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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금 천하의 정세는 각국이 분쟁하고 대소 강약이 서로 병탄하여, 갑(甲)이 일어나면 을(乙)이 쓰러져 성쇠(盛衰)가 엇갈리고 있다. 이때를 당하여 우리 일본은 동양의 바다 가운데 고립되어 2500여 년 간의 국풍(國風)에 익숙하여 아직 5대주 내부의 정세를 알지 못한다. 또 국력이 쇠잔하고 군비가 공허하고 인심이 게으르고 약하여 황국(皇國) 독립의 기개가 없다. 이를 알면서 고식적으로 세월을 보낸다면 몇 년을 지나지 못해 죽어 넘어지고 뒤집혀 망해 다른 나라에 예속될 것은 분명하다. 지금 이를 떨치고 일어나 우리나라로 하여금 각국과 같이 달려 천하에 독립시키고자 한다면 오직 전투하고 공격하고 정벌하여 해외로 건너가 먼저 구주 각국 사이에 종횡무진 활동하고 위력을 비교하여 이로써 마침내 천하만국 사이에 나란히 서는 길 밖에 없다. 지금 영국⋅프랑스⋅프러시아⋅러시아와 같은 각국은 서로 맞서 아직 힘을 중국⋅조선⋅만주에 미칠 여가가 없다. 이때에 우리 일본은 마땅히 그 틈을 타 중국⋅조선⋅만주로 건너가 이를 빼앗아 가져 이로써 구주 각국에 침입하는 기초를 세워야 한다.
『서남기전』 제1책 상권1, 부록 제1장, 기리노 도시아키의 정한론에 관한
『서남기전』 제1책 상권1, 부록 제1장, 기리노 도시아키의 정한론에 관한
정한론(征韓論)은 한반도를 정벌하여 일본의 국력을 배양하자는 주장이다. 좁게는 메이지 6년 정변 일련 과정을 뜻하며 넓게는 에도 막부 이래 일본에서 나타난 조선 멸시 사상과 막말 유신 초의 무력으로 조선을 정벌하는 주장을 뜻한다.[1][2]
한반도로의 군사적 진출은 일본 역사 내내 꾸준히 논의되었다. 신화의 영역인 진구 황후를 제외해도 삼국시대에도 신라-왜 전쟁, 관산성 전투나 가야멸망전, 백강 전투 등 여러 분쟁에 개입했고 이후에도 8세기에는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같은 것을 추진하기도 했다. 임진왜란도 마찬가지. 이후 진지하고 구체적인 과제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에도 막부 중기에서부터, 메이지 유신에 접어든 19세기부터이다. 이때부터 소위 정한론이 대두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한반도의 개혁과 보호라는 미명아래 한국 침략의 발판으로 삼은 주장이다.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은 아래에 후술할 조선의 통상 요구 거부가 정한론과 메이지 6년의 정변이 발생된 원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는 에도 시대 말기부터 성립된 오래된 이야기며, 더 나아가면 임진왜란에 이를 정도로 오래전부터 제기되었던 주장이다.[3]
2. 에도 막부 말기의 정한론
2.1. 하야시 슌사이
막부 말기, 일본의 국력 배양을 위하여 한반도를 점령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당시 하야시 슌사이(林春斎 1618~1680)는 한반도는 "일본의 신화에서 나오는 신인 스사노오노미코토가 경력한 곳으로 이 신이 삼한의 조상"이라고 주장하였다.2.2. 하야시 시헤이 & 혼다 도시아키
1785년 삼국통람도설(三國通覽圖說)을 저술한 하야시 시헤이(林子平)와 혼다 도시아키(本多利明)는 그 책에서 한반도와 류큐 왕국이 일본의 국가 방위에 깊은 관계가 있다 주장하며, 국방의 강화와 팽창주의 정책만이 국가 이익을 위한 길이라 주장하였다.2.3. 사토 노부히로
19세기에 들어 국방 논의가 더욱 활발해지면서 1823년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4]가 제시한 청나라 침공 구상인 우내혼동비책(宇內混同秘策)의 가운데에, 대총과 화전을 내세워 함경, 강원, 경상, 충청 지역으로 공격하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세계 만국 중에서 황국(皇國)이 공략하기 쉬운 토지는 중국의 만주보다 쉬운 것은 없다. …먼저 달단(韃靼, 몽고)을 취해 얻으면 조선도 중국도 차례로 도모할 수 있다. …다섯 번째는 송강부(松江府), 여섯 번째로 추부(萩府), 이 두부는 다수의 군선에 화기와 차통(車筒)을 싣고 동해로 가 함경ㆍ강원ㆍ경상 3도의 여러 주를 공략할 것. 일곱 번째로 박다부(博多府)의 병력은 많은 군선을 내어 조선국 남해에 이르러 충청도의 여러 주를 칠 것. 조선은 이미 우리 송강과 추부의 강병에게 공격받아 동방 일대가 노략질에 시달림을 받는 이상 남방 여러 고을은 어쩌면 허술한 곳이 될 것임. 곧바로 진격하여 이를 치고 대총(大銃)과 화전(火箭)의 묘법(妙法)을 다한다면 모든 성은 바람을 바라보고 허물어질 것이다."#
2.4. 요시다 쇼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1854년에 발표한 유수기(幽囚記)을 통해 양이들이 일본을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시베리아에서 필리핀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해야 한다 주장하며, 조선에 대해서 과거 한반도는 일본의 속국[5][6]이었기 때문에 이를 다시 정복하여 복속시키는 게 옳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서양과의 불평등 조약을 잘 지켜 일단 그들의 신임을 얻어 서둘러 근대화를 하고, '불평등 조약으로 입은 손해는 조선과 중국을 쳐서 보충하면 된다는 주장도 했다. 다만 전면적인 식민지화 등의 주장까지 하지는 않았고, 제압하여 인질과 조공을 바치게 하자는 식이었다.2.5. 하시모토 사나이
1857년 일본도 서양의 국가 동맹체를 모방하여, 한반도와 중국을 병합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우선 한반도와 만주의 병합을 촉구하였다.2.6. 이타쿠라 가쓰키요
막부 고관이었던 이타쿠라 가쓰키요는 사쓰마 번, 조슈 번 세력의 반발에 따른 일본내 체제 위기를 막기 위해 중국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난 틈을 타, 중국과 한반도를 공격하자고 제안하였다.2.7. 가쓰 가이슈
후일 사쓰마와 조슈를 도와 메이지 유신에 협력하게 된 가쓰 가이슈 역시 유럽인에 대항하기 위해서 우선 한반도를 설득한 뒤, 응하지 않으면 정복해야 한다 주장했다.원래 가이슈는 일본을 중심으로 조선, 청나라가 연대해야 한다는 아시아 연대론자였다. 하지만 해군 건설을 지원해주던 아네가코지 긴토모가 암살당하자 해군 건설에 대한 지원을 받기 위해 정한론을 주장한다. 이후에는 반대로 청일전쟁과 조선 합병에 반대하였으며 을미사변 때 무츠 무네미츠에[7] 항의하는 서신을 보내 을미사변의 배후가 일본 조정이라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가쓰 가이슈는 청일 전쟁에 반대하거나 일본의 가속화되는 침략 야욕을 탐탁지 않게 봤기 때문에 정한론 주장은 스폰을 얻어내기 위한 발언이라고 추정된다. 물론 가쓰가 아주 선량하기에 정한론을 반대한 건 아니다. 허나 일본의 국익을 위해서는 중국 - 한국 - 일본의 삼각 경제 블록을 구성하는 것이 더 좋다라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무력을 통한 정벌에는 의외였다고 볼 수 있다.
3. 메이지 유신 이후의 정한론
1868년 국서 거부 사건(서계 거부 사건)이 일어난 후 다시 이 이야기가 나온다. 이후 두 나라 모두 여러 차례 협상을 시도했지만 계속 결렬되다가 1875년에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다.3.1. 사다 하쿠보
외무성의 관료로 1870년 조선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다가 천황 운운의 기존과 다른 모습, 기선을 타고 온 것, 양복을 입고 단발을 한 것이 거슬린 조선에게 문전박대당하자 화난 채로 돌아와서 온 내각에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로비를 하고 다녔다.3.2. 우에노 가기노리
1870년과 1873년에 잇달아 국서 접수가 거부되고 일본 사절이 문전박대당하자 무력으로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3. 이타가키 다이스케
명색이 일본의 자유민권 운동에 앞장서서 일본 의회주의의 시초를 만든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지만 1870년대부터 초과격 정한론자였다. 두루뭉술하게 조선과의 단교 내지는 무력으로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정도의 얘기가 오가던 일본 내에서 처음으로 대대급 병력으로 부산을 점령하고 조선을 개항시키자는 과격하면서도 자세한 주장을 일삼아 동료 정한론자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그를 뜯어말려야 했다.정한론이 반대에 부딪히자 이에 격분해서 사이고 및 그들을 따르는 관료들과 같이 자문역을 내려오는 메이지 6년 정변 사건을 일으켰으며, 고향인 토사에 낙향한 후에는 함께 사직한 관료들과 함께 반 메이지 정부 운동인 자유민권운동 활동을 벌였다. 이후 메이지 정부에 복귀해 이토 히로부미와 손잡고 2차 이토 내각 출범에 기여했고, 말년의 저작에서도 정한론을 고수했다.
3.4. 후쿠자와 유키치
정한론의 대표주자들 중 한 명이라는 주장이 있다. 단 이 사람은 초기에는 일본이 한반도를 정복하는 것보다는 한반도에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개화·개혁의 물결이 스스로 생기어 일본처럼 근대 국가가 되는 것에 관심을 두었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이 틀어지자 정한론으로 갈아타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은 후쿠자와 유키치와 김옥균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관점이 달라진다.이와는 반대로, 후쿠자와 유키치 본인은 그 이전에도 계속 조선을 혐오하고 멸시했으며, 제국주의 팽창을 부르짖었다는 설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역사비평사에서 출간된 야스카와 주노스케의 저서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를 참조할 것. 출처
3.5. 기도 다카요시
1868년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뒤, 정부 고위직에 오른 기도는 메이지 신정부가 조선에 보낸 수교 요청이 거부당하자 '사절을 보내 그들의 무례를 묻고 그들이 만약 불복한다면 그 죄를 따져 한반도를 공격하여 세력을 신장하여야 한다'라는 주장을 하며 1870년 6월, 내각에 사절단 파견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측근이자 정한을 실행할 오무라 마스지로가 암살당하자 이 주장은 흐지부지되었다.덧붙여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의 대표로 많이 인식되고 있으나, 실제 사이고가 정한론자였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도 존재한다. 이는 기도 다카요시 또한 마찬가지다. 외교관계 수립을 위해서 단신으로 조선을 방문하려던 사이고를 가로막은 게 기도 다카요시였기 때문이다.
기도 다카요시는1871년에는 서양 여러 나라를 순방, 내치(內治)의 긴급성을 통감하여 정한론(征韓論)에 반대. 입헌정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다만 초창기에는 스승인 요시다 쇼인의 영향을 받아 정한론을 주장하였다고 설명된다. 정한론자 문서의 내용과 정반대되는 내용. NHK 대하드라마 야에의 벚꽃에서는 정한론 주창자로 사가현의 에토 신페이, 도사의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들고, (일단은) 반대파로 사쓰마의 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토모미(공가), 그리고 조슈 번을 든다. 그리고 그 중간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중재역으로 있었다고 나온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당장은 외교 활동을 유지하고 단기, 급진 형태의 정한론을 반대했을 뿐 결국 다른 유신 인사와 마찬가지로 정한론 자체에는 찬성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4. 메이지 6년의 정변
메이지 6년 정변 문서 참조.정한론 논쟁에 대해서 근본적인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고메이 덴노 후기와 메이지 덴노 초기의 시대상을 어느정도 파악해둘 필요가 있다. 당시 일본은 갑신정변 당시의 조선과 비슷하게 수구파와 개화파가 심하게 대립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를 즈음으로 이와쿠라 사절단 이 파견되는데,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파견 된 인물들이 후에 내각을 구성하는 중요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사절단의 파견동안 임시 내각을 맡는 형태로 상술된 이타다케 다이스케와 사이고 다카모리, 오오쿠마 시게노부 등이 선출되었다. 이 임시내각 안에서도 견해의 차이는 있었으나 정한론에 찬성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 중심에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있었는데,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자인지는 불명확하나 적어도 그가 정한론자들의 우두머리로 활동하고 있었던건 사실이다. 이러한 사이고의 성향은 후에 세이난 전쟁에서도 표현되는데, 그의 성향을 떠나 그는 세이난 전쟁 이전부터 수구파 무사들의 강한 지지를 얻어 우두머리로 활동했고, 파벌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의견과 다른 행동[8] 을 어쩔 수 없이 취한다. 이때 사이고 다카모리는 조선에 통신사를 파견하는 안을 제안하는데[9] 당시 이와쿠라 사절단을 보낼때 임시 내각은 국정과 관련된 중요한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약속을 하고 있어서 미루게 된다. 결국 사이고를 중심으로 한 임시 내각은 이와쿠라 사절단이 돌아오면 이에 대해서 결정하는것으로 마무리짓는다.
그러나 이와쿠라 사절단이 일본으로 귀국해오자 내각을 잡게 된 사절단은 국정을 우선시할것을 이유로 사이고의 조선통신사 파견 의견을 거부했다. 사이고는 이때 사절단의 의견을 받고나서 큰 결단을 하게 되는데 당시 참의 및 관료 600명과 동시에 사직해버린다.[10] 이런 상황에 다수의 고급인력이 사직해버렸으니 일본에서는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일련의 사직사건을 메이지 6년의 정변이라고 부른다. 이 메이지 6년의 정변 이후로 한국을 군사적으로 정복하자는 정한론자들은 모두 정부에서 쫓겨나지만 이는 후에 세이난 전쟁으로 연결된다.
5. 평가
일본이 정한론을 행동으로 옮길 때 내세운 명분으로는, 왕정 복고 이후 메이지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받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조선 정부가 자신들과 수교를 거부한 데 대한 분노가 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덴노가 권력을 되찾은 뒤 보내온 외교 문서에 덴노라고 찍혀 있었는데 당시 조선은 역대 막부의 쇼군들을 일본 국왕으로 보고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공식 서한이 이전 형식과 다르게 불손하다는 사유로 메이지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주장의 골자이다.[11]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일본 내부에서 일어난 정변과 이웃 나라인 조선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조선이 일본과 통상 관계를 맺고 안 맺고는 조선이 결정해야했다고 본다. 정변이 일어나 외교 형식 등이 바뀌었다면 이를 알리고 합의하는 것은 근대식 조약에도 적용되는 외교 관례인데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강압적인 입장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정한론은 그 시기와 방법에는 차이가 있지만 일본의 주요 요인들이 모두 동감한 주장이었으며, 이 이론의 실천을 위해 억지로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서 조선을 강제 개항한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된다. 이로서 조선은 멸망의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셈이 되었다. 일본은 조선에 관심을 가진 청나라와 청일전쟁을, 러시아 제국과 러일전쟁을 벌여 승리해 걸림돌을 없앤 후, 경술국치를 일으켜서 조선을 병합한다. 이와 같은 팽창주의는 점점 확대되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단초가 되었으며[12] 이렇게 계속 선을 넘자 열강인 미국과의 마찰이 지속적으로 일어나 미국이 일본에 대한 자원 수출을 제한하게 되자, 일본은 자신들의 몰락의 시발점인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다.
이렇게 지속적이고도 반복적으로 정한론이 여러 국가 요인에서 계속하여 주장되고 이를 실천하려고 한 것은 막부 말기에는 서양 세력이 침공하기 전에 일본을 키우겠다는 이야기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당시 일본은 서구의 불평등 조약으로 인한 자국의 손실을 조선과 청나라 등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유리한 조약과 관계를 맺어 벌충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였다. 일본은 청나라와 국교를 맺을때에도 대등하게 맺기 보다는 일본에 최혜국 대우를 요구 하는 등 자국에 유리한 불평등한 조약을 맺고자 하기도 하였다. 운요호 사건은 조선이 철저하게 서구식 외교 관계를 거부하자 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일본 내부 사정 때문이다. 즉 당대 제국주의를 충실하게 실천한 것.
메이지 6년에 일어난 정변에서 정한론은 겉으로 내세운 주장일 뿐 실은 조슈 번 출신과 비 조슈 번 출신들이 벌인 권력 다툼이라는 시각도 있다. 때문에 평소 스승인 요시다 쇼인의 제자로서 정한론을 주장한 기도가 정한에 반대하고, 정한론에 부정적이었던 사이고가 정한에 찬성하는 괴이한 사태가 일어난 것. 결국 메이지 6년에 일어난 정변에서 조슈 번 출신들이 승리를 거두었고 그들은 위에 설명했듯이 정한론에 따라 조선을 침략하지 아니하였다.
근본적으로 한국측에서 '정한'이란 글자만 보고 에도 막부 말기-메이지 초기의 정한론의 사상적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성향이 있는데, 막상 실제 일제의 조선 침략과 병탄은 정한론자들이 주장한 것과 반대의 구상으로 이루어졌다. 정한론자들이 원한 건 이토나 하야시 곤스케 같은 메이지 관료 일각이 주장한 수조권, 외교권 등을 하나씩 뺏어오다가 마침내 국권을 강탈하는 장기적인 침투방식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처럼 일본군 수십만이 쳐들어가서 땅을 뺏고 실업자가 된 하급 사무라이들한테 주는 대규모 공개적 침략이었다. 애초에 정한론자들 주장의 핵심은 메이지 유신 이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일본 내부의 사회적 불만과 불안을 외부 침략으로 해소하자는 내수용 메세지지, 조선 그 자체가 핵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 참살에서부터 남한 대토벌까지 특히 당한 우리 한국인들 입장에선 일제의 침략이 뭐가 '평화로운 방법'이었냐 싶겠지만 실제로 조선 식민화 과정에서 일본이 조선 반도에서 직접적으로 벌인 군사 작전들의 스케일은 무슨 일본 내부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겠다니 이런 소리는 코웃음 나올만큼 소규모의 제한적 작전들이었다. 조선 식민화 이후로도 식민지 조선은 일본 사회의 모순의 해결은 개뿔이고 당장 수탈도 똑바로 못해서 일제가 조선 경영하면서 진짜 돈 벌고 수익 올린건 극히 일부의 지주, 사업체였지, 일본 나라 전체로나 조선 정착 일본인들 개인으로 보나 전자한테 조선 식민지 경영은 내내 적자 나오는 밑지는 장사였고, 후자는 대부분 쪽박만 차고 조선인들 멸시하면서 생기는 얄량한 차별의식 말곤 크게 성공한 경우도 거의 없었다. 결국 이러다보니 일제가 조선에서 제대로 쥐어짤 수 있는 이득이란 경제적인 면은 없고[13] 그나마 고대엔 우리나라한테 문명을 전파해줬던 가장 가깝고 가장 오래된 이웃나라를 정복하고 우리 종으로 부린다는 정치적, 심리적 이득이 전부였다. 일제의 조선 통치는 당장 총독부 위치부터 조선신궁엔 조선관련 신화를 통합하려는 시도도 안하는 등 유독 정신적, 문화적 모멸감을 주는데 치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제의 조선 침략 과정을 주도한건 정한론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사이고 같은 정한론자들 뜯어말리면서 영국, 프랑스, 미국 눈치 보느라 바빴던 조슈번 출신 메이지 관료들이었고, 이들이 청일전쟁, 러일전쟁, 삼국간섭 같은 험란한 외교적 장벽을 뚫고 드디어 조선을 마음대로 요리할 위치에 도달한 1900년대 초반쯤 되면 막부말, 토막혁명 시절의 정한론자들은 이미 사이고는 죽고 정계에서 나가리된지 오래였다. '정한'자체는 이루어졌어도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비전이나 의견은 하나도 반영 안되고 오히려 철저히 정치적으로 쩌리가 된 토막혁명 시기, 메이지 정권 초기의 정한론자들은 결국 그 과격성이 더 자극받아서 대륙낭인 같은 다이쇼-쇼와시기 일본 제국주의, 관외 극우의 첨병이 되거나[14] 이 시기 일본 특유의 좌우파를 초월한 지사 문화를 타서 그 와중 오히려 정신차린 소수는 메이지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일찍 통찰하고 나중엔 (당시 기준으로) 극좌 운동권 등 야권세력까지 흘러가는 경우도 있었다.[15] 이렇게 1880-1900년대 정한론세력의 정치적 좌절을 이해하지 못하고선 훗날 왜 겉보기에 일본은 조선과 대만도 집어먹고, 1차대전에서도 승전국 꼽사리에 끼고, 만주까지 처들어가면서 안그래도 알아서 잘 팽창주의적 폭주의 길을 걷고 있는데 일본 내부의 관외 극우세력은 이것도 부족해서 자국 민간 정치인들더러 유약하다면서 암살, 테러하며 결국 나라 전체를 폭주하게 만들었는지 이해가 불가능해진다. 이렇기 때문에 19세기 말의 일본 내부의 정한론 세력을 일본의 팽창주의 전반과 동치하는 건 잘못된 사실 관계인 것이다.
[1] 사실 정한론의 정(征)자는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치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하여 일본 측 시각이 반영되고 있다고 해서 이를 침한론(侵韓論)으로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한국에서도 고려의 여진 정벌, 대마도 정벌과 같은 사례가 있다. 다만 고려의 여진 정벌이나 대마도 정벌은 정한론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고려나 조선은 여진, 왜구에 지속적인 침범을 겪어왔기에 토벌을 한 예방전쟁인데 비해, 정한론은 일본의 국익을 위해 한반도를 침략하자는 선제공격이므로 단어가 같다 하여 그 본질이 같다고 하기 어렵다.[2] 사실 일본어에서는 '바른 것(正)을 행(行)한다'는 뜻으로, 멀게는 일본서기에서 부터 에도 시대까지 반드시 무력을 동원하는 뜻은 아니지만, 정벌(征伐), 정복(征服),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정한론에서 征은 무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정로환에서 정과 같은 의미. '러시아를 정벌한다'는 뜻. 이후 바를 정으로 고침.[3]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참모격인 사이쇼 조타이라는 승려가 일본서기에 실린 신공황후의 삼한정벌론을 토대로 과거 일본의 속국이었던 조선이 지금에 와서는 조공을 바치지 않으니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임진왜란을 부추긴 일도 있었다.[4] 병학, 농학, 국학를 연구하던 학자로, 원래 국학이 일뽕끼가 있는 학문이지만 그중 끝판왕이라 할만한 인물로서 일본이 만국의 근본이라고 주장하면서 조선뿐만 아니라 만주, 대만, 필리핀을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 했다.[5] "주아이 덴노(仲哀天皇, 전설상의 천황으로 그 비인 神功황후가 죽은 남편의 신탁으로 신라를 쳐서 정복했다는 황국사관의 시원적 존재) 9년, 천황 붕어하다. 황후 스스로 신라를 정복하시다. 신라 항복…고려ㆍ백제 역시 신을 칭하고 조공을 바치다…옛날 우리의 융성하고 강력했던 이유를 알지어다. 나라를 잘 보존한다고 하는 것은 단지 그 존재를 잃지 아니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자람을 불리는 데 있다. 지금 서둘러 무비(武備)를 갖추고 함정을 준비하고 대포를 늘려야 한다…류큐(琉球)를 지도하여 국내의 제후로 만들고 조선을 책망하여 인질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게 하여 옛날의 성시(盛時)와 같이 해야 한다."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44248[6] 물론 일제강점기전까지 한반도는 단 한번도 일본의 속국이었던 적이 없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내부적으로 한반도를 자신들의 속국이자 조공국이라고 선전하고 - 조선 통신사도 일본 내부적으로는 조공 사절로 선전되었다 - 대외적으로는 대등한 국가로 대우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에 이를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7] 여담으로 무츠는 가쓰의 제자다.[8] 때문에 사이고 다카모리를 자주 일본에서 의인으로 추모하기도 한다.[9] 당시 일본은 조선에 일본국황제 라고 표기한 것에 대해서 국서를 거부했고 사이고는 조선에 통신사를 보내 조선의 진의를 확인해보고자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사이고 휘하에 조선을 정복하자는 적극적인 정한론자도 있었으나 사이고가 조선과 전쟁까지 할 의도였는지는 불명확하다. 애초에 사이고는 당시 심한 성인병을 앓고있었다.[10] 이건 엄청난 문제였는데 당장 사이고 다카모리 부터가 육군대장이었으며 일본은 근대화를 위해 한 명 한 명의 인재가 아쉬운 상황이었다.[11] 당연하게도 전제왕권이 확립된 조선의 입장에선 이제까지 쇼군을 일본의 국왕이라고 인지하고 교류중인데 갑자기 그 윗사람이라고 등장하니 '이게 뭐지?' 싶었을 것이고 국왕인 쇼군의 자리를 찬탈한 쿠데타 세력으로 보아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하튼 조선 입장에선 일본의 수뇌부가 교체되었는데 갑자기 자기를 속국취급하면 기분이 좋을리 없다.[12] 특히 관동 대지진, 세계 대공황 등 경제에 지속적인 타격을 입은 것도 저런 팽창주의에 한 몫했다. 경제가 망해가니 눈에 뵈는게 없어지는 상황에서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정복으로 경제를 보완하자는 생각을 했던 것.[13] 이걸 일찌감치 간파하고 그냥 식민지 싹 다 독립시켜서 우호 관계 수립하고 (한국이야 불가능하겠지만) 이를 기반으로 무역 국가로서 성공하자고 주장한 게 이시바시 단잔. 하지만 다이쇼 데모크라시에서조차 씨알도 안 먹혔고 먼 훗날 일제 패망 후 총리로 취임하지만 이번에는 미국의 일본 길들이기에 반발하다 한 번, 자민당 체제에서 중국과의 무역 재개를 추진하다 또 한 번 밀려났다. 두 번째 사임은 지병이었다고 하지만... 정작 그의 주치의는 사임 직전 '원인 불명의 갑작스러운 병세 악화'가 있었다고 회고했으니...[14] 미야자키 토텐, 그리고 우치다 료헤이의 겐요사[15] 나카에 조민, 그리고 그의 제자이자 일본 공산주의 겸 아나키즘의 시조 고토쿠 슈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