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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하울딩

존 하울딩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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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튼 FC 회장 · 구단주
존 하울딩
(1884~1892)
윌리엄 잭슨
(1892)
조지 마흔
(1892~1895)
리버풀 FC 회장 · 구단주
존 하울딩
(1892~1896)
윌리엄 하울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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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하울딩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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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창립자
Founder of Liverpool Football Club
존 하울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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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창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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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하울딩
John Houlding
<colbgcolor=#d00027> 출생 1833년 8월
잉글랜드 머지사이드주 리버풀
사망 1902년 3월 17일 (향년 68세)
프랑스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니스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사업가
축구 경영인
정치인
소속 <colbgcolor=#d00027> 축구 에버튼 FC (1878~1892 / 회장)
리버풀 FC (1892~1896 / 회장)
정치 리버풀 시의원 (~1897)
리버풀 시장 (1897~1898)
정당

1. 개요2. 생애3. 여담4. 관련 문서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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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사업가이자 정치인으로, 에버튼 FC리버풀 FC를 창립했으며 양 구단의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머지사이드 축구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며, 정치적으로는 보수당 소속으로 리버풀 내 에버튼 지역을 대표하는 시의원으로 활동하다 1897년 리버풀 시장직까지 역임했다.

2. 생애

하울딩은 리버풀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찍이 지역 양조장과 극장, 호텔 등을 소유해 19세기 말까지 머지사이드 지역의 사업가로 활동했다. 그는 보수당 소속으로 리버풀 내 에버튼 지역을 대표하는 시의원으로서 정치인 활동도 겸했다.

하울딩은 1878년 창단한 지역의 축구팀 에버튼 FC의 초대 회장이자 공동 창립자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당시 리버풀 시내 스탠리 파크[1] 공터에서 경기를 진행하던 에버튼은 새로운 구장을 찾고 있었고 회장이었던 하울딩은 1884년 안필드 부지에 새로운 피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당시 이 안필드 부지는 하울딩의 동료 양조업자 존 오렐의 부지였는데, 하울딩의 주도 아래 에버튼은 약간의 임대료를 지불하고 홈 그라운드로 안필드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사건은 1885년, 존 하울딩이 안필드 부지를 직접 매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에버튼의 회장이자 안필드 소유주가 된 하울딩은 에버튼의 이사회와 다양한 방면에서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가장 큰 갈등 요소는 안필드의 임대료 인상이었다. 1889년에 에버튼은 하울딩에게 안필드 임대를 위해 연 100파운드의 임대료를 지불해왔으나, 하울딩은 경기 수입이 늘어남에 따라 임대료를 계속해서 인상하는 방식을 취하여 1889-90 시즌부터는 250파운드, 이후 370파운드까지 임대료를 인상했다. 이에 에버튼 이사회는 하울딩에게 불만을 표하며 임대료 고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하울딩은 초기 자본이 부족했던 구단 대신 자신이 직접 안필드 부지를 매입하였고 구단이 수익을 만들기 이전까지 무상으로 경기장을 임대해줬던 것을 지적하며, 구단을 위해 자신이 투자 위험을 감수했던 바 응당한 금액을 받아야겠다며 요구를 거부했다.[2]

게다가 하울딩은 안필드에 자신이 운영하는 양조장의 맥주를 독점적으로 들여왔고, 에버튼 선수들이 그의 소유인 샌든(The Sandon) 호텔을 경기 전후에 사용하도록 만들기도 했는데[3], 이러한 조치가 에버튼 이사회의 불만을 샀고 계속해서 이사회와 충돌했다. 하울딩은 보수당 소속의 자본가였던 반면, 에버튼 이사회에는 자유당 정치인들이 많았으며, 성공회 교인들도 다수 있어 양조업자였던 하울딩과는 부딪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갈등이 심화되던 와중에, 인접한 토지 소유주이자 안필드의 전 주인 존 오렐과의 토지 분쟁까지 얽히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 1891년, 에버튼 이사회는 안필드 경기장 내 새로운 스탠드를 건설했는데, 이 스탠드가 오렐이 소유한 옆 토지를 침범하며 지어졌고,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스탠드가 도로로 사용될 예정이었던 오렐의 땅을 가로막아버렸던 것이었다. 당시 안필드 경기장과 맞닿아 있던 오렐의 부지는 안필드의 일부 구역을 도로로 사용하지 않고는 접근이 불가능한 땅이었다. 즉, 반드시 안필드 경기장 부지를 지나야만 하는 도로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미 오렐과 하울딩 사이에는 이와 관련한 토지 이용 조항이 안필드 부지 매매 계약 당시부터 존재했으며, 이 조항에 따르면 안필드 부지의 특정 구역이 도로로 사용되어야만 했다. 에버튼 이사회는 해당 부지가 온전히 구단의 것이라 믿고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스탠드를 세운 것이었다고 주장했으나 오렐은 에버튼 측이 토지 계약 내용을 모르고 있었을 리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고 스탠드 철거를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울딩은 오렐의 손을 들어주며 오렐과의 계약 내용을 구단 이사회에게도 알려줬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사건은 단순한 토지 문제를 넘어 하울딩과 에버튼 이사회 사이의 불신이 증폭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하울딩과 에버튼 이사들 간의 관계가 완전히 파국으로 치닿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결국 1891년 9월 15일, 하울딩은 급히 경기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단을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오렐의 부지를 완전히 매입할 자금을 모으자는 안건을 이사회에 올렸다.[4] 이러한 제안은 구단의 초대 감독이자 하울딩의 절친한 친구였던 윌리엄 바클레이를 비롯한 회장 측근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자유당 정치인 조지 마흔[5]을 필두로 한 다수의 이사들은 주식회사로 전환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하울딩이 제안한 방식에 강하게 반대의사를 밝혔다. 하울딩이 제안한 안건은 12,000주의 주식을 발행하여 이사회 멤버들이 1주씩을 나눠 가지고 나머지 주식은 일반 대중 및 이사회 멤버들에게 판매하자는 내용이었는데, 이는 자본가인 하울딩과 측근들이 지분을 모으기 유리한 방식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마흔은 총 500주의 주식만 발행하고 어떤 개인도 10주 이상 소유할 수 없도록 제한을 두며,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주식을 보유해야 한다는 원칙을 주장했다. 실제로 당시 에버튼은 수많은 주주들의 결의에 의해 의사 결정을 해왔는데, 회장이던 하울딩은 그런 다수 의결 방식이 발전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안필드의 소유권을 가진 후 갈등을 벌여온 것도 권력을 잡아 운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였다. 사실상 내부 운영 방식의 관점을 보인 두 집단의 정치 싸움이였던 것이다.

이후 합의를 위해 하울딩은 마흔측과 많은 협상을 벌였지만 1892년이 밝을 때 까지 합의는 도출되지 못했다. 결국 마흔은 부지 문제가 엮인 하울딩의 안필드를 떠나기 위해 새로운 경기장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1892년 1월 25일, 쇼 스트리트(Shaw Street)에 위치한 옛 리버풀 칼리지(Liverpool College) 건물에서 특별 총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하울딩의 제안은 다시 한 번 부결되었고, 마혼은 미어 그린(Mere Green)[6]의 임대 계약서를 제출하며 에버튼이 새로운 경기장으로 떠나자는 안건을 올렸다.[7] 결국 다수 의결에 의해 에버튼은 안필드를 떠나게 되었고 하울딩은 에버튼 이사회로부터 결별을 통보받고 말았다. 당시 이 사건은 리버풀 지역 내에서도 정치적으로 큰 사건이었다. 자유당 성향의 리버풀 데일리 포스트(Liverpool Daily Post)는 하울딩을 축출한 사건을 두고 "암적인 존재를 제거한 것"이라며 에버튼의 결정을 긍정적으로 보도했고, 보수당 성향의 리버풀 이브닝 익스프레스(Liverpool Evening Express) 등은 익명의 기고문을 통해 마혼을 공격하는 기사를 다수 내보내는 등, 하울딩을 지지하며 에버튼 이사회를 강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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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당시의 리버풀 FC[8]

하울딩은 결국 에버튼과 결별하여 빈 축구장만을 소유하게 되었고, 새로운 축구 구단을 본인이 직접 창단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에버튼과의 결별 과정에서 존 맥케나를 비롯해 몇몇 인물들이 하울딩의 편에 남았고, 하울딩에게는 윌리엄 바클레이와 같은 조력자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합심하여 새 구단 창단 과정은 순탄하게 이루어졌다.[9] 그리고 1892년 6월 3일 현재의 리버풀 FC가 협회의 승인을 받아 탄생했다.[10] 하울딩은 리버풀의 초대 회장직에 앉았고, 구단 창립을 도운 바클레이는 초대 감독을 맡았다.

이후 하울딩은 구단을 순탄하게 운영하기 시작했다. 하울딩은 초창기 텅 빈 구단에 선수들을 채워넣기 위하여 스코틀랜드의 선수들을 수급하자는 바클레이와 맥케나의 의견을 받아들여 500파운드를 지원해 스쿼드를 구축했다. 팀의 구실을 갖춘 리버풀은 이후 리그에 등록되어 프로 구단으로서 역사적인 첫 걸음을 시작했다. 그는 구단 운영에 있어서 기존의 에버튼과는 다른 방식을 선호했는데, 에버튼은 다수의 주주들이 회의를 통해 공동의 의견을 도출하여 팀을 이끌어가는 시스템이었으나 그는 이러한 방식의 비효율을 느꼈고 본인이 직접적인 리더십을 발휘해 팀을 꾸려가기를 원했다. 이에 하울딩은 초기부터 구단의 주식을 대다수 점유하기 시작했다. 1892년 창립 당시, 리버풀의 주주는 47명에 불과했고, 하울딩은 구단의 초기 주식 788주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지분만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10년 후에 그는 클럽 주식의 3분의 2(2,953주 중 1,960주)를 지배하게 됨으로서 구단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울딩의 운영 아래, 리버풀은 2부 리그에 참가한 1893-94 시즌 첫 해부터 무패로 우승을 달성했고, 디비전 1 꼴찌였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신 뉴튼 히스(Newton Heath)와 승강 플레이오프 격인 테스트 매치에서 2-0 승리를 거두어 창단 2년 차에 처음으로 1부 리그에 진출하는 호성적을 냈다. 이후 한 시즌만에 다시 강등되긴 했으나 1895-96 시즌 디비전 2에서 마지막 14경기 12승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1년 만에 다시 디비전 1 복귀에 성공했다. 하울딩은 팀의 승격을 지켜보며, 1896년을 끝으로 리버풀 회장직에서 물러나 리버풀 시장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연로한 그는 건강이 좋지 못했고 1년 뒤, 시장직에서 내려와 투병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가 창단한 리버풀이 첫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한 다음 해인 1902년, 하울딩은 프랑스 니스 인근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리버풀에서 치러졌으며, 리버풀과 에버튼의 선수들은 그가 도시에서 축구를 위해 해낸 모든 것에 대한 존경을 표하며 그의 관을 직접 옮겼다.
파일:존하울딩.jpg
존 하울딩
Founder of Liverpool Football Club

이후 하울딩이 창단한 리버풀은 잉글랜드 최고의 구단으로 발돋움 했고, 그는 리버풀의 창립자로서 존경받게 되었다. 그러던 2018년 11월, 리버풀 구단은 구단의 125주년을 기념하여 창립자인 그의 흉상을 안필드 내 96 에비뉴에 설치하며 그의 명예를 높였다. 해당 흉상은 안필드 내 빌 샹클리의 동상을 제작한 톰 머피에 의해 디자인 되었으며, 약 7피트의 높이로 메인 스탠드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 제작되었다. 2022년에는 역사학자 데이비드 케네디 박사에 의해 'The Man Who Created Merseyside Football'이라는 제목으로 하울딩의 전기가 출판되기도 했다.

3. 여담

  • 머지사이드주의 지역 라이벌인 두 구단을 창립한 인물로, 에버튼의 공동 창립자이자 리버풀의 창립자이다. 두 구단에서 모두 회장직을 역임했다. 또한 에버튼과 갈등 관계 속에 리버풀을 창단함으로서 실질적으로 두 구단의 라이벌리를 창조한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 그는 리버풀 지역의 사업가로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는데, 양조장과 더불어 The Sandon 호텔과 엠파이어 극장이 유명했다. The Sandon 호텔은 아직까지도 운영되고 있으며, 하울딩이 리버풀 FC를 창단한 곳이 바로 이 호텔이다. 안필드 구장 바로 옆에 위치해 있으며, 호텔 1층에는 동일 이름의 유명 펍이 운영되고 있다. 현재 리버풀 FC는 이 호텔에 투숙하며 경기를 관람하는 패키지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4. 관련 문서

5.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d00027><tablebgcolor=#d00027> 파일:리버풀 FC 라이버 버드 로고(화이트).svg리버풀 FC
회장·구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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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555555,#aaaaaa
순서 국적 이름 기간 우승 기록 비고
초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존 하울딩 1892~1896 구단 창립자
2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윌리엄 하울딩 1896~1904
3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에드윈 베리 1904~1909 새 이사회 구성
4대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존 맥케나 1909~1913 최초의 감독 출신 회장
최초의 외국인 회장
5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존 애스버리 1913~1917
6대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존 맥케나 1917~1919 최초의 중임 회장
7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윌리엄 윌리엄스 1919~1924
8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리차드 마틴데일 1924~1926 재임 중 타계
9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토마스 크롬튼 1926~1932
10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왈터 카트라이트 1932~1935
11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윌리엄 해롭 1935~1941
12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리차드 마틴데일 주니어 1941~1944
13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W. H. 맥코넬 1944~1947 재임 중 타계
14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스텐리 윌리엄스 1947~1950
15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조지 리차즈 1950~1953
16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윌리엄 해롭 1953~1956 재임 중 타계
17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T. V. 윌리엄스 1956~1964
18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시드니 리크스 1964~1967 새 이사회 구성
19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해롤드 카트라이트 1967~1969
20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허버트 로버트 1969~1973 재임 중 타계
21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존 스미스 1973~1990
최장 기간 재임 회장
역대 최다 우승 회장
22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노엘 화이트 1990~1991
23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데이비드 무어스 1991~2007
24대 파일:미국 국기.svg 톰 힉스 & 조지 질레트 주니어 2007~2010 최초의 공동 구단주
최초의 미국인 구단주
25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마틴 브러튼 경 2010 구단 매각을 위한 임시 구단주
26대 파일:미국 국기.svg 존 헨리
(펜웨이 스포츠 그룹)
2010~
프리미어 리그 / FA컵 / EFL컵 / EFL 챔피언십
UEFA 챔피언스 리그 / UEFA 유로파 리그 / UEFA 슈퍼컵 / FIFA 클럽 월드컵
참고 사항
* 리버풀 FC의 회장은 구단 이사회가 선출하는 최고직이었으나 데이비드 무어스부터 구단 지분 과반 이상을 소유하게 되었고 이후 외국 자본이 구단을 소유하며 구단주로 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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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의 안필드구디슨 파크 사이에 있는 공원이다.[2] 실제로 후에 하울딩은 안필드를 매입하여 에버튼을 위해 투자한 것 때문에 빈털털이가 될 수도 있었다며 당시 상황을 변호하기도 했다.[3] 당시 경기장엔 제대로된 라커룸이 없었기에 사실상 라커룸 혹은 드레싱룸의 개념으로 사용한 것이었다.[4] 당시에는 구단이 주식회사 형식으로 운영되는 것이 드물었기에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축구단은 보통 회원들이 연회비를 지불하는 '스포츠 클럽'의 형식으로 대부부 운영되었다.[5] 이사회 내에서 하울딩과 계속해서 부딪혀왔던 인물이다. 리버풀 지역 지방 선거에서 정치적으로도 충돌한 적이 있었다.[6] 구디슨 파크의 이전 이름[7] 당시 마흔이 경기장 이전 안건을 올리자 한 이사회 멤버가 "구장을 못찾을 것이다"라며 비아냥거렸고, 마혼은 주머니에서 미어 그린의 임대 계약서를 꺼내 보이며 "내 주머니에 경기장이 있다!"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있다.[8] 하단 정중앙의 인물이 하울딩이다. 왼쪽은 존 맥케나, 오른쪽은 윌리엄 바클레이[9] 1892년 3월 15일 구단 창단이 결정되었다.[10] 처음 이름은 '에버튼 FC & 애슬레틱 그라운즈'였다. 하지만 기존의 에버튼과 이름이 겹쳐 협회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고, 후에 바클레이가 '리버풀 풋볼 클럽'의 이름을 제안하여 이름을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