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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고려)/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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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려 멸망의 씨앗3. 사치암군4. 의종 시해의 영향

1. 개요

의종의 평가를 정리한 문서.

2. 고려 멸망의 씨앗

의종은 환관 무리와 놀러 다니는 일로 날을 보내어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국정은 어지럽고 기강은 땅에 떨어졌다. 문신들과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내고, 무신을 혹사하고 천대한 결과 마침내 무신의 대란(大亂)을 도발케 했다.
- 김상기, 《고려시대사》
사신(史臣) 유승단(兪升旦)이 말하기를, “원수(元首 군주)와 고굉(股肱 신하)은 한 몸으로 서로 의존한다. 그러므로 옛날의 어질고 슬기로운 임금들은 문무(文武)를 좌우의 손과 같이 보아서 피차와 경중이 없어, 임금은 위에서 밝고 신하는 조정에서 화합하여 반란이 일어날 수 없었다. 의종(毅宗) 초기의 정치는 규모가 볼 만한 것이 있었으니, 진실로 충성스럽고 정직한 사람을 얻어 보좌하였다면 반드시 후세에서 찬양할 만한 선정(善政)을 시행하였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아첨하고 경박한 무리들이 좌우에 나열되어, 재를 올리고 기도하는 데 재물을 기울여 없애고, 정치에 부지런해야 할 시간과 정력을 주색에 돌렸으며, 풍월을 읊는 것으로써 신하와의 정치에 대한 의논을 대신하였으니, 점차 무인의 노여움이 쌓여 화가 장차 이르렀던 것이다. 의종이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戲)를 하게 하여 후하게 상을 내려서 그들의 원망을 위안하려고 하였으니, 왕의 마음에도 본래 어떤 예측이 있었던 것인데, 한뇌 등이, 무인들이 총애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갑자기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서 드디어 곤강(崑岡)을 태운 치열한 불길에 옥과 돌이 구별 없이 다 타고, 마침내는 임금이 쫓겨나서 최후를 좋게 마치지 못하였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랴." 하였다.
-《고려사절요》 권11 의종 24년 8월 사평(史評)

흔히 이렇듯 항락과 사치에만 몰두하다가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무신정변이 일어나도록 만들어서 고려의 혼란과 쇠퇴를 초래한 암군이자 더 나아가 무신정권과 함께 고려가 몽골 제국의 부마국이 된 이후부터 공민왕 이전까지 몽골 제국으로부터 내정 간섭과 수탈을 당하고 이성계신진사대부에 의해 멸망당하는 원인을 제공한 만악의 근원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다가 험한 난관에 부딪혀 좌절하고만 비운의 임금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의종은 무신정권의 시작이라는 것만으로도 역사와 당시 상황을 기록하는 문신들에게 최악의 평가를 받은 측면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종이 마냥 비운의 군주 소리를 듣기에도 뭣한 게, 25년이란 재위 기간은 결코 짧지만은 않은 기간이었다. 시대와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명군 평가를 받는 조선성종정조 또한 약 25년 간을 집권했었다.

또 아무리 왕권이 실추되었다고 한들 의종은 후대의 고종(제23대), 창왕(제33대)이나 공양왕(제34대)처럼 아예 권력이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허수아비 임금도 아니었다. 무신정권 시절의 고려 국왕들과 비교해봐도 답이 나오는데, 의종이 실권이 전무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고려가 인종 시기 이후에 군약신강 국가로 전락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권을 회복할 도리나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무신정권 시절의 고려 국왕들은 몽골 제국의 도움으로 왕정 복고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창왕이나 공양왕처럼 아무것도 못하는 허수아비 신세였다. 희종(제21대)처럼 이를 극복하려고 했다가 실패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또한 의종은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보다 더 오래 살았고, 임금 자리에도 더 오래 있었다. 게다가 죽어서 왕위를 넘긴 것이 아니라 폐위당해서 왕위를 빼앗겼던 것이었으며, 이의민에 의해 제 명에 죽지도 못했으니 무신정변이 없었더라면 더 오래 재위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의종은 무신 집권과 고려의 국정 혼란을 초래한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임금인 동시에 특히 무신 집권기 이후 몽골의 침입 때까지 고려가 혼란기를 겪는데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해 버렸다는 점에서 고려를 쇠락의 길로 이끈 암군이라는 평가는 피할 수가 없다. 물론 문벌귀족 사회가 왕권을 억압하고 고려를 좀먹은 탓도 크게 있긴 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종이 고려 멸망의 씨앗을 싹 틔웠다는 사실은 절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3. 사치암군

제8대 현종국가 흥성의 기반을 닦았고 덕종, 정종의 짧은 치세가 있었다. 제11대 문종전성기를 구가했고, 순종, 선종, 헌종의 짧은 치세가 있었다. 제15대 숙종, 제16대 예종은 북방 고토 회수를 천명했고, 제17대 인종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치세를 보냈지만 두 차례의 큰 환란[1]을 겪었다.

보다시피 현종 대부터 시작한 고려 왕조의 빛나는 상승세는 점차 빛 바래가고 있었다. 의종은 이렇듯 매우 중요한 시기에 임금이 되었으며, 그의 치세에 따라 고려는 다시 상승세를 탈 수도, 크게 변하지 못하고 계속 쇠락할 수도, 아예 나락에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의종은 고려미래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의종 스스로의 측근 집단을 양성하기 위해 휘하 문신들과 자주 술을 마시고, 별장에서 노는 일이 잦았다, 이들을 호위하기 위해 낮은 계급의 군졸들과 기존 의종 휘하의 무신들이 고된 노역에 자주 동원되고, 문신들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호위 무신들을 모욕하고 모함하는 일이 잦아졌으며, 노역과 무시로 쌓인 기존 의종 휘하 무신들의 불만은 무신정변이 일어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고, 이로 인해 나중에는 나라를 더욱 혼돈에 빠지게 하여 고려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고려사》에 기록된 의종의 사치만 해도 끝이 없을 지경이다. 본궐에 있는 기간이 매우 짧아서 언제나 놀러 다녔으며, 별궁, 별장도 정말 많이 건립했다. 이 때문에 보다 못한 대간이 계속해서 간언을 올렸음에도 그 때에만 들을 뿐 전혀 되새기지 않았다.

4. 의종 시해의 영향

이와 별개로 의종의 존재감 하나는 최고였다. 고려의 군주로 25년이나 재위했고, 암만 나라를 개판으로 운영했어도 왕조시대였던 만큼 의종의 폐위, 시해는 과하다고 여긴 사람들은 존재했다. 의종이 거제로 내쫓겼을 때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그를 복위시킨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고, 의종이 처참하게 죽었을 땐 서경유수 조위총이 의종의 원한을 갚겠다고 난을 일으켰다.[2][3]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은 죽을 때까지 왕을 죽인 자로 비난받았다. 특히 이의방이 살해되었을 때(갑오정변) 조위총은 선왕의 시해자가 잘 죽었다며 축하드린다는 요지의 표문을 명종에게 바쳤고, 이의민은 경대승이 선왕을 시해한 자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내가 어찌 술을 마시겠나며 일갈하자 겁이나 경주로 도망칠 정도였다. 이의민이 의종을 죽일 때 옆에서 거든 박존위는 사지가 찢기는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의종을 시해한 이의민 본인 역시 최충헌과 최충수 형제의 급습을 받아 처참한 말로를 맞았고, 이후 그의 일가 역시 모두 멸족당하고 말았다(병진정변).

[1] 이자겸의 난묘청의 난.[2] 다만 조위총의 경우에는 자신이 권력을 잡기위해 의종시해를 겉치례 명분으로 내새웠다는 시각도 있다. 만약 조위총이 의종한테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왜? 김보당을 돕지 않았냐는 의문이 남기 때문이다. 사실 김보당과 조위총이 손을 잡고 개경을 공격했다면? 무신정권은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조위총은 김보당의 난이 진압당하고 의종이 시해당할때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3]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반기를 든 것은 중앙군이 모든 요직을 독식한 것이 불만이었던 것이다. 무신정권의 첫번째 주인이었던 이의방 정권은 오로지 중앙군 하급장교들 위주로 권력을 독점한 상태였고 지방군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하지 못했으며, 이의방도 별관심이 없었다. 조위총은 이런 지방군의 불만을 감지하고 그들과 손잡고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건 나중에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일어나는데 헤이케 로쿠하라 정권이 중앙군 위주로 권력을 독점하자 소외된 지방군들이 겐지를 중심으로 결집하면서 겐페이 합전이 벌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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