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6 04:01:25

레이테 만 해전/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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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레이테 만 해전
1. 해전의 경과2. 팔라완 해로3. 시부얀 해전
3.1. 개전 이전3.2. 일본 항공대의 선공3.3. 미 해군 3함대의 무사시 공습
4. 홀시의 북상
4.1. 34 임무부대의 편성4.2. 오자와 지사부로 함대의 출현과 홀시의 북상4.3. 미 함대 참모진의 우려
5. 수리가오 해협 해전
5.1. 별동 함대의 출격5.2. 죽음의 돌입5.3. 미군의 습격5.4. 최후의 전함간 포격전5.5. 일본 함대의 퇴각5.6. 기타
6. 엔가노 곶 해전
6.1. 홀시의 추격6.2. 엔가노 곶의 항공전6.3. THE WORLD WONDERS6.4. 홀시의 복귀
7. 사마르 해전
7.1. 구리다 함대의 필리핀해 진출7.2. 양측 함대의 전력 비교7.3. 전투 시작7.4. 전투 전개
7.4.1. 미 해군 파일럿들의 분전7.4.2. 미 해군 구축함 및 호위구축함들의 분전7.4.3. 야마토의 이탈7.4.4. 미 해군 호위항공모함들의 포격전
7.5. 일본군은 왜 고전했는가?7.6. 구리다 턴7.7. 카미카제7.8. 미 해군의 피해
8. 1차 다호 작전

1. 해전의 경과

파일:attachment/레이테 만 해전/MAP.jpg
붉은색: 일본 제국 해군 연합함대, 검은색: 미합중국 해군
  1. 시부얀 해전 (구리다 VS 홀시)
  2. 수리가오 해협 해전 (니시무라, 시마 VS 킨케이드 휘하 올덴도르프 함대)
  3. 엔가노 곶 해전 (오자와 VS 홀시)
  4. 사마르 해전 (구리다 VS 킨케이드 휘하 스프레이그 함대)[1]

2. 팔라완 해로

브루나이를 출발한 구리다 함대는 레이테 만으로 향하지만, 10월 23일 0시 16분에 팔라완 해로(Palawan Passage)에서 미국 잠수함 다터(USS Darter)에게 발각되었다. 다터는 동행하던 잠수함 데이스(USS Dace)와 함께 일본 함대를 추적했고, 새벽 5시 24분에 구리다 함대의 기함 아타고에 4발의 어뢰를 명중시킨다. 이후 다터는 중순양함 타카오에 어뢰 2발을 명중시켰고, 데이스는 중순양함 마야에 4발의 어뢰를 먹인다.

아타고와 마야는 침몰했지만 타카오는 살아남았고, 타카오를 추적하던 다터는 실수로 좌초하는 바람에 추적에 실패하고 만다. 타카오는 2척의 구축함을 호위로 대동하고 브루나이로 돌아갔다. 이후 수리받지 못한채로 싱가포르로 갔고, 같은 신세인 묘코와 함께 대공포대로 전락하게 된다.

다터의 승무원들은 전원 데이스에 구조되어 오스트레일리아로 탈출한다. 정원초과로 다터의 승무원 2명은 데이스에 들어가지 못하고 잠수함 위에 앉아서 가야 했다. 다터는 레이테 만 해전이 끝난 다음주에, 데이스와 노틸러스에 의해 처분된다.

아타고가 너무 빨리 침몰한 탓에, 구리다 사령관은 물에 빠졌다가 구축함 키시나미에 의해 구조되었다.[2] 이후 새로운 기함을 골라야하는 상황에서, 전함 야마토를 선택한다. 반면 숙련된 사령부 통신요원들은 구출되지 못했는데, 이게 엔가노 곶 해전과 사마르 해전[3]에서 전황을 바꾸는 큰 문제를 일으켰다.

3. 시부얀 해전[4]

3.1. 개전 이전

다터와 데이스가 구리다 함대를 습격하기 전, 홀시는 식량과 탄약 보급을 위해 2개(38.1, 38.4)의 항모 전단을 울리히로 돌려보낸 상태였다. 하지만 다터로부터 일본 함대와의 접촉 보고를 받자, 홀시는 항모 전단의 복귀를 지시한다. 하지만 유일하게 정규 항공모함을 3척 보유하고 있어서 3함대의 최고 주력이었던 38.1 임무전대는, 지휘관인 매케인 제독의 재량으로 홀시의 허락을 받아, 레이테 만으로 복귀하지 않고 울리히로 갔다. 이 덕분에 미군은 압도적인 항공 우세에도 불구하고 석연찮은 전과+찜찜한 승리를 거두게 된다.

10월 24일 오전 8시에 구리다 함대는 3함대가 사방에 뿌린 미국 정찰기에 발각되었다. 홀시는 38.1 임무전대의 복귀를 재차 명령하고는, 남은 3함대의 3개 항모 전단을 총동원해서 구리다 함대를 공습한다. 하지만 공습하기에 최적인 위치에 전개되었던 38.2 임무전대의 항공 세력은 에식스급 항공모함 인트레피드[5] 1척과, 2척의 경항모 뿐이었다.

3.2. 일본 항공대의 선공

일본의 오니시 다키지로 일본 해군 중장은 루손 섬의 항공대에 명령하여, 구리다 함대를 지키기 위해 홀시의 3함대를 공습하도록 지시한다. 미 3함대의 38.3 임무전대가 이 공습을 저지하였으나 50~60대의 항공기로 각각 구성된 3차례의 공습을 모두 저지하는데에는 실패하였다.

인디펜던스급 경항공모함 프린스턴(USS Princeton, CVL-23)은 9시 38분에 폭탄에 맞고 화재 진화 중 15시 23분에 탄약고 폭발로 침몰한다.

클리블랜드급 경순양함 버밍햄(USS Birmingham, CL-62)이 프린스턴의 화재 진화 중 폭발에 휘말려 손해를 입어 2개월 정도 전선에서 이탈하게 된다. 프린스턴이 유폭할 때 버밍햄을 덮친 화염이 갑판에 나와 있던 버밍햄의 함장에게 화상을 입혀 결국 사망하였으나, 함장은 '배를 버리지 말라'는 명령을 남기고 죽었고 승조원들은 필사적으로 배를 수습해서 살아 돌아간다.[6]
파일:USS_Princeton_(CVL-23)_burning_on_24_October_1944_(80-G-287970).jpg
파일:USS_Birmingham_comes_alongside_the_burning_USS_Princeton.jpg
<rowcolor=white> 피격당한 프린스턴 버밍햄이 불을 끄고 있었으나..
파일:800px-USS_Princeton_(CVL-23)_1944_10_24_1523explosion.jpg
파일:USS_Princeton_(CVL-23)_blows_up_after_being_torpedoed_by_USS_Reno.jpg
<rowcolor=white> 프린스턴이 유폭하고, 치명타를 입은 버밍햄이 물러선다. 프린스턴이 레노의 뇌격처분으로 굉침
이후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간, 오자와 함대도 38.3 임무전대를 공습한다. 하지만 항공대의 공습 때문에 미군 함재기들의 대공 초계가 매우 삼엄했고, 오자와 함대의 함재기들은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한다. 필리핀 해 해전 이후 파일럿의 숙련도는 더욱 떨어져 있었고, 오자와는 공격대 발진 직전 모함 귀환이 여의치 않으면 필리핀 지상기지에 착륙한 뒤 보고할 것 이라는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부분의 일본군 함재기들은 아군의 도움을 더 빨리 받을 수 있는 루손섬의 항공대 기지로 도망가야 했다.

루손섬의 항공대와 전투를 벌이느라 담당 영역의 정찰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38.3 임무전대는, 바다로부터 날아든 적 항공기가 온 방향으로 정찰기를 뿌린다.

3.3. 미 해군 3함대의 무사시 공습

파일:HLMNNPZ-1-1.jpg
<rowcolor=white> 가운데 있는 배가 공습당하는 무사시, 무사시 우측 뒷편에 보이는 배는 구축함이다.
미 해군 역시 항공기로 구리다 함대를 공습했다. 전술한 38.2 임무전대의 첫 공습이 10월 24일 오전 10시 27분에 나가토, 야마토, 무사시에게 쏟아졌으며, 중순양함 묘코가 대파되어 보르네오로 회항한다. 무사시는 1번 포탑 천장에 폭탄 1발, 우현에 어뢰 1발을 피탄당했지만 폭탄은 운 좋게 도탄되었고 어뢰 피해도 무사시의 덩치가 워낙에 컸던지라 별 거 아니었고 금방 복구했다.

1시간 반이 지난 후, 38.2 임무전대의 인트레피드는 한번 더 공습을 시도한다. 무사시는 큰 덩치를 자랑하는 데다, 어그로를 끌기 위해 의도적으로 함체를 기존의 일본 해군 함선보다 밝은 회색으로 조금 다르게 칠했기에 미군 함재기들은 무사시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게 된다.
파일:6IblWzl-1.jpg
<rowcolor=white> 레이테 만 해전 참가를 위해 브루나이에서 출항하는 무사시.
확실히 다른 일본군 군함보다 색이 밝다.
[7]
인트레피드의 공습은 불발탄 1발과 엔진룸 바로 위에서 폭발한 폭탄 하나가 기록되었으며, 스팀 파이프를 파손시킨 탓에 엔진룸과 보일러룸을 포기하게 되어서 스크류 하나가 멈추게 된다. 당연히 함속이 내려갔다. 구리다 제독은 무사시를 낙오시키지 않기 위해 함대의 속도를 줄였다.

13시 31분이 되자, 38.3 임무전대의 에식스급 항공모함 에식스, 렉싱턴이 공습을 퍼붓는다. 이들의 함재기는 무사시의 양현에 어뢰 3발을 명중시켰다. 그 결과 또 다른 엔진룸이 침수되어 함속이 또 내려갔다. 다른 어뢰는 1번 포탑의 수압식 펌프를 고장내서 보조 유압 펌프로 전환하게 하였다. 무사시는 이에 대응하여 주포에 3식탄을 장전하고 사격을 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거기에 사전 경고 없이 사격을 가하는 바람에 무사시의 대공포 사수들이 주포 발사의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생존자 중 일부의 증언에 의하면 주포사격의 충격으로 인해 무사시의 주포 조준 방위판이 고장났다는 주장도 있었다.[8] 이 3식탄 발사 과정에서 1번 포탑의 중앙 포신에서 포탄이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났으며, 탄약고에서 1번 포탑으로 탄약을 올려주는 양탄기가 전부 고장나버렸다.

무사시는 이 시점에서 버티지 못하고 회항을 결정하였으나, 38.2 임무전대의 인트레피드와 38.4 임무전대의 엔터프라이즈와 에식스급 항공모함 프랭클린이 15시 25분에 네 번째 공습을 한다. 이 공습에서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들에게 3발의 어뢰를 맞고, 인트레피드와 프랭클린으로부터는 13발의 폭탄과 11발의 어뢰를 얻어맞는다.[9] 이 공습으로 무사시는 대화재가 발생하고, 좌현 함수가 물 속에 잠기기 시작할 만큼 기울어졌다. 무사시는 최고로 보수적으로 따지더라도, 4번의 공습을 통해 총 19발의 어뢰와 17발의 폭탄을 두들겨 맞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구리다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보고, 15시 30분 경에 무사시를 방패막이로 버려둔 채 함대를 반전해 도망치기 시작한다. 미군은 이걸 보고 구리다 함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고 간주했지만, 미군의 정찰기가 사라지자마자 구리다는 함대를 다시 돌려,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을 통과해 목적지로 향한다. 구리다 함대는 16시 21분 경에 만신창이가 된 무사시를 다시 지나친다.
파일:구축함에서 본 침몰중인 무사시.jpg
<rowcolor=white> 선수부가 크게 가라앉은 상태로 돌아가는 무사시.구축함 이소카제에서 촬영.
그 동안 무사시는 1척의 중순양함과 2척의 구축함의 호위를 받으며, 북쪽으로 침로를 잡고 좌현으로 10도나 기울여진채로 6노트의 속도로 항구를 향해 항해했다. 하지만 엔진에 누적된 타격이 너무 컸으며, 무사시는 해변에 좌초하기로 하지만 그 전에 엔진이 멈춰버린다. 19시 15분에 배를 버리기로 결정되었다. 2,399명의 승조원 중에서 1,376명이 구출된다. 절반 정도는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다른 절반은 필리핀 방어전에 해군 육전대로 동원된다. 그 외에 마야로부터 구출한 635명이 동승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구축함 시마카제가 대신 항구로 실어보낸다.

구리다 함대는 잠수함 뇌격으로 중순양함 2척 격침, 1척 대파의 손실을 입었고, 공습으로 전함 1척 격침과 중순양함 1척 대파의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홀시는 당장 이 전과를 확인할 도리가 없었으니, 눈앞에 보이는 프린스턴의 격침, 그것도 공습에 의한 격침이 그저 뼈아플 뿐이었다.

4. 홀시의 북상

4.1. 34 임무부대의 편성

오자와 지사부로의 함대가 발견되기도 전에, 미 함대는 구리다 함대와 니시무라 함대를 포착한 상태였다. 홀시와 3함대 참모들은 아이오와급 전함 뉴저지에 모여, 구리다 함대를 저지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한다. 여기서 34 임무부대의 편성이 결정되었으며, 윌리스 리 제독[10] 휘하에 4척의 전함, 5척의 순양함, 14척의 구축함을 편성하여 산 베르나르디노(San Bernardino) 해협을 봉쇄하고, 3함대의 항공모함과 38.4 임무전대의 항공모함의 지원을 받도록 하는 방안이 결정된다.

무사시를 향한 마지막 공습이 하늘을 날던 10월 24일 오후 15시 12분. 홀시는 이 결정을 태평양 함대 사령부의 니미츠 제독과 워싱턴 해군 본부의 어니스트 킹 제독에게 전문으로 전달한다. 7함대의 킨케이드 제독은 수신인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미 해군 지휘부의 통신병들은 누가 수신인인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신들이 수신한 모든 통신을 전부 참모들에게 전달하였기 때문에, 킨케이드 제독에게도 그 결정이 전달된다. 니미츠 제독도 동일한 결론을 내린 상태였고, 거기에 동의한다.

홀시 제독은 오후 17시 10분에 전문 내용을 요약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음성 무전을 보낸다.
IF THE ENEMY SORTIES (THROUGH SAN BERNADINO STRAIT) TF 34 WILL BE FORMED WHEN DIRECTED BY ME.
적 함대가 산 베르나르디노[11] 해협을 통해 진격할때, 내 지시에 따라 34 임무부대를 편성할 것임.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홀시는 처음 보낸 전문에서 미래형("will be")으로 표현했는데 "언제까지"라는 시간을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킨케이드는 현재 34 임무부대가 편성된 상태라고 착각했다. 그리고 전문으로 보내진 첫번째 메시와는 달리 음성 무전으로 보내진 두번째 메시지는 킨케이드 쪽에서 수신하지 못했다.

실제 34 임무부대를 편성하는 경우, 거기에 들어갈 4척의 전함은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사우스다코타, 매사추세츠, 앨러배마,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워싱턴이었다. 거기에다가 후방에 에식스급 항공모함 프랭클린과 엔터프라이즈를 포함한 38.4 임무전대가 항공지원을 하게 되므로, 구리다 함대가 제 아무리 야마토와 나가토를 데리고 온다 한들,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을 통과할 가능성은 0%였다.

4.2. 오자와 지사부로 함대의 출현과 홀시의 북상

한편 오자와 지사부로는 항공모함까지 포함한 제1기동함대 본대(미군 명칭 북방함대)를 지휘하고 있었으나, 항공전력이 부실한 상태에서 항공모함은 그저 크고 무장한 수송선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찌됐건 항공모함은 상당히 전략적인 요소였고, 진주만 공습 당시 참가해서 미국의 격침우선순위에 든 즈이카쿠도 있었다. 오자와는 이를 이용해 미군의 주력 함대를 유인하려 하였다. 전략적 가치가 없어진 아군 항모를 미끼로 미군의 항모를 꼬셔낸 뒤, 전함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수상함대가 미 육군 수송선단을 공격할 기회를 노렸던 것.

24일 11시 58분, 4척의 항공모함에서 총계 57기의 공격대가 발진한다. 하지만 루손 섬의 항공대가 38.3 임무전대를 공습하고 난 직후여서, 대공 초계가 삼엄했다. 공격대는 초계중이던 38.3 임무전대의 항공기들에게 대부분 격추되어서, 미 3함대의 수상함에게는 단 1건의 공격도 하지 못했다. 살아남은 일본 함재기들은 루손 섬의 일본군 항공대 기지로 도망갔다.

오자와 함대에게 공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은 정작 오자와 함대를 제외한 구리다, 니시무라, 시마 함대, 심지어는 16전대까지도 모두 포착한 상태였다. 정작 이들보다 먼저 포착되어야할 오자와 함대는 10월 24일 16시 40분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12] 그날 저녁, 오자와는 미군이 실수로 평문으로 송신한 통신 하나를 감청하게 되는데, 구리다 함대가 퇴각한다는 내용이었다. 자살행 특급열차를 타는 미끼 임무를 하고 싶은 의사가 전혀 없었던 오자와 역시 그를 핑계삼아 해질 무렵에 도망가기로 결정하고, 미끼 역을 위해 남쪽으로 전개시켰던 이세급 전함 2척을 불러들였다.

한편 해가 진 직후의 20시, 연합함대 장관인 도요타 소에무 제독이 구리다 함대에게 돌격을 재촉하는 무전을 발신한다. 이 무전은 오자와 측에게도 수신되었지만, 정작 오자와는 구리다가 함대를 다시 반전시켜 돌입을 시도했다는 것을 작전이 끝날 때까지 알지 못했다. 오자와 함대는 구리다가 퇴각했다고 판단해 북상을 계속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25일 아침 7시 12분, 38 임무부대의 공습선도기를 발견하면서 엉겁결에 미끼 역할을 완수하게 된다. 그때는 이미 미 해군의 항공모함 3개 전단에서 대대적으로 함재기를 발진시킨 상태였다.

반면, 이 시기의 홀시는 항공모함 예찬론자가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16시 40분에 북동쪽 해상에서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다수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전함 위주의 구리다 함대보다 오자와 함대가 더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하고는, 북상하기로 결정한다. 이 결정에는 공습에 경항공모함을 잃었다는 점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ENTRAL FORCE HEAVILY DAMAGED ACCORDING TO STRIKE REPORTS.
AM PROCEEDING NORTH WITH THREE GROUPS TO ATTACK CARRIER FORCES AT DAWN
공습 리포트에 따르면 중앙함대(구리다 함대)는 심한 피해를 입었음.
나는 새벽까지 3개의 항모 전단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출할 것임.

문제는, 3함대는 4개의 항모 전단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홀시는 그중 보급하고 복귀중인 38.1을 제외한 3개만 가지고 올라갈게.라고 언질한 것이지만, 킨케이드, 니미츠, 킹 제독은 전부 34 임무부대를 편성하면서 38.4를 거기에 배속시키고, 남은 38.1, 38.2, 38.3 그룹만 데리고 올라간다고 이해했다. 이 실수로 인해, 처음의 두 메시지를 받은 니미츠와 킹 조차도 홀시 제독의 의사를 잘못 받아들이게 된다.

이제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은 텅텅 빈 상태가 되었으나, 미 해군의 다른 제독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4.3. 미 함대 참모진의 우려

그날 밤, 함대가 북상하는 동안, 미 해군 3함대의 제독들과 참모들이 계속해서 이의를 제기했다. 그 중, 보급을 마치고 3함대로 복귀하던 38.1 임무전대의 지휘관 매케인 제독은 홀시의 결정에 소극적인 항명을 하기로 한다.

38.2 임무전대의 지휘관이었던 제럴드 보건 제독은 경항공모함 인디펜던스에서 발진시킨 야간 정찰기와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에 두고온 구축함들로부터 해협에 항해등이 켜진 것을 관측했다는 정보를 각각 받았다며 우려를 표했지만, 그 정보를 접수한 홀시 제독의 참모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면서 기각한다. 홀시 제독은 38.2 임무전대에 소속된 아이오급 전함 뉴저지에 승함하고 있었다.

워싱턴을 기함 삼아 38.3 임무전대에서 전함들을 이끌고 있었던 월리스 리 제독은, 오자와 함대가 미끼라는 결론을 홀시의 기함에 점멸 메시지로 전달했지만 역시 기각된다.

마크 미처 제독은 38 임무부대 지휘관이었으며, 38.3 임무전대의 렉싱턴을 기함으로 삼고 있었다. 그의 참모장이던 알레이 버크 대령과 비행단장인 제임스 플래트리도 동일한 결론을 내리고, 위험한 상황이라 생각해 마크 미처 제독을 깨운다. 하지만 홀시에게 보고했냐는 소리에 그렇다고 하니, 홀시의 성격상 본인이 필요할때나 내 의견을 들을 것이라고 답변하고는 도로 자러 갔다.

흩어서 서술하니 감이 잘 안오겠지만, 4개 임무전대 중에서 3개 함대의 지휘관 혹은 참모들이 우려를 표명한 상황이며, 38.3의 경우는 반쯤 체념한 것에 가깝다.

같은 시간, 사령부의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은 홀시 제독이 3개 전단을 이끌고 북상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라면 함대를 북상시키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렀을 거라고 했다.[13]

5. 수리가오 해협 해전

Battle of Surigao Strait
スリガオ海峡海戦

5.1. 별동 함대의 출격

10월 22일 15시, 후소급 전함 야마시로를 기함으로 하여[14] 같은 후소급 전함인 후소, 모가미급 중순양함 1번함 모가미, 시라츠유급 구축함 2번함 시구레, 아사시오급 구축함 미치시오, 아사구모, 야마구모의 7척으로 구성된 2전대, 일명 니시무라 함대(미군 명칭 남방함대)가 구리다 함대의 뒤를 이어 브루나이를 출항했다.

중순양함 나치(기함)와 아시가라, 경순양함 아부쿠마, 그리고 구축함 시라누이, 아케보노, 우시오, 카스미의 4척으로 구성된 5함대 2유격부대, 일명 시마 함대가 2차 타격 함대로 그 뒤를 이어 출항했다.

니시무라, 시마 함대의 역할은 구리다 함대와 정반대 방향에서 레이테만에 접근한뒤, 저지하는 적 해상 세력을 양쪽에서 협공하여 분쇄하고, 레이테만의 상륙함대를 일소하는데 화력을 보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구성에서 보듯이 양동함대의 성격이 더 컸다.
하지만 이들은 무선 침묵을 지나치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구리다 함대나 오자와 함대, 시마 함대와 니시무라 함대끼리의 협조체제조차도 결여되어 있었다.

5.2. 죽음의 돌입

파일:Surigao_straight.jpg
<rowcolor=white> 검은선 : 미 해군 77.2 임무전대
붉은선 : 니시무라 함대
붉은 점선 : 시마 함대
10월 24일, 미 해군이 니시무라 함대를 발견하자 38.4 임무전대의 엔터프라이즈와 프랭클린에서 함재기를 발진해, 니시무라 함대를 공습한다. 야마시로는 우현에 떨어진 지근탄이 벌지를 파손시키면서 침수가 진행되어 우측으로 15도나 기울어 결국 좌현 벌지를 침수시켜서 함의 평형을 되찾는다. 후소에는 2발이 명중했다. 한발은 캐터필트와 2개의 수상기를 부수고 다른 한발은 2번 포탑 주변을 관통해서 1번 부포의 포반원 전부를 전멸시켰다. 피격 결과 배는 우현으로 2도 기울었다. 작은 손상은 아니었으나, 일방적인 공습을 당한 것 치고는 양호했다.

하지만 미 해군 함대에게 니시무라 함대가 노출된 것은 분명했고, 항공 작전이 시작되는 새벽이 오기 전에 모든 것을 마쳐야 했다. 함대는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20시 13분, 니시무라 제독은 도요타 연합함대 장관에게 25일 새벽 4시에 레이테 만으로 돌격하겠다는 전보를 발송한다. 그러나 같은 시간, 구리다 함대는 미 3함대의 공습을 따돌리느라 지체하고 있었고, 아직도 아까전의 전장이던 시부얀 해를 지나고 있었다. 시마 함대는 그보다는 나았지만, 니시무라 함대보단 약간 늦어서 46킬로미터 정도 뒤쳐진 상태였다.

22시 36분, 니시무라 함대는 미군 어뢰정 PT-131과 조우한다. 어뢰정은 뇌격을 시도했으나, 명중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니시무라 함대를 계속 추적하며 침로와 순항속도를 보고했다. 어뢰정의 공격이 실패한 것은 니시무라 함대의 사기와 긴장감도 동시에 높였다.

이후 미군 어뢰정들은 뇌격 시도와 도주를 반복하면서 니시무라 함대를 계속 괴롭힌다. 반면, 니시무라 함대는 어뢰정들을 견제하며 최대한 빨리 레이테 만을 향해 달렸다. 그 과정에서 어뢰정 PT-130과 PT-132가 야마시로의 공격에 피해를 입는다.

10월 25일 밤 1시 5분, 후소는 좌현 전방에 함영을 발견하고 함포로 공격한다. 그러나 후소가 공격한 상대는 모가미였고, 모가미의 의무실에 있던 승조원 3명이 사망한다. 니시무라 함대를 뒤덮은 긴장감 때문에 생긴 불상사였다.

5.3. 미군의 습격

어뢰정으로부터 정보를 전달받은 제시 올덴도르프 제독은 본격적으로 니시무라 함대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우선 제일 후열에 6척의 전함들을 단종진으로 배치했다. 전함 부대의 기함 웨스트버지니아를 앞장세우고, 메릴랜드, 미시시피, 테네시, 캘리포니아, 펜실베이니아가 그 뒤를 따랐다. 미시시피를 제외한 모든 전함이 진주만 공습에서 피해를 입었고, 웨스트버지니아와 테네시, 캘리포니아는 공습으로 인한 손상 때문에 대개장을 받은 전함이었다. 특히 기함 웨스트버지니아는 전쟁 전의 지위도 그렇거니와 대개장 이후의 성능도 기함을 달만한 배였는데다가, 이게 복귀 후 첫 실전이기도 했다.

전함 앞열에는 구축함과 중순양함들을 배치했다. 적의 침로로 예상되는 우측 열에는 올덴도르프 제독 본인의 기함인 노스햄프턴급 중순양함 루이스빌을 선두로 해서 포틀랜드급 중순양함 포틀랜드, 뉴올리언스급 중순양함 미니애폴리스가 그 뒤를 따랐으며, 그 뒤를 최신예 클리블랜드급 경순양함 덴버와 콜롬비아가 따랐다. 좌측열은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보이쉬(Boise)와 피닉스, 그리고 호주 해군의 중순양함 슈롭셔[15]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구축함들은 해협 양쪽의 지형을 은엄폐삼아서[16] 뇌격을 시도하기 위해 앞으로 내달렸다.

새벽 3시가 되자 미 구축함 3척이 니시무라 함대에 뇌격을 시작했다.

3시 9분, 플레처급 구축함 멜빈이 발사한 어뢰중 1~3발이 후소의 우현에 명중했다. 후소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으며 대열에서 이탈했다. 이후 연료에 인화되어 침몰했다. 후소의 경우 불타며 두동강이 났으나, 양쪽 조각 모두 기울지 않고 가라앉았다 해서 논란이 있었다.[17] 2017년 말에 발견되어 탐사한 결과로는 어뢰에 맞은 함수 부분이 부러져서 휘어진 것으로 판명되었고, 파고다 마스트는 부러져서 사라져 있었다고 해서 증언이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여지는 듯 하다. 이후 후소는 5시 31분부터 35분 사이에 니시무라 함대의 나머지 함선들을 추격하던 순양함 루이스빌에게 추가로 포격을 받았으나, 일반적으로는 멜빈의 단독 전과로 본다. 후소의 승조원들은 아사구모에 의해 구출되었으나, 아사구모마저 격침되면서 결국 10명만이 살아남았다.

어뢰들은 후소에게만 달려든 것이 아니었다. 미 구축함들의 어뢰는 구축함 야마구모를 격침하고 미치시오와 아사구모[18]를 항해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새벽 3시 11분이 되자 플레처급 구축함 몬슨(Monssen)과 킬렌(Killen)이 추가적으로 뇌격을 했고, 1~2발이 기함 야마시로에 명중했다. 그 결과 야마시로는 느려졌고 좌현으로 기울었다. 후미의 탄약고 2개에 침수도 발생했다. 야마시로는 3시 40분에 함수 부분에 어뢰 한대를 더 맞았다.

니시무라는 함대가 입은 괴멸적인 피해에도 불구하고, 연합함대로부터 받은 명령, 즉 구리다 함대의 돌입을 지원하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계속 전진한다.[19]

5.4. 최후의 전함간 포격전

파일:bb48-Surigao-c1a.jpg
<rowcolor=white> 웨스트버지니아가 제출한 보고서에 나오는 레이더 추적 기록
점선으로 표시된 Able이 야마시로로 보이고,
지그재그 기동을 하면서 돌격하다 반전한 Baker가 모가미로 보인다.
새벽 3시 16분경, 콜로라도급 전함 웨스트버지니아가 미 전함중에서는 홀로 야마시로와 모가미를 포착한다. SG 레이더로 포착한 거리는 38킬로미터 거리였다. 올덴도르프 제독은 니시무라 함대가 구축함들에게 유린당할 때까지 기다리며, 웨스트버지니아로부터 들려오는 보고를 받는다.
파일:USS_West_Virginia_(BB-48)_firing_during_the_Battle_of_Surigao_Strait_in_October_1944.jpg
<rowcolor=white> 니시무라 함대에 포격 중인 웨스트버지니아
새벽 3시 50분, 모가미와 야마시로가 이를 악물고 20.8킬로미터 거리까지 다가오자, 웨스트버지니아는 레이더 사격통제 시스템으로 적을 조준해서 16인치 주포 8문으로 일제 사격을 시작하고, 도합 93발의 주포를 퍼붓는다. 웨스트버지니아의 주포 사격은 첫 사격부터 야마시로에게 명중했다. 이후 6척의 전함 중에서 제대로 사격한 것은 최신 사격통제장치를 갖춘 웨스트버지니아, 캘리포니아, 테네시 3척 뿐이며, 나머지 세 척은 구식 사격통제장치의 저성능 때문에 제대로 포격하지 못했다. 메릴랜드는 남들의 포격으로 일어나는 물보라를 보고 대충 포격이라도 했고, 미시시피는 마지막 순간에 적을 발견하고 일제사격이라도 한 번 해봤지만, 펜실베이니아는 대상을 찾지 못했고 사격 선상에 아군 함정이 있어서 결국 제대로 쏘지도 못했다. 덧붙여서 미시시피의 포격은 전사(戰史)상 전함이 전함에게 가한 마지막 포격이다.[20]

그 결과 이 해전은 세계 해전사에서 수상함들로만 이루어진 마지막 해전이자 전함들끼리 포탄을 교환한 마지막 해전이며 여기서 가라앉은 일본 전함 야마시로는 전함 주포에 가라앉은 최후의 전함으로 기록된다.

1, 2번 포탑으로 사격을 가하며 응전하던 야마시로는 함선의 중앙부에 대화재가 발생했으며, 4번 주포탑이 폭발했고 5,6번 주포탑의 탄약고가 침수되어 무력화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4시에 작동 가능한 모든 포문[21]을 전개하기 위해 서쪽으로 선회하여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미군 함대의 포격에 4시 4분에 큰 폭발이 일어났으며[22], 플레처급 구축함 베니언(Bennion)이 발사한 어뢰 1발이 우현에 명중해 함의 속도도 크게 느려졌다.

이후 4시 9분에 올렌도르프 제독이 아군 구축함에 대한 오사 위험을 이유로 사격을 중지하자 속력을 14노트로 높이며 좌현으로 변침해 모가미를 따라 남하하기 시작했으나 구축함 뉴콤, 앨버트 W. 그랜트, 리처드 P. 리얼리가 5km 거리에서 발사한 어뢰 중 2발이 우현 기관실에 명중하며 기관이 완전히 정지하고 말았다. 니시무라 제독은 선임 참모에게 '우리는 레이테 만을 향해 돌격, 옥쇄한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낼 것을 지시하나[23] 야마시로가 이미 통신 능력을 상실한 상태여서인지 이 통신은 구리다 제독의 주력 함대에 전해지지 않았다.

4시 17분, 어뢰 명중 이후 지속적으로 커지던 함의 경사가 45도에 이르자 함장 시노다 소장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총원 퇴함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고, 명령이 내려진 지 2분만에 야마시로는 완전히 전복되었으며 잠시 떠 있다가 함미 부분부터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24] 니시무라 제독 이하 지휘부 및 시노다 소장 이하 함 승조원 중 대다수가 전사했고[25], 생존자는 미군 구축함 USS 클랙스턴에 구조되어 포로가 되었다가 전후인 1945년 12월에 귀국한 장교 2명과 하사관 8명 뿐이었다.[26]

5.5. 일본 함대의 퇴각

포문을 연 것은 전함만이 아니었으며, 그 앞열의 순양함들도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후일에 말하기를 '360도 전 방향에서 강철이 폭포처럼 쏟아졌다'고.

모가미급 중순양함 모가미는 포틀랜드의 8인치 주포 사격에 맞아 함교와 대공사격 관제소가 대파되었고, 함장과 부장이 전사, 포술장이 직무를 대리했다.

궁지에 몰린 모가미와 구축함 시구레는 남쪽으로 도망치기로 한다. 그러나 도망치려는 와중에, 시마 함대의 기함 나치가 모가미의 우현을 들이받는다. 모가미는 수면 아래쪽의 우현에 큰 구멍이 났고, 나치의 함수에도 침수가 시작된다. 모가미는 이 충격으로 조타실에 침수가 발생했으며, 어뢰가 폭발해 모가미의 우현 엔진을 날려버린다. 그 와중에도 모가미는 안간힘을 쓰며 남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올덴도르프 제독 휘하의 순양함대와 구축함대, 어뢰정들은 잔존한 시마, 니시무라 함대를 추격하러 남하하고 있었다. 새벽 5시 30분에 포틀랜드, 덴버와 기함 루이스빌의 포격도 모가미에게 쏟아진다. 모가미는 그것을 얻어맞으며 남쪽으로 계속 도망갔다. 결국 사마르 해전이 시작되자 77.2 임무전대의 순양함들은 추격을 포기하고 태피 3을 구하기 위해 돌아간다. 모가미는 살아남은 것이다.

그러나 아침 8시 반이 되자, 운명의 여신이 모가미를 버린다. 모가미의 좌현 엔진이 파괴되었고, 배는 표류하기 시작했다. 표류한지 30분이 지난 9시 2분이 되자, 태피 1의 함재기들이 나타난다. 태피 1과 4는 태피 3을 구원하기 위해 북상하고 있었는데, 같은 이유로 수리가오 해협을 비운 77.2 임무전대를 대신하여 수색하기 위해, 짬을 내서 함재기를 띄운 것이었다. 모가미는 태피 1의 어벤저 뇌격기에게 발견되었고, 공습을 당해 폭탄 2발을 맞는다. 결국 모가미로부터 퇴함 명령이 내려진다. 시마 함대의 구축함 아케보노가 퇴함하는 이들을 수용한 다음, 모가미를 뇌격 처분했다.

새벽 3시 25분, 시마 함대의 경순양함 아부쿠마는 미 해군 어뢰정 PT-137에게 뇌격을 받아서 1번 보일러 룸이 대파되었으나, 새벽 4시 45분에 가까스로 복구해서 20노트로 도망간다. 5시 35분에 아부쿠마 역시 올덴도르프 제독의 추격함대에게 따라잡히나, 가까스로 탈출한다. 그러나 아부쿠마는 그 다음날인 10월 26일, 구축함 우시오의 호위를 받으며 수리를 위해 다피탄으로 향하던 도중, 미 육군의 폭격을 맞고 격침된다.

결과적으로, 시마 함대는 아부쿠마 한 척을 잃은 데 그쳤으나, 니시무라 함대는 시구레 한 척을 제외하고 전멸했다.

5.6. 기타

일본 해군의 함대는 올덴도르프 함대의 견고한 방어진을 뚫지는 못했다. 시마와 니시무라의 협력이 전혀 없어서, 니시무라 함대가 먼저 돌입해서 전멸한 후 시마 함대가 돌입한 것도 패인이었다. 다만 일본 해군의 전력 대부분, 특히 전함 두 척이 니시무라 함대에 집중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미 해군 전함열의 화력이 워낙 압도적인 상황이었다. 올덴도르프 함대는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소속의 2척을 포함해서 79척(이 중 주력함은 전함 6척, 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4척으로 나머지는 구축함과 어뢰정이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압도적인 전력차이다.), 이에 대해 니시무라, 시마 두 함대를 합쳐도 14척, 별도 행동중이던 시마 함대 휘하의 21구축대까지 포함시켜도 17척이었다. 시마 함대가 협력해서 같이 진입했다고 한들 돌파의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볼 수 있다.[27]

다만 당시 개량을 받지 못한 미국의 구식 전함 2척은 밤에 상대가 안 보여서 명중탄을 내는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전함 미시시피는 보이는게 없다고 그냥 멍 때리다가 교전이 끝났다고 하자 그때서야 딱 1발만 쏘고 전투를 끝내기도 했다. 6척의 전함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레이더 등의 개량을 받은 전함만이 일했던 것. 그리고 미국 함대는 함대전을 예상하지 못해서 철갑탄 수량이 상당히 적었다는 걸 감안하면, 철갑탄이 다 떨어지고 거의 고폭탄만 남은 미국 해군은 생생한 시마 함대에 보다 취약했다. 미친척하고 시마 함대가 돌격했다면 뚫고 나갔을 가능성 자체는 있었던 셈.

레이테 만 해전의 일본측의 빡빡한 시간 스케쥴이 문제라는 의견도 있다. 만약 충분한 시간과 연료[28]가 있었으면 시마와 니시무라 함대가 함께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케쥴에 맞춰서 레이테 만으로 가기 위해선 니시무라 함대가 바로 닥돌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스케쥴이 촉박했다.

시마 함대 소속이지만 별개 행동을 했던 16전대는 레이테 섬 돌입에 성공했다. 이들은 원래 구리다 함대에 소속될 예정이었다가 시마 함대로 소속이 변경된 뒤, 별도 행동을 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별도로 서술된 '1차 다호 작전'에 서술되어 있다.

수리가오 해협에선 미군에게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니시무라 함대의 돌입을 알고 나서 77.2 임무전대가 단종진으로 전개하자, 더글러스 맥아더는 올덴도르프 제독에게 전함의 포격전을 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가 거절당한다. 이후 상륙지가 위험할 수 있다는 이유로 미 육군 지휘부는 상륙함에서 전부 내려, 필리핀 내륙으로 이동된다.

6. 엔가노 곶 해전

일본어 :エンカノ岬沖海戦
영어 : Battle off Cape Engaño

6.1. 홀시의 추격

10월 24일 오후 4시 40분, 3함대 예하 38.3 임무전대는 오자와 제독의 함대 위치를 파악하고 홀시에게 보고했다. 홀시는 오자와를 때려잡으러 북상을 시작한다.

10월 25일 새벽 2시 50분, 홀시는 3 함대에 배속된 6척의 고속전함 전부를 34 임무부대로 재편성한 뒤, 윌리스 리 제독에게 34 임무부대를 맡아 오자와 함대를 쫒아 북상하라고 지시한다.[29] 홀시 제독은 일본 항공모함을 완벽하게 끝장내기 위해, 미처 제독의 공습과 함께 전함의 주포 사격을 퍼부을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 홀시는 항공모함의 전술적인 운용에 대해서는 전부 마크 미처 제독에게 위임하게 된다.

34 임무부대가 편성될 즈음 수리가오 해협 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고, 구리다 함대는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을 막 통과한 상태였다. 덧붙여서, 킨케이드 제독으로부터 첫 지원 요청 무전이 온 것은 이보다 50분 전인 새벽 2시, 수리가오 해협에서 교전이 벌어질 것이 분명할 때였다.

6.2. 엔가노 곶의 항공전

파일:Zuikaku_at_Cape_Engano.jpg
<rowcolor=white> 공습당하는 즈이카쿠(왼쪽)과 즈이호(추정. 오른쪽).
좌측 하단에 즈이카쿠를 향해 급강하 중인 SB2C 헬다이버도 있다.
25일 새벽 미해군 3함대는 180대의 항공기를 발진시켰다. 먼저 발진한 공습 선도기는 7시 12분에 이미 접적보고를 올린 상태였다. 미 해군 함재기 편대는 아침 8시에 오자와 함대의 상공에 도달한다. 전투기들은 항공 초계중이던 30여대의 일본기를 전부 격추했고, 급강하 폭격기와 뇌격기들은 공습을 진행한다. 그날 저녁까지, 3함대는 오자와 함대를 상대로 527 소티를 기록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owering_the_flag_on_Zuikaku.jpg
파일:attachment/LASTBANZAI.jpg
<rowcolor=white>퇴함 도중 마지막 경례를 하고 있는 즈이카쿠의 승조원들퇴함 도중 마지막 반자이를 외치는 즈이카쿠의 승조원들
홀시의 3함대는 엔가노 곶에서 오자와 함대와 교전에 들어가 큰 피해없이 항공모함 즈이카쿠, 경항공모함 즈이호, 치토세를 격침시키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즈이카쿠는 연합함대와 오자와가 예상했듯이, 홀시가 북상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중 하나였으며, 항공모함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많은 7발의 어뢰와 9발의 폭탄을 흠씬 두들겨 맞고 좌현으로 전복된 뒤, 출격 열흘 전에 제독으로 진급한 함장, 카이즈카 타케오와 842명의 승조원들의 시신과 함께 가라앉았다. 진주만 공습에 참가한 6척의 일본군 주력 항모들 중 미드웨이 해전 때 가라앉은 아카기, 카가, 히류, 소류, 이후 필리핀 해 해전 때 가라앉은 쇼카쿠를 빼고 마지막인 즈이카쿠가 가라앉음으로써 일본 항공전대는 사실상 붕괴됐다.

그 외에도 3함대는 구축함 아키즈키를 격침시키고, 경항모 치요다쿠마급 경순양함 타마를 대파시켰다.

타마는 이스즈의 호위를 받으면서 퇴각하였으나, 이스즈는 치요다를 구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탈한다. 이후 구축함 시모츠키가 함께하나, 시모츠키 역시 즈이호를 도우라는 명령을 받고 이탈한다. 타마는 홀로 오키나와로 향하다가 미군의 발라오급 잠수함 잘라오에게 발견되었고, 뇌격을 받아 격침되었다. 잘라오는 이것이 첫 출동이었고, 타마의 생존자는 한 명도 없었다.

치요다는 2번째 공습이 끝난후 휴가가 견인하려고 하였으나, 세번째 공습으로 포기한다. 이후 이스즈가 3번이나 승조원들을 구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계속되는 미군의 공습을 피하다가 이스즈 역시 공습에 손상을 입고 말았다. 이스즈는 남을 돕기에 앞서 스스로를 구해야할 상황이 되었고, 치요다로부터 승조원들을 구출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이후 치요다는 북쪽으로 느리게 도망가다, 듀보세 제독이 이끄는 미 해군 추격함대의 공격으로 생존자 없이 격침되었다.

이제 오자와 함대에는 항공전함 휴가, 이세, 그리고 경순양함 오요도와 이스즈, 그리고 구축함 8척이 남았다. 오자와는 기함을 침몰한 즈이카쿠에서 오요도로 옮긴뒤 철수했다. 홀시의 3함대를 끌어낸다는 미끼 작전은 성공했고, 작전 성공을 구리다 함대에 무전으로 알렸으니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자와의 기대와는 다르게, 그 무전은 구리다 함대에 끝내 전해지지 않았다.

6.3. THE WORLD WONDERS

일반적으로는 니미츠 제독이 보낸 제목의 메시지가 유명하나, 사실 하나만 보낸 것이 아니다.

킨케이드 제독은 수리가오 해협 해전이 시작되는 25일 새벽 2시에 3함대를 처음으로 호출해서, 3개 항모 전단을 꼭 싹 끌고가야 했는지 애걸복걸한다. 이 당시만 해도 킨케이드는 34 임무부대와 38.4 임무전대가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을 방어하고 있는 줄 알았다.

새벽 3시~4시 즈음에 수리가오 해협 해전이 끝나자, 킨케이드 제독은 홀시 제독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낸다. 7함대의 77.2 임무전대에 소속된 전함들이 교전을 했으며, 그 결과 탄약이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애걸복걸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홀시는 7함대 세력이 막강한데 뭐가 문제냐 라는 반응을 보였다. 덧붙이자면 77.2 임무전대는 니시무라 함대를 괴멸시킨 이후에도 탄약이 부족한 상황이 전혀 아니었지만,[30] 홀시가 이 사실을 알 도리는 없었다. 정리하자면, 두번째 메시지는 킨케이드 제독이 엄살을 부린 것.

25일 아침 6시 45분을 기점으로 사마르 해전이 벌어지자, 태피 3의 아수라장으로부터 온갖 무선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킨케이드 제독은 원래의 평서문에 더해, 문장을 점점 더 간략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보내기 시작한다.
"My situation is critical. Fast battleships and support by air strikes may be able to keep enemy from destroying CVES and entering Leyte.
내 상황이 위급하다. 고속전함과 항공지원이 있다면, 적이 호위항공모함을 파괴하고, 레이테에 진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8시 0분에 킨케이드 제독이 보냄.
홀시는 이 호출문을 듣고 깊게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홀시는 오전 10시 이전까지 킨케이드 제독의 메시지를 하나도 전달받지 못했다고 변명했다.[31] 그러나 이후 38.1 임무전대의 지휘관인 매케인 제독이 자신은 이 메시지를 받았다고 폭로했고, 후에 홀시는 킨케이드가 곤경에 처한건 알았지만, 야마토같은 게 튀어나와서 근거리에서 호위항공모함에게 주포를 쏴대는 어마무시한 상황씩이나 될 줄은 몰랐다고 변명했다.
Fast Battleships are Urgently Needed Immediately at Leyte Gulf
레이테 만에 고속 전함이 긴급하게, 즉시[32] 필요하다.
8시 22분에 킨케이드 제독이 보냄.
Need Fast Battleships and Air Support
고속전함과 항공지원이 필요함.
9시 5분에 킨케이드 제독이 보냄.
4 Battleships, 8 Cruisers Attack Our Escort Carriers
전함 4척, 순양함 8척이 아군의 호위항공모함을 공격중
9시 7분에 킨케이드 제독이 보냄.
여기까지 다다르자, 니미츠 제독은 더 이상 상황을 좌시할 수 없었고, 홀시에게 34 임무부대의 위치를 묻는 식으로 완곡하게 의사를 표명하고자, 아래와 같이 메시지를 보낸다.
TURKEY TROTS TO WATER
GG[33]
FROM CINCPAC
ACTION COM THIRD FLEET INFO COMINCH CTF SEVENTY-SEVEN
X[34]
WHERE IS RPT WHERE IS TASK FORCE THIRTY FOUR
RR[35]
THE WORLD WONDERS

해석을 막기 위한 더미 문자
태평양 함대 사령부로부터
수신인 : 3함대 지휘부, 해군장관,[36] 77임무부대[37]
어디 있는가, 반복한다.[38] 34임무부대는 어디 있는가.
해석을 막기 위한 더미 문자

위의 메시지가 홀시에게 전달될 때는 기가 막히게도 아래와 같은 문장이 되어 있었다.
WHERE IS RPT WHERE IS TASK FORCE THIRTY FOUR THE WORLD WONDERS
어디 있는가, 반복한다. 34임무부대는 어디 있는가. 온 세상이 알고 싶어한다[39]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인고 하니, 통신을 보낼 때는 도청 방지를 위해 아무 문구나 집어넣어서 보내게 된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듯이 문장에서 어떤 문구는 고정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수신인이 그렇고, Yours sincerely같이 예의상 붙이는 관용어구가 그렇다. 그리고 미국은 일본의 외교 암호를 해독할 때 같은 방식으로 공략에 성공했다. 그 문제의 문구는 덴노헤이카 반자이. 추축동맹 독일 또한 하일 히틀러를 써넣다가 에니그마가 해독되어 영국한테 털렸다.

그런데 하와이의 통신장교가 체스터 니미츠의 전문을 보내면서 하필 온 세상이 알고 싶어한다라는 문구를 넣은 것이다. 이 문구는 발라클라바 전투의 경기병대의 돌격을 다룬 테니슨 경의 시구이며, 마침 그 날이 경기병대의 돌격 기념일이라 해당 문구를 골랐던 것이다. 이를 기함인 전함 뉴저지의 통신요원들이 번역하면서 뒤의 더미 문구를 통신 주문에 그대로 붙여버린 것이다. 결국 실제로는 니미츠가 보낸 내용이 아니었지만 홀시의 입장에선 자신은 이전에 니미츠가 어려울 때 그를 도와준 바 있는데 이제 와서 본인이 큰 실수를 하자 니미츠가 졸지에 이를 조롱하는 문구를 보낸 셈이 되었다.

홀시는 입으로 이 문구를 다 읊으며 읽었다고 하는데, 마지막 문장을 읽자마자 항공모함 갑판에 자신의 모자를 내동댕이치고는 분노의 괴성을 지르며 니미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나서는 그 자리에서 흐느꼈다. 멘붕한 것이다.[40] 그의 참모장이었던 로버트 카니 제독[41]은 홀시 제독 앞에 마주 서서 홀시 제독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고는 그만 진정하라고 말린다. 홀시는 그제서야 이성을 찾았지만, 오자와 함대를 격멸하겠다는 목적을 바꾸진 않았다. 3함대는 이후로도 1시간 동안 더 북상하며 오자와 함대의 잔존 함정을 추격한다.

결국 홀시는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38.1 임무전대에게 구원을 명령한다. 하지만 38.1 임무전대의 지휘관 매케인 제독은 이미 새벽에 3함대와 합류하는 침로가 아닌 7함대 사이의 어중간한 침로를 타면서 물타기를 하고 있었고, 8시 0분의 킨케이드 제독의 메시지를 받자마자 이미 독단적으로 남쪽으로 전속 항해를 시작한 상태였다. 이것이 이전 문단에서 언급한 매케인 제독의 항명 행위이다.[42]

9시 20분이 되자 구리다 턴이 시전된다. 적이 퇴각한다는 사실에 안도한 킨케이드 제독은 곧 어리둥절해서 다시 한 번 메시지를 보낸다.
Who is guarding the San Bernardino Strait?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은 누가 지키고 있는가?
10시 5분에 킨케이드 제독이 보냄.

6.4. 홀시의 복귀

11시 15분이 되자, 쪼이는데 질린 홀시는, 윌리스 리 제독이 이끌던 고속전함 위주의 34 임무부대에게 반전하여 남하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이미 구리다 함대는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을 통해 탈출한 뒤였고, 리의 고속전함 함대는 치요다와 오자와 함대의 잔존 함정에게 포격을 개시하기 일보 직전이었으며[43], 항공모함 전단의 구축함들은 남하하기 전에 2시간 반동안 급유를 해야 했다. 이렇게 뒤늦은 타이밍에 결정을 뒤집는다면, 홀시는 아무런 성과도 얻을 수 없었다.

홀시는 클리블랜드급 경순양함 산타페, 모바일, 위치타급 중순양함 위치타, 뉴올리언스급 중순양함 뉴올리언스의 4척과 9척의 구축함을 떼어 38 임무부대를 만들고, 로렌스 듀보세 제독에게 추격을 계속하도록 지시하고는, 아래의 지침을 준다.
No survivors are permitted to be rescued.
생존자 구조를 금지한다
파일:Japanese_light_carrier_Chiyoda_sinks_during_the_Battle_of_Cape_Engaño,_25_October_1944.jpg
<rowcolor=white> 38임무부대가 촬영한 치요다의 최후
리의 고속 전함 함대가 반전한 것은, 대파된 치요다와 구출되지 못한 승조원들의 최후를 아주 조금만 미룬 것에 불과했다. 38 임무부대는 홀시의 명령에 따라 경항모 치요다에서 단 한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는다.

홀시는 또한 구색을 맞추기 위해, 함대에서 가장 빠른 전함인 아이오와급 전함 '뉴저지'와 '아이오와'의 2척, 그리고 3척의 순양함과 8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34.5 임무전대를 34 임무부대에서 독립 편성하여 오스카 뱃저 2세 제독에게 맡긴 뒤, 리 제독은 나머지 4척의 전함으로 뒤따르도록 하고, 34.5 임무전대를 최대 전속으로 태피 3를 향해 남하시킨다.

어쨌거나 구리다 함대는 도망갔으므로 34.5 임무전대는 얻을 것이 없어보였지만, 치쿠마의 승조원들을 구출해서 도망가던 구리다 함대의 구축함 노와키를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에서 포착해서 격침시킨다. 노와키는 헤일스톤 작전에서 아이오와급 전함에게 추격당하고도 살아남았지만, 이번에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노와키는 추격함대의 순양함에게 포격을 맞았고, 플레처급 구축함 오웬의 뇌격을 맞아 격침당했다. 치쿠마와 노와키의 모든 승조원이 익사했다.

7. 사마르 해전

Battle off Samar[44]
サマル沖海戦

파일:Samar.jpg
붉은 선 : 2함대 1유격부대, 구리다 타케오 제독[45]
검은 실선 : 77.4.3 임무분대 (태피3), 클립튼 앨버트 프레드릭 스프레이그 제독
우측의 검은 점선 : 77.4.2 임무분대 (태피2), 펠릭스 스텀프 제독
하단의 검은 점선 : 77.4 임무전대 본대 (태피 1, 4), 토마스 스프레이그 제독[46]

7.1. 구리다 함대의 필리핀해 진출

홀시가 이끄는 미 해군 3함대가 북상하면서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이 텅 비었다. 그 덕분에 구리다 함대는 10월 25일 새벽 3시에 무사히 해협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이들은 해협을 통과한 뒤 레이테 만을 향해 남하한다.

동이 트자, 7함대의 호위 함공모함 함대인 77.4 임무전대는 항공작전을 개시한다. 임무전대 예하의 호위 항공모함 부대는 태피 1, 2, 3, 4로 세분화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항공기를 발진시키기 위해 일제히 맞바람이 부는 북쪽으로 항진하기 시작한다. 그중에서, 태피 3의 호위 항공모함 5척은 상륙한 육군을 위한 항공 지원을 준비했고, 세인트 로에서는 태피 3가 담당한 북쪽 해역의 대잠 초계를 위해 정찰기 4대를 발진시킨다. 그리고 6시 37분, 정찰기를 조종하던 장교는 홀시의 3함대[47]가 전개했을 것이라 믿은 장소에서, 일본 함대가 기동하고 있다는 보고를 올린다. 태피 3의 지휘관이던 클립튼 스프레이그 제독은 당연히 믿지 않았고, 좀 더 다가가서 확인하라고 내리 갈굼을 시전한다. 그래서 정찰기는 좀 더 다가갔고, 보고를 올린다.
I can see pagoda masts. I see the biggest meatball flag on the biggest battleship I ever saw!
파고다 마스트[48]가 보이고, 제가 본 가장 큰 전함가장 큰 미트볼 깃발이 보입니다!
- 윌리엄 C. 브룩스 소위
정찰기는 일본 해군의 전함 야마토와 수많은 수상함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구리다 함대 역시, 6시 45분에 항공모함 위주의 미해군 함대를 발견하고는, 머리 위의 정찰기에게도 대공포 사격을 한다. 정찰기가 야마토를 발견할 무렵, 구리다 함대는 태피 3의 북서쪽 방향으로 불과 3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태피 3의 견시도 이 대공 사격을 목격했다.

구리다 제독은 이 함대를 홀시가 이끄는 3함대라고 판단하고, 함재기의 공격을 받아 불덩어리가 되기 전에 항공모함을 벌집으로 만들어 수장시키기 위해서 즉각 교전에 들어갔다.

7.2. 양측 함대의 전력 비교

파일:external/www.bookmice.net/9.jpg Vs. 파일:external/www.bookmice.net/10.jpg
미 해군 태피3 전력 함종 일본 해군 구리다 함대 전력
전함 야마토급 전함 야마토, 나가토급 전함 나가토,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 하루나 총 4척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 칼리닌 베이, 세인트 로, 겜비어 베이, 화이트 플레인스, 팬샤우 베이, 킷쿤 베이 총 6척 항공모함
중순양함 타카오급 중순양함 초카이, 모가미급 중순양함 쿠마노, 스즈야, 묘코급 중순양함 하구로,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 치쿠마 총 6척
경순양함 아가노급 경순양함 노시로, 야하기 총 2척
플레처급 구축함 존스턴, 히어만, 호엘 총 3척 구축함 카게로급, 유구모급, 시마카제급 구축함 총 11척
존 C. 버틀러급 호위구축함 존 C 버틀러, 데니스, 레이문드, 사뮤엘 B 로버츠 총 4척 호위함
13척 총합 23척
127mm 29문 주포 수량 460mm 9문
410mm 8문
360mm 16문
200mm 54문
152mm 12문
127mm 66문
하지만 구리다 제독의 판단과는 달리 이 함대는 홀시와 미처 제독이 이끄는 3함대 예하 38 임무부대가 아니었다. C.A. 스프레이그 소장이 지휘하는, USS 갬비어 베이 등 호위항공모함 6척, 구축함 3척, 호위 구축함 4척 등으로 이뤄진 77.4.3 임무분대 또는 '태피3'라고 불리는 소규모 호위 항공모함 전대였다. 당시 구리다 함대와 태피3의 전력차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태피3의 모든 함정의 배수량을 합치면 야마토 한 척과 비슷했다. 그리고 구리다 함대에는 야마토를 빼고도 전함 3척, 중순양함 6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1척이 더 있었다!

7.3. 전투 시작

구리다 제독은 오자와 함대가 홀시를 꾀어내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몰랐으며,[49] 상대가 3함대의 주력 항공모함이라 생각했기에, 진형을 대공진형으로 바꾸라고 함대에 지시한다. 함대는 태피 3를 향해 전속으로 달려들면서 진형을 바꿨고, 특별한 목표를 지정하지 않은채 스스로 판단해서 적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한편 클리프턴 스프레이그 제독의 호위항공모함 함대, 태피 3는 이런 예측하지 못한 사태를 맞게 되자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생각하지도 못한 기습을 받은 데다가, 일본 전함은 코 앞에 있는데 77.2 임무전대에 배속된 미군 전함은 레이테만 남쪽 해협에 있었다. 게다가 이들 전함을 호위하는 구축함과 순양함들은 니시무라 함대와 시마 함대를 추격하기 위해 수리가오 해협 남쪽까지 내려온 상태였다. 따라서 77.4 임무전대의 다른 호위항공모함 부대가 공습을 해 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구리다 함대에 맞서 볼 만한 카드가 없었다. 그나마도 77.4 임무전대의 호위 항공모함들은 맥아더의 지상 부대를 지원하기 위한 대지상 공격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대잠 공격을 위한 항공기 무장만 갖추고 있었다.
c갬비어베이에서 촬영된 당시 영상으로 포격 시의 물기둥과 30초쯤에 연막을 치며 이동하는 구축함이 보인다.
태피3는 적을 발견하자마자 우현으로 일제히 선회해서 남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한다. 여기서 구리다가 치명적인 오판을 하는데 태피 3를 적당히 놔두고 빨리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러 가야하는데, 태피 3를 쫓아가는 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함대 지휘관이 중요한 작전 목표를 망각해버린 것.[50]

쫓기던 태피 3는 7함대의 토마스 킨케이드 제독에게, 일본 함대에 맞설 수 있는 7함대의 주력 전함 부대인, 77.2 임무전대가 전개하고 있는 레이테 만으로 철수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강력한 적을 상륙지로 끌고 들어오는 셈이었고, 니미츠 제독이 내린 기본 방침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킨케이드 제독은 상륙부대의 안전을 이유로 거절한다. 그 대신 77.2 임무전대는 니시무라, 시마 함대의 추격을 단념한 뒤 즉시 레이테 만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킨케이드 제독은 홀시의 3함대에게 구원 요청을 보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태피 3에게는 남하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수가 없었고,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내달리는 호위항모부대와, 그를 뒤쫒는 일본함대 간의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야마토와 나가토는 거대한 함포와 그 함포에 걸맞은 경험 있는 포술반의 통제를 빌어 선제 사격을 가하며 태피 3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야마토의 협차 사격[51]에 화이트 플레인즈(CVE-66)가 지근탄을 얻어맞아 기관실과 전력 계통에 손상을 입고 나머지 호위 항모에도 협차 사격이 떨어지는 대위기가 발생했다.

하지만 이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클립튼 스프레이그 제독은 침착하게 대처했다. 우선 함대를 원형진으로 재편성하며 구축함과 호위구축함은 연막을 쳐서 항모를 가리고, 때마침 동쪽 방향으로 발생한 스콜에 피신하고 연막을 스콜 주변에 뿌려서 목측식인 일본군 함선의 사격통제장치를 무력화시켰으며[52], 호위 항모는 맞바람 여부를 따지지 말고 전 함재기를 긴급발진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호위항공모함에도 일본 함대에 유효한 대함용 철갑탄이나 어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무장을 탑재하거나 교체할 시간이 없으니[53] 무장이 있든 없든 일단 전부 띄우고 보자는 것. 스프레이그의 빠른 상황판단 덕분에 단시간 내에 함재기들은 한 기의 피해도 없이 전부 무사히 발함에 성공했다. 그리고 호위항모가 보유하고 있는 함재기용 무장은 유폭의 위험이 있으니 전부 바다에 버리라는 과감한 명령을 내렸다.[54]

그렇다곤 해도 실제적인 전력 차는 너무나 확연했다. 이 때의 태피 3는 스콜과 연막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호위항모의 최고 속도가 너무 느린 탓에 곧 따라잡힐 시한부 상황이었다. 구리다 함대는 스프레이그의 호위항모부대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고, 클립튼 스프레이그는 훗날 그 때는 30분 버티면 잘 버틴 거라고 생각했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

함대의 생사가 걸린 결정적인 순간 태피 3 소속 구축함 7척 중 플레처급 구축함 USS 존스턴을 필두로 하여 존 C. 버틀러급 호위구축함 USS 사무엘 B. 로버츠, 플레처급 구축함 USS 히어만, USS 호엘로 구성된 구축함 전대가 구리다 함대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야마토의 주포탑 하나 무게가 2774톤인데 USS 존스턴의 만재배수량이 그보다 가벼운 2700톤이었다. 그런 야마토를 기함으로 한 대함대가 독단적으로 돌격한 겨우 4척의 구축함에게 대낮에 패퇴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 만큼, 이 돌격은 자살이나 다름없는 무모한 짓이었다.

7.4. 전투 전개

7.4.1. 미 해군 파일럿들의 분전

태피 3의 파일럿들은 적 함대를 공격한 뒤 레이테 만 북서쪽 타클로반에 건설한 간이 활주로로 가서 재무장과 급유를 받으라는 지침을 받고 긴급 발진한다.

급하게 발진한 함재기들 중 무장을 탑재한 기체는 소수에 불과했고, 그나마 탑재한 무장도 대부분 함정에 유효타를 먹일 수 없는 대지상 폭탄이나 폭뢰에 불과했다. 심지어 어떤 기체들은 연료나 기총 탄약조차 제대로 탑재 안 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호위항모 함재기 파일럿들은 (대함 공격 훈련을 거의 받지 못했음에도) 결사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무장을 장착한 기체는 뭘 탑재했든 간에 최대한 타격을 가하기 위해 폭격을 개시했고, 그 와중에 중순양함 스즈야가 육상공격용 폭탄을 지근탄으로 얻어맞고 엔진에 손상을 입었다. 무장이 없는 기체는 기총 소사를[55] 가했으며, 기총 탄약조차 다 떨어지면 일본 함대를 공격하려는 것처럼 접근하고 주변을 맴돌면서 회피기동을 강요하고 집중력을 분산시키면서 전투를 방해했다.[56]

항공 전력을 갖추지 못했던 일본 함대는 이런 속임수 공격에 더욱 혼란에 빠졌다. 함재기들은 연료가 떨어질 때까지 이런 공격과 거짓 공격을 반복한 다음 육상기지로 향했다. 착륙 과정에서 손상된 기체는 몇 있었지만 태피 3의 파일럿들은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무사히 대피하는 데에 성공했다.

또한 태피 1, 2에서도 태피 3을 구원하기 위해 함재기를 발진시켰다. 태피 2는 함재기를 발진시키기 위해 구리다 함대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북쪽으로 항진하다가 오전 8시가 되기 전에 반전하여 동쪽으로 도망간다.

7.4.2. 미 해군 구축함 및 호위구축함들의 분전

적의 압도적인 승리를 가로막고 나선 유일한 부대는, 한 줌도 안 되는 미국의 소형 군함들과 비행기들이다.
실전최강 전투기 대전 EP 6. 야마토 전함과 세기의 공중전 中.
한편 태피 3의 플레처급 구축함 존스턴(DD-557)의 함장인 어니스트 에반스명령이 내려지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돌격했다. 죽음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태피 3의 호위항모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것이다. 이를 보고 플레처급 구축함 호엘(DD-533), 히어만(DD-532) 만재배수량 2,000톤도 안 되는 '깡통 구축함'인 존 C.버틀러급 호위구축함 사무엘 B. 로버츠(DE-413) 4척이 돌격했다. 이들은 일본 순양함들의 주포 부앙각이 못 미치는 거리까지 달라붙어 5인치(12.7cm) 함포로 그나마 피해를 줄 수 있는 구조물들을 공격하고 어뢰를 쏘며 싸움을 벌였다.

선두에 선 어니스트 에반스 함장이 이끄는 구축함 존스턴은 우선 지그재그로 접근,[57] 포격을 가해 모가미급 중순양함 4번함 쿠마노의 함교를, 뒤이어 발사한 어뢰로는 함수를 날려버렸다. 이때까지 존스턴은 포탄 한 발도 맞지 않았는데 자기 체급보다 6배나 무거운 중순양함을 박살내버린 것이다. 뒤를 따르던 모가미급 3번함 스즈야는 쿠마노를 도우려고 정선하다가 존스턴이 쏜 2번째 어뢰에 피탄되고 태피 3 함재기들의 공습을 당해 폭탄 2발을 맞고 전열에서 이탈한다.[58] 그러나 존스턴도 7시 30분쯤에 주포 3발,[59], 야마토의 6인치 부포 3발을 맞아 큰 피해를 보자 스콜 안으로 숨어 수리에 들어갔다.

이때 존스턴의 뒤를 이어서 싸움판에 끼어든 배가 바로 사무엘 B. 로버츠(DE-413). 사무엘 B.로버츠는 처음에는 타카오급 중순양함 4번함 초카이를 향해 돌진했는데, 초카이도 반격을 가했으나 역시 부앙각의 사각으로 들어간 덕분에 포격은 모두 빗나갔다. 그렇게 접근하여 초카이에게 뇌격을 가한 후 곧바로 토네급 중순양함 치쿠마에 접근해서 포격전에 들어간다. 치열한 근접전 끝에 치쿠마의 8인치 포탄 6발에 5인치 포탑 중 1기를 잃었지만 나머지 5인치 포 1문으로 반격을 가해 치쿠마의 3번 포탑과 함교를 날려버렸고, 철갑탄과 고폭탄이 다 떨어지자 조명탄까지 발사해 치쿠마의 함체 전역에 화재를 일으킨다. 이후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의 14인치 포에 치명타를 입어 9시 35분에 퇴함 명령이 떨어진 뒤 30분 후에 침몰했다. 하지만 이 활약상으로 전함처럼 싸운 호위구축함(The destroyer escort that fought like a battleship)이라는 칭호를 얻었다.[60]

한편, 호엘(DD-533) 역시 공고를 정면에서 틀어막아 시간을 끌었고, 공고의 포격으로 포탑 3문과 통신이 두절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사격을 가하면서 하구로에게도 어뢰 1발을 맞추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그 뒤 중순양함[61]으로 추정되는 군함을 향해 어뢰 사격을 가하는 등 분전하였지만, 결국 포위당하여 40발이 넘는 포탄을 얻어맞고 8시 55분, 돌격을 감행한 구축함들 중 첫번째로 침몰했다.

아모스 T. 해서웨이(Amos T. Hathaway) 함장이 지휘한 구축함 USS 히어만(DD-532)은 토네급 중순양함 치쿠마에게 포격을 가하며 묘코급 중순양함 하구로와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를 향해 어뢰를 날렸고, 곧바로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에 접근해서 어뢰를 발사한다. 이 어뢰들은 전부 빗나갔지만 그 중 2발이 바로 뒤에 있던 일본 함대 기함 야마토급 전함을 향해 돌진했다. 야마토는 이 어뢰를 피하려다가 방향을 잘못 잡는 바람에 진행하는 어뢰들 사이에 끼어버렸고 그대로 전장에서 벗어나게 된다. 영문위키 나가토에 따르면 이 어뢰는 야마토와 함께 있던 전함 나가토도 전장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히어만은 혼자서 일본 최강 전함 2척을 물리친 것이다. 덤으로 하루나는 히어만의 어뢰를 피하기는 했지만 이후 전공을 올리지 못했다.[62] 즉 혼자서 전함 셋을 상대로 이긴 것이다.

이후 히어만은 사무엘 B. 로버츠와 함께 토네급 중순양함 치쿠마를 양쪽에서 포위하고 공격했지만, 일본군의 순양함들과 전함 공고, 그리고 어뢰에 쫓겨 도망가던 야마토와 나가토의 집중포화를 뒤집어쓴 끝에 포탑 하나가 날아가고 이물[63]이 침수되고 3명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히어만은 태피 2의 함재기 4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계속 포격했고, 함재기의 어뢰 1발이 치쿠마의 고물[64]을 파괴한다. 대파되어 조종불능이 된 치쿠마는 뒤이은 공습으로 침몰했고, 토네가 히어만을 잡으려고 달려들었지만 역시 공습을 당해 쫓겨난다. 구리다 제독이 후퇴명령을 내리면서 해전은 막을 내렸고, 히어만은 결사적인 돌격을 감행한 4척의 미군 구축함들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야마토와 나가토를 물리치고 최후까지 구리다 함대를 저지하여 사마르 해전을 승리로 이끈 공적 덕분에 해서웨이 함장은 해군십자훈장을 받았으며, 히어만은 미국과 필리핀 정부로부터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이 해전에서 히어만이 낸 전사자는 6명 뿐이었다.

존스턴은 때마침 드리운 스콜에 숨어서 기관부와 포탑 2개를(1번과 2번 포탑) 복구하는 데 성공했고 다시 아군을 지원하던 와중에 아가노급 경순양함 야하기가 구축함 4척을 이끌고 호위항모에 공격을 가하려 접근하자 다시 한번, 이들을 단신으로 가로막고 나섰다. 여기에 당황한 일본 함대는 급히 93식 어뢰를 발사했지만 제대로 조준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부 빗나간다. 이어진 포격전 끝에 존스턴은 2번 포탑과 엔진이 파괴되었고, 오전 9시 40분에 전원 퇴함, 10시 10분에 침몰했다.[65]

7.4.3. 야마토의 이탈

파일:ship_yamato13.jpg
<rowcolor=white> 사마르 해전 중 촬영된 야마토. 야마토 옆으로 함재기 한 대가 보인다.
야마토는 사마르 해전이 시작된 직후, 약 32,000m 거리에서 주포탄 104발을 쏘았다. 매우 빠르게 협차를 내는 등 숙련도와 전투력을 드러냈지만 여러 요인이 겹치면서 효과는 미미했다.

칼리닌 베이에서는 야마토의 포격이 거리는 정확했지만 방향과 각도가 어긋났음을 파악했다.[66] 야마토에서는 적 항모 1척의 격파를 확인하고 항모 화이트 플레인즈가 연막(흑연)을 살포하자 조준이 곤란해져 목표를 변경했다.[67]
(27분 37초부터)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었던
사마르 해전의 야마토급 전함의 명중 기록이 나온다.
야마토는 첫 함선에서 2번만에 협차와 유효타, 2번째 함선은 아예 한번만에 협차를 냈지만, 데미지를 적당히 준거 같으면 하위 함급에 뒤를 맡기고 다른 함선을 공격해서 끝마무리를 못했다. 산포계 등이 전함에 맞춰져 있어서 구축함 상대로는 너무 넓게 산포계가 형성되어 적함이 탄과 탄 사이로 빠져나가기 쉬웠던 것도 문제였다. 특히 조우한지 얼마 안 있어 미국 함선들이 연막을 내뿜고, 때맞춰 바로 곁에 생긴 스콜로 미국 함대가 피신하자 레이더가 빈약한 야마토로서는 공격하기 어려웠다.

스콜로 피하러 가는 듯 보였던 미 구축함들이 선회하여 돌격을 시작했다. 구축함들은 어뢰를 쏘아댔고 그중 히어만의 뇌격을 피하기 위해 야마토는 회피기동을 하다가 전장을 이탈하게 된다.

구리다가 야마토에 타고 있었으므로 이는 구리다가 정확한 전황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08:00 전투 상황도
파일:4Dv9WnUr.jpg
남서쪽으로 도망가는 미 호위항모와 일본의 주력함대의 상황이다.
파일:EcUW0VK.jpg
일본의 중순양함들은 호위항모에 8인치 철갑탄을 마구잡이로 쏘아댔고, 그로 인해 칼리닌 베이는 8인치 철갑탄에 피격당해 손상을 입었다.
파일:NG04ZZq.jpg
하루나는 히어만이 쏜 어뢰를 피하지만 뒤에는 나가토와 야마토가 있었다. 야마토 역시 가까스로 어뢰 사이로 피하지만, 두 전함 모두 전선을 이탈하게 된다. 이때 나가토와 하루나는 미 구축함 호엘을 빈사상태로 만든다.
파일:zu58a6S.jpg
미 구축함들이 일본 군함에 달려들어 어뢰, 함포사격을 가한다.
하구로는 호엘이 발사한 5발의 어뢰 중 1발에 피격되었고,
히어만, 레이먼드도 뒤이어 하구로에 어뢰를 발사하지만 빗나갔다.
사무엘 B 로버트는 초카이에게 어뢰 한 방에 치명타를 날렸고,
데니스는 토네를 향해 어뢰 3발을 날리지만 모두 빗나갔다.
존스턴은 일본 중순양함들에게 함포사격을 가하였다.

이 공격으로 초카이, 치쿠마, 나가토, 야마토가 대열에서 이탈해, 구리다 제독이 상황 파악을 하는 데 어렵게 만들고 결국 후퇴를 결심하게 되는 결정적인 공격이 된다.
영문위키와 일본어 위키 레이테 만 해전 모두 야마토가 구축함의 어뢰에 쫓겨서 도망쳤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설도 있다. 야마토와 나가토가 구축함대의 어뢰 회피를 위해 변침하다 조타 실수로 어뢰 항주가 끝날 동안 같은 방향으로 도망친 것이 아니라, 계속 되는 미 함재기의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뢰를 회피한 방향과 같은 방향에 형성된 스콜속으로 대피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변침에 소요한 시간은 8분으로, 긴 시간이라 할 수 없다. 이 외에도 전함 공고 또한 미함재기의 공격 받아 측거의가 파손되어 스콜속으로 대피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주장대로라면 야마토는 공습을 당하면서도 진격하는 구리다 함대의 다른 배들을 버리고, 기함의 임무까지 방기한 채 도주했다는 의미가 되고 만다. 일본군에서 가장 대공화력이 막강한 전함이 말이다.

또 다른 이설로 야마토가 어뢰에 끼어 전장을 벗어났다는 과거의 주장은 간단한 함정기동의 원리조차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전함이 어뢰 사이에 끼여 꼼짝도 못하고 항주하려면 어뢰와 전함의 속도가 계속 똑같아야 한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당시의 어뢰는 무유도 직진형이다. 어뢰는 정해진 속도대로 항주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전함 쪽은 얼마든지 속도조절이 가능하다. 양쪽의 어뢰 사이에 끼었다 하더라도 전함의 속도를 아주 조금만 줄이면 어뢰는 순식간에 앞서나가게 되고, 전함은 다시 항로를 틀 수 있는데 몇 분~몇십 분간 어뢰에 끼어서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그만 요트도 아니고 전함급 함선은 관성 때문에 속도 조절이나 방향 조절이 기민하게 이루어질 수 없고, 또한 속도를 늦출 경우 미군 전투기와 폭격기의 손쉬운 공격 목표가 된다. 즉 위의 사진에서 나오는 것처럼 선미쪽에서 옆을 스치듯이 어뢰가 접근하면 전함급 함선은 선회해서 어뢰 경로 바깥쪽으로 피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다고 속도를 빠르게 줄일 수도 없고 속도를 낮춰서도 안되므로 울며겨자먹기로 어뢰가 함선을 추월해가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당연히 야마토의 견시가 어뢰가 선미까지 올 때까지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발견했을리도 없으니, 선미에서 선수까지 추월하는 시간이 아니라 선미 후방 최소 몇 km 뒤 위치에서 선수를 추월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럼 어뢰 때문에 몇 분 정도 야마토가 전장에서 이탈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더구나 어뢰가 지나갔다고 해서 바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진행방향이나 선회 반경에 다른 어뢰나 함선이 없는지 충분히 확인한 후 진행방향을 돌려야 하는데, 말했지만 전함급 함선은 180도 턴이 말처럼 휙 이루어지는게 아니다.)

영문 위키와 일본어 위키는 모두 야마토가 구축함에게 쫓겨서 도망쳤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전술하였다시피 정확한 연구를 통해 서술된 것이 아니라 2차 대전 종료 직후에 알려진 일화들이 별다른 검증 없이 현재까지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는다. 생각 외로 레이테 해전 당시의 일본 함대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미드웨이 해전과 같은 상세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야마토가 어뢰에 끼어 도망갔다"라는 주장은 좀더 명확한 출처와 교차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야마토가 구축함의 어뢰에 쫓겨 도망가지 않았다면 히어만을 상대로 계속 싸웠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USS 히어만은 2시간이나 혈투를 벌이면서도 살아남았고 구리다 함대는 레이테 만 진입에 실패했다. 해전 이후 일본군이 구리다 턴을 시전하며 달아났으므로, 야마토는 2시간 동안 구축함과 싸우고도 승리하지 못하고 도망친 셈이다. 야마토가 구축함에게 쫓겨서 달아났다는 결과는 똑같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왜 "야마토가 구축함의 어뢰에 쫓겨서 도망갔다"는 주장이 인정받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 당시의 상식은 전함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전함뿐이며, 다른 걸로 잡을 수 있으면 그건 전함도 아니다였기 때문이다. 항공모함의 공습이나 잠수함의 뇌격도 아니고, 대낮에 구축함이 정면대결로 전함을 이기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절대다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야마토가 구축함의 어뢰에 쫓겨서 도망갔다"는 주장이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선택지가 두 개밖에 없는데, 하나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니 나머지 하나가 몰표를 받은 것이다.

다만 정말로 야마토가 2시간 동안 구축함과 싸우고도 패배해 도망갔다면 전함 역사상 최악의 대굴욕이 될 것이다. 대규모 호위 함대까지 대동한 전함'들'이, 대낮에 그것도 독단적으로 돌격한 구축함들에게 패퇴한 것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7.4.4. 미 해군 호위항공모함들의 포격전

히어만이 야마토와 싸우는 한편 공고와 중순양함 부대는 호위항모 CVE-73 갬비어 베이에 포격을 집중시켰다. 8시 15분경 갬비어 베이의 최초 명중탄은 하구로와 토네의 20.3cm 포탄이었고[68] 토네의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는 저서에서 '전함부대의 포탄은 적 항모에 화재를 일으킨 일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미국의 전사연구가 Robert Lundgren은 야마토의 포격은 존스턴에 46cm포 3발, 15cm포 3발 피탄, 호위항모 화이트 플레인즈에 지근탄으로 기관실을 파손시킨 것이 전부라고 주장했다.[69] 당시 야마토에 승선하고 있던 우가키 마토메는 전초록에서 31km 거리에서 포격으로 항모 1척을 격파 후 다른 함으로 목표를 옮겼다고 언급하고 있지만 이 항모는 지근탄으로 기관실이 파손된 후 연막을 살포한 화이트 플레인즈였고 야마토가 다른 항모를 격파 혹은 격침했다는 언급은 없다. 나가사키 사세보 해군 묘지의 공고 위령비는 항모 1척과 구축함 2척 격침을 공고의 전과로 쓰고 있으며, 중순양함과 함께 갬비어 베이를 포격하다 8시 50분경 '적 항모 1척 대화재 대폭발'을 보고하고 갬비어 베이에 사격을 중단했다. 야마토가 갬비어 베이를 명중시켰다는 주장[70][71]은 일본에서는 소수설이다. 2021년 4월 4일 필리핀 해저에서 존스턴을 발견한 탐사팀에 따르면 존스턴을 격침시킨 것은 야마토라고 한다.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들도 중과부적,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중포로 두들겨맞으며 도망치는 와중에도 함선당 한 개 달린 구경 5인치짜리 다목적포(양용포)를 가지고 열심히 응사를 했다. CVE-63 세인트 로가 구축함에 1발, CVE-68 칼리닌 베이가 묘코급 중순양함에 2발을 명중시켰으며[72], 화이트 플레인스(CVE-66)는 야마토의 지근탄으로 기관부가 손상되고 함내 전기 계통을 일시적으로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근성을 발휘하여 5인치 포의 최대 사거리에 가까운 거리에서 초카이에 무려 6발을 명중시켰다. 이때 이 6발이 산소어뢰를 유폭시켜서 초카이가 침몰하게 되었다, 즉 호위항모가 중순양함을 포격으로 격침시켰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지만, 이후 조사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초카이가 5인치 6발을 얻어맞은 것은 사실로 남았다. 초카이가 대파된 원인은 현재 전함 공고에서의 오인사격 혹은 사무엘 B. 로버츠의 뇌격으로 추정되며,[73], 이후 공습까지 당해 폭탄 2발까지 명중하며 대화재가 발생, 복구에 실패해 퇴함명령이 내려진 이후 구축함 후지나미의 어뢰를 맞고 침몰했다.

그러나 이런 분전에도 불구하고 숫자와 화력의 차이로 인해, 칼리닌 베이는 물론, 호위항공모함 팬쇼 베이(CVE-70), 호위구축함 데니스(DE-405) 등 피격당하는 함선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집중 포격을 당한 갬비어 베이는 결국 격침당하고 말았다. 갬비어 베이는 1940년 노르웨이에서 독일 해군의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에게 격침당한 영국 항모 HMS 글로리어스, 순양함 4척에게 두들겨 맞고 침몰한 치요다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에서 포격으로 격침당한 항공모함이라는 기록의 주인공이 되었다. 치쿠마, 공고, 초카이, 노시로 등 워낙 많은 일본군 군함들이 갬비어 베이에 집중포화를 퍼부었기에 상술한 대로 공고의 전과 내지는 공동격침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호위항공모함 세인트 로(CVE-63)는 이 전투 직후 카미카제 공격에 침몰하였다.

7.5. 일본군은 왜 고전했는가?

상식적으로 봤을 때, 스프레이그 제독의 함대는 구리다 함대의 적수가 될 리가 없었다. 다른 전력 다 빼고 그냥 야마토가 주포로 즈려밟기만 해도 모조리 산산조각날 수준이다. 스프레이그 제독이 30분만 버티면 다행이라고 본 게 그래서다. 이렇게 유리한데도 일본군이 패배한 이유는 무엇일까?
  • 클립튼 스프레이그 제독의 훌륭한 지휘
    절망적인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스프레이그 제독은 자신이 할 일을 다했다. 그는 일본 함대와 조우하자마자 재빨리 함재기들을 발진시켰다. 일본 함대가 코앞에 있었으므로 함재기를 무장시킬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그의 조치 덕분에 태피 3은 최소한의 대응이 가능했다. 야마토와 나가토의 포격이 시작되자 동쪽에 드리우는 스콜에 함대를 피신시키고 연막을 뿌리도록 하여 포격을 최대한 차단하였다. 또한 그는 호위항모에 실려 있던 폭탄들을 몽땅 바다에 버리라고 명령했는데, 일본 함대가 집중포화를 쏟아부을 게 분명한 만큼 이는 매우 현명한 조치였다. 적의 포격으로 폭탄이 유폭할 경우 호위항모의 빈약한 함체는 단숨에 박살날 것이기 때문이다.
  • 호위항모와 함재기들의 분전
    호위항모들은 살기 위해 미친 듯이 연막을 뿌려대고, 어뢰를 난사하고, 긴급출격한 전투기들이 폭탄을 장착하지 않았지만(중후반부에는 구축함들이 필사적으로 옆에 붙어서 폭뢰를 투하하긴 했다.) 폭격을 가하는 척 움직임을 보이고 기총이라도 난사하고, 총알이 다 떨어져도 계속 주변을 맴돌면서 시선을 끄는 등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바람에 효과적으로 제압하지 못했다. 성능 면에서 상대가 안 되는데도 최선을 다한 덕인지, 호위항모 화이트 플레인즈는 일본군의 정예 중순양함인 초카이에 몇 발의 명중탄을 내기도 했다.
  • 일본군의 레이더 부재
    일본군의 레이더 기술은 미 해군의 레이더 기술과 비교하면 거의 없다시피했으며[74] 모든 상황을 눈으로 직접 관측하는 상황이었다. 야마토와 나가토의 주포 포격은 시계가 확보된 전투 초창기에는 협차를 기록하며 호위 항모들을 압박하였으나, 스콜과 연막에 목측식 사격통제장치가 무력화된 이후에는 호위 항모에 더 이상 유효한 타격을 주지 못했다. 만약 레이더 기술이 정상적으로 개발되었다면 태피 3는 연막을 친 보람도 없이 순식간에 전멸했을 것이다.
  • 일본군의 오판
    구리다 제독은 홀시 제독과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오판을 하고 있었는데. 작전 목표가 매우 모호했고, 특히 상술한 오자와의 작전 성공여부에 대한 무전을 못 받은지라 구리다와 참모진들 남하하는 홀시나 북상하는 올덴도르프의 함대와 전투를 할 수도 있다는 심리적인 압박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태피3의 항공모함을 보고서는 스프레이그 함대를 홀시의 3함대로 착각하고 말았다. 쉽게 말해 호위항공모함을 정규항공모함으로 착각한 것이다.[75] 이런 오판 때문에 '빨리 못 잡으면 함재기가 날아와서 우릴 고깃밥으로 만들거다!'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전투 대형을 짜지도 않고(못하고) 항해하던 대형 그대로 전투를 시작했기에 압도적인 화력을 충분히 살릴 수도 없었다. 이 착각은 구리다 함대가 포에 철갑탄을 장착하고 포격을 가하게 만들었지만, 태피3의 함선들은 모두 과관통이 날 정도로 장갑이 얇아서 그냥 구멍만 좀 나고 말았다. 당장 어니스트 에반스의 USS 존스턴만 봐도 야마토의 46cm 포에 3방 맞았어도 살아 남았고, 호위항모에 명중한 포탄은 아예 관통해 버렸다. 심지어는 포탄이 신관작동으로 폭발하기도 전에 갑판과 선체를 다 뚫고 지나가서 그냥 바람구멍만 뚫리는 일이 발생했으므로 결정적인 손상을 입지도 않았다. 상대적으로 포탄이 작은 일본 해군의 중순양함들이 미군 호위항모에 더 큰 타격을 입힌 것도 이 때문이다.
    이때 일본 해군은 스프레이그 함대의 이동속도를 실제 이동속도보다 훨씬 더 빠른 30노트 이상의 속도로 추정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스프레이그 제독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내가 그때 겁먹긴 했지만 그정도로 급하진 않았다."라고 회고했다.(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의 최고속도는 20노트이고 존 C. 버틀러급 호위구축함의 최고속도는 25노트이다.)
  • USS 존스턴과 용감한 구축함들의 돌격
    USS 존스턴의 함장인 어니스트 에반스는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선두에 서서 구리다 함대를 향해 돌격했고, 구축함 호엘과 히어만, 호위구축함 사무엘 B.로버츠도 그 뒤를 따랐다. 이 돌격이 없었다면 구리다 함대는 단숨에 태피 3을 분쇄하고 레이테 만에 돌입했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침몰할 때까지 용감하게 싸운 덕에 태피 3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 USS 히어만의 전설. 그리고 야마토의 도주
    USS 히어만은 무모하게도 일본군 전함 3척을 상대로 혼자 도전했다. 일본에서는 상당한 수훈함에 속하는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 일본의 자랑이라는 16인치포 탑재전함 나가토, 그리고 세계 최대의 전함 야마토를 상대로 이것은 자살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구축함이 전함을 상대로 어뢰공격을 하기 전에 전함의 부포가 먼저 구축함을 박살내도록 설계되기 때문이고, 이걸 알기에 일본군이 뇌격전용 구축함 시마카제의 양산을 취소한 것이다. 수뢰전을 좋아하는 일본군조차도 전함 상대로 구축함이 승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히어만은 야마토와 나가토를 전장에서 쫓아냈다! 하루나는 히어만의 공격을 피했지만 이후 전과를 올리지 못했음을 감안하면, 히어만은 일본 전함 3척을 혼자 물리친 셈이다. 특히 기함 야마토가 도망가는 바람에 구리다 제독은 효과적으로 함대를 지휘할 수도 없었고, 전황 파악도 그만큼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는 야마토가 어뢰를 피한 후 다시 싸웠다고 주장하지만 제대로 싸웠다고 볼 수가 없는 게, 야마토가 제대로 싸웠으면 태피 3은 순식간에 전멸했다.
    이후에도 히어만은 일본 함대의 선두에 선 중순양함들과 격전을 벌였고 존스턴을 비롯한 동료 구축함들이 침몰하는 와중에도 계속 싸웠으며, 구리다 함대가 진격을 포기하고 후퇴할 때까지 사실상 혼자서 버티면서 전선을 유지해냈다. 일개 구축함이 전함과 중순양함들을 상대로 끝까지 버틴 것은 놀라운 일이며, 히어만이 야마토를 쫓아내는 순간 레이테 만 해전의 승패가 결정되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왜 히어만이 혼자 버텼냐 하면, 히어만을 비롯한 구축함 4척은 총알받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호위항모가 달아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나선 것이고, 구리다 함대를 상대로 이긴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히어만이 태피 3의 다른 배들과 함께 싸워서는 안 되는 입장이었다. 다른 배가 함께 싸운다는 것은 그 배가 탈출하지 못했다는 뜻이니까. 실제로 탈출에 실패한 갬비어 베이는 눈물겨운 혈투를 벌이다가 가라앉았다. 함께 싸운 구축함 3척도 용전분투를 벌이다 침몰했고, 구리다 함대를 저지할 배는 히어만 한 척밖에 안 남았다. 호위항모들이 달아날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혼자서 싸울 수밖에 없고, 호위항모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빨리 달아나면서 모든 화력을 일본군에게 퍼붓는 것 뿐이었다. 같이 싸우자며 멈추는 순간, 히어만을 포함한 구축함 4척의 희생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런데도 히어만은 결국 이겼다. 절대로 불가능한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그러니 히어만은 전설이 될 수밖에 없었다.
  • 태피 1, 2, 3의 막강한 항공전력
    일본군 입장에선 태피 3를 본대로 착각한 건 과대평가였지만, 태피 1, 2, 3의 실제 항공전력은 결코 과대평가가 아니었다. 세 부대는 총합 400기 상당의 항공기#를 날려보내는 상황이었다. 태피 3의 항공 전력은 너무 급한 나머지 제대로 무장을 장착할 시간도 없어서 큰 타격을 주지 못했지만, 태피 1, 2의 항공 전력은 당연히 제대로 된 무장으로 일본군을 타격했고 시간을 더 지체한다면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을 건 불보듯 뻔했다, 실제로도 겜비어 베이 옆에서 포격중이던 초카이는 후에 도착한 TBF 어벤저 뇌격기가 500파운드 폭탄을 전방 기계실에 명중시켜 후에 자침되었으며 치쿠마도 태피 2에서 날라온 뇌격기들이 좌우현 가릴것 없이 어뢰공격을 가한 결과 어뢰 4발을 맞고 당일 오후 2시쯤 침몰하였다[76].

7.6. 구리다 턴

"저 망할 놈들이 도망간다!!"
- 클립튼 A.F. 스프레이그 소장

구리다 함대에 (구리다)함대의 후방에서 적함대를 발견했다는 통신이 날아들었다. 실제로도 구리다 함대 후방에 38.1 임무전대가 전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38.1 임무전대의 첫 공습은 11시경에 이루어졌으므로, 9시 20분에 시전된 구리다 턴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일본쪽에서는 오보라는 이야기가 주류이다. 다만, 구리다 함대는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을 통해 도망가면서, 실제로 해당 미군 부대의 에식스급 항공모함 3척으로부터 대공습을 당했기 때문에, 옳은 판단을 했다는 확신은 들었을듯 하다.

게다가 구리다는 오자와가 3함대 본대를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오자와는 홀시의 3함대를 낚으면 무전으로 이 사실을 알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실제로 오자와 제독은 구리다 제독에게 무전을 여러 번 날렸다고 주장했는데, 공교롭게도 구리다 함대의 그 누구도 이 무전을 받지 못했다.

결국 전황도 불분명한 상황에, 오자와는 연락이 없고, 후방에 적함대가 나타났다는 소식까지 날아드니, 구리다는 함대가 포위당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함대는 철수하기 시작하고, 덕분에 위기에 처했던 태피 3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태피 3는 구리다 함대가 반전한 이후에도 계속 도망갔고, 킨케이드 제독의 지침에 따라 레이테 만에서 먼 방향으로 도망가기 위해 동진하다가, 본대인 토마스 스프레이그 제독의 태피 1, 태피 4와 랑데뷰하는 20시가 돼서야, 진짜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된다.

사마르 해전은 레이테 만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교전이었으며, 이 기회를 놓친 일본군은 승리할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반대로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근성을 보여준 한판이었다. 당장 스프레이그 제독부터 던질 수 있는 것은 문고리까지 던질 지경이라고 회상할 정도였다고 한다. 정말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기 때문에 살았던 것이다.

당시 미군 참전자들의 회상에 따르면 "이제는 진짜로 죽는구나..." 싶은 순간 갑자기 일본 해군이 퇴각하는 걸 보고 어안이 벙벙했지만, "쟤들이 갑자기 왜 후퇴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살았다!"라는 안도감이 들었다고 한다. 수병 중 일부는 포 사정거리 안에 있을때 그냥 보내지 말고 쏴서 격침시키자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구리다의 철수 명령은 후세에 구리다 턴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엄청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7.7. 카미카제

파일:USS_St_Lo_(CVE-63)_2.jpg
<rowcolor=white> 제로센의 카미카제에 맞은 세인트 로가 유폭하는 순간.[77]
구리다 함대가 퇴각하는 와중 오전 10시 13분에 호위항공모함 CVE-63 USS 세인트 로[78]카미카제 공격을 받아 화재가 발생했고 결국 오전 11시에 선원들이 배를 버리고 퇴함, 이후 침몰하였다. 세인트 로는 역사상 최초로 카미카제에 격침된 배로,[79] 세키 유키오 대위는 카미카제로 적함을 격침시킨 첫 파일럿으로 기록된다.

7.8. 미 해군의 피해

In no engagement of its entire history has the United States Navy shown more gallantry, guts and gumption than in those two morning hours between 0730 and 0930 off Samar.
(미 해군이 그 역사를 통틀어 사마르 앞 바다에서 7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 아침 2시간 동안 보여준 용맹, 배짱, 진취성보다 더한 것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사무엘 엘리엇 모리슨, 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ume XII, Leyte

돌격했던 미군 구축함들은 USS 히어만 단 한 척을 제외하고는 죄다 대파당하거나 격침당해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 USS 히어만은 전사자가 6명만 나왔지만 히어만이 구리다 함대의 전함과 중순양함 다수를 상대로 싸워 이긴 것부터가 기적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카미카제하고도 대비되는 게 이건 전적으로 아군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아예 첫 돌격을 감행한 어니스트 에반스 함장의 존스턴은 명령도 받지 않고 돌진했다. 이 행동은 일본군이 평소 강조하던 근성과 정신력과 일치했으며, 그걸 빼더라도 어찌나 용감해 보였는지 USS 존스턴 같은 경우 침몰해서 수병들이 바다에서 표류할 때는 일본 수병들이 지나가던 중 경례까지 해주었다고 한다.[80] 구출은 하지 않았지만 엄연히 일본군이 도망가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구조를 안 한 것을 비난하기는 힘들다. 상대편 해역에서 후퇴하는 경우엔 아군조차 버리고 가는 경우가 흔했다. 애초에 구조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판단했으면, 아마도 나머지 미 함대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예우를 해줬다는 이 부분은 이설도 있어서, 많은 생존자들이 일본 함대가 지나가면서 단장기총으로 자신들을 쏘았다고 회고했다. 이는 일본 해군 측에서도 공통적으로 나오는 회고이며, 다만 대부분의 배에서 함장이나 포술장이 착란과 복수심에 빠져 생존자에게 난사하는 수병들을 제지하는 식으로 중단되었다. 적어도 유키카제와 야하기 전우회에서 출간한 책에서는 일관되게 같은 이야기, 즉 수병들이 사격하는 것을 사관들이 제지하는 내용이 나온다. 두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공식적으로는 미군 수병들에게 예의를 갖추긴 했지만 소수의 수병들이 우발적으로 사격을 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태피 3의 모두가 겁먹고 도망만 다녔으면 오히려 몰살당했을 것이며, 레이테 섬에서 한참 전투 중인 미 육군도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미군과 일본군 모두 우연히 만난 상황에서 어니스트 에반스 함장이 과감하게 나서지 않았으면, 구리다가 먼저 전투 준비를 마쳤을 것이고 당연히 압도적인 화력에 하나하나씩 사냥 당했을 것이다. 과감하게 나선 2척의 구축함, 1척의 호위구축함과 호위항모 갬비어 베이의 희생, 그리고 과감하게 나선 4척의 구축함들 중 유일한 생존함인 구축함 USS 히어만과 후퇴하던 태피 3 함선들의 분전, 다른 아군 부대의 항공지원에 힘입어 살아남았다. 그야말로 생즉사 사즉생(生則死 死則生)을 제대로 보여준 셈이다.

8. 1차 다호 작전

연합함대는 5번째 양동함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1차 다호(多号)작전은 레이테 만 해전과 병행해서 실시된 작전으로, 원래 구리다 함대에 소속될 예정이었던 아오바, 키누, 우라나미의 3척으로 구성된 16전대가 이 작전의 주역이 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수송선단을 호위하여 레이테 섬의 오르목 만[81]에 진입, 레이테 섬에 증원병력을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구리다 함대가 레이테 섬의 미군 상륙함대를 괴멸시키면, 16전대가 상륙시킨 일본군 증원병력이 레이테 섬의 일본군과 함께 미군을 몰아낼 예정이었다.

그러나 10월 23일, 기함 아오바는 미군 잠수함 브림의 어뢰 공격을 받아 2번 기관실이 피격되면서 대파되었고, 16전대 사령관 사콘조 제독은 경순양함 키누를 새 기함으로 삼은 후 아오바를 마닐라로 회항시킨다.

그리고 다음 날인 24일, 16전대는 시부얀 해전에 휘말렸고, 38.3 임무전대의 에식스와 렉싱턴이 공습을 해온다. 그 결과 지근탄을 맞아 키누에서 74명, 우라나미에서 25명의 승조원이 사망한다.

그러나 16전대는 3함대가 북상한 사이에 기어코 키누, 구축함 우라나미, 수송선 5척을 거느리고 레이테 섬으로 진입하여, 사마르 해전이 벌어진 25일에 무사히 병력을 양륙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임무를 끝내고 귀환하던 중인 10월 26일, 사마르 해전의 복수를 위해 벼르던 77.4 임무전대의 호위항공모함들로부터 공습을 당한다. 키누와 우라나미, 수송선 2척이 침몰했고 사콘조 제독은 수송선 1척에 타고 귀환했다. 그러나 남은 수송선 2척은 별개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격침당했다.

그러나 16전대의 고생은 헛수고로 돌아갔다. 레이테 섬의 미군 상륙함대를 괴멸시켜야 할 구리다 함대가 임무를 포기하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리다 함대는 16전대가 괴멸된 덕에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살아남았는데, 미 해군 함재기들 중 일부가 16전대를 공격하느라 전력이 분산된 덕에 구리다 함대에게 가해진 압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레이테 만 해전이 끝난 후, 아오바는 미군 38기동부대의 공습을 받지만 살아남아 탈출한다. 대파되어 6노트밖에 못 내는데도 불구하고, 아오바는 미군 잠수함들의 뇌격을 모두 피하고 살아서 일본에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해인 1945년 7월 15일, 일본의 패망을 앞두고 미 해군의 잠수함 구조함 챈트클리어(Chanticleer)가 격침된 경순양함 키누에 관심을 보인다. 키누는 좌현 90도로 누운 상태였고, 함교 바로 뒤의 갑판에는 큰 구멍이 나 있었다. 키누의 잔해는 잠수부들이 침입하기에 최적의 상태로 놓여있었고, 미 해군의 잠수부들은 별다른 손상을 입지 않은 함교로부터 다수의 기밀문서와 4개의 암호기계를 챙겨 돌아간다.

[1] 여기서 붉은 선이 갑자기 반전을 하는데 이게 구리다 턴이다.[2] 참고로 구리다는 수영을 매우 잘했다고 전해진다.[3] 사마르 해전에서 구리다 턴이 나오는 간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이거다.[4] Battle of Sibuyan Sea[5] 뉴욕에서 기념함으로 남아있는 그 항공모함이다.[6] 이 일화는 레이테 만 해전 이후에 각 함별로 느낀 점, 개선할 점, 반성할 점을 취합하는 자리에서 버밍햄의 장교들이 제출한 것이다.[7] 파일:w201_01.jpg시부얀 해전 당시 무사시의 모습을 재현해둔 프라모델이다. 당시 일본 군함들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색이 더 밝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목재갑판이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다.[8] 거기다가 영점을 잘못맞춘 덕분에 명중탄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사실 조종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공사격이 구름 사이로 들어갔을때 날아오지 않았다는 말이 있어 레이더가 아니라 육안으로 조준했다고 봐도 될것이다.[9] 레이테 만 해전에서 야마토가 1번 주포탑 옆에 폭탄을 맞는 사진이 있는데, 이 4번째 공습에서 프랭클린의 함재기가 공격한 것이다.[10] 과달카날 전역 때 공고급 순양전함 키리시마를 털어버린 그 제독이다.[11] 뉴저지에서 통신을 보낼때, 오타를 냈다. Bernadino가 아닌 Bernardino이다. 후술할 The world wonder 건과 관련된 내용이기도 하다.[12] 일본 측의 기록에서는 24일 15시경 즈이호가 미군의 정찰기로 추정되는 항공기와 조우했다.[13] 애석하게도 스프루언스 제독은 당시 휘하에 함대가 없이 사령부와 참모진만 유지한 채 진주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5함대 사령관(사실 5함대나 3함대나 같은 함대로 사령관인 제독이 누구인가에 따라 이름만 다르게 줬을 뿐이다. 홀시가 사령관이면 3함대, 스프루언스가 사령관이면 5함대라는 식으로 구성원은 똑같았다.)으로서 홀시와 동격의 제독이였고, 필리핀 해 해전에서 연합함대를 끝장내지 못했다는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었으며 자신도 지나가는 말처럼 언급한 바람에 그의 말에 신경쓴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14] 원래는 나가토도 2전대에 소속되어 기함역할을 할 예정이었으나 취소되었다.[15] 원래 영국 해군의 런던급(카운티급 중순양함의 하위 함급)인데, 사보섬 해전에서 호주 해군의 중순양함 캔버라가 격침되자, 영국 국왕인 조지 6세가 동형함인 슈롭셔를 선물로 주었다. 원래는 이름도 캔버라로 개명하려 했으나, 침몰한 캔버라의 전과를 기념하기 위하여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건조 중이던 볼티모어급 중순양함 USS Pittsburgh의 함명을 캔버라로 변경한 점, 슈롭셔 지역은 이 배 말고는 해당 지역의 이름을 딴 배가 없던 관계로 개명에 반발이 있었던 점 등으로 인하여 함명 변경 없이 슈롭셔로 호주 해군에 가게 된다.[16] 그림자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과 일본군 모두의 레이더로도 구축함과 어뢰정을 감지하기 힘든 지형이었다.[17] 이 증언을 한 사람들 중에서 파고다 마스트에 대해 언급한 사람이 없었기에 증언의 신뢰성에 의심이 있었다.[18] 미치시오는 추가 공격을 받고 격침되었고, 아사구모는 이후 항해 능력을 일부 수복하여 표류하면서 퇴각을 시도했으나 느린 속도로 인해 실패하고 최종적으로 격침되었다.[19] 다만 이 시점에서 니시무라 제독은 후소가 낙오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20] 이렇게 명확히 기록된 계기가 좀 웃긴데, 올덴도르프 제독이 사격 중지 명령을 내리고 나서, 함대의 전함과 순양함의 전 포문이 침묵하는데 혼자 뿜 하고 일제사격을 해버렸다.[21] 4,5,6번 주포는 사실상 무력화 된 뒤였으므로 상부구조물에 가려져 있던 3번 주포탑과 측면의 부포곽들을 사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22] 3번 주포탑의 폭발로 추정[23] 후술할 사토 이자키의 증언[24] 미군 측 전함 테네시의 레이더 기록에는 표적의 크기가 서서히 줄어들더니 4시 20분 경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5] 니시무라 제독은 기울어지는 함교에서 떠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아마 함교에서 탈출한 생존자인 사토 이자키 대위의 증언으로 보임)[26] 이외에도 150명 가량의 생존자가 더 있었으나, 이들은 구조를 거부했으며, 인근의 섬에 상륙했다가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한 생존자들도 있었다고 한다.[27] 단 이들을 상대한 올덴도르프 함대 입장에서는 나름 우려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일본 함대가 야간전에 강하다는 고정 관념에 더불어 이 당시 올덴도르프 함대가 장비한 탄약의 대부분이 고폭탄이었다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 올덴도르프 함대의 주목적은 적 함대와의 전면전을 상정한 것이 아니라 해협을 차단하고 상륙부대를 지원하는 것이었기에 전함을 상대하기 위한 철갑탄의 수량이 부족했다. 따라서 해전 내내 올덴도르프 제독이 직접 철갑탄의 소모량을 통제해가며 싸웠다고 한다. 이때문에 일본측에서도 니시무라, 시마 양 함대가 동시에 돌입했다면 그나마 승산이 있지 않았을까하는 의견이 간간이 나오는 편. 물론 함대의 구성만 봐도 철갑탄 부족 정도로 뚫을 수 있는 레벨이 아니다. 주력함의 숫자가 차이가 너무 심했고, 철갑탄이 부족했다한들 주력함 차이가 너무 심해 미 해군측이 철갑탄이 다 떨어졌다해도 고폭탄으로 두들겨 버리면 일본측은 어찌저찌 어뢰를 쏴가며 돌파를 해볼 수 있었겠지만 이후 작전을 수행하는것은 불가능했을것이다.[28] 일본의 시간 스케쥴이 빡빡해져 버린 이유 중 하나는 연료부족이 심해져서 이동시간, 루트까지 연료 문제가 적용되었기 때문이다[29] 앞서 말한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을 방어하기로 한 (구) 34 임무부대와 다름에 주의.[30] 전술했다시피, 아예 한 번도 함포사격을 하지 못한 펜실베이니아와 딱 한 번 일제사격한 미시시피도 있을 뿐더러, 가장 많이 사격을 한 웨스트버지니아도 철갑탄의 절반도 안 쏜 상태였다. 단, 펜실베이니아와 미시시피가 제대로 함포를 못 쏜 것은 사격 통제장치가 웨스트버지니아보다 구형이라서 난전 상황에서 아군 오폭을 주저하다 놓친 것이다. 또한 7함대 본연의 임무는 해상포격지원이라 가진 포탄 절반 이상이 고폭탄이고 함대 결전에 필요한 철갑탄 재고가 부족했기에, 훨씬 규모가 큰 구리타 함대와 맞부딪혔을 경우 포격전 중 철갑탄이 다 떨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하긴 어렵다.[31] 즉, 뒤늦게 전달되었다고 변명한 것.[32] 동어 반복으로 강조.[33] 시작.[34] 수신인과 본문을 구분.[35] 끝.[36] INFO COMINCH : COMINCH는 해군장관이지만 여기선 CNO인 어니스트 킹 본인을 지칭한다.[37] CTF SEVENTY-SEVEN : 태피3는 77 임무부대에 소속되어 있었다.[38] RPT : repeat.[39] 쉽게 말하면, "도대체 어디 있는거야, 딴짓 하지 말고 얼른 나와!" 정도 될 내용이다.[40] 엄밀히 말하면 니미츠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니미츠를 절대적이게 신뢰하고 지지한 홀시 입장에서 저런 명령문이 왔을 때 그 심정은...[41] 로버트 카니 제독도 오자와 함대를 추격한 것을 반대하긴 했다.[42] 출처는 상원위원이었던 존 매케인 3세가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해 쓴 책이다.[43] 홀시가 고집을 꺾지 않았았다면, 연합함대의 다음 장관이 될 사람이 여기서 죽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44] of의 오타가 아니다. 사마르섬 바깥의 근해에서 벌어진 전투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45] 붉은 선의 경로를 잘 보면 어느 순간 돌아가는 걸 볼 수 있는데 이게 구리다 턴.[46] 태피3의 스프레이그와는 다른 인물이다. 골때리게도 둘 다 미국해군사관학교 1917년에 졸업한 임관동기인데, 둘 모두 태평양 전쟁에서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하며 이 레이테 만 해전, 오키나와 전투에서 활약하는등 동선이 상당히 겹치는데다 군생활도 똑같이 중장까지 달고 전역했기 때문에 라이트 밀덕들에게는 왠지 동일 인물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다. 정작 실제로는 고향도 다르고 다른 동네 다른 학교 졸업한 생판 남남이다. 흔히 '지기(Ziggy)'라는 별명의 태피3 사령관 스프레이그 제독이 그나마 더 자주 언급되는 편이다.[47] 즉, 논의만 되고 편성하지 않은 (구) 34 임무부대.[48] 후소급 전함으로 대표되는 일본군 특유의 가느다랗고 높게 쌓여 있는 적층식 함교.[49] 일본 해군이 통신 정비를 게을리해서 통신 시설이 좋지 않아서 오자와가 통신을 했는데도 닿지 않았다. 당시 구리다의 첩보 상태는 한심함 그 자체였는데 사실상 제대로 무전이 되지 않아서 두루뭉술한 명령만 믿고 작전을 개시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작전을 성공하려 했으니 구리다가 무당이라도 되지 않는 한 사실상 시작부터 패퇴가 예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50] 분명히 작전참모인 가미 시게노리가 필리핀이 함락당하면 남방이 차단되어 말라 죽으니 무조건 상륙을 막아야 한다고 했는데, 구리다는 그걸 잊고 부수적인 목표 달성에 달려든 것이다.[51] 야마토의 포술반은 일본 해군 전체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인재들이었고, 초탄부터 협차 형성에 성공하여 태피 3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산포계 중심이 몇십 미터만 조정되었어도 초탄부터 명중탄이 나올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52] 야마토조차도 제대로 된 레이더가 없어 목측식 사격통제에 의존하는 상황이었기에, 대부분의 포격이 빗나가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화이트 플레인즈가 연막을 살포하자 야마토 측에서는 화재가 발생하고 무력화된 것으로 착각하여 다른 목표로 눈을 돌렸고, 화이트 플레인즈는 간신히 살아남았다.[53] 미드웨이 해전을 생각해보면 정확한 판단이었다.[54] 이것이 후의 포격전에서 호위항모가 피해를 입으면서도 한 척만 격침당하는 데 그치는 지대한 역할을 한다.[55] 파일럿들은 조함과 전투지휘를 방해하기 위해 대공포좌나 함교를 주로 노렸다고 한다.[56] 파일럿들 중에는 조종석에 있던 콜라병을 집어던지거나 자위용 38구경 리볼버를 함교에 발포한 이들도 있었다.[57] 적함에서 발사된 포탄이 만든 물기둥을 향해서 접근했다. 바람, 해류, 파도 등 복잡한 주변 환경의 예측 불가능한 영향 때문에 포탄이 같은 장소에 연속해서 떨어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걸 고려한 전술이었다. 뿐만아니라 적 포술반이 빗나간 사격제원을 그대로 유지한 채 차탄을 쏘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다.[58] 하지만 태피2 함재기들의 공습을 피하지 못하고 격침당한다.[59] 46cm 주포를 맞았으나 과관통이 일어나 살았다.[60] 그 뒤 기어링급 구축함 DD-823,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호위함 FFG-58이 그 이름을 계승한다.[61] 실제로는 야마토나 하루나로 추정되고 있다.[62] 당시 하루나는 필리핀 해전 당시 폭격으로 입은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로 인해 함미부의 진동이 심해 속력을 제대로 낼 수가 없었다고.[63] 배의 앞부분[64] 배의 뒷부분[65] 침몰된 존스턴의 잔해는 2021년 3월 31일 탐사정에 의해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었다. #[66] 日米全調査 決戦戦艦大和の全貌[67] 우가키 마토메, 전초록.[68] 原勝洋 '日米全調査 決戦戦艦大和の全貌' 203항[69] ' The World Wonder'd: What Really Happened Off Samar' Robert Lundgren[70] Aircraft Carriers: A History of Carrier Aviation and Its Influence on World Events: 1909-1945. Potomac Books, p.434[71] Yamato (Battleship, 1941–1945) in the Battle of Leyte Gulf[72] 심지어 이때 칼리닌 베이의 함포는 거리측정장치가 고장난 상태였다.[73] 침몰함선 조사결과 선수가 떨어져 나가 있었다.[74] 사실상 말만 레이더지 "어느 방향에서 반사파가 온다"수준이였다.[75] 사실 호위항공모함이라도 정규항공모함 대비 덩치가 좀 작다 뿐이지 가장 중요한 함재기 탑재량은 일본군의 정규항공모함과 거의 동급이었으니, 정규항공모함으로 착각할 만은 했다.[76] 당시 초카이와 치쿠마의 승무원들을 구조한 구축함인 후지나미와 노와키는 후에 미군의 공격으로 침몰하여 초카이는 승조원 전원 전사, 치쿠마는 단 1명만이 살아서 귀환하였다.[77] 2차 대전이 끝난 후 일본 군부는 이 사진의 원본을 파기했으나 이미 여러 신문에서 보도했기 때문에 사진은 남아있다.[78] 원래는 '미드웨이'였는데 이번 해전이 벌어지기 직전에 그 이름을 신형 항공모함에 붙이기 위해 배 이름이 갑자기 바뀌었다. 열받은 수병들은 오만가지 욕지거리를 날리면서 "배 이름을 마음대로 바꾸는 무식한 놈들이 어디 있어! 그러면 마가 낀단 말이야! 배는 분명히 2주안에 침몰할거야, 내가 장담한다!" 라면서 분노했었다. 그리고 말이 씨가 된 건지, 진짜로 마가 낀 건지 그 말은 현실로 나타났다. 다만 같은 카사블랑카급의 CVE-57은 원래 이름이 코럴 씨였는데, 이것도 그 이름을 신형 항공모함에 붙이기 위해서 세인트 로보다 먼저 함명을 안지오로 바꿨었다. 이 배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다. 뱃사람들이 미신을 많이 믿기는 하지만, 이런 것이 단순한 미신이라고는 할 수 없다. 특히 미드웨이라는 함명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선원들의 사기는 이루 말할 수 없게 된다.[79] 최초로 '계획된 카미카제'를 당한 배는 호주 해군의 HMAS 오스트레일리아였고, 10월 21일이었다.[80] 아마 초카이 승조원을 구출한 후 퇴각하던 후지나미의 일화인 듯하다.[81] 레이테 섬의 서쪽, 즉 레이테 만 정 반대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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