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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예인)/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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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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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rnal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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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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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데뷔 전3. 신인시절 및 첫 솔로 활동4. 한류스타
4.1. 스피드 레이서를 통한 할리우드 데뷔4.2. 닌자 어쌔신의 와패니즈 닌자
5. 2008년 5집 Rainism, 비의 최전성기6. Back To The Basic 활동7. 2011년 군 입대와 침체기8. 6집 Rain Effect, 기묘한 인기와 본격적 하락세의 시작9. 의 발매와 몰락10. 깡 신드롬의 발생, 커리어의 전환점이 된 싹쓰리 활동

1. 개요

의 활동을 정리하는 문서이다.

2. 데뷔 전

1998년 6인조 그룹 '팬클럽'의 멤버로 데뷔했으나, 제대로 된 활동을 못 하고 1999년에 나온 2집을 끝으로 팬클럽이 해체하며 깨끗하게 묻혔다.[1] 딱히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2집까지 나왔다.

이후에도 가수의 꿈을 품고 안양예고를 다녔으나 극심한 가난에 병원비를 못 대서 결국 모친상을 당하는 매우 힘든 나날을 보냈다.[2] 비는 이 일화를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이야기한 바가 있다. 그러던 중 박진영의 눈에 띄어 JYP연습생으로 들어간다. 박진영이 후에 밝힌 캐스팅 이유는 비에게서 절박함이 보였다고. 무반주로 을 몇 시간씩 춰 보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도 당장 해낼 만큼 절박함이 보였다고 한다. 그 예로 돈이 없어서 우유에 불린 라면으로 삼시세끼를 때우거나 옷 살 돈이 없어 땀에 전 트레이닝복을 한 달 내내 입고 다닌 일화는 유명하다. 이때의 기억 때문인지 아직도 자신에게 밥을 사주는 사람을 매우 좋아한다고 한다.[3] 이른바 자수성가의 아이콘 중 한 명이라고 볼 수 있고, 나중에 그가 메인 MC를 맡는 더 유닛의 제목같이 리부팅된 사례이기도 하다.

3. 신인시절 및 첫 솔로 활동

2002년 상반기에 타이틀곡 '나쁜 남자'를 통해 솔로로 가수 데뷔를 했고 나름대로 주목할 만한 신인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당시 가요계가 2002 FIFA 월드컵에 대국민적인 관심이 쏠린 시기라서 YB 빼고는 가요계가 침체되어 있던 상황이라 전대의 가수들만큼 주목받지 못했다. 기대보다 반향이 없자 회사에서는 음반 활동을 접자고 했지만 비가 귀여운 이미지의 후속곡 '안녕이란 말 대신'으로 조금 더 활동해 보자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후속곡 활동을 하게 된다.

결국 월드컵이 끝난 하반기에는 안녕이란 말 대신으로 인기를 끌며 당시의 대중들에게 기억될 만한 성적으로 1집 활동을 마무리했다. 이 곡으로 지상파 방송인 SBS 인기가요에서 한 번 뿐이지만 어쨌든 1위도 하게 되고 특유의 미소로 CF도 많이 찍으며 인지도도 높였으니, 비의 주장이 빛을 본 셈. 결국엔 SBS 가요대전과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는 등 주목할 만한 신인으로 부상하게 된다. 삼속곡으로는 R&B 발라드 '악수'가 있는데, 이 곡으로의 TV 출연은 거의 없었고 라디오를 중심으로 인기몰이를 하였다.

무엇보다 비가 폭넓은 인지도를 얻기 시작한 것은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부터이다. 한동안은 "저 듣보는 누구냐?"라는 평을 들었으나 천생연분에서 화려한 댄스 실력을 선보인 것이 화제가 되었고 건강한 몸을 바탕으로 각종 신체 대결 게임들에서 타 남자 연예인들을 압도하며 점차 주목을 받았다. 이 당시 지나친 겹치기 출연으로 팬들에게는 "JYP 먹여 살리는 소년가장"[4][5]이란 말을 듣기도 하였다. 비가 예능으로 얻은 인기와 인지도가 상당한 만큼 비의 예능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 보통 짬이 차면 예능은 안 돌고 신비주의 이미지로 가는 연예인이 많은데 비는 신인 때와 마찬가지로 활동 시작하면 예능을 많이 도는 편이다.[6]

4. 한류스타

이렇게 인지도를 쌓아가던 비가 결정적으로 탑스타로 자리매김한 것은 2003년 KBS드라마인 '상두야 학교 가자'에 주연으로 출연하면서부터.[7]

또한 그 뒤에 발표한 2집의 타이틀 곡인 '태양을 피하는 방법'이 대히트를 치게 되었다. 태양을 피하는 방법은 Sting의 Shape Of My Heart를 샘플링한 것으로 유명한 곡이다. 원곡의 기가 막힌 기타 반주 멜로디를 잘 활용했다. 또한 보잉 선글라스 등의 아이템으로 비하면 연상되는 비주얼과 비의 음악적 스타일이 정립된 곡이기도 하다.[8] 또한 곡을 준비할때 비는 태양을 피한다는 가사에 맞춰서 선글라스로 안무를 만들었으나 이 부분에서 박진영과 의견이 충돌했다.[9] 허나 비는 처음으로 박진영의 지시를 어기고 첫 무대에 본인이 짠 안무와 의상(선글라스, 카고바지, 크롭티, 숏재킷)으로 나가서 1등을 했고, 박진영에게 이제 모든 디렉팅은 니가 해도 되겠다고 인정을 받았다.

그 후 드라마 '풀하우스'가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권에서 대박이 터지면서[10] 명실상부한 탑스타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고 성공했다는 자수성가형 스토리, 국위선양을 유달리 좋아하는 한국인의 정서, 드라마 '풀하우스'의 후광효과[11] 등이 맞물리며 당대의 각종 CF를 휩쓰는 등의 결과를 보여준다.[12]

풀하우스 이후 나온 3집 It's raining으로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비는 3집 활동으로 2004년 가요대상[13]을 석권했고 동시에 3집은 아시아 밀리언셀러로 등극했다. 특히 박진영 작사 작곡의 타이틀 곡 It's raining은 '습-하' 하는 특유의 호흡소리 파트, 강렬한 비트와 댄스의 임팩트로 비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곡이 되었다. 신화의 Brand New, 이수영의 휠릴리, 보아의 My Name, 김종국의 한 남자와 함께 2004년 가요계를 평정한 최고 인기곡이었으며 2010년대에도 비가 시상식에서 레퍼토리로 써먹었을 정도.

그리고 비는 한류열풍과 '풀하우스' 의 인기를 등에 업고 해외로 진출, Rain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 투어를 비롯 미국에서도 활동[14]하였기에 한국이 배출한 제1세대 월드스타라고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와는 거리가 있는 자기 홍보성 언론플레이에 불과하다는 평이 많다. 월드스타 마케팅은 초창기엔 극히 호감형이었던 비의 이미지를 깎아먹는 족쇄로 작용하는 결과로 후일에 이어진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장나라안재욱, 일본보아배용준 등이 매우 커다란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 인기가 특정국에 한정되었던 특징이 있는 반면, 비의 경우 아시아권에서 폭 넓은 인기를 끌며 기존의 한류 스타들과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였던 것은 주목할 만하다. 3집 'It's raining'의 음반판매량과 여러 도시에서 개최된 콘서트 투어가 그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아시아 전역에서 앨범 100만 장 이상을 팔았고, 아시아 여러 도시에서 진행된 콘서트는 매진 행렬을 이어갔다.

그 인기는 대개 아시아권에 한정된 것이지만 그 당시 범아시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와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 바탕으로 서구권 언론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주목하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서구권에서도 영향력을 가지는 한류, 즉 지금의 한류의 시발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15] 더욱이 그 이후 할리우드 영화 단독 주연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고 미국 시상식에서 수상했기 때문에 그러한 성과를 무시하면 안될 것이다. 미국에 진출한 이후 유명 방송 토크쇼에도 출연하고 영화에도 출연하였기에 미국에 가서 Rain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두 유 노 레인? 초창기에는 대부분 몰랐었지만 그 당시 인지도는 나름대로 올라갔었다. 비가 2006년 "타임지에서 뽑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한국 연예인 최초로 선정되면서[16] 외국 배우들에게 한국인 기자들이 하도 아냐고 물어본 통에 "유명한 거로 유명한 사람"이란 꼬리표가 생겨났다.

사실상 가수로서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2006년 당시에는 서구권에서 가수로서의 인지도는 거의 없었고, 그나마 지켜본 평론가들로부터는 미국 트렌드에 몇 년 정도 뒤쳐진 촌스러운 음악이란 평을 들었다.[17] 영화 스피드 레이서에서는 조연에 불과했으나 닌자 어새신의 단독 주인공으로 출연하면서 한국 유일 할리우드 영화 단독 주연 타이틀을 얻었다.[18] 다시 말해 미국인들이 비라는 인물을 인지하게 된 것은 가수로서가 아니라는 것. 닌자 어새신의 주연을 맡음으로써 북미와 세계시장에 이름을 알린 부분이 크다.

그러나 이 시기에 해외투어로 형성한 월드스타 이미지는 국내에서는 대단히 효과적이었고 비가 이효리와 더불어 가요계 솔로 최고의 위치였던 것도 사실이다. 이후에 음반을 내고 복귀할 때마다 지상파 특집 방송이 잡혔으며 비의 무릎팍도사 출연으로 인해 라디오 스타 방송분이 5분으로 단축된 일은 매우 유명하다. 월드스타 이미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며 이 이미지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의 세계적 히트 전까지는 유효했다. 최소한 군 복무 이전 2010년대 초반까지 비는 거품설이 제기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방송가에서 슈퍼스타 대우를 받았고 국민적 인식도 그러했다. 그러므로 박진영이 의도한[19] 월드스타 브랜딩 전략은 서구에서의 실체는 없더라도 국내와 아시아 한정으로는 대단히 잘 먹혔다고 볼 수 있다.[20]

여담으로, 비가 서양에서도 알려지게 된 계기가 있다. 비가 아무리 한국에서 최고 인기스타이고 아시아에서는 유명했을지언정 서양에서는 인지도가 부족했다. 그러나 닌자 어새신 촬영 이후, 헐리우드 미녀 배우인 메간 폭스에게 구애 받고 나서부턴 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나름대로 이름을 알렸다. 이 당시 메간 폭스는 트랜스포머 시네마틱 유니버스로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섹시스타였다. 그 무렵 북미의 청소년 및 20대 초반 청년들에게 메간 폭스는 그야말로 여신 이상으로 추앙받는 여배우였던 것.[21]

2009년 한국을 방문한 메간 폭스 말로는 비의 뮤직 비디오를 어쩌다가 보게 되었는데 비의 복근을 보고 반했다고 한다. 메간 폭스 덕분에 비가 서양 사람들한테 알려졌고, 이때 비가 메간 폭스와 실제로 사귀었으면 비는 정말로 월드스타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다. 참고로 메간 폭스는 2019년에도 인터뷰에서 K-POP에 대한 애정을 밝혔으며, 연예가 중계에 출연해서도 닌자 어새신을 본 이후 오랫동안 비의 팬이었다고 이야기했다.

4.1. 스피드 레이서를 통한 할리우드 데뷔

박찬욱 감독과 같이 찍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되면서 헐리웃 관계자들 눈에 들어오게 되고,[22] 얼마 지나지 않아 비는 스피드 레이서에서 "태조 토고 칸"이란 국적 불명의 이름을 가진 일본인 가장과 중국인 여동생을 둔 가정의 장남으로 출연한다. 몽골계와 일본계 이름이 혼합된 토고 칸이란 이름에 억지로 태조라는 단어를 넣은 것인데 이를 가지고 한국을 홍보했다는 발언드립을 하였다. 테조로 안 들리면 다행이겠다.

하지만 제작팀의 인터뷰에 따르면 원작이 일본 만화다 보니 시나리오상에서의 토고 칸은 일본인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토고 칸의 아버지인 체트야는 일본인 배우와 일본풍 테마로, 여동생인 토고 호루코는 중국인 배우와 중국풍 테마로 유지되었다.

영화 출연으로 한국을 홍보했다는 마케팅을 하고 싶었다면, 제작진의 합의로 토코 칸 가家의 정확한 국적은 언급되지 않게 된 김에 테마도 한국풍으로 해달라는 식의 협상이 필요했던 부분이다. 뭐 이런 것 자체가 비가 월드 스타 이미지로 재미를 보던 시절에나 먹혔을 철 지난 국수주의적 마케팅이긴 하지만 말이다. 참고로 토고 칸은 동양계 미국인, 즉 미국 국적을 가진 미국인이다.

스피드 레이서는 감독인 워쇼스키 자매의 명성과 헐리웃 영화라는 사실 때문에 미국과 국내에서 대규모의 홍보가 이루어졌으나 예상과는 달리 해외와 국내 모두 흥행에 실패하였다. 영화에 대한 평은 호불호가 크게 갈렸으며 공통적으로 워쇼스키 자매의 취향이 크게 개입된 키덜트 팬 무비라는 평이 많다.

주어진 거대한 예산에 비해 정석적 블록버스터스러운 접근법을 다루지 않으며 취향을 크게 타는 실험적 영화를 만들어낸 것. 한마디로 불균형이 매우 심한 영화였다. 대단히 독창적인 연출기법을 보여주었지만 무딘 서사 및 개성없고 평면적인 캐릭터와 함께 현란하다 못해 정신없을 정도의 미술과 비주얼로 장단점이 너무 첨예하게 대립하는 영화였다. 결과적으로 평론가로부터 혹평을 받고 말았다.

단, 제작진이 비의 아시아권에서의 인기를 이용하려고 나쁘지 않은 대접을 해주었던 것은 사실이며 결과적으로 제작 당시 좋은 인상을 워쇼스키에게 남겨 차기작 닌자 어새신 출연으로까지 이어졌으니[23] 정지훈 개인에겐 완전히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스피드 레이서 출연으로 비는 언론으로부터 월드 스타라는 타이틀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했으나 실질적으로 미국에서의 인지도는 한국에서 부여한 타이틀에 미치지 못했다.

4.2. 닌자 어쌔신의 와패니즈 닌자

스피드 레이서의 참패 이후 촬영한 닌자 어쌔신이 미국내에선 유명한 와패니즈 B급 영화의 대명사인 아메리칸 닌자의 후속작으로 받아들여지며 드디어 의미 있는 인지도를 확보하게 된다. 고어물, 액션물 매니아를 중심으로 호평 받고 있어 중박쯤은 노려볼 만하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해외에선 개봉 3위로 시작해서 다음주에 6위로 하락하고 그 다음주엔 순위권 밖으로 밀려났으며 국내에서는 2012에 밀렸다.

애초 워쇼스키 자매는 닌자 어새신의 흥행여부를 보아 닌자 어새신 2를 제작하려는 계획이 있었다고 하나 미국 내 흥행이 그에 미치지 못하면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제작비에 비해 흥행이 기대치에 못 미친 근본적인 이유는 닌자 어새신 영화 자체의 품질이 싸구려 킬링 타임 영화 급이었기 때문이다. 워쇼스키 자매 자체가 매트릭스 이후 감독이나 제작자로서의 역량이나 커리어가 시원찮았다. 닌자 어새신의 영화 평점도 로튼토마토 26%, 메타크리틱 34점으로 범작 ~ 졸작 수준의 스코어이며 B급 무비 취향의 관객이나 킬링타임 액션영화를 찾는 평범한 관객의 호응은 어느 정도 있었지만 평론가에게는 혹평받은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워쇼스키 자매는 A급 감성보다는 키덜트적 취향이나 오타쿠스러운 감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창작자들이며 스피드 레이서 제작 시기부터 그런 기질이 두드러졌다. 닌자 어쌔신에서도 80년대 미국식 B급 닌자 영화 스타일, 닌자 용검전 같은 와패니즈물을 연상케하는 캠피함이나 경파함, 막나가는 싸구려틱함이 영화 전반적으로 깔려 있었던 편. 닌자 어쌔신에 대한 일반 대중의 평가는 IMDb 기준 평점 6점, 네이버 영화는 7.8점 정도의 수준으로 평이했다.

그러나 닌자 어새신은 비가 미국 헐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의 단독 주연을 맡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이며 비의 월드스타 타이틀의 가장 큰 근거이기도 하다. 종래 헐리웃 영화계가 동양인 배우에게 부여하던 전형적인 캐릭터인 "동양적인 무술을 하는 액션 위주의 캐릭터"라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하긴 힘들겠지만 그걸 뛰어넘은 다른 동양 배우가 누구냐고 물으면 딱히 손꼽기도 힘들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대단하긴 한 일. 이연걸이나 주윤발 같은 중화권 탑배우도 헐리우드에선 원패턴 동양인 무술 달인 캐릭터로 소모적으로 활용되는 마당이니 말이다. 그나마 몇년 전 부터는 아시아 배우나 아시안계 미국인 배우들도 '전형적인 아시안 배역'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의 배역들을 맡고 주연자리를 차지하는 추세에 있다.

닌자 어새신은 종영 후 미국과 북미, 그리고 기타 40개국에서 DVD 판매량이 증가하면서 최종집계 금액으로는 제작비를 넘겨 두 배 이상의 수익을 영화사에 남겼다. # #

하지만 헐리우드 영화산업의 손익분기점은 보통 총투자금액의 2배로 잡는 것이 업계의 상식이다. 입장권 수익의 절반 정도가 영화관의 몫으로 잡히기 때문이다. 영화관의 몫을 뺀 나머지 수익을 배급사, 제작사, 투자자 등이 나누어 가지므로 보통 제작비의 3배 정도 성과를 올려야 수익을 남긴 영화라는 타이틀을 달 수 있게 된다. 반면 닌자 어새신의 경우 기대 이하의 극장 개봉수익에 DVD 판매량 등의 2차 수익을 겨우 합쳐서야 4천만 달러 제작비의 본전치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닌자 어새신의 한국 내 흥행은 크게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비의 주연이 화제가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100만은 넘기는 관객수를 기록하게 된다. (1,345,025 명) #

첫 주연작의 흥행부진으로 비는 부담을 안게 되었지만 반면에 닌자 어새신을 통해 체지방이 거의 없을 정도의 혹독한 몸 만들기의 과정[24]과 실전을 방불케 하는 무술연습 등이 공개되며 화제가 되었고 MTV Movie Award의 Bad Ass Action Star상을 수상함으로써 어느 정도 실익도 취할 수 있었다.[25]

5. 2008년 5집 Rainism, 비의 최전성기

비는 3집 It's Raining 이후 헐리우드 영화 촬영 등의 해외 활동에 주력하던 도중 국내로 리턴하여 2008년 10월에 5집 앨범 Rainism으로 가요계에 복귀하였다. 비는 5집 활동기에 동명의 타이틀 곡 Rainism으로 댄스 퍼포먼스 가수로서 스스로의 정점을 찍었으며 2008년의 가요계 시상식을 평정했다.

Rainsim의 연간 음원 성적은 50위권으로서 15만장 이상을 판매한 음반 성적이나 최고의 솔로 가수라는 비의 가요계 입지에 비해 음원 성적은 비교적 미흡했다. 그러나 음원성적을 한없이 초월하는 거대한 대중적 파급력을 과시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비 하면 떠오르는 대중적 이미지는 Rainism으로 완성되었다. 비 자체를 상징하는 곡이 바로 Rainism인 것.

자세한 설명은 Rainism 항목을 참조할 것.

6. Back To The Basic 활동

2010년 4월, 비는 스페셜 앨범 Back To The Basic으로 컴백했다. Hip Song과 널 붙잡을 노래의 더블 타이틀 체제였다. 3집 무렵부터 정립된 강렬한 퍼포먼스 곡과 감미로운 발라드의 더블 타이틀 체제를 다시 들고 나온 것.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해당 활동에서 더 조명받고 퍼포먼스적으로도 강렬했던 곡은 R&B 발라드였던 널 붙잡을 노래였다. 프로모션적으로 메인이 된 것도 해당 곡이기도 했다. 이전 비의 활동에서 메인이 된 곡이 It's Raining, Rainism 같은 강렬한 댄스곡이었던 것에 비해 큰 변화였다.

널 붙잡을 노래는 곡 중반부의 꿀렁거리는 복근 웨이브, 후반부의 갑작스러운 상의 탈의로 대세급 화제가 되었다. 당시 유행했던 UCC를 통해 끊임없이 패러디가 될 정도였다. 곡 자체도 멜로디가 준수하고 완성도가 말끔했으므로 음원 성적이 매우 잘 나왔다. 멜론 연간차트 31위로서 비의 최전성기로 꼽히던 Rainism 시절보다 오히려 훌륭한 성적이었다.

다만 널 붙잡을 노래의 무대 퍼포먼스와 뮤직비디오는 곡의 상징 수준이었던 꿀렁거리는 복근 웨이브가 너무 부담스럽다는 평가와 함께 호불호가 크게 갈리기도 했다. 분명 임팩트는 거대했지만 한 마디로 과한 면이 있었던 것. 일종의 간지와 병맛을 넘나드는 감성이었는데 이런 측면은 그냥 '간지' 하나로 설명이 끝났던 이전 Rainism 시대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달라진 부분이기도 했다.

비가 박진영의 품을 벗어나면서 특유의 스냅백, 민소매 밀리터리 자켓과 부츠 같은 패션이 고착되었고 지나친 눈 밑 스모키 메이크업 같은 여러모로 과한 컨셉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5집 이후로 비는 본격적으로 작사, 작곡에 손대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인 더블 타이틀곡인 Hip Song은 분명 무난한 인기를 끌기는 했으나,[26] '난 나만의 인생을 즐기는 슈퍼맨이야' 같은 유치한 가사가 드러나버렸다. [27]

결과적으로 Back To The Basic 활동으로 비는 가수로서 여전한 존재감을 확인시켜줬고 Rainism 활동시기보다도 훨씬 준수한 음원성적을 냈다. 뿐만 아니라 음원 성적을 훨씬 넘어서는 대세급의 대중적 화제성을 얻었다. 음원 성적이나 음반 성적에 비해 존재감과 포스가 훨씬 거대하다는 비의 특성이 다시금 재현된 것이다. 그러나 프로듀서로서 비 특유의 엇나간 유치한 감성이 싹을 트기 시작한 시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후 비는 프로듀서로의 단점이 대폭발하였고 다시는 Back To The Basic 활동 시절처럼 탑급 솔로 댄스가수로서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7. 2011년 군 입대와 침체기

비는 Back To The Basic 활동으로 뛰어난 성과를 냈으나 한류스타로서의 지배적 위치가 흔들리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Back To the Basic 활동에서 쏠쏠했던 음원성적에 비해 음반성적이 하강하기 시작한 것이 그 첫번째 징조. 앨범의 최종 판매량이 53,584 장으로 가온차트 연간순위 26위 수준이었다. 이전 5집 Rainism 활동에서 판매량의 국내 최종 판매량은 15만장 이상으로 연간 차트 5위였던 것에 비해 큰 하락폭이었다. Back To The Basic 활동에서 팬덤 판매량은 어느 정도 유지되었으나 대중 판매량이 줄어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비는 이전까지만 해도 예능 출연 시 한류스타로서 영웅급 대접을 받았었다. 그런데 비의 2010년 라디오 스타 출연 시 자매 프로그램 무릎팍도사김연아 동시출연으로 인해 출연 분량이 5분으로 삭제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전 비가 한류스타 컨셉으로 무릎팍도사에 출연할 때 라디오 스타 분량을 5분으로 만들어버렸던 사건과 똑같은 역전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비의 스타 컨셉이나 그에 걸맞는 방송계의 대우는 여전했으나 예전처럼 출연진 전원이 환대하며 한류스타 국민영웅을 대접하는 식의 대우[28]에 비해 정도가 약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와! 월드스타 비님이 우리 방송에 나와주셨습니다!!! 대박!!!'에서 '월드스타 비씨가 나오셨네요!' 식으로 느낌표가 3~4개 정도 줄어든 수준의 반응이 된 것이다.

결정적으로 비는 이 무렵 비(연예인)/논란 문서에 서술된 제이튠 관련 주식 소송, 의류 브랜드 식스투파이브 관련 잡음 등으로 언론에서 집중보도되며 이런저런 불협화음이 나기 시작했다. 각종 법적 논란들로 인해 유승준을 대체하고 떠오른 모범적 청년으로서의 비의 이미지가 큰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이전 공연 무산 파동 사건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한류스타로서의 위상에 금이 가게 된 것. 특히 이전까지는 극히 우호적이었던 대중적 호감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네이버 뉴스 등지에서 비의 논란이 연일 화제가 되며 뉴스 댓글 게시판마다 비를 사기꾼으로 매도하는 악플 세례가 쏟아지기에 이를 정도였다.

이같은 각종 소송들에서 결국 비는 모두 무혐의 처리받으며 법적인 무고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미 악화된 여론이 크게 나아질 기미는 엿보이지 않았다. 이에 활동도 비교적 자제하였다. 주로 콘서트 활동에 매진했으며 음반도 부산 여자라는 싱글을 내는데 그쳤다. 그런데 이 곡마저도 표절 의혹에 휩쓸렸다.[29]

활동을 마무리한 비는 10월 11일 군에 입대함으로써 일부로부터 제기되어왔던 군기피 의혹까지 종결하고 군대에 입대하였다. 제5보병사단의 신병교육대대의 조교로 배치되었으나 이후 연예병사로 차출되었다.

군대 가기 전 공군 협조로 영화 R2B: 리턴 투 베이스를 찍었는데 공개된 줄거리와 스틸은 괴작이 나왔다는 평이다. 감독부터가 두사부일체 2편인 '투사부일체'와 '유감스런 도시' 같은 조폭 코미디를 만들던 김동원 감독이다. 2011년 3월에 촬영을 마쳤지만 극장들이 외면하고 배급사를 찾지 못하여 1년 반 넘게 극장 개봉을 하지 못했다가 2012년 8월 15일에서야 개봉했다. 참고로 원래 제목도 『비상:태양 가까이』로 개봉하려다가 바꾼 제목이다. 결국 예상대로 흥행은 암울해 제작비 절반도 못 뽑았다. 최종 관객수는 1,201,944명이다. 6.98UBD

그렇게 무난히 군생활 하나 싶었는데 2013년 1월 1일 새해 첫날 김태희와의 열애설이 터졌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발생하였다. 열애설과 연예병사 특혜 논란 문단 참조.

2013년 7월 10일에 전역한 뒤로 한국과 중국을 오고가며 배우 위주로 활동을 진행했지만, 전반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하며 슬럼프에 빠졌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8. 6집 Rain Effect, 기묘한 인기와 본격적 하락세의 시작

무엇보다도 오랜 준비기간 끝에 2014년에 야심차게 출시한 6집 Rain Effect가 최악의 악평을 받으면서 비는 여러모로 가수로서 저점을 찍었다. 타이틀 곡 La Song이 특유의 병맛으로 인기를 얻었으므로 활동 자체가 묻힌 건 아니고 각종 커뮤니티에서 큰 화제가 되며 이전 활동에 비해 미흡할지언정 뜨기는 뜬 편이었다. 그러나 그 인기가 제대로 된 인기(?)가 아니라는 점이 문제.

활동 초기에 비는 더블 타이틀곡인 30 Sexy쪽을 더 밀며 활동의 중점으로 삼았다. 이 곡도 엠카운트다운에서 M.C The Max를 누르고 1회 1위를 하기는 했다. 그런데 음원 성적이 2위 대비 절반도 안나온 상태에서 팬덤의 초동화력 덕을 본 음반점수로 누른 결과였다. 때문에 차트 1위 논란 기사가 뜰 정도였다.

이후로도 30 Sexy는 주간차트 10위권 안, 5위 근처의 순위를 2~3주 유지하기는 했으나, 곡 특유의 가성을 떡칠한 환관창법, 뺨에 바른 립스틱 자국 같은 과한 섹시 컨셉의 결함 때문인지 노래 자체의 파급력은 상당히 애매했다. 차트 순위에 비해 음원의 화력도 약했고 대중 사이에서 크게 인기있는 곡이라고 하기 애매했던 것.

그런 상태에서 La Song 특유의 B급 병맛이 화제가 되며 커뮤니티의 화제거리가 되자 비는 음악방송에서 태진아콜라보[30]무대를 하는 등 La Song 쪽으로 프로모션의 중점을 바꾸게 된다.[31] 이후 La Song은 병맛 이미지로 일종의 B급 유행을 형성하며 각종 패러디가 쏟아져나왔고 멜론 연간차트 83위 수준의 음원 성적에 비해 큰 화제성을 낳았다.

그러나 범접할 수 없었던 탑급 솔로 가수로서의 비의 이미지는 하락세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6집 이전까지만 해도 대중적 인식 및 방송계에서 비의 이미지는 간지나는 탑급 댄스가수였고 한류스타 컨셉과 띄워주는 대우도 변함이 없었다. 제이튠 관련 주식 논란과 의류 브랜드 잡음 등으로 흔들리면서도 비의 브랜드 자체는 유지가 된 것이다. 2014년 비 6집 발매 당시만 해도 엠넷에서 비 단독 리얼리티 방송을 편성해줄 정도였으니 말이다.[32]

그러나 6집 발매 이후 비 특유의 B급 병맛 감성이 조명된 이후로는 한류스타 컨셉의 유지는 힘들어졌고 비를 메인 주제로 삼는 단독방송 섭외나 예능 출연시 호들갑스런 대환영 등의 특별대우도 점점 줄어들었다.

6집은 뭐라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앨범이므로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면 Rain Effect 항목의 일독을 권한다. 요약하자면 비 특유의 유치한 감성, 질 낮은 허세, 괴이한 가사, 꾸러기 표정과 능글맞은 눈빛 등 후기 비의 클리셰가 본격적으로 정립된 앨범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면모로 볼 때 6집은 깡 신드롬의 시발점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작업물 자체의 질은 지탄을 받는데 의도치 않은 B급 병맛 요소가 네티즌들 사이에서 기이한 인기를 끈다는 점도 이 앨범부터 시작된 요소다. 분명 비는 전성기마냥 슈퍼스타 댄스가수로서의 간지나는 모습을 보이려고 애를 쓰는데 그 결과물이 대중이 보기엔 이상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6집 발매 이후로 비는 이전처럼 탑스타의 위치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며 놀림거리이자 대중가요계 병맛의 아이콘, 팬들에게는 애증의 존재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유튜브가 성행하며 비의 6집 시절 작업물이 나쁜 의미로 재조명될수록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꾸러기 표정, 재간둥이 눈빛'으로 대표되는 B급 캐릭터가 잡히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김태희와의 연애 전선은 큰 이상 없이 흘러가 5년 간의 열애 끝에 2017년 초 결혼에 골인해 침체되어 가던 커리어에 반환점을 잘 찍나 싶었다. 김태희와 결혼을 발표하며 낸 발라드 곡인 '최고의 선물'도 노래 자체는 크게 뜨지 못했지만 비가 담은 진정성 때문에 비의 이미지를 상승시키는 데는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정작 그 해 마지막에 낸 앨범은...

9. 의 발매와 몰락

비는 2017년 12월 《MY LIFE愛》라는 미니앨범과 타이틀 곡 을 발표했다. 비는 이 노래의 발매 이후 가수로서 몰락이라고 칭해도 좋을 최악의 시기를 보냈다. 댄스 가수로서 비의 대중적 이미지가 재기불능 수준의 나락에 쳐박히게 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을 참조할 것.

10. 깡 신드롬의 발생, 커리어의 전환점이 된 싹쓰리 활동

설상가상으로 2019년 초 주연 영화인 자전차왕 엄복동마저 폭망하며 비 커리어의 내리막길이 가속화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자전차왕 엄복동이 개봉하기 직전 SNS에서 올린 글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해당 글이 술 한잔 마셨습니다라는 밈이 되기에 이른 것. 밈의 본원인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도 괴작 수준이라는 참혹한 혹평 속에 폭망하긴 했다. 그러나 자전차왕 엄복동의 최종 관객 17만명을 뜻하는 UBD라는 관객지수 하나만큼은 밈으로서 크게 유행했다. 170만 관객 영화는 10 UBD로 치환하는 식이다. 엄복동 10개 분량의 흥행을 해냈다는 뜻.

그러나 결과적으로 대유행한 두 밈 모두 망한 대상을 풍자할 때 쓰이는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여러모로 의도와는 달리 크게 망가졌는데 헛발질로 뜨게 된 격. 이전의 비처럼 탑급 스타로서 조명받는 게 아니라 놀림거리, B급 조롱거리로 유명해졌다는 점은 뼈아프다. 6집 시절마냥 의도하지 않은 병맛으로 인기를 끌게 되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그런데 이러던 와중, 폭망했다는 평가를 받던 곡 이 병맛 노래로서 뜬금없이 재조명되어 화 되며 다시금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 재조명은 단순한 유행으로 끝나지 않았고 깡 신드롬으로 불릴 정도로 2020년을 관통하는 대세로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폭풍의 시발점은 유튜브에 업로드된 깡 뮤직비디오였다. 깡 뮤비는 2017년 출시 당시만 해도 뮤비의 모든 점들이 가루가 될 때까지 닳고 닳도록 까이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뮤비 영상을 보며 노래와 영상의 구린 점을 비판해오던 청자들이 어느 순간 곡의 병맛과 특유의 이상한 포인트들, 괴상한 안무와 유치한 가사, 트렌드를 완전 놓친 올드함, 개연성이 붕괴한 근본없는 음악적 구성[33] 등에 중독되며 곡과 애증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34] 게다가 차에 타봐 같이 부담스러운 면이 강한 비의 다른 망곡들과는 다르게 화려한 조명이 나오기 전 EDM 파트의 비트 하나만큼은 수능 금지곡에 비견할만한 찰진 중독성이 있었고 반복재생을 돌릴 만한 편이었다.[35] 그러다 청자들은 깡을 혐오하면서도 즐기게 되는 기괴한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청자들은 유튜브 깡 뮤직비디오 영상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깡 특유의 밈[36], 그간은 밝혀지지 않았던 비의 이상한 습관들을 조명해내고 컨텐츠를 만들어내며 즐기게 되었다. '꾸러기 표정'이라거나 '재간둥이 눈빛'으로 대표되는 치명적 표정연기를 날조하는 버릇, 시도 때도 없이 질끈 깨무는 입술이나 윙크, 뺨에 바른 립스틱 자국 같은 과잉 그자체적인 부분들, 비의 작사곡에서 나타나는 초6 수준의 유치한 감성[37], '오빠'라는 단어에 집착[38]하는 것 같은 비 특유의 습관들이 이 시기에 밝혀진 요소다. 또한 깡 뿐만 아니라 '차에 타봐''어디 가요, 오빠' 같은 6집 시절의 묻혀 있던 수록곡도 어둠의 재조명을 받았고 노래의 구린 포인트가 하나하나 지적당하며 조롱성의 컬트적 인기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현상이 지속되며 2019년 시점에서는 '깡팸'이라고도 불릴 정도의 거대한 어둠의 팬층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깡팸은 깡을 허구한날 들어대며 온갖 비, 깡 관련 드립을 쏟아내었다. 깡 중독 현상은 가속화되었고 급기야는 '1일 1깡'이라는 신조어까지 생성될 지경이 되었다. 하루에 한번 깡을 듣고 댓글로 놀리지 않으면 욕구불만이 될 정도로 깡에 중독되어버린 것이다.

깡팸들은 유튜브깡 뮤비 댓글게시판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해당 게시판을 커뮤니티처럼 사용했고[39] 1일 10깡을 넘어서기까지 하며 반복적으로 뮤비를 시청했다. 동시에 깡팸은 너나 할 것 없이 적극적으로 각종 드립을 쳐댔고 묻혀 있던 비 관련 자료들[40]을 올리며 교류했다. 노래의 단점과 이상한 밈들을 매일같이 찾아내며 깡이나 비의 약점을 사정없이 파고들며 놀려댄 것이다.

비 본인이 폭소하며 읽기도 한 시무 20조도 깡팸의 내공이 무한으로 축적되던, 비에 대한 분석력 하나만큼은 비를 육성한 박진영 못지 않았던 이 시기에 탄생한 작품이다. 깡팸은 깡 뮤비와 비의 이전 영상들을 하도 반복 시청하다보니[41] 강제로 비 전문가가 되어버렸다. 깡 커뮤니티를 1회 이용할 때마다 강제로 BGM을 1번씩 들어야 하니 깡이나 비에 대한 이해도가 극히 높아져 버린 것이다. 덕택에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을 포인트들이 너무나도 잘 보이게 되었다.[42]

이 과정에서 묻혀 있던 망곡 깡의 유튜브 조회수는 지속적으로 상승했고 깡팸은 날이 갈수록 확장되어갔으며 깡의 기괴한 매력 역시 인터넷 커뮤니티 각지로 전파되었다. 결과적으로 폭망한 망곡이었던 깡이 날이 갈수록 떡상하기 시작했다. 발매된지 2년도 넘은 묵은 곡이 멜론 실시간 급상승 차트에 불현듯 고개를 내밀더니 난데없이 멜론 실시간 차트 18위까지 뛰어오르기까지 한 것.[43] 가요계에 전례가 없었던 이례적 역주행인 셈이다. 일련의 사정은 문서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이로 인해 네티즌들은 한 때 가창력 논란, 정치 관련 발언 등으로 숲튽훈이라는 멸칭[44]으로 불리며 커리어가 내리막길로 치닫다가 숲튽훈 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재기에 성공한 김장훈처럼 비 역시 이런 관심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했었다.

그리고 2020년, 비는 놀면 뭐하니? 출연 분에서 깡 관련 논란을 스스럼없이 자학 개그 소재로 써먹으며 훌륭하게 대처했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미지 전환에 성공했다.[45] 해당 방송의 매우 좋은 반응과 높은 화제성 덕분에 놀면 뭐하니?의 다음 기획으로 유재석, 이효리, 비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 싹쓰리가 결성되기에 이르렀으니 금상첨화였다.

여름 가요계를 음원 사재기 논란에 연루된 양산형 발라드들이 지배하는 기이한 현상에 대중들이 극도로 싫증을 느끼던 와중, 싹쓰리가 발표한 여름 시즌 곡들, 특히 다시 여기 바닷가가 2020년 여름을 휩쓰는 수준의 인기를 누린 것이다. 놀면 뭐하니? 방송분이나 싹쓰리 활동에서 비가 보여준 투덜이 캐릭터 같은 예능적 모습 또한 대중적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46]

결과적으로 비는 연이은 싹쓰리 활동 역시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며 제2의 전성기를 열 전환점을 찾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게다가 깡으로 인해서 결국 농심 새우깡 광고도 찍고 지프 광고도 촬영하는 등 결국 해피엔딩의 상황이 되었다.

비가 새로 개설한 공식 유튜브인 시즌비시즌도 구독자가 100만 명을 넘어서며 승승장구중.

이후 TVN 드라마 고스트 닥터에 주인공으로 출연하며 나아진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드라마도 호평을 받으며 배우로서도 재기에 성공했다.

[1] 과 고등학교 동기다. 과거 세븐이 같은 방송에 출연했을 때 과거 얘기를 했는데, 팬클럽 활동 이후 연습생으로 돌아간 3학년이던 비와 1학년이던 세븐이 포함된 춤 연습 멤버들이 있었는데, 당시 가수 활동을 하던 이 쉬는 시간에 지나가면서 그걸 보고 "애쓴다"는 의미의 거만한 표정으로 비웃었다고 한다. 세븐이 이 얘기를 하자, 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나 현재 두 고등학교 동창의 위상은 당연히 정반대인 데다가, 불미스러운 일까지 겪어서 지금도 여론이 영 좋지 않다.[2] 당뇨 말기에 걸렸지만 치료비가 부족해 초기 치료를 못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어머니는 비를 위해 돈 일부를 남겨 놓으셨다고. 비의 어머니는 용미리2 추모의 집에 안치되어 있다.[3] 또한 연예계 톱스타가 된 뒤에도 지인을 만날 때 밥은 항상 그 자리에서 제일 큰 형이 사야 한다고 생각하는 원칙이 있다고 한다. 그래야 인기도에 따라 분위기가 변하는 일이 없어 지인들과 멀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과거부터 비와 친했던 연예인 형들은 아직도 본인보다 잘 버는 비를 사적으로 만나면 비에게 밥을 사줘야 한다고. 그냥 짠돌이 아냐? 최근 몇년 전부터는 형들의 항의(?)에 의해 비가 밥을 사는 때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4] 이 계보는 이후 원더걸스2PM, 수지, TWICE 등이 이어받는다.[5] 박진영도 비의 유튜브 방송에 출연하여 반 농담식으로 JYP 사옥 1층은 비가 올렸다는 인정을 하기도 했다.[6] 정지훈 왈, "예능으로 사랑 많이 받았는데 떴다고 갑자기 안 나오고 그러는 건 아닌 거 같다."[7] 이 드라마로 KBS 연기대상 신인상, 네티즌상, 베스트 커플상을 수상했다.[8] 여담으로 이 곡을 작곡한 박진영은 약속 시간에 일찍 와서 주차장에서 기다리다가 보닛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잘생긴 외모는 어쩔 수 없구나 생각하다가 영감을 얻어 해당 곡을 작곡하게 됐다고 한다.[9] 댄스가수는 눈빛이 생명인데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면 안된다고 안무를 전부 다시 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10] 태국에서는 시청률이 무려 63%가 나왔다고 한다.[11] 드라마 작중 내용 상으로 탑스타로 등장한다[12] 몇몇 사람들은 이 시기에 가수로서의 인지도는 약해 일요일 일요일 밤에게릴라 콘서트에 도전했다가 참패하기도 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상두야 학교 가자는 2003년 10월 방송을 시작했고, 게릴라 콘서트는 2003년 1월에 방영되었으니 아직 배우 활동을 시작하기 전이므로 듣보 연예인이었을 수는 있어도 가수로서의 이미지가 배우의 이미지보다 약하던 시기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13] MKMF 최고 인기 뮤직비디오상, KBS 가요대상 대상.[14] 박진영이 작곡가로서 미국으로 진출함과 함께 비의 It's raining 뮤직비디오를 릴 킴 등의 미국 뮤지션들에게 보여주며 홍보를 했다. 그러나 이후 박진영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미국 진출 성향 때문에 아시아에 머물길 원하는 비와 충돌하였다는 후일담을 남기기도 했다.[15] 물론 이전에도 강수연, 박중훈, 전도연, 김윤진 등 서구권으로 진출했던 사례도 꽤 있었으나 이들의 행보가 지금의 한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많은 사람들에게 서구권으로의 진출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란 것을 보여주며 희망을 불어넣는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긴 했다. 실질적인 서구권에서의 한류는 이로부터 5년 정도가 지나서야 비를 시작으로 이병헌, god의 박준형, 원더걸스 등이 서구권으로 진출하며 발판을 마련하고, 이후 빅뱅이 이어오다 싸이가 포텐을 터트렸다 보는 것이 맞다.[16] 당시에 온라인 투표 1위를 하면 타임지 100인에 선정된다는 낭설은 타임지에서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이벤트성일 뿐 선정에는 영향이 전혀 없다는 말. 실제로 비뿐 아니라 한국 연예인들 중에 타임지 온라인 투표 상위권을 차지한 연예인들은 여럿 있었지만 한국 연예인 중에 선정된 건 딱 둘뿐이다.[17] 뉴욕타임스에서 “무대에서 공연하는 그를 보는 것은 한국말로 더빙된 오래된 MTV의 비디오를 보는 것 같았다. 자기 색깔이 없다."는 혹독한 평을 내린 바 있다. 기사 링크 또한 뉴욕 데일리 뉴스에서는 비의 음악이 미국의 90년대 음악의 모방에 머물고 있다고 하기도 했다.[18] 한국 배우 최초의 할리우드 영화 주연은 1998년 아메리칸 드래곤의 주연을 맡았던 박중훈이다. 하지만 박중훈은 단독이 아닌 공동 주연이었다.[19] 박진영은 미국병 소리를 들을 정도로 비, 원더걸스를 미국으로 계속 진출시켰고 임정희와 G-Soul 등을 미국 데뷔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본인도 작곡가로서의 미국 진출 스토리, 한국식 근성 영업 썰과 릴 킴과 R 켈리, 윌 스미스 등의 미국 스타들과의 썰을 무릎팍도사나 놀러와 같은 방송에서 풀며 국위선양적 대리만족 마케팅을 한 바가 있다.[20] 박진영의 월드스타 브랜딩 전략은 2020년, Nizi Project에서도 다시 한 번 재활용 된 바가 있다. 일본 방송에서 박진영이 월드클래스급으로 활동하는 거물 작곡가로 이미지가 연출되는 식. 그러나 2020년의 박진영은 K-POP의 마스터라고는 할 수 있어도 미국 진출 실패 이후 북미 시장에서 뚜렷한 활동이 없는 상태였다. 즉,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Nizi를 프로듀싱해 준다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일본 국내용 연출이었던 것. 아무래도 한국이나 일본이나 세계에서 인정받는다는 키워드에 매우 약하다.[21] 당시 유명했던 소셜미디어인 페이스북, 마이스페이스를 보면 그 인기를 알 수 있다. 당시 10대, 20대 대부분의 남자들은 좋아요를 누른 메간폭스의 페이지가 반드시 하나씩 있었을 정도였다.[22] 이병헌이 헐리웃 진출한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헐리웃 관계자들은 아직도 티켓 파워를 가진 한류스타를 선호하는 편이라고 한다. 지아이조에서 이병헌이 캐스팅된 이유가 다름 아닌 일본 팬미팅 영상 때문이라고 한다.[23] 스피드 레이서 촬영이 진행되던 중간에 함께 식사하던 워쇼스키가 대놓고 비에게 "다음에 만들 영화도 준비 중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주인공은 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비는 너무 신이 났다고 한다.[24] 여기서도 체지방 0% 달성 발언을 해 과장된 마케팅으로 빈축을 산 바 있다.[25] MTV Movie Award가 영화 시상식이지만 아카데미골든 글로브같은 정통 영화 시상식이기보다는 젊은 층의 타겟을 상대로 좀 더 가볍게 다루는 시상식이다. 시상하러온 배우들도 그냥 즐기다 가는 정도지 무슨 아카데미나 골든 글로브처럼 MTV로부터 수상받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던지 연기를 한다던지 같은 건 없다. 애초에 MTV인데 아카데미나 골든 글로브같은 영화 시상식과 비교될리 만무하다. 다만, 의미가 없는 상은 아니고 한해의 인기상 시상식이라고 보면 된다. 심사위원들이 수상항목과 후보자를 결정하고 투표로 수상자를 결정한다. 수상 항목은 해마다 변경되며 수상하고 싶은 대상자가 있지만 적당한 수상 항목이 없으면 항목이 새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대상자가 없으면 수상 항목 자체가 사라질 정도로 매우 유연한 영화제다. 예를 들어 Virtual Actor는 오직 2명의 수상자가 있을 뿐이다. 비가 수상한 항목도 2010년, 2011년에만 수상자가 있다.[26] 멜론 연간 차트 96위[27] 이렇게 시작된 비의 작사작곡 욕심은 6집에서 최악의 결과를 낳게 된다.[28] 강남스타일 히트 후의 싸이나 빌보드 차트 등극 이후의 방탄소년단의 위상에 비견할 수준이었다.[29] 라파엘 사딕(Raphael Saadiq)의 Detroit Girl과 제목, 컨셉, 도입부, 후렴구까지 흡사한 표절이라는 지적이다.[30] La Song의 LaLaLa가 반복되는 훅은 태진아를 연상케 하는 트로트스럽게 구수한 포인트가 있었다. 때문에 대중 사이에서 병맛 포인트로 화제가 되었고 여러 매쉬업 패러디물을 낳기도 했었다. 해당 훅을 태진아가 부르면 딱이겠다는 반응이 많던 도중에 시의적절하게 콜라보를 추진한 것.[31] 참고로 비 본인은 30 Sexy가 본인이 원했던 곡이며 La Song은 다른 이들이 점찍은 곡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32] 비의 눈치를 보는 듯한 작곡가 배진렬의 클립이 나온 바로 그 방송이다. 새 앨범을 모니터링 하는 '비'[33] 아무 빌드업도 없는 상태에서 EDM 비트 바로 뒷부분의 훅이 갑자기 발라드가 되어버리는 기괴한 구성이다. '화려한 조명' 한 마디로 설명이 끝나는 부분이며 사람들이 깡에서 가장 치를 떠는 요소. 음악적 구성도 근본이 없는데 가사도 갑자기 자기자랑에서 사랑고백으로 바뀌며 근본이 더욱 없어진다. 그러나 후일 깡에 중독된 사람들은 근본없기로 유명한 깡의 발라드 파트마저 흥얼거릴 정도가 된다.[34] 유튜브 깡 뮤비 게시판의 '이 커뮤니티는 다 좋은데 BGM이 별로'라는 댓글이 깡에 대한 팬들의 기묘한 애정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시다.[35] 의 비트는 길(가수)의 작곡팀 Magic Mansion의 작품이다. 길의 비트메이커로서의 우수한 역량은 이미 유명하다. 리쌍 시절의 기라성같은 히트곡 및 쇼미더머니 5 시절 약체로 평가받던 팀을 멱살잡아 끌어올리고 기어코 호랑나비를 히트시키는 등 무수한 사례로 증명된 사실.[36] Hundred Dollar Bill, 화려한 조명, 꼬만춤, 팔척귀신 댄스, 갑옷 방탄조끼, RAIN 스냅백 등 밈이 한도 끝도 없이 발굴되었다.[37] 차에 타봐가 대표적이다.[38] 비는 인스타그램 ID도 rain_oppa다.[39] 보통은 영상에 대한 소감만 짧게 쓰는게 유튜브 댓글 게시판이다. 그런 게시판이 깡팸 개개인의 일상적 소소한 사건들을 공유하고 공감성 게시글을 올리는 등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나 네이버 카페화 되어버린 것. 일종의 디시인사이드 비 갤러리의 역할을 수행했다고도 볼 수 있다.[40] 해당 영상이 대표적이다.[41] 깡 뮤직비디오를 여러번 시청하다보면 유튜브 추천 영상이 비 관련 영상으로 도배된다. 정신 차리고 보면 비의 과거 공연 영상이나 뮤직비디오만 보고 앉아있게 되는 것. 이 과정에서 비의 화려했던 전성기 곡들에 대한 재평가, 아쉽게 묻힌 곡들에 대한 재조명도 강제로 이루어졌다. 심지어는 La song이나 30 Sexy같이 활동 당시는 악평받았거나 반응이 애매했던 곡들도 평가가 대단히 높아졌다.[42] 일부 깡팸 멤버들의 경우 반복훈련으로 눈이 너무 트인 나머지, 비의 전속 댄스팀 와일드 래빗 팀원들의 군무 싱크가 맞지 않는다, 어떤 영상에선 기량이 괜찮은데 6집 시점부터는 실력이 저하되고 있다는 부분이 보일 정도였다.[43] 놀면 뭐하니?출연과 싹쓰리 결성이 시너지를 낸 결과이기도 하다.[44] 훌륭한 가수 김장훈과 괴이한 창법으로 노래를 망쳐대는 어둠의 인격 숲튽훈이 공존한다는 밈이다. 전성기 시절 노래를 잘 부르던 무대 영상김장훈이고 활동 후기의 일렉기타 창법, 제멋대로 뜬금없이 박자타기, 정상적인 진행 도중 난데없는 괴성 등 이상하게 노래를 부르는 영상은 숲튽훈으로 취급하는 식.[45] 사실 이미 깡으로 이미지가 희화된 것을 유튜브 등지에서 쿨하게 인정하며 오히려 깡밈을 고평가하는 대인배같은 모습을 보였기에 평가가 높아진 와중이었다. 놀면 뭐하니?에서 이미지 상승의 결정타가 된 셈.[46] 물론 놀면 뭐하니?싹쓰리 기획에서 가장 큰 수혜를 입은건 린다 G라는 강력한 예능적 캐릭터를 보여준 이효리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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