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30 20:46:51

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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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주, 益州
파일:fine_art_china.jpg
위 지도는 고도가 낮으면 녹색, 높으면 갈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중간쯤에 있는 산지 한가운데 거대한 분지가 익주의 중심이던 파촉이다.

1. 개요2. 역사와 특징
2.1. ~ 주나라 시기2.2. 춘추전국시대 ~ 삼국시대 시기2.3. 삼국시대 이후2.4. 당나라 시기2.5. 중세 시대
3. 주요 도시4. 관련 이야기5.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고대 중국의 옛 지명으로, 파촉지방이라고도 한다.[1] 현재의 쓰촨성(사천성), 충칭시(중경시), 윈난성(운남성), 산시성 일부, 간쑤성 일부, 그리고 구이저우성을 관할하는 익주자사부에서 유래한 명칭이며, 특히 쓰촨성(촉)과 충칭 시(파) 일대를 가리킨다.[2]

2. 역사와 특징

2.1. ~ 주나라 시기

상대[3]에는 삼성퇴 유적으로 대표하는 고도로 발전했으면서도, 중원지역과는 확연히 다른 청동기 문명이었던 듯하나 점차 중원사람들이 영역을 확장하였다가 이후에 독립국가가 나왔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키거나, 상이 하나라를 멸망시킬 적에도 동맹군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지리적으로는 혜택을 받은 곳이지만 고대 중원 정권의 입장에서는 변방지로, 너무 서쪽에 치우쳐 주변이 온통 이민족의 영역이라 중국사에서 큰 역할을 하기가 힘들었다. 남쪽으로는 윈난성, 서쪽으로는 티베트, 북쪽으로는 서량을 접하고 있었다. 결국 이곳은 중원 역사상 내내 대부분 변방지 역할만을 했다.

진나라의 정복이래 한족이 이곳에 세력을 넓히면서 원주민들은 점점 남쪽으로 밀려났으며, 태국의 타이족과 라오스의 라오족, 미얀마의 버마족이 한족이 자리잡기 이전에 이 지역에 주거한 거주민들의 후손이라는 얘기도 있다.

원래 주나라 시절까지 이곳은 중국이 아니라서 천하 9주에도 안 들어가지만, 진나라 말기에 중국의 영역에 들어오고, 후한시절엔 자사를 보낸 13주의 하나가 된다.

2.2. 춘추전국시대 ~ 삼국시대 시기

이 지역은 일찍(전국시대 진나라)부터 풍부한 수자원을 바탕으로 한 관개사업을 잘한 곳이었다.[4] 물산이 풍부하고 지형이 험해서 외부의 침공을 막기 쉬워 난세마다 독립 세력이 하나씩 났다. '변방'이지만 고립한 지형과 비옥한 토지로 견제받지 않고 힘을 키우기 좋은 곳이라서 후한 시절 유언은 황제를 참칭하려고 했다. 또 헌제조비에게 선양하고 후한이 멸망하자 유비는 한실을 잇겠다며 이곳에서 촉한을 세우고 황제에 올랐다. 촉한은 규모는 작아도 동오가 자리잡은 강동과 달리 삼국시대 당시에 이미 개발도는 높아, 후한 13주 중 무려 10개주 가량을 차지한 위나라의 1/5 정도 되는 인구였다.

영역 또한 다른 주 3~4개를 합친 만큼 넓었으며, 현재도 이 당시의 익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인구 자체는 약 중국 전체 인구의 1/6 정도나 될 정도로 엄청나게 많다.[5] 이에 따라 당시에도 실질적인 익주 지방 내의 인구 자체는 타 주의 몇 배 이상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지만, 당시는 중앙 정권에서 확실히 지배권을 가지고 실질적으로 통치한 영역은 사천 분지 일대 및 한중 일대 정도였고 남중은 준자치구 형태로 다스렸던 듯 하다, 사실 전란으로 인해 유민까지 생기며 호구조사 역시 제대로 되지 않아 저 분지의 생산력 역시 완벽하게 활용하지 못했다.

구리와 같은 다른 물산도 풍부했는데, 제갈량이 출사표에서 말했던 소금이 풍부하다는 내용은 암염인 듯하다. 제갈량의 시대 개간사업이나 수레 사용 등으로 개발을 진두지휘하여 영토에 비해 더 생산력이 증가한 듯하다. 삼협의 댐이 대표적.

이처럼 사천 분지와 한중 일대의 생산력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황하와 장강 사이의 몇 배 이상 넓은 중원 전체의 생산력에 비할 수 없고, 지형상 방어에는 유리하지만 공격에는 불리해 사천을 기반으로 한 독립 세력이 중국을 통일한 경우는 없다. 한마디로 웅크리고 있기엔 좋지만 밖으로 치고 나가기엔 한계가 있는 땅. 가끔 인터넷에 떠도는 글들 중에 진나라와 한나라가 사천 분지를 기반으로 천하통일 했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하술하듯 엄연히 말하면 틀린 서술이다.

먼저 춘추전국시대의 진나라는 혜문왕 시기 사마착의 활약으로 파촉을 정벌하고 나서 위세를 크게 떨쳤으나, 원래 파촉을 얻기 이전부터 진헌공진효공이 대대적으로 국가를 정비해 군사강국 반열에 올라있었다. 또한 이미 관중을 가진 상태에서 치고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확장 과정에서 사천도 얻어낸거지 처음부터 사천 분지를 기반으로 하여 굴기한 국가가 아니다.

유방의 한나라도, 사람들이 멀고 먼 변방 파촉으로 간다면서 울고불고 난리였다는 기록 때문에 오해가 많지만, 실제로 분봉을 받은 후에 간 곳은 익주의 중심부인 성도가 아니라 익주의 '초입부'인 한중의 동천(東川) 일대에서 잠시 세력을 가다듬고 삼진왕이 있던 관중으로 치고 나간 것이다. 즉 당시 유방은 한중까지밖에 가지 않았고 그것만으로도 머나먼 변방으로 내쫒겼다며 항우에게 이를 북북 갈 정도로 사천 평야는 유방에게 있어 머나먼 미지의 땅이었다. 물론 삼진왕을 격파한 후 초한전쟁이 한창일 때에는 성도를 비롯한 쓰촨 성 일대 역시 유방의 세력 기반이 되었다. 다만 이 시점에도 소하가 보급을 위해 열심히 관리한 지역은 주로 '관중' 지역이었으며[6] 천하 통일 역시 대체로 관중에서의 생산력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따라서 한나라 역시 익주를 기반으로 천하통일을 했다고 보기보단 오히려 확장과정에서 익주도 얻었다고 보는게 더 타당하다. [7]

촉의 승상이었던 제갈량은 유방과 달리 익주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전체를 온전히 차지하고 기반을 닦은 사례이다. 제갈량은 한고제광무제의 예를 쫓아서 익주와 형주를 기반으로 천하를 통일하려 했으나, 형주를 빼앗기는 바람에 삼국분립의 계획이 크게 틀어졌고, 오나라의 군사적 역량이 모자라는 바람에 위나라의 군사력을 소모시키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제갈량의 계획 초안은 형주와 익주에서 동시에 북벌을 수행하는 것인데, 형주와 상용을 빼앗겼으니 '익주에서만' 치고 나가야 했다. 여기에다 위나라와의 근본적인 국력 차이도 있어서 결국 제갈량의 북벌은 실패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다만 촉이 지키는 익주의 지형은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였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위촉의 경계인 한중을 두고 벌어진 공방에서는 거의 대등하게 일진일퇴를 벌였고, 흥세 전투에서도 알 수 있듯이 5배의 국력을 보유한 위나라가 촉에 쳐들어가는 걸 오랫동안 포기할 정도였다. 제갈량 사후에도 어떤 뛰어난 등산가가 등장하기 전까지 거의 30년 동안 촉의 심장부는 위나라의 침략을 당하지 않았다.

사천 분지의 어마어마한 생산량 때문에 촉나라가 저개발지 강동에 자리잡은 오나라보다 경제적으로 부강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으나, 이는 사실이라 보기 힘들다. 삼국지 시대에 중원이나 익주에 비해 장강 이남이 비록 덜 개발된 지역이긴 하지만, 이 시대의 경제력이란 사실상 인구수를 의미한다.[8] 개개인은 보다 풍족하게 살았을지 모르나, 프리츠 하버의 질소 고정법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아무리 풍족해봐야 1.5배 정도이다. 인구에 따른 식량생산량의 증가가 곧 국가의 총 경제력이므로 인구가 적으면 자연스레 경제력도 뒤떨어진다. 즉 절대적인 규모 면에선 인구가 오나라의 절반이었던 촉나라가 경제력으로 오나라를 능가할 리 없는 것이다.

또한 후대에 수나라와 당나라가 제갈량이 꿈꾸던 융중대, 즉 사천+관중+형주 일부+서량 일부라는 조합을 바탕으로 천하통일을 이룩했으나, 이들 역시 '관중에서 출발'해 천하통일을 한 것이지[9] 사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중국 역사에서 천하통일이 일어날때 사천의 역할은 관중을 기반으로 하여 일어난 집단이 가장 먼저 흡수하여 세력을 더욱 불리는 딱 그 정도 역할이었지 사천을 첫 스타팅 지역으로 하거나 수도로 정해서 천하통일에 이른 국가는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다.

2.3. 삼국시대 이후

촉한이 위나라에게 망하고 곧 이어 서진이 들어선 265년, 북동부 '파' 지역에 양주(梁州), 271년 건녕 등 남부에 영주(寧州)를 신설했다(269년에는 무도·음평·농서 지역은 옹주에서 나눠 진주(秦州)를 세웠다). 따라서 서진 19주 가운데 4주가 옛 촉의 땅이었다. 이후 오호십육국시대 때는 저족의 이민족 왕조 성한이 들어섰고 이후 남조의 동진이 점령했다가 화북정권인 서위(북주)가 빼앗아 이후로 수나라~당나라 시절에 이른다. 당나라 시절엔 안사의 난으로 당현종이 청두로 피난했을 당시 반란진압기간 동안 장안에서 임시로 천도하기도 했다.

참고로 중국 역사상 현재의 운남성 일대에 해당되는 남중칠군까지 확실하게 통치권을 확보한건 한나라 한무제 때부터이지만 독립적인 성격도 강했다. 실제로 당나라 현종 천보 연간 남조 때 중국은 윈난성 전체의 지배력을 상실했고 명나라 초기까지 운남성은 무려 630여년이나 중국과는 다른 독립상태~준 독립상태를 유지했다.

후한 말기 이곳은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동했지만 225년 촉한제갈량에 의해 평정되면서 촉한의 통치에 들어온다. 일종의 준자치구가 됐다고 보면 될 듯. 안정적으로 이곳을 관리하던 촉한이 멸망하고 이곳은 촉한의 내항도독이었던 곽익이 계속 관리하다가 서진 시기인 271년에 익주에서 영주(寧州)로 나뉘었고 옛 촉한 남중 지역의 4군을 거느렸는데, 그 땅은 대략 현재의 윈난성 지역에 해당한다. 영주는 284년 폐지되었다가 302년에 다시 세워지는데 302년부터 306년까지 대대적인 반란이 있었으며 이때 칠군이 두절되어 위급한 상황이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역병까지 돌아 남중은 십만명이 죽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피폐해진다. 310년 왕손이라는 인물이 영주자사가 되지만 남중은 폐허가 되었으며 왕손은 폭정을 일삼았고 결국 333년 남중은 성한 정권에 넘어간다. 이후 성한이 347년 동진의 환온에게 멸망하면서 남중은 다시 동진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나 통치력이 유효하지는 못했다.

2.4. 당나라 시기

동진, 유송, 남제 영주 관할에는 지금의 윈난성 전역, 구이저우성 중서부 지역이 있다. 중기 이후 폐지되었다가 서위(북주)가 554년 남영주(南寧州)를 세웠다가 수나라 초에 남영주총괄부를 두었다 폐지하고, 그 땅은 남조의 전신인 육조가 차지했다. 한편 당나라는 이 지역의 남영주총괄부를 이어받아 남은 지역을 남영주(南寧州)라고 칭하고. 치소를 미현(지금의 윈난성 취징시 서북쪽)으로 했으며 634년에는 낭주(郎州)로 개명했다가 717년 남영주로 다시 개칭했고 당현종 천보말년인 754년 이곳도 남조에 점령되어 석성군으로 바뀌었다.

2.5. 중세 시대

중세에는 남조, 다리 왕조(대리국)가 있었던 곳인데 몽골 제국이 멸망시킨 후 운남등처행중서성(雲南等處行中書省)을 세웠다. 이후 원나라 말기 운남에 고립되어 있던 몽골 괴뢰정권인 양왕(梁王)의 정권을 명나라 홍무제가 멸망시켰을 때, 이 지역에서 몽골 황족들을 도우면서 정권을 잡고 있던 대리 단씨는 양왕국을 배신하고 명나라에 붙어 그 공으로 재독립을 꿈꾸었다. 하지만 대리의 은광산에 눈독을 들인 홍무제 주원장은 기대를 무참히 짓밟고 운남등처승선포정사사(雲南等處承宣布政使司)를 세워 1390년에 직할령으로 만들어버렸다. 명나라는 대리 단씨를 비롯한 바이족을 귀속시킨 이후로도 대리국의 왕족들에게 계속해서 총독, 진무 같은 벼슬을 주면서 현지의 토사(土司)로 삼았다고 한다.

3. 주요 도시

익주는 파 지방과 촉 지방으로 나뉜다. 파 지방은 현재의 충칭 일대로 이 당시에는 강주 주변부를 의미했고 촉 지방의 중심 도시는 성도(청두)로, 2008년에 지진이 일어났다. 삼국지에 자주 나오는 상용(과 방릉)은 원래 익주 소속이었으나, 상용을 지키던 맹달이 위나라로 귀순하자 이곳을 형주에 포함시켰고 그 뒤로 계속 형주에 속했다.[10] 현재 옛 신성군 일대는 후베이성 죽산현에 있다.

4. 관련 이야기

어린 시절을 익주에서 보낸 이백은 '촉도난'이란 시를 쓰면서 '촉으로 가는 길은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표현하며 이 곳으로 가는 길이 대단히 험난함을 나타냈다. 이 시는 토탈 워: 삼국의 유비 트레일러에도 사용된다.참고로 이 게임의 유비는 업뎃 종료까지 입촉을 못했다

중국산 양산형 게임삼국지 전략판의 광고에서 지겹도록 언급이 되는데, 주변이 산으로 덮혀있어 방어가 수월하다고 한다.

5. 같이보기


[1] '파촉'으로 검색하면 현재 문서로 연결된다.[2] 모순이지만 익주자사부 소속의 익주은 현 윈난성의 중심부를 관할하는 군이었다.[3] 상나라는 수도 은허에서 따온 은나라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다.[4] 도강언 항목 참고.[5] 익주가 넓이에 비해 산지가 많지만 파촉 지방의 분지는 구글 어스 등으로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 대한민국의 영토(휴전선 남쪽)보다 넓다. 저 거대한 분지만 해도 한 국가의 영토로서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며, 저 평지의 면적만 놓고 보더라도 서주나 연주, 청주 같은 주의 (산지 등을 포함한) 주 전체보다 확연히 넓다.[6] 후한 말의 지명으로 치면 옹주(장안 일대)와 사주 일부, 예주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7] 관중까지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서는 검각을 통해 한중으로 나오는 방법 뿐인데 검각 일대는 현대에도 깎아지르는 절벽길이 길이 거의 수백 km 달하는 험지이다. 따라서 소하 역시 쓰촨 분지의 생산력을 활용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활용할 수 없었던 쪽에 가까웠을 것이다.[8] 현대에는 GDP 개념으로 경제력을 설명하지만, GDP는 상업과 공업이 발달한 근대 이후에 의미를 가지는 지표이다. 물론 GDP 조차도 여전히 인구가 중요한 매개변수이긴 하다.[9] 애초에 이들을 '관롱집단'이라 부르는게 괜히 그러는 것이 아니다.[10] 이 때문에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선 대대로 형주에 속한 도시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