퍼 중 하나였다. 포효하는 모습이 멋있다. 고환암을 이겨낸 인간 승리자라고도 유명한데 호나스 구티에레스의 원조라 할 수 있겠다. 그러고보니 호나스 구티에레스도 데포르티보 소속.

필리페 루이스: 과르다도와 함께 무너져가던 데포르티보를 중상위권으로 끌어올렸던 구세주. 원래 수비력이 부족하다고 까였으나 당시 감독이었던 미구엘 앙헬 로티나 지도 하에 수비력도 눈부시게 발전했다. 08/09 시즌을 기점으로 프리메라 리가 최고의 레프트 백으로 자리매김했다. 한 동안 데포르티보 팬들은 필리페 루이스를 엄청 그리워 했지만 팀이 잘 나가다보니 요즘은 덜 해졌다. 본인도 데포르티보보단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더 좋아하는 듯.

안드레스 과르다도: 무너져가던 데포르티보를 잠시나마 끌어올린 멕시코의 간판 스타. 당시 소속팀 아틀라스 및 멕시코 대표팀에서의 활약상으로 특급 유망주로 명성이 자자했다. 과르다도의 입단식엔 3,000명의 팬들이 몰려왔고 멕시코 전역에 생중계 되기도 했다! 큰 기대 만큼 성장하진 못했지만 필리페 루이스와 함께 2000년대 후반 데포르티보의 아이콘. 특히 과르다도-필리페의 왼쪽 라인은 라 리가 최고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10-11 시즌 강등에도 불구하고 잔류하는 충성심을 보여줌과 동시에 맹활약으로 데포르티보의 승격에 크게 일조했다.

5. 근황

티노 페르난데스가 구단주로 부임한 후 2014년부터 데포르티보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성공한 비즈니스맨 출신 답게 사업 수완이 뛰어나다. 그로인해 재정이 안정을 되찾았다.

팬들과 소통을 중요시한다. 티노 페르난데스는 구단주이기 앞서 데포르티보가 무명일 때부터 좋아했던 열혈 팬이다. 그래서 구단주지만 같은 팬의 입장에서 선수들과 팬들이 가까워 질 수 있는 각종 행사를 라 코루냐 시나 일반 기업들과 협력해 자주 열고 있다. 또한 페이스북, 유투브,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구단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팬들과 한 층 가까워지다보니 평균 관중수도 지난 시즌들에 비해서 상당히 많아진 편이다. 최근에는 홈 경기가 있을 시 라 코루냐 교외에 거주하는 팬들의 교통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셔틀 버스 시스템을 도입했다. 구단주로서 열정이 대단하다.

그러나 축구 내적인 면에서 있어선 합격점을 주기 힘들다. 축구를 좋아하지만 축구를 잘 모른다. 스포르팅 디렉터에게 권한을 위임하는데 문제는 축구를 모르니 스포르팅 디렉터가 유능한지 무능한지 구분도 못한다. 가장 큰 문제는 감독 선임과 경질인데 계속해서 검증도 안된 감독이나 선수단 구성과 상반되는 축구 철학을 추구하는 감독을 선임한다. 페르난도 바스케스, 빅토르 산체스의 의문스러운 경질에 자신의 오른팔이자 구단의 스포르팅 디렉터는 급기야 작년 10월 돌연 사임했다.

6. 선수단

RC 데포르티보 데 라 코루냐 2017-18 시즌 1군 스쿼드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영문 이름 비고
1GK파일:폴란드 국기.png프르체미슬라프 티톤Przemysław Tytoń
2DF파일:스페인 국기.png후안프란Juanfran
3DF파일:스페인 국기.png페르난도 나바로Fernando Navarro
5MF파일:스페인 국기.png페드로 모스케라Pedro Mosquera주장
6DF파일:스페인 국기.png라울 알벤토사Raúl Albentosa
7FW파일:스페인 국기.png루카스 페레스Lucas Pérez임대[a]
8MF파일:터키 국기.png엠레 촐라크Emre Çolak
9MF파일:아르헨티나 국기.png페데 카르타비아Fede Cartabia
11MF파일:스페인 국기.png카를레스 힐Carles Gil임대[b]
12DF파일:브라질 국기.png시드네이Sidnei
13GK파일:스페인 국기.png루벤 마르티네스Rubén
14MF파일:덴마크 국기.png미하엘 크론-델리Michael Krohn-Dehli
15FW파일:스페인 국기.png아드리안 로페스Adrián López임대[c]
16DF파일:포르투갈 국기.png루이지뉴Luisinho
17MF파일:우루과이 국기.png페데리코 발베르데Federico Valverde임대[d]
18MF파일:벨기에 국기.png자카리아 바칼리Zakaria Bakkali임대[e]
19MF파일:스페인 국기.png보르바 바예Borja Valle
20MF파일:브라질 국기.png기예르메Guilherme
22MF파일:attachment/틀:북중미카리브축구연맹 회원국/CRC.jpg셀소 보르헤스Celso Borges
23DF파일:스페인 국기.png헤라드 발렌틴Gerard Valentín
25GK파일:우크라이나 국기.png막심 코발Maksym Koval임대[f]
26GK파일:나이지리아 국기.png프랜시스 우조호Francis Uzoho
구단 정보
감독 구장
클라렌스 세도르프 에스타디오 무니시팔 데 리아소르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마지막 수정 일자: 2018년 2월 1일

[a] 아스날 FC로부터 임대[b] 아스톤 빌라 FC로부터 임대[c] FC 포르투로부터 임대[d] 레알 마드리드 CF로부터 임대[e] 발렌시아 CF로부터 임대[f] 디나모 키예프로부터 임대

7. 기적 메이커


말도 안되는 결과를 자주 연출한 구단 중 하나다. 대표적으로 리아소르의 기적, 센테나리아소(Centenariazo)라 불리는 2002 코파 델 레이 결승, 리아소르 징크스가 있다.

리아소르의 기적: 16강에서 02/03 시즌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클럽 유벤투스를 홈과 원정에서 각각 1:0으로 격파하며 8강에 오른 데포르티보. 그러나 8강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이자 황금기를 보내고 있었던 AC 밀란이었다. 산 시로에서 열린 1차전 데포르티보는 조안 카프데빌라의 크로스를 왈테르 판디아니가 깔끔한 헤더로 선제골을 득점하며 앞서간다. 그러나 선제골을 지키겠다는 의지로 수비적으로 나선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내리 4실점을 내주며 1:4로 영혼까지 털린다. 센터백 말디니까지 오버래핑 나설 정도로 데포르티보는 철저하게 가패당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AC 밀란은 구단의 황금기 중 하나로 꼽히는 세대로 네스타, 카푸, 파울로 말디니 등 역대급 수비진을 비롯해 중원에서의 압박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 받았고 후이 코스타필리포 인자기가 벤치에 앉을 정도로 공격진 수준 또한 뛰어났다. 그야말로 리즈 시절이었다. 리즈 시절 급이 아니라 거의 축구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스쿼드가 아닐까 아무리 데포르티보가 홈 극강이라지만 이런 AC 밀란을 상대로 1:4의 스코어를 뒤집고, 3골 이상 득점해 4강에 진출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상대가 리아소르에서 매번 좌절했던 레알 마드리드였다면 모를까 데포르티보 팬들은 4강 진출은 고사하고 2차전 승리를 거두는 것에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데포르티보의 감독 하비에르 이루레타도 "화요일에 밀란을 이기면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성지 순례를 하겠다. 아니 기어서 갈 수도 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희망이 없었던 상황. 모두가 안된다고 말했지만 선수들 만큼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니 전반전에만 3골 그리고 후반전에는 No.10이자 주장, 축구 인생 한평생을 데포르티보에 바친 프란 곤살레스가 터트리며 전 세계에 기적이 일어났음을 알렸다. 말이 씨가 되어 이루레타 감독은 차로도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걸어갔다.

센테나리아소(Centenariazo) 2002 코파 델 레이 결승: 레알 마드리드데포르티보는 리그와 챔피언스 리그에서 모두 순항을 거듭한 와중에 코파 델 레이 결승까지 진출하며 언론에서는 두 클럽의 트리플 크라운 가능성을 제기했던 상황.

2002년은 코파 델 레이가 100주년이었다. 스페인 축구 협회는 코파 델 레이 100주년인 만큼 이번 결승은 스페인 국왕이 머물고 있는 마드리드에서 열겠다라 선언했다. 이까지는 좋은데 장소가 바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스페인 축구 협회는 '코파 델 레이 결승은 제3의 경기장에서 치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라고 본인들이 명시했지만 이를 어긴 것. 마드리드엔 비센테 칼데론이라는 또 다른 대형 경기장이 있는데 말이다. 결승 날짜 또한 시즌이 끝난 후 치러졌던 것과 달리 뜬금 없이 3월 6일로 앞당겨졌다.

말이 코파 델 레이 100주년이지 이는 플로렌티노 페레스의 계획된 쇼였다. 2002년은 레알 마드리드의 창단 100주년이기도 했고 3월 6일은 레알 마드리드의 창단일이었던 것. 다시 말해 2002년 3월 6일은 레알 마드리드가 창단된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날이었다. 플로렌티노 페레스는 2002 코파 델 레이 결승을 성대한 홈 파티로 장식하는 동시에 자신이 추진한 갈락티코 정책의 성공을 전세계에 알리기 원했다. 말도 안되는 상황에 여러 스페인 구단들이 '스페인 축구 협회가 레알 마드리드에게 강한 압력을 받고 있다.'라며 반발했지만 스페인 축구 협회는 기어코 결승을 정해진 날짜, 정해진 장소에서 강행했다. 강팀이 약팀 에이스를 빼내오는 것이야 축구 시장의 원리인 만큼 욕을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사건은 명백히 원칙과 규정을 무시한 쓰레기 같은 결승전이었다. 상대가 바르셀로나였다면 강행할 수 있었을까?

2002년 3월 6일 저녁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스페인 국왕을 비롯해 전세계 축구 귀빈들이 자리했고 경기장 외부부터 내부까지 사소한 인테리어 하나하나가 레알 마드리드의 우승을 벌써부터 자축하는 것 마냥 디자인되어 있었다. 트로피 역시 레알 마드리드의 우승 그리고 100주년을 대비해 새롭게 장식되었다. 모든 것이 레알 마드리드에게 맞춰져 있었던 상황. 그러나 90분이 지난 후 스페인 국왕에게 트로피를 건네받은 선수는 레알 마드리드의 주장 페르난도 이에로가 아닌 데포르티보의 주장 프란 곤살레스였다. 레알 마드리드는 코파 델 레이 역사에 찬란하게 이름을 남기고자 했지만 클럽 역사에 상처만 남겼을 뿐. 데포르티보가 레알 마드리드에게 세기의 망신을 선사하는 순간이었다.

스페인 현지 팬들이나 방송에선 AC 밀란에게 4:0 대승을 거둔 리아소르의 기적 보다도 2002 코파 델 레이 결승을 더 높게 평가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느 다른 코파 델 레이 결승과는 달리 워낙 상징적이었고 역사라곤 1도 없던 구단이 스페인 최고 구단을 꺾는, 특히나 막대한 외부 자본이 투입되지 않고 오로지 구단 운영진의 열정, 선수들의 간절함 그리고 팬들의 성원이 아우러져 이룩한 성공의 정점이었기 때문이다.

리아소르 징크스: 1992년부터 2009년까지 레알 마드리드는 데포르티보의 홈 구장 리아소르에서 단 한 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6무 12패.
흥미로운 점은 데포르티보가 몰락한 이후인 04/05 시즌부터 08/09 시즌까지 매번 이제는 징크스가 깨질 것이라 예상했지만 되려 연패를 당한 것. 당연히 이 시기 리그, 컵 통틀어서 상대 전적도 데포르티보가 앞선다. 데포르티보는 1995 수페르 코파, 2002 코파 델 레이 결승, 04/05 시즌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 승리를 거둔 적이 있기 때문. 괜히 '바르셀로나가 레알 마드리드의 영원한 라이벌이라면 데포르티보는 영원한 천적이다.'라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