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9-28 14:36:39

제프리 애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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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2.3. 7년 전쟁2.4. 폰티악 전쟁
2.4.1. 인디언에게 천연두균이 담긴 담요를 선물하다
2.5. 이후의 경력

1. 개요

영국의 군인. 초대 애머스트 남작. 7년 전쟁 시기 북미 대륙에서 일어난 프랜치-인디언 전쟁을 영국의 승리로 종식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현지 인디언들을 강압적으로 대해 폰티악 전쟁을 일으키는 계기를 제공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애머스트는 1717년 1월 29일 영국 세븐옥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인 제프리 애머스트이며, 어머니는 엘리자베스였다. 애머스트는 12살에 도르셋 공작의 저택에서 시종으로 지냈다. 이후 1731년 도르셋 공작의 중재로 보병대 장교로 임관한 애머스트는 1740년 리고니에 장군의 군단에 배속되어 참모관에 임명되었다. 애머스트는 군 경력 초기 몇년 동안 도르셋 공작과 리고니에 장군의 후원을 받았고, 사람들은 그를 리고니에의 "어린 학생"이라고 불렀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1년, 애머스트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가하여 독일과 플랑드르 등지의 전역에 참가하여 1743년 6월 27일 데팅겐 전투를 치렀고 1745년 영국으로 돌아가 자코바이트 반란 진압에 한몫했으며, 이듬해 다시 플랑드르로 돌아와서 1746년 10월 11일 로쿠스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가 지휘를 맡았을 때, 애머스트는 참모진에 배속되었고 라우펠드 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1748년 평화 협약이 체결된 후, 애머스트는 보병 제1 보병 연대와 함께 평시 근무에 들어갔다.

2.3. 7년 전쟁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한 후, 애머스트는 하노버를 방어하기 위해 조직된 헤센군의 군무원이 되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제15 보병대 대령으로 진급했지만 헤센군과 함께 남아 있기로 했다. 그는 헤센군에서 주로 행정 역할을 수행했고, 이후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을 통솔하게 된 컴벌랜드 공작을 보좌했다. 그러나 1757년 7월 26일 컴벌랜드 공작은 하스텐벡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했고, 이후 공작은 크로스터르제벤 협약을 체결해 하노버가 전쟁에서 이탈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영국 국왕이자 컴벌랜드 공작의 부친인 조지 2세는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고, 연합군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의 지휘하에 재편성되었다.

1757년 10월, 리고니에 장군은 영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지난날 케이프 브리튼 섬의 루이스버그 요새를 탈환하지 못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 이듬해에 그 요새를 함락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 작전을 수행하는 임무를 자신의 제자에게 맡겼다. 애머스트는 행정 사무 및 작전 논의에 참여했을 뿐 전투에서 군대를 지휘한 적이 없었기에 이는 매우 뜻밖이었다. 하지만 리고니에는 애머스트야말로 적임자라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조지 2세는 이를 허락하고 애머스트를 독일에서 소환한뒤 임시로 북미 식민지 방면 영국군 소장에 임명했다.

1758년 3월 16일 영국을 출발한 애머스트는 길고 느린 대서양 횡단을 견뎌낸 끝에 5월 말에 핼리팩스 항에 도착했다. 이후 에드워드 보스카웬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와 합세한 애머스트는 6월 8일 루이스버그 전투를 개시했다. 그는 제임스 울프 준장이 이끄는 영국군을 해안에 성공적으로 상륙시킨 뒤 단시일에 섬을 평정하고 루이스버그 요새를 포위했고, 보스카웬 제독은 인근의 프랑스 함대들을 모조리 나포하거나 격추시켰다. 결국 루이스버그 요새의 프랑스 수비대는 7월 26일 항복했다.

애머스트는 이 승리를 기반으로 삼아 북미 프랑스 식민지의 핵심 근거지인 퀘벡을 공략하고자 했으나 카리용 요새 전투에서 제임스 애버크롬비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이 참패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공격을 미루기로 했다. 대신 그는 애버크롬비 장군과 합류하기 위해 군대를 이동시키면서 울프에게 세인트 로렌스 만 주변의 프랑스 정착지들을 급습하라고 명령했다. 보스턴에 상륙한 애머스트는 육로를 넘어 올버니까지 진군한 후 조지 호수로 북진했다. 그 후 1758년 11월 9일, 애머스트는 북미 식민지 방면 영국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759년, 애머스트는 퀘벡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제임스 울프 소장이 세인트로렌스 강을 거쳐 퀘벡 공략에 착수하는 동안, 애머스트는 챔플레인 호수를 거슬러 올라가서 카리용 요새를 공략한 뒤 몬트리올이나 퀘벡 중 한 곳을 공략할 계획이었다. 또한 존 프라이드 준장은 나이아가라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서쪽으로 급파되었다. 애머스트는 6월 27일 프랑스군이 퀘벡 방어를 위해 철수한 덕분에 카리용 요새를 손쉽게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8월 초 세인트 프레드릭 요새를 점령했다. 그러던 중 챔플레인 호수의 북쪽 끝에 프랑스 함선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잠시 군대를 멈추고 자신의 편대를 조직했다.

그해 10월 진격을 개시한 애머스트는 얼마 안가 제임스 울프가 아브라함 평원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퀘벡 장악에 성공했지만 도중에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캐나다에 있는 프랑스군 전체가 몬트리올에 집중될 것을 우려하여 더이상의 진격을 중단하고 겨울을 나기 위해 크라운 포인트로 돌아갔다. 그는 이듬해 공세를 개시해 몬트리올을 향한 세 갈래로 진군하기로 했다. 즉, 퀘벡 주둔 영국군이 세인트 로렌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윌리엄 하빌란트 준장이 이끄는 군단이 챔플레인 호수를 넘어 북쪽으로 진군하고, 애머스트가 이끄는 주력부대는 오스웨고로 진군했다가 온타리오 호수를 건너 몬트리올 서쪽에서 도시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물자 보급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애머스트는 1760년 8월 10일까지 오스웨고를 떠나지 않았다.

8월 10일 마침내 군수 물자가 도착하면서 공세를 진행할 수 있게된 애머스트는 진군을 개시해 9월 5일 몬트리올 외곽에 도착했다. 당시 병력이 부족하고 물자도 턱없이 모자랐던 프랑스군은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항복 협상을 벌였고, 몬트리올은 9월 8일 항복했다. 이로서 캐나다에서의 프랑스군을 일소시킨 그는 뉴욕으로 돌아와서 1761년 도미니카와 마르티니크 원정을 감행해 성공시켰고, 1762년 아바나 원정대를 조직했다. 또한 그는 뉴펀들랜드에서 프랑스인들을 추방시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이렇듯 영국이 프랜치-인디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데 큰 공을 세운 그는 1763년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하반기에 버지니아 주지사와 제60 로얄 아메리칸 보병 연대 대령에 임명되었다.

2.4. 폰티악 전쟁

프랜치-인디언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애머스트였지만, 그 직후에 벌어진 폰티악 전쟁의 책임은 그에게 있다. 1763년 2월 프랜치-인디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영국은 오하이오 일대를 장악했다. 이에 오하이오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델라와레스 족, 쇼뉴족, 세네카족, 밍고족, 모히칸족, 미아미스족, 오타와족, 와이안도츠족 등 인디언 부족들이 결성한 연합은 영국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프랑스 이민자들과 오랜 동맹을 맺고 있었고 함께 생활하고, 교역했으며 서로 결혼하기도 했다. 그런데 프랑스인들이 어느날 갑자기 쫓겨나고 외부세력이 튀어나왔으니 쉽게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다.

이리하여 영국과 오하이오의 인디언 부족들의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애머스트는 갈등을 폭발시키는 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인디언들이 영국의 지배에 철저히 복종하리라고 여기고 그들을 정복민으로 대우했다. 게다가 그는 7년 전쟁 이후 재정이 고갈될 지경이 된 영국 정부의 사정을 고려해 인디언들에게 주는 선물을 삭감하기로 결정했다. 인디언들은 이러한 정책 변화를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그는 인디언에게 팔던 탄약과 화약의 양을 제한했다. 인디언들은 영국인들에게 모피를 공급하고 식량을 얻어내야 살 수 있었다. 그러므로 사냥에 쓰이는 탄약과 화약은 인디언들에겐 필수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탄약과 화약의 양을 제한한다는 것은 인디언들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1763년 5~7월 오타와족 인디언 추장 폰티악[1]이 부족민들을 이끌고 디트로이트 요새를 포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전해들은 오타리오 일대의 인디언들은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오하이오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 병사들과 주민들은 고립되었다. 애머스트는 이에 맞서 사로잡은 인디언들을 즉결 사살하게 했지만 상황은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결국 애머스트는 런던으로 소환되었고, 토마스 게이지 장군이 대신 부임했다. 게이지 장군은 영국에게 항복한 인디언들에게 유화책을 실시했고, 폰티악을 비롯한 반란 지도자들은 영국에게 항복하는 대신 자치권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쟁에서 약 400명의 영국군 병사가 전사했고 정착민 수천 명이 죽었으며, 4,000명의 정착민들은 피난을 떠났다.

2.4.1. 인디언에게 천연두균이 담긴 담요를 선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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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티악 전쟁에서 애머스트가 인디언들에게 저지른 짓 중 가장 악명높은 사건은 '천연두균이 담긴 담요를 인디언들에게 선물로 준 사건'이다. 역사학자 프랜시스 파크만은 1886년에 저서 <캐나다 정복 후 폰티악과 인디언 전쟁의 음모>에서 애머스트가 1763년 6월 29일 피트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펜실베니아 랭커스터에서 원정대를 준비하고 있던 헨리 부켓 대령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고 기술했다.
“그 불온한 인디언 부족에게 천연두를 보내는 게 들키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 이놈들을 줄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쓸 수 있는 모든 전략을 사용해야 한다.”

이 편지의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7월 13일 부켓이 에머스트에게 보낸 편지 원본은 발견되었다. 이에 따르면, 부켓이 에머스트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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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장의 담요에 천연두균을 오염시켜 그 개자식들의 손에 들어가게 하겠습니다. 물론 저는 감염 안 당하도록 조심해야겠죠."

이에 에머스트는 7월 16일에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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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요로 인디언들을 감염시키면 충분히 잘되겠지. 그 외에 이 실행 가능한 작전을 이행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모든 다른 방법들을 시도해 봐!"

역사학자 프랜시스 파크만에 따르면, 피트 요새의 수비대는 이러한 에머스트의 뜻에 따라 요새를 포위한 인디언들에게 천연두균이 담긴 담요와 손수건을 건내줬고, 이로 인해 인디언들 사이에서 천연두가 확산되었다고 한다. 또한 1924년 미시시피 벨리 역사 리뷰는 1763년 당시 피트 요새의 무역업자이자 민병대원이었던 윌리엄 트렌트가 쓴 보고서를 출판했다. 이 보고서에서, 트렌트는 1763년 6월 24일 요새에서 두 명의 델라웨어 인디언과 만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배려로, 우리는 그들에게 천연두 병원에서 가져온 두 개의 담요와 한 개의 손수건을 줬다. 나는 그것으로부터 성과가 있기를 희망한다.

다만 애머스트가 실제로 피트 요새에게 천연두균이 담긴 담요를 인디언들에게 넘기라고 명령한 것은 아니다. 애머스트와 부켓이 인디언들에게 세균전 전술을 구사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편지를 교환할 때로부터 몇 주 전인 6월 24일에 피트 요새 수비대가 독자적으로 동일한 작전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작전이 성공했는지는 미지수다. 천연두 균이 담긴 담요 전달 사건 이전에 이미 오하이오 인디언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요새 수비대는 인디언들로부터 천연두에 전염되었다는 기록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마이클 맥코넬은 “천연두를 생화학 무기로 사용하기 위한 영국의 노력은 필요하지도 않았고, 효율적이지도 못했다.”고 주장했다.

세균이 담긴 담요를 건네는 작전이 성과를 거뒀는지의 여부는 접어두더라도, 이 일화는 에머스트가 인디언들을 얼마나 증오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사례라 할 수 있다. 1763년 여름에 에머스트가 기술한 편지들은 그가 인디언들에게 가진 악감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 해충들은 인간의 권리에 관한 모든 것을 박탈당했다."(1763년 6월 25일, 부켓 대령에게)
"나는 어떠한 야만족이라도 죽일 수 있는 자유를 주고 싶다."(1763년 6월 25일, 부켓 대령에게)
"인디언 부락 전체를 근절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1763년 7월 9일 북미 인디언 관리부장 윌리엄 존슨 경에게)
"그들을 근절하는 것은 속죄의 대상이 아닙니다."(1763년 8월 7일 인디언 문제 담당부 대리인 조지 크로한에게)
"그들의 존재[2]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중단이 될 것입니다."(1763년 8월 27일, 윌리엄 존슨 경에게)

2.5. 이후의 경력

1770년, 애머스트는 게른시 총독이 되었고 1772년에는 포병대 대령이 되었다. 그러던 중 북미 식민지에서 긴장이 고조되자, 조지 3세는 1775년 애머스트에게 북미 식민지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애머스트는 이 요청을 거절했고, 이듬해 홈즈데일의 애머스트 남작으로서 귀족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미국 독립 전쟁이 격렬해지자, 그는 다시 윌리엄 하우 장군을 대신해 식민지 방면 영국군 지휘관을 제안받았으나 또다시 거절했다. 그후 1793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임박하자 예비역 장교로 복무하다가 1795년 은퇴했고 1797년 8월 3일에 세븐옥스에서 사망했다. 향년 80세.
[1] 본명은 오브완디야그(Obwandiyag)이다.[2] 애머스트 본인이 편지 원문에 강조 표현을 삽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