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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일 | 1946년 2월 7일(제7보병연대) 2020년 12월 1일(제7보병여단) | |||||
상징명칭 | 초산부대[1] | |||||
소속 | 대한민국 육군 | |||||
상급부대 | 제6보병사단 | |||||
규모 | 여단 | |||||
역할 | 휴전선 중부지역의 경계 | |||||
여단장 | 대령 김무현 | |||||
위치 |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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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육군 제5군단 제6보병사단 예하 제7보병여단. 상징명칭은 초산.[2]연대급 부대로는 국군 3번째로 창설된 육군 부대이며, 당시의 부대 편제를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국군 유일무이한 전통이 있는 부대이다.
2. 상세
[3]1946년 2월 7일, 충북 청주시에서 창설되었다. 그 후 1947년 말 조선경비대 제1여단(현: 제1보병사단)에 예속된 뒤 1948년 6월 14일 제6보병사단의 전신인 4여단에 배속된 이래 6.25 전쟁 개전 이후 춘천, 동락리, 초산 등지에서 맹활약하면서도 현재까지도 6사단 예하의 부대 편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6사단의 적자(嫡子) 부대라는 자부심이 있으며, 휴전 이후 2연대와 함께 최전방 산악지형을 경계하고 있다. 게다가 제2땅굴까지 맡게 되어 버리는 바람에 6사단 내에서도 빡세기로 소문이 나 있다.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을 때 7여단이 걸리면 조교들이 위로를 해줄 정도. 아마 FEBA던 GOP던 군생활 내내 산만 타다가 전역할 가능성이 높다. 막사 시설은 6사단 내에서도 꽤 좋은 편이다.[4] 6.25 전쟁 발발 초기에 육군 최초의 승리를 안겨준 부대이며 그 후에도 수많은 전투에서 지속적인 승전보를 울린 부대이다.
그리고 국방개혁 2.0 기본계획에 의거, 상비사단과 지역방위사단이 개편돼 이 연대 역시 2020년부로 여단급으로 격상되었다.
3. 편제
3.1. 여단 직할대
3.2. 군수지원대대 (前 수송대)
2020년 12월 국방개혁 2.0으로 인해 연대에서 여단급으로 격상되면서 수송대가 해체되며 군수지원대대가 창설되었다.3.3. 제1대대 초산진격
[5]
초산 전투 당시 전군 최초로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한 1대대가 압록강변의 물을 수통에 담아 가장 먼저 대통령에게 보냈다는 자부심이 있다. 2021년에도 여단장 교체식에서 7여단 1대대 1중대가 당시 군복과 총을 입고 수통에 물을 담아 올리는 퍼포먼스를 한다.
3.4. 제2대대 음성무극전승
음성무극전승대대는 충북 음성군 무극리에서 육군 최초로 승전보를 울린 음성지구전투 혹은 무극리전투로 유명하다. 동락초등학교에서 부임중이던 교사의 신고를 받고, 집결해 숙영 중인 2개 연대 규모의 북한군을 기습해 2185명을 사살하고 132명의 포로를 잡았다. 야포, 장갑차, 차량 등 다수의 주요 장비들을 노획하는 성과를 냈다.[6] 이 전투로 아군은 1명의 부상자만 발생했고 대한민국 국군 최초로 전 장병 일계급 특진의 영예와 함께 제1호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3.5. 제3대대 개천돌진(GOP)
한국전 당시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북진할 때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북한 개천시를 점령하여 국군이 압록강 초산군까지 진격하는 발판을 마련했다.4. 출신인물
4.1. 여단장
볼드체는 대장 진급이 된 연대장 및 여단장. |
역대 제7보병여단장 | |||||
역대 | 이름 | 계급 | 임관 | 비고 | 기타 |
초대 | 민기식 | 예) 대장 | 군영 | 前 육군참모총장 | 제 7~9대 국회의원 |
2대 | 이병주 | 예) 소령[7] | 군영 | 前 연대장 | [8] |
3대 | 채원개 | 예) 준장 | 육사 3기 | 前 제3보병사단장 | [9] |
4대 | 심언봉 | 예) 중장[사후추서] | 군영 | 前 육군 제2 훈련소장 | |
5대 | 고시복 | 예) 준장[사후추서] | 육사 2기 | 前 서울병사구사령관 | [12] |
6대 | 임부택 | 예) 중장 | 육사 1기 | 前 제1군단장 | [13] |
00대 | 김태섭 | 예) 중장 | 육사 17기 | 前 제8군단장 | |
00대 | 황규식 | 예) 중장 | 육사 26기 | 前 제6군단장 | |
00대 | 정종진 | 예) 준장 | 육사 34기 | 前 제72보병사단장 | |
49대 | 유형근 | 예) 준장 | 육사 40기 | 前 연대장 | |
50대 | 손문수 | 예) 대령 | 前 연대장 | ||
53대 | 고태남 | 예) 소장 | 육사 46기 | 前 육군인사사령관 | |
54대 | 장세혁 | 예) 준장 | 학사 16기 | 前 제75보병사단장 | |
55대 | 김흥준 | 소장 | 육사 49기 | 現 육군본부 정책실장 | |
56대 | 이상현 | 준장 | 육사 50기 | 現 제1공수특전여단장 | |
57대 | 김태연 | 대령 | 육사 52기 | 前 연대장 | |
58대 | 김도연 | 준장 | 학군 34기 | 現 제2군단 참모장 | |
59대 | 박권영 | 대령 | 육사 55기 | 前 여단장 |
4.2. 장교/부사관
4.3. 병
5. 기타
5.1. 근무환경
- 여단본부: 어딜가나 비슷하듯 여단 본부대는 예하 대대들보다 근무환경이 훨씬 좋다고 할 수 있다.
- 1대대: 1대대가 2,3대대보다는 더 메인 대대라는 느낌이 있다. 훈련도 1대대가 훨씬 많이 뛰는가 하면 부대 분위기도 1대대가 더 빡센 감이 없지 않아 있다. 2대대에 비해 막사가 최근에 지어졌고 2대대에 비해 막사 면적이 넓다. 특히 위병소에서 막사로 올라가는 초산진격로의 경사가 심해 택배를 가지러 갈 때 상당히 귀찮다.
- 2대대: 1대대에 비해 막사가 비교적 일찍 지어졌는데 면적이 좁은 편이다. 하지만 타 대대들에 비해 동송읍내와의 거리가 가까워서 휴가 나갈 때는 편리하다.
- 3대대: 3대대는 여단에서 GOP대대를 맡고 있어 격오지에서 근무하다 보니 대부분 최전방에 위치한 부대들과 같이 근무 환경은 혹독하다. 또한 2여단 섹터에 비해 경사로가 많은 편이므로 근무 난이도가 힘든 편. 다만 이는 해당 중대가 어떤 구역을 담당하는지에 따라 많이 다른데, BJ OP는 경사가 완만해서 가장 쉽고, 그 다음으로는 CS OP, CWB OP는 경사가 가장 심해 담당하는 초병들이 힘들어하는 걸 자주 볼 수 있다.
5.2. 여단가
6. 사건 사고
7. 여담
- 2021년 4월에 처음으로[14] KCTC 훈련을 마쳤다. 과학화전투훈련단에서도 처음인 GOP 형식의 전투로 훈련을 진행했으며 주한미군 2사단과 함께 훈련을 하였다. KCTC 훈련 결과는 당연히 패배였다.[15] 제7보병여단의 부대 명칭이자 역사적인 상징인 초산(진격)[16]이 이번 KCTC 훈련의 주 전술이었다. 2대대, 3대대가 최전방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고 1대대가 북쪽으로 우회를 하여 적을 타격하는 게 목표였지만 안타깝게도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제대로 된 훈련이 진행되지 못했다. [17]
[1] 국군의 북진 당시 압록강변 평안북도 초산군까지 가장 먼저 도착한 것에서 유래되었다.[2] 유래는 아래 1대대 참고.[3] 수색중대 영상.[4] 여단본부는 2007년 11월 하순, 1대대는 2011년 11월, 2대대는 2006년, 3대대도 2대대랑 비슷한 시기에 완공이 됐다.[5] 위 사진 속 인물은 신찬균(1931~2023) 예비역 대령이다. 평안남도 양덕군 출신인 신 예비역 대령은 서울 선린상업학교 재학시절 학도병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어 북진 6사단 7연대 선봉에 서서 압록강에 다다랐고, 당시 지휘관이던 임부택 대령에게 보고한 뒤 흐르는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떠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전설의 인물이다. 이 일로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는 영광을 안았고, 6개월간의 광주보병학교 훈련 뒤 11사단 20연대 12중대 소대장으로 임관한 그는 베트남 전쟁까지 참전한 후 1979년 10월31일 30사단 90연대장을 끝으로 전역했으며 2000년부터 20년 넘게 동양일보 신문배달원으로 활동하다 2023년 11월 6일 교통사고로 별세했다.[6] 노획한 장비들이 소련제라는 증거를 유엔에 보내게 되면서 유엔군이 참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7] 건국 당시 까지는 소령이 연대장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8] 남로당 계열로 숙군 과정에서 숙청, 6.25 전쟁 당시 실종.[9] 광복군 출신 독립유공자[사후추서] [사후추서] [12] 광복군 출신 독립유공자[13] 한국전쟁 개전초기 연대장[14] 1대대는 처음은 아니다. 7연대 시절인 2009년 4월 1대대는 KCTC 훈련에 참여한 바가 있다. 2018년 7월 19연대가 KCTC훈련을 받을 당시 19연대 3대대는 신병교육대라 7연대 1대대가 19연대 3대대 자격으로 훈련했다[15] 자기집 앞마당과 다름없는 전문대항군연대에게는 지형지물이 익숙하다는 장점이 있어 훈련전부터 패배 결과가 확실시했다.[16]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과 UN연합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하던 당시 가장 먼저 압록강 초산에 도달한 것에서 유래되었다.[17] 사실 KCTC훈련은 승패보다는 전술적인 면을 더 중요시하는 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