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06 13:20:01

신빈 신씨

신녕옹주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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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태종의 후궁
신빈 신씨 | 信嬪 辛氏
파일:신빈신씨묘2.jpg
신빈 신씨묘 전경
출생 1377년(우왕 3년)
사망 1435년(세종 17년) 3월 10일(음력 2월 2일)
(향년 58세)
능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산 41
재위기간 조선 신녕옹주
1414년 2월 3일 ~ 1422년 3월 12일
조선 신녕궁주
1422년 3월 12일 ~ 1435년 3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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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영월 신씨[1]
부모 부친 - 신영귀(辛永貴)
배우자 태종
자녀
슬하 3남 7녀 [ 펼치기 · 접기 ]
[2]
장남 - 함녕군(諴寧君, 1403 ~ 1467)
차남 - 온녕군(溫寧君, 1407 ~ 1454)
장녀 - 정신옹주(貞信翁主, ? ~ 1452)
차녀 - 정정옹주(貞靜翁主, 1410 ~ 1456)
3녀 - 숙정옹주(淑貞翁主, ? ~ 1489년 이후)
4녀 - 숙녕옹주(淑寧翁主)
5녀 - 소신옹주(昭信翁主, ? ~ 1437)
6녀 - 소숙옹주(昭淑翁主, ? ~ 1456)
7녀 - 숙경옹주(淑慶翁主, 1420 ~ 1494)
봉작 신녕옹주(信寧翁主)
→ 신녕궁주(信寧宮主/愼寧宮主/信靈宮主) → 신빈(信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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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태종의 총애2.2. 총애와 관련한 일화2.3. 말년2.4. 사망2.5. 추증
3. 대중 매체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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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태종후궁. 아버지는 검교 공조 참의(檢校工曹參議) 신영귀(辛永貴)이다.[3] 본래 그녀는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를 모시는 여종이었으나 태종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다.

슬하에 함녕군 이인, 온녕군 이정을 비롯해 일곱 옹주를 낳아 3남 7녀를 두었고, 태종의 총애를 받아 당대에 상당한 권세를 누렸다.[4]

2. 생애

2.1. 태종의 총애

1414년(태종 14) 1월 13일 신씨는 함녕군을 낳은 덕택에 신녕옹주(信寧翁主)로 봉작되었다.[5] 조선 초기에는 왕손이 번창하였기 때문에 단순히 왕의 자녀를 낳았다고 해서 쉽게 첩지를 받을 수는 없었다. 일례로 서장자 경녕군의 생모 김씨는 죽을 때까지 첩지를 받지 못하고 한참 뒤에야 효빈 김씨로 봉해졌다. 이를 생각하면 '중궁의 비(婢, 궁녀나 몸종)'출신으로 첩이 된 신씨의 출세가 더뎠던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품계와는 별개로 태종의 사랑을 독차지한 애첩이었다.

1422년(세종 4) 태종이 상왕으로 있을 때, 태종을 극진히 간병하여 신녕옹주에서 궁주(宮主)로 높아졌다.[6][7]

신씨는 태종의 여러 후궁 중에서 가장 총애받는 후궁이었다. 당시 간택후궁인 명빈 김씨의빈 권씨가 있었으나 궁녀 출신인 그녀가 궁중의 일을 도맡았다는 기록이 이 사실을 증명한다. 원경왕후 사후에는 내명부를 총괄하며 내명부 상급 권한을 누렸고 많은 일을 하였다.

혹자는 태종의 정실부인인 원경왕후가 대군 4명 공주 4명을 제외하고도 요절한 자식들이 더 있기 때문에 태종이 신빈 신씨보다 원경왕후를 더 사랑했을 것이라고 몰아가는 경우가 있는데, '자식 숫자=총애'로 단순하게 판단할 수 있느냐는 차치하더라도 이건 너무 일차원적인 계산이다. 원경왕후는 40년이 넘는 기나긴 결혼 생활 중 최대 12명 가량의 자식을 낳았으나, 신빈 신씨는 그 절반인 20년만에 10명을 낳았다. 심지어 이후 더 출산하지 못한 이유는 막내딸 숙경옹주의 탄생 이후 태종이 1422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참고로 태종의 마지막 자식은 선빈 안씨가 낳은 유복자 익녕군이기에, 태종은 사망 직전까지 정력(...)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즉 신빈 신씨는 태종의 후궁으로 지내던 20년 내내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였으며, 평생 단 한 순간도 태종의 사랑을 잃었던 적이 없는 여자였다. 참고로 원경왕후와 신빈 신씨 다음으로 많은 왕손을 낳은 후궁은 바로 저 유복자 익녕군의 어머니인 선빈 안씨.
원경 왕후(元敬王后)가 돌아간 뒤, 의빈(懿嬪)과 명빈(明嬪)이 있으나, 신녕 궁주(愼寧宮主)가 항상 궁안 일을 주장하였다. 태상이 장차 천달방(泉達坊) 신궁으로 나가겠다 하므로, 궁주(宮主)가 먼저 연화방(蓮花坊) 신궁에서 〈천달방 신궁으로〉 옮겨 갔다.
세종실록》 세종 4년 4월 4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기본적으로 신녕옹주, 신녕궁주 등의 작위로 기록되었는데, 태종의 입으로 직접 말할 때는 첫째 아들인 함녕군(공녕군)의 이름을 따서 '공녕(恭寧)의 어미'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8] 당시 기사에서 태종은 강원도를 순찰할 때 신빈 신씨와 함께 다녀왔다고 언급한다. 여러모로 각별하게 총애한 셈.

2.2. 총애와 관련한 일화

1418년(세종 즉위년)에는 신효창(申孝昌)이 죄를 면하고자 함녕군을 시양자(侍養子)[9]로 삼고 그 대가로 노비 50구를 신씨에게 주었다고 하여 문제가 되었다.[10] 이때 신씨는 "전하께서는 여자의 청탁을 받지 않는다" 라고 꾸짖어 물리쳤다고 한다.

또 광대 이법화(李法華)의 아들 오마지(吾麿知)가 사신을 따라 베이징에 가고자 무수리 내은이(內隱伊)와 그녀의 오빠 봉길(奉吉)을 통해 신씨에게 뇌물을 주려 한 일도 있었다.[11][12]

이전 버전에서는 신빈 신씨가 뇌물 청탁 구설수에 올랐지만 처벌 받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는데, 신빈 신씨는 애초에 해당 사건에서 잘못한 점이 하나도 없기에 벌을 받을 이유가 없는 게 당연하다.(...) 죄인은 뇌물을 주고받은 오마지와 봉길, 그리고 거짓말을 한 내은이였고 이들은 당연히 처벌을 받았다. 애초에 아무리 애첩이라도 뇌물 사건에 연류되었으면 천하의 이방원이 그냥 넘어갔을 리가...

아무튼, 이렇게 태종의 넘치는 총애를 받은 최애 후궁임에도 본처인 원경왕후와 불화가 없이 무난한 관계를 이어간 점이나 훗날 사후 세종대왕과도 매우 친밀했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하면 여러 모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처세를 잘한 듯 싶다.

2.3. 말년

의빈 권씨와 신녕 궁주 신씨가 임금에게 계하지 아니하고,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후궁들이 서로 경쟁하여 머리를 깎고 염불하는 기구를 준비하여, 아침 저녁으로 불법을 행하였는데, 임금이 금하여도 되지 아니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4년 5월 20일

1422년(세종 4) 태종이 승하하자, 의빈 권씨와 함께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세종도 이러한 뜻을 꺾을 수 없었다.[13]

또한, 신씨는 태종을 위해 금으로 법화경을 옮겨 적고자 하였는데, 세종은 궁인을 시켜 사경하는 도구를 준비하게 하고, 승려 정순(正恂)에게 명하여 청룡사(靑龍寺)[14]에서 일을 맡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비판받자 세종은 "나는 본래부터 옳지 못한 것으로 아나, 그의 원함이 정중하여 중지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15]

1423년(세종 5)에는 태종을 위해 복을 빌려고 하자, 세종이 문소전(文昭殿)의 불당(佛堂)에 금으로 불경을 쓰게 하였다.[16]

2.4. 사망

1435년(세종 17년) 사망하였는데 세종은 그녀가 서모였지만 국모에 준하는 예우를 해주었다. 상장을 갖추고 친히 군신을 거느려 예로써 조문하였으며 수의도 하사하였다.[17]

능원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산 41번지에 있다.

2.5. 추증

1872년(고종 9) 신빈(信嬪)으로 추증하였다.

3. 대중 매체


천하의 태종 이방원의 총애를 말 그대로 독차지한 후궁이지만, 창작물에서는 공기 비중이다. 아무래도 애증의 원경왕후, 그녀의 모진 학대를 받으면서 드라마틱한 삶을 산 효빈 김씨에 비해 신빈 신씨는 이렇다 할 배경도 없고 우여곡절도 없었기에 재미가 없다(...) 대부분 대체역사, 가공인물 중에서 태종의 찐사 롤에 신빈 신씨를 대입해서 상상하는 경우가 많다 (육룡이 나르샤의 분이 등)

용의 눈물에서도 등장한다. 배우는 조승희. 후궁 중 가장 총애를 받았던 것과는 정반대로 여기서는 등장한 후궁 중 가장 비중도 존재감도 적다. 아예 나오지도 못한 후궁들보다야 낫겠지만. 참고로 후에 효빈이 되는 원경왕후의 몸종 덕실이 초반에는 '덕실(신빈)'이란 자막을 달고 나왔는데, 처음에는 기록대로 원경왕후의 몸종이 총애를 받아 신빈이 되는 것으로 기획했다가 어느 순간 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 역사와는 달리 원경왕후와는 관계없이 상궁 신분으로 태종의 승은을 입는 것으로 나온다. 참고로 원경왕후는 태종이 신씨에게 손을 댔다는 것을 알고 당연히 노발대발하고, 신씨 역시 원경왕후의 악명을 익히 들어 전전긍긍하지만, 불똥이 튈 겨를도 없이 얼마 후 태종이 노씨 성의 나인[18]과 하룻밤을 보내자, "아니 효빈이나 선빈도 아니고, 저번에 그 신상궁이란 아이도 아니고, 뭐? 나인?"이라며 아예 화를 낼 기력도 없이 기가 막혀했다. 결국 원경왕후는 노나인을 문초하여 초주검을 만들면서 신빈은 무사할 수 있었다.[19]

용의 눈물의 원작인 박종화의 세종대왕에서는 원경왕후의 몸종 출신으로 입궁한 월화라는 궁녀가 태종에게 승은을 입어 신빈으로 책봉된다. 다만 아무리 늦어도 양녕이 만7살때 쯤 승은을 입었을 실제의 신빈 신씨와 달리 여기서는 세자가 책봉도 받고 가례 얘기가 나올 때쯤에 승은 사태가 터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카카오페이지의 소설 <신녕궁주전>의 주인공이며, '신아지'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정비전의 침방나인이었다가 갑자기 사라진 지밀나인 금영의 빈 자리를 채우게 되면서 태종과 정비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된다.

원경에서는 채령이라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4. 여담

새해에 세종경복궁 경회루에서 연회를 베풀고 연회가 끝난 뒤 신빈에게 술 한 잔을 올리기 위하여 중궁(中宮)에 들어갔다. 그런데 큰 상에 놓인 고기가 바깥 사람들의 작은 상에 차린 것보다 작아보여 세종은 이를 왕실에 대한 모욕이라 여겨 의전을 담당한 사련소(司臠所)의 관리들을 문초했다.

[1] 부원군파(府院君派) 12세.[2] 태종실록 36권, 태종 18년 11월 8일 갑인 6번째기사. #[3] 신빈의 아버지 신영귀의 6촌 형이 신덕왕후의 형부 신귀(辛貴)이다. 이같은 사실은 가계도에서 확인 가능하다. 출처: 『靈山寧越辛氏大同譜』, 1981(대경출판사).[4] 태종실록 36권, 태종 18년 11월 8일 갑인 6번째기사. #[5] 태종실록 27권, 태종 14년 1월 13일 무자 1번째 기사. #[6] 세종실록 15권, 세종 4년 2월 20일 정미 1번째기사. #[7] 고려 말의 영향으로 내명부 체제가 완전히 정해지기 전까지는 후궁에게 옹주, 궁주 등의 호칭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에는 보통 옹주→궁주→빈 순서로 높아졌다.[8] 세종실록 9권, 세종 2년 9월 28일 정미 1번째기사. #[9] 4세 이상의 아이를 데려다 길러 삼은 양자. 3세 이하일 때는 수양자라고 한다.[10] 세종실록 2권, 세종 즉위년 11월 13일 기미 4번째 기사. #[11] 세종실록 9권, 세종 2년 9월 27일 임진 4번째기사. #[12] 세종실록을 보면 "무수리 내은이의 형 봉길"이라고 기록되어있는데, 현재에 와서는 남자들끼리만 형이라고 부르지만 옛날에는 남녀 모두 서로 형이라고 불렀다.[13] 숭유억불의 기조가 있었으나 정업원의 존재가 말하듯 불교에 귀의하는 왕실 여성들이 많았다.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여말선초는 불교의 영향력이 강하게 존재하던 시기이니만큼 숭유억불 정책이 프로그램 입력처럼 하루아침에 뚝딱 이루어질 수 없었다. 참고로 세종의 후궁들 중에서도 세종 사후 여승이 되는 후궁들이 있었다.[14]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에 위치한 절. 현존하는 청룡사는 나중에 새로 지은 것이고, 진짜 청룡사는 터만 남아있다.[15] 세종실록 16권, 세종 4년 6월 21일 병오 3번째기사. #[16] 세종실록 21권, 세종 5년 9월 21일 기해 3번째기사. #[17] 세종실록 67권, 세종17년 2월 2일 갑진 2번째기사. #[18] 배역은 신인 시절의 하지원이 연기했다.[19] 여담으로 당대 내명부 특성상 상궁까지 올라갔다면 나이가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궁녀가 상궁이 되려면 최소 30년을 근무해야 했기 때문. 오히려 나인 신분에 승은을 입는 노나인이 나이로 보자면 더 자연스러운 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