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영국의 군소정당 자유당에 대한 내용은 자유당(영국\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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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 Liberal Party |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fcaa17> 한글명칭 | 자유당 |
창당일 | 1859년 6월 9일 |
해산일 | 1988년 3월 2일 |
통합한 정당 | 휘그당, 급진파 등 |
중앙당사 | 영국 잉글랜드 런던 1 Whitehall Place, London |
후계 정당 | 자유민주당 |
이념 | 자유주의 (영국) |
스펙트럼 | 중도 ~ 중도좌파[1] |
국제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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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59년에 창당되어 1988년까지 존재했었던 영국의 정당. 당 이름에서도 보이듯 자유주의를 표방했고 당대 보수당과 대립하는 구도였다. 참고로 본래 있던 자유당은 1988년 사회민주당과 합쳐 사회자유민주당(현 자유민주당)이 됐으나, 당시 합당에 반발한 소수 자유당원들이 이탈하여 자유당이라는 동명 정당을 다시 만들어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다만 군소정당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거의 없다보니 보통은 자유민주당이 자유당을 계승했다고 본다.휘그당이 1859년 당명을 바꿔 자유당으로 재창당한 이래,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보수당과 함께 영국을 이끌던 대표적인 양대 정당이었으나, 1924년 총선을 기점으로 노동당에 지지층을 대거 내주고 군소정당으로 추락하고 만다. 이후 64년 동안 만년 제3정당으로 존속했다. 다만 이때 군소정당이란 이미지는 소선거구제 탓도 큰데, 실제 합당 전 각종 선거에서 자유당의 득표율은 10% 후반대를 유지했다. 그러나 소선거구제 때문에 의석이 매우 적었다. 물론 득표율은 상당했기에 언론에서도 노동당, 보수당 다음가는 관심은 받는 편이었다.
2. 역사
2.1. 19세기-20세기 초반
17세기 후반 토리당에 대립되었던 젠트리 파벌인 휘그당이 토대다. 다만 좀 더 정확히 따지면 휘그당 외 급진파(Radicals)+필파(Peelites)+독립아일랜드당(Independent Irish Party)까지 연합한 당으로 약간 복잡한 생성 과정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시작부터 큰 정당으로 출발할 수 있었지만, 이런 여러 계파는 훗날 계파 갈등으로 이어져 자유당 몰락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하여튼 자유당이란 말은 1840년대에 사용되었고 직접적인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은 1859년부터다.19세기 중후반 윌리엄 글래드스턴, 헨리 존 템플, 존 러셀 총리 등을 배출하며 보수당과 영국을 양분하던 거대 정당이었지만 1920년대부터 세력이 많이 약해진다. 일각에선 보수당이 디즈레일리 등이 주장한 선거권 확대에 발맞추어 대중 정당으로서 면모를 갖추어 간 반면 자유당은 그러하지 못하였다는 주장도 하는데, 이건 글래드스턴이 직접 광장으로 나가 시민들을 동원한 사례도 있다는 점과 다수 선거에서의 높은 득표율을 생각하면 사실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복잡한 생성 원인으로 생긴 번잡한 당의 구조와 파벌 갈등이 주된 원인이었던 것으로 지적된다.
자유당의 내부 갈등은 1880년대 중반부터 불거졌다. 필파 출신으로 온건한 대외정책과 아일랜드의 자치,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종교 자유로 대변되는 '작은 영국'을 주장한 글래드스턴에게 휘그파 일부와 영연방 확장, 제국주의에 긍정적이던 체임벌린 등의 신흥자본파가 함께 반발한 것이었다. 이들은 '자유통일당(Liberal Unionist Party)'을 조직하고 보수당과 연합해 글래드스턴에게 엿을 먹인다. (덤으로 아일랜드 의회주의자들은 영국 내에서는 보수당에게 표를 던져서 연정 없이는 자유당이 집권할 수 없는 교묘한 전략으로 의석을 깎아먹었다.) 이걸 헨리 캠벨배너먼이 탕평책으로 어찌어찌 봉합에 성공했지만, 한번 갈라졌던 경험은 당에 상처를 남긴다.
자유당은 1906년 총선에서 무려 397석 대 156석의 압승을 거두며 정권을 되찾는다. 허나 캠벨배너먼 총리가 1908년 사망하면서 자유당은 다시 위기를 맞게 된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글래드스턴의 평화주의 노선과 함께 국가의 적극적인 분배 정책 개입을 주장하는 사회자유주의자(뉴 리버럴리스트)들의 목소리가 높았고,[2][3] 이것은 노령연금법안(1908년), "인민예산"이란 말마저 들은 막대한 예산확보(1909년)같은 강력한 분배 정책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 예산안은 결국 자기들 호주머니 털어가는거라고 여긴 상원의 귀족들에게 350:75란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당하고 만다.
이에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수상(재임 : 1908~1916)은
허나 이후에도 당내 사회자유주의자와 자유방임주의자 등의 이념 논쟁은 계속 벌어졌고, 이런 난맥상에 지쳤는지 전통적인 휘그 지지자(비국교도 중산층)들도 1차세계대전 전후해 대거 이탈해버린다. 정권의 한 축이었던 아일랜드 의회당 역시 자치 및 독립 요구가 커지며 발생한 1916년의 부활절 봉기 이후 몰락해 아일랜드에선 강경파인 신페인당이 득세하게 된다. 그야말로 내우외환.
결국 애스퀴스 전 수상과 사이가 멀어진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의 '궁정 쿠데타' 이후 분당 크리가 결정타가 되어 자유당은 1918년 총선에서 대패를 하고 만다. 그래도 로이드 조지는 전시 내각에서 이미 협력한 바 있는 보수당과 어찌어찌 연정을 맺어 겨우 집권을 하기는 했다만 결국 줄어든 당세를 회복하지 못해 1922년 사임했고, 이후 자유당에선 총리가 나오지 못한다. 1923년 총선에서는 아예 양대 자유당을 합해도 노동당에게 밀리는 상황이 되어버렸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자유당 세력은 1924년 재통합되었으나 옛날의 영광을 회복하기엔 때 늦은 뒤였다. 이후 기존 자유당 지지자들 가운데서 사회자유주의에 가까운 축은 노동당, 자유방임주의에 가까운 축은 보수당으로 흩어졌으며[4] 당의 전성기를 책임진 애스퀴스와 로이드 조지는 분당 정국에서도 각 정파의 대표를 역임했으나, 통합 뒤 오히려 전체 의석의 20%는커녕 그 반토막 이하로 쇠락한 자유당의 모습을 지켜봐야했다.
이렇게 20세기 초 마지막 전성기를 보내고 만년 야당으로 지내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자유당이지만, 20세기만 하더라도 자유당 내각은 집권하는 동안 제1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끝마치고, 상원의 하원 비토권을 에드워드 7세와 함께 없애버렸으며,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는 등 나름 굵직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2.2. 20세기 중후반
사회민주당–자유당 연대 로고 |
영국 정치에서 자유당(또는 그 후신 자민당)과 노동당(또는 창당 이전 노동 운동 계열)의 연합이 성립될 경우 이걸 Lib-Lab pact라고 부르는데, 19세기부터 현재까지도 수시로 도는 떡밥이다. 아무래도 지지층이 제법 겹치는데다 보수당만 좋은 일 시켜주는 꼴이니 이런 연합설이 도는 모양.
3. 역대 선거 결과
- 굵은 색은 총리 역임자
연도 | 대표 | 의석수 | 순위 | 득표율 | 득표율 증감 | 집권 여부 |
1865 | 헨리 존 템플 | 369/658 | 1위 | 59.5 | - | 템플 내각 다수 여당 |
1868 |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 387/658 | 1위 | 61.5 | +2.0 | 글래드스턴 내각 다수 여당 |
1874 | 242/652 | 2위 | 52.0 | -9.5 | 비집권 | |
1880 | 스펜서 캐번디시[6] | 352/652 | 1위 | 54.2 | +2.2 | 글래드스턴 내각 다수 여당 |
1885 |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 319/670 | 1위 | 47.4 | -6.8 | 글래드스턴 내각 소수 여당 |
1886 | 191/670 | 2위 | 45.5 | -1.9 | 비집권 | |
1892 | 272/670 | 1위 | 45.4 | -0.1 | 글래드스턴 내각 소수 여당 | |
1895 | 아치볼드 프림로즈 | 177/670 | 2위 | 45.7 | +0.3 | 비집권 |
1900 | 헨리 캠벨배너먼 | 183/670 | 2위 | 44.7 | -1.0 | |
1906 | 398/670 | 1위 | 48.9 | +4.2 | 캠벨배너먼 내각 다수 여당 | |
1910.1 |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 274/670 | 1위 | 43.5 | -5.4 | 애스퀴스 내각 자유-의회 연립정부 |
1910.12 | 272/670 | 1위 | 43.2 | -0.3 | ||
1918 | 36/707 | 5위 | 13.0 | -30.2 | 비집권 | |
1922 | 62/615 | 3위 | 18.9 | +5.9 | ||
1923 | 158/615 | 3위 | 29.7 | +10.8 | ||
1924 | 40/615 | 3위 | 17.8 | -11.9 | ||
1929 |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 59/615 | 3위 | 23.6 | +5.8 | |
1931 | 허버트 새뮤얼 | 33/615 | 4위 | 6.5 | -11.3 | 국민정부 다수여당 |
1935 | 21/615 | 4위 | 6.7 | +0.2 | 비집권 | |
1945 | 아치볼드 싱클레어 | 12/640 | 3위 | 9.0 | +2.3 | |
1950 | 클레멘트 데이비스 | 9/625 | 6위 | 9.1 | +0.1 | |
1951 | 6/625 | 4위 | 2.5 | -6.6 | ||
1955 | 6/630 | 3위 | 2.7 | +0.2 | ||
1959 | 조 그리몬드 | 6/630 | 3위 | 5.9 | +3.2 | |
1964 | 9/630 | 3위 | 11.2 | +5.2 | ||
1966 | 12/630 | 3위 | 8.5 | -2.7 | ||
1970 | 제러미 소프 | 6/630 | 3위 | 7.5 | -1.0 | |
1974.2 | 14/635 | 3위 | 19.3 | +11.8 | ||
1974.10 | 13/635 | 3위 | 18.3 | -1.0 | ||
1979 | 데이비드 스틸 | 11/635 | 3위 | 13.8 | -4.5 | |
1983 | 17/650 | 3위 | 25.4 | +11.6 | ||
1987 | 17/650 | 3위 | 22.6 | -2.8 |
[1] 정확히는 노동당 부상 이전 보수당과 양당체제일 시절에는 중도좌파고 노동당이 양당제의 진보정당 포지션을 대체한 이후에는 중도로 밀려났다.[2] 영어권에서는 20세기 초반 이후로 별도의 설명 없이 liberal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뉴리버럴, 즉 사회적(진보적) 자유주의를 가리키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시장에 맡겨 놓는 자유방임이라면 뉴리버럴은 거기에 반대해 국가의 분배 개입을 지지하니 같은 자유주의라도 입장이 상당히 다르다. 참고로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유래한 현대의 시장 자유주의 계열들은 오늘날 대개 libertarian(자유지상주의, 자유의지주의 등으로 번역)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굳이 liberal이라는 말을 쓸 경우 앞에 다른 수식하는 다른 단어를 덧붙여야 오해를 피할 수 있다.[3] new liberalism이나 neoliberalism이나 모두 '신자유주의'로 번역 가능하나 양자의 입장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국가의 적극적인 분배 개입을 지지하지만 후자는 고전적 자유주의, 시장 자유주의를 계승해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는 입장을 취한다. 한국어에서 '신자유주의'는 보통 neoliberalism을 가리킨다. 참고로 new는 기존에 있던 것에 대항하여 등장한 대안을, neo는 기존에 있던 것을 계승하여 개량한 것이라고 뉘앙스라고 이해하면 된다. 즉 new liberalism은 기존에 있었던 고전적/시장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자유주의고, neoliberalism의 neo는 고전적/시장 자유주의를 계승하여 등장한 최신 버전의 (시장) 자유주의인 셈. 이런 특성 때문에 new liberalism은 그 특성상 진보주의, 좌파 이념과 연합할 여지가 크고, neoliberalism은 보수주의, 우파 이념과 연합할 여지가 크다.[4] 비율상으론 노동당에 간 비율이 높았다.[5]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네임밸류가 있었기 때문에 1930년대 이후에도 항상 선거 득표율 10%는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비례대표제가 전혀 없는 소선거구제로서 양대정당 외에는 대단히 불리한 덕에 의석 확보는 실패한다. 대표적으로 1974년 2월 노동당:보수당 301:297로 2차대전 이래로 최초의 과반다수당이 없는 헝(hung)의회가 이루어지면서 캐스팅보더가 될 기회를 잡았지만 10월 이루어진 재선거에서 319:277이 되면서 처참하게 버려졌다.(...) 당시 두 번 모두 20%에 육박하는 득표를 얻으며 의석이 2배나 증가했지만, 그럼에도 확보한 의석은 10여석에 불과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6] 총리 지명자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