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18:07:24

시네이드 오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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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이드 오코너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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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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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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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This Note's for You
닐 영
Nothing Compares 2 U
시네이드 오코너
Losing My Religion
R.E.M
}}}
<colbgcolor=#222><colcolor=#fff> 시네이드 오코너
Sinéad O'Connor
파일:external/media.fan2.fr/sinead-o-connor-a-souffert-de-tendances-suicidaires.jpg
본명 시네이드 마리 베르나데트 오코너
Sinéad[1] Marie Bernadette O'Connor
출생 1966년 12월 8일
아일랜드 더블린
사망 2023년 7월 26일 (향년 56세)
잉글랜드 런던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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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싱어송라이터, 뮤지션, 前 사제
장르 얼터너티브 록, 팝 록, 포크 록
데뷔 1987년 1집 앨범 'The Lion and the Cobra'
활동 1986년 - 2023년
종교 가톨릭이슬람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3. 저항 정신4. 디스코그래피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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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일랜드싱어송라이터.

2. 생애

1987년에 1집 앨범 The Lion and the Cobra로 데뷔한 싱어송라이터로서, 반골기질의 저항정신으로 유명하다. 1990년 2집 앨범 I Do Not Want What I Haven't Got에 수록한 <Nothing Compares 2 U>가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를 쳐서[2] 유명 아티스트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3]

<Nothing Compares 2 U>가 너무나도 큰 히트를 기록한 탓에 현재까지도 그녀의 대표곡으로 여겨지고 있고, 그 곡을 뛰어넘는 히트곡은 만들어내지 못했으나 꾸준한 음악 활동으로 총 10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는 혹평을 받은 앨범도, 호평을 받은 앨범도 공존하고 있고, 후술하듯 음악 활동보다는 특유의 저항 정신과 활동가로서의 모습이 대중들에게는 더 유명하기도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그녀가 음악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섹스 피스톨즈의 멤버인 존 라이든은 '몇 주 동안 그녀의 음악을 듣는다'고 밝히기도 하였고, 피오나 애플은 시네이드 오코너에게 '당신은 나의 영웅이다'라는 비디오 메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후술할 저항정신과 더불어 본인의 예민한 기질 탓인지 정서적으로 문제를 다소 겪었다. 1999년에는 아일랜드 언론인 존 워터스와 결별한 후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였고, 2007년에는 양극성장애를 앓고 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 작업은 꾸준히 해오고 있다가 2015년에는 아들 셰인의 양육권을 잃고 난 후 정서적 문제가 심해져 페이스북에 본인 가족의 문제를 상세히 설명하는 내용의 게시물을 올리기도 하였고, 2017년에는 페이스북에 "양육권을 잃은 후 지난 2년 동안 자살하고 싶었으며, 오직 내 의사와 심리치료사만이 나를 살려두고 싶어 했다"라는 내용의 비디오를 게재하기도 하였다. 이후 그녀는 텔레비전 토크쇼에 출연했으며, 의사에 따르면 시네이드는 정신 질환의 인식을 바꾸고 오명을 씻기 위해 인터뷰에 나섰다고 한다.

정서적 문제를 겪어오다가 2018년, Magda Davitt이라는 이름으로 <Milestones>라는 새 음악을 발표하고 투어 일정 또한 발표하였으며, 2021년에는 어려운 어린 시절, 정신 건강 문제, 그리고 대중 음악에 대한 그녀의 주목할 만한 공헌을 정리한 회고록 <Rememberings>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의 정서적 문제를 딛고 극복하는 듯 했으나 2022년, 자신이 그토록 아꼈던 17살 셋째 아들 셰인이[4] 1월 6일 실종되었다가 7일 자살로 사망한 채 발견되어 아들을 잃는 참척의 고통을 겪게 된다. 이후 시네이드 오코너는 SNS를 통해 '나는 아들을 따라가겠다, 난 더 이상 살 자격이 없다'는 글을 남겼으며 실제로 자살기도까지 했던 것으로 밝혀져 더욱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자살기도 이후 경찰의 도움으로 입원을 했다고 밝혔고,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는지 SNS 활동도 하였으나 2023년 7월까지도 '아들은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아들이 떠난 이후로 좀비처럼 살고 있다'며 여전히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떨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살로 세상을 떠난 모든 아이들의 어머니께'라는 말을 담은 음악 게시물#을 끝으로 SNS 갱신이 없다가, 결국 2023년 7월 26일, 향년 56세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인은 만성 폐쇄성 폐질환천식이다.

시네이드 오코너의 장례식은 그녀의 고향에서 이슬람식으로 진행되었다. 장례식은 이맘 우마르 알 카드리가 주관했다. 그는 추도사에서 "한 세대의 젊은이들을 감동시키는 목소리를 타고난 그녀는 그녀의 이세계적인 공명으로 청중을 눈물 흘리게 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묘비에는 영어와 함께 아랍어가 새겨졌다.

3. 저항 정신


오코너의 대표곡인 <Nothing Compares 2 U>의 뮤직비디오.

시네이드 오코너의 트레이드마크는 단연 삭발이라는 파격적인 머리 스타일인데, 음악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있어 아름다운 외모는 방해가 되고, 성상품화 또한 반대한다며 삭발하였다.

페미니스트로서 오랫동안 목소리를 내왔고, 저항정신에서 비롯된 이런저런 발언 및 행동들 때문에 이제는 음악가보다 이런 쪽으로 더 유명할 정도이다. 이러한 모습들에 대해 불우했던 유년시절[5]아일랜드 민족 정서를 그 뿌리로 보는 시각도 있다.
  • 각종 공연이나 방송출연, 시상식 등의 출연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이는 걸프전을 용인하는 분위기나, 소수민족에 대한 경시, 반여성적 태도, 또는 극단적인 상업주의 등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많은 음악가들의 꿈의 시상식인 그래미 어워드에도 출연을 거부했는데,[6] 때문에 Best Alternative Music Performance 부문에서 수상했음에도 트로피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 뉴저지에서의 공연장에서 미국 국가 연주를 거부했고,[7] 공연 전 미국 국가를 연주하는 공연장에서의 공연을 거부했다.
  • 반여성주의 뉘앙스를 풍기는 출연자가 있다는 이유로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 출연 요청을 거절한 에피소드가 상당히 유명하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92년. 결국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에 출연한 그녀는 큰 사건 하나를 터뜨리게 되는데...
  • 1992년 10월 3일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에서 그녀는 밥 말리의 <War>를 부르면서 인종차별(Racism)이라는 가사를 아동학대(Child abuse)로 바꿔 불렀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진을 찢어버린 뒤, "진짜 적과 싸우자"라며 퇴장해버렸다.# 이는 가톨릭계의 아동 성추행 사건 은폐 및 각종 인권문제 은폐[8] 의혹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9] 이 일로 그녀는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에서 영구출연금지를 받았으며[10], 그 다음주에는 배우 조 페시가 찢어진 교황 사진을 붙였다면서 시네이드 오코너를 "한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제 쇼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말 운이 좋았어요. 제 쇼라면 한 대 맞을 뻔했으니까요."라고 오프닝 모놀로그에서 발언까지 했다.# 이런 와중에도 대중들은 오히려 폭력을 선동한 발언과 마돈나의 패러디를 옹호하며 시네이드 오코너를 비난하는 여론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11] 당시는 아직 카톨릭의 악명높은 아동성추행 사건이 미국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전으로, 사람들은 시네이드 오코너가 왜 이런 기행을 했는지 이해를 하지를 못하였으며, 반대로 당시엔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한 미담만이 퍼져있었다. 그러나 9년후인 2001년 보스턴의 지역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가 미국내 카톨릭 교구에서 이루어진 조직적인 아동 성추행 및 은폐사건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미국 대중들도 사태를 파악하게 되었지만, 이미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 사건은 잊어버린 뒤였고, 시네이드 오코너는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 제작진 측은 커녕 조 페시로부터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무튼 당시에 이는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고, 훗날 본인을 교회를 증오하는 가톨릭 신자라 칭했다. 한술 더 이단교파에 들어가 가톨릭에서 인정하지 않는 여성 사제 서임을 받고,[12] 나중에는 아예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 그로부터 2주 뒤 뉴욕에서 열린 밥 딜런 데뷔 30주년 기념 헌정공연에 참가. 원래 <I Believe in You>를 부르기로 되어 있었으나, 해당 사건 탓에 관중들로부터 노래를 연주하지 못할 정도로 야유가 쏟아졌다. 이에 그녀는 SNL에서 불렀던 <War>를 무반주로 절규하듯 열창한 뒤 퇴장했다. 그리고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 IRA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물론 무조건 옹호는 아니라 민간인이 휘말리는 테러는 비판했지만, 무조건 테러리스트는 아니라며 영국이 벌이는 북아일랜드 민간인 인권침해에 피의 일요일 사건도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 흑인을 절도용의자로 오인하고 사살한 경찰과 그 사건을 방관한 영국 정부를 빗대어 <Black boys on Mopeds>라는 곡으로 마가렛 대처를 비판하였다.
  • 마일리 사이러스가 Wrecking Ball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할 때, <Nothing Compares 2 U> 뮤직비디오에서 일부 모티브를 차용했고, 존경하는 가수라며 오코너를 언급했는데, 이후 마일리의 여러 행적(?)들을 알게 된 오코너는 '주위 사람들의 꼬임에 넘어가 성을 상품화하지 말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고, 이에 대해 마일리는 오코너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뉘앙스의 트윗을 날려[13] 비난을 받은 사건이 있다. 처음엔 마일리의 적절치 못한 언행을 비난하고 오코너를 옹호하는 여론이 압도적이었지만, 오코너의 과격한 대응에[14] 여론이 점차 뒤집히며 2세대, 3세대 페미니즘 간 갈등의 상징적인 사례로 남게 된다.[15]

2023년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수많은 셀럽들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는데 이에 대해 밴드 더 스미스의 보컬 모리세이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녀가 살아있었을 때, 그녀가 당신들을 필요로 했을 때는 당신들은 그녀를 응원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모리세이는 오코너와 성향이 극단적으로 반대편인데도 이런 말을 남겼다.

4. 디스코그래피

  • The Lion and the Cobra (1987)
  • I Do Not Want What I Haven't Got (1990)
  • Am I Not Your Girl? (1992)
  • Universal Mother (1994)
  • Faith and Courage (2000)
  • Sean-Nós Nua (2002)
  • Throw Down Your Arms (2005)
  • Theology (2007)
  • How About I Be Me (and You Be You)? (2012)
  • I'm Not Bossy, I'm the Boss (2014)

5. 여담

  • MBC <놀러와>에 출연한 자우림의 보컬리스트인 김윤아는, 오코너를 여성 뮤지션들의 우상이라 칭하며 개인적으로도 존경하는 아티스트라고 밝혔다. 오코너의 곡인 <Nothing Compares 2 U>를 직접 키보드를 치며 부른건 덤.
  • 2015년. 첫째 제이크가 아들을 얻으면서 48세의 나이로 할머니가 되었다. 본인은 이를 매우 기쁘게 생각하여 페이스북에 손주를 안고 찍은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허나 손주를 얻은 기쁨도 잠시 아들에게 큰 병이 생겨 모든 공연을 취소했다.
  • 2017년부터 이름을 Magda Davitt으로 바꿨다.#
  • 2018년 현재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이름을 Shuhada' Davitt으로 변경하였다.
  • 과거 90년대에 노엘 갤러거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노엘이 첫부인인 멕 매튜스와 결혼하기 전이었다고 한다.
  • 코너 맥그리거가 그녀의 팬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UFC 189에서 코너가 입장할 때 그녀가 코너의 등장곡인 'Foggy dew'를 현장에서 불러주었다.


[1] 아일랜드어 발음은 장음 때문에 "시네이드"[2] 1990년 빌보드 핫 100 1위, 1990년 빌보드 연말 차트 3위.[3] 그런데 정작 그 곡은 프린스의 곡을 리메이크해서 부른 것이라는게 아이러니하다.[4] 참고로 자식이 넷인데 전부 아버지가 다르다. 셰인은 도널 러니에게 얻은 아들인데 양육권을 셰인의 친부에게 빼앗겼다.[5] 빈민촌에서의 생활, 부모의 이혼과 폭력, 수녀원 보호시설에서의 성장 등.[6] 신인이던 1989년엔 그래미에서 공연을 한 번 하긴 했다.[7] 이는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비판받았다.[8] 대표적으로, 영화로도 제작된 막달레나 수녀원 사건이 있는데, 오코너 본인도 막달레나 수녀원에 살았던 적이 있다고 한다.[9]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의 아동 성범죄 문제와 인권문제는 정교유착 문제까지 얽혀서 특히 악명이 높았다. 이 때문에 한때 폴란드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신실한 나라 취급받던 아일랜드 가톨릭 교단은 동성결혼과 낙태가 합법화되는 와중에도 목소리 하나 못 낼 정도로 영적 권위를 잃은 상황[10] 덧붙여서 임진모가 밝히길, 이 사건 이후로 기독교 계열 라디오 채널에서 그녀의 곡들이 전부 금지되었다고 한다.[11] 1993년 1월 16일 SNL에 출연한 마돈나는 미성년자와 불륜 스캔들을 일으킨 조이 부타푸오코의 사진을 찢으면서 "진짜 적과 싸우자."라고 패러디했다.#[12] 가톨릭에서는 세례 받은 남자만이 거룩한 서품을 유효하게 받는다.(가톨릭교회법 제1024조).[13] 시네이드 오코너는 양극성장애로 많은 고생을 했는데 이를 들먹인 것. 또한 문제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사진 사건도 언급하였다.[14] 창녀(prostitute), 바보같은(F**king Stupid), 반 여성적(Anti-Female), 등등의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하지만 정작 마일리 역시 페미니즘과 LGBT를 대변하는 인물이라는 게 아이러니.[15] 오코너는 여성적인 모든 것을 거부하는 전형적인 2세대 페미니스트이고, 마일리는 자신의 선택을 중요시하는 3세대 페미니스트였기에, 오코너는 이런 마일리를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