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 | 원인(原人), 금강학인(錦江學人) |
본관 | 서림 이씨[2] |
출생 | 1901년 10월 29일 |
충청남도 홍산군 대야면 신동리 (現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조현리 식송마을 51번지) | |
사망 | 1971년[3] 12월 9일[4] (향년 70세) |
충청남도 부여군 | |
학력 | 보통학교 (졸업) 휘문고등보통학교 (중퇴) 니혼대학 전문부 (정치과 / 졸업)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398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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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정치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이동철은 4촌 형이다.
2. 생애
1901년 10월 29일 충청남도 홍산군 대야면 신동리(現 부여군 홍산면 조현리 식송마을 51번지)의 중류 가정에서 아버지 이병승(李炳升, 1860. 2. 26 ~ 1932. 3. 29)과 어머니 풍천 임씨(1874. 9. 1 ~ 1945. 10. 20) 사이에서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부여군 홍산면 조현리 식송마을 59번지로 이주했고, 99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옮기기도 했다.보통학교 졸업 후 상경해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919년 경기도 경성부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한 뒤 자퇴했다. 1923년 말 일본으로 유학해 니혼대학 전문부 정치과에 입학했고, 이때 재일 조선인들을 모아 대한독립의 정당성을 인식하도록 하고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또한 적위(赤衛)노동조합, 조선공존회(朝鮮共存會), 조선노동자조회(朝蘇勞動自助會) 등의 단체에 가입해 이 중 조선공존회에서는 간부를 역임했으며, 조선의 자치권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신화회(新和會)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28년 4월 니혼대학을 졸업하고, 1930년 1월 귀국했다. 이후 1931년 노명우(盧命愚) 등 사회주의자 동지들과 함께 합법단체인 농민조합을 조직하고자 계획했으나, 당시 일본 경찰의 탄압이 엄중하자 그해 10월 충청남도 부여군·서천군·논산군·홍성군 등을 중심으로 비밀결사 공산주의연구협의회(共産主義硏究協議會)[5]를 조직했다. 이후 부여군 홍산면을 비롯한 부여군 각지의 마을에 공산주의연구협의회의 지부를 조직한 뒤 농민들을 위한 야학 및 노동조합을 개설하고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계몽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각 마을의 야학을 연합해 수시로 연합 토론회 및 운동회를 개최해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는 등 계급의식을 고취했다.
이후 1931년 12월에는 중화민국 길림성 연길현 용정촌 제4구로 건너가 용정촌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에서 잠시 교사로 근무하면서 주로 공산주의 관련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1933년 6월에는 잠시 귀국했다가 만주국으로 건너갈 계획을 세웠으나, 그해 8월 10일 충청남도경찰부에 체포되었다.
1933년 12월 7일 부여공산주의자협의회 관련자 30여 명 중 유기섭(柳基燮)·노명우(盧命愚)·노명우(盧明愚)·강병국(姜秉國)·강성모(姜聖模)·강일구(姜日求)·조병철(曺秉哲)·조병순(曺秉順)·강도형(姜道馨)·강주구(姜柱求)·장창선(張昌善)·오기영(吳祺泳)·최재봉(崔在鳳)·전영철(田泳喆)·김임술(金壬戌)·허원룡(許元龍)·유인철(柳寅喆)·강병환(姜秉煥) 등 18명과 함께 기소되어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35년 6월 12일 공주지방법원의 예심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공주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고, 1935년 10월 15일 공주지방법원에서의 1회 공판이 개정되었다. 결국 1935년 11월 2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아 곧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고향 부여군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교사로 근무했고, 8.15 광복 후에 우익 정치인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남도 부여군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김철수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후 1948년 10월 18일 대한국민당 창립준비위원회에 지방부 창립위원으로 참여했고, 호서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1952년 지방선거에서 충청남도의회 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임기가 끝난 뒤에는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1954년 5월 20일 치러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남도 부여군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자유당 조남수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후에는 정계를 은퇴하고, 승려로 생활하다가 1971년 12월 9일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별세했다.
몽양 여운형계로 불리는 자생적 사회주의자 경향이 있어 독립운동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다가 1987년 뒤늦게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5년 5월 1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금성산 남령근린공원에 이호철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는 '애국지사 원인 이호철선생 기념비(愛國志士原人李戶喆先生紀念碑)'가 건립돼 있으며, 저서로 『回顧錄』이 있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48 | 제헌 국회의원 선거 (충남 부여군 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7,957표 (25.48%) | 낙선 (2위) | |
1952 | 1952년 지방선거 (충청남도의회 의원) | - | - | 당선 | |
1954 |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부여군 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735표 (5.99%) | 낙선 (5위) |
4. 참고 문헌
[1] 한국사론 32권 지역사 연구의 이론과 실제에는 李[2] 진사공파(進士公派) 24세 철(喆) 항렬.[3]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1973년생으로 기재돼 있다.[4] 서천(서림)이씨대동세보 하권 299쪽에는 11월 15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돼 있다.[5] 부여공산주의자협의회(扶餘共産主義者協議會), 금강공산협의회(錦江共産協議會), 충남공산당협의회(忠南共産黨協議會),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朝鮮共産主義者協議會), 금강문인회(錦江文人會)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