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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현/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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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2. 민주화추진협의회 시절3. 정치 활동
3.1. 국회의원 경력

1. 생애

익산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모두 졸업하고, 남성고등학교(19회)를 졸업했다. 본인의 증언으로는 당시 특별한 집안 형편은 아니었다고 하는데, 평범한 농부였지만 동네 사람들의 인심을 얻어 면의원을 하던 아버지의 '너는 커서 무조건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기대와 그에 따른 영향으로 2남 1녀 중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면서도, 학창시절 내내 전교 1등을 거의 놓친 적이 없다고 하며, 1등을 한번만 놓쳐도 항상 마음이 불편했다고 한다. 중학교 때는 아이큐 147이 나와서 학교에서 별명이 이천재였다고 하는데, 사실은 원래 중학교에 못 갈 뻔했다고 한다.

중학교 학비를 받아 쓰기엔 집안 형편이 빠듯해서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1등을 해서 전액 장학금을 타고자 공부를 했는데 2등을 하는 바람에 반액 장학금만 나오게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이던 분이 입학등록금 절반을 내 줘서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이후 학창시절 내내 전액 장학금을 받기 위해[1] 더더욱 항상 1등을 해야 한다는 마음이 커졌다고 한다. 고교시절에는 한시를 공부하기도 하여 성인이 된 지금도 한자실력이 뛰어나서 국회에 써 있는 한문들은 전부 다 읽고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며, 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동화책도 출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중고교 시절 계속 전교 1등을 유지한 관계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들어갔다가, 학생운동에 뜻을 두고 민중을 돕기 위해 법을 공부하겠다며 학교를 그만두고 재수를 하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고, 사회과학연구회라는 모임과 가톨릭학생회라는 모임을 통해 운동권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지하신문 횃불을 발행하며 이후락을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 교련 반대와 징집 거부로 기소된 적이 있었다. 그의 경우에는 특별히 운좋게 은사 양승규 교수(서울대 법대)가 그의 사건 담당 검사와 판사의 대학교 은사이기도 해서 그들을 설득하여 징역형을 받지 않도록 하고, 선고유예 겸 군입대로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군입대를 통해 후일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는 건 막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군대를 갔다와서 대학을 졸업하고 보험회사에 들어가서 나름 편안한 생활을 잠깐 하려 하던 중 운동권 시절 선배와 동료들이 찾아와 "지금 편안하게 살 상황이 아니다"라며 설득하여 운동권 생활을 병행하게 된다.

2. 민주화추진협의회 시절

배기선, 문희상 등과 함께 13인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민주연합청년동지회, 즉 연청회를 만들어 1980년 시국사건에 연루되게 된다. 체포 후 보안사에서 고문을 당했으나 다행히 구속은 되지 않고 풀려나게 된다. 운동권으로 쫓기고 고문받는 생활에 질리기도 하며, 자신이 장남이라는 것 때문에 가족을 돌보는 안정된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는[2], 다시 회사생활로 복귀하여 살고 있었으나, 대학선배 겸 고향선배였던 이협 전 의원이 그를 다시 설득하게 되었고, 일주일간의 고민 후 1984년 회사를 아예 그만두고 운동권의 길로 완전히 뛰어들어, 민주화 추진 협의회(민추협)을 만들고 온전한 운동권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후 1년간은 수입이 없어 배고픈 생활을 했다고 한다. 운동권 선배들이 쥐어주는 뒷돈[3]으로 겨우 먹고 살았다고.

3. 정치 활동

이석현의 본격적 정치입문은 김대중의 동교동계 생활로부터 시작되었다. 1980년 연청회 시절에 잠깐 봤던 게 다였고 제대로 대화도 못해봤던 김대중이 1985년 미국에서 돌아온 지 몇달 안 된 어느 날 이석현을 동교동 자택으로 불렀고 단 둘이 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회 얘기를 하다가 "내가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며, "자네가 앞으로 내가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사회 각 부분에 대해서 일주일 동안 보고서를 써서 정리해 오게."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민주화의 거성이던 김대중 선생의 요구였으니, 이석현은 당연히 정성껏 일주일 동안 자필로 언론환경, 노동권, 재벌, 군부, 정당 등에 대한 상황과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보고서로 작성해서 제출했다고 한다. 그러자 3일 뒤 김대중이 그를 비서로 채용했다고 한다.

1985년부터 3년간 비서 생활을 하고,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안양시 을 선거구에 평화민주당 후보로 출마하며 첫 공식 정치행보를 하게 된다. 당시 평민당이 87년 대선 이후 김대중-김영삼 단일화 실패에 대한 비난으로 홀대받던 시절이라 출마하려던 사람들이 적어서 40살도 안 된 정치신인이던 그도 공천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당시 공천담당자가 김영배[4] 사무총장이었는데 나이 어린 이석현의 공천신청을 탐탁지 않아해서 다른 후보 공천신청을 기다리던 입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 달 넘게 계속 공천을 안 해주는 것에 화가 난 이석현이 찾아가서 "사무총장님 저 공천 안 받을랍니다. 안양에 평민당이 요즘 인기가 없으니, 차라리 무소속으로 나가는 게 낫겠습니다. 나가서 구호도 '이당 저당 볼 것 없다. 사람보고 찍어주자'로 하렵니다."고 불만을 표출하자, 김영배 총장이 깜짝 놀라서 달랜 뒤, 바로 다음 날 공천을 해줬다고 한다. 그후 기호 3번으로 선거나갔는데, 결과적으로 낙선한다. 그러나 사실 그가 나간 안양시 을 지역이 가능성 없다고 생각해 포기한 평민당에서 그에게 별로 지원도 안 해주었는데, 그랬던 것에 비해 그가 높은 득표율을 얻고 기호 2번 통일민주당 신하철 후보에 이어 2위를 한 것에 대해 공을 인정받아 평화민주당 부대변인이 되어 당내 주요직을 맡게 된다. 당시 신하철과 표차이가 3천 표도 나지 않았고, 심지어 정치신인이던 그가 기호 1번이던 민주정의당 김일주 후보를 2천여 표 차이로 이겨 3위로 밀어냈다는 부분이 평민당 내에서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5]

낙선 직후 평민당 부총재가 "아이고 이 동지, 하마터면 당선될 뻔 했어. 좀 더 당에서 지원하면 좋았을 뻔 했네."라며 아쉬워 하면서도 격려해줬다고 한다. 이석현 본인은 이 얘기를 듣고 속으로 "아니 당선되면 좋은 건데, '하마터면 당선'될 뻔 했다는 게 무슨 말씀이지?"라고 좀 어이없는 느낌도 받았다고 한다. 그가 30년 가까이 이 말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당시 부총재가 실제로 '하마터면'이라는 말을 쓴 게 사실인 듯. 그래도 그 부총재가 자신을 부대변인으로 적극 추천해줘서 처음으로 주요 당직을 맡은 거라 이석현 입장에서는 감사했다고 한다. 말투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이 에피소드의 부총재는 여성이었다. 당시에 50대 후반으로 나이가 있던 편이라 그런 말투를 쓴 듯.[6]

그 뒤로, 안양시 지역구 관리를 꾸준히 하여 지지율을 올렸고, 1992년 총선에서 당시, 3당 합당으로 괴물당으로 불리던 민주자유당의 폭발적인 의석 독점[7]에도, 안양에서만큼은 그가 어렵지 않게 큰 득표 차이로 당선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그의 국회의원 인생이 시작되었다.

3.1. 국회의원 경력

제14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데 이어,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재선되었다. 그러나 1997년 이른바 명함 파문에 휘말린다. 당시 이석현은 외국인용으로 7개 국어로 적힌 명함을 쓰고 있었는데 중국어로 자신의 국적을 韩国(南朝鮮)으로 표기했다. 중국과 수교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한국이란 국명 옆에 괄호를 치고 그 안에 익숙한 '남조선'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문제는 그해 8월 15일 이석현이 참석한 로스앤젤레스의 한 출판기념회에서 국가안전기획부 직원이 그 명함을 입수하면서 비롯됐다. 그때 이석현은 미국에서는 중국어 표기가 의미가 없기에 '남조선'이란 글자를 먹선으로 지우고 명함을 나눠줬으나 그 직원은 그 명함의 내용을 안기부장 권영해에게 보고했다. 권영해는 여당인 신한국당 사무총장 강삼재와 정치적 활용 방안을 논의했다. 8월 20일 신한국당 대변인 이사철은 이석현의 명함 내용을 공개하며 색깔론을 제기했다. 조선일보 등 보수 언론도 이석현과 야당을 강력하게 공격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눈 앞에 둔 야당에게는 위기였다. 새정치국민회의 창당발기인이자 고문을 맡았던 오익제가 월북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색깔론은 더욱 증폭됐다. 결국 이석현은 새정치국민회의를 탈당하고 계룡산 대성암에서 근신한다.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되자 1998년 2월 여당에 복당하였다. 같은 해 안기부와 검찰은 명함 파문이 북풍 공작의 일환이었다고 발표한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심재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4년부터 제19대 국회 후반기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8]

3.1.1.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국회는 성스러운 곳도, 속된 곳도 아니며 그냥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2016년 2월 23일부터 열린 제340회 국회(임시회) 제7차 본회의에서 테러방지법이 상정되자 발동된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 의장직을 수행할 때마다 여당 의원들의 고성을 막았다.


26일 새벽 더민주 김경협 의원은 10번째 주자로 필리버스터를 이어가던 중 네티즌들이 테러방지법을 국민스토킹법, 빅브라더법, 유신부활법 등으로 부른다며 댓글을 읽어내려갔다. 그러자 조원진 의원이 의제와 관련 없는 내용이라며 이의를 제기했고 사회를 보던 이석현 국회부의장이 "테러방지법에 대해 국민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소개하는 것으로 관계가 있는 내용"이라고 일축했다.

특히나, 김경협 의원의 발언 당시에 지속적으로 조원진 의원이 비격식적인 발언[9]을 하자, 격노한 이석현 부의장이 국회법 제145조[10]에 따라 퇴장시킬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의장직을 걸고 말하건대 관계가 있습니다. 퇴장시키기 전에 들어가세요!"라고 일갈하며 조원진 의원을 데꿀멍시켰다. 그러나 조원진 의원은 그 후에도 떼쓰다 마지 못해 자리로 돌아갔다.

나중에 밝혀진 속기록에 따르면 조원진 의원은 부의장인 자신이 의사진행을 하고 있다는 이석현 부의장에 대해 "저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개인의원이 아니고 원내수석부대표로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등 이석현 부의장의 의사진행권에 대해 정면도전하는 듯한 언사를 하여 이석현 부의장이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속기록 517쪽 참조 자리로 돌아간 조원진 의원은 얼마간 국회법 책자를 뒤적였다(…).

또한 정청래 의원의 필리버스터 시간 중간에 의장직을 수행하면서 당시 7시간을 넘게 한 자리에서 연설 했던 정청래에게 화장실에 다녀오도록 권유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달라"[11]고 했고, 정청래가 지금은 괜찮고 나중에 본인이 요청하면 허락해 달라고 하며 사양하자 이를 받아들이며, "소변 안 보고 연설하느냐, 소변 보고 연설하느냐는 진실하고는 아무 관계 없는 껍데기입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안민석의 차례 때 안민석의 요청을 받아 소변을 허가하여 필리버스터 최초의 공식허가 소변 사례를 남겼다.[12]

이학영 의원의 필리버스터 도중에 이학영 의원에게 잠시 운동하라며 2분간 인사말을 했는데 그 인사말이 감성적이다.
"국민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목화 송이처럼 소담스런 함박눈이 내려서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습니다. 이 순백의 도화지 위에, 만일에 여러분이 새로운 세상을 그린다면 무엇을 먼저 그리시겠습니까? 저 같으면 앞에 있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뒤에는 파란 뒷동산이 있는 그런 아름다운 마을을 먼저 그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뒷동산 위로는 일곱가지 색깔이 영롱한 무지개를 또 그려놓겠습니다. 국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 그리겠습니까? 저는 국회도 그려 놓겠습니다. 무지개 빛깔처럼 서로 다른 스팩트럼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다름을 이해하면서 또 존중하고, 그리고 조화롭게 공존하는 그런 국회를 그리고 싶습니다. 또 국민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국민들의 기쁨과 아픔을 내 피부처럼 느끼는 그런 국회를 그려 놓겠습니다. 이런 필리버스터도 있고 또 그런 껍데기 권위보다는 사람이 존중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추구되는 그런 국회를 그리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제가 말한 이 상상의 국회가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저희 국회가 여야를 초월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학영 의원의 필리버스터 도중에 한 인사말 -

이석현 부의장 감성 발언

발언 10분 모음집

2016년 2월 29일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 의장직 수행 중, 새누리당 하태경, 홍지만 의원이 계속 반론하고, 발언 중인 홍종학 의원도 계속 반박하자, 여기는 바로 묻고 답하는 대학교 강단이 아닌 국회라며, 국회법 99조[13][14]를 들며 중재에 나섰는데, 이때 두 의원이 계속 멈추지 않자, 토론 신청을 하고 발언하라 말하며[15] 데꿀멍을 시전한 것도 모자라, 가까이에서 크게 말해 신경쓰인다고 디스, 또한 재적 중인 의원들에게 수고가 많다면서도 두 의원에겐 "안 들으려고 하는 말이 귀에 쏙쏙 들어오면 그것도 큰 고통이거든요"이라고 디스했다. 홍종학 의원은 이에 웃음을 참지 못했는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발언을 재개했고, 디스받던 두 의원도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영상보기 그리고 같은 날 오전 2시경, 하태경 의원과 홍지만 의원이 계속해서 앞자리에서 발언을 이어나가자 앞에 시장이 있는데 뒤에서 암시장 하는 거랑 같은 겁니다. 세금 내고 발언하세요. 라면서 저지했다.

2월 29일 새벽 1시 정갑윤 부의장 시간대에 의장석에 앉았다.[16] 이에 대해선 아무런 입장이 없는 상태이다.[17]

같은 날 저녁 10시 47분경 다시 한 번 무제한 토론 중 화장실에 갈 수 있는지의 여부를 언급했다. 한국의 경우에는 미국과 달리 발언자가 화장실에 갈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규정된 게 없는데, 이석현 부의장은 의장의 동의를 얻었을 경우에는 화장실에 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어떠냐며 의견을 표했다. 이에 나경원 의원이 의장으로서 적절한 발언이 아니었다고 항의했다.

후에 김어준의 파파이스에 출연하여 일종의 후일담을 얘기했다. 나름 입담이 훌륭하고 필리버스터 외에도 개인의 가치관, 소신 등도 알 수 있다. 본인 입으로는 계파색이 전혀 없는 중립이라고 말하고 실제 부의장까지도 그래왔으나 훗날 문재인 당시 대표를 도와주는 정치 행보 등을 보면 범친문에도 가깝다고 추정.

3.1.2. 제20대 국회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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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4월 13일 6선 성공 직후 지지자들과 환호하는 사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승리를 거두고 본인도 6선에 성공하면서 유력한 20대 국회의장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 야당의 최다선 의원 중 한 명인 데다 계파색이 강하지도 않고, 부의장을 경험했기 때문. 그러나 정세균 의원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국회의장직에 선출되었다.

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후보로 다시 거론되었으나 경선에 나가지는 않았고, 21대 총선에 출마하여 7선 의원이 된 후 국회의장을 노리겠다고 한다.

그러나 2020년 2월 24~26일에 걸쳐 치러진 민주당 경선에서 민병덕 후보에게 밀려 탈락했다. 이후 트위터를 통해 일반 시민투표에서는 자신이 우세했으나, 권리당원 투표에서 민 후보에게 밀렸음을 밝히고, 경선 결과에 승복하였다.[18][19] 하지만 정계를 은퇴한 것은 아니다. 관양사거리에 있는 지역구 사무실도 간판을 바꿔달고 유지 중이고, 트위터 활동도 하고 있으며 , 더 라이브박지원 의원에 이어 여당측 패널로 출연하면서 지속적으로 얼굴을 내비치고 있다.

2021년 8월 27일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위촉되었다. 정권 교체 후 2022년 8월 18일 윤석열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2023년 12월 29일, 자신의 50년 지기 이낙연을 당에서 조리돌림 시키는 것을 더이상 못보겠다면서 더불어민주당에서 탈당했다. #

2024년 1월 3일, 고향인 전북 익산시 갑 지역에 이낙연 신당 소속으로 출마를 시사하였다.#

파일:1710692199.jpg
2024년 3월 14일 새로운미래의 비례대표를 신청했지만 컷오프되었다 .

3월 22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자 등록 마감시간을 불과 2시간 남짓 앞두고 “박용진의 뜻을 받들 것”이라면서 서울 강북구 을 선거구에 새로운미래 후보로 등록했다. # 6선에 국회부의장까지 한 사람이 2선하고 경선탈락한 의원의 뜻을 받들겠다고 연고도 없는 곳에 출마한 것(...)

선거 결과 5.54%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선거비만 날려먹고 낙선하였다.


[1] 1960년대 당시에는 시험 성적이 높으면 장학금을 주는 학교들이 많았다.[2] 그는 이 시기에 결혼을 못한 것이 평생 결혼을 못하게 된 요인으로 생각하기도 한다고 한다. 당시 결혼을 하면 무조건 여자를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운동권 생활을 하며 도망도 다니고 잡히기도 하는 생활을 하다보니 본인의 삶이 불안정하다고 생각하여 여자를 행복하게 할 준비가 안 되어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연애를 할 때에도 항상 결혼얘기를 못 꺼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친구였던 배기선은 이석현과 함께 도망자 생활을 할 때 하숙집에서 우연히 만난 여성(음악인 이경애)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고 한다.[3] 한 달에 30만 원. 지금 물가와 다른 시절이지만 그렇다고 여유있는 돈은 아니었다. 신입 말단공무원 월급보다 약간 적은 정도니, 안정적으로 한 곳에만 산다면 끼니는 충분히 때우고 살았다 하겠으나, 뻑하면 정권의 어용경찰의 눈을 피해서 다른 지역으로 도망갔다 오는 일을 반복해야 해서 도망경비가 많이 들고, 이동할 일이 많아 생존을 위해 일반인보다 쓸 돈이 많았다. 80년대 중반 이 시대가 바로 한국의 초고속 경제성장기가 절정이던 때라 "괜찮은 직장인(중견기업 계장 이상급)은 월급 돈백(백만원)은 받는다"고 하는 소위 "돈백"이란 표현이 한국사에 처음 생긴 시대다.(70년대에는 규모있는 회사 소유주가 아닌 일반인이 월수입 백만원이면 의사들이나 벌까말까해서 서민은 상상도 못했다. 90년대부터는 괜찮은 직장이면 신입직원도 돈백을 받았다.) 그래도 이석현은 본인이 운동권생활을 하면서 남들보다는 운이 참 좋은 편에 속했다고 회고한다.[4] 당시에 별명이 사무라이, 칼잡이 등이었다고 한다.[5] 당시 민정당-통민당-평민당-공화당 4당제 현실상(민중당까지 하면 5당), 경기도 내에서 평민당은 2위는커녕, 낮은 득표율로 3위나 4위를 하면서 떨어지던 후보들이 즐비했다.[6] 한국 페미니즘사에서 손에 꼽는 전설적 인물 중 하나인 박영숙 전 부총재.(이 13대 총선 때 박영숙 부총재가 김대중 총재 대신 몇 달간 총재대행을 했었다.)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의 이화여대 후배로 여성계 정치인 중에서 김대중을 가장 적극적으로 돕던 인물이다.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당시 '여성단체연합 성고문대책위원회장'을 맡아 피해자의 인권유린을 일삼은 전두환 정권 내 경찰에 대항하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던 사람이며, 한국 최초 정당 여성 비례대표 1번제를 시행한 것도 김대중 때의 평민당으로, 박영숙이 그 제도 최초의 국회의원이다. 2013년에 작고했다. 남편 안병무 교수 역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갔던 운동가이다.[7] 299석 중 149석을 가져갔다. 민자당 쪽에서는 절반이 1석 차이로 안 된 것에 대해 실패로 보기도 했지만 다당제 상황이던 당시에는 최강의 제1당이었다. 특히 경기도 쪽은 전체 상황보다 심해서 58%가 민자당 후보들 당선 지역이었다.[8] 재밌는 것은 옆 지역구인 동안구 을의 국회의원인 심재철은 이석현의 뒤를 이어 20대 국회 전반기 국회부의장을 지낸 바 있다.[9] 하술됐지만, 본 회의를 주재하는 국회부의장을 상대로 "저도 분명히 말했습니다." "개인의원이 아니라 원내수석부대표로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라며 이석현 부의장의 의사진행권에 정면도전하는 말을 한 게 결정타였다.[10] ① 의원이 본회의 또는 위원회의 회의장에서 이 법 또는 국회규칙에 위배하여 회의장의 질서를 문란하게 한 때에는 의장 또는 위원장은 이를 경고 또는 제지할 수 있다. ②제1항의 조치에 응하지 아니한 의원이 있을 때에는 의장 또는 위원장은 당일의 회의에서 발언함을 금지하거나 퇴장시킬 수 있다.[11] 화장실에 갔다 와도 필리버스터를 계속 할 수 있도록 하는 전례를 만들기 위한 목적을 의미한다.[12] 공식허가 없는 최초의 사례는 박정희 정부 시대의 김대중이다. 당시 소변을 보러간 김대중이 없는 사이 김대중의 마이크를 없애기 위한 여당 국회의원들과 이를 막으려는 야당 국회의원들의 대형 몸싸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13] ① 의원이 발언하려고 할 때에는 미리 의장에게 통지하여 허가를 받아야 한다.[14] 이석현 부의장이 언급한 1번 부분 외에도 두 가지 조항이 더 있다. 출처[15] 하태경 의원은 새누리당 내에서도 찬성토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긴 했으나 당론에 막혀 토론에 참여하진 못하긴 했다.[16] 원래 순서는 정의화-이석현-정의화-정갑윤 순이다[17] 정갑윤 부의장이 편향적 발언으로 의장진에서 배제된 줄 알았으나 복귀했다.[18] 그리고 같이 안양시의 민주당 투톱을 이루고 있던 이종걸 또한 경선에서 탈락했다. 거기다가 역시 안양시에서 5선을 기록하던 심재철 역시 민주당의 이재정에게 패하여 이번 총선 한 번으로 3명 도합 16선(...)의 기록이 한꺼번에 깨졌다.[19] 한편, 광명시 을양기대 또한 권리당원 투표에서 밀리고 시민투표에서 상대인 강신성을 이겼는데, 이긴 폭이 훨씬 커 경선에서 승리했고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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