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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윤국

파일:문윤국.jpg
금산(錦山)
본관 남평 문씨[1]
출생 1877년 음력 1월 30일
평안도 정원현 덕달통 이리[2]
(현 평안북도 정주시 원봉리)
사망 1958년 1월 2일 (향년 81세)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북평리 노루목
가족 아내 전주 이씨
1남 문경운, 2남 문경호, 3남 문경봉
직업 한학자(漢學者), 소학교 교사
장로회 목사, 독립운동가
종교 개신교(장로회)
학력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졸업)
상훈 1977년 대통령 표창 추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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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禱天設誓向南雲이라 在生當作民權黨이오、寧死언뎡 不隨傀儡群。
해석: 남녘 구름을 바라보며 하늘에 기도하며 맹세하건대 살아서 민권당이 되어야지, 차라리 죽을지언정 괴뢰의 무리를 따르지 않으리라.
문윤국의 친필 유서(1954년) 중에서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기독교 장로회 목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교주 문선명의 작은할아버지, 즉 막내 종조부이다.

2. 생애

문윤국은 1877년 음력 1월 30일, 평안도 정원현(현 평안북도 정주시) 덕달통 이리 문촌(文村)에서[3] 문정흘(文禎紇)과 연안 김씨 김유환(金有煥)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자매로 맏형 문치국(文致國)과 둘째 형 문신국(文信國), 그리고 차방윤(車方允)과 홍준구(洪俊九)에게 각각 시집간 누이 2명이 있었다.

그는 1898~1901년에 유학자(儒學者)인 일암(一菴) 백예행(白禮行)[4] 문하에서 한문을 배웠다. 그리고 1902~1908년정주군 덕언면 덕흥동의[5] '덕흥의숙'(德興義塾)에서 한문 교사로 일했다. 또한 1911~1912년에 정주군 정주읍의 '신안소학교'(新安小學校)에서 교사로 일했다.

문윤국은 전주 이씨 이학수(李鶴洙)의 딸과 결혼하여 슬하에 문경운(文慶運)[6], 문경호(文慶浩)[7] 등 두 아들을 두었고, 이후 월남한 뒤 이복아들인 문경봉(文慶鳳)을 얻었다.

그는 이승훈이 정주에 오산학교를 지을 때, 적극 지지해줬다고 한다.[8]

그는 1910년 기독교 장로회에 입교하였다. 또한 1913년,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 제11회로 졸업하였다. 이후 목사 안수를 받아, 정주군 덕언면 덕흥동의 덕흥교회,[9] 덕언면 덕성(德星)동의 덕성교회, 정주군 신안면(新安面)의 연봉(蓮峰)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일했다. 그리고 문윤국이 정주에서 목사로 시무하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그는 3.1운동 당시 정주군 아이포면사무소 뒷산에서 독립선언을 했으며, 정주군 일대의 3.1운동을 주도했다. 때문에 그는 일제 경찰에 죽창으로 세 곳을 찔리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그는 기독교장로회 평북노회(平北老會) 조선독립운동 발기인으로서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에 전국 13도 대표 중 한 명으로 서명했다고 그의 유서 《학업과 경력》에 나와있다.

그는 민족대표 33인의 초기 구성원으로서 독립선언서 초안에는 그의 이름이 들어갔다. 그러나 이승훈 장로가 문윤국에게 거사가 실패할 경우 뒷일을 부탁한다고 하여 문윤국은 33인에서 빠졌다고 한다. 그래서 문윤국 대신 이명룡 장로와 김병조 목사가 33인에 들어갔다고 그의 유서에 나와있다.

1921년에는 고향 정주의 일가 친척들과 교회 신도들을 설득하여 당시 돈 7만 원을 마련하였으며, 이를 만주의 김숙제(金肅濟) 목사를 통해 모두 상해 임시정부의 자금으로 보냈다.

이후에 일제에게 주요시찰인물로 지정되자 1927년부터 가족을 두고 홀로 충청북도 천안군 직산면(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강원도 강릉군(현 강릉시) 옥계면 등을 전전하며 은둔생활을 했다.

해방 후 1946년부터는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장열리에 정착하여 제자들에게 한학(漢學)을 가르쳤다. 그는 생전에 130여 편의 한시(漢詩)를 지었고, 그 시들은 대부분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1948년에는 소위 공산당 빨갱이로 몰려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워낙 문윤국이 조용히 살다보니 해방 이후 이 때 처음 사는 곳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장열리 맞은 편 '항골'이라고도 불리는 북평5리 노루목의 외딴 곳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다 1958년 1월 2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문윤국의 일가 친척들은 그가 죽고나서도 그가 어디에 있으며 생사도 모르고 지냈다고 한다. 사실 일가 친척이라 해봤자 남한에는 현재 문선명과 문용기(文龍基) 두 사람 밖에 없다. 그러던 1966년 문윤국의 종손자(從孫子) 문용기의[10] 꿈에 문윤국이 나와 그가 살던 강원도 정선의 주소를 문용기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선에 연락하여 문윤국의 제자들과 유서, 유해를 찾았다고 한다. 이후 문윤국의 유해는 1970년경기도 파주시통일교 성지인 '파주원전'으로 옮겨졌다.

문윤국의 맏형이 문치국이며, 문치국의 장남이 문경유(文慶裕)[11]로 문경유의 차남이 바로 통일교 교주 문선명이다. 즉 문윤국 입장에서, 맏형의 장손자가 문선명이다. 문선명과 촌수로는 4촌 관계이며, 문선명 입장에선 작은할아버지이다.

[1] 의안공파-이곡-참의공파 31세.[2] 1812년 홍경래의 난 여파로 평안도 정주목(定州牧)이 정원현(定遠縣)으로 강등 → 1895년 23부제 시행으로 정주군이 의주부(義州府)에 편입 → 1896년 정주군이 평안북도에 편입, 정주군 덕달통(德達統)이 덕달면으로 개편# →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덕달면 이리(二里)가 덕성동(德星洞)으로 개편 → 1939년 덕달면, 이언면(伊彦面), 아이포면(阿耳浦面)이 덕언면(德彦面)으로 합병 → 1945년 광복 직후 신설된 덕흥리(德興里)에 덕성동 지역이 포함 → 1949년 덕흥리가 덕산리(德山里)와 상사리(上思里)로 분리 →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원봉리(圓峰里)가 덕산리, 상사리, 강서리(江西里)를 흡수, 면이 폐지되어 정주군 원봉리로 개편 → 1994년 정주시로 승격[3] 남평문씨 집성촌.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등으로 불렸으며, 현재는 정주시 원봉동이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 문선명도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람.[4] 백예행은 이항로 중심의 화서학파(華西學派)를 따르는 운암(雲菴) 박문일(朴文一) 문하의 유학자이다.[5] 당시 행정구역 체계는 통일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읍면은 대신에 을 하위 행정구역으로 두고 있었다..[6] 족보명 문운모(文運模).[7] 족보명 문봉모(文鳳模).[8] 후에 문선명이 다닌다.[9] 후에 문선명이 다닌다.[10] 맏형 문치국의 차남 문헌모(文憲模), 본명 문경복(文慶福)의 차남이다.[11] 족보명 문달모(文達模).