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夜學 / Night School[1]야학에 대한 정의를 단순히 '야간'이라는 시간적 구분에 따르는 것은 무의미하다. 야학을 일반 대중이 '배우는 곳'이라는 공간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규정한 개념이다. 그래서 야학을 야간에 진행하는 대중교육'이라는 시간에 따른 단편적인 정의보다는 '일반 대중이 주, 야간 시간의 구분 없이 필요한 교육을 받는 곳'이라는 정의가 합당하다.
「한국야학운동사」에서의 정의
「한국야학운동사」에서의 정의
개화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비정규적인 대중교육기관.
수업이 주로 밤에 진행되는지라 '밤 야(夜)' 자를 써서 '야학'이라고 주로 불렸다. 정규교육과는 다르게 야학은 농민, 노동자 등 학교교육을 아예 받지 못하거나 부족한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제도권과는 분리된 교육기관이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방식의 비제도권 교육이 시행되어 정규교육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민주화 운동,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과 결합하여 활동가들이 민중을 가르치거나 계몽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2]
야학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3]
첫째, 대안적 대중교육기관이다. 지금이야 의무교육이나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대한 높은 진학률, 등록금을 받춰줄 수 있는 경제력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제도교육을 받고 있지만, 민주화 이전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특히 노동자, 농민) 제도교육으로부터 비켜서 있었다. 이들은 고학은 커녕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기 힘들었다. 이들의 교육을 위해 야학은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둘째, 비제도권 민중교육기관이었다. 야학은 제도교육과는 분명 달랐다. 정식으로 인가를 받지 않은 교육기관들이 민중을 교육하였다. 야학은 공교육과도 달랐고, 사교육과도 차이가 있는 존재였다.[4] 야학은 자유롭게 교육을 진행했고, 제도교육에 소외된 자라면 누구든지 받아들여 교육시켰다. 그리하여 노동자와 농민들의 고학이나 검정고시 합격을 통해 민중의 지식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야학은 개화기부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에서도 못 배운 사람들을 계몽시키는 데 앞장섰다. 민주화 이후 21세기로 넘어오면서 경제발전과 이내 찾아온 1997년 외환 위기의 영향으로 국민 전반에 걸쳐 교육열이 대폭발하며 공교육은 기본에 사교육도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세상이 되어 야학의 존재의 목적이 희미해졌지만 노들장애인야학 등 장애인들이나 노년계층, 또는 다문화가정 결혼이민자 등 제도권 교육에서 소외된채 성인이 되어버린 이들을 위한 야학의 명맥은 이어지고 있다. 즉, 제도권 학교 밖의 청소년 및 저학력 성인들의 교육을 도모한다는 야학의 사명을 21세기에는 대안학교와 사교육이 적절히 분담하는 형태로 발전적 계승이 이뤄진 셈이다.
2. 2부 고등학교
중등 교육 과정의 2부 학교도 수업이 오후에 시작하여 밤 9~10시에 끝났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야간학교로 불렸지만 같은 학교에서 수업 시간이 늦을 뿐 정규 공교육이었기 때문에 상술한 야학과는 다르며 수업도 매일 나와야 한다. 2부만 있고 전용 교실을 갖춘 정규 과정 학교는 거의 없고, 중-고등학교가 같이 있는 학교 재단에서 수업이 일찍 끝나는 중학교 교실을 활용하여 중학생이 집에 간 후 그 교실에서 오후 3시 이후에 수업을 시작하여 10시 경에 끝내는 식으로 운영하였다. 2부가 있는 학교에서 주간부가 야간자율학습을 하며 10시까지 붙잡아 놓는 경우엔 하교 시간이 겹치게 되는데 마찰이 일어날 것[5]을 방지하기 위해 어느 한 쪽이 다 갈 때까지 하교하지 못하게 막는 일도 있었다. 남고-여고가 붙어 있거나 주간부 여고와 2부의 남고 또는 그 반대가 겹치는 경우에도 불순한(!) 이성교제가 생긴다면서 어느 한쪽을 못 나가게 막는 일도 있었다.2부 학교를 운영하는 곳은 인문 일반계, 실업계 학교에 모두 있었다. 실업계 학교는 특성상 2부가 있는 경우가 꽤 많았다. 낮에 산업체에 다니고 밤에 공부하거나 늦은 나이에 시작한 만학도들, 거칠게 살다가 온 학생, 타 학교에서 말썽을 부리고 휴학, 퇴학하고 들어온 학생 등이 있었기 때문에 같은 학교 일반 학생(주간부)들은 2부 학생 쪽이 학년이 낮더라도 말을 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여성에게 교육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던 80년대까지는 산업체 근무하는 여성의 학력이 중졸 이하인 경우가 많았는데 더 배우고 싶은 직원들을 위해 조금 일찍 퇴근시켜 주고 학비, 식비, 교통비를 회사에서 지원해 주며 단체로 2부 학교에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70년대 초-90년대 말까지는 대한민국 청년 인구가 매우 많았고[6] 주간(1부) 학교만으로는 한정된 건물, 교원 때문에 그 인원을 다 가르치지 못할 형편이라 그 인원을 분산하기 위하여는 2부 수업을 하는 학교가 필요하였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학력이 낮았는데 웬만한 기업은 사무 행정직에 고졸 이상 학력을 요구했던 시절이기도 하여 고교 졸업장을 주는 2부 학교의 필요성이 더 컸다.
야학의 영향으로 지금도 일부 대학들은 입학 정원의 일부를 야간과정으로 편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직장인들이 주로 수강하는 특수대학원들도 마찬가지다.
3. 문화에서의 야학
심훈의 <상록수>가 야학을 다룬 가장 대표적인 소설이다. 최용신이라는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하여 쓰여진 이 소설은 1930년대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한 젊은이들이 학교를 세우고 농촌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1] 분명 있는 그대로 해석한다면 옳은 번역이지만 후술할 내용에 따르면 야학은 밤하고만 연관시켜서는 안 되므로 'Popular Education(민중교육)', 'Education for grass roots(민초교육)'으로 하기도 번역한다. 한편 야학 연구가 천성호는 한국에서의 야학이 'Yahak'이라는 고유명사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본다.[2] 대표적인 사례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 역할을 맡았던 민주화운동가 윤상원 열사인데 그도 광주지역의 야학이었던 들불야학의 강사였다. 아울러 서울이나 각 지역 거점도시의 명문대를 나온 운동권 계열 학생들이 공장에 위장취업한 뒤 생계 빈곤 등으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여공 등 공장 노동자들을 가르치는 일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 중에는 심재철, 유시민, 심상정, 남인순 등처럼 민주화 이후 사회운동 참여를 거쳐 정치권으로 뛰어든 이들이 적지 않다.[3] 야학 연구가 천성호는 야학을 이렇게 정의했다.
① 일반 대중을 위한 대중교육기관
② 학력 인정이 되지 않는 비제도권 교육기관
③ 민중의 정치 의식화를 위한 민중교육기관
④ 제도 교육에 대안적인 대안교육기관
⑤ 모든 이를 위한 교육기관[4] 야학은 국가의 정식 지원을 받지 못했으며 교육체계도 공교육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교과목이나 기술을 가르치는 학원같은 존재도 아니었다.[5] 2부 쪽엔 질이 안 좋은 학생들도 좀 있어서 주간부 학생들 주머니를 턴다든지, 때린다든지 하는 일도 왕왕 있었다.[6] 80년대 중반에는 서울의 고등학교 한 반에 75-80명, 14-26개 반이 있었으며 한 학년에 1000명이 넘어갔다. 90년대 초까지는 병력 자원이 남아돌아서 중졸까지는 대부분 면제, 고졸은 절반은 보충역과 신체 1-2등급이 현역, 대학생 이상 되어야 현역이 더 많을 정도였던 시절이다.
① 일반 대중을 위한 대중교육기관
② 학력 인정이 되지 않는 비제도권 교육기관
③ 민중의 정치 의식화를 위한 민중교육기관
④ 제도 교육에 대안적인 대안교육기관
⑤ 모든 이를 위한 교육기관[4] 야학은 국가의 정식 지원을 받지 못했으며 교육체계도 공교육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교과목이나 기술을 가르치는 학원같은 존재도 아니었다.[5] 2부 쪽엔 질이 안 좋은 학생들도 좀 있어서 주간부 학생들 주머니를 턴다든지, 때린다든지 하는 일도 왕왕 있었다.[6] 80년대 중반에는 서울의 고등학교 한 반에 75-80명, 14-26개 반이 있었으며 한 학년에 1000명이 넘어갔다. 90년대 초까지는 병력 자원이 남아돌아서 중졸까지는 대부분 면제, 고졸은 절반은 보충역과 신체 1-2등급이 현역, 대학생 이상 되어야 현역이 더 많을 정도였던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