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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체코의 수도 프라하를 거점으로 하는 관현악단.2. 연혁
1896년 1월에 체코 최초의 연주회 전문 관현악단으로 출범했으며, 창립 연주회는 같은 달 4월에 안토닌 드보르자크가 자작곡들을 지휘해 개최했다. 이후 오스카르 네드발을 비롯한 체코 지휘자들이 객원으로 지휘대에 올랐고, 1897년에는 러시아의 바실리 사포노프가 외국 지휘자로서는 처음으로 지휘했다.다만 이 악단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단원들이 프라하 국립오페라 관현악단 직책을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활동에 큰 장애가 되고 있었다. 결국 1901년 10월에 오페라극장에서 독립했고, 동시에 루드빅 첼란스키를 초대 상임 지휘자로 초빙했다. 하지만 첼란스키는 3년 정도 부임하고 악단을 떠났고, 후임으로는 빌렘 체마넥이 임명되었다.
체마넥은 1차대전 기간 동안에도 재임하면서 악단의 현상 유지에 진력했고, 프라하 시청사의 부속 공연장인 스메타나 홀을 악단 상주 공연장으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1918년 4월에 무슨 이유인지 악단 측으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고, 이후 첼란스키가 잠깐 객원으로 지휘하며 공백을 메꿨다.
약 1년 간의 공백 뒤에 바츨라프 탈리히가 제3대 상임 지휘자로 부임했고, 탈리히는 프라하 국립오페라극장 예술 감독을 맡았을 때의 공백기를 제외하고는 30년 이상을 이 악단과 보내며 최장기 연임 지휘자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탈리아와 영국, 벨기에, 프랑스 등지로 대규모 국외 순회 공연을 한 것도 탈리히 재임기에 와서였고, 1929년에는 스메타나의 6부작 교향시 '나의 조국' 을 HMV(현 EMI)에 취입해 악단 최초의 녹음 기록도 수립했다.
이 동안에는 훗날 상임 지휘를 맡게 되는 카렐 안체를과 라파엘 쿠벨릭 같은 젊은 지휘자들도 객원으로 무대에 서기도 했고, 쿠벨릭은 탈리히를 대신해 1937-38년의 유럽 순회 공연을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이 주데텐란트를 시작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합병하면서 악단 활동에도 큰 위기가 닥쳐왔다. 독일 총독은 탈리히를 반강제적으로 상임 직에서 강판시켰고, 그 자리에는 쿠벨릭이 대신 들어갔다.
하지만 쿠벨릭도 나치에 결코 고분고분한 인물은 아니었고, 나치식 경례나 바그너 음악의 공연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등의 행동으로 높으신 분들의 눈밖에 나게 되었다. 게다가 뒤이어 터진 2차대전으로 인해 악단의 활동 영역은 더욱 축소되고 제한되었는데, 다만 체코 음악의 연주는 유대계 작곡가의 작품을 빼고는 대체로 허용되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45년에는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가 되었고, 쿠벨릭도 게슈타포의 체포를 피해 시골에 은거해야 했다. 프라하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자 쿠벨릭도 다시 돌아왔고, 5월 28일에는 종전 후 첫 공연을 지휘했다. 쿠벨릭은 나치 시대 연주되지 못했던 유대계/적성국 작곡가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재공연하면서 악단의 연주 곡목과 연주력 회복에 주력했다. 10월에는 임시정부의 대통령령으로 악단의 국립화가 발표되기도 했고, 1946년 5월에는 프라하의 봄 음악제의 상설 관현악단 자격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서서히 공산주의 진영의 우세로 넘어가게 되면서 쿠벨릭은 모종의 위협을 느꼈고, 결국 1948년 7월에 영국으로 망명했다. 갑작스러운 공백 사태를 맞게 된 악단은 2년 정도 객원 지휘에 의존하다가 1950년에 악단 콘트라베이스 주자 출신의 카렐 세이나를 상임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세이나는 불과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고, 후임으로 카렐 안체를이 들어갔다.
안체를은 공산주의 정권 초기의 혼란 속에서 악단 내분을 수습하고 체제 정비에 노력했고, 1959년에는 창단 후 최초로 유럽을 벗어나 소련과 중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인도를 돌며 순회 공연을 했다. 1965년에는 미국과 캐나다에서도 공연했으며, 쿠벨릭 망명 후 주춤했던 녹음 작업도 재개해 국영 음반사인 수프라폰에서 많은 녹음을 남겼다.
하지만 안체를도 1968년에 일어난 민주화운동인 프라하의 봄이 소련군을 주축으로 한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군 병력에 의해 유혈 진압되자, 바로 캐나다로 망명해 버렸다. 정부는 급히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서 재임 중이던 바츨라프 노이만을 불러 상임에 앉혔고, 노이만은 20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켰다.
1989년 동유럽의 자유화 물결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시민들의 반정부 시위가 잇따랐는데, 노이만도 체코 필을 이끌고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무료 공연하는 등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결국 공산 정권이 붕괴하고 자유 선거를 통해 새 정부가 들어서자, 고국을 오랫동안 등졌던 반은퇴 상태의 쿠벨릭도 노구를 이끌고 귀국해 지휘대에 올랐다.
노이만은 민주화 직후 퇴임했고, 후임으로는 이르지 벨로흘라벡이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 때부터 악단의 연주력이 점차 퇴보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기 시작했고,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벨로흘라벡을 위시한 후임 지휘자들이 악단과 모종의 알력 상태에 놓여 스캔들을 빚는 일이 잦아졌다. 체코 필은 민주화 이후 악단 운영에도 민주적인 방식을 도입해 투표로 상임 지휘자를 선출하기 시작했고, 벨로흘라벡의 후임으로 취임한 독일 출신의 게르트 알브레히트가 이 제도로 뽑힌 첫 지휘자가 되었다.
하지만 알브레히트도 오래 있지 못했고, 비로소 재정비가 시작된 것은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가 부임하면서 부터였다. 이 기간 동안에는 특히 일본의 음악 업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아슈케나지 지휘의 음반들도 대부분 엑스톤 같은 일본 음반사에서 출반되었다.
아슈케나지가 2003년 퇴임한 후에는 다시 체코 출신의 즈데넥 마찰이 임명되었는데, 마찰은 2007년에 프라하의 언론들이 자신을 계속 디스한 것에 분통을 터뜨리며 갑자기 사임해 버렸다. 이 문제는 큰 스캔들이 되어 악단 이미지에도 타격을 주었고, 운영진들은 회의를 거쳐 이스라엘 출신 지휘자인 엘리아후 인발이 2009/10 시즌부터 상임 지휘자로 활동한다고 밝혔다. 인발은 발표대로 2009년 가을에 4년 계약의 상임 지휘자로 부임해 2012년까지 재임했고, 후임으로는 이미 1990-92년 동안 악단을 이끈 바가 있는 벨로흘라벡이 인발과 마찬가지로 4년 임기로 계약했다. 벨로흘라베크는 이후 4년 추가 연임 계약까지 맺었지만, 임기 도중인 2017년 5월 31일에 암으로 급서하였다. 이후 악단은 세묜 비치코프가 2018년부터 상임 지휘자 겸 음악 감독으로 활동한다고 밝혔다.
3. 역대 상임 지휘자
- 루드빅 첼란스키 (Ludvík Čelanský, 재임 기간 1901-1903)
- 빌렘 체마넥 (Vilém Zemánek, 재임 기간 1903-1918)
- 바츨라프 탈리히 (Václav Talich, 재임 기간 1919-1931, 1933-1941)
- 라파엘 쿠벨릭 (Rafael Kubelík, 재임 기간 1942-1948)
- 카렐 세이나 (Karel Šejna, 재임 기간 1950)
- 카렐 안체를 (Karel Ančerl, 재임 기간 1950-1968)
- 바츨라프 노이만 (Václav Neumann, 재임 기간 1968-1989)
- 이르지 벨로흘라벡 (Jiří Bělohlávek, 재임 기간 1990-1992, 2012-2017)
- 게르트 알브레히트 (Gerd Albrecht, 재임 기간 1993-1996)
-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Vladimir Ashkenazy, 재임 기간 1996-2003)
- 즈데넥 마찰 (Zdeněk Mácal, 재임 기간 2003-2007)[1]
- 엘리아후 인발 (Eliahu Inbal, 재임 기간 2009-2012)
- 이리 벨로흘라벡 (Jiří Bělohlávek, 재임 기간 2012-2017)
- 세묜 비치코프 (Semyon Bychkov, 재임 기간 2018-)[2]
4. 특징
체코 최초의 연주회 전문 악단이라는 기록으로 보나, 그리고 국영 음반사 수프라폰을 비롯한 여러 회사에 취입한 수많은 음반들의 질과 양으로 보나 유럽 유수의 관현악단 반열에 들고 남는 명성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다. 특히 탈리히와 안체를, 노이만의 음반들이 높은 평가를 받으며, 고국 체코 음악의 연주에 있어서는 따를 자가 없다고 평가하는 이들까지 있다.민주화 직후 혼란기에 한때 우수한 단원들이 고액 연봉을 제시하는 서방 오케스트라로 유출되거나, 공산주의 정권 붕괴와 함께 국고 지원이 취소되면서 재정난에까지 봉착하게 되었다. 때마침 동구권에서 1970년대 후반부터 쇼미더머니를 시전하던 일본 음악 업계의 러브콜을 받기 시작했는데, 일본 입장에서는 서방의 악단들보다 더 싼 금액을 제시해도 계약을 덥석덥석 물어주는 것이 어지간히 고마웠던 듯 하다.
물론 이렇게 만들어진 음반들의 대부분은 클래식 레퍼토리를 담고 있고, 노이만이 생애 마지막에 도전하다가 미완으로 남은 마지막 말러 교향곡 전집도 포니캐년에서 출반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은 수입을 갈망하게 되면서 비클래식 영역에서도 적극적으로 작업하기 시작했는데, 오덕들이 이 악단의 이름을 접했다면 십중팔구 1990년대 무렵부터 이 방면에서 나온 음반들일 듯.
히사이시 조가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OST들로 만든 교향조곡(교향 모음곡) '모노노케 히메' 와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 이 악단의 연주로 프라하 현지에서 녹음되었고, 이웃의 야마다군 같은 여타 지브리 작품들의 클래시컬 트랙들이나 토에이가 제작한 AIR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DVD에 특전으로 딸린 노미 유지의 교향곡, 잉베이 말름스틴의 협주 모음곡 '밀레니움' 등이 이 방면에서 유명한 작업물들로 여겨진다.
악단 단원들이 소규모로 결성한 체코 필하모닉 실내 관현악단도 활동하고 있으며, 고양이의 보은 OST 후반의 클래시컬 트랙들이나 브라이언 크레인의 'Beautiful Symphony' 앨범에서 연주를 들어볼 수 있다.
상주 공연장으로는 2차대전 이전에 쓰던 스메타나 홀 대신 루돌피눔(Rudolfinum)의 드보르자크 홀을 사용하고 있는데, 공산 정권 시대에는 '예술가의 집' 으로 불렸다. 원래 회의장 용도로 지어졌지만 여러 차례의 리모델링을 통해 콘서트 전문 공연장으로 탈바꿈했고, 외관과 내부 모두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간지폭풍이라 관광 명소로도 유명하다.
1991년에는 상임 지휘자였던 벨로흘라벡의 지휘로 프라하 필하모닉 합창단과 창단 이래 최초로 내한해 세종문화회관에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공연했다. 당시 공연 실황은 MBC에서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기도 했다.
[1]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치아키의 멘토 비에라를 연기한 적도 있었다.[2] 러시아인으로 2022년 조국 러시아가 벌인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력히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 체코 필하모닉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 표시로 입주 건물에 우크라이나 국기를 내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