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05 09:17:39

질문

1. 개요2. 질문의 가치와 대한민국에서의 인식3. 나무위키에서4. 예외5. 다른 영장류에서6. 좋은 질문과 나쁜 질문7. 관련 문서

1. 개요

, / Question
There's no such thing as a stupid question.
바보같은 질문은 없다.
엔트로피가 역전될 수 있는가?와 같은 어떤 알고자 하는 바를 얻기 위해 묻는 것. '물음'이나 '질의'(質疑)라 불리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연소한 사람이 나이가 있는 사람에게 질문하는 경우가 많다. 스승이 제자에게 질문하거나 친구나 동생에게 질문하는 경우도 있다.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문제나 궁금한 점을 질문함으로써 그 문제나 궁금한 점을 해결하게 되거나 해결할 단서를 찾게 된다. 질문을 하는 것은 사회조사에서도 핵심 콘텐츠가 될 수 있다.

개인용 컴퓨터가 막 보급될 무렵에는 윈도는 사용자에게 특별한 것도 없는 질문을 하고 작업을 처리하기 때문에 이와 관련해 이와 유사한 종류의 유머도 발생했다.
PC의 보급화로 덩치가 커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본격적으로 자동차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자동차는 에어백의 다음과 같은 기능 때문에 소비자들이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엄청난 혹평을 하게 되어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에어백 : 튀어나올까요?

상대방에게 질문공세를 퍼붓는 식으로 서비스가 이루어지는 SNSAsk.fm이 있다.

2. 질문의 가치와 대한민국에서의 인식

소크라테스가 "산파술" 로 불리는 문답법을 통해 상대방을 가르치고 설득하며, 유태인들은 스승이 제자에게 끝없이 질문하고, 제자들이 스승에게 끝없이 질문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며 지식을 쌓는 걸로 유명하다. 항간에는 유태인 어린이들이 집에 들어오면 부모들이 "오늘은 스승에게 무엇을 물어보았느냐"며 질문한다는 말도 있다. 이런 전통을 받아들인 구미권에서도 오히려 질문을 하지 않는 학생을 좋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교사, 강사나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할 것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질문을 생각하는 것 자체를 요점을 단순히 암기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심화 학습의 단계로 취급하는 것이다. 불경의 경우 석가모니가 어느 날 어느 곳에서 어떤 내용의 설법을 행하거나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제자들이 어떤 질문을 하고[1] 그것에 대해 석가모니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설법이 진행된다.

사회 각지의 프레젠테이션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 질의응답 과정이고, 여기서 질문이 얼마 나오지 않거나 내용을 재정리하는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면 청중의 관심을 끄는 데 실패한 것으로 간주하여 발표자가 좌절감을 겪게 된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교육법 중 하나이며, 모든 학문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질문을 자꾸 하면 오히려 대인관계에 지장을 주는 행위로 인식해서 지못미스럽다. 한국에서는 남에게 적극적으로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다른 학생들에게 좋지 않은 첫인상을 준다. 남들보다 질문을 자꾸 하는 학생에게는 주변 학우들이 "왜 저렇게 혼자 나대냐. 재수없다."고 비난한다.수업 진도 빨리 나가고 끝나야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으니까[2]
제가 처음 강의를 시작할 때 몹시 두려웠습니다. 학생들 앞에 서는 게 가장 많이 두려웠었죠. 그래서 선배한테 자문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학생들 앞에서 떨지 않을까요? 그때 그 선배가 저한테 큰 용기를 준 말이 있었습니다.
"절대 두려워하지 마라. 학생들은 결코 질문하지 않는다."
- 정효찬, 한양대 교수

이는 대학 프리젠테이션에서도 동일해 거의 일상적으로 발표 말미에 질의응답을 실행해도 학습이 실속있게 진행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질문을 할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 소극적으로 "이러이러한 점이 이해되지 않는데 보충 설명 좀 해주겠냐"고 질문하게 된다. 이에 대해 질문의 느낌이 날카롭거나 강도가 센 사람들에게는 상술한 내용과 동일한 반응으로 "왜 저렇게 혼자 나대냐. 재수없다."라는 말이 나온다.

한국에서 취업한 이후에도 회사에서 미팅도 하며 프레젠테이션에서는 질문이나 제안을 하는 것은 일종의 암묵적인 금기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감히 상사의 프로젝트나 제안에 질문을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는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 예배 중에도 목사의 설교에 대해 토를 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금기인 경우가 많다[3]. 그러나 미국 등지에서는 설교 중에 신도들이 자유롭게 손을 들고 "목사님 그 말씀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신학적인 주제에 대해 질문하고 코멘트를 하는 경향이 더 크다.[4] 대한민국에서 목사들이 의 대리자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3. 나무위키에서

질문을 하고 싶으면 질문게시판에 질문을 할 수 있다.
예전엔 나무위키:보존문서/문의 게시판의 토론창에 질문을 했었다.

4. 예외

표면은 의문문인데 일반적인 질문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표현도 있다. 이는 특수의문문으로 불리운다. 예를 들면 반어법설의법 등이 있다. 가끔 이런 표현은 편집의 방향을 강제하지 않는 나무위키에서도 올라온다.

5. 다른 영장류에서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질문하는 모습이 발견된 적이 없다고 한다. 침팬지, 보노보 등 영장류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기도 하고 공감능력도 있으며, 연구자의 질문에 답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학계에서는 '모든 존재가 같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다'는 전제에 대해 무지하다는 의견이 다수이다. 이 가설은 다음과 같은 수화를 배운 영장류들이 다음 시험에 실패함에 뒷받침된다.
갑돌이와 을순이가 한 방에 있었다. 갑돌이는 과자를 찬장 속에 두고 방을 나갔다. 을순이는 과자를 옮겨 책상서랍속에 숨겼다. 갑돌이가 방에 다시 들어왔다. 갑돌이는 과자를 찾기 위해 어디를 볼까?
다른 영장류들의 답: 서랍속

인간도 어렸을 때는 다른 영장류들과 같은 대답을 했다는 보고가 있다.

6. 좋은 질문과 나쁜 질문

질문의 가치가 높이 평가되다 보니 질문을 무조건 좋게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동서양의 고전에선 나쁜 질문의 예가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그런 질문에 대해서는, 질문을 받은 사람이 심지어 성인들이었는데도, 질문한 사람을 두고 '이뭐병'이라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樊遲請學稼. 子曰 “吾不如老農.” 請學爲圃, 曰 “吾不如老農” 樊遲出, 子曰 “小人哉, 樊須也! 上好禮則民莫敢不敬, 上好義則民莫敢不服, 上好信則民莫敢不用情. 夫如是則四方之民, 襁負其子而至矣, 焉用稼?”
번지가 농사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늙은 농사꾼만 못하다."
밭 가꾸는 일에 대해 묻자 말씀하셨다.
"나는 늙은 농사꾼만 못하다."
번지가 나가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소인이로구나 번지는,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이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의를 좋아하면 백성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믿음을 좋아하면 백성이 감히 진정으로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무릇 이렇게 하면 사방의 백성이 자기 자식을 포대기에 업고 몰려올 것인데, 어찌 농사에 힘을 쓰겠는가."
- 논어 자로편[5]
베드로가 돌아다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의 옆 자리에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 넘길 자가 누굽니까?’하고 묻던 제자였다.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공동번역 요한의 복음서 21:20~22[6]
  • 좋은 질문의 예
    • 구체적인 질문
    • 본질적인 질문
    • 맥락이 있는 질문
    • 다른 청중들도 궁금해하거나 궁금해할 사항에 대한 질문
  • 나쁜 질문의 예
    •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묻는 것
      • 답정너
      • 누구나 뻔히 아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
        • 남의 질문이나 말에 제대로 응답하지도 않고 되묻는 것
    • 맥락을 제대로 생각하지도 않고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것[7]

6.1. 되묻기

나쁜 질문의 대표적인 예시.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되묻는 것은 대단한 결례이다.

되묻기가 필요할 수도 있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 주변이 시끄러워서 청자가 화자의 말을 알아듣기 힘든 상황.
  • 정리가 필요한 어려운 내용을 요약하여 확인할 경우.
  • 되돌리기 힘든 일로, 매우 신중하게 결정할 필요가 있는 경우 등.

반면 되묻기가 결례인 경우는 다음과 같다.
  • 의도적인 경우
    • 특별한 이유도 없이 남을 의심하는 경우.
    • 질문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려 하는 경우.
    • 분위기를 바꾸려는 이유로 합의 없이 대화 주제를 바꾸는 경우.[9]
    • 번외 : 결정권자가 아닌 입장에서, 자신이 납득할 때까지 계속해서 묻는 경우.[10]

결례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서브컬처에서 자주 접하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지 마 라는 대사 역시 바로 되묻기를 뜻한다. 의도적인 경우는 아예 상대방을 무시하는 의도도 있으니 비난도 감수하겠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의도적이지 않은 되묻기를 자주 하면 행동교정을 해야 한다. 이는 질문이 금기시되는 문화와 관계없이, 어떤 문화권에서든 결례에 해당한다. 본인이 이러한 습관이 있으면 대답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답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다. 되묻는 것에도 요령이 있어서, XXX 말하는 거지? 이렇게 요약하여 되물으면 그나마 낫다. 최악은 네? 왜? 뭐?라며 한 마디로 되묻는 경우이다.

7. 관련 문서


[1] 이를테면 지옥이란 어떤 곳인지, 어째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어떤 보살은 어떤 인연으로 보살의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 어떤 나라의 왕은 어째서 어떤 나라를 멸하게 되었는지 등등[2] 질문은 하고 싶은데 정 눈치가 보인다면 수업이 끝나고 질문을 하거나 쉬는 시간을 이용하는 것도 하나의 해결책이다.[3] 설교 도중에 끼어드는 상황이라면 이해가 갈 수 있다. 누구나 그렇듯이 상대방이 말하는 도중에 자기 말을 하려고 말을 끊는 행위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설교를 마치고 예배가 끝난 상황인데 질문이나 제안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면 목사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게 만든 신도에게도 문제가 있다. 아무래도 성경에서 사도 토마스가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다가 예수의 부활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서야 믿은 것을 두고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지만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고 한 것이 임팩트가 좀 크다보니... 물론 예수가 그런 의미로 그렇게 말한 것은 결코 아니다. 사도 토마스 항목 참조.[4] 일례로 미국의 흔한 목사 중 하나인 더글러스 코넬리 씨는 자신의 저서에서 목사에게 궁금한 점을 묻는 수준을 넘어서서 "그렇게 하셔서는 안 됐습니다!" 라고 강하게 어필하는 신자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다.[5] 공자는 번지가 물은 덕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좋은 질문이다’라고 칭찬하고 대답해 주기도 한다.[6] 사실 “누가 당신을 팔아넘기는데요?”라는 질문을 예수가 대답하기는 했다. 당신이 로마군에 체포되기 직전에 있었던 식사 자리에서. 제자들이 끝까지 못 알아들어서 그렇지... 그리고 예수로써는 어차피 예수 자신의 운명에 대한 결말이 정해져 있는 판에 그걸 굳이 누구 탓이냐, 누가 원인이냐, 그런 인간은 어떻게 되느냐 구구하게 따져봐야 뭐하느냐는 의미에서 ‘내가 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던 말던 그게 무슨 상관인데?’라고 대답했을 수도 있고.[7] 남녀간 갈등이 여기서 자주 터지고는 하는데, 남자에 비해 관계 중심적인 여자는 비교적 질문의 빈도가 많다. 왜냐하면 체면을 고려하는 남자에게 있어 뜬금없는 질문은 부끄러운 행동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을 답답하게 여기는 여자가 남자에게 질문을 강요하는 경우에 갈등이 생긴다. 왜냐하면 여자가 남자를 답답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저 질문 하나인데'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만, 오히려 남자에게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혹은 '저 사람한테 신세지기 싫은데' 가 더 앞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관계 중심적이라는 것은 특정 누군가와의 관계를 중시하지 않고, 특정 인간을 의식하지 않는 것 = 누군가를 인간관계상의 대상 A로서만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관계 중심적인 사람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자주 바뀌기도 하고, 누가 보단 어떤에 더 집착하는 성향을 띈다. 여성들이 괜히 말싸움중에 말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는 게 아닌 것이다.[8] 이 경우 국소적으로 질문하는 게 예의다. 왜냐하면 청자 역시 전체를 못 들은 것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대단한 결례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 괜히 화자가 '니가 들은 게 맞아, 이 XX야'. 라고 청자를 욕하며 화내는 게 아니다.[9] 하지만 모두가 주제를 바꾸고 싶어하는 눈치라면 결례가 아니다.[10]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되묻기에만 한정되지는 않고 전체의 움직임을 둔화시키는 매우 이기적인 행위이다. 특히 소수의 입장 역시 존중되어야 하나, 단체 행동에서 다수를 우선시하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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