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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회당(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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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일본의 혁신정당
창당 일본사회당 사회민주당
(당명 변경)
민사당
(분당)
사회민주연합
(분당)
신사회당
(분당)
※ 아래 정보는 당명 변경 당시를 기준으로 함
파일:일본사회당 로고.svg
일본사회당
[ruby(日本社会党, ruby=にっぽんしゃかいとう)]
<colcolor=#173283><colbgcolor=#f5f5f5> 영문 명칭 Japan Socialist Party: JSP
약칭 社会党(사회당), 社会(사회), 社(사), JSP
한글 명칭 일본사회당
창당일 1945년 11월 2일
당명 변경 1996년 1월 19일 (사회민주당)
전신 사회대중당
이념 사회주의
진보주의
급진주의[1]
평화주의
"일본에서의 사회주의로의 길" (1964) 이후"사회당 신선언" (1986) 이후
스펙트럼 좌익 빅 텐트 (중도좌파[2] ~ 극좌[3])
주소 도쿄도 치요다구 나가타초1초메 8-1
(東京都千代田区永田町1丁目8番1号)
당색 남색 (#173283)
당기 파일:일본사회당 당기.svg
중앙집행위원장 무라야마 도미이치 / 6선 (, 33~35·37~41대)
중앙집행부위원장 사토 간쥬 / 9선 (, 32~40대)
우에하라 고스케 / 9선 (, 32~40대)
치바 케이코 / 재선 (, 14·16대)
집행부서기장 구보 와타루 / 3선 (, 10·13·15대)
정책조사회장 세키야마 노부유키 / 4선 (, 37~40대)
선거대책위원장 후치가미 사다오 / 재선 (, 14·16대)
국회대책위원장 나가이 다카노부 / 5선 (, 36~40대)
참의원 의원회장 아오키 신지 / 4선 (, 10·12·14·16대)
참의원 39석 / 252석 (15.5%)
중의원 63석 / 511석 (12.3%)
국제 조직

기관지 사회신보
1996년 1월 19일 기준
1. 개요2. 역사
2.1. 초기2.2. 가타야마 내각 ~ 분열2.3. 통일2.4. 안보 투쟁과 그 후2.5. 무라야마 내각2.6. 1994년 무라야마 총리의 김일성 조전2.7. 몰락
3. 당명 변경 이후 사회민주당4. 성향5. 지지 기반6. 역대 선거결과
6.1. 중의원 의원 총선거6.2.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clearfix]

1. 개요

파일:rectangl_syakai-9309e0f9c5812.jpg

일본사회당은 1945년에 창당한 일본사회주의 정당이다. 1996년 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일본 현대사에서 드물게 수권 경험이 있는 좌파 정당으로, 55년 체제의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이어진 계파 갈등으로 세력이 누수되어 지지 기반을 갉아먹었고, 이 때문에 원내 2당에 안주하는 만년야당이라는 평을 들었다. 이 때문에 야당 지지층들도 제1야당이라서 찍었지 하면서 긍정적인 평가는 못 내리는 편이고, 1970년대 말이 되어서야 계파 갈등이 그나마 잠잠해졌다.[4]

2. 역사

2.1. 초기

파일:25232.png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후 전전의 무산운동세력이 단결해 결성하였다. 제도권 유일의 무산정당이었던 사회대중당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전전 일본의 무산운동은 오늘날의 좌우 개념과는 궤가 다른 담론이었기에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이 합류했다.

전전 사회대중당 내에는 이념과 출신에 따라 여러 조류가 존재했다. 반파시즘 통일전선을 부르짖던 스즈키 모사부로가토 간쥬에 동조하는 풀뿌리활동가 집단이 좌파로 있었고, 아베 이소오, 가타야마 데쓰, 니시오 스에히로, 미즈타니 조사부로, 요네쿠보 미츠스케 등 노동조합 운동가들이 결집된 우파가 있었으며, 또 이렇게 갈라진 무산운동의 통일을 부르짖던 아사누마 이네지로, 가와카미 조타로 등 지식인 계층이 주도한 중간파가 있었다. 그리고 사대당 밖으로 나가면, 정권에서 뇌물을 받은 것이 발각돼 무산운동 주류에서 추방당했던 히라노 리키조 주변의 황도회 집단이 있었고, 또 나카노 세이고가 이끌었던 반체제 파시스트 혁신운동인 동방회가 있었다.

여기서 좌파는 정부의 탄압을 받다가 1937년 인민전선사건으로 일망타진되었고, 우파는 1940년의 입헌민정당 사이토 다카오 의원의 반군 연설 사건에서 의회주의를 고수했다가 중간파에 의해 당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지지 기반인 노조는 익찬체제의 성립 후 산업보국회에 흡수되어 완전히 붕괴하였으며, 히라노 리키조의 황도회 세력의 근간이었던 농민운동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익찬체제로 흡수되었고, 구 사대당 우파와 황도회 세력은 하토야마 이치로가 이끄는 의회 내 보수파 그룹 동교회에 합류했다. 이들과는 반대로 고노에 후미마로에 동조해 익찬체제 성립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대당 중간파와 동방회는 그 후광을 받아 일시적으로 대정익찬회에서 승승장구했으나, 고노에가 쇠락하면서 함께 망하여 42년 총선에서는 공천도 받을 수 없게 됐고, 특히 동방회는 그 수괴인 나카노 세이고가 자살을 강요받는 사태를 맞았다.

전후 이들 집단은 제각기 무산운동의 대동단결을 부르짖으며 잇따라 통일무산정당의 창당을 시도한다. 좌파는 혁신화족으로 유명한 도쿠가와 요시치카를 당대표로 하는 이른바 "국민협회"라는 것을 구상했고, 중간파도 혁신화족이었으며 구 대정익찬회의 사무총장을 역임했던 아리마 요리야스 전 농림대신이나 전전 혁신파의 아이콘이었던 기시 노부스케 등의 추대를 시도했다. 그러나 종전 직후 가장 목소리가 컸던 집단은 하토야마가 이끄는 동교회에 가담했던 우파/황도회 집단이었다. 니시오, 히라노, 여기에 미즈타니 조자부로[5]를 더한 3인 그룹은 전시의 하토야마 그룹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하토야마를 영수로 모시고 무산운동과 "진보적 자유주의" 세력을 규합한 빅텐트 중도정당을 창당코자 했으나, 오노 반보쿠, 고노 이치로, 가와시마 쇼지로, 마츠노 츠루헤이 등 하토야마의 측근들이 격렬하게 반발하고 하토야마 본인의 의향도 일본자유당의 창당으로 기울자 3인 그룹도 무산운동을 결집시키는 것으로 선회했다. 한편, 좌파가 모시려고 했던 도쿠가와 요시치카는 본인이 고사했고, 중간파가 모시려던 아리마 요리야스는 좌파와 우파가 격렬하게 반대했으며, 기시 노부스케는 전범으로 체포돼 버렸다.

이렇듯 각 정파들의 구상들이 전부 좌절되면서 어느 일파도 신당을 장악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좌파가 당대표로 밀었던 도쿠가와 요시치카와 중간파가 당대표로 밀었던 아리마 요리야스/기시 노부스케의 취임이 전부 좌절된 후 누가 당대표가 될 것인지 합의를 보지 못했고, 급기야 사회당의 창당대회에서는 당대표에 해당하는 당 중앙집행위원장직을 공석으로 남기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비록 우파의 3인 그룹이 이른바 "창당 3인"이라고 하여 사회당의 창당 과정을 지도하기는 하였으나, 이들은 타 정파들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하고 무산운동 대동단결이라는 명분으로 포용하면서 제각기의 입장과 지분을 보장해주어야만 했다. 위원장 공석자리에 우파 인물이었던 가타야마 데쓰가 뒤늦게 취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조율의 결과였다. 그런데 앞서서 보았듯 이 정파들은 무산운동이라는 담론에 묶였을 뿐 서로 지향점도 다르고 출신도 달랐기에, 지분을 보장해주지 못할 경우 단일대오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 밖에 없었다. 이 폭탄은 가타야마 내각에서 가장 극적으로 터지게 된다.

2.2. 가타야마 내각 ~ 분열

전후 새 헌법에 의해 치러진 1947년 중의원 총선거에서 143석을 획득해 제1당으로 부상한 사회당은 일본민주당과 국민협동당 양당과 연립하여 가타야마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 연립정권 형성을 주도한 것은 이미 앞서 "진보적 자유주의" 세력과의 협력을 구상한 우파였으나, 일본민주당과의 연정 성립을 위해 대장대신을 내주는 등 지대한 양보를 했으며, 그간 사회당이 내세웠던 개혁 정책들도 대대적으로 축소되는 등 혁신성이 크게 퇴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좌파는 공산당과의 절연 선언을 요구받으면서 사상검증까지 당하였다. 더군다나 히라노 리키조 농림대신이 전전 황도회 활동을 빌미로 공직에서 추방된 것을 둘러싸고 우파의 일부가 탈당하여 사회혁신당을 창당하는가 하면, 반대로 좌파에서도 구로다 도시오를 위시로 하는 친중파가 제명되고 나중에 노농당을 창당하게 된다. 거기다 히라노의 공직추방으로 공석이 된 농림대신의 후임을 놓고 좌파와 우파와 민주당이 서로 싸우는 등, 가타야마 내각에는 분열이 끊이지 않았다.

급기야 1948년 2월에 가타야마 내각이 제출한 공공요금 인상안을 좌파가 날치기로 상정하여 부결시키자, 가타야마 내각은 막다른 길로 내몰려 실각하기에 이르르고, 후속되는 아시다 내각은 사회당-민주당 연립은 유지하되 총리가 민주당에게 돌아가면서 사회당은 하위 파트너로 전락하였다. 그런데 이 아시다 내각마저 곧 쇼와전공사건에 휘말려 아시다 본인은 구속되고 또 사회당 우파의 수장이며 당시 내각의 부총리였던 니시오 스에히로까지 연루되는 미증유의 정치위기가 닥쳐왔다. 아시다 내각의 붕괴 후 1949년 1월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사회당은 불과 48석만 건지며 대패했으며, 특히 우파에서는 총리였던 가타야마와 부총리 니시오, 좌파에서는 노동대신 가토 간쥬 등 가타야마-아시다 내각에 입각했던 거물들이 전부 낙선하는 등 국민들의 외면을 받았다. 이 대패로 전후 세대가 본격적으로 당 조직에 침투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고, 이는 좌파가 비록 함께 심판을 받기는 했지만 이후 풀뿌리 활동가 집단에 기반을 두고 당내 세력을 급격하게 확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반면에 사회당 우파는 자신들이 주도했으나 실패작으로 끝난 가타야마-아시다 내각, 니시오의 정치 스캔들 연루, 그리고 선거참패의 책임까지 짊어지면서 당내에서 수세에 몰리게 된다. 달라진 좌파와 우파의 위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총선 직후인 4월에 열린 제4회 당대회이다. 일명 모리토·이나무라 논쟁[6]으로 당 노선에 대한 격렬한 토론 끝에 좌파와 우파의 노선을 적절히 융합한 타협안이 채택되었으나, 불과 2년 전 우파에 의해 사상 검증을 강요당하던 좌파가 이제는 우파에게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즈음에 이르면 갈등의 골은 당의 뿌리 조직으로도 번져서, 좌파가 사회당 청년부의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외연 확장에 나서는 것에 맞대응하려는 우파의 움직임이 이른바 독립청년동맹의 결성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독청 조직의 이론적 지도자는 사노 마나부 등 전직 공산당 전향자들이었고, 이에 좌파에서 "독청의 배후에는 파쇼가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등 각종 물의를 빚었다. 급기야 1950년 1월에 열린 제5회 당대회에서는 사회당 청년부가 초대위원장으로 선출된 후 아직까지 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던 가타야마를 상대로 불신임을 선언하고, 독청 가담자들을 제명하라는 결의를 발표한다. 이 요구를 받은 가타야마는 당대회 도중 대회장을 박차고 나와 우파끼리만 모여 다시 당대회를 열었고, 스즈키의 좌파와 아사누마의 중간파는 우파 당대회를 인정하지 않고 스즈키를 서기장을 선출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6월의 참의원 선거 문제로 부득이 통일대회를 다시 열어 일시적으로 우파가 당에 복귀하고 스즈키를 아사누마로 교체하는 타협이 있었으나,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고 교체당한 스즈키도 곧 위원장에 선출되어 당내 좌파 우위를 완전히 굳혔다. 또한 지금까지 우파가 기반으로 삼았던 비공산당 계열 노동조합연맹, 즉 총동맹이 독청문제로 아수라장이 된 것을 이용하여 좌파가 그 주도권을 탈취했고, 이윽고 이들은 공산당 계열의 노동조합연맹인 산별회의를 탈퇴한 이른바 민동파와 결탁하여 총평을 결성함으로서 일거에 일본 노동조합운동의 주도권을 획득했다. 반대로 우파는 자신들의 기반이 위축되면서 운동 내의 비주류 세력으로 전락하게 된다.

위원장은 좌파, 서기장은 중간파, 의원들은 우파, 하지만 기반 조직은 좌파가 장악한 아슬아슬한 분열상에 재차 불이 붙은 것은 1951년 9월로, 강화조약에 소련과 중국이 불참하고 또 안보조약이라는 것이 부록으로 딸려오면서 여기에 대한 가부를 놓고 다시 당이 갈라지게 된다. 좌파는 소련과 중국이 없는 강화조약과 일본의 비무장 중립을 위협하는 안보조약에 모두 반대했고, 우파는 두 조약에 모두 찬성했다. 여기에 중간파가 강화조약에는 찬성, 안보조약에는 반대하는 타협안을 제시하자, 우파가 찬성하면서 중앙위원회에서는 통과됐으나, 이 결과에 반발한 좌파가 당대회를 소집해 부결시키고자 했다. 대회 도중 우파와 중간파는 아사누마 서기장을 중심으로 이미 중앙위원회를 통과한 타협안을 집행하겠다며 원내 의원 다수를 이끌고 대회장을 나갔고, 좌파는 스즈키 위원장을 중심으로 중앙위원회의 타협안을 부결시킨 후 무효를 선언했다. 그리하여 좌파와 중간파가 당대회를 지키고 우파가 떨어져 나간 1950년의 분열극과는 달리 이번에는 좌파만이 당을 지키고 중간파와 우파가 함께 나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 분열이 이른바 좌파사회당우파사회당의 시초다.

2.3. 통일

1951년 분열 당시 좌사당이 중의원 16석, 우사당이 중의원 30석을 가져가면서 원내에서는 일시적으로 우사당이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활동가들-노조와의 연결로 선거 기반이 단단했던 좌사당은 1955년 총선거에서 89석을 획득한 데 반해 우사당은 불과 67석에 그치면서 불과 4년 만에 좌사당 우위로 돌아섰다. 특히 이 시기엔 좌파의 주 구성원들이었던 활동가들과 노조 출신 의원들이 대거 의회로 진출해 이른바 "사회당-총평" 블럭의 정치 역학이 확립됐다. 그런데 이렇게 되니 활동가층이나 총평과는 거리가 있던 집단, 이를테면 와다파 등 정책통들은 스즈키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으면서 마찰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우사당의 내부 상황은 이보다 더 심각했는데, 본디 우사당은 우파의 강화 찬성, 안보 찬성 입장에 중간파가 강화 찬성, 안보 반대라는 타협안을 내놓으면서 이를 전제로 양 당파의 협력이 성립되었었다. 그런데 자위대 문제가 본격적으로 떠오르자, 원래 안보조약에 찬성이었던 우파는 재무장에 찬성으로 돌아섰고, 중간파는 반대로 재무장 반대를 주장했다. 더군다나 아사누마 서기장은 우사당을 중간파 천하로 꾸렸으니, 대정익찬회 등 전시정책에 협력한 책임으로 공직 추방을 당했던 가와카미 조타로가 추방이 풀리자마자 중간파의 수괴가 되어 우사당의 위원장이 되었으며, 산업보국회의 이른바 "산보-인민전선파"의 지도자로서 노동자 강제 동원에 봉사한 미와 쥬소는 우사당의 정치자금책이 되었다. 이렇게 중간파가 우사당 지도부를 독점하고 있던 상황에서 좌사당에 비해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내자 중간파는 우파에게 추궁당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한편 양 사회당의 밖을 돌아보면, 그간 장기집권한 요시다는 독재적인 정치로 국민들의 싫증을 불러와 54년 끝내 실각했고, 반대로 오랫동안 반요시다 투쟁을 한 하토아먀는 전국적인 기대를 한데 모으면서 자유당 하토야마파, 하토야마 자유당, 개진당 등 삼파를 합동시켜 민주당을 창당했다. 과연 민주당은 1955년 총선거에서 121석을 185석으로 불리며 대승했고, 반면 요시다의 퇴진으로 정권을 내준 자유당은 185석을 112석으로 말아먹었다. 그런데 의석 수의 변화를 잘 보면, 민주당이 대승했다고 하는 선거 결과도 사실은 아무런 외연 확장도 하지 못한 체 그저 보수정당 내에서 서로 의석 수를 바꿔먹은 것에 불과하며, 그나마도 양 사회당의 선전으로 의석 수가 야금야금 줄고 있었다는 점이 보인다. 따라서 이런 분열상에서는 양 사회당이 통일될 경우 그 시너지까지 고려한다면 의회 단독 과반수까지는 못하더라도 제1당을 노려볼 길이 열리는 것이었다.

1955년 사회당의 통일은 이런 고려와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즉 좌사당의 지도 세력인 스즈키파와 우사당의 지도 세력인 중간파가 합동을 주도함으로서 자신들을 통일사회당의 주류로 고착화시키고 당 지도의 난맥상을 해결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의 재무장에 반대하던 좌파와 중간파의 노선을 통일사회당의 노선으로 관철함으로써 재무장에 찬성하는 우파를 억제하고 비무장중립론을 당의 영원불변한 입장으로 정립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당 체제의 붕괴와 자유-민주 양당의 정립은 통일사회당에게 원내 다수당의 기회를 열어주고, 장기적으로는 연립내각으로서 정권 참여 가능성까지 내다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2.4. 안보 투쟁과 그 후

사회당은 1956년 참의원 선거에서 49석을 확보, 사실상의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으며 전국구 의석 수에서 자민당을 앞지르는 위엄을 보였다. 그러나 안보투쟁 문제에 있어서 안보조약 개정 및 갱신에 찬성하던 우파와 안보조약 폐기를 주장하던 좌파 사이에서 중간파가 갈라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에 맞물려 1958년 총선에서 8석을 늘리는 데 그치고 1959년 지방선거에서도 의석을 늘리기는 했지만 예상에 미달한데다 참의원 선거에서 당시에 도쿄에서 표 분열로 한명도 당선시키지 못하며 38석에 그치면서 계파 갈등이 격화되었다. 그 책임을 계급투쟁에 골몰한 좌파에게 물으려는 니시오 우파와 운동 분열을 촉진한 우파에게 물으려는 스즈키 좌파 사이에서 격렬한 투쟁이 발생하여 급기야 니시오를 당에서 제명시키려는 운동이 발생하였고, 니시오는 우파를 이끌고 탈당하여 민주사회당, 이후 민사당을 창당하는 것으로 받아쳤다. 여기에 중간파, 특히 관동지방에서 다량의 이탈자가 발생하여 구 사대당 중간파의 전통은 명맥이 끊어지고 사회당 우파의 성격 또한 원천적으로 바뀌게 된다.

또한 안보투쟁 자체를 놓고 전체적으로 총괄하였을 때 사회당의 원내투쟁이 효과적이었다고 할 수도 없다. 안보투쟁을 주도한 것은 분트 등 신좌파 및 공산주의 청년조직들의 학생운동이었고, 사회당 등 정당세력이 조직한 시위는 일만명 규모를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었다. 물론 사회당 내부의 계파분쟁으로 분열된 문제도 있었지만, 더 큰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당에게 여론을 동원하기는 커녕 주도할 능력 자체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도쿄 찌르기 사건으로 아사누마 이네지로 위원장(대표격)이 죽은 동정표도 얻지 못했으며, 뒤이은 선거에서 이케다 총리가 소득 배증 계획을 제시하며 선거 의제를 자민당에 불리한 안보 문제에서 경제 문제로 전환하자 안보 문제를 중심 의제로 선거를 치르려고 했던 일본사회당도 결국 경제정책을 주요 공약으로 내놓게 되면서 주도권을 상실하고 '만년야당'으로 전락했다.

이 문제를 놓고 당내 좌파의 지도자였으며 스즈키 모사부로의 후계자로 등장한 에다 사부로구조개혁론을 내세워 대중적 좌파의제를 도입하고자 했다. 구조개혁론은 유로코뮤니즘에서 수입한 것으로 투쟁의 대상을 이른바 독점자본에 집중하는 형태였다. 그런데 이를 정치투쟁의 경시화 내지는 개량주의적 사회민주주의로 이해한 사사키 고조를 위시로 하는 반구조개혁파의 강력한 반발로 구조개혁파는 이른바 '우파'로 몰리게 된다. 그리하여 기존의 사회당 우파는 탈당하고 중간파는 궤멸한 상태에서 이제는 사회당 좌파 안에서 구조개혁을 놓고 사사키파와 에다파가 새로이 갈라나오게 된 것이다. 두 계파 모두 노농파 마르크스주의를 잇는 사회당 좌파의 후계자들이며, 중간파로 등장한 가쓰마타파도 좌파사회당에 합류했던 와다파의 계보를 잇는 집단이었다.

그리하여 1960년대 후반, 사회당은 친중[7]친소[8]의 불편한 동거로 인한 당내 갈등이 격화되어 유권자에게 실망감을 주었고 이는 1968년 참의원 선거와 1969년 중의원 선거에도 영향을 미쳐 자민당의 득표율 감소에도 텃밭인 대도시 지역에서 타 야당(공명당, 일본공산당)에게 표를 빼앗기며 참패하였고 이후 나리타 토모미 위원장 치하에서 세력이 회복되었을 때도 이때 빼앗긴 지지 기반은 끝내 회복되지 못했을 지경이었다.

결국 사회당 우파 수장격 인물이였던 에다 사부로가 당내 좌파 계파인 사회주의연구회의 비판을 받고 결국 사회당에서 제명되기에 이른다. 제명 후엔 사회시민연합을 창당한다. 그러나 제11회 참의원 선거 직전에 지병인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급히 아들인 에다 사쓰키가 출마해 오카야마 참의원에 당선된다. 후에 사회시민연합은 사회민주연합으로 당명을 개칭하고 비전공투 운동권 출신 간 나오토가 정치계 리즈 시절 활약한 정당이 바로 이 사회민주연합이다. 후에 에다 사쓰키는 이때 인연인지 간 나오토의 계파 나라의 모습 연구회의 좌장이 되고 간 내각의 주요 대신으로 입각하게 된다.

이 때 사회당의 내부 논쟁이라는 것이 중도성향 유권자들의 지지를 잃기 쉬운 소재였는데, 대표적으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지지해야 하는가 등이었고[9],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을 지지해야 하는가(...) 등의 논쟁[10]도 있었다. 나리타 공항 투쟁에서는 경찰과 시위 측 합쳐 12명이나 죽은 쟁의에 참가해 신좌파계열의 극좌학생들을 독려하는 등 점차 극좌 색채가 강해지며 중도층의 지지를 잃어가는 게 이 시기의 사회당이었다. 오히려 일본공산당이 사회당을 폭력 집단과 손을 잡았다며 비난하는 광경이 펼쳐지기도.[11] 도이 다카코 위원장 시대가 와서야 공명당과 공산당으로 흩어진 해당 지지 기반을 회복하는데 성공을 거뒀지만 이마저도 오래 가지 못하고 1992년 참의원 선거와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 신당 붐으로 잇따라 날린다.

하지만 사회당은 1960년대 후반에서부터 1970년대 초중반에 걸쳐 야권 연대(사회당-공산당)로 도쿄교토, 나고야 등 상당수 지역에서 지자체장을 차지했고, 1969년 중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이후 나리타 토모미 위원장과 이시바시 마사시 서기장 주도로 사회당의 세력 기반을 강화해 1971년 참의원 선거 때부터 1976년 중의원 선거 때까지 5년간은 선거에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며 당세가 회복되었다.[12] 하지만 이러한 세력 회복에 더해 1974년 참의원 선거와 1976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잇따라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고 사회당을 포함한 야당이 자민당과 비등한 의석을 확보하였음에도 사회당은 여전히 정권 확보와는 거리가 멀었다. 자민당에서 떨어져 나간 표는 공명당, 민사당, 신자유클럽으로 향했고, 더 선명성 있는 야당을 원하는 유권자들은 공산당을 지지했는데 사회당은 이 둘의 중간에 위치한 어쩡쩡한 상태에 놓여 있었고 그렇다고 중의원 선거에서 후보자 수를 크게 늘린 것도 아니었던지라 정권을 확보하지 못하는 불임야당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지는 바람에 부동층들의 표를 확보하지 못한 것이었다.

또한 정권 교체를 목표로 한다 해도 민사당, 공산당과의 관계가 크게 문제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전 야당을 포함한 연립정부의 구성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회당을 포함한 야당이 의석을 늘리고 자민당의 득표율이 낮아져도 정권 탈환을 하기 힘들었다. 또한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1968년과 1969년 중참의원 선거 때보다 나은 성적표를 거둔 성적이지 여전히 1956~1967년도의 선거 결과보다는 못했다. 하지만 사회당은 이들 야당과 어쩡쩡하게 관계를 유지해야 되는 딜레마에 처하게 되었는데 공명, 민사당과 연합을 하면 그나마 정권 교체에 근접하는 의석과 득표율을 얻을 수 있었지만 민사당이 반공 노선을 내세우며 자민당과의 연합을 할지 말지를 놓고 간을 보는 데다, 공산당은 천황제 부정과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중도성향 유권자가 떨어져 나갈 위험이 있었으니 어떤 쪽을 택하든 간에 정권 확보를 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사회당이 이들 야당을 힘으로 누를 수도 없던 것이 소선거구제를 채택할 경우 이들 야당들을 거진 쩌리로 만들어버릴 수야 있겠지만 그 대신 그나마 가지고있던 농어촌 지역 의석은 그대로 자민당에게 헌납하기 때문에 자민당 의석 수만 늘여주는 꼴이 되기에 사회당에게 별다른 메리트가 없었다. 후의 일본 민주당이 소선거구제의 장점을 잘 활용해 공산당 후보자들의 표를 흡수하는 데 성공해서 2000년대 당시에 자민당이 삽질할 때마다 의석 수를 크게 늘린 것과 대비된다.

거기에다가 고질적인 계파 갈등 문제가 남아있었으며, 이러한 계파 갈등은 1976년 중의원 선거 이후로 본격적으로 터져 에다 사부로를 비롯한 일부 세력들이 사회시민연합이라는 정당을 따로 만들며 세력이 누수됐다. 그 결과 1977년 참의원 선거에서 단 27석에 그치는 부진을 면치 못했고 이후 1979년 통일지방선거에서 지방 권력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6개월 후에 치러졌던 중의원 선거에서도 자민당의 패배(248석)에도 불구하고 공산당과 공명당에게 의석을 내주며 또 의석을 까먹었다(119석에서 107석으로[13]). 하지만 자민당의 내분이 장기화되자, 상황은 역전되었고, 이 와중에 의회해산안이 통과되어 중참의원 동시선거가 펼쳐지자 드디어 정권교체를 이룰 기회를 잡았다.[14][15]

하지만 선거 운동 기간 도중 민사당이 사회당을 비방하는 일이 터지면서 생각보다 버프를 못 탄데다가 무엇보다 오히라 마사요시 수상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중의원 의석 수는 줄어들지 않았지만 참의원 의석 수는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그 이후 별 다른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하며 선거마다 족족 패배하는 모습을 보였고[16], 1986년 중, 참의원 동시선거에서 사회당의 지지율이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의회 해산을 막으려고 했지만 의회 해산이 강행되면서 나카소네 야스히로에게 통합 이후 최악의 참패를 당했다.

최악의 참패를 당한 사회당은 여성인 도이 다카코를 사회당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대대적인 쇄신에 나섰다. 그 결과 80년대 일본 버블경제로 요약되는 호경기였을 때였음에 불구하고 선거마다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고.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는 리크루트 사건우노 소스케 총리의 불륜 문제로 자민당에 대한 지지 여론이 악화되며 드디어 자민당을 제치고 개선 1당이 되는 데 성공한다.[17]

그러나 다음 해 중의원 총선거에서 연립정부 구성에 참여하기로 한 타 야당(공명당, 민사당, 사회민주연합)이 지리멸렬한데다가[18] 후보자 수를 1986년 총선거보다 5명 더(1986년 144명->1990년 149명) 내는 데 그쳤고 결국 야당 전체의 의석을 크게 늘리는 데 실패한데다 공명당과 민사당의 득표율이 줄어드는 바람에 정권교체엔 실패했다.[19] 사공민 연합의 득표율 자체는 1983년 중의원 선거와 비슷했지만 효율적인 표 배분에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1991년 걸프전이 터지자 사회당은 걸프전을 협상을 통해 종결하자는 비현실적인 논평을 발표했고 이는 도이 위원장의 지도력에 의심을 가게 만들었다. 결국 사회당은 그 해 통일 지방선거에서 참패하고 도이 다카코는 사회당 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우파사회당 출신 타나베 마코토, 야마하나 사다오가 권력을 잡았다.

당초에는 사회당이 제1당이 되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의석 수를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됐지만, 1992년 참의원 선거전에서 PKO(유엔평화유지활동) 법안이 쟁점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PKO법을 민사당과 공명당이 찬성하면서 야당의 공동 전선이 흐려졌고, 결국 PKO 법안 시행에 대해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당내도 분열됐다. 독자 후보를 내세우는 측과 그래도 공명-민사당과 같이 가야 한다는 측이 나눠진 것. 그 결과, 1992년 참의원 선거에서는(사과와 규빈 사건까지 겹쳐 자민당의 지지율이 최악이었을 때임에도) 투표율이 50.7%에 그쳐 반사 이익을 얻지 못하고 22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다음해엔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을 대신할 비전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되려 쇄신 이미지를 일본신당, 신생당, 신당 사키가케 등이 가져가면서[20] 기성 정당적인 이미지가 씌여지며 1986년 총선거보다도 의석 수가 적은 70석에 그쳐 참패했다.

2.5. 무라야마 내각

1993년 중의원 선거 참패에도 불구하고 정권이 교체돼 호소카와 내각의 여당 내 1당이 되었으나[21] 여당 내 갈등으로 1994년 4월에 연정을 깨고 그 해 6월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총리가 되는 조건으로 자민당, 신당 사키가케와 새롭게 연립정권을 수립했다.

카타야마 내각 이후 무려 46년만에 야심차게 출범한 사회당 정권이지만 무라야마 내각은 연이은 사건 사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수차례 삐끄덕거렸고, 실망한 국민들이 등을 돌린 상황에서 힘겹게 내각을 유지하는 수준에 그쳤다. 결국 한계에 부딪힌 무리야마 도미이치가 1996년 내각 총사퇴를 발표한 뒤, 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그래도 아예 공적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1년 2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무라야마 담화 발표, 피폭자 구제법 성립, 미나마타 병 미확인 환자에 대한 전면 구제 등 나름 사회당 내각다운 모습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자민당에서 워낙 많은 내각 각료를 가져간 탓에 무라야마 총리가 뜻을 펼 수 있는 한계는 뚜렷했다.

2.6. 1994년 무라야마 총리의 김일성 조전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무라야마 총리는 일본사회당 명의로 김일성의 사망을 애도하는 조전을 보냈다.[22] 이 같은 행보에 대해 일본사회당은 조선로동당과의 오랜 우호관계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은 일본 특유의 국익을 위한 남과 북에 대한 줄다리기식 외교라고 분석했다.

당시 조전에서 무라야마 총리는 "'위대한 지도자 김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에 가슴깊이 우러나오는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한다"'라고 밝혔다.[23][24][25]

2.7. 몰락

이렇게 짧은 여당 시기를 거치면서 자민당이 부진했던 기회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일본사회당이 정체성을 잃고 자멸해 버렸다.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센고쿠 요시토, 아카마츠 히로타카, 오하타 아키히로, 이노우에 잇세이, 하치로 요시오우파사회당 대부분이 민주당으로 건너가고, 오카자키 히로미좌파사회당 일부가 신사회당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설상가상 지지 기반마저 민주당으로 떨어저 나가 계속 의석 수가 반토막나고, 결국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만다.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시점에서 사회당 소속 경험이 있는 국회의원은 중참의원 통틀어서 아카마츠 히로타카, 사사키 다카히로, 요코미츠 가쓰히코, 요시카와 하지메, 다니하타 다카시, 하치로 요시오 총 6명이다. 이 중에서 사회당 국회의원 출신 의원은 아카마츠, 요코미츠, 다니하타, 하치로이며, 다니하타 의원은 2020년 건강 악화로 의원직을 사직하여 현재 국회에 사회당 출신은 5명뿐. 이후 아카마츠 의원과 사사키 의원이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하였으며,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요코미쓰 의원은 낙선하였으며 하치로 의원 역시 제2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舊 일본사회당 국회의원 출신은 완전히 사라졌다.[26]

그러나 2010년대 이후로 일본의 민주당-민진당-구 입헌민주당-신 입헌민주당이 부진을 달리며 일본사회당도 재평가되는 흐름이다.(...) 비록, 일본사회당이 만년야당이었고, 지지세가 정체된것도 이 때문이기는 했지만, 일본사회당은 그래도 중, 참의원에 있어서 민주당계 정당들보다 더 많은 의석을 챙기기라도 했기 때문이다.[27]

현재 대한민국국민의힘12.3 내란로 인해 잘못하다간 일본사회당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3. 당명 변경 이후 사회민주당

이후의 역사는 사회민주당(일본) 참고.

4. 성향

우파와 중간파민주사회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를, 좌파반자본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 아소 히사시, 가와카미 조타로 등을 위시한 일부 사회대중당 중간파 세력은 태평양 전쟁때 사회주의의 실현을 국가주의에 요구하며, 군사 독재에 협력한 강경파적인 색채가 강한 의원도 많았다. 그럼에도 대체적으로 미국에 비판적이었으며 신생국인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당시 일본사회당의 중앙집행위원장였던 아사누마 이네지로 의원은 중국을 방문하여 미국은 일본, 중국 공동의 적이라고 하기도 하였으니...

일본의 원내정당에서는 가장 친북 성향이 강했으며, 1989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과의 회담 이전까지는 사실상 북한만을 인정하고 있었다. 1970년 대에 대거 방북단을 보낸 것을 계기로 조선로동당의 유일한 해외우당을 자처했다. 오죽하면 이런 에피소드도 있는데, 1978년에 김일성이 사회당 방북단 접견자리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조선로동당 간부들이 김일성이 말할 때마다 기립하며 아부를 했는데, 이를 본 사회당 의원들도 똑같이 김일성의 말이 끝날 때마다 기립하며 예를 표했다고. 이런 성향 때문에 반북성향의 좌파정당이었던 일본공산당에게 많이 비판받았다. 또, 일본공산당은 사회당이 신좌익 등의 '폭력집단'을 '동맹군'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하는 등으로도 비판했다. 물론 사회당만 탓할 것이 못 되었던 것이 자민당이나 공명당도 북한에 파견단을 내보내며 간을 봤던 시절이기는 했다.(...) 다만 실제 선거연합에 있어서는 사회당이 유연한 편이었다. 이는 반공주의를 내세운 민사당이 사회당과 상당기간 동안 선거연합이나 정책연합을 했기 때문이었다.[28] 여하건 저하건 이 때문에 일본 망명 시절 일본사회당 의원들의 암묵적 지원을 받아 유신 철폐 투쟁에 나섰던 김대중이 북괴의 지원을 받아 내란 음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뻔 했다.
전쟁 이전에도 창당 당시에 당명을 ‘일본사회당’으로 할지 ‘사회민주당’으로 할지 논의하다가 일본어 명칭은 일본사회당으로, 영문 명칭은 Social Democratic Party of Japan(SDPJ, 일본 사회민주당)으로 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후에 좌파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점차 Japan Socialist Party(JSP)라는 영문 명칭이 사용되게 되었다. 그 후 다시 우파의 영향력이 강해져 사회민주주의가 당의 노선이 되면서 SDPJ의 영문 명칭을 회복하게 되었다고 한다.

5. 지지 기반

  •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정당답게 초기에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대도시와 그 근교 지역에서 상당한 강세를 보여(물론 중소도시나 시골은 자민당의 압도적인 우위였다. 물론 중소도시나 시골이라도 노조나 농민단체 가입률이 높은 일부 지역은 사회당의 지지세가 높았기는 했지만 홋카이도 지역을 뺀 나머지 지역에서 가입률이 높은 곳이 그리 많지 않았다.그나마 대표적으로 오이타현과 지금도 야권지지세가 주고쿠에서 가장 강한 요나고시 정도였다.)선거구당 후보를 여러명씩 내보냈으나 자민당이 장기집권이 고착화되고 사회당이 계파갈등 등으로 원내 2당 자리에 안주하는듯한 모습을 보이며 사회당에 별 다른 매력을 못느끼게 된 야당 성향 유권자들이나 부동층들이 공명당, 일본공산당, 신자유클럽, 민사당등으로 흩어지며 사회당의 지지 기반을 잠식했고, 이 때문에 대도시 지역에서 우위를 상실하면서 한두 명씩 정도나 후보를 보내서 당선시키는 수준이 되었고, 오히려 농어촌에서의 세력 보존이 잘 된 편이었다.[29]
  • 자민당의 지지 기반이 게이단렌과 농촌단체라면, 사회당의 지지 기반은 총평(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이었다. 총평이 당시 일본 노조단체 가운데서는 가장 강력했던 관계로 지리한 선거 결과를 이어갔음에도 제1야당 자리는 굳건히 지킬 정도의 지지 기반이 되어주었다.
  • 그 이외에는 홋카이도에서 상당히 강세였으며 타 지역에서 공명당, 공산당, 민사당으로 표가 상당수 빼앗기는 와중에도 홋카이도에서만큼은 세력 보존이 잘 되었다.
  • 사회민주당으로의 당명 변경 이후 지금의 일본 사회민주당 이외에 무라야마 내각의 온건화를 반대하던 강경파들이 떨어져 나가 스스로 살림 차린 신사회당이 있다. 국회 원내로는 진출하지 못하고 기초자치단체 의석만 전국구적으로 엄청 많이 갖고 있다. 이전에 한국의 민주노동당과의 간담회도 있었고 통합진보당을 응원했고 박근혜 정부에게 진보세력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방북한 적도 있다.
  • 이외에 2000년에 사회당의 전 국회의원이었던 우에다 테츠(上田哲)에 의해 창당된 사회당이라는 정당이 또 있었으나 여기는 2000년에 치러진 제42회 중의원 선거에 한 번 나오고 국회 입성에 실패한 뒤 2008년 우에다가 사망하며 현재는 와해되었다. 그래도 당시 원내정당이었던 자유연합과 보수당보다 득표율이 높았다.
  • 박상희 기자 - 일본 사회당의 몰락은 무엇을 말하는가 #

6. 역대 선거결과

※ 제1당을 차지한 선거는 총 의석이 볼드체로 되어 있다.

6.1.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의석 증감은 직전회차 선거 의석 수와의 비교임.
연도(회차) 후보자 당선자 [증감] 정당투표
득표수 득표율
1946(22회) 331 93 [▲78] 9,924,930 17.90%
1947(23회) 289 143 [▲50] 7,176,882 26.23%
1949(24회) 187 48 [▼95] 4,129,794 13.50%
좌우분열
1952(25회) 96 54 4,129,794 9.62%
109 57 3,398,597 11.63%
1953(26회) 108 72 [▲18] 4,516,715 13.05%
117 66 [▲9] 4,677,833 13.52%
1955(27회) 121 89 [▲17] 5,683,312 15.35%
122 67 [▲1] 5,129,594 13.86%
재통합
1958(28회) 246 166[30] [▲10] 13,093,993 32.94%
1960(29회) 186 145 [▼21] 10,887,134 27.56%
1963(30회) 198 144 [▼1] 11,906,766 29.03%
1967(31회) 209 140 [▼4] 12,826,103 27.88%
1969(32회) 183 90[31] [▼50] 10,074,100 21.44%
1972(33회) 161 118 [▲28] 11,478,742 21.90%
1976(34회) 162 123 [▲5] 11,713,008 20.69%
1979(35회) 157 107 [▼16] 10,643,450 19.71%
1980(36회) 149 107 [-] 11,400,747 19.31%
1983(37회) 144 112 [▲5] 11,065,082 19.49%
1986(38회) 138 85 [▼27] 10,412,584 17.23%
1990(39회) 149 136 [▲51] 16,025,472 24.39%
1993(40회) 142 70 [▼66] 9,687,588 15.43%
사회민주당으로 당명 변경

6.2.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연도(회차) 후보자 당선자 비개선
의석
총 의석 [증감] 전국구
지방구 전국구 합계 지방구 전국구 합계 득표수 득표율
1947(1회) ? ? 101 30 17 47 - 47 [-] 3,479,814 16.36%
2회1950년36/2561(제2당)25025.2%/17.3%
3회1953년좌파 사회당 10/162625010.5%/6.4%
우파 사회당 18/224014.0%/14.3%
총 28/386624.5%/20.7%
4회1956년49/318025037.58%(제2당)/40.38%(전국구 제1당)
5회1959년38/4785250
6회1962년37/2865250
7회1965년36/3975250
8회1968년28/3664250
9회1971년39/2766252
10회1974년28/3462252
11회1977년27/2956252
12회1980년25/2752252
13회1983년22/2547252
14회1986년20/2141252
15회 1989년 46/22 68[32] 252
16회1992년22/4971252
17회1995년17/2138247
일본 사회민주당으로 당명 변경

[1] Tetsuya Kataoka, ed. (1992). Creating Single-party Democracy: Japan's Postwar Political System. Hoover Institution Press. p. 2. ISBN 9780817991111. "The constitution was defended by the JSP, the mainstay of kakushin (radical-liberal forces), ..."[2] 사회당 우파 중에는 자민당 못지 않은 보수적인 외교관을 가진 의원들도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CIA의 지원 하에 외교적으로는 친미/반공 노선의 사회주의 정당인 민사당을 결성하기도 했다.[3] 극좌 계열로는 당의 청년조직인 혁명적노동자협회(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의 주류파)가 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실현으로 로자 룩셈부르크의 노선을 따랐다.[4] 참고로 민사당은 간잽이, 공명당은 종교정당, 공산당은 빨갱이 정당이라는 이미지였는데, 1960년대에 사회당 강성파 지지자들이 계파 갈등에 실망, 공산당으로 대거 이탈해 공산당의 성장에 도움이 됐다.[5] 1920년대에는 좌파에 공명하였으나, 1930년을 기점으로 중간파와 협력해 무산운동의 통일을 주장했고, 이후에는 우파에 가담했다.[6] 사회당 좌파였던 모리토 타츠오와 사회당 우파였던 이나무라 쥰조를 따왔다.[7] 길게 사회당의 톱을 차지했던 나리타 도모미 위원장 등[8] 사회주의협회 등[9] 여담이지만 당내 좌파가 이 논쟁에서 이겨 결국 지지했다(...)[10] 사회당 좌파 중에서도 왼쪽으로 치우치기로 악명 높았던 사사키 고조 전 위원장의 제안이었다. 실태를 몰랐다는 핑계도 대기 어려운 것이 크메르 루주가 사사키 의원을 초청해서 자국을 둘러보게 한 뒤 귀일(帰日)하여 발언했다. 킬링필드를 보고도 크메르 루주 정권을 지지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좌파사회당에 포섭된 후 노골적으로 당내 좌파를 편들던 나리타 도모미 위원장조차도 이건 아니라 생각했는지 논고 단계에서 기각했다.[11] 사실 공산당 안에서 공산당 주류 세력과 싸우고 나간 게 신좌파들이었으니 이상할 건 없다.[12] 단, 의석 회복이 후보자 줄이기(당시엔 일본 중의원 선거 제도가 중선거구제라 후보를 많이 내면 오히려 "나가리" 되는 경우가 그리 드물지 않았다.)로 인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의석 수로 보면 분명 선전했지만 득표율은 정체되거나 되려 줄어드는 양상을 보인다.[13] 그 덕분에 자민당이 계파싸움으로 갖기 총리 후보를 2명을 내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총리 선출 선거에서 3위로 밀려났다.[14] 이 때 그동안 지방선거에서 꾸준히 연대해온 일본공산당과 완전 결별하고, 반자민/비공산 야권연합 정권 창출을 내걸고 공명당, 민사당과 손을 잡는다. 이때 사회당은 공산당과의 연대에 부정적이었던 우파의 세가 강해진데다, 공산당과 민사당, 공명당의 사이가 원수급인지라 모두를 함께 끌고 갈 수 없는 상황에서 민사당, 공명당과의 연대를 선택한 것이다. 여기에는 보수적인 일본의 여론 지형상 공산당이 의석을 크게 늘린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판단도 한몫 했다.[15] 이때 사회당은 그동안 거의 포기하고 있던 정권 교체에 나름 의욕을 보였으면서도, 여러 가지 제약(당내 파벌투쟁, 부족한 자금력, 다른 야당과의 관계 등)으로 후보자를 크게 늘리지는 못했다.[16] 이 시기 승리했던 유일한 중앙 선거가 1983년 중의원 선거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 그나마 이 선거에서도 1980년 선거보다 5석 늘어나는 데 그쳤다.[17] 이 때 일본 최초의 여성 당수 도이 타가코는 "산이 움직였다."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 때를 마돈나 열풍이라고 부른다.[18] 하필 리크루트 사건에 민사당 의원과 공명당 일부 간부도 연루되었다. 이 때문에 사회당이 136석으로 의석을 늘린데 반해, 공명당은 부진하고 민사당은 참패했다.[19] 본래 180명을 공천할 예정이었으나 타 야당(공명당, 민사당, 사회민주연합)의 반발과 후보자를 너무 많이 내면 오히려 선거에서 부진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후보자를 줄였다는 안타까운 후문이 있다. 그 덕택에 타 야당이나 야당계 무소속 의원의 의석까지 합해도 257명에 그쳤다. 그에 반해 자민당은 보수계 무소속 후보까지 합해 328명을 후보자로 내걸었다. 물론 정권 교체가 되었어도 버블 붕괴 때문에 되려 책임을 뒤집어 쓰어 영 좋지 않은 꼴로 끝났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기는 하지만.[20] 이는 사회당이 중의원 의원 수 감축 방안(512->511석)을 반대했던 영향이 컸다.[21] 하지만 의석이 많지 않았기에 각료 배분에서 단 3자리(운수대신, 건설대신,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 만을 얻는 불이익을 당한다. 대신 중의원 의장 자리를 사회당에 주었지만 결국 이런저런 사회당의 불만 누적은 훗날 자민당과 대연정이 출범하는 결과로 나타난다.[22] 무라야마 일본 총리, 사회당 위원장 자격 북측에 조전 보내 mbc[23] 일 총리 북측에 애도 전문 동아일보[24] 무라야마 북한에 조전 한겨레[25] 알 총리 사회당 명의로 북한 조전 경향신문[26] 요시카와 하지메, 아베 도모코 중의원 의원과 쓰지모토 기요미, 요시다 타다토모 참의원 의원은 사민당 소속으로 처음으로 당선됐었으며, 현재는 입헌민주당 소속이다.[27] 하지만 사회당이 그동안 많은 의석을 챙겼던것은 중선거구제의 영향이 컸다는 분석이다. 입헌민주당도 중선거구제를 바탕으로 선거를 치렀으면 현재보다 의석을 더 많이 건질수있을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28]민사당이 사회당과 마찬가지로 골때렸는데 반공주의를 이유로 프랑코, 피노체트의 대학살을 정당화하는 게 당 주류 여론이었기 때문이다. 남한의 군사독재 정권을 옹호한것은 덤이었다.[29] 다만 농어촌 지역이 포함된 선거구의 경우에는 자민당 2명 vs 사회당 1명, 자민당 3명 vs 사회당 1명 정도의 구도를 띄는 경우가 많았고, 심하면 자민당 4명에 사회당 1명, 아예 사회당 후보 없이 자민당 후보만 당선되는 지역구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 정도가 가장 심했던 지역은 이시카와현 제2구와 기후현 제2구 등이었다.[30] 개헌선(156석) 단독 저지[31] 국내적 요인으로는 과격화된 학생운동으로 신좌익에 대한 온정적 태도, 국외적 요인으로는 프라하의 봄 유혈진압으로 현실사회주의 국가와의 친선교류 모두에 염증을 느낀 지지자들이 대거 이탈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면 신좌익, 공산권 국가들과 대립각을 세우던 일본공산당은 오히려 9석에서 14석으로 늘었다.[32] 개선 제1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