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1 12:13:45

카이두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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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타이 칸국 칸
ᠺᠠᠶᠳᠣ | 카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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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fff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fff 《동방견문록》}}}]]에서 묘사된 카이두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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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두의 서명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칸호 카이두(Хайду)칸
海都 汗(해도 한)
ᠺᠠᠶᠳᠣ ᠬᠠᠭᠠᠨ
보르지긴(Боржигин)
孛兒只斤(패아지근)
ᠪᠣᠷᠵᠢᠭᠢᠨ
카이두[1](Хайду)
海都(해도)
ᠺᠠᠶᠳᠣ
종교 텡그리교
생몰 기간 1230년 ~ 1301년 9월 26일
재위 기간 1248년 ~ 1301년 9월 26일

1. 개요2. 생애 초기3. 차가타이 칸국과의 대립4. 원나라와의 대립5. 생애 후반6. 여담7. 창작물에서의 등장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ᠪᠣᠷᠵᠢᠭᠢᠨ ᠺᠠᠶᠳᠣ(보르지긴 카이두/패아지근 해도)
(생몰: 1230년 ~ 1301년, 재위: 1248년 ~ 1301년)

오고타이 칸국의 실질적인 초대 이자 차가타이 칸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였으며, 원 세조 쿠빌라이 칸과 대립했던 몽골 제국의 대립 대칸으로 무려 50년 동안 당숙뻘인 쿠빌라이 칸을 집요하게 괴롭혔던 문제적인 인물이었다. 오고타이 칸국은 그의 사후 10년도 채 안 되어 멸망했기 때문에 오고타이 칸국은 사실상 그가 혼자 지배했던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생애 초기

1230년 몽골 제국 제2대 태종 오고타이 칸의 5남인 카시의 아들로 태어났다. 1241년 조부 오고타이 칸이 붕어한 이후 대칸 지위를 두고 귀위크와 주치 울루스의 바투 칸이 다투었고, 귀위크가 1246년 쿠릴타이를 열어 제3대 대칸의 지위에 올랐으나, 1248년 갑작스럽게 붕어했다. 이후 바투 계열과 연합한 툴루이 계열이 오고타이 계열과 다시 대칸의 지위를 두고 다투다가 툴루이 계의 몽케가 1251년 제4대 대칸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몽케 칸 즉위 직후, 오고타이 칸 계열이 대칸 지위를 되찾기 위한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대거 숙청당했을 때, 몽케 칸에게 고개를 숙여 목숨을 건지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오게 된다.

3. 차가타이 칸국과의 대립

1259년 몽케 칸 붕어 이후 쿠빌라이 칸아리크부카가 대칸 지위를 두고 다투자, 카이두는 아리크부카를 지지했다. 그리고 아리크부카가 결국 쿠빌라이에게 패배하게 되자, 쿠빌라이를 지지한 차가타이 칸국의 알루구 칸[2]이 본격적으로 카이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킵차크 칸국이 도움을 주어 차가타이 칸국의 공격을 막아내고, 차가타이 칸국에서 바락이 즉위하자 도리어 차가타이 칸국을 킵차크 칸국과 함께 압박해, 두 차례의 승리를 이끌면서 차가타이 칸국의 상당한 영토를 얻고 강화를 맺게 된다.

한편 영토를 잃은 바락 칸은 상당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이러한 불만을 이용해 바락으로 하여금 일 칸국을 공격하게 만들어, 바락 칸은 일 칸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킵차크 칸국이 바락 칸을 압박하게 되었고, 1270년 일 칸국에게 대패한 바락 칸이 1271년 카이두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도리어 포위를 당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결국 바락 칸은 카이두의 군대에게 둘러싸인 상태의 막사 안에서 죽게 되었다. 이후 차가타이 칸국에 새로운 칸을 올렸으나, 이전 칸들의 아들들의 반란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러한 반란은 1282년 카이두가 반란 세력과 타협하여 바락의 아들 두아를 차가타이 칸위에 올리면서 해결되었다.

4. 원나라와의 대립

1264년 8월 툴루이 내전에서 아리크부카가 패배하고, 쿠빌라이가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이 되자 평소 카이두를 탐탁지 않아 했던 쿠빌라이는 카이두를 제거하기 위해 상도로 소환했으나 말들이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 카이두는 1266년 아리크부카가 사망하자 그의 계승자임을 선언하고, 킵차크 칸국차가타이 칸국, 일 칸국 등에 지지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 몽골 왕공족들의 지지[3]를 얻어냈고, 1269년 차가타이 칸국의 바락을 물리친 후 대칸을 선언했다.

쿠빌라이는 넷째 아들 노무간으로 하여금 카이두를 공격하게 했는데, 몽케 칸의 아들 시리기, 아리크부카의 아들 요부쿠르 및 멜릭 테무르가 함께했다. 1276년 세 왕자가 진중[4] 반란을 일으켜 노무간을 킵차크 칸국에 넘겨버리고, 자신들은 카이두에게 의탁했다. 그리고 이 왕자들 사이에 차가타이 칸의 차남 사르반도 합류하게 되었다. 이 왕자들과 킵차크 칸국, 카이두가 반(反) 쿠빌라이 전선을 구축하고, 원나라의 수도 카라코룸으로 진격했고, 쿠빌라이는 명장 바린 바얀으로 하여금 이 진격을 막아내게 했다. 이후 카이두는 지속적으로 원나라를 괴롭혔다. 하지만 번번히 바린 바얀의 방어에 막혔고, 쿠빌라이 사후에는 오히려 본인 진중에 있었던 세력들이 이탈해 감에 따라 세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그래도 원나라 공격을 멈추지 않아서 1298년에는 원 성종 테무르 칸의 사위('쿠르겐')였던 쾨르기즈를 생포하여 처형하기도 했다.

5. 생애 후반

자신의 세력이 줄어드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카이두는 1301년 최대 규모의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처음에는 카말라[5]의 군대를 압도했지만, 곧바로 투입된 카이산[6]의 군대로 인해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는 본국으로 돌아갔고, 카이두도 전장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사망했다.

그의 사후 오고타이 칸의 지위에는 장남인 차파르가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 칸에 의해 오르게 되었으나 곧바로 두아와 대립했고, 두아는 원나라와 함께 차파르를 공격했다. 결국 1306년 차파르는 항복하고, 오고타이 칸국의 영토는 원나라와 차가타이 칸국에 의해 분할되었다. 이후 1310년 차파르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원나라에 망명함으로서 오고타이 칸국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6. 여담

카이두에게는 24명의 자식들이 있었으며, 그중 9명의 딸이 있었다. 딸들 중 쿠툴룬(Khutulun)이라는 딸은 기록이나 문헌으로 많이 남아 있다. 그녀를 모티프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이다.

그녀의 결혼에 대해서 마르코 폴로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했다. 마르코 폴로에 의하면,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힘이 세고 용맹하여 아버지 카이두의 칸국에서 힘으로 그녀를 능가할 수 있는 남자가 없었다고 전한다. 카이두는 그녀가 결혼하기를 간절하게 바랬지만, 그녀는 자신을 무력과 용맹, 지구력, 군사적 능력으로 이길 수 있는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녀는 말 100마리를 걸고 자신과 싸워 이기는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녀의 '공개구혼'에 100명의 청년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쿠툴룬이 청년들이 가져온 10,000필의 말을 소유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1280년경 잘생기고 자신감이 넘치며 무예가 뛰어난 한 청년 왕자가 카이두의 궁정으로 와서 쿠툴룬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그는 무려 1,000필이나 되는 말들을 걸고 그녀와 레슬링 시합을 겨루고자 했다. 카이두는 부유하고 당당한 청년에게 마음이 끌려, 쿠툴룬에게 일부러 져주라고 은밀하게 부탁했다. 쿠툴룬은 도도하게 답했다.
"절대 그럴 수 없어요! 만약 그 사람이 저를 이긴다면 기꺼이 그의 아내가 될 거에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쿠툴룬과 청년 왕자의 레슬링 시합이 벌어졌다. 전에 상대했던 젊은이들과 다르게 청년 왕자는 오래 버텼다. 하지만 쿠툴룬의 빠른 공격기술에 자신만만하던 젊은 왕자도 무릎을 꿇었다.결국 왕자는 말 1,000필을 남긴 채 카이두의 궁정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녀를 시집보내고자 했지만 실패하자 카이두는 체념하고 딸과 함께 전장터를 누볐다. 하지만 쿠툴룬을 오랫동안 시집보내지 않는 카이두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아버지와 딸의 근친상간을 의심하고, 부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카이두 같은 경우, 유목적 관습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딸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 정주민들보다 자유로운 시각을 보인 듯 하지만, 그가 지배한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지대는 정주 도시문명이었고, 오래도록 이슬람교를 믿어왔기 때문에 보다 보수적인 여성관을 지녔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카이두는 사람들의 거센 비판에 직면하자, 딸을 아브타글이라는 남자에게 시집을 보냈다. 《집사》는 그녀가 남편을 선택하여 결혼했다고 증언하지만, 한때 전장을 호령한 쿠툴룬에게는 '울며 겨자먹기 식'의 결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라시드 앗딘의 《집사》에 의하면, 이후 쿠툴룬은 타르사켄트와 카르발릭이라는 지역에 거주하면서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것이 한때 일세를 풍미했던 한 몽골 '여전사'의 생애였다.

7. 창작물에서의 등장

코에이의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에도 등장. <원조비사>에서는 할아버지의 능력을 그대로 물려받은 꽤 준수한 능력치와 오리지널 일러스트를 가지고 있음에도 플레이 불가능한 군주로 나오며, 시나리오 3 '원조의 성립'의 오고타이 칸국 칸이다. 능력치는 정치C, 전투B, 지도B, 매력B의 준수한 능력치

<징기스칸 4>에서도 시나리오 2의 오고타이 칸국 칸으로 등장. '하이두'라는 이름으로 표기된다.[7] 능력치는 정치 / 전투 / 지모 순으로 74 / 86 / 82에 건설, 외교, 등용, 돌격, 연사 특기를 가지고 있다. 콘솔 판에서는 지모가 90까지 상승해서 시나리오 1의 자무카와 비슷한 능력치가 되었다. 꽤 우수한 무장이지만 부하들이 심하게 빈약하고 문화도도 낮은 데다가 땅도 발전하기 영 좋지 않아 원나라와 국력 차이가 상당하다. 연사 특기와 몽골 기병 편성이 가능하므로 카이두를 앞세워 차가타이 칸국부터 접수하는 게 정석적인 방법이지만, 자신이 있다면 냅다 원나라의 카라코룸으로 돌진하는 것도 해 볼 만하다.

중국 드라마 <칭기즈칸의 후예>(원제 : <건원풍운>)에서는 왕루(王璐)가 담당하였다. 태종 오고타이 칸의 후예들의 수장임에도 불구하고 아리크부카의 졸개처럼 묘사되며 툭하면 작전이 실패할 때마다 아리크부카에게 구박받고 어쩔 줄 몰라하는 굴욕적인 모습을 자주 연출한다. 이 드라마가 철저히 한족의 사고방식에 따라 진행되는 만큼 몽골 땅을 변방 취급해 자기 할아버지의 영지를 다스리며 칸국들을 제패해 위세를 떨치던 카이두가 평생 변방에 쫓겨나 살았던 것처럼 에필로그를 써놨다.

문피아 소설 《몽골제국 망나니》에 주인공의 어린친척(서방왕)으로 나오며, 추후 극서방에 자리를 잡게 했다.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을 60년 동안 괴롭힌 것을 아는 주인공은 예방 차원과 더불어 사후 후계자에게 강대한 적이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예상된다.

8. 관련 문서


[1] 몽골어로 '몽골 군대의 영광'이라는 뜻이다.[2] 재위 : 1260년 ~ 1266년[3] 그러나 일 칸국은 카이두와 쿠빌라이 간의 내전에서 쿠빌라이의 편을 들었다.[4] 군대나 부대의 안.[5] 원나라 제6대 황제 진종의 아버지[6] 훗날의 원나라 제3대 무종[7] 몽골어 ᠬᠠᠢᠳᠤ/Хайду를 중국어로 옮기면 海都/Hǎid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