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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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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바알벡 01.png
유적지 전반부
파일:7165535335_844504c5c0_k.jpg
바알벡의 상징인 바쿠스(그리스어: 디오니소스)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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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한국어 바알베크
아랍어 بعلبك
영어 Baalbek
프랑스어 Baalbek
국가·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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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카 주, 바알벡 현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294
등재연도 1984년
등재기준 (ⅰ)[1], (ⅳ)[2] }}}

1. 개요2. 역사3. 헬리오폴리스 유적
3.1. 바쿠스 (디오니소스) 신전3.2. 유피테르 (제우스) 신전

1. 개요

파일:바알벡.jpg 파일:바알벡 신전 2.jpg
유적지 전반부 바수스 신전 내벽
아랍어 بعلبك‎
라틴어 Heliopolis
영어 Baalbek[3] / Baalbec / Baalbeck

레바논 동부 베카 주의 도시. 수도인 베이루트에서 북동쪽으로 85km,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에서는 북으로 75km 떨어진 베카 협곡 분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10만명이다. 고대 가나안 지역 토속신인 바알에서 도시명이 유래했다. 기워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3세가 '태양의 도시'란 뜻인 헬리오폴리스 (Ἡλιούπολις)라 명명했고, 로마 제국 시기에 세워진 바쿠스 신전을 찾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십자군 전쟁기에는 이슬람권의 중요한 요새로서 아미르(총독)가 다스렸으며 살라흐 앗 딘의 부친인 아이유브가 그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유피테르 신전은 거대한 성채였다. 도시는 몽골 제국의 파괴와 연이은 지진으로 점차 쇠퇴했다. 1984년 신전군은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주민들은 시아파 무슬림 60%, 수니파 무슬림 34%, 기독교도 6%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도시는 헤즈볼라가 실질적으로 지배 중이며, 2006년과 2024년 이스라엘 군의 공습으로 각각 13명과 1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2. 역사

파일:바알벡 벽.jpg 파일:바알 1.jpg
가나안 문명기에 세워진 신전 기단부 바알-제우스(유피테르) 신상
파일:바알벡 27.jpg
서남쪽 외곽의 채석장

라스 알 아인 샘 근처의 텔 바알벡, 즉 언덕부에는 기원전 6천년 경부터 마을이 있었다. 매년 봄에는 안티 레바논 산맥의 눈 녹은 물이 흘러내려 수자원이 풍족했다. 이집트 신왕국아시리아 제국 시기부터 종교적 의미가 있었고, 티레에서 팔미라로 이어지는 교역로 상에 있었기에 경제적으로도 번성했다. 가나안 문명기 현재의 신전군 일대에는 태양신 신앙의 남성신인 '바알'과 여신인 '아스타르테 (아슈타르트)', 둘의 아들인 '아돈'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다.

이슬람측 전설에 따르면 신전군 일대는 솔로몬 (술라이만)의 궁전이 있었고, 신령인 '진'이 완공한 후 솔로몬이 셰바 왕비에게 결혼 선물로 주었다 한다. 그러다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태양의 도시란 뜻인 '헬리오폴리스'라 명명했고, 셀레우코스 왕조에 속했다가 기원전 64년경 로마 제국령이 되었다. 종교 측면 외에도 헬리오폴리스는 계절 장이 열리면 시리아 각지의 상인들이 몰리며 번성했다.

2.1. 로마 제국

파일:바알벡 2.jpg
로마 시기 헬리오폴리스 복원도
파일:바알벡 1.jpg
제우스 (유피테르) 신전
파일:바알벡 정문.jpg
신전군의 입구인 프로필라이아

기원전 40년경 율리우스 카이사르 혹은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제5 및 제8 군단의 퇴역병들을 정착시키며 '콜로니아 율리아 아우구스타 펠릭스 헬리오폴리타나'라 명명했고, 이로써 바알벡은 로마의 식민 도시가 되었다. 동시에 로마 군대가 주둔하게 되었고, 행정적으로는 기원전 15년부터 시리아 속주 산하 베리투스 (베이루트) 시에 귀속되었다. 도시의 주신 바알은 그리스의 태양신 헬리오스와 동일시되었다가, 로마의 최고신인 유피테르 혹은 '헬리오폴리스의 제우스'로 치환되었다. 서기 1세기 중반에 기존 바알 핫두 신전은 대대적으로 개조되어 60년 무렵 유피테르 신전을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거대한 신전군이 되었다. 전차 몰이꾼의 모습으로 오른손에 천둥, 왼손에 곡물 줄기를 쥔 수염 없는 유피테르의 금 조각상은 현지에서 주조된 동전에 항상 묘사되었고 매년 축제 때마다 가두행진에 등장했다.[4]

바알은 유피테르, 아슈타르트는 베누스로 치환되었고 여기에 바쿠스 (디오니소스)를 더하여 3개의 신전이 신전군을 이루었다. 근처 언덕에는 아돈 혹은 메르쿠리오스를 모신 신전도 있었다. 1~3세기 헬리오폴리스는 로마와 함께 지중해권의 양대 다신교 도시로써 로마 제국의 신탁 성지 중 하나였고, 아테네에서 브리타니아 (영국)까지 그 표식이 나타냈다. 트라야누스 황제도 2번이나 방문해 신탁을 받았다.[5] 193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주민들에게 이탈리아인 권리를 주었고, 이로써 헬리오폴리스는 베리투스 관할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시가 되었다.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에 도시는 시리아 데카폴리스 (10개 도시) 연맹의 일원으로 기술되었다.

215년에는 율리아 돔나카라칼라 모자가 방문했다. 10여년 후 카라칼라의 조카인 태양신 사제 출신의 시리아인 황제 엘라가발루스는 바알을 상징하는 검은 원뿔형 돌을 로마로 가져갔다. 3세기 들어 시리아의 기독교화가 가속화 될 때에도 헬리오폴리스만큼은 굳건한 다신교 도시로 남았다. 이에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오스 등의 주교들이 도시의 다신교 신앙을 비판하며 날을 세웠다. 3세기 말엽 현지 다신교 유력자 디오스코로스가 딸 바르바라의 개종을 알게 되자 직접 참수형을 집행했는데, 그 직후 벼락을 맞아 죽었다 한다. 297년에는 기독교 세례를 모욕하는 연극이 진행되던 중에 배우 겔리시노스가 공개적으로 기독교 개종을 선포하자 분노한 군중이 그를 끌고나가 투석형으로 죽였다. 그럼에도 점차 기독교도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4세기 초엽 사제 키릴로스가 헬리오폴리스의 여러 우상을 파괴했다가 살해되었다.[6]

2.2. 동로마 제국

파일:바알벡 제단.jpg
바실리카로 개조된 안뜰의 제단 일대
파일:베누스 신전 1.jpg
성녀 바르바라 성당으로 개조되었던 베누스 신전

밀라노 칙령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는 여신들의 신전을 허물고 바실리카 (성당)을 세웠다. 그는 또한 결혼 전에 여성에게 매춘을 시키고 중혼하는 현지 풍습을 금지했는데, 이에 분노한 주민들이 현지 기독교도 처녈을 강간 및 고문흐기도 했다. 율리아누스 시기에 주민들은 재차 기독교도들을 괴롭혔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벌로써 헬리오폴리스로 추방되기도 했다. 이미 지진으로 크게 훼손되어 있던 유피테르 신전은 기독교를 국교화한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철거 후 폐허의 자재들을 이용하여 바실리카로 개조되었다. 또한 이때 여러 군소 신전 및 성지들이 파괴되었다.

400년 무렵 미래의 에데사 (샨르우르파) 주교 랍불라가 다신교 의례를 방해하여 순교하려 했지만, 동료들과 신전 계단 밑으로 던져지는 것에 그쳤다. 얼마 후 헬리오폴리스는 자채적인 주교구가 되었다. 5세기의 학자 요안니스 말랄라스는 헬리오폴리스는 세계의 불가사리라 일컬으며 2세기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상당 부분 건설했다고 저술했다. 530년대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신전군에서 코린트 양식의 기둥 8개를 뽑아 선편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어 성 소피아 대성당 장식에 활용했다. 다만 6세기 후반까지 헬리오폴리스에는 유피테르의 황금상이 있었고 7세기까지도 그 궁전, 기념물, 정원들로 명성이 높았다.

2.3. 중세

파일:바알벡 우마이야 모스크.jpg
파일:우마이야 바알벡.png
우마이야 왕조 시절에 세워진 모스크.

이슬람 정복 시기 다마스쿠스 함락 후 635년 가을 무렵 헬리오폴리스는 이슬람 제국군에 항복했다. 항복 당시 안전 보장을 대가로 금 57kg, 은 110kg, 비단 2천필, 검 1천 자루 등이 공물로 바쳐졌다 한다. 636년 야르무크 전투 후 이슬람 제국의 지배력은 더욱 공고해졌고, 지명은 옛 아람어 표기인 바알벡으로 환원되었다. 폐허가 된 신전군은 요새화되어 '알 칼라아' (요새)라 불렸고, 748년 칼리파 마르완 2세가 대대적으로 약탈했다. 그후 주민들이 대부분 떠나 바알벡은 소도시로 전락했고, 우마이야 왕조압바스 왕조를 거쳐 10세기 후반 파티마 왕조 령이 되었다. 바알벡 신전군의 폐허는 대리석 기둥 공급처로 알려졌고, 974년 요안니스 1세와 1001년 바실리오스 2세의 동로마 군대가 다시 도시를 약탈했다. 1025년에는 미르다스 왕조령이 되었다가 1075년 셀주크 제국이 정복했다.

2.3.1. 십자군 전쟁

파일:부스탄 알 칸.jpg
로마 시대 열주가 남아있는 부스탄 알 칸 (신전군 남쪽)

1080년 바알벡은 우카일 왕조령이 되었다가, 1083년 다시 셀주크 령이 되어 튀르크 아미르 귀뮈슈테긴이 통치했다. 1100년 봄 다마스쿠스의 셀주크 아미르 두카크는 바알벡 근처를 지나던 보두앵 1세보에몽십자군을 습격해 격파했다. 1110년 귀뮈쉬테긴이 십자군에 항복하려 하자 다마스쿠스의 부리 왕조 아미르 툭테긴은 아들 타즈 알 물크 부리에게 군대를 주어 보냈고, 그해 4월 부리는 바알벡을 점령한 후 그 총독에 봉해졌다. 1128년 툭테긴의 사후 부리가 계승했고, 그는 삼남 자말 앗 딘 무함마드를 바알벡 총독으로 봉했다. 1134년 부리의 사후 무함마드는 연이어 즉위한 형들인 이스마일과 마흐무드의 공격을 격퇴하며 도시를 계속 통치했다.

한편 시리아 통일을 원하던 장기 왕조는 1137년 11월 바알벡 남쪽의 마즈달을 점령했고, 이마드 앗 딘 장기와 대립하던 권신 우누르는 1139년 6월 아미르 마흐무드가 사망하자 바알벡의 무함마드를 옹립했다. 이에 무함마드는 우누르에게 바알벡을 영지로 주었는데, 반발한 장기가 남하해 9월 초엽 14대의 투석기와 함께 바알벡 성채를 포위했다. 10월 10일 성채가 함락된 후에도 바쿠스 신전을 개조한 시타델은 계속 저항하다가 11일 후, 장기의 안전 보장 약속에 항복했다. 하지만 장기는 37명의 수비대를 십자가에 못박고 수비대장은 책형으로 잔인하게 죽였다. 이로써 이어진 다마스쿠스 포위에서 주민들은 결사 항전했고, 장기의 시리아 통일은 무산되었다.
2.3.1.1. 장기 왕조
파일:바알벡 성벽.jpg
누르 앗 딘이 보강한 성벽
파일:바알벡 24.jpg
시타델로 쓰인 바쿠스 & 유피테르 신전

아바크에게 항복하면 홈스 혹은 바알벡을 준다는 장기의 제안 역시 우누르의 반대로 거절되었다. 1140년 3월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우누르가 실권자가 되었고,[7] 십자군과 군사 동맹을 맺었다. 그해 6월 우누르-십자군 연합군이 바니야스를 점령하자 장기는 다마스쿠스 봉쇄를 풀고 바알벡으로 철수한다. 얼마 후 장군 아이유브를 총독에 봉한 장기는 다시 다마스쿠스로 남하하지만 명목상의 복속을 얻은 것에 만족하고 회군한다. 1146년 10월, 장기 사후의 혼란을 틈타 우누르는 바알벡을 수복하고 환관 아타 알 카딤을 총독에 봉했다. 1151년 6월, 다마스쿠스의 우누르가 십자군에 맞서 도움을 청하자 장기의 아들 누르 앗 딘 마흐무드가 바알벡으로 남하한 후 회군했다.

그해 12월, 튀르크 유목민들의 바니야스 약탈 후 반격에 나선 십자군 주둔군은 베카 협곡을 약탈했지만 아이유브에게 격퇴되었다. 그 무렵 아타 알 카딤의 사후 와디 앗 타임의 태수이던 조카 다하크가 바알벡 총독이 되었다. 1154년 아이유브는 다하크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이에 아바크가 의심하자 결국 다하크는 누르 앗 딘에게 항복했다. 이후 다시 바알벡 총독에 봉해진 아이유브는 다마스쿠스 봉쇄 및 아바크가 이슬람의 배신자라는 여론을 조성하는 등 같은해 4월 누르 앗 딘의 다마스쿠스 정복을 도왔다. 다마스쿠스에 상주하며 바알벡 역시 관리하던 아이유브는 곧 수도 장관 격이 되었고, 후임 바알벡 총독은 1157년 5월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응징되었다.
12세기 중반의 지리가 알 이드리시는 바알벡에 두 시전이 있고, 솔로몬 관련 전설을 언급했다. 1170년에는 유대인 여행가 투델라의 벤자민이 방문했다. 또한 바알벡은 1139년, 1157년, 1170년에 지진을 겪었고 마지막의 경우 성벽이 무너졌다. 이를 수리한 누르 앗 딘은 난공불락의 시타델 (바쿠스 신전)에 십자군 포로들을 수감했는데, 1171년 포로들이 봉기해 간수를 제압하고 성채를 장악했다. 하지만 주변 무슬림들이 몰려와 포위했고, 현지 주민이 알려준 비밀 통로로 진입해 십자군 포로들을 학살하며 봉기를 진압했다. 1175년 3월에는 아이유브의 아들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살라딘)가 바알벡을 포위해 4개월의 공성전 끝에 점령했다.
2.3.1.2. 아이유브 왕조
파일:바알벡 21.jpg
남문 역할을 한 바쿠스 신전의 동벽 일대

살라딘은 반격에 나선 모술의 아미르 사이프 앗 딘에게 바알벡, 홈스, 하마 할양을 제안했으나 묵살되었다. 같은해 4월, 하마 전투에서 장기 왕조 연합군에 승리한 살라딘은 작년에 다마스쿠스를 넘겨준 샴스 앗 딘 이븐 알 무캇담을 바알벡 총독에 봉하며 일대를 이크타 (영지)로 주었다. 1176년 4월, 살라딘의 알레포 포위를 틈타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가 베카 협곡을 습격했으나 이븐 알 무캇담에게 격퇴되었다. 다만 8얼에 보두앵 4세와 토론 영주 옹프루아의 십자군 본대가 아인 앗 자르에서 살라딘의 동생이자 다마스쿠스 총독인 투란 샤를 격파하고 (시타델을 제외한) 바알벡을 약탈했다가 살라딘이 남하하자 철수했다. 이후 1178년, 살라딘은 투란 샤를 다마스쿠스 총독에서 해임했다.

이에 투란 샤는 고향인 바알벡을 영지를 요청했고, 살라딘이 허가했다. 하지만 이븐 알 무캇담이 거부해 살라딘은 무려 6개월간 성채를 봉쇄했고, 그는 십자군에 도움을 청했으나 그들은 살라딘과 휴전 중이었기에 개입하지 않았다. 결국 1179년 봄 이븐 알 무캇담은 협상을 통해 마라트 알 누만, 바린, 카파르탑 영지를 대가로 항복했고 투란 샤가 새 총독이 되었다. 다만 같은해 투란 샤는 알렉산드리아로 전임되었고, 살라딘은 다마스쿠스 총독인 조카 파루크 샤에게 바알벡 총독도 겸임시켰다. 1182년 6월 파루크 샤는 바알벡 등 시리아 병력으로 십자군령 하비스 잘두크를 점령했다. 같은해 파루크 샤가 사망한 후 어린 아들 알 암자드 바흐람 샤가 계승해 향후 반세기 가량 통치한다.

1201년 알레포의 앗 자히르가 알 아딜의 다마스쿠스를 노리자 알 암자드는 승리자의 편에 서기로 합의했다. 1203년 5월 알 암자드는 바린으로 진격하던 트리폴리 백국과 구호기사단의 십자군을 격퇴했다. 1230년 바흐람 샤의 사후 술탄 알 카밀의 동생인 다마스쿠스의 아미르 알 아슈라프 무사가 바알벡을 병합했다. 1238년 알 카밀에게 다마스쿠스를 잃은 앗 살리흐 이스마일은 이듬해 바알벡 및 보스라 영지를 받았다. 1240년 6월 이스마일은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의 타협으로 다시 다마스쿠스 아미르가 되었다. 다만 술탄과 대립하던 이스마일은 1244년 6월, 술탄의 호라즘 용병대가 남하하자 토벌군을 보냈으나 바알벡 남쪽의 알 자르에서 호라즘 군에 전멸되었다.[8]

1245년 10월, 이스마일은 오랜 공성전 끝에 다마스쿠스를 포기하며 기존 바알벡-보스라 영지의 유지를 대가로 항복했다. 하지만 이듬해 이스마일이 호라즘 용병대와 함께 다마스쿠스를 포위하자 분노한 술탄은 알 카삽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했다. 바알벡으로 후퇴했던 이스마일은 알레포로 도주했고, 1246년 5월 홈스 영주 알 만수르 이브라힘이 도시를 포위했으나 이스마일의 장남 알 만수르 마흐무드가 시타델에서 결사 항전하자 이듬달 회군했다. 다만 그해 9월, 술탄의 다마스쿠스 총독 후삼 앗 딘이 포위 끝에 바알벡 시타델을 항복시켰다. 이로써 도시는 오랜만에 술탄의 직할령이 되었고, 사드 앗 딘 알 후마이디가 아미르 (총독)으로 봉해졌다.

2.3.2. 맘루크 왕조

파일:바알벡 모스크.jpg
술탄 칼라운이 세운 모스크

1260년 2월,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몽골 제국의 장군 키토부카는 4월에 그 시타델을 포위하며 바알벡 총독 하집 슈자 앗 딘 이브라힘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이에 슈자 앗 딘은 순교하겠다며 거부했고, 곧 몽골군이 도시를 점령한 후 시타델을 포위했다. 저항하던 슈자 앗 딘은 종교 유지들이 주민들의 피해가 막대할 것이라며 교리를 앞세워 설득하자 결국 키토부카와 협상, 자신 및 가족들이 다마스쿠스로 안전히 향하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1260년 5-6월) 하지만 몽골에 귀순한 아미르 자인 앗 딘 알 하피지가 훌라구 칸에 참소해 슈자 앗 딘의 처형을 인가받았고, 이로써 키토부카는 못마땅했지만 형을 집행했다. 이후 키토부카는 바알벡 성벽을 허물었다.

한동안 바알벡에 주둔하더 키토부카는 8월 무렵 나사렛을 지나 티레로 향했고, 이듬달의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패해 전사한다. 그후 바알벡 인근 진영에 남겨진 키토부카의 가족들은 맘루크 측에 포로로 잡혔고, 도시는 맘루크 왕조령이 되었다. 1261년 1월에는 술탄 바이바르스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한 다마스쿠스 총독 알람 앗 딘 산자르 알 할라비는 바알벡 시타델로 도주했지만 결국 붙잡혀 진압되었다.[9] 1280년 10월, 일 칸국군이 알레포를 점령하자 주민들이 난민이 되어 남하하며 일부는 바알벡으로 피난했다. 다만 술탄 칼라운이 반격에 나서자 몽골군은 철수한다. 칼라운의 치세에 바알벡 성벽은 재건되었고, 현존하는 모스크가 세워졌다.

1290년 칼라운에 이어 아크레 포위를 준비하던 술탄 알 아슈라프 칼릴은 레바논 산의 목재로 바알벡에서 당대 역사상 최대 규모의 투석기인 알 가비다를 제작해 분해한 후 그해 12월 말엽, 다마스쿠스로 이동했다. 이듬해 봄, 알 가비다의 활약과 함께 아크레가 함락되며 레반트 해안은 십자군의 위협에서 벗어난다. 14세기 초엽의 지리가 아불 피다는 바알벡이 크고 강한 요새라 기록했다. 다만 도시는 1318년 5월 10일의 대홍수로 194명이 사망하고 시가지가 파괴되었다. 주택 1500채, 과수원 44개, 화덕 17개, 제분소 11개, 수도교 4개, 모스크 등 13개의 종교 및 교육 시설도 파손되었고 성벽에는 30m 너비, 4m 깊이의 구멍이 생겼다. 1400년에는 티무르가 바알벡을 약탈했고, 1459년에도 지진으로 인한 피해가 있었다. 3세기 반동안 이어진 맘루크 조의 지배는 1516년, 오스만 제국이 시리아를 정복하며 종식되었다.

2.4. 오스만 제국

파일:바알벡 16.jpg
유럽인들이 자주 묘사한 바쿠스 신전의 기울어진 기둥
파일:바알벡역.jpg
반세기 가까이 운영이 중단된 바알벡 역

오스만 조정은 바알벡 출신의 쉬아 무슬림 세력인 하르푸쉬 가문에게 홈스 산작 및 베카 협곡의 일티잠 (수조권)을 맡겼다. 하르푸쉬 셰이크들은 현지 교회 지도자 선출 및 현지 기독교 수도원 경영도 관여했다. 18세기 들어 레바논 아미르국과 하르푸쉬 가문의 대립이 지속되자 바알벡의 기독교도들은 더 안전한 남쪽의 자흘레로 대거 이주했다. 이후로도 하르푸쉬 가문은 자흘레의 정교도 세력인 말루프 가문과 친교를 유지했고, 파크르 앗 딘 2세에게 격파된 후 그 보호를 받기도 했다. 기독교도 외에도 쉬아 무슬림인 우사이란 가문더 바알벡을 떠나 시돈에 정착, 상업으로 부를 쌓고 이란의 영사를 맡기도 했다. 이렇듯 많은 인구 유출과 자흘레의 성장으로 바알벡은 점차 쇠퇴했다.

다만 유럽 지식인들은 가장 잘 보존된 로마 시대 신전 유적이라 칭송하며 바알벡 방문을 선망했고, 영국의 세인트 조지 성당 등 여러 신고전주의 건축에 영향을 주었다. 그 무렵 신전군 유적의 서쪽에는 무성한 호두나무가 자라 입구를 가렸다. 바알벡은 1759년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으며 더 쇠퇴했고, 아밀 산지의 메타왈리 부족의 지배 하에 놓였다. 18세기 말엽 메타왈리 부족은 제자르 파샤에게 격파되었다. 1804년 제자르 파샤의 사후 권력 공백 기간 동안 베카 협곡을 지나는 여행자들은 무장 호위대를 대동해야 했다. 1831년 메흐메트 알리 파샤의 시리아 정복 후 하르푸쉬 가문이 복귀하며 질서가 회복되었다. 1835년 기준 인구는 2백여 명에 그쳤다. 1850년 오스만 조정은 바알벡을 다마스쿠스 에얄레트 산하 카자 (읍)로 삼았고, 카이마캄 (시장)을 두었다. 1902년 바알벡에는 베이루트, 다마스쿠스, 홈스를 잇는 철도역이 세워졌다. 1915년 기준 바알벡의 인구는 5천명이었고 쉬아 무슬림 2천, 순니 무슬림 2천, 기독교도 1천으로 구성되었다.

2.5.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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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발라 참극 후 압송되다가 바알벡에서 죽었다 하는 후세인의 딸 카울라의 영묘. 시아파 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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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에 보수된 내부의 모습

70년대 레바논 내전 후 열차 운행은 중단되었다. 2006년 레바논 전쟁에서 이스라엘 특공대가 헤즈볼라가 바알벡에 감금한 이스라엘군 포로를 구출하며 시가지에 70발이 넘는 폭탄을 떨어뜨렸다. 전쟁 기간 동안 바알벡에서는 약 15명이 사망했고 시장이 크게 파괴되었으며 유적이 일부 훼손되었다. 2019년에 다시 이스라엘이 바알벡을 공습했다. 2020년 7월 바쿠스 신전에서는 야간 오케스트라 공연이 있었다.

3. 헬리오폴리스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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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문명기에 세워진 신전 기단부 바알-제우스(유피테르) 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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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군 일대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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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수스 신전 동문 베누스 신전 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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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쿠스 신전 (좌)와 유피테르 신전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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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누스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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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누스 신전과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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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탄 알 칸 (칸의 정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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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탄 알 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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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뜰의 회랑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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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뜰의 돔형 테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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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뜰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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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라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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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수스 신전 동문의 독수리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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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 기단부의 육중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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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장

3.1. 바쿠스 (디오니소스)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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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유피테르 (제우스)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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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정확한 발음은 Baʿalbek[4] 신상을 지는 자들은 도시의 유력자들이었고, 머리를 깎아 경건함을 표했다[5] 첫 신탁에서 그는 백지를 봉인해 냈는데, 답변 역시 공란이라 탄복했다 한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이 파르티아 원정에서 생환할지 여부를 물었는데, 조각난 백인대장의 포도나무 지팡이를 받았다 한다.[6] 일설에 의하면 일부 군중이 시체를 가져다 식인을 했다고도[7] 무함마드의 사후 아들 무지르 앗 딘 아바크가 옹립되었는데, 어렸기에 아직 바알벡 총독을 경험하지 못했다[8] 이로써 시리아 제후 연합군의 이집트 침공은 무산된다[9] 다만 사면되어 후일 알레포 총독까지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