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9 14:52:13

에버튼 FC/역사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에버튼 FC
파일:에버튼 FC 로고.svg
에버튼 FC 관련 문서
{{{#!wiki style="margin:0 -10px -5px"
{{{#274488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373A3C,#DDDDDD
<colbgcolor=#274488><colcolor=#ffffff> 산하 구단 에버튼 FC에버튼 FC 위민에버튼 아카데미
역사 역사유니폼
선수단 스쿼드스쿼드(간략)임대 명단U-21
역대 시즌 2008-112011-122012-132013-142014-152015-162016-172017-182018-192019-20 /리그2020-21 /리그2021-22 /리그2022-23 /리그2023-24 /리그2024-25 /리그
주요 인물 역대 감독역대 올해의 선수레전드
더비 매치 파일:리버풀 FC 로고.svg 머지사이드 더비
구단 시설 구디슨 파크(~2024-25)에버튼 스타디움(2025-26~)
관련 인물 댄 프리드킨 구단주션 다이치 감독
관련 구단 파일:AS 로마 로고.svg AS 로마
스폰서 파일:캐스토어 로고 화이트.svg 캐스토어 킷 스폰서파일:Stake.com.png Stake 메인 스폰서파일:Christopher Ward Logo.png Christopher Ward 슬리브 스폰서
}}}}}}}}}}}}}}} ||


1. 개요2. 창단 그 이후 역사3. 구단의 전성기4. 역대 시즌 요약

1. 개요

에버튼 FC 역사에 대한 문서이다.

2. 창단 그 이후 역사

에버턴 F.C.는 1878년, '세인트 도밍고 교회'의 신자들이 창설하여 '세인트 도밍고(St. Domingo's)'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원래 이 팀은 크리켓 팀이었으나, 크리켓이라는 경기가 여름철에만 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어서 구단은 겨울철에도 할 수 있는 스포츠 팀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래서 별도의 축구팀을 만들게 되면서 St. Domingo's Football Club이 에버튼 축구 클럽의 시초가 된다. 그리고 1년 후에 인기가 많아지면서, 지역의 이름을 따 에버튼 FC(Everton FC)로 명칭을 변경하게 된다.

에버턴의 초창기 구장은 '스탠리 파크'로 관중석이 없는 일반 공원에서 경기를 했었다. 그러다 보니 인근의 많은 인파가 몰렸고, 항상 소음이 끊이지 않아 소음 문제를 야기시켰다. 또한 제대로 된 구장이 있어야 풋볼 리그에 정식 프로 축구 클럽으로 등록될 수 있었기에 에버튼은 새 홈 구장을 물색해야 했다. 이에 구단은 스탠리 파크 바로 옆의 안필드 부지를 찾게 되었다. 당시 안필드는 초대 회장인 존 하울딩의 동료 양조업자 존 오렐의 소유 부지였고, 에버튼은 1885년 안필드를 임대해 축구 구장으로 개장하게 되면서 안필드 스타디움의 첫 주인이 된다. 에버튼은 안필드에서 정식 프로 축구 클럽으로 발돋움하여 1890-91 시즌 사상 첫 번째 풋볼 리그 우승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첫 번째 우승 직후인 1891년, 구장 부지 소유주 존 오렐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안필드 부지에다가 자신이 보유한 다른 토지로 이어지는 진입로를 놓겠다고 선언하며 사건이 시작되었다. 이 진입로는 안필드의 메인 스탠드를 통과하여 지어질 예정이었는데, 이 당시 영국에서 프로 축구 구단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경기장과 바깥 구역을 구분할 수 있는 제반시설[1]을 갖추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진입로에 의해 메인 스탠드가 사라진다는 것은 안필드가 프로 축구 경기장으로서 활용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결국 이 상황을 막기 위해서 회장 하울딩이 직접 안필드를 매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본격적으로 하울딩과 에버튼 구단 간의 갈등이 발생하게 되었다. 하울딩은 경기장을 본인의 소유로 직접 구입했기에 수익을 위하여 회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단 측에 대폭 상승한 경기장 임대료를 청구했고,[2] 경기장의 소유권을 통해 구단 내에서 본인의 입지를 올리고자 했다. 당시 에버튼은 수 많은 주주들과 이사진의 회의를 통해 집단 운영되고 있었는데 하울딩은 이러한 구조 때문에 회장으로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적다고 느껴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그러나 에버튼 이사진 또한 불만은 마찬가지였다. 구단 이사진들은 에버튼 선수단에게 경기 전에 자신이 소유한 호텔을 이용하도록 하는 등의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하울딩에게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하울딩은 영국 보수당 정치인이었고, 에버튼 이사회 인사들은 영국 노동당 정치인들이 많았으며, 하울딩은 양조업자인 반면 에버튼의 핵심 이사진들 중에선 성공회 목사 등의 종교계 인사들이 있어와 구단 내부에서는 껄끄러움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어져오던 갈등은 임대료 문제를 계기로 폭발하고 말았고, 의견 다툼은 봉합되지 못했다. 결국, 에버튼의 주주 279명은 1892년 1월에 회의를 열어 하울딩과 결별을 선언하고 홈 구장 이전을 결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서 에버튼은 1892년 3월 15일 안필드를 떠나 구디슨 파크[3]로 옮겨왔다. 1892년에 지어진 구디슨 파크는 잉글랜드 역사상 처음으로 지어진 축구 전용 구장이기도 한데, 개장 이후 영국 왕 조지 5세가 방문하면서 더 인지도를 높이게 된다. 한편, 에버튼이 나간 안필드에는 존 하울딩이 새 축구 클럽을 창단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리버풀 FC이다. 그리고 이러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에버튼과 리버풀 사이의 축구경기는 머지사이드 더비로 불리며 이피엘에서 유명한 더비 매치 중 하나가 되었다.

1878년에 창설된 에버튼은 1888년부터 풋볼 리그의 원년 멤버로 활약하기 시작했으며, 1890-91 시즌 우승을 차지한 이후 풋볼 리그 초창기부터 강세를 나타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리그와 FA컵을 각각 1개씩 땄었다. 팀 역사상 첫 전환기는 1925년에 트란미어 로버스에서 딕시 딘을 사면서부터였다. 1927/28 시즌 중반까지 최고 기록은 59골이었고 그가 57골을 기록했을 때는 단 한 경기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기록을 깨려면 해트트릭을 기록해야 했는데 하필이면 상대가 아스날이라 모든 사람들이 최다 골 기록을 깨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그는 해트트릭을 기록해 리그 최고 기록인 60골을 기록했으며, 그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1929/30 시즌 때 22팀 중 꼴찌로 강등됐지만 그는 팀에 꿋꿋이 남아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1시즌만에 선두로 1부 리그에 재승격시켰고, 1931/32 시즌에 리그 우승까지 차지하는 경이로운 활약을 보였다.

1960년대는 에버튼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로 손꼽히는데, 이 시기에 획득한 주요 타이틀은 두 번의 리그 우승과 한 번의 FA컵 우승 등이다. 당시 에버튼은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경기 스타일로 인해 '스쿨 오브 사이언스(School of Science)'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1961년에 팀의 중앙 공격수 출신인 해리 캐터릭이 감독으로 취임하여 전원 수비, 전원 공격을 앞세운 '토탈 풋볼'을 적용시켜 로이 버논과 알렉스 영, 조 로일 등의 활약으로 1962/63 및 1969/70 시즌에 각각 리그 우승을 했고, 1965/66 시즌에는 FA컵에서 우승을 했다.

이후 1970년대 들어서는 꾸준히 리그 중상위권을 유지해왔으나 라이벌 팀 리버풀에 가려 별다른 빛을 보지 못했다. 리버풀이 유러피언 컵을 연패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에버튼은 강등권으로 내몰리는 수모를 당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84/85 시즌에는 통산 여덟 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기지개를 폈고, 컵 위너스컵까지 제패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1979년부터 부임한 필립 카터 회장은 1980/81 시즌 도중에 '캐터릭의 아이들' 시절 멤버이던 하워드 켄달이 감독으로 취임하여 1985년에 리그 우승과 UEFA 컵위너스컵에서 우승시킴으로써 또 전성기를 누릴 찰나, 헤이젤 참사가 터진다.

리그 우승은 에버튼에게 새로운 전성기의 시작을 알리는 상승세의 조짐과도 같았지만, 불운하게도 에버튼은 1985년 헤이젤 참사로 인해 다른 잉글랜드 클럽들과 마찬가지로 5년간 유럽 대항전에 참가할 수 없었다. 라이벌 팀 리버풀 팬들에 의해 일어난 헤이젤 참사는 에버튼의 상승세에 제동을 걸었고, 설상가상으로 에버튼은 리버풀과의 막판 경합을 이겨내지 못해 1985/86 시즌 리그 준우승에 머무르는 분루를 삼켰다.

1980년대 후반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에버튼은 이후 중위권과 하위권을 전전하며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하락세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이어져 매년 강등권을 가까스로 빠져나오는 '대탈출'이 이어진 데다 머지사이드 더비에서도 매번 리버풀에 밀려 팀 사정이 암울했다.

2001/02 시즌 막판에 프레스턴 노스 엔드 감독이었던 데이비드 모예스를 영입하였는데, 이 영입이 구단의 역사를 바꾸게 된다. 부임 초기부터 15위로 리그 잔류에 성공시킨 뒤 2002/03 시즌에 신동 웨인 루니의 활약으로 7위를 찍었으나, 블랙번 로버스보다 승이 많은데도 UEFA컵에 출전하지 못했다. 모예스 감독은 적은 돈으로 가격 대비 성능비가 뛰어난 선수들을 영입하고 유소년 선수들을 대폭 기용하면서 팀의 전력을 차차 상승시켰다.

그러나 2003/04 시즌에선 한 시즌 만에 강등을 걱정할 정도까지 가면서 17위로 순위가 급격히 추락했고, 설상가상으로 2004/05 시즌을 앞두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유로 2004에서 4골을 터뜨려 득점 2위에 오른 신성 웨인 루니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팔면서 전문가들 사이에 강등 유력 후보로 거론됐으나, 잉글랜드 정통 축구의 맥을 고수하며 리그에서 폭풍을 일으켜 4위를 찍어 챔피언스 리그까지 갔다.

이후 2016/17 시즌까지는 리그에서 꾸준하게 중상~중위권 순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2017/18 시즌부터 잘못된 감독 선임, 감독과 선수 간 불화 등으로 성적이 들쭉날쭉하다가 2021/22 시즌부터 강등을 겨우 면하고 있다. 1995년 FA컵 우승이 마지막 우승이다.

3. 구단의 전성기

1888년 창립된 '더 풋볼 리그(The Football League)'의 공식 창설 멤버인 에버튼은 1890-91시즌 클럽 역사상 최초의 우승으로 리그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다. 1906년에는 첫 FA컵 우승을 달성한 에버튼은 1914-15년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고, 한동안 축구 경기가 중단되면서 구단의 상승세도 한 풀 꺾이게 된다.

한동안 잠잠하던 에버튼은 1925년 클럽 역사상 최고의 레전드로 평가받는 딕시 딘을 영입하면서, 새로운 전성기를 열었다. 1927-28 시즌 39경기에서 무려 60골을 넣은 딘은 에버튼의 세 번째 리그 우승의 일등 공신이 된다. 이 시즌에 작성한 딕시 딘의 득점 기록은 여전히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한 시즌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 있다. 메시도 이 기록은 깨지 못했다.

에버튼은 이후 예상치도 못한 구단 내분이 발생하며 뜬금없이 2부 리그로 강등되었으나 그 다음 시즌 부진을 만회하는 엄청난 호성적을 거두고 바로 1부 리그로 재승격한다. 1부 리그로 돌아온 직후인 1931-32 시즌 기세를 탄 에버튼은 리그 4번째 우승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 다음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두 번째 FA컵 우승을 차지하고, 1936년에 토마스 H. 매킨토시가 사망한 뒤 시오 켈리 비서가 비공식적으로 팀을 지휘한 1938-39 시즌에는 팀 역사상 다섯 번째 리그 우승까지 차지한다. 그리고 20년 넘게 부진이 이어진다.

에버튼의 두 번째 전성기는 해리 캐터릭 감독이 부임한 1961년에 찾아왔다. 캐터릭 감독의 에버튼에서의 두 번째 시즌인 1962-63 시즌 에버튼은 25년여 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고, 1966년에는 FA컵을 우승한다. 1968년 다시 FA컵 우승에 도전했지만, 아쉽게 준우승에 그친 에버튼은 2년 후 리즈 유나이티드에 승점 9점을 앞서며 리그 우승을 거뒀다. 한편 이 기간, 에버튼은 잉글랜드 축구 팀 역사상 최초로 5년 연속 유럽 대항전에 출전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1961-62 시즌~1966-67 시즌).

1980년대 에버튼 구단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는 1980/81 시즌 도중에 새로 부임하는 하워드 켄달 감독과 함께 찾아왔다. 에버튼은 1984년 FA컵에서 우승하고, 1984-85 시즌, 1986-87 시즌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1985년 에버튼은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달성하는데 이는 구단 역사상 유일한 유럽 대항전 우승 기록이다.

4. 역대 시즌 요약

1878년 세인트 도밍고스 풋볼 클럽(St. Domingo's Football Club) 이라는 이름으로 창단되었고 1879년에 에버튼 FC로 이름을 바꾸었다. 본래는 홈 구장으로 앤필드를 사용했으나 존 훌딩이 앤필드의 주인이 되면서 임대료를 올려버리자 구디슨 파크로 구장을 옮겼다. 에버튼이 구장을 옮긴 바람에 생긴 구단이 바로 리버풀 FC이다. 덕분에 리버풀과는 전통적으로 라이벌 관계이며 두 팀의 경기는 머지사이드 더비라고 불린다.

가난한 노동자들의 스포츠 정도로 귀족들이나 기득권들에게 무시당하던 프로 축구를 제대로 인식하게 한 구단이기도 하다. 1916년 구디슨 파크에 영국 왕세자 일행이 처음으로 보러 와서 인식을 다르게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리그와 FA컵을 각각 1개씩 따기도 했다.

팀 역사상 첫 전환기는 1925년에 트란미어 로버스에서 딕시 딘을 사면서부터였다. 1927/28 시즌 중반까지 최고 기록은 59골이었고 그가 57골을 기록했을 때는 단 한 경기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기록을 깨려면 해트트릭을 기록해야 했는데 하필이면 상대가 아스날이라 모든 사람들이 최다 골 기록을 깨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그는 해트트릭을 기록해 리그 최고 기록인 60골을 기록했으며, 그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1929/30 시즌 때 22팀 중 꼴찌로 강등됐지만 그는 팀에 꿋꿋이 남아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1시즌만에 선두로 1부 리그에 재승격시켰고, 1931/32 시즌에 리그 우승까지 차지하는 경이로운 활약을 보였다.

1937년에 딘이 팀을 떠난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재정난, 주축 선수들의 이탈로 부침을 겪다가 1961년에 팀의 센터포워드 출신인 해리 캐터릭이 감독으로 취임하여 전원 수비, 전원 공격을 앞세운 '토탈 풋볼'을 적용시켜 로이 버논과 알렉스 영, 조 로일 등의 활약으로 1962/63 및 1969/70 시즌에 각각 리그 우승을 했고, 1965/66 시즌에는 FA컵에서 우승을 했다.

1970년대 내내 꾸준히 리그 중상위권을 유지해왔으나, 라이벌 리버풀 FC의 패권 장악으로 만족할만한 성적을 못 냈다. 1979년부터 부임한 필립 카터 회장은 1980/81 시즌 도중에 '캐터릭의 아이들' 시절 멤버이던 하워드 켄달이 감독으로 취임하여 1985년에 리그 우승과 UEFA 컵 위너스컵에 우승시킴으로써 또 전성기를 누릴 찰나, 헤이젤 참사로 인해 잉글랜드 리그가 유럽대회에 출전금지를 당해 에버튼의 3번째 유로피언 컵 출전은 그렇게 물건너가고 말았다. 1986/87 시즌 우승 뒤 잦은 감독 교체와 재정난, 트레이드 실패 등이 겹치면서 이렇다 할 활약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1995년에 FA컵 우승과 커뮤니티 실드 우승을 이루어냈으나 그때뿐이었고, 하락세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이어져 매년 강등권을 가까스로 빠져나오는 '대탈출'이 이어진 데다 머지사이드 더비에서도 매번 리버풀에 밀려 팀 사정이 암울했다. 1993/94 시즌과 1997/98 시즌에는 최종전 직전까지 강등권에 위치해있다가 최종전에서야 간신히 강등을 모면하기도 했다.

특히 1994년에 카터 회장으로부터 팀을 산 피터 존슨 회장이 1998년 11월에 에버튼 타투를 새길 정도로 팀을 사랑하던 팀의 간판 공격수 던컨 퍼거슨을 감독 몰래 뉴캐슬로 이적시키면서 팬들이 존슨 회장을 쫓아냈고, 공연 프로듀서 빌 켄라이트가 팀을 산 후 전임 회장 필립 카터를 회장직에 다시 불렀다. 같은 시기에 스코틀랜드 레인저스의 명장이던 월터 스미스 감독이 팀을 지휘했음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2001/02 시즌 막판에 프레스턴 노스 엔드 감독이었던 데이비드 모예스를 영입하였는데, 이 영입이 구단의 역사를 바꾸게 된다. 부임 초기부터 15위로 리그 잔류에 성공시킨 뒤 2002/03 시즌에 신동 웨인 루니의 활약으로 7위를 찍었으나, 블랙번 로버스보다 승수가 많은데도 UEFA컵에 출전하지 못했다. 모예스 감독은 적은 돈으로 가격 대비 성능비가 뛰어난 선수들을 영입하고 유소년 선수들을 대폭 기용하면서 팀의 전력을 차차 상승시켰다.

그러나 2003/04 시즌에선 한 시즌만에 강등을 걱정할 정도까지 가면서 17위로 순위가 급격히 추락했고, 설상가상으로 2004/05 시즌을 앞두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유로 2004에서 4골을 터뜨려 득점 2위에 오른 신성 웨인 루니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팔면서 전문가들 사이에 강등 유력 후보로 거론됐으나, 잉글랜드 정통 축구의 맥을 고수하며 리그에서 폭풍을 일으켜 4위를 찍어 챔피언스 리그까지 갔다. 다만 2005/06 시즌 챔스에선 본선 32강도 못가고 3차 예선에서 비야레알에게 2패로 허무하게 탈락했다.[4] 게다가 UEFA컵 1라운드에서도 디나모 부쿠레슈티에 원정에서 5:1 대패를 당하면서 여기서도 광탈당했다. 리그에선 초반 엄청난 부진에 빠지며 8경기 1골 1승7패로 꼴찌까지 떨어졌으나 첼시와의 홈경기에서 첼시의 개막 10연승을 저지한 뒤 다행히 반등에 성공하여 11위로 마감했다. 이후 2007-08 시즌 칼링 컵 4강, 2008-09 시즌 FA 컵 준우승 등 가시적인 성과가 계속 나오고 있으며 리그에서는 꾸준하게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2013-14 시즌부터 로베르토 마르티네즈 감독이 부임하여 새로운 첫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최다 리그 승점과 함께 5위를 기록하여 미래가 밝아보였으나, 2014-15 시즌에는 11위로 순위가 곤두박질쳤다. 그 다음 시즌인 2015-16 시즌에도 상위 10위권 진입에 실패하면서 시즌 최종전을 앞두고 경질되었으며 로날드 쿠만 감독이 2016-17 시즌부터 지휘봉을 넘겼다. 부임 첫 시즌에 루카쿠의 맹활약을 비롯해 좋은 경기를 몇 차례 선보이며[5] 팀을 7위로 올려놓으며 유럽대항전 진출 티켓까지 확보해 2시즌간 망가졌던 에버튼의 명성을 되찾는 듯했으나...

2017-18 시즌 엄청난 돈을 써가며 선수를 가열차게 영입했음에도 어이없는 경기력으로 리그와 유로파를 가리지 않고 털려대며 초반에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말았다. 로날드 쿠만 감독은 여러 변명을 둘러댔지만 팀의 경기력은 몇 주째 형편없는 날들의 연속이었고 결국 파하드 모시리 구단주와 빌 켄라이트가 직접 구디슨 파크를 찾은 9R 홈경기 아스날전에서 2-5로 다시 한번 패배했다.[6] 아스날전을 치른 뒤 24시간 만인 2017년 10월 23일부로 로날드 쿠만은 전격 경질되었다.

일단 대체 감독으로 U-23 팀의 감독인 데이비드 언스워스가 몇 경기 대행을 맡은 뒤 2017년 11월 30일 프리미어리그 대표 공무원 중 하나인 샘 앨러다이스가 새로운 사령탑 자리에 올랐다. 1년 반 계약기간으로 단기소방수 롤로 온 것으로 보이는데 그 당시 중하위권을 맴돌던 에버튼의 순위를 어느 정도는 끌어올리면서 그의 역할을 수행하기는 한 것 같았지만 핵심 윙어 아론 레넌을 당시 7위 경쟁팀인 번리 FC에 팔아넘기는 기행을 저지르는 것은 물론이고 팀 훈련에도 일주일에 3~4번 이상은 지각 또는 결근하기 일쑤였다. 사실 순위는 8위로 마감했지만 실질적으로 전적은 쿠만 경질 시즌 때와 별 차이는 없었고 최종전적도 13승 10무 15패로 패가 더 많았다. 정확하게는 에버튼보다 아랫순위의 팀들이 꽤 부진하면서 어부지리로 8위로 올라간 셈. 게다가 무리하다시피 유스기용엔 소홀하고 노장들 위주로 선수기용을 해서 에버튼의 미래를 설계하기에도 어려웠다. 이러했던 내부 사정들로 인해 시즌 폐막과 함께 경질되었다. C학점이 D학점보다 양호하다고 해서 절대로 좋은 학점은 아닌 셈이다.

2년만의 리빌딩에 돌입한 에버튼은 빠른 시일내에 마르코 실바라는 젊고 유망한 감독을 새로운 사령탑에 앉혔다. 이 때문에 마르코 실바의 전 소속팀이었던 왓포드와 갈등을 빚고 있고 2018-19 시즌 초반 현재도 갈등이 진행중. 잡음이 있긴 했지만 어찌됐든 모시리 대주주는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그를 데려온 듯하며, 그도 모시리의 철학에 동의했다. 더불어 네덜란드 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풋볼 디렉터인 마르셀 브랜즈를 새로운 단장으로 영입했다.

그 다음 시즌인 2019-20 시즌, 마르코 실바는 졸전을 거듭한 끝에 강등권까지 추락했고, 리버풀과의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5:2라는 스코어로 패배한 끝에 경질되었다. 감독대행은 과거 팀의 간판 스트라이커였고 은퇴 후 코치로 계속 에버튼에 남아 있었던 던컨 퍼거슨.

이후 에버튼은 21일(한국시간),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 부임을 발표했다. 계약기간은 2023-24 시즌까지. 하지만 계약기간 중이었던 2020-21시즌 종료 후 안첼로티는 레알 마드리드 CF의 부름을 받았다는 이유로 에버튼과의 계약을 해지해버리고 레알에 가 버렸고, 갑작스러운 변수를 맞은 보드진은 지역 라이벌팀의 레전드 감독으로 추앙받던 라파엘 베니테즈를 그 대체자로 세우는 충격적인 결정을 했다.


[1] 광고판, 개찰구, 스탠드 등의 시설이 필요했다.[2] 150% 상승한 250파운드를 임대료로 요구했다.[3] 당시 이름은 미어그린(Mere Green)이었다.[4] EPL 빅4 체제 하에서 2009-10 시즌 토트넘 핫스퍼가 리그 4위로 진출하여 챔피언스 리그 8강까지 간 것에 견주는 경우도 있다.[5] 홈에선 맨체스터 시티를 4-0으로 대파하는 명경기를 선보인 바 있다.[6] 마지막 골을 먹힌 뒤 모시리와 켄라이트의 참담한 표정이 잡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